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과 혼과 육에 대한 오해 – 고 김성수목사 설교 중에서 (1)
많은 이들이 인간이라는 존재를 헬라의 플라톤 철학이나 영지주의 등의 영향을 받아서 영과 혼과 육, 혹은 영혼과 육신 등으로 나누어서 이해를 하고 있습니다. 그걸 굳이 ‘이분 설이다, 삼분 설이다.’ 이렇게 이름을 붙여서 말하는 사람들이 있는데 그건 하나도 중요하지 않습니다.
제가 지금 말씀드리고자 하는 건 헬라철학이나 영지주의 그리고 동양의 혼백사상 등이 얼마나 인간의 이성을 잠식하고 있는지에 대해 말씀을 드리고자 하는 것입니다.
많은 분들이 인간 안에 영과 혼과 몸이 각각의 구별된 영역을 갖고 있는 독립적인 본질로 존재한다고 생각하고 있습니다.
유령선이라든지 꼬마유령 캐스퍼, 장화홍련전 등의 동화나 옛날 이야기나 영화 등에도 그러한 인간들의 인간 존재론이 잘 나타나 있습니다. 몸과 분리된 독립적 개체로서의 어떤 존재가 - 그게 영인지 혼인지 분별도 할 수 없는데도 -우리 안에 존재하다가 몸에서 튕겨져 나가게 되면 그 자체가 독립적 개체로 존재할 수 있다는 사고입니다.
그건 성경이 말하는 영이나 혼, 영혼과 많이 다른 것입니다.
구약 성경에는 영과 혼과 몸이라는 단어가 정확하게 ‘루아흐’,‘네페쉬’,‘바싸르’로 구별이 되어 기록이 됩니다. 신약 성경에도 영과 혼과 몸은 정확하게 ‘프뉴마’,‘프쉬케’,‘소마’로 구분이 되어 기록이 되어 있습니다.
로마서 8장 10절의 영은 ‘프뉴마’입니다. 그 단어는 항상 ‘성령’을 가리킵니다. 그런데 어떤 때에는 그 ‘프뉴마’라는 단어가 ‘성도의 영’을 가리킬 때도 있습니다. 그러니까 우리 안에 살아계신 이는 우리의 영혼이 아니라 그리스도의 영인 성령인 것입니다. 정확히 말해서 우리 성도의 영은 우리의 것이 아니면서 외부의 어떤 존재로부터 우리의 것으로 주어지고 인정이 되는 것을 말하는 것입니다. 쉬운 말로 우리 인간은 예수 그리스도를 만나기 전까지는 영이 없는 상태인 것입니다. 그걸 성경이 ‘영이 죽었다’라고 표현을 합니다.
그 말을 오해하지는 마세요. 그 말은 인간 안에 사유되어 있던 독립적 개체로서의 영이 죄로 인해 죽어 있다가 그리스도의 영에 의해 살아나는 것이 아니라 그리스도의 영이 들어오기 전에는 인간에게 영이라는 개념이 없는 것입니다. 그러다가 그리스도의 영이 들어오시게 되면 인간은 비로소 영에 속한 사람이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그 ‘영’을 하나님을 감지하고 그 분과 교통할 수 있는 능력이라고도 하는 것입니다. 그건 우리 안에 성령이 임하셨을 때에만 가능한 것입니다. 그러니까 하나님을 알지도 못하고 하나님과 교통도 할 수 없는 세상 사람들은 영이 없는 것입니다. 혼은 또 다른 개념을 담고 있는 것이고요.
요한복음 3장 6절에 보면 ‘육으로 난 것은 육이요 성령으로 난 것은 영이니’라고 합니다.
보세요. 성령의 가입으로 비롯되는 개념이 ‘영’인 것입니다. 그것을 예수님께서 성령으로 낳는 것이라고 표현을 하시는 것입니다.
이렇게 성도의 ‘영’은 하나님의 은혜로 예수 그리스도와의 관계가 맺어지게 되고 성령의 역사로 말미암게 되는 하나님과의 교통이 가능하게 된 그 ‘상태’를 ‘영’이라고 하는 것입니다. 독립적인 개별적 존재가 아니란 말입니다. 바로 그들이 살아있는 자이고 그들만이 그리스도의 은혜로 열매를 맺게 되는 것입니다. 그게 창세기 2장 7절의 생기(루아흐)를 받고 생령이 된 아담의 그림에서 모형으로 나타났던 것입니다. 거기에서 생기는 ‘루아흐’로서 성령을 가리키는 것이고 그렇게 성령의 가입으로 말미암아 살아있는 ‘혼(네페쉬)’이 되는 것입니다.
고린도 전서 15장 45절에 보면 ‘기록된바 첫 사람 아담은 산 영이 되었다 함과 같이 마지막 아담은 살려 주는 영이 되었나니’라고 해요.
여기에서 첫 사람 아담에게 쓰인 ‘영’이라는 단어와 마지막 아담이신 예수님에게 쓰인 ‘영’이라는 단어는 다른 단어입니다. 첫 사람 아담에게 쓰인 단어는 우리가 흔히 ‘혼’이라고 번역을 하는 ‘프쉬케’(히브리어로는 ‘네페쉬’)이고 마지막 아담이신 예수님에게 쓰인 ‘영’은 ‘성령’을 가리키는 ‘프뉴마’(히브리어로는 ‘루아흐’)입니다. 이 부분은 사도 바울이 창세기 2장 7절의 ‘생령’의 부분을 인용해다가 쓴 것입니다. 그런데 바울이 그 단어를 ‘살아있는 영’이 아니라 ‘살아있는 프쉬케’, 즉 ‘살아있는 혼’이라고 쓰고 있는 것입니다.
따라서 창세기 2장 7절의 ‘생령’도 살아있는 영이 아니라 살아있는 혼이 되어야 맞습니다. 그래서 창세기 2장 7절에도 ‘루아흐’가 아닌 ‘네페쉬’라는 단어가 쓰인 것입니다.
창세기 2장 7절을 보면 ‘여호와 하나님이 흙으로 사람을 지으시고 생기를 그 코에 불어 넣으시니 사람이 생령이 된 지라’고 해요.
하나님께서 흙으로 사람을 지으시고 그 코에 생기, 즉 ‘루아흐’를 불어 넣으셨더니 사람이 살아있는 ‘네페쉬’ ‘혼’이 된 것입니다. 생기, 즉 성령(루아흐)과 생령에서의 ‘영’(네페쉬 하야)이 다른 단어란 말입니다. 네페쉬(혼)에 루아흐(성령)이 들어가니까 ‘살아있는 혼(네페쉬)’ 즉 ‘영’이 되는 형국입니다. 여러분이 보시면 아시겠지만 구약에서 ‘네페쉬’라는 단어가 사용될 때에는 주로 사람이나 동물이나 살아있는 생명체 혹은 생명 자체를 가리키는 것이지 인간 속에 있는 어떤 독립적인 본질로서 죽을 때 몸을 떠나서 별개로 존재하는 무슨 귀신같은 불멸의 혼백이 아닙니다.
마찬가지입니다. 신약에서 ‘프쉬케’라는 단어가 쓰일 때에도 구약에서의 ‘네페쉬’와 그 용례가 같습니다. 그러니까 ‘혼’ ‘네페쉬’라는 것은 인간의 몸 안에 들어 있는 보이지 않는 혼령 같은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창조의 권능 아래에서 숨 즉 목숨을 갖게 된 모든 피조물들을 가리키는 단어인 것입니다. 그 ‘혼’이라는 단어는 구원받은 자나 구원 받지 못한 자 모두에게 주어지는 숨인 것입니다. 심지어 그 ‘혼’이라는 단어는 짐승에게도 쓰입니다. 그 ‘네페쉬’‘혼’이라는 단어가 쓰인 구약 성경의 몇 군데만 찾아드리겠습니다.
창세기 46장 27절에 보면 ‘애굽에서 요셉에게 낳은 아들이 두 명이니 야곱의 집 사람으로 애굽에 이른 자의 도합이 칠십 명이었더라’고 하는데
여기에서 두 명이라고 번역이 된 단어도 ‘네페쉬’이고 ‘칠십 명’에서의 ‘명’도 ‘네페쉬’입니다. 굳이 직역을 하자면 ‘혼’입니다. 그러면 우리가 가진 ‘혼’의 개념으로 이 구절을 번역을 하면 어떻게 됩니까? 요셉이 두 명의 ‘혼’을 낳은 것인가요? 그리고 가나안에서 애굽으로 들어간 야곱의 자손 70명도 70명의 혼령이었나요? 아닙니다. 성경에 나오는 ‘네페쉬’ ‘혼’은 혹자들이 이야기 하는 것처럼 ‘마음’도 아니고 우리가 알고 있는 사전적 개념의 ‘혼령’도 아닙니다. 말씀드린 것처럼 성경이 말하는 ‘혼’은 하나님의 창조의 손길이 직접 닿은 숨이 붙어 있는 존재를 가리키는 것이고 좀 더 정확하게 말하면 피조물에게 하사된 하늘의 생명과 구별되는 역사 속의 생명 그리고 하늘과 구별되는 지옥 속의 생명을 총칭하여 ‘혼’이라 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혼’이 나가면 죽는다고 하는 것이고 ‘혼’이 다시 들어오면 산다고 하는 것입니다. 물론 그건 육신적인 생명을 가리키는 것이며 아울러 하늘 생명과 대조되는 지옥의 생명을 가리키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 혼이 부어지기 전의 상태를 ‘몸’ 즉 죽은 흙이라 하는 것입니다.
그 네페쉬라는 단어의 용례를 몇 군데만 더 찾아 드리겠습니다.
1. 출애굽기 12장 15절에 보면 ‘너희는 칠일 동안 무교병을 먹을지니 그 첫날에 누룩을 너희 집에서 제하라 무릇 첫날부터 칠일까지 유교 병을 먹는 자는 이스라엘에서 끊쳐 지리라’고 하는데 여기에서 ‘유교 병을 먹는 자’라고 번역이 된 어구에 ‘네페쉬’가 쓰였습니다. 그러니까 성경에 기록된 ‘혼’은 빵도 먹는 존재입니다. 혼백이 빵 먹는 것 보셨어요?
2. 시편 107장 18절을 보면 ‘ 저희 혼이 각종 식물을 싫어하여 사망의 문에 가깝도다’라고 하는데 여기도 보시면 ‘혼’‘네페쉬’가 각종 음식을 싫어한다고 나오지요?
3. 사도행전 2장 41절을 보면 ‘그 말을 받는 사람들은 세례를 받으매 이 날에 제자의 수가 삼천이나 더 하더라’라고 하는데, 여기에서 구원을 받고 세례를 받은 삼천 명에 쓰인 단어가 ‘사람’이 아니라 ‘프쉬케’입니다. 직역을 하면 ‘혼’입니다. 이 혼들은 구원받은 혼들입니다.
4. 사도행전 27장 37절을 보면 ‘배에 있는 우리의 수는 전부 이백 칠십 륙 인이러라’라고 하는데 여기에서도 276인이 ‘프쉬케’ 즉 ‘혼’입니다. 바울과 한 배에 탄 사람들을 가리키는 것이니 여기에서의 혼은 모두 다 구원 받은 혼은 아닙니다.
이렇게 성경에서 ‘혼’이라는 개념은 하나님의 창조의 능력에 의해 산 존재가 된 자들을 가리키며 그건 믿는 자나 믿지 않는 자 모두에게 공히 쓰이는 보편적 칭호입니다.
그래서 그 ‘혼’을 가리키는 ‘네페쉬’나 ‘네솨마’라는 단어는 ‘숨’이나 ‘목숨’등으로 혼용하여 쓰기도 하는 것입니다. 다시 말하지만 그 ‘혼, 네페쉬, 네솨마’가 끊어지면 살아있던 존재가 죽은 흙덩이, 먼지 덩이가 되는 것입니다. 그걸 ‘몸’이라 합니다.
5. 왕상17장 22절을 보면 ‘여호와께서 엘리야의 소리를 들으시므로 그 아이의 혼이 몸으로 돌아오고 살아난 지라’고 해요.
보세요. ‘네페쉬, 네솨마’가 떠나면 아이는 고깃덩어리가 되는 것입니다.
6. 누가복음 12장 20절을 보면 ‘하나님은 이르시되 어리석은 자여 오늘 밤에 네 영혼을 도로 찾으리니 그러면 네 예비한 것이 뉘 것이 되겠느냐 하셨으니’라고 하는데
여기에서의 어리석은 부자의 영혼도 ‘프쉬케’ ‘혼’입니다.
‘혼’ 즉 하나님이 주시니 생명이 떠나면 그 부자 역시 죽은 고깃덩어리가 되는 것입니다. ‘혼’이 무엇인지 아시겠지요?
하나님에 의해 창조된 ‘숨, 호흡, 생명’을 가진 피조물의 상태를 ‘혼’이라 하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사무엘상 28장에서 사울이 접신한 여인에게 찾아가서 사무엘의 혼령을 불러올리는 그런 장면을 생각하시면서 ‘혼’이라는 것이 그러한 귀신의 모양으로 존재하는 것이라 생각하시면 안 됩니다. 거기에서 신접한 여인이 본 것은 ‘신’이지 ‘귀신’이 아닙니다. 그 단어는 ‘엘로힘’입니다. 그 대목을 히브리 원어로 보면 앞뒤가 안 맞아요. 신접한 여인이 ‘엘로힘(하나님)’을 보았다고 하는데 그 혼령은 사무엘의 역할을 합니다.
그리고 또 하나 중요한 것은 그 신접한 여인이 사무엘의 혼령을 끌어올리기 위해 아무 것도 한 것이 없다는 사실입니다. 사울이 사무엘을 부르라고 하자 죽은 사무엘이 갑자기 나타난 것이고 그 여인은 그 존재를 보자마자 깜짝 놀라서 소리를 지른 것밖에 없습니다. 그러니까 거기에서 나타난 것은 사무엘의 귀신이 아니라 그 상황 자체가 하나님의 작품이었다는 것을 성경이 보여주고 있는 것입니다. 엘로힘의 하나님께서 그 일을 주관하셨다는 그런 말입니다. 거기에서 사무엘의 혼령 같은 것이 올라와서 사울을 야단친 것은 무당이 귀신을 불러올릴 수 있다는 것이나 이미 죽은 자가 이 땅에 다시 내려 올 수 있는가 등에 초점이 있는 것이 아니라 자기의 안위와 유익을 위해서 인간이 얼마나 추악하게 추락할 수 있는가와 그러한 자들을 향한 하나님의 진노가 얼마나 큰 것인가에 대한 교훈에 초점이 있는 것입니다.
죽은 인간의 혼령으로서의 귀신은 없습니다. 다만 마귀의 세력들이 그러한 것들로 속일 수는 있습니다. 그러니까 귀신이라는 것은 마귀의 속임수인 것이지 실제로 존재하는 인간의 혼령 같은 것이 아닌 것입니다.
인간은 그 자체로 전인적인 존재입니다. 몸을 가진 인간에게 하나님이 주시는 숨, 생명이 들어가면 그 자체가 혼이 되는 것이고, 그 혼에 성령이 들어가 하나님과의 교통이 가능하게 되면 그 상태를 ‘영’이라고 하는 것입니다. 그 각각이 개별적이며 독립적인 개체가 아니란 말입니다.
그러니까 가위 같은 거 눌리면서 무서워하거나 두려워하지 마세요. 그건 마귀에게 속는 거란 말입니다.
그러니까 성도 안에 성도가 소유한 영이 있는 것이 아니라 성령의 임재로 인해 하나님의 것으로 편입이 된 그 사람을 ‘영’에 속한 사람, ‘영’이 살아난 사람, 혹은 그냥 ‘영’ 등으로 지칭하는 것이고 그를 성령이 낳은 영이라 부르는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