글을 잘 쓰지 못하지만 가끔 한국산악회 회보에 칼럼을 투고하고 있습니다. 진우 대장님이 카페가 활성화되었으면 좋겠다는 말씀이 생각나 몇 글자 써본 내용을 공유드립니다.
“자신에게 쌓인 문장이 곧 자신이다”라는 김진해 작가의 말이 떠오릅니다. 여러분은 지금 어떤 서사, 어떤 문장을 쓰고.."
글쓰기와 등반, 그리고 넘어서기
글: 고성호 한국산악회 학술문헌위원 (관광학 박사)
글쓰기
다른 분들이 동의하지는 않을 수도 있지만 글쓰기와 등반은 여러 면에서 공통점이 많은 것 같습니다. 글을 쓰다 보면 긴 시간 동안 집중할 수밖에 없는데, 그 시간은 결코 즐겁지만은 않습니다. 왜냐하면 끊임없이 생각하고, 표현하고, 다듬어야 하는 반복적인 과정을 거쳐야 하는데, 이런 과정 자체가 자기감정의 소모와 극심한 정신적인 피로를 불러오기 때문입니다. 저처럼 글을 잘 쓰지 못하는 사람은 특히 더 큰 고통을 느끼는 것 같습니다. 박사 논문을 쓸 때, 멀쩡했던 치아 두 개가 빠질 정도였으니까요.
하지만, 고통스러운 글쓰기도 반복하다 보면 점차 깊은 몰입의 세계로 빨려 들어가는 듯한 경험을 하게 되는데요. 몰입이 깊어지는 어느 순간이 되면, 주변의 소음은 모두 사라지고, 마치 진공상태의 고요함 속에 홀로 떠 있는 듯한 감각이 찾아옵니다. 이때부터 제 내면 깊숙한 곳에 있던 생각들이 자연스럽게 글로 옮겨지기 시작하는데, 저는 이 과정에서 강한 지적 쾌감을 느낍니다. 마치 분리된 또 다른 자아와 마주하는 듯한 이 경험은, 그 어떤 성적 쾌락보다도 강렬해서 그 세계에 계속 머물고 싶은 강한 유혹을 불러일으킵니다. 종교에서는 이런 경험을 '영적 체험'이나 '깨달음'이라고 표현하는 것 같습니다.
등반 행위
등반도 글쓰기와 마찬가지로 깊은 몰입과 고요한 세계로의 진입을 경험하게 합니다. 전문 등반가가 아닌 저에게 암벽 등반은, 신체적 고통은 물론 추락에 대한 두려움과 죽음의 공포까지 동반되는 행위입니다. 그러나 이를 견디며 손끝과 발끝의 미세한 감각에 집중하고, 한 걸음씩 반복해서 암벽을 오르다 보면, 어느 순간 고통과 두려움이 서서히 사라지고, 마치 텅 빈 우주에 홀로 있는 듯한 고요함이 찾아오는데요. 그 순간이 되면 평소 무의식 속 깊이 감춰져 있던 불안, 후회, 갈등의 기억들이 떠오르며, 저 스스로를 성찰하고 반성하게 합니다. 이때 등반은 단순한 육체적 활동을 넘어 정신적, 철학적 깨달음을 이끄는 행위로 확장됩니다. 이는 글쓰기에 몰입할 때 느끼는 강렬한 '지적 쾌감'과도 유사한 경험입니다.
등반은 의심할 여지없이 미적 경험과 내면적 성찰을 수반하는 활동입니다. 학자들과 등반가들은 이를 예술적 관점(Karlsen, 2024)과 철학적 관점(Ilundín-Agurruza, 2012)에서 해석하려는 다양한 시도를 이어가고 있습니다. 산악 문학의 걸작으로 평가받는 라인홀드 메스너(Reinhold Messner)의 책 ‘검은 고독 흰 고독(2007)’은 알파인 스타일로 낭가파르바트를 단독 등반하면서 그가 겪은 내면의 고백을 담고 있는데요. 메스너는 책에서 이렇게 말합니다.
“나는 두려움을 통해서 이 세계를 새롭게 알고 싶고 느끼고 싶다. 물론 지금은 혼자 있는 것도 두렵지 않다. 이 높은 곳에서는 아무도 만날 수 없다는 사실이 오히려 나를 지탱해 준다. 고독이 더 이상 파멸을 의미하지 않는다. 이 고독 속에서 분명 나는 새로운 자신을 얻게 되었다.”
메스너에게 등반은 자기 성찰과 존재의 본질을 탐구하는 과정이었고, 이를 통해 그는 스스로를 새롭게 정의하려 했던 것으로 보입니다.
넘어서기
등반이든 글쓰기든, 아니면 우리의 삶이든, 우리는 필연적으로 자신의 한계와 마주하게 됩니다. 그때마다 좌절감과 무력감, 그리고 알 수 없는 두려움이 우리를 깊은 어둠 속으로 가두려 할 것입니다. 하지만 그 한계를 넘어서기 위해 묵묵히 한 발 한 발 내딛으며 계속 나아간다면, 결국 우리는 반드시 어느 지점에 도달할 것입니다. 그곳에서 우리는 단순한 성취를 넘어 전혀 새로운 시야와 깊이 있는 통찰을 얻게 될 것입니다. 우리의 삶은 더욱 풍요롭고 완전해질 것입니다. 철학자 최진석(2024) 교수는 “규칙을 지키는 반복적인 행위를 지속하면 특별한 경지가 선물처럼 찾아온다”라고 말했습니다.
지금 이 순간, 독자 여러분은 어디에서 어떤 생각을 하고 계신지 궁금합니다. “자신에게 쌓인 문장이 곧 자신이다”라는 김진해(2021) 작가의 말이 떠오릅니다. 여러분은 지금 어떤 서사, 어떤 문장을 쓰고 계신가요? 이 세상에 단 하나뿐인 당신만의 길 위에서, 깊어가는 가을의 사색을 즐겨보시길 권해드립니다. 삶과 죽음, 후회와 구원을 다룬 어니스트 헤밍웨이의 1963년 단편 소설 ‘킬리만자로의 눈(The Snows of Kilimanjaro)’ 첫 문장을 소개하며 이 글을 마칩니다.
”킬리만자로는 19,710피트 높이의 눈 덮인 산으로, 아프리카의 가장 높은 산으로 알려져 있다. 그것의 서쪽 봉우리는 마사이어로 신의 집을 뜻하는 '은가예 은가이'라 불린다. 서쪽 정상 부근에는 말라 얼어붙은 표범의 시체 한 구가 있다. 표범이 그 고도에서 무엇을 찾고 있었던 것인지는 아무도 설명하지 못했다“ (헤밍웨이, 2022)
참고문헌
- 김진해(2021). 말끝이 당신이다, 한계레출판, p.27
- 라인홀트 메스너/김영도 옮김(2007). 검은고독 흰고독, 도서출판 이레, p165
- 최진석(2024). 건너가는자, ㈜쌤앤파커스, p.135
- 어네스트 밀러 헤밍웨이/이정서 옮김(2022). 킬리만자로의 눈, 새움, p.165
- Karlsen (2024). Three paths to the summit: understanding mountaineering through game-playing, deep ecology and art. Journal of the Philosophy of Sport, 51(2), 367-380
- Ilund´ in-Agurruza, J. (2012). Climbing–Philosophy for Everyone: Because It's There.
첫댓글 요새 성호덕분에 글을다읽는군
나 저책 샀어 건너가는 자 아직 읽지는 않고 전시중 ㅎㅎ
저도 읽지는않고 소장중입니다😅
누군가 얘기한 한계를 넘어서는 삶을 사는 것과 같은 생각인 것 같네요
지적 수준이 높은 누나, 형님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