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는 돌고 돈다.
우리는 지나간 역사를 돌아보며 오늘을 살아가는 지혜를 배운다.
제왕의 자리는 흔히 하늘이 내린다고 한다.
그러나 실제로 왕권을 좌지우지하는 건 조정의 실세들이다.
왕위계승권을 두고 치열한 암투가 끊이지 않는 궁중은 오늘날의 선거판과 흡사하다.
왕좌를 둘러싼 환경이 후보자의 개인적 능력과 과실보다 우선하는 경우도 있다.
우리 민족이 오랜 세월 봉건왕조 체제를 유지할 수 있었던 것은 왕을 도와 국정을 이끌었던 책사들의 역할이 컸다. 권력의 핵심에서 성군과 폭군의 치세를 가른 책사들이 오늘날 우리에게 주는 교훈은 무엇인가∼”
2015년 발행된 역사서, 작가 장강의 ‘왕의 책사들’ 머리말 일부이다. 이 책에서 많은 내용을 발췌하였다.
지금도 많은 종친들이 본인이 고려태조의 몇 세손인지 잘 모르고 있고 대손과 세손을 혼동하고 있다.
부(父)와 조부의 성함은 익히 알고 있으나 증조부 이상의 선조 휘(돌아가신 분의 성함)는 쉽게 답변하기가 어렵다. 이러한 현상은 쫓기는 생업과 핵가족제도에서 그 이유를 찾을 수 있다.
그리고 족보를 보고자 하는 심적 여유가 없고 내용 또한 한자가 부지기수이라 접근성도 용이치 않다.
종친회를 바라보는 시각도 폐쇄적이다.
이러한 현상이 누적되니 선조의 산소를 찾는 성묘와 시제에 참사하는 인원도 해마다 감소된다.
종친회 운영은 더더욱 어려운 상황이 된다.
후손은 이를 조금이나마 해소하기 위해 종친들의 종사에 대한 관심 환기가 필요하다는 생각이 들었고
우선 sns망을 통하여 종중 소식과 고려의 역사를 게재코자 하였다.
오늘은 고려태조(왕건)의 배향공신이자 책사인 최응(崔凝)에 관한 얘기를 나누고자 한다.
당나라에서도 신동으로 소문난 최응은 서기 898년(신라 효공왕2년),
황해북도 황주군 토산현에서 황주최씨 최우달의 아들로 태어났다.
최우달의 당시 관직은 대상(大相/태봉국의 3등급 품계)이었다.
최응이 태어나기 전, 텃밭에서 오이가지에 참외가 주렁주렁 열렸고
이 소문을 들은 궁예는 불길한 징조라 판단하여 사내가 나면 죽이라 협박하였다.
최우달은 태어난 아기를 먼 친척집으로 몰래 옮기고
자신도 벼슬에서 물러나 궁예의 자식에 관한 관심을 멀리하고자 하였다.
서기 901년, 궁예는 국호를 고려로 칭하고 스스로 왕위에 올랐다.
그리고 지금의 개성인 송악을 수도로 삼았는데
이는 경기북부 지방과 황해도를 아우르는 패서 지역의 호족과 백성들의 지지를 얻고자 함에 있었다.
문헌에 의하면 고려태조께서는 서기 894년 18살 때 마진국 궁예 휘하의
철원군 태수(철원군수)로 첫 관직에 오르셨고
20살 896년 발어참성 성주(송악군수),
22살 898년 정예기마병을 통솔하는 정기대감,
24살 900년 아찬(신라의 6등 관등),
33살 909년 해군대장군인 한찬(5등 관등),
35살 911년 대아찬(5등 관등),
37살 913년 광평성의 장관인 시중(파진찬/4등 관등)에 최종 올랐다.
신라의 관등 제도는 17등급으로
1등 관등인 이벌찬에서 5등 관등인 대아찬까지는 오직 진골만이 올라갈 수 있었다.
성골은 무열왕 이전까지는 왕이 될 수 있는 최고위 신분계급으로 왕족 중에서도 일부만이 차지하였다.
서기 904년, 궁예는 국호를 다시 마진으로 바꾸고 이듬 해인 905년에 개성에서 철원으로 도읍을 옮겼다.
아지태 등 청주 출신을 대거 끌어들여 자신의 친위세력으로 삼았다.
그리고 이 때부터 독자적인 연호 무태(武泰)를 사용하므로서 황제국임을 과시하였다.
연호는 황제국만이 사용 가능하다.
907년경, 주전충이 당나라를 무너뜨리고 후량을 창건하자
당에 유학 갔던 최응 등 유학자들이 한반도로 귀국하였다.
주전충은 당나라 관리들의 수탈에 항거하여 난을 일으킨 황소의 휘하에 들어갔다 판세가 불리하자 배반하여 오히려 토벌군이 되어 황소의 난을 평정한 인물이다.
12살 어린 나이에 당나라에 유학간 신라인 경주최씨 고운 최치원은
18살에 토황소격문을 이때 지어 황소의 간담을 서늘하게 하였다.
중국 양주박물관에는 현재 그의 동상이 있고 현대에서도 중국인으로부터 칭송받고 있다.
주전충은 당 마지막 황제인 애제로부터 황위를 찬탈하여 후량의 태조가 된다.
궁예는 유학자를 대거 등용하여 호족들의 견제 세력으로 활용한다.
불과 10살의 소년이 경전과 문장이 통달한 모습을 보고
궁예는 한림대의 수장인 한림랑(8등 관등)의 벼슬을 주고 외교 문서와 각종 조서를 작성하게 하였다.
그가 최우달의 아들이라는 10여년 전의 사실을 궁예는 까마득히 잊고 있었다.
서기 911년, 마진국은 태봉국으로 이름을 바꿨다.
궁예의 말년을 상징하는 관심법(觀心法)이 등장한 건 철원으로 천도한 이 후이다.
관심법은 궁예 나름의 정적 제거법이었다.
그가 미륵의 현신이라고 주장하는 이상 누구도 관심법의 권능을 부정할 수 없었다.
첫 희생양은 궁녀이었으나 조정대신들로 폭이 넓혀졌다.
특히, 관심법의 주된 타킷이 패서 출신 호족으로 옮겨가고
서기 915년(신라 신덕왕4년)경, 패서 출신의 왕비 강씨와 두 아들이 처참한 최후를 맞이하였다.
그리고 나주에서 철원으로 돌아 온 왕건에게도 위기가 찾아 들었다.
당시 왕건은 시중이 된 후부터 주위의 모함을 받았고
많은 호족들로부터 폭 넓은 지지를 받아 궁예는 그를 경계의 대상으로 삼고 있었다.
궁예가 왕건에게 관심법을 행했을 당시 상황을 기록한 고려사 사료를 보자.
[하루는 태조가 급한 부름을 받고 입궐하니
궁예가 바야흐로 주살(죄를 물어 죽임)한 사람들에게서 몰수한 금은보화를 점검하고 있다가
눈을 부릅뜨고 태조를 보며 말하기를,
“그대가 어젯밤 여러 사람을 모아 놓고 반역을 모의함은 무엇 때문이냐.”고 했다.
이에 태조는 “어찌 그런 일이 있었겠습니까.”라고 답변하였다.
궁예가 다시 말하기를 “그대는 나를 속이지 말라. 나는 관심법으로 다 알 수 있으니
내가 장차 입정하여 그 일을 다 말하리라.”
그런 뒤 곧 눈을 감고 뒷짐을 지고는 얼마 동안 하늘을 우러러 보고 있었다.
그때 최응이 일부러 붓을 떨어뜨리고 뜰에 내려와서 이것을 줍는 척하며 태조에게 귓속말을 하였다.
“복종하지 않으면 위태롭습니다.”
이에 태조가 깨닫는 바가 있어 “신이 진실로 반역을 꾀하였으니 그 죄는 죽어 마땅하나이다.”라고 하니
궁예가 크게 웃으며 말하기를, “그 태도가 가히 정직하도다. 경은 다시는 나를 속이지 말라.”하면서
금은으로 장식한 말 안장과 고삐를 하사하였다.]
운명의 기로에 서 있던 왕건에게 최응의 한마디는 결정적이었다.
최응은 상황 판단력이 뛰어난 인물이었다.
궁예는 초기 야심찬 이상주의자로서 백성들의 이상향인 미륵정토를 꿈꾸게 하였으나
이제는 더 이상 백성들에게 희망을 주는 존재가 아니었다.
자신의 가족을 살해하는 군주가 어찌 만백성의 어버이가 될 수 있을까.
구사일생으로 목숨을 건진 왕건은 일찍이 형제결의한 궁예에 대하여 심한 회의감에 젖는다.
918년 음6월, 왕건의 역성혁명은 무혈혁명이었다.
모든 일은 일사천리로 진행되어 거사 다음날 철원 포정전에서 즉위식을 가졌다.
국호를 고려로, 연호를 천수라고 하여 황제국임을 대내외에 선포하였다.
최응은 한동안 학문연구 분야 책임자로 있다가 어느 날 태조의 부름을 받고 광평낭중의 자리에 올랐다.
불과 20살의 어린 나이에 광평성의 실무책임자가 된 것이다.
낭중 자리에 오른 지 1년도 못 미쳐 태조는
그의 학문과 식견을 높이 사 차관급인 광평시랑의 벼슬을 내렸으나 간곡히 사양하였다.
당시 태조의 어수 42살이었고 정윤이자 태조의 장자인 왕무(2대 혜종)는 6살이었다.
평소 육식을 하지 않아 허약했던 그가 “고기를 먹지 않으면 불충과 불효”라는 태조의 간곡한 청을 받아들여
비로소 먹고 병이 나았다는 일화는 지금도 회자된다.
서기 932년(태조15년), 35살의 젊은 나이에 요절한 후 대광 태자태부(大匡 太子太傅)로 증직되고
뒤에 다시 사도(司徒/정1품)가 증직되었다.
936년의 후삼국 통일을 끝내 보지 못하였다. 시호는 희개(熙愷)이다.
우리 모두 결코 잊어서는 아니된다.
태조께서 고려국 황위에 등극하신 찬란한 영광 뒤에는 음지에서 이를 도운 책사가 있었음을---.
"역사를 잊은 민족에게 미래는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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