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방랑시인 김삿갓 (46회)
과년한 시인 곱단이.
"원 별말씀을 ...
죄송합니다, 함부로 최선생의 시를 왈가왈부 해서 ..."
김삿갓은 자기의 시를 고쳤음에도
싫은 내색을 하지않고 오히려 고마워 하는 이 선비가 더없이 마음에 들었다.
"헌데 김선생,
내가 듣던것 보다 훨씬 젊어 보이는데
성혼은 하셨는지요?"
"예, 성혼은 했습니다만,
선생께선 저보다 연세가 높으신 것 같으니 말씀을 낮추시지요."
"허..천만에요.
내가 아직은 사십이 못되었는데
선생같은 시객에게 그럴 수야 없지요."
하며 그 역시 겸양의 말을했다.
이렇듯 두 사람이 잠시 세상일을 잊고,
아름다운 단천변에 앉아 시와 말로 서로의 마음을 주고 받고 있었다.
"김선생, 다 있는데 술이 없구려."
"허허, 최선생 술은 없지만 물은 맘껏 있소이다!"
김삿갓의 이 말에 최백호는 호쾌하게 웃었다.
"그런데요 최선생,
선생은 이 마을에서 무얼로 소일을 하시오?"
"하하, 나야 감농(監農)이나 하며,
이렇게 가끔 산수간에 나와 풍월이나 읊조리며 살고 있지요."
"역시 고매하신 분입니다."
"김선생은 오늘은 어디로 가실 작정입니까 ? "
"저야 뭐 일정한 여로가 없습니다.
그저 오늘은 이 강물이나 따라 내려가 볼까 합니다."
"참, 풍류객다운 말씀입니다.
그러나 이 강물을 따라가시면 바다밖에는 없습니다."
"허, 그렇습니까 ? "
"김선생,
오늘은 딴 생각 마시고 우리집에 가십시다.
우리 사랑방에서 며칠 묵으시면서
근동에 글 좀 하는 시객들을 모아,
풍월도 즐기시면 좋을 것입니다.
내 꽤 너른 농사를 지어 의식주 걱정은 없지만,
김선생이 여러날 계시더라도
소찬에 밥을 대접할수 있으니 사양치 마시기 바랍니다."
"글쎄올시다.
저야 떠도는 몸이니 아무래도 좋습니다만
댁에 폐가 될듯하여 ..."
"허허, 자, 갑시다.
가셔서 저녁이나 들고 우선 한 잔씩 합시다."
김삿갓은 최백호를 따라 그의 집으로 갔다.
최백호의 집은 과연 선비의 집이요 풍류객의 집이었다.
깨끗한 기와집의 네귀에는 풍경을 달았고
아름드리 기둥에는 좋은 글씨가 쓰여 있었다.
사랑채에 안내된 김삿갓은
대청마루에 책장에 꼿혀있는
고금의 진서(珍書)가 즐비한 것에 놀랐고
이어 나온 주안상의 정갈한 솜씨에
안주인도 바깥 선비와 다르지 않음을 알수 있었다.
"자 .. 한 잔 하십시다."
"네 , 고맙습니다."
이렇게 김삿갓은 최백호의 사랑에
열흘 가까이 머물면서
시름을 잊고 시문을 나누며 기거하게 되자,
금강산과 안변, 문천과 함흥일대 등
그가 거쳐 지나왔던 곳에서의 소문이 온 동네를 휩쓸고 있었다.
그때 마침, 그 마을에는
과년한 규수 시인이 살았으니 이름은 곱단이라 하였다.
곱단의 어머니는 옛날 함흥의 관기로 있다가
이 마을의 김진사의 첩실이 되어
이곳 단천에 와서 살게 되었는데
지금은 김진사도 죽어
그가 남겨준 농사땅을 도지賭只 주고
비교적 넉넉하게 살면서 적적함을 달래려
침선으로 소일하며 살고 있었다.
※침선針線
1.바늘과 실을 아울러 이르는 말.
2.바느질(바늘에 실을 꿰어 옷 따위를 짓거나 꿰매는 일).
곱단이는 그런 김진사의 씨앗이라 그런지
어려서부터 총명하고 예뻣으나
이상스럽게 혼사말 만 나오면 성사가 되지 않아
스물이 넘도록 출가를 하지 못하고 있었다.
그도 그럴것이 출신이 진사의 딸이라
상민하고는 혼인을 하고 싶지 않은데다
막상 내노라 하는 양반집에서는
퇴기의 딸이라 좋게 보지도 않음으로써
차일피일 시간만 보내게 된것 이다.
이런 곱단이의 귀에
최백호의 사랑에 온 김삿갓의 이야기가 들어가게 되었다.
"어머니 백호선생님 사랑에
글 잘하는 손이 들었다면서요?
"글쎄 말이다.
나이도 스물 다섯밖에 안 들었다는데
그렇게 글을 잘 한다는구나..."
"어머나 ..어쩜..."
이렇게 말을 한 곱단이의 얼굴이 붉어진 것을
눈치빠른 그 에미가 모를 리 없었다.
한편, 최백호의 사랑에서는
이웃 마을 훈장까지
밤마다 소문난 김삿갓을 보려고 모여 들었다.
그러면서 어떻게 하면
어린 학동들을 잘 가르칠수 있는가 묻기도 하였다.
그때마다 김삿갓은
기초가 되는 천자문을 가르치는 방법에 대해 이렇게 말을 하였다.
"천자문" 이라는 책은 그 옛날 중국 양(梁)나라 때
주흥사(周興嗣)라는 사람이 지은 만고의 명저(名著)로
네글짜씩 짝을 지어 도합 250수로 구성되어 있어서
글자 수로는 모두 1천자로 만들어진 작은 시집(詩集) 이므로
이것을 한 글자 한 글자씩 가르치는 것 보다
네 글짜를 이어서 가르치는 게 뜻을 새기는데 더욱 좋다고 말했다.
예를 들어
첫장에 수록된 "天地玄黃"은
아이들 열의 열 하나같이,
"하늘천 따 지, 검을 현, 누를 황" 하고
글자만 배우고 익히게 할 것이 아니라,
천지현황을 "하늘은 검고 땅은 누렇다"는 뜻으로
묶어서 가르쳐야
숲을 먼저 보게 하고 나무를 보게 함으로써
교육의 성과와 질을 높일수 있다고 역설하였다.
그러면서 "寒來暑往" 은
(찰 한, 올 래, 더울 서, 갈 왕)이라는 네 글자로 되어 있으니,
추위가 오니 더위가 간다는 뜻이 되고,
이렇듯 천자문에 실려있는 모든 문장을
읽고 새기게 하여야 아이들도 흥미를 가지고 된다고도 하였다.
"과연, 송곳 같은 말씀 이외다!"
모여든 훈장들은
김삿갓의 말에 무릅을 치며 감탄한다.
이렇게 밤마다 최백호의 사랑에서는
학문과 시를 논하는 자리가 벌어지곤 하였는데 ,
어느날은 짖궂은 선비 하나가 말을 건넸다.
"삿갓선생!
우리 마을에 처녀 문장가가 한 사람 있는데
그 처녀를 불러다가 시좀 같이 지어 보면 어떻겠소?"
악의없이 웃으며 말을 하였다.
그러자 또 다른 선비가 말을하기를
"그 일이야 곱단이 어머니와 자별하신
백호선생께서 다리를 놓아야지
누가 대신 할 사람이 있습니까?"하고 말했다.
그러자 다른 선비가 말하기를,
"참, 곱단이가
올봄도 그냥 넘겼으니 이제 스물 하난가?
너무 과년해서 ... 그런데 요즘도 글을 읽나?"
최백호가 말을 받는데
"아, 곱단이 글이야 한 문장 하지요.
요즘도 저 혼자서 풍월을 한다던데 ... "
"그려면 백호선생이 곱단이에게
한 상 잘 차리라고 이르고
우리 삿갓 선생님을 한번 모시고 가면 어떻겠소?
혹시나 알겠소 노처녀 머리까지 얹어줄 기회가 될지?"
삿갓은 아무런 대꾸도 없이 앉아 있는데
사랑방 손님들은 자기들끼리 이같이 말하며 들떠 있었다.
그런 어느날 최백호는
정중히 삿갓에게 묘한 의견을 물었다.
"저녁마다 마을 훈장 선생들도 더러 권하기도 했지만
혹시 선생께 무례가 될까 염려되어 말씀을 못드렸는데
마침 우리 내자가 곱단네 집에 볼 일이 있어 들렸더니
그 에미가 반색을 하며
선생의 일을 낱낱이 묻기로
왜 의향이 있냐고 반문하니 퍽 그럴듯이 말하더랍니다.
이미 조강지처가 계신줄 아오만은
대장부가 객지에서 노처녀의 원한을 풀어 주기로 뭐 어떻겠습니까?"
"글쎄올시다.
나야 뭐 객창에서는 무관 하옵니다만,
규중의 동정녀의 머리까지 얹어줄 자격이 있다 하겠습니까?
아무래도 분수에 지나친 일이 아닐까 생각합니다."
"허허, 김선생.
이렇게 해서라도 처녀귀신 소리를 면하게 해준다면
그 또한 적선이 아니겠소?"
"허허... 과분한 말씀입니다."
마음이 없는 것은 아니지만
가련이 처럼 기녀가 아닌 요조 규수라는데는 마음이 끌렸다.
"더구나 시서에 능하여
그 에미 소원대로 데릴 사위로 들어가시면
단 둘이 풍월도 즐기며 이런 호강도 흔치않을 것입니다."
"허허, 저는 호강하러 객지에 나온
그런 위인은 아니올습니다만 ..."
"아따, 덕분에 이 최백호도 술한상 얻어 먹읍시다."
"허허허..."
최백호의 집념은 말을 할수록 강해졌다.
방랑시인 김삿갓 (47회)
후원황율 불봉탁 後園黃栗 不蜂柝
계변양류 불우장 溪邊楊柳 不雨長
뒷동산 밤송이는 벌이 쏘지 않아도 벌어지고,
시냇가 수양버들은 비가 오지 않아도 잘 자란다.
다음날 , 최백호는 자기 부인을 시켜
곱단이네 집으로 미리 통지를 보내고
삿갓에게는 새옷을 한벌 갈아 입힌 뒤,
그를 데리고 재넘어 곱단이 집을 찾아갔다.
곱단의 집은
재넘어 남향에 자리잡은 조그만 기와집으로
마당 앞에는 한참 장미가 꽃피우고 있었고
손님이 온다는 기별이 있어서인지
집안은 티끌 하나 없이 깨끗하였다.
"이리 오너라 ! "
안마당을 지나 대청앞에 가서 최백호가 크게 부르니
부엌에서 한참 음식준비를 하던 곱단 어미가
앞치마 바람으로 뛰어나와
"어머나!
백호어른 이렇게 와주셔서 ... "하며
부산하게 두 사람을 사랑으로 안내했다.
사랑에 나란히 앉은 두 선비는 무언중 희색이 만면인데
오늘따라 김삿갓이라는 시인이 자기집 까지 찾아온 지금
곱단이는 뒷곁 소나무 아래를 왔다갔다하면서
무슨 일이라도 하는척 하며 부엌으로
들어갔다 나오기를 반복하며 가슴을 졸이고 있었다.
한편 김삿갓은 곱단이 집에는 왔으되
그 처자의 얼굴은 보이지 아니하고
뒤뜰에서 오가는 짧은 치마를 입은 처자의
하얀 종아리만 언뜻언뜻 보았을 뿐이다.
상이 들어오기까지 무료했던 최백호는
"김선생 먼 빛이나마 곱단이를 보았으니,
이따가 곱단이에게 보여주게 한 수 지어 보시지요."
하고 웃으며 말을했다.
"글쎄요.
뭐 갑자기 생각이 나겠습니까만 한 수 써 볼까요? "
김삿갓은 곱단이가 쓰는 것으로 보이는 붓을 들어
한 수를 적었다.
ㅡㅡㅡ
규중처자 대여양 閨中妻子 大如孃
규중 처녀가 다커서 어른같은데
완착분홍 단포상 緩着紛紅 短布裳
분홍빛 짧은 치마를 느슨하게 입었구나
적각낭창 착과객 赤脚踉蹌 着過客
다리가 드러나 과객에게 보이기가 부끄러운듯
송필심원 화향농 松筆深院 花香弄
소나무 울타리에 숨어 꽃 향기를 희롱하누나
ㅡㅡㅡ
곱단이의 지금 표정을 그대로 읊은 시였다.
"허어, 곱단이가 좋아하겠습니다."
"원 ,별 말씀을 .... "
잠시 뒤 주안상이 떡 벌어지게 나왔고,
이어 곱게 단장한 곱단이가 나왔다.
"자, 뭐 딴 뜻은 아니고
서로 문장을 나누고 담론도 할 겸
자리를 마련해 보는 것이 어떻겠나 했던차에 ..."하고 최백호가 말을 하자
곱단에미가 말을 받는데,
"암요, 그렇구 말구요.
선비님이 워낙 문장이 높으시니
아이에게 글도 가르쳐 주실겸 자주 놀러 오세요."하며 말한다.
그러자 김삿갓은 ,
"허허, 이거 과객에게 너무 과분한 배려를 하셔서..
몸 둘 바를 모르겠습니다." 하였다.
곱단이는 속으로는 기뻐도
말 한마디 못하고 앉아만 있는데,
"애야, 선생님들이신데 어떠냐?
술도 따라 올리고 애기도 좀 하려무나."
곱단 에미가 딸에게 다정하게 이른다.
"어머나 어머니께서도 어떻게 ..."
상냥하게 웃음짓는 곱단이는
서글서글한 김삿갓 시인이 처음부터 마음에 들었으나 ,
이렇다 말이 없이 술상 앞에 다소곳이 앉아 있었다.
그때 최백담이 잊었다는듯
"참, 지금 막 김선생이 곱단이 주려고
시를 한 수 지었는데 읽어보아라."하며
백지를 건네주자
곱단이가 보고 ,
"어머나 오시자마자 어쩌면 ...."
자기의 모습을 멀리서 보고 지은
김삿갓의 시를 흥미롭게 되새겨 보았다.
다음날 부터 김삿갓은 혼자서 곱단의 집을 찾아가니
그 어머니도 반겨주었고
노처녀 곱단이는 밤이 이슥하도록
시를 짓고 글을 읽으며 삿갓 선생과 즐기기를 마지 않았다.
이렇게 곱단이를 알게 된 삿갓은
최백호에게는 미안했지만 단천 땅을 떠날 생각도 하지 않고
한달이 되고 또 한달이 보름이 되도록 묵었다.
마을 사람들은
두 사람을 두고 말을 하기 시작했다.
"곱단이가 삿갓 선생에게 단단히 반했다는군..."
"아냐,
그 삿갓 선생이 곱단이 보다도 더 하다던데 ..."
"그러게 연분이 따로 있지 뭐야,
영 차고 넘쳐서 시집 못갈 줄 알았던 곱단이가...."
"글쎄 말이야.
벌써 그 삿갓이 곱단이 뱃속에 애를 넣었다는군."
"아이구 망칙해라,
늦게 배운 도둑질이 날새는 줄 모른다더니
벌써 그렇게 꿀맛을 보았나?"
이렇게 있는 말 없는 말이 파다하게 나돌자
어느날은 곱단에미가 딸을 불러 말하는데,
"애, 요즘 마을에 떠도는 소문이
너하고 삿갓 선생하고 이상한 말들이 나돌고 있는데
이제 삿갓 선생을 그만 오시라고 할까?"며
곱단이의 의향을 떠 보았다.
"아이참, 어머니도 ..
그 선생님하고 저 하고 무슨 망측스런 일이 있다고 그러세요.
행여, 소문이 그렇더라도
내내 오시던 분을 어떡해 그만 오시라고해요?"
곱단이가 펄쩍뛴다.
("음..네가 단단히 마음에 두고있구나...")
곱단 어머니는 그렇게 생각하고 아주 결말을 낼 속셈으로 말한다.
"글쎄 무슨 소문이 나더라도
너만 잘하면 그만이다만 기왕 너도 혼기를 놓쳤으니
더는 말썽 나기전에 아주 그사람 하고 성혼을 하던가 하렴.
보아하니 고향도 냉큼 갈 것 같지도 않고
데릴사위 감으로도 그만하면 무던하겠더구나."
그러자 곱단이 얼굴을 붉히며 말하는데,
"어머니도 좋으시다면 그렇게 하지요."하며
못이기는 체 승낙을 하였다.
"하룻밤에 천리를 간다 했던가?"
곱단 어미로 부터 곱단의 의사를 전달받은 최백호는
김삿갓과 곱단이의 성혼을 급전직하로 진행했다.
그런 유월 어느날,
드디어 곱단이네 마당에서는 조촐한 혼인잔치가 벌어졌다.
"허허, 내 이렇게 될 줄 알았지!"
"암, 노처녀가 그런 선비를 마다 할리가 있나!"
"글쎄.. 걸인 시인이 새처녀 얻고 땡잡았지 뭐 ..."
잔치에 온 동리 사람들은 이렇게 말도 많았다.
삿갓은 혼례에서의 절차와 인사를 모두 치루고
밤이 이슥해서야 곱단이와 오붓한 첫날밤을 맞게 되었다.
김삿갓은 문득 고향의 아내를 생각 하였다.
이렇게 객지에 나와 새장가를 가게 되어 미안하지만,
대장부가 객지에서 소실 하나 얻는것 쯤 어떠랴 하고 스스로를 용서했다.
그리고 아내와의 그때를 생각하면,
너무 어릴때 일이라서
제대로 신랑 노릇 못했던 일이 떠올랐다.
(오늘밤은 멋있는 신랑이 되어보자 ! )
그는 아랫목에 앉아 여러가지 감회를 억누르고
윗목에 앉아 기다리고 있는 곱단이를
정겨운 눈으로 바라보았다.
날이 더웠다.
아니, 남들의 눈을 피해 방문을 꼭꼭 닫았기에
곱단이도 김삿갓도 송송 땀을 흘렸다.
"곱단이 오늘따라 더욱 곱구만 ..."
삿갓이 웃으며 입을열자
"고단하실텐데 그만 주무시죠.'
그러면서 깔아 놓은 금침을 매만진다.
삿갓이 먼저 겉옷을 벗고 자리로 들려하자,
"제옷도 벗겨주셔야죠."
곱단이가 고개를 숙인채 한마디 한다.
"참, 그걸 잊었네..."
삿갓은 곱단의 저고리 고름을 풀었다.
"이제 됐나?"
삿갓은 곱단이가 규중처녀라 그런지
주막 안주인이나 가련이와는 느낌이 달랐다.
어쩐지 여자를 다루는 자신감도 떨어지고
서툴기 조차 스스로 느껴졌다.
"호호, 먼저 자리에 드세요."
방안에 불이 꺼지고 신부가 삿갓의 옆에 살며시 다가왔다.
신랑은 먼저 신부의 몸을 매만지며
마지막 걸친 속옷을 헤치기 시작했다.
신부는 몸을 뒤채고 흥분해 떨고 있었다.
삿갓은 신부의 부푼 젖가슴을 끊임없이 애무했다.
그리고 손은 점점 밑으로 내려갔다.
"아유 , 자꾸 이러시면 ..."
곱단은 몸을 비틀며 끙끙거렸다.
"허허, 참 곱구나 가만 있어라."
삿갓은 숨이 턱까지 차올라
색색거리는 신부의 몸을 한참동안 어루만지다,
드디어
마지막 남은 일을 하려고 몸을 일으켰다.
그리고 이십 여년 동안 굳건히 지키고 있던
곱단이의 처녀성에 자신을 입성시켰다.
그러나 그순간, 김삿갓의 실망은 너무도 컸다.
"아니 , 처녀가 이럴수가 ....?"
삿갓은 갑자기 하던 짓을 멈추고 앉아
곰방대를 물었다.
그리고는 뻐끔뻐끔 담배를 피워댔다.
(아.. 역시 노처녀란 이런 것인가 ?)
이제까지 삿갓 자신이 상대했던 여인과
너무도 다른 곱단이를 의아하게 여겼다.
"왜 그러세요. 갑자기? "
"아니다. 어서 자거라."
그리고 삿갓은 불을 켜고
머리맡에 문갑에서 붓을 찾아 들고
백지에 글 한 자를 써 놓았다.
毛深內闊 모심내활
털이 깊고 속이 넓으니
必過他人필과타인
반드시 다른 사람이 지난 자취로다.
새신랑이 첫날밤을 치루다 말고 자리에서 일어나
난데 없이 불을 켜고 담배를 피우질 않나.
붓을 들어 글을 쓰질않나,
가만히 이불 속에서 기다리던 곱단이
눈을 들어 쳐다보니
새신랑 얼굴이 한심 투성이었다.
그러자 곱단이는 몸을 일으켜
새신랑이 써 놓은 글을 보고서야,
모든 것을 알게 되었다는 듯이
수치와 분노의 얼굴빛을 감추지 못하더니
새신랑이 쓰고 던진 붓을 들어 아래와
같이 써내려갔다.
후원황율 불봉탁 後園黃栗 不蜂柝
뒷동산 익은 밤송이는 벌이 쏘지 않아도
저절로 벌어지고
계변양류 불우장 溪邊楊柳 不雨長
시냇가의 수양버들은 비가 오지 않아도
스스로 자란다.
이렇게 써놓은 신부는 그만,
복받치는 설움에 몸을 가누지 못하고
엎드려 흐느낀다.
삿갓은 그때서야 자신의 잘못을 크게 뉘우쳤다.
(여자의 옥문이란 실로 미묘하여
안변 주막집 안주인 같은 호로형이
있는가 하면,
함흥 주막집 여자처럼 항구형도 있으렸다.
그렇다면 곱단이는 세숫대야 형이던가?
허허....거 참 알수 없군!)
"곱단이 내 잘못했네, 제발 눈물을 멈추지 ..."
그날, 김삿갓은 새벽 동이 트도록
곱단이를 달래며 밤을 꼬박 새웠다.
방랑시인 김삿갓 (48회)
다시 찾은 아는 이 없는 쓸쓸한 안변거리.
김삿갓은 행복했다.
곱단이와의 신혼생활은
지난해 가련이와 보낸 시간보다 더 자유롭고 즐거웠다.
노처녀를 여위지 못할 줄 알았던 곱단 어머니는
가히 사위가 자랑스러웠고,
천하의 시객을 남편으로 맞은 곱단이는
김삿갓을 온갖 정성으로 섬기고 사랑했다.
그런 시간은 일년이 넘었고
뜰 앞에 오동나무는 다시 가을 소리를 내고 있었다.
미각지당 춘초몽 未覺池塘 春草夢
연못가에 피어난 봄풀은 꿈도 깨지 못했는데
계전오엽 기추성 階前梧葉 己秋聲
뜰앞에 오동잎은 벌써 가을 소리를 내는구나.
사람이 사는 인생의 부귀영화가 다 무어란 말인가.
오늘, 가을 바람에 떨어지는
오동잎과 다를 게 하나도 없지 아니한가?
"내가 또다시
이렇게 안일한 생활만 해서는 아니 될텐데 .... "
김삿갓은 자기 자신도 알수 없는
묘한 자책이 또 고개를 들기 시작 했다.
조상이 지은 죄를 속죄하기 위해
세속의 허무함을 잊기위해서 삿갓을 쓰고 떠난 내가
사년이 다 되도록
고향에도 가지 않고 떠돌아 다닌 결과가
겨우 이렇듯 안일한 생활을 하려했던 것인가 ?
차라리 이렇게 살바에는
고향에 가서 농사를 짓고
어머니를 모시고 살아야 할 것 아닌가 ?
늙은 어머니가 지금도 살아계신지
벌써 돌아가셨는지도 모르겠고
집을 떠나기 전 배가 불러왔던
아내는 아이를 잘 낳아 키우고 있는지
온갖 궁금증이 그를 짖눌렀다.
드디어 가을 바람이 일기 시작하자
삿갓의 마음은 향수에 사로잡혀 들뜨기 시작했다.
더구나 곱단이가 태기가 있는지
배가 불룩해 오는 것을 보니
고향에 있는 아내 생각이 더욱 간절했다.
(내가 고향에 다니러 간다고 하면
곱단이가 펄쩍 뛸텐데... 어떡하나 ...)
이런 생각에 잠겨있던 어느날
그는 꿈을 꾸었다.
그것은 고향집 어머니 방에 가족이 모여들어
어머니의 임종을 지켜보는 꿈이었다.
머리에 수건까지 두른 어머니 머리맡 에는
약사발을 놔둔 채 모두 모였는데
"우리 병연이만 오지 않는구나."하며
병석의 어머니가 눈물을 흘리는 장면이었다.
삿갓이 안방문을 열고 들어가자,
아내가 하는 말이
"아이구 여보 , 진작 좀 오시지!"하며 울고,
병석의 어머니는 가냘픈 눈을 떠서..
"이 불효 막심한 놈아 이제야 오다니.."하며
그만 운명하는 꿈이었다.
"아이구 어머니!"
그는 꿈결에 소리를 지르자
옆에서 잠을 자던 곱단이 잠을 깨며,
"여보! 당신 무슨 꿈을 꾸셨기에
소리를 지르십니까?"하며 팔을 흔들어 깨웠다.
"음 .. 그랬나 ? "
"다 큰 양반이 잠결에 어머니를 찾으세요 ? "
곱단이는 모로 누우며 그렇게 말을 했지만
삿갓은 벌써 단천을 떠나
고향길에 오르는 상상에 사로잡혀 있었다.
(그렇다. 근본을 무시하고 사는 것은 아니될 일이다.
할아버지만 조상이고
날 낳아 키워주신 어머니는 조상도 아니란 말인가?)
이튼날 아침 삿갓은 아내가 없는 틈을 타
행장을 차려입고 장모를 찾았다.
"아니, 갑자기 어디를 가려는 차림인가?"
장모는 눈이 동그래져 물었다.
"아네요.
제가 언젠가도 말씀을 드렸지만
안변 사또가 저를 무척 아껴 주셨는데
어젯밤 꿈에 보이기로 무슨 변고라도 있는가 싶어,
바람도 쏘일겸 안부삼아 다녀오려고 합니다."
"글쎄 집에만 있으려니
갑갑하기도 하겠지만,
곱단이 바느질 심부름 다녀 온 뒤에 보고 가지
갑자기 이렇게 ... "
장모는 딸이 없는데
행장을 차려 사위를 떠나 보내는 것에
불안감을 감추지 못했다.
"허허, 장모님두 ...
대 엿새면 다녀 올 것을 꼭 만나보고 가야 하나요.
나가다가 만나게 되면 말을 해 두지요."
"글쎄 그래도 상관 없겠지만 ... "
삿갓은 이렇게 말을 하고 인사를 한 다음
성큼성큼 걸어나와 재를 넘었다.
반짓 그릇에 간단하게
못 보고 가서 미안하다는 글을 써놓고 나오기는 했지만,
"혹시 곱단이를 만나면 어떡하나" 걱정을 하였다.
공연히 거리에서 만나게 되면
눈치빠른 곱단이에게 붙들려, 들어가야 될지도 모를 일이다.
다행히 곱단이를 만나지 않은 채
삿갓은 마을을 벗어났다.
모처럼 방랑의 길을 나서니 기분이 날아갈듯 상쾌했다.
길을 떠난지 사흘만에 안변을 밟았다.
벌서 일년이 넘었지만
거리는 그때나 다름 없었고
고향을 찾아 온듯 반갑기만 한 안변의 산천이다.
누구 보다도 가련이가 보고 싶었다.
음.. 가서 하룻밤 회포나 풀고가자.
이렇게 생각한 김삿갓은
가련의 집앞에서 뛰는 가슴을 억누르며
젊잖은 소리로 사람을 불렀다.
"이리오너라."
그러나 대답도 없고 인기척도 없었다.
이상한 예감에 사로잡힌 삿갓은
다시한번 불러 보았다.
"이리오너라."
그때서야 한 사나이가 동저고리 바람으로
대문을 삐끔 열고 내다본다.
"누굴 찾으시오 ? "
"여기 혹 가련이란 기생이 지금도 ..."
"댁은 가련이와 어떻게 되오 ? "
사내는 턱을 들어 아니꼬운 표정을 지으며 물었다.
"글쎄 이렇게 찾아 온 것은
아는 사이니까 찾아오질 않았겠소?"
"허 .. 늦었수다.
가련이는 죽었다오!"
"예 ... ?"
"허, 이양반 그것도 모르고 찾아왔구려.
왜 지난해 봄에 목을 매달았다지 .."
"예엣 ? .. 자결을?"
김삿갓은 피가 거꾸로 도는것 같았다.
뒷통수를 얻어 맞은듯 정신이 아찔했다.
지난날 가련과 헤어질 때 가련이 했던
마지막 말이 뇌리에서 떠나지 않았다.
("꼭 돌아 오셔야 해요.
만약 동짓달까지 서방님이 돌아 오시지 않는다면
가련이는 죽고 말거예요. 네?
저를 살리려면 꼭 그때까지 돌아오세요 ....")
가련이 자살은
자기와의 이별이 큰 원인인 것이 아니었나
생각을 하니 어처구니가 없었다.
한동안 멍하니 서있던 김삿갓이
다시 정신을 차리고 쓸쓸히 물었다.
"혹시 죽기 전에 남긴 말이라도 있는지 .... "
"허.. 그 양반,
가련인가 그 기생이 죽고난 한참 뒤에
이집을 사서 이사를 온 내가 그걸 어찌아오?"하고선
대문을 닫고 안으로 사라진다.
"허..이런 변이 있나!"
삿갓은 홀로 탄식을 거듭하다
가련의 집에서 돌아 나오는 길에 마음이 하도 울적하여
가까운 주막에 들려 술을 청했다.
주모가 날라온 술을 한잔 마신 삿갓은,
"혹시 저 안마을에 가련이가 왜 죽었는지 아오?"
하며 물었더니.
"아... 왜 그 기생노릇 하던 가련이요?
서방인가, 남방인가 못된 놈 떠나 보내고
기다리다 지쳐 들어 누웠다가
불쌍하게도 불현듯 목을 매달았다지요. 아마 ? "
"......"
더 물을 필요도 없었다.
삿갓은 몇 사발 술을 더 벌컥벌컥 마시고 다시 물었다.
"본군 사또님은 안녕하시죠 ? "
"호호 .. 손님은 없는 사람만 찾으시네요.
사또님도 새로 갈리셨지요."
"네에?
그럼 먼저 사또님은 어디로 가셨소? "
"그야 모르죠.
들리는 애기로는 관직에서 떠나
출세한 아드님 임지로 두 양주분이 가셨다죠 아마 ? "
"...."
오늘, 김삿갓이 만난 안변은
불과 이태 전까지와 전혀 다른 안변이었다.
인생무상이 한꺼번에 밀려왔다.
그는 쓸쓸한 가슴을 안고 혼자 고개만 주억거리며
주모의 말을 듣다가 주막을 나왔다.
황혼이 밀려오는 안변 거리를 거닐면서
쓸쓸한 회포를 달랠길 없는 김삿갓,
마음을 담은 시 한수를 읊으며
안변의 거리를 떠돌았다.
일종통후 기감망 一從痛後 豈堪忘
한번 이별한 뒤 어찌 잊고 견디었겠나?
골여위분 아수상 骨汝衛粉 我首霜
네 뼈는 가루가 되고 내 머리는 서리가 되었구나.
난경영한 춘적적 鸞鏡影寒 春寂寂
난경은 그림자 싸늘해 봄이와도 적적할 게고
풍영음단 월망망 風玲音斷 月茫茫
퉁소는 소리가 끊어져 달도 아득하구나
조음위북 귀제곡 早吟衛北 歸齊曲
일찌기 북위의 귀계곡을 부르며 이별했고
허부주남 채조장 虛負周南 采藻章
헛되이 주남의 채조장을 저버렸구나
구로무흔 난재방 舊路無痕 難再訪
옛 길 흔적 없어 찾기 어려우니
정차좌애 야화방 停車坐愛 野花芳
수레를 머무르고 앉아 들꽃의 아름다움만 사랑했도다.
방랑시인 김삿갓 (49회)
고향 앞으로
이튼날 부터 김삿갓은
모든 것을 다 잊고 고향에나 갈 결심을 굳게 하였다.
옛날 걸어온 그 길을 부지런히 걸어
보름만에 강원도 땅을 밟았다.
가을도 깊어
이제는 조석으로 찬서리가 내려
겨울을 재촉하는 무렵이었다.
늦은 가을 고향 산천은 이미 낙엽이 지고
오곡을 거두어들인 전답은 황량하기만 했다.
삿갓은 며칠을 더 걸어
영월땅 고향 마을에 당도했다.
벌써 해는 지고 황혼이 깔린 뒤라
아무도 자기를 알아 보는 사람은 없었다.
삿갓은 금의환향도 아니데
차라리 해가 져서 어두운 것에 마음이 편했다.
삿갓은 초라한 초가집 사립문을
가만히 밀고 들어섰다.
집은 사년 전 떠날 때 보다 더 낡고 쓸쓸해 보였다.
"어머니 ! "
마음은 크게 불러야 하겠다고 시켰지만
정작 어머니를 부르는 소리는
모기소리 보다 작게 나오고 말았다.
부엌 쪽에서는
그릇 달그락 거리는 소리만 들리는데
아내는 지금쯤 설겆이를 하고 있는 모양이다.
"어머니 ! "
이번에는 조금 힘을 주어 불렀다.
그러자 부엌에 있던 아내가 주발 하나를 든채
"누구세요?"하고 다가선다.
오랫만에 들어보는 아내의 음성이었다.
"나요 나 ... 그동안 잘 있었소?"
"에그머니나!"
아내는 사년만에 만나는 남편을 보고
이렇게 외마디 소리만을 칠 뿐
장승처럼 멍 하니 서 있었다.
"그래 어머니는 안녕하시오 ? "
"..... 네."
아내는 겨우 그렇게 대답하고
그때서야 앞장서 방으로 들어가서 등잔불을 댕겼다.
불빛에 언뜻 보이는 아내의 모습은
그동안 너무도 고생을 한 탓인지 더 초라하고
볕에 그을린 검은 피부에 야위어 있었다.
"어머니는 어디 가셨소 ? "
"동네 내려 가셨어요."
그렇게 대답하는 아내의 음성은
울음이 섞인 목멘 소리였다.
삿갓도 눈시울이 붉어져
더는 말을 못하고 있다가 불현듯
형의 내외가 생각나 물었다.
"형님은 어디 가셨소 ? "
".... 돌아가셨어요 그만 ...."
아내는 북바치는 설움을 참지 못한 채
그렇게 말하고는 흐느껴 울기 시작했다.
"뭐 ... 형님이 ? "
삿갓은 너무도 의외였다.
어려서 부터 건강이 좋지 않은 형이었다.
역시 허약한 탓으로
작년 봄에 세상을 떠났다고 아내는 말을이었다.
더욱이 불쌍한 것은 형수였다.
시집온지 삼년만에 아무 소산없이
남편이 건강해지면 오겠다고
친정에 가서는 결국 청상과부가 된 것이 아닌가.
삿갓은 방에 앉지도 못한 채
감당 할 수 없는 괴로움에 어쩔줄 몰랐다.
"앉으세요.
제가 동네에 가서
어머니랑 익균이를 데리고 올께요."
"익균이가 누구요 ?"
"참 모르시겠네요.
당신 아들이지 누구예요 ? "
"아 참 그렇던가 ? "
삿갓은 아들의 이름을 알리가 없었다.
아내가 뱃속에 아이를 품고 있을때 집을 떠났으니..
"돌아가신 큰 아버지가 지어 주셨어요.
날개 익(翼)자를 써서 익균(翼均)이라고요."
"... 음 이름도 괜챦군."
그때 마침 어머니가 마을에서 돌아와서
방에서의 인기척을 듣고 물었다.
"누가왔냐 ? "
그러면서 문을 연 노인은
기다리고 기다리던 아들을 희미한 불빛에서 보자
다시 한번 뚫어져라 쳐다 보았다.
그러더니 놀라 눈이 둥그래지며,
"아니 ? 네가 ...."하고 말을 잊지 못하고 흐느껴 울었다.
"어머니 불효자식이 이제야 왔습니다."
삿갓은 절을 넙죽 하면서
죄스런 마음에 고개를 떨구고 있었다.
"그래 어디를 다녔기에 그동안 소식이 없었니?
네 형은 그만 ..."
노인은 말을 더는 못하고 다시 울음이 터졌다.
삿갓도 다시 눈물을 글썽이며
"어머니 뵈올 낮이 없습니다."하고 무릅을 꿇었다.
"그래
몸성히 돌아 왔으니 다행이다만
원 사람이 그렇게 무심할 수 있느냐?"
"..... "
삿갓은 달리 말을 할 수 없었다.
"어서 저녁 차려라 ! "
아직도 우두커니 서 있는 며느리에게
다소 마음을 진정한 노인이 이르면서
"참, 익균아.
네 아비다 절해야지."하고
어깨너머에 영문 모르고 서 있는 손자를
앞으로 끌어 세웠다.
삿갓은 그제서야 아이를 보았다.
"그래 네가 익균이구나."
희미한 등잔불 아래
자기 모습을 닮은 사내놈이
토실토실 살이 올라 귀엽게 보였다.
"자.. 네 애비라니까, 절 좀 하라니까 ..."
하지만 처음 보는 낯선 사람에게
절을 하라니까 꼬마가 달갑게 절을 할리 없었다.
아이는 금방 울상이 되며
할머니 품을 파고들며 울음을 터트린다.
"오냐 .. 그만둬라. 원 ..아비도 모르고 ..."
"애가 네살 되었나요 ? "
"그렇지..만 사년이 다 되었구나."
모자간에는 이런저런 이야기가 많았다.
삿갓도 금강산으로 해서
안변, 문천, 함흥, 단천을 거쳐
길주 명천까지 갔다가 다시 돌아온
대강의 경로를 말씀드렸다.
아내는 서둘러 저녁상을 차려들고 왔으나
가난한 집에 반찬인들 별스러운게 있을리 없다.
"내일은 닭 한 마리 잡자!"
어머니는 쓸쓸한 얼굴로 말하며
그래도 돌아온 아들이 대견했던지 자꾸 넘겨다 보았다.
이윽고 밤이 이슥해서야 삿갓은
사년만에 아내와 나란히 누웠다.
자연히 아내의 입에서는
원망의 소리가 나올수 밖에 없었다.
"원 세상에 ..
그렇게 소식도 없이
나가 돌아다니는 양반이 어디있어요?"
"그러게나 말이오.
할 말이 없구려."
"저는 영 안 돌아 오시는것 아닌가 걱정되어
밤마다 얼마나 울었는지 몰라요."
"허 .. 산 사람이 안 올리야 있겠소?"
"정말 ..
이 어린것들만 없었더라면 .... "
"오.. 왜?
어린것들만 없었더라면 개가라도 하려고 그랬나?"
"아유 무슨 말씀을 그렇게 섭섭하게 하세요."
"그럼."
"정말, 목이라도 매고 죽어버리려고 했지 뭐예요!"
"허허 , 그래?
그러니 다 삼신 할머니가 당신을 살리려고
아들을 보내신 것 아닌가...? "
"그래 어딜 그렇게 다니셨어요?"
"참 많이도 다녔지 ..
금강산으로 함경도로 ...."
"이젠 다시는 안떠나시죠 ? "
"글쎄 두고봐야지."
"또 나가시게요 ? "
"허허 .. 다음번에도 나갈양이면
또 아들이나 하나 심어주고 나가든지 허지."
"아유 그럼 이번에는 저도 따라 나설래요."
"허어..아녀자가 그런소리를...,
그만하고 잡시다."
"잠이 와요?
그동안 익균이 놈이
왜 난 아버지가 없느냐고 물을 때는
얼마나 난감 했는지 알아요?"
아내는 돌아누워서 다시 훌쩍거리기 시작했다.
삿갓은 난처했다.
그러나 아내를 달랠 방법이 묘연했다.
"허어.. 이젠 그만 좀 하오.
낸들 그러구 싶어서 돌아다니다 왔겠소?"
아내도 더 는 말을 하지 않았다.
" ....."
그때서야 삿갓은 아내를 끌어 당겨 품에 안았다.
워낙 오랫만에 남편의 손이 닿자
아내는 처녀처럼 몸을 떨기까지 했다.
그런대로 아내의 몸은 포동포동 했다.
"당신 객지를 나 다니며 외도도 많았겠지요 ?"
아내는 몸을 허락 하면서도 한마디 했다.
삿갓은 순간 웃음이 나왔지만
아내의 말에 순순히 대답할 수는 없는 일이었다.
"허..무전에 걸식을 하는 놈이
외도는 무슨 외도를 했겠소?
괜한 소리를 하는구먼!"
" ....."
약한게 여자의 마음이라 ...
무전걸식 이라는 삿갓의 말에
아내는 이렇다 할 대꾸를 못한 채
방법조차 잊어 버린 것 같은 부부간의 이불속 행사가
낯선듯, 남편의 몸을 꼭 쥐고 부르르 떨기만하였다.
그렇게 사년만에 만난 부부의 분홍빛 밤은 깊어만 갔다.
방랑시인 김삿갓 (50회)
고향에서(1부 마지막 편)
이튼날 이른 아침
삿갓, 아니 병연은 아우 병호의 안내로 뒷산에 올라 형의 무덤에 성묘하고
모처럼 고향의 마을을 바라보며 깊은 생각에 잠겨 있었다.
"병호야,
네가 그동안 고생을 많이 했다.
형은 앞으로 어떻게 하면 좋겠니?"
아우 병호도 장가를 가고 분가를 한 뒤지만
집에 와 들으니 농삿일은
그 아우가 모두 보살펴 주었다는 것이다.
"제 생각으로는
형님이 집에 계신다면 얼마나 좋겠습니까만
형님은 형님대로 생각이 있으시니
제가 어찌 형님 뜻을 좌우하겠습니까?"
"글쎄 말이다.
뜻이라는 것이 별 것도 아니지만,
그렇게 방랑 생활을 하니까 세상의 번뇌는 잊을 수 있더구나."
"형님,
그래도 아주머니나 어머니가 불쌍해지니
집에 계셔야죠."
"허긴 ..
그래서 우선 온 게 아니냐?"
형제는 산을내려오며
허심탄회한 이야기를나누었다.
아침을 먹고난 병연은 먼저 글방에 들러
자기를 가르쳐 준 스승을 찾았다.
백발이 눈에 띄게 더 성성해진 스승은
크게 반가워했다.
"아니 이게 병연이 아닌가?"
"네 ...
그간 무고 하셨습니까?"
"허 ..언제 돌아왔나?"
"어제밤에 돌아왔습니다."
"그래 돌아다니며 마음 좀 추스렸는가?"
"이곳 저곳을 정처없이 다니며 세상구경을 했습니다."
"어디를 돌아 보았나?"
"네, 금강산으로 해서
함경도 길주, 명천까지 다녀왔습니다."
"암... 사람은 그렇게 객지 바람을 쐬야
듣고 배우는 것도 많을 것이니 ... !"
"뭐 .. 별로 배운 거야 있겠습니까?"
"그동안 자네 집도 형이 타계하고
변화가 많았었지?"
"네,
오늘아침 산소에 다녀 왔습니다."
"이제 그만하고 내 글방에 와서 아이들이나 가르치게.
난 도무지 나이가 들어서 이것도 이젠 못하겠네."
"원 .. 선생님두
이제 환갑이 조금 지나셨는데...."
"아니야 자네같은 제자가 좀 해주었으면 해 ..."
"같이 수학하던 동학들 소식은 있습니까?"
"이제는 모두 농사나 지으며 잘들 살고 있지."
"제법 어른티가 나겠군요."
"암 ..모두 가장들 아닌가?"
병연은 옛 스승과 많은 이야기를 나누고
또 찾아 뵙겠다는 인사를 한 뒤 마을로 들어가서
옛 글방 친구들을 만났다.
그 가운데서도 가장 각별하게 지낸 친구와
모처럼의 회포를 나누면서
그 친구의 주선으로
그의 집 사랑에 옛 글방 동학들이 모여 술상이 벌어졌다.
"허, 병연이 죽은 줄 알았다."
"그놈의 백일장이 생사람 잡았지."
"그래 금강산 절경이 그렇게나 기막히다며?"
친구들은 반가워 하면서 묻는 말도 많았다.
이렇게 마을에 동학들은
함께 술에 취하고 흥에 겨웠다.
병연이 여기저기 다니며 걸식하던 얘기,
서당 훈장하고 싸운 이야기 등
구경하며 다닌 이야기를 두서없이 늘어놓자
한 친구가
"그 훈장 혼내준 글하나 소개해 봐라"
하며 조른다.
병연은 몇번 사양을 하다가
함경도 어느 서당에서 훈장을 혼내준
다음과 같은 글을 소개하여 좌중을 웃겼다.
두메구석에 완고한 백성이
고약한 버릇이 남아서 문장대가를 함부로 욕하며
허풍만 떠벌리는구나!
조그만 조개비 잔으로
바닷물을 어찌 측량할 수가 있으며
쇠 귀에 경을 읽는 격이니
어찌 글의 뜻을 알겠냐?
서속이나 훔쳐먹는
산골에 간악한 쥐같은 네놈이요
구름을 타고 넘는 붓끝에
용을 날리는 내로다
마땅히 볼기를 쳐서 죽일 죄이로되
잠시 용서 하노니
다시는 어른 앞에서
버릇없는 행동을 하지 말지어다.
좌중은 모두 허리를 잡고 웃으며
다시 한번 병연의 재주를 아깝게 생각했다.
이렇게 고향에 온 병연은
삼년 동안이나 자기가 배운 서당에서
훈장 노릇을 하면서 살았다.
그러나 시간이 흐르자
고향에서의 안일한 생활이 또 권태롭기 시작했다.
병연은 다시,
방랑을 꿈꾸기 시작했다.
그것은 그의 생리며 숙명인지 모른다.
방랑할 때 쓰던 삿갓과 죽장을 볼 때 마다
바람과 구름과 유유한 산수가 그리워졌다.
(이번에는 한양이나 가볼까?
아니면 경상도나 전라도를 가볼까?)
김병연 김삿갓!
그는 오늘도 강원도 영월땅에서
전국 팔도 모두를 머릿속에 그리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