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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고(寶庫)열쇠를 소유한 자
마16:13~20
예수께서 가이사랴 빌립보 지방에 이르러 제자들에게 물어 가라사대 사람들이 인자를 누구라 하느냐 가로되 더러는 세례 요한, 더러는 엘리야, 어떤 이는 예레미야나 선지자 중의 하나라 하나이다 가라사대 너희는 나를 누구라 하느냐 시몬 베드로가 대답하여 가로되 주는 그리스도시요 살아 계신 하나님의 아들이시니이다 예수께서 대답하여 가라사대 바요나 시몬아 네가 복이 있도다 이를 네게 알게 한 이는 혈육이 아니요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시니라 또 내가 네게 이르노니 너는 베드로라 내가 이 반석 위에 내 교회를 세우리니 음부의 권세가 이기지 못하리라 내가 천국 열쇠를 네게 주리니 네가 땅에서 무엇이든지 매면 하늘에서도 매일 것이요 네가 땅에서 무엇이든지 풀면 하늘에서도 풀리리라 하시고 이에 제자들을 경계하사 자기가 그리스도인 것을 아무에게도 이르지 말라 하시니라
문명사회에서 사는 현대인의 생활의 특징의 하나는 열쇠라고 봅니다. 거의 다 열쇠 한 두 개씩 있을 줄 압니다. 대문 열쇠, 안방 열쇠, 아파트 열쇠, 자동차 열쇠, 사무실 열쇠, 책상 열쇠 등 어떤 분들은 열쇠를 수십 개씩 차고 다니는 분들도 있습니다.
심지어 딸 시집 잘 보내려면 열쇠 3개 이상을 줄 수 있어야 된다는 말도 있습니다.
그러나 아파트 열쇠나 자동차 열쇠보다 천 배, 만 배 더 주요한 열쇠 몇 가지가 있어야 합니다. 다른 열쇠는 없어도 이 열쇠만은 꼭 있어야 합니다.
1. 천국 열쇠입니다.
한번은 예수께서 가이사랴 빌립보 지방에 이르러 제자들에게 중요한 질문을 했습니다. “사람들이 나를 누구라고 하느냐”고 물었습니다. 제자들이 대답하기를 세례 요한, 엘리야, 예레미야, 선지자 중에 하나라고 대답을 했습니다. 이때 예수님은 “너희는 나를 누구라고 하느냐”(Who do you say that I am)라고 질문을 했습니다. 이 질문은 가장 중요한 질문이며, 누구에게나 물어보시는 질문입니다.
이 질문(質問)에 어떻게 대답하느냐에 따라 그 사람의 영원한 운명이 결정됩니다. 이 질문(質問)에 애매한 대답을 한다면 예수님도 슬퍼하시고, 목사의 마음도 실망이 됩니다.
지금도 어떤 사람은 공자, 맹자, 석가와 같은 성현 중의 한 사람 정도로 생각합니다. 어떤 사람은 “무조건 하나님이 계시다는 것만 믿고 착하게 살면 되지 않습니까?”라고 말을 합니다. 이런 사람의 종류들은 거듭나지 못한 것은 물론이고, 천국열쇠를 갖지 못한 사람입니다. 그러면 올바른 대답이 무엇인가? 베드로의 대답을 들어봅니다. 다른 제자들은 당황하고 머뭇거리며 대답하지 못하고 있을 때에 이렇게 대답을 했습니다.
“주는 그리스도시오 살아계신 하나님의 아들이시니이다”
이렇게 대답한 베드로에게 기뻐하시면서 “네가 복이 있도다 이를 네게 알게 한 이는 혈육이 아니요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시니라”고 말씀하셨습니다.
베드로가 똑똑하거나 학식이 많아서 안 것이 아니라, 성령(聖靈)께서 베드로에게 직관의 능력을 주셔서 대답하게 한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이어서 말씀하시기를 “너는 베드로라 내가 이 반석 위에 교회를 세우리니 음부의 권세가 이기지 못하리라 내가 천국열쇠를 네게 주리니 네가 땅에서 무엇이든지 매면 하늘에서도 매일 것이요 네가 땅에서 무엇이든지 풀면 하늘에서도 풀리라”라고 하셨습니다.
천주교에서는 천국열쇠를 베드로에게만 주신 것으로 생각하고, 그 후 교황들이 그 권세를 이어 받은 줄로 생각을 하고 베드로도 마리아와 같이 숭상합니다. 그것을 잘못된 신앙사상입니다.
“너는 나를 누구라 하느냐?”는 질문에 베드로와 같은 신앙고백(信仰告白)을 하는 자는 누구에게나 천국열쇠를 주시고 영원한 천국(天國)에 들어갈 자격(資格)을 주시는 것입니다.
“내가 천국 열쇠를 네게 주리니 네가 땅에서 무엇이든지 매면 하늘에서도 매일 것이요, 네가 땅에서 무엇이든지 풀면 하늘에서도 풀리라”고 하신 말씀은 천국열쇠를 보유한 자의 특권과 아울러 중대한 책임을 보여 줍니다.
열쇠를 가진 사람은 다른 사람에게 문을 열어주어야 할 책임이 있습니다. 자기만 넣고 다니고 다른 사람에게 열어주지 않으면 그들이 못 들어가게 됩니다. 천국의 열쇠를 가진 사람은 다른 사람에게도 전도하고, 깨우쳐서 천국에 들어가게 해주어야 합니다. 즉 먼저 예수 믿고 구원받아 천국열쇠를 가진 사람은 다른 사람에게도 전도하여 천국에 들어보내야 할 막중한 책임이 있습니다.
예수님은 베드로에게만 천국 열쇠를 주신 것이 아니라 구원받은 한 사람, 한 사람에게도 천국 열쇠를 주셨습니다. 영혼 구원의 책임을 주셨습니다.
그런데 그 주요한 열쇠를 혼자만 넣고 다니면서 다른 사람이 들어가도록 열어주지 않으면 잘못을 하고 있는 것입니다. 천국 열쇠를 열심히 잘 사용하시기 바랍니다. 그리하면 축복의 보고문이 열릴 줄로 믿습니다.
2. 십일조의 열쇠입니다
경제 문제를 해결하며 하늘 보고를 여는 열쇠는 바로 십일조입니다.
말라기 3장 10절에 “만군의 여호와가 이르노라 너희의 온전한 십일조를 창고에 들여 나의 집에 양식이 있게 하고 그것으로 나를 시험하여 내가 하늘 문을 열고 너희에게 복을 쌓을 곳이 없도록 붓지 아니하나 보라”고 약속했습니다. 하늘의 축복의 문을 여는 열쇠를 주셨지만 사용하지 아니하면 평생 보고문이 열리지 않습니다.
십일조는 물질(物質)의 문제만 아니라 가정평안의 축복, 건강의 축복, 재난을 막는 중요한 비결입니다.
신․구약 성경 중에서 “주 너희 하나님을 시험하지 말라”는 말씀은 많지만 “시험해 보라”는 말씀은 십일조에 관해서 밖에 없습니다.
유명한 노르만 빈센트 필(Norman V. Peal)박사에게 경제 문제로 가정이 파탄되어 이혼한다고 상담해 오는 편지가 일년에도 수 백통이 넘는다고 합니다. 그에 대한 해답을 “가이드 포스트”지에 썼는데 “돈 때문에 염려하십니까?(Do you worry about money)라는 제목으로 쓴 것을 보았습니다.
그 글에서 “돈을 남용하지 말고 기도하는 마음으로 써라 서로 딴 주머니 차지 말라”는 등 10가지를 썼는데, 큰 글자로 말라기 3장 10절을 쓴 것을 읽었습니다. 그 글에 끝맺은 결론에서 “십일조를 했습니까?”라고 했습니다.
미국의 위대한 재산가이면서, 신앙가인 알렉산더 케르라는 사람은 십일조 생활로 축복을 받은 사람인데, 온 동네가 불탔는데도 많은 기름통을 쌓아 놓은 자기 공장 담 밖까지만 붙고 안전하였다고 합니다.
그 때 그가 말하기를 “누구든지 십일조를 1년 이상 해 보라. 그러면 하나님이 계시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라고 간증을 했습니다.
농부들이 아무리 먹을 것이 없어도 종자는 먹지 않고 머리에 베고 굶어 죽는다는 말이 있습니다.
우리들은 이 축복의 종자는 삶아 먹어서는 안됩니다. 여러분! 십일조는 보고문을 여는 열쇠입니다. 이 열쇠를 소유하시기 바랍니다.
3. 기도의 열쇠입니다
마태복음 7장 7절에 “문을 두드리라 그러면 너희에게 열릴 것이니”라고 말씀했습니다. 우리의 가장 중요한 열쇠의 하나가 기도의 열쇠입니다.
기도는 호텔의 마스터키와 같습니다. 어떤 문제든지 아무리 큰 근심과 고민거리라 할지라도 이 기도의 열쇠를 활용하면 해결할 수가 있습니다.
보통 기도나, 새벽기도로 안되면 금식기도로 매달리면 불가능해 보이는 일들이 해결되고, 죽은 자가 살아나고, 실패가 성공으로 바꾸어지기도 합니다.
그런데 이 기도의 열쇠를 사용하지 않고 근심하고 고민만 합니다. 간절히 기도했는데도 해결되지 않았다면, 나중에 지나고 보면 내 생각대로 응답 안된 것이 훗날에 나에게 더 큰 유익이 되었다는 것을 알게 될 것입니다.
성경에는 교회를 기도하는 집이라고 하였습니다. 사랑하는 교회 안에서 우리 모두 뜨겁게 기도하십시다.
우리 기독교의 역사는 기도의 역사라고 했습니다. 역사를 크게 변화(變化)시킨 사람들은 모두 기도하는 사람들 이였습니다. 기도(祈禱)를 예배 형식의 한 순서 정도로만 생각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기도(祈禱)를 정신생활의 사치품 정도로 아는 사람도 있습니다. 이러한 사람들은 참 하나님과 예수 그리스도를 진심으로 체험한 사람들이 아닙니다. 형식적(形式的)인 신자(信者)에 불과(不過)합니다.
요한복음 17장 3절에 “영생은 곧 유일하신 참 하나님과 그의 보내신 자 예수 그리스도를 아는 것이니라”고 하셨습니다.
안다의 뜻은 신학적으로, 철학적으로, 인식했다는 뜻이 아닙니다. 진정한 교제를 통해서 아는 것을 의미합니다. 즉, 동정 마리아가 “나는 사내를 알지 못하나이다”하는 말은 남자란 인간을 알지 못한다는 뜻이 아니라 남자와 사랑의 교제를 나누어 보거나 정을 통해 본 일이 없다는 뜻입니다.
기도와 체험하는 보고의 열쇠를 소유하시기 바랍니다.
여러분! 아파트 열쇠나 자가용 열쇠는 없어도 천국 열쇠, 십일조의 열쇠, 기도의 열쇠는 반드시 소유해서 하늘의 축복(祝福)을 풍성(豊盛)하게 누리시기를 주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많은 사람을 살리는 길
요12:20~25
명절에 예배하러 올라온 사람 중에 헬라인 몇이 있는데 저희가 갈릴리 벳새다 사람 빌립에게 가서 청하여 가로되 선생이여 우리가 예수를 뵈옵고자 하나이다 하니 빌립이 안드레에게 가서 말하고 안드레와 빌립이 예수께 가서 여짜온대 예수께서 대답하여 가라사대 인자의 영광을 얻을 때가 왔도다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한 알의 밀이 땅에 떨어져 죽지 아니하면 한 알 그대로 있고 죽으면 많은 열매를 맺느니라
자기 생명을 사랑하는 자는 잃어버릴 것이요 이 세상에서 자기 생명을 미워하는 자는 영생하도록 보존하리라
오늘 본문에 보면 예수님께서 동문서답(東問西答)격으로 말씀하신 내용을 읽을 수가 있습니다. 예수님 당시에 호기심을 가지고 예수님을 만나 보려고 하는 사람들이 많이 있었습니다. 본문에 보니까 헬라인들이 찾아와서 예수님을 좀 만나보게 해달라고 안드레와 빌립에게 청탁을 했습니다.
“들여보내라” 한다든지 “돌려보내라” 하시지 않고, 엉뚱하게 말씀하시기를 “인자의 영광을 얻을 때가 왔도다” 라고 말씀하시고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한 알의 밀 알이 땅에 떨어져 죽지 아니하면 한 알 그대로 있고 죽으면 많은 열매를 맺느니라 자기 생명을 사랑하는 자는 잃어 버릴 것이요 이 세상에서 자기 생명을 미워하는 자는 영생토록 보존하리라”고 말씀을 하셨습니다. 이것이 무슨 뜻입니까?
그 뜻은 “지금 너희들이 호기심을 가지고 나를 보려고 하지만 지금 겉모양으로는 영광스러운 하나님의 아들의 참모습을 볼 수가 없고 한낱 가난한 목수의 아들로 밖에는 보지 못할 것이로되 그러나 머지 않아 십자가에 못 박혀 죽었다가 부활한 영광스러운 모습을 볼 때가 오는데 바로 그 영광을 얻을 때가 왔다”고 말씀하신 것입니다. 밀 알 한 알을 놓고 보면 그 참모습을 볼 수 없습니다.
땅에 뿌려서 죽었다가 수십 배, 수백 배 다시 열매 맺는 것을 보아야 밀 알 하나의 참모습을 볼 수 있다는 말씀입니다. 이런 의미에서 예수님을 찾아온 헬라인들에게 동문서답(東問西答)격인 말씀을 하셨습니다.
한 알의 밀이 땅에 떨어져 죽으므로 말미암아 많은 열매를 맺는 것처럼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못 박혀 대속의 죽음을 죽으시고 부활(復活)하심으로 말미암아 누구든지 저를 믿는 자마다 멸망치 않고 영생을 얻게 하신 것입니다. 예수님 한 분이 희생의 제물이 되심으로 많은 사람을 살리신 것같이 이 세상의 생활원칙, 영적생활의 원칙도 희생하고 죽어져야 많은 사람을 살릴 수 있는 것입니다. 많은 사람을 살리려면?
1. 낮아져야 합니다
“한 알의 밀이 땅에 떨어져 죽지 아니하면 … ”라고 말씀하신 대로, 밀 알이 습기있고 거름 냄새나는 땅 속에 떨어져 묻히지 아니하면 많은 열매를 맺을 수 없는 것과 같이 자기를 낮추고 겸손하지 않으면 많은 사람을 살릴 수가 없고 복되게 할 수가 없는 것입니다.
그런고로 예수님께서 하늘 영광(榮光)을 버리시고 이 땅위의 천한 말구유에 오셨습니다. 그리고 하나님의 아들이 인간의 가난한 목수의 아들로 태어나신 것입니다. 높은 곳에서 가장 낮은 곳을 떨어지셨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 죄인들이 구원받게 되었고 천국백성이 된 것입니다.
높아질 수 있지만, 낮아지는 사람이 있을 때, 많은 사람이 사는 길이 열리고 행복해질 수가 있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그 거룩한 창조주의 손으로 피조물인 죄인들의 발을 씻어 주시기까지 하셨습니다.
제자들의 발을 다 씻어 주신 후에 “너희가 나를 선생이라 또는 주라 하니 너희 말이 옳도다 내가 그러하다 내가 주와 또는 선생이 되어 너희 발을 씻겼으니 너희도 서로 발을 씻기는 것이 옳으니라”(요 13:13) “너희가 이것을 알고 행하면 복이 있다”(요 13:17)라고 하셨습니다.
너희도 높아지려고 하지 말고 자기를 낮추라는 뜻입니다. 올라가려고만 하지 말고 내려오라는 뜻입니다. 이것이 나도 살고 남도 살리는 것입니다.
“너희 중에 누구든지 으뜸이 되고자 하는 자는 모든 사람의 종이 되어야 하리라. 인자의 온 것은 섬김을 받으려함이 아니라 도리어 섬기려하고 자기 목숨을 많은 사람의 대속물로 주려함이니라”(막 10:42) 참으로 진리의 말씀입니다.
오늘날 정국이 왜 혼란한가? 왜 많은 사람들이 불안에 떨고 있는가? 서로서로 자기가 대통령이 되어야 하고, 서로서로 자기 파가 권세를 잡아야 하는 것 때문에 정국이 혼란하고 사회적으로 안정이 되지 못합니다.
누구 하나가 낮아지고 양보하고 집착을 버리면 온 국민이 고요하고 평안한 가운데 잘 살 수가 있는 것입니다. 낮아지는 사람이 있을 때에 그를 통하여 많은 사람이 살게 되고 행복하게 되는 것입니다.
“너희 안에 이 마음을 품으라 곧 그리스도의 마음이니 그는 근본 하나님의 본체시나 하나님과 동등됨을 취할 것으로 여기지 아니하시고 오히려 자기를 비어 종의 형체를 가져 사람들과 같이 되었고 사람의 모양으로 나타나셨으며 자기를 낮추시고 죽기까지 복종하셨으니 곧 십자가의 죽으심이라”(빌 2:5)
그러므로 하나님은 예수님을 만유의 주가 되게 하시고 그 이름을 지극히 높여 주시고 모든 무릎이 그 앞에 꿇게 하신 것입니다. 높아질 수 있지만 낮아지는 것이, 동등한 권리를 주장하지 않고 낮아지면 많은 사람이 살고 진정 높아지는 길입니다.
2. 집착을 버려야 합니다
많은 사람을 살리고 복되게 하려면 집착(執着)을 버려야 합니다. 자기 중심적(自己 中心的)이고, 자기실속만 찾는 사람은 결코 다른 사람에게 유익을 주거나 살리는 일을 할 수가 없는 것입니다.
“자기 생명을 사랑하는 자는 잃어버릴 것이요, 이 세상에서 자기 생명을 미워하는 자는 영생하도록 보존하리라”(요 12:25)고 말씀하셨습니다.
비단 목숨만이 아니라 물질(物質)이든, 명예이든 세상 것에 대한 집착을 버릴 줄 아는 사람이 많은 사람을 살릴 수도 있고 복되게 할 수 있는 것입니다.
모세가 대국인 애굽의 황제가 될 수도, 모든 보화도 손에 넣은 수도 있었으나 그 모든 것을 포기하고 그리스도를 위한 고난의 길을 택했기 때문에 종살이하던 이스라엘 백성을 구원해 낼 수가 있었던 것입니다.
후에 지도자로 나서기 전에 지금까지 가지고 다녔으며 믿고, 사랑하고, 의지하고 다녔던 지팡이를 버리라고 했을 때, 순종하고 버렸더니 능력의 지팡이가 되어 홍해를 가르고, 반석을 쳐서 생수를 나게 하여 이스라엘 백성을 살릴 수가 있었던 것입니다.
어떤 아프리카 소년이 원숭이 새끼를 잡아 가지고 와서 관광객에게 팔려고 합니다. 어떤 관광객이 묻기를 “그 원숭이를 어떻게 잡았느냐”고 물었습니다. 그 소년이 잡는 방법을 말하였습니다. 돌항아리 속에 땅콩이나 원숭이가 좋아하는 열매를 넣고 그물을 가지고 나무 위에서 기다리면, 그 냄새를 맡고 와서 돌항아리 속에 손을 집어넣으면 빈손으로는 들어가지만 움켜쥔 다음에는 주먹이 걸려서 안나온다고 합니다. 그 원숭이가 땅콩 한 웅쿰을 버리고 도망가면 살 수 있을 텐데 그것을 버리지 못하고 있을 때 그물을 씌워 잡는다고 합니다.
집착을 버리고 용감하게 포기할 줄 아는 사람이 남도 살리고 자기도 사는 것입니다. 참으로 얻기 위해서는 버리는데 용감해야 되는 것입니다.
“아버지께서 나를 사랑하시는 것은 내가 다시 목숨을 얻기 위하여 목숨을 버림이라. 이는 내게서 빼앗는 자가 있는 것이 아니라 스스로 버리노라 나는 버릴 권세도 있고 다시 얻을 권세도 있으니 이 계명은 내 아버지에게서 받았노라” (요 10:17~18)
예수님께서 목숨을 버리면 다시 얻는 것을 아셨기 때문에 십자가의 죽음을 택하셨던 것입니다.
오늘날 전국이 왜 혼란하고 사회가 안정되지 못합니까? 집착을 버리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3. 희생해야 합니다
예수님이 한 알의 밀 알이 되어 죽어짐으로 세상에 많은 사람들이 영생을 얻고 구원받게 된 것 같이, 희생하려는 사람이 있어야 많은 사람을 살리고 복되게 할 수가 있습니다. 본문에서 예수님은 십자가에 죽으시는 고난의 때를 영광을 얻을 때라고 하셨습니다. 희생(犧牲)의 생활이 곧 남도 살리고 자기도 영화롭게 되는 길입니다.
자기의 이익만 생각하고 희생하거나 헌신할 줄 모른다면 나도 죽고 남도 죽는 것입니다. 자기를 희생하고 헌신하려는 사람이 있을 때 그 가정, 단체, 사회, 나라, 교회가 삽니다.
스코틀랜드의 의료(醫療) 선교사(宣敎師)였던 리빙스턴이 아프리카에서 온갖 위험과 고생을 겪으면서 선교하다가 본국에 다니려 왔을 때 많은 사람들이 그의 희생적 생활을 칭찬하고 존경하는 말을 할 때에 리빙스톤은 “희생이 아니라 특권이라”고 말했습니다. 그리고 또 “하나님께 갚을 수 없는 빚을 진 사람이 복음을 전하기 위해 수고했다고 해서 무슨 희생이겠느냐 그것은 나의 특권입니다. 그리고 장차 받을 영원한 영광에 비하면 그것은 아무 것도 아니요, 예수님의 희생과 비교하면 결코 희생이라고 할 수 없습니다”라고 말했습니다.
리빙스톤의 희생은 인류에게 본을 보여준 사람입니다. 그를 통하여 아프리카의 수많은 영혼들이 구원을 받은 것입니다.
결 론(結 論)
많은 사람을 살리고 자기도 사는 길은 자기를 낮추고, 집착을 버리고 희생할 줄 아는 사람입니다. 우리는 어디서나 언제나 살리는 사람이 되시기를 주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의를 사모하십시다.
의를 사모하라
마5:6, 10~12
의에 주리고 목마른 자는 복이 있나니 저희가 배부를 것임이요, 의를 위하여 핍박을 받은 자는 복이 있나니 천국이 저희 것임이라 나를 인하여 너희를 욕하고 핍박하고 거짓으로 너희를 거스려 모든 악한 말을 할 때에는 너희에게 복이 있나니 기뻐하고 즐거워하라 하늘에서 너희의 상이 큼이라 너희 전에 있던 선지자들을 이같이 핍박하였느니라
마태복음 6장 33절에 “너희는 먼저 그의 나라와 그의 의를 구하라 그리하면 이 모든 것을 너희에게 더하게 하시리라”라고 했습니다.
1. 의는 신과 인간과의 율법을 지키는 일입니다
의는 우리가 하나님께 용납되는 조건이지만, 우리 인간에게는 하나님께 합당한 의가 없음으로 그리스도로 말미암아서만 주어지는 의를 힘입고 의롭다함을 받아야 합니다.
로마서 1장 17절에 “복음에는 하나님의 의가 나타나서 믿음으로 믿음에 이르게 하나니 기록된바 오직 의인은 믿음으로 말미암아 살리라”고 했으니, 본절은 로마서의 주제가 되는 동시에 기독교의 확신을 이루는 뜻이요, 이 뜻의 성격은 곧 하나님의 구원의 능력과 그 내용으로는 하나님의 의되신 예수 그리스도임을 나타냈습니다.
하나님의 의가 나타나야 한다고 했으니 곧 예수 그리스도이며,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죄인이 의인되고, 의인은 오직 예수그리스도를 믿음으로 말미암아 살게 됩니다.
그러므로 의는 단순히 어떤 추상적인 개념이 아니라 하나님과 그 분의 백성 사이에 맺어진 언약 관계를 전제로 하고 있으니, 이 언약은 어떤 사람이나 행위 또는 사물의 일정한 관계 속에서 인간 속죄가 이루어지는 것을 의미하는데 불완전하고 죄인 된 인간의 행위나 사물로는 불가능합니다.
또 의는 언약 공동체를 보존해야 될 책임이 있는 왕과 재판관들의 의무입니다(신 16:18-19). 이 공동체 내에 분쟁이 발생할 때에는 재판관은 반드시 의인 곧 의로운 자의 편에 서서 판결을 하고 스스로 변호할 수 없는 자들의 억울함을 풀어주어야 합니다(시 72:1-2).
하나님은 누구보다도 의로우신 분이십니다(사 24:16). 그분의 의로우신 행위로 그 분의 백성을 구원하심으로써 언약 관계를 유지했습니다(삿 5:1). 또한 하나님은 압박 당하는 자들의 억울함을 풀어주시고, 의로운 자들에게 공의를 베푸시고, 곤궁 중에 빠진 자들의 소원을 들어주십니다. 또 죄인이 회개 할 때 속죄하시고, 구원해 주시며 영생으로 인도하시는데, 의되신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이루어 주시는 하나님이십니다.
그러므로 바울은 고린도전서 1장 30절에서 그리스도는 우리의 의가 되신다 하셨고 또 하나님의 의에 대하여는 예수의 복음 안에서 나타내셨으며(롬 1:16-17), 예수를 인간에게 선물로 주셨습니다(롬 5:17). 사람의 의와 다른 하나님의 의는 인류구원을 위한 행위였으며,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구원을 ‘의의 한 행동’이라고 밝혔습니다(롬 5:18). 그러므로 성도는 하나님의 의가 되고, 의롭다 함을 얻게 되는 것이므로 성도는 의되신 예수그리스도를 주리고 목마름 같이 사모해야 합니다.
2. 하나님의 의를 구해야 합니다
“너희는 먼저 그의 나라와 그의 의를 구하라”(마 6:33)고 예수님이 말씀하셨습니다. 이것이 그리스도인들의 마땅한 삶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의가 무엇인지 알지 못하면 어떻게 구할 수가 있겠습니까? 그러므로 먼저 하나님의 의가 무엇인지 위에서 알아보았으나 다시 한번 더 이해해 보겠습니다.
예수님의 산상보훈을 기록한 마태복음 5장 10절을 보면 “의를 위하여 핍박받는 자는 복이 있나니 천국이 저희 것임이라”는 말씀이 나옵니다.
‘의’라고 하면 우리는 상식적으로 물질과 몸을 희생하면서 불쌍한 사람을 돕는 것 등을 생각할 수 있습니다. 그것이 의라고 한다면 우리는 예수님의 말씀 가운데서 이상한 점을 발견할 수 있게 됩니다.
‘의를 위하여 핍박받는다’고 했는데 누가 가난한 자, 소외된 자를 돌보는 일을 하는 사람을 싫어하고 핍박하겠습니까? 자기가 피땀 흘려 번 돈으로 학교도 짓고, 도서관을 세우며, 양로원 고아원을 세워서 헌납하는 자들을 누가 핍박하겠느냐 말입니다. 오히려 그를 칭찬하며 높힐 것입니다. 그렇다면 예수님이 말씀하신 의는 우리가 생각하는 의와 다르다고 봐야 될 것입니다. 그 의문을 풀기는 그리 어렵지 않습니다. 우리는 그 해답을 10절 바로 뒤에 나오는 말씀에서 찾을 수 있습니다.
“나를 인하여 너희를 욕하고 핍박하고 거짓으로 너희를 거슬려 악한 말을 할 때에는” (마 5:11, 12)
이 말씀가운데서 우리는 ‘의’가 예수 그리스도라는 사실을 알 수 있습니다. 예레미야 23장을 더 살펴보면 “나 여호와가 말하노라 보라 때가 이르리니 내가 다윗에게 한 의로운 가지를 일으킬 것이라 그가 왕이 되어 지혜롭게 행사하며 세상에서 공평과 정의를 행할 것이며 그의 날에 유다는 구원을 얻겠고 이스라엘은 평안히 거할 것이며 그 이름은 여호와 우리의 의라 일컬음을 받으리라”(5, 6절)고 하신 하나님의 약속의 말씀이 나오는데, 이것은 하나님께서 예수 그리스도를 이 세상에 보내실 것에 대한 이사야의 예언입니다. 이 말씀 속에 나오는 ‘의로운 가지’, ‘그 이름은 여호와 우리의 의’라고 지칭된 분이 곧 예수 그리스도이십니다. 예수 그리스도에 대하여 마태복음은 “아브라함과 다윗의 자손”(마 1:1)이라고 말씀하며, 예수님의 육신의 아버지 요셉에게도 “주의 사자가 현몽하여 가로되 다윗의 자손 요셉아”(마 1:20)라고 부름으로 예수님이 다윗의 자손임을 강조하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오직 너희가 그리스도의 고난에 참여하는 것으로 즐거워하라 이는 그의 영광을 나타내실 때에 너희를 즐거워하고 기뻐하게 하려 함이라”고 하신 대로 예수님의 이름을 위하여 핍박받고 욕을 먹을 때 기뻐하고 즐거워해야 합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위하여 핍박받는 자, 먼저 그 나라와 그의 의를 구하는 자는
1. 예수님께 인정 받습니다.
“누구든지 사람 앞에서 나를 시인하면 나도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 앞에서 저를 시인할 것이요 누구든지 사람 앞에서 나를 부인하면 나도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 앞에서 저를 부인하리라” (마10:32,33)
2. 영생합니다.
“그가 와서 죄에 대하여, 의에 대하여, 심판에 대하여 세상을 책망하시리라 죄에 대하여라 함은 내가 아버지께로 가니 너희가 다시 나를 보지 못함이요 심판에 대하여라 함은 이 세상 임금이 심판을 받았음이니라” (요16:8-11)
인간은 하나님과 사이에 죄악의 담이 막힘으로 고통을 당하게 되었고 하나님의 형상이 상실되어 성령이 떠나게 되었습니다. 그러나 예수께서 이 세상에 오셔서 십자가의 고난을 통하여 하나님과 우리 사이에 막힌 담을 허물어 주시고 화목하게 해 주셨습니다. 그러므로 의되신 예수 그리스도를 믿으면 죄 사함 받고, 의되신 예수 그리스도를 믿으면 구원을 얻으며, 의되신 예수 그리스도를 믿으면 영생을 얻는 것이니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를 열심히 찾아야 합니다.
3. 하늘나라에서 상이 클 것입니다.
“나를 인하여 너희를 욕하고 핍박하고 거짓으로 너희를 거스려 악한 말을 할 때에는 너희에게 복이 있나니 기뻐하고 즐거워하라 하늘에서 너희의 상이 큼이라 너희 전에 있던 선지자들을 이같이 핍박하였느니라”
4. 세상 끝날까지 예수님과 함께 살게 됩니다.
“그러므로 너희는 가서 모든 족속으로 제자를 삼아 아버지와 아들과 성령의 이름으로 세례를 주고 내가 너희에게 분부한 모든 것을 가르쳐 지키게 하라 볼지어다 내가 세상 끝날까지 너희와 항상 함께 있으리라” (마 28:19, 20)
“이 첫째 부활에 참예하는 자들은 복이 있고 거룩하도다 둘째 사망이 그들을 다스리는 권세가 없고 도리어 그들이 하나님과 그리스도의 제사장이 되어 천년 동안 그리스도로 더불어 왕 노릇하리라”(계 20:6)
우리가 의를 위하여 핍박받고 욕을 먹어야 되는 의는 바로 예수 그리스도이십니다. 그분은 우리의 구세주로 우리의 영과 혼과 몸을 살리시는 분이시며, 그분에게는 축복이 있고, 질병에서 치료하는 능력도 있습니다.
그러므로 기독교인들은 특히 하나님의 나라와 그의 의를 구하는데 힘써야 할 것이며, 그렇게 할 때에 먼저는 우리 안에 하나님 나라가 건설되며, 나아가 우리 가정에, 사회에, 국가에, 전 세계에 하나님 나라가 건설될 것입니다. 그리고 궁극적으로 저 천국, 영원한 하나님의 나라에서 행복한 삶을 누리며 살 것입니다. 이것이 참된 축복이요, 인간의 궁극적 목표인 행복입니다.
뜻을 정한 다니엘
단 1:1-16
유다 왕 여호야김이 위에 있은 지 삼 년에 바벨론 왕 느부갓네살이 예루살렘에 이르러 그것을 에워쌌더니 주께서 유다 왕 여호야김과 하나님의 전 기구 얼마를 그의 손에 붙이시매 그가 그것을 가지고 시날 땅 자기 신의 묘에 이르러 그 신의 보고에 두었더라 왕이 환관장 아스부나스에게 명하여 이스라엘 자손 중에서 왕족과 귀족의 몇 사람 곧 흠이 없고 아름다우며 모든 재주를 통달하며 지식이 구비하며 학문에 익숙하여 왕궁에 모실 만한 소년을 데려오게 하였고 그들에게 갈대아 사람의 학문과 방언을 가르치게 하였고 또 왕이 지정하여 자기의 진미와 자기의 마시는 포도주에서 그들의 날마다 쓸 것을 주어 삼 년을 기르게 하였으니 이는 그 후에 그들로 왕의 앞에 모셔 서게 하려 함이었더라 그들 중에 유다 자손 곧 다니엘과 하나냐와 미사엘과 아사랴가 있었더니 환관장이 그들의 이름을 고쳐 다니엘은 벨드사살이라 하고 하나냐는 사드락이라 하고 미사엘은 메삭이라 하고 아사랴는 아벳느고라 하였더라 다니엘은 뜻을 정하여 왕의 진미와 그의 마시는 포도주로 자기를 더럽히지 아니하리라 하고 자기를 더럽히지 않게 하기를 환관장에게 구하니 하나님이 다니엘로 환관장에게 은혜와 긍휼을 얻게 하신지라 환관장이 다니엘에게 이르되 내가 내 주 왕을 두려워하노라 그가 너희 먹을 것과 너희 마실 것을 지정하셨거늘 너희의 얼굴이 초췌하여 동무 소년들만 못한 것을 그로 보시게 할 것이 무엇이냐 그렇게 되면 너희 까닭에 내 머리가 왕 앞에서 위태하게 되리라 하니라 환관장이 세워 다니엘과 하나냐와 미사엘과 아사랴를 감독하게 한 자에게 다니엘이 말하되 청하오니 당신의 종들을 열흘 동안 시험하여 채식을 주어 먹게 하고 물을 주어 마시게 한 후에 당신 앞에서 우리의 얼굴과 왕의 진미를 먹는 소년들의 얼굴을 비교하여 보아서 보이는 대로 종들에게 처분하소서 하매 그가 그들의 말을 좇아 열흘을 시험하더니 열흘 후에 그들의 얼굴이 더욱 아름답고 살이 더욱 윤택하여 왕의 진미를 먹는 모든 소년보다 나아 보인지라 이러므로 감독하는 자가 그들에게 분정된 진미와 마실 포도주를 제하고 채식을 주니라 하나님이 이 네 소년에게 지식을 얻게 하시며 모든 학문과 재주에 명철하게 하신 외에 다니엘은 또 모든 이상과 몽조를 깨달아 알더라 왕의 명한 바 그들을 불러들일 기한이 찼으므로 환관장이 그들을 데리고 느부갓네살 앞으로 들어갔더니 왕이 그들과 말하여 보매 무리 중에 다니엘과 하나냐와 미사엘과 아사랴와 같은 자 없으므로 그들로 왕 앞에 모시게 하고 왕이 그들에게 모든 일을 묻는 중에 그 지혜와 총명이 온 나라 박수와 술객보다 십 배나 나은 줄을 아니라 다니엘은 고레스 왕 원년까지 있으니라
다니엘서는 하나님의 선민 이스라엘이 범죄하여 바벨론에 의하여 예루살렘이 함락되고 많은 사람들이 죽임을 당하거나 포로로 끌려가 노예가 되었고, 예루살렘은 가난하고 비천한 자들만이 남은 황폐한 도시가 되었던 B. C. 589~539년 사이의 포로 시대에 바벨론에서 되어진 일입니다. 본서는 다니엘의 신앙 절개와 끊임없는 기도 생활, 그리고 하나님께서 주신 놀라운 계시들을 기록하고 있습니다.
1.성도의 원수는 죄입니다.
이스라엘은 하나님의 법도와 규례를 떠나 행악하였고, 패역하여 하나님을 반역하고 우상을 섬겼습니다. 그뿐 아니라 언약을 지키시고 인자를 베푸시는 하나님께서 많은 선지자들을 그들에게 보내어 회개하고 돌아오도록 권면하고 경고하였으나 다 죄악으로 치우쳐 주의 목소리를 청종치 아니하고 끝내는 거역하므로 하나님은 주전 605년 범죄한 유대를 바벨론왕 느부갓네살에게 붙이셨습니다(단 9:4~6, 11).
하나님을 떠난 유다는 바벨론의 침략을 받았고 전쟁에 패하게 되자 유다의 왕 여호야김은 쇠사슬로 결박당하여 바벨론으로 끌려가는 신세가 되었습니다(대하 36:6). 그 뿐 아니라 예루살렘의 모든 백성과 방백들과 용사 일만 명과 또 공장과 대장장이를 사로잡아 가매 빈천한 자 외에는 그 땅에 남은 자가 없었으며(왕하 24:14), 예루살렘 성전도 그들에게 부쳐져 성전의 기명들까지 다 빼앗겼습니다. 이와 같이 죄를 범하면 하나님께서는 사랑하는 자라도 징계하십니다. 또한 하나님의 성전이라도 하나님의 뜻에 합당치 않을 때에는 돌아보지 않으시고 버리십니다. 성도의 원수는 죄입니다. 죄는 우리를 악한 사단의 포로가 되게 하고 우리를 비참하게 만듭니다.
2. 사단은 좋은 조건으로 성도를 유혹합니다.
바벨론은 모든 속국들을 바벨론화 시키려는 정책을 썼는데, 그 일환으로 왕족과 귀족의 자제들 중 똑똑한 이들을 뽑아 바벨론 다니엘과 그의 세 친구, 즉 하나냐와 미사엘과 아사랴라고 하는 소년들이 뽑힌 소년들 중에 있었습니다. 뽑힌 소년들은 왕의 특혜를 받아 왕궁에서 3년 동안 왕이 먹는 진미를 먹으며, 그 때 당시에 최고의 학문이었던 갈대아 학문을 배울 수 있었고, 그 학문을 다 배운 후에는 왕 앞에 서게 되는 출세가 보장된 길이었습니다. 그들을 바벨론화 하려는 시도로 먼저 그들의 이름을 바꾸었는데, ‘하나님은 나의 재판관’이라는 뜻의 이름을 가진 다니엘은 바벨론의 주신(主神)인 벨의 이름과 관련된 ‘벨이여 그의 생명을 보존하소서’라는 뜻을 가진 이름 ‘벨드사살’로, ‘주 여호와는 은혜로우시다’라는 뜻을 가진 하나냐는 ‘하나님과 같으신 이가 누구 신가?’라는 뜻의 미사엘, ‘여호와는 돕는 자 이시다’라는 이름을 가진 아사랴를 각각 사드락(월신의 명령), 메삭(므로닥 같은 이가 누구인가?), 아벳느고(느보의 종)라는 이름을 지어 주었습니다.
이와 같이 여호와께 대한 이름들을 자기들의 신의 이름으로 다 고쳐 놓으므로 하나님의 사람을 바벨론 사람으로, 우상의 사람으로 만들려고 하였던 것입니다. 이것은 신앙적으로 큰 시험입니다. 지금도 마귀는 성도들에게 세상의 좋은 조건들을 주고 조금씩 자기의 노예로 만듭니다. 한가지를 양보하면 또 한가지를 요구하고, 약간의 더럽힘을 묵인하면 마귀는 차츰 차츰 온몸을 더럽게 만들어 버립니다. 성도는 신앙 양심이 더러워지지 않아야 합니다. 바울 사도는 사랑하는 믿음의 아들 디모데에게 보낸 편지에서 “청결한 양심으로 조상적부터 섬겨 오던 하나님께 감사”(딤후 1:3下)한다고 말함으로 하나님을 섬기는 자는 청결한 양심으로 살아야 함을 가르치고 있습니다.
3. 뜻을 정한 다니엘
바벨론의 포로로 잡혀 온 다니엘과 세 친구들은 비록 바벨론 사람들의 음식을 먹었고, 바벨론의 의복을 입고, 바벨론 사람들과 함께 살았지만 그들이 섬기는 신앙만은 따르지 않았습니다. 창조주 하나님 여호와 한 분만을 섬기면서 그의 뜻을 따르며 순종하기로 뜻을 정했습니다. 우리 역시 성도가 되었다고 해서 어느 구별된 장소에서 성도만이 사는 천국의 생활을 하는 것이 아니라, 세상에서 다른 모든 사람들과 함께 살아야 합니다. 사회 생활을 같이 해야 하기 때문에 세상 사람들이 돈을 벌 때 우리도 벌어야 하고, 그들이 입을 것을 입을 때 우리도 그들과 같이 입어야 하고, 먹는 음식도 같이 먹어야 됩니다. 그러나 그들과 같이 하지 말아야 할 것이 있습니다. 그들은 귀신을 섬기고 세상에서 물질을 섬기는 사람들이기에 우리 성도들은 창조주 하나님을 섬기는 믿음을 빼앗겨서는 안됩니다. 다니엘과 그의 세 친구들은 기름진 왕의 진미를 먹는 특혜를 받았지만 그것이 먼저 우상 앞에 놓여졌던 음식이었으므로 우상 제물로 자신들을 더럽히지 않기 위해서 그것을 먹지 않기로 작정하고 책임자인 환관장에게 고하게 됩니다. 환관장의 답변에 다니엘은 다시 자기네들의 뜻을 이야기합니다(1:10, 12~13).
믿음에 근거하여 자신 있는 말입니다. 인간의 몸을 시험하는데는 십일 동안이 고비라고 합니다. 먹고 싶은 욕구와 빈속이기 때문에 당하는 고통 등 십일 동안은 많은 어려움을 느끼지만 그 후에는 음식 냄새에도 초연해질 수 있습니다. 요한 계시록에 마귀가 서머나 교회 중 몇 사람을 옥에 던져 10일 동안 시험을 받게 하는데, 그 10일은 로마 네로 황제로부터 데오 트리시안 황제까지 10황제의 핍박이 아닌가 합니다(계 2:10). 비록 10일 동안의 시험이 어렵다하나 믿음을 지키려는 자에게 하나님은 역사하여 주시며, 자신의 깨끗함을 지키려는 자들에게 하나님은 반드시 길을 열어 주십니다. 믿음의 조상 아브라함도 깨끗하고자 우상의 도시를 떠났고, 위대한 지도자 모세도 하나님의 뜻대로 살고자 공주의 아들의 지위와 애굽의 죄악의 낙을 버리고 하나님의 백성과 함께 고난받기를 즐겨 했습니다. 지위, 재물, 학문, 즐거움, 명예는 물론이고 잘못하다가는 목숨까지도 버려야 했지만, 하나님의 뜻대로 살기로 작정한 다니엘과 세 친구들에게 하나님은 환관장을 통하여 은혜를 입게 하셨습니다.
우리의 생활 가운데서 우리로 하여금 하나님의 뜻대로 살지 못하게 하는 조건들이나 요인은 없습니까? 우리 자신들을 돌아보고 살펴보며 깨끗케 하고자 한다면 하나님께서 반드시 길을 열어주시며 역사하실 것입니다.
드디어 환관장의 허락이 떨어져 다니엘과 하나냐와 미사엘과 아사랴에게 십일간의 시험기간이 주어졌습니다. 그리고 믿음으로 하나님의 뜻을 자기들의 뜻으로 정하고, 최선을 다해서 이 뜻을 지키며, 십일이라는 시험의 기간에서 승리한 이들에게 하나님은 놀랄 만한 축복을 해 주셨습니다.
“볼지어다 내가 네 앞에 열린 문을 두었으되 능히 닫을 사람이 없으리라 내가 네 행위를 아노니 네가 적은 능력을 가지고도 내 말을 지키며 내 이름을 배반치 아니하였도다”(계 3:8)
4. 뜻을 정한 결과
1. 놀랄 만한 학문을 얻게 하셨습니다(17절)
가장 좋은 은사와 온전한 선물이 다 위로부터 빛들의 아버지께로서 내려오는 것입니다(약 1:17). 하나님이 네 소년에 지식을 얻게 하시며, 모든 학문과 재주에 명철하게 하셨으므로 그 지혜와 총명이 바벨론의 모든 하수와 술객보다 십 배나 나은 것을, 왕이 그들에게 모든 일을 묻는 중에 드러나게 되었습니다(단 1:17, 20). 축복이 어떤 것이든 간에 하나님께로부터 축복을 받는 비결은 모두 같습니다.
하나님께서 이렇게 해 주시면 그 중에서 얼마를 드리겠다는 것, 즉 ‘주시면 하겠습니다’ 식의 물질관이 아닙니다. 구원해 주신 은혜뿐만 아니라 모태에서 적신으로 나온 내게 하나님은 얼마나 많은 것을 주셨습니까? 내가 열심히 일해서, 지혜를 짜내서, 노력을 해서 이룬 것 같지만 “네 하나님 여호와를 기억하라 그가 네게 재물 얻을 능을 주셨음이라”(신 8:18)고 하심같이 하나님께서 재물 얻을 능을 허락해 주신 은혜인 것입니다. 아브라함, 욥, 다윗 등 성경의 위대한 믿음의 사람들은 현재 있는 여건과 위치에서 하나님께 먼저 드리는 신앙을 가졌습니다. 그러므로 이들은 물질의 풍성함을 누리도록 하나님의 축복을 받았습니다.
오늘 우리는 이러한 믿음을 가져야 됩니다. 이미 우리는 하나님께 셀 수 없이 많은 축복을 받은 사람입니다. 믿음의 사람은 죄악 가운데 나서 죄 가운데 살다가 영원히 지옥 형벌을 받을 수밖에 없는 중에서 구원해 주신 것 한가지만 해도 우리의 모든 것을 드리는데 더 이상의 조건이 필요하지 않다는 것을 알기에 하나님 제일주의로 살게 되는 것입니다. 현재 내게 주신 여건과 환경을 감사하면서, 지금 이 자리에서 이곳에서 ‘최선을 다해 하나님 일을 하겠습니다’라고 하는 믿음의 생각은 차원이 다른 것이고, 생각이 다른 것이고, 계산이 다른 것입니다.
다니엘과 사드락과 메삭과 아벳느고에게 주어진 비상한 능력과 학문의 성취는 오직 하나님의 은혜로 된 것이었습니다. 다니엘과 3친구들은 선조들의 죄 때문에 나라를 잃고 바벨론 나라에 포로가 되어 왕족으로, 귀족으로 누리는 명예와 재산, 모든 즐거움을 박탈당하고 종노릇하고 사는 이들이었지만, 포로된 자리에서도 하나님 앞에 신앙으로 섰을 때 모든 사람 위에 뛰어난 지혜와 학식을 주셨던 것입니다.
“하나님이 그 기뻐하시는 자에게는 지혜와 지식과 희락을 주신다”(전 2:26上)함과 같이, 우리의 정신도 그것을 만드신 하나님께로 말미암는 것이며, 그에 다른 지혜와 지식도 하나님께서 주시는 것입니다. 많은 시간을 책과 씨름한다고 해서 그가 일들을 하는 것이 아니며, 지혜로운 사람이 되는 것도 아닙니다. 오직 다니엘과 같이 하나님의 뜻을 곧 내 뜻으로 정하고 살므로 하나님의 기뻐하심을 입는 자라야 하는 것입니다.
“영원 무궁히 하나님의 이름을 찬송할 것은 지혜와 권능이 그에게 있음이로다. … 지혜자에게 지혜를 주시고 지식자에게 총명을 주시는도다”(단 2:20, 21)라는 다니엘의 체험적 찬양이 바로 여러분의 고백이 되시기를 축원합니다.
2. 이상과 몽조를 깨달아 알 수 있는 축복을 주셨습니다.
“너희 중에 선지자가 있으면 나 여호와가 이상으로 나를 그에게 알리기도 하고 꿈으로 그와 말하기도 하거니와”(민 12:6)
하나님께서는 하나님의 뜻과 계획을 때때로 이상과 몽조로 나타내십니다. 그리고 하나님의 사람을 통하여 그 말씀을 잘 해석할 수 있는 은혜를 주십니다. 애굽에 팔려간 요셉은 어려서 꿈을 통해 자신의 장래를 보았고, 하나님께서 주신 신적인 지혜와 능력으로 꿈속에서 계시된 하나님의 계획과 뜻을 알았습니다. 애굽 왕 바로가 “너는 꿈을 들으면 능히 푼다더라”(창 41:15下)고 하며 해몽할 것을 청하자, 요셉은 “이는 내게 있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바로에게 평안한 대답을 하시리이다”라고 대답하므로 꿈과 이상을 주시는 분이 하나님이심을 말하였습니다. 다니엘 역시 느부갓네살 왕의 이상을 알지 못하여 죽음에 직면하게 되자, 3친구들에게 “하늘에 계신 하나님이 이 은밀한 일에 대하여 긍휼히 여기사 자기 다니엘과 동무들이 바벨론의 다른 박사와 함께 죽임을 당치 않게 하시기를 그들로 구하게 하므로”(단 2:18) 하나님께서 이상을 보여주셨습니다. 하나님이 주신 이상과 몽조를 얻는 자는 복된 자입니다. 이들은 축복의 근원이 어디며, 축복 받은 성도가 무엇을 해야 된다는 것을 바로 압니다. “각각 은사를 받은 대로 하나님의 각양 은혜를 맡은 선한 청지기같이 서로 봉사하라”(벧전 4:10)
성도는 요셉처럼 다니엘처럼 하나님께로부터 받은 은사를 따라서 살아가야 합니다. 세상의 지식, 세상의 어떤 경험, 이것을 중요시해서 살아가는 신자가 아니라 각자가 받은 은사대로, 받은 그 은혜대로 봉사할 기회와 의도를 가지고 힘써 하나님을 섬겨야 할 것임을 명심해야 합니다.
3. 총리의 위치에 서게 되었습니다.
받은 은사가 크면 클수록 더 겸손한 사람이 되어야 합니다. 겸손한 자를 하나님은 높이신다고 분명히 말씀하셨습니다. 요셉이 꿈을 해석하는 자는 자기가 아니라 하나님임을 애굽의 왕 바로 앞에 증거 하였을 때 바로는
“이와 같이 하나님의 신에 감동한 사람을 우리가 어찌 얻을 수 있으리요 하고 요셉에게 이르되 하나님이 이 모든 것을 네게 보이셨으니 너와 같이 명철하고 지혜있는 자가 없도다”(창 41:38, 39)하고 요셉을 애굽의 총리로 삼았습니다. 다니엘 역시 “왕이 물으신 바 은밀한 것은 박사나 술객이나 박수나 점쟁이가 능히 왕께 보일 수 없되 오직 은밀한 것을 나타내실 자는 하늘에 계신 하나님이시라”(단 2:27, 28上)고 하므로 이러한 이상과 꿈을 주시고, 알게 하시는 이가 오직 하나님 한 분뿐임을 증거하였습니다.
은사를 선물로 받은 성도들이여! 아무쪼록 겸손하시기 바랍니다. 그리고 하나님의 이름만을 나타내며 높이시기를 바랍니다. 다니엘과 그 세 친구의 지혜와 총명은 바벨론 나라 모든 박수와 술객들보다 10배나 더 나았다(20절)고 했습니다. 그 중에서도 다니엘은 모든 이상과 몽조를 깨달아 알았다고 했으니, 바벨론 온 나라에 그를 따를 자가 아무도 없었습니다. 요셉과 다니엘 간에는 서로 비슷한 점이 많습니다. 이들은 자기를 드러낼 좋은 기회, 자기가 출세할 기회, 신분이 바뀔 수 있는 기회에 자신들을 드러내지 아니하고, 오직 하나님을 드러내므로 하나님을 알지도 믿지도 않는 이방 왕들로 하여금 하나님께 영광 돌리게 하였습니다. 하나님은 그런 그들에게 그들이 포기한 모든 것 위에 더하여 더 크고, 더 좋으며, 더 많은 것으로 축복해 주셔서 자기 민족을 위하여 큰일을 감당케 하고, 자기의 가문을 구원케 하고, 이스라엘 역사의 한 페이지를 남기게 하셨습니다.
하나님의 뜻대로 살기 위하여 죽음을 각오하였더니, 도리어 일생을 건강하게 장수와 형통의 축복을 주셨습니다. 바벨론 멸망 후에도 하나님은 적은 능력을 가지고도 하나님의 뜻을 따라 산 다니엘, 하나냐, 미사엘, 아사랴에게 이방 땅 바벨론에서도 이처럼 축복해 주셨던 것입니다(단 6:28).
“이 다니엘이 다리오 왕의 시대와 바사 사람 고레스왕의 시대에 형통하였더라”
적은 능력이란 우리의 있는 힘 전체를 말합니다. 우리의 능력이 비록 적고 약하지만 최선을 다하여 시험을 이기고자 한다면 하나님께서는 영적 육체적 힘을 주시고 심령에 생명의 빛을 주시므로 우리로 승리케 하실 뿐만 아니라 더욱 더 아름답고 윤택하며 잘 되는 축복을 주실 것입니다.
그 아홉은 어디에 있느냐?
눅17:11~19
예수께서 예루살렘으로 가실 때에 사마리아와 갈릴리 사이로 지나가시다가 한 촌에 들어가시니 문둥병자 열 명이 예수를 만나 멀리 서서 소리를 높여 가로되 예수 선생님이여 우리를 긍휼히 여기소서 하거늘 보시고 가라사대 가서 제사장들에게 너희 몸을 보이라 하셨더니 저희가 가다가 깨끗함을 받은지라 그 중에 하나가 자기의 나은 것을 보고 큰 소리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며 돌아와 예수의 발 아래 엎드리어 사례하니 저는 사마리아인이라 예수께서 대답하여 가라사대 열 사람이 다 깨끗함을 받지 아니하였느냐 그 아홉은 어디 있느냐 이 이방인 외에는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러 돌아온 자가 없느냐 하시고 그에게 이르시되 일어나 가라 네 믿음이 너를 구원하였느니라 하시더라
감사를 모르는 시대입니다.
예수님께서 이 마지막 시대의 형편을 말씀하시면서 ‘무관심한 때’인 것을 지적하셨습니다. 피리를 불어도 춤추지 않고 애통하여도 울지 않는다고 하셨습니다(눅 7:32). 이처럼 남의 일에 무관심한 것이 마지막 시대의 한 특징입니다. 특별히 말세의 형편을 보면 사람들이 감사하지 아니하며 또 무정하다고 했습니다. 그러니까 예수님이 말씀하신 무관심(無關心), 무감각(無感覺), 무정(無情) 이런 것이 마지막 때의 형편인 것입니다.
고통스럽고 어려울 때는 하나님을 찾아 기도하고, 신앙생활을 바로 하려고 노력도 하지만 그 어려운 문제가 해결되고 형편이 좋아지면 언제 그랬느냐 싶도록 믿음이 식어지고 감사를 잊어버리는 것이 우리 인간의 모습이 아닌가 합니다. ‘원수는 돌에 새기고 은혜는 물에 새긴다’는 말처럼, 우리 인간은 섭섭한 일은 늘 기억하고 받은 바 은혜에 대해서는 쉽게 잊어버리고 삽니다.
누가복음 17장 11~19절의 말씀을 보면 예수님으로부터 고침을 받은 열 명의 문둥병자 이야기가 기록되어 있습니다. 열 명의 나환자가 다 불치의 병으로부터 고침을 받았지만, 오직 한 사람만 예수님께 나아와 감사할 뿐 아홉 사람은 보이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 말씀하십니다. “그 아홉은 어디 있느냐?” 다같은 은혜와 긍휼을 입었음에도 불구하고 감사할 줄 아는 사람은 이처럼 극히 소수에 불과합니다. “그 아홉은 어디 있느냐?” 이것은 서두에서 언급한 것처럼 감사의 마음을 상실한 오늘 우리가 살고 있는 시대를 향하여 예수님께서 심히 섭섭하며 하시는 말씀인 줄 압니다. 이런 관점에서 오늘 본문을 통하여 우리의 모습을 돌아보며 진정 감사할 줄 아는 성도들이 되어야 하겠습니다.
고통 가운데 있는 인생입니다.
11절과 12절을 보면 고통 가운데 있는 인생의 모습이 나옵니다. 문둥병은 지금도 고치기 어려운 무서운 불치의 병입니다. 이보다 더 큰 고통의 질병도 없는 줄 압니다. 이 문둥병이라는 말 자체가 고통의 상징이고 쓰기 거북한 말이기 때문에 별도로 ‘한센(Hansen)병’이라는 용어를 씁니다만, 안타깝게도 코가 떨어져 나가고 손목이 떨어져 나가는 병입니다. 그래서 나환자 마을에 가서 예배를 드리다 보면 손으로 박수를 칠 수가 없어서 손목으로 박수를 칩니다. 손바닥이 온전한 우리들은 더욱 감사한 마음으로 찬송을 많이 해야 하겠습니다.
구약을 보면 나환자들은 공동체로부터 격리하여 살아야 할만큼 소외감과 고통을 겪습니다. 레위기 13장 45, 46절을 보면 홀로 살도록 했습니다. 동네 안에서도 살 수 없고 가족과도 살 수 없다고 했습니다. 멀리 동네 밖 또는 산골짜기에서 살게 되어 있는데, 혹시 이것을 모르고 사람이 오면 가까이 오지 못하도록 경고해야 합니다. 금방 알아 볼 수 있도록 머리를 풀어헤치고 옷을 찢고 있어야 했습니다. 그래도 사람들이 알아보지 못하면 나환자는 윗입술을 가리고 큰 소리로 ‘부정하다, 부정하다’고 소리를 질러야 합니다.
첫째로, 예수님께 부르짖어야 합니다.
이처럼 철저히 소외당하고 멸시당하며 동네에서도 살지 못하고 가족들로부터도 버림받은 문둥병자 열 명이 예수님을 만나게 된 것입니다. 그러나 그들은 예수님께 쉽게 접근할 수 없었습니다. 12절에 보니까 문둥병자 열 명이 ‘예수를 만나 멀리 섰다’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인류의 구원자이시고 치료자이신 예수님을 만나고도 가까이 나아갈 수 없는 것이 고통당하는 문둥병자의 현실이었습니다. ‘문둥병’을 히브리어로 ‘차라아트(ת)’라고 하는데, 이 말은 ‘몹시 괴로움’, 또는 ‘매’(棍杖), ‘징계’의 뜻을 포함하고 있습니다. 구약 성경은 죄에 대한 하나님의 징계로 이 병에 걸리는 것으로 묘사하고 있습니다(민 5:1~4; 왕하 5:20~27). 미리암과 게하시, 그리고 웃시야 왕의 경우가 그렇습니다. 죄지은 사람의 추한 모습을 문둥병에 비유하고 있는데, 이 병이 고칠 수 없는 불치의 병이듯이 인간이 스스로 아무리 노력하여도 해결할 수 없는 것이 바로 죄라는 가장 무섭고도 고통스러운 질병입니다. 수다한 잿물을 쓰고 비누를 써도 씻을 수가 없습니다.
인간에게 영원한 형벌을 가져온 죄는 대속의 주되시는 예수 그리스도 외에는 해결할 길이 없습니다. 예수님만이 인간을 죄로부터 해방하시고 믿는 자에게 구원과 영생을 주십니다. 불치의 환자인 문둥병자들이 이 예수님을 만난 것입니다. 13절을 보니까 이들은 소리를 높혀 “예수 선생님이여, 우리를 긍휼히 여기소서”라고 간절히 예수님을 부르고 있습니다.
가장 큰 고통의 질병에 처한 문둥병자들이 간절히 예수님을 찾듯이, 죄악이라는 가장 큰 고통에 처한 인생들은 누구나 예외없이 예수님을 찾아야 합니다. 그렇습니다. 고통 중에 있을 때는 예수님을 찾아 기도할 때입니다. 야고보서 5장 14절에 “너희 중에 병든 자가 있느냐 … 저는 기도할 것이라”고 했습니다. 시편 50장 15절에도 “환난 날에 나를 부르라”고 했습니다. 환난이 있고, 고통이 있고 또 병들고 직장과 가정에 어려움이 있을 때는 바로 기도할 때입니다. 열 명의 문둥병자들은 불치의 병이 들고 가족과도 떨어져 있어야 하는 고통과 고독 속에서 소리 높여 “예수, 선생님이시여, 우리를 불쌍히 여기소서, 우리를 불쌍히 여기소서”하고 간구했습니다.
어려움을 당할 때 예수님을 찾아 기도할 수 있다는 것은 하나님께서 인간에게 주신 축복입니다. 특별히 신자들에게 주신 크나큰 특권이 아닐 수 없습니다. 우리도 고통 중에 예수님께 나아와 부르짖은 문둥병자들처럼 부지런히 기도해야 하겠습니다.
둘째로, 부르짖을 때 예수님은 응답하십니다.
오늘 본문을 통해 배울 수 있는 두 번째 교훈은 ‘예수님은 응답하시는 분’이라는 사실입니다. 또한 예수님이 말씀하실 때에 우리는 순종해야 된다는 사실입니다. 14절에서 “보시고 가라사대 가서 제사장들에게 너희 몸을 보이라 하셨더니 저희가 가다가 깨끗함을 받은지라”고 진술합니다.
레위기 13장과 14장을 보면 구약시대에 문둥병자들은 제사장의 진단을 받도록 되어 있습니다. 혹시 피부병인지도 모르기 때문에 여러 가지로 진단하는 방법을 하나님께서 가르쳐 주셨습니다. 살이 오목하고 색깔이 변하고 털 색깔이 희어지면 이는 문둥병이니 부정함으로 그를 내어쫓으라고 합니다. 며칠 후에 다시 봐서 그 문둥병을 재진하는 법도 있고, 혹 나았을 때는 어떻게 예물을 드리라는 규정이 자세히 기록되어 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열 명의 문둥병자가 찾아와 간구할 때에 “너희는 제사장들에게 가라”로 했습니다. 한 명이었다면 제사장에게 가라고 했을 것인데, 아마도 열 명이 다 고향이 다르고 거처하는 곳이 달랐던 모양입니다. “제사장들에게 가서 너희 몸을 보이라.” 매우 어려운 명령을 하셨습니다. 쉬운 것 같으면서도 어려운 것은, 병이 나았다는 확신이 있어야 제사장을 찾아가는 법이기 때문입니다. 여전히 진물이 흐르고, 역한 냄새가 나고, 상처투성이인데 그런 상태에서 제사장을 찾아가 몸을 보이는 것은 믿음이 없으면 불가능한 일입니다.
성경을 통하여 볼 때 신앙이란 절대적인 순종에 근거합니다. 하나님께서 일찍이 아브라함에게 약속하신 젖과 꿀이 흐르는 땅 가나안을 주겠다고 약속하셨고 마침내 그의 후손들이 그 땅을 얻게 되었습니다. 우리는 이스라엘 백성들이 그 땅에 들어가는 것을 보면서 ‘이것이 믿음이구나’하고 깨닫게 됩니다. 봄이 되어 헐몬산의 눈이 녹아 요단강이 넘쳐흐릅니다. 언덕까지 물이 넘실거립니다. 그때에 내리신 하나님의 명령은 제사장들이 옷을 입은 채로 법궤를 메고 앞장 서서 강물에 들어가라고 합니다. 이 때 제사장들이 하나님의 말씀대로 순종했더니 물이 발에 닿는 순간 물이 물러갔습니다. 할렐루야! 그래서 하나님의 백성들은 마른 땅을 밟고 요단강을 건넜습니다. 이처럼 믿음은 순종을 전제로 하고 있습니다. 본문의 문둥병자들도 참으로 믿기 어려운 상황 속에서 예수님의 명령에 순종하였습니다. 먼저 병을 고쳐 주시던가, 아니면 기도라도 해 주시던가 했으면 좋을 터인데 다만 “가서 너희 몸을 제사장들에게 보이라”는 말씀뿐입니다. 그러나 이들은 순종했습니다. 예수님의 말씀을 믿었습니다. 이처럼 순종하는 믿음이 기적을 가져옵니다. 믿고 순종하면서 가던 중에 병 나음을 얻은 것입니다. 이것이 하나님의 역사요 응답입니다. 우리가 본문의 병인들처럼 믿고 순종할 때에 하나님은 응답하십니다. 우리도 믿고 순종함으로 하나님의 응답을 체험하면서 삽시다.
셋째로, 받은 은혜에 감사해야 합니다.
15절 이하에 보면 참으로 놀라우면서도 실망스러운 광경이 묘사되어 있습니다. “그 중에 하나가 자기의 나은 것을 보고 큰 소리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며 돌아와 예수의 발 아래 엎드리어 사례하니 저는 사마리아인이라”
실망스러운 것은 열 명 중 단 한 명이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며 예수님께 감사했다는 사실 때문입니다. 반면에 놀라운 것은 그 한 명이 당시로서는 비천한 사마리아인이었다는 사실입니다. 서두에서 말씀 드린 대로 이것이 감사에 인색한 우리 인간의 실상인 것입니다. 또한 우리의 신분이 대단해서 구원받은 것이 아니라 당시 유대인들에게 괄시받던 사마리아인 같은 우리들이 예수님의 은혜를 입었다는 사실을 배울 수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섭섭하셔서 말씀하십니다. “열 사람이 다 깨끗함을 받지 않았느냐 그 아홉은 어디 있느냐?”고 말입니다. 계속해서 말씀하십니다. “이 이방인 외에는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러 돌아온 자가 없느냐?” 우리는 여기서 우리가 한 사람의 이방인처럼 하나님 긍휼을 입을 자격이 없는 존재라고 생각할 때 더 큰 감사가 있는 것입니다.
페르시아에 사미아라는 시인이 있었다고 합니다. 이 시인은 하나님께 감사를 잘 하기로 이름이 나 있었습니다. 그런데 하루는 불평이 생겼습니다. 신발이 헤어져 신을 수 없는데 새로 살 돈이 없었습니다. 그래서 투덜거리며 걸어가고 있는데 한 사람이 땅바닥을 뭉게며 몸을 움직이고 있었습니다. 자세히 보니까 신발을 신기는 했지만 발을 사용할 수 없어서 두 손을 사용해서 땅바닥을 기고 있는 것이었습니다. 그때 사미아는 성한 두 다리를 두고도 단지 신발이 없다는 이유만으로 불평한 자신이 크게 부끄러웠다고 합니다.
빌립보서 4장 11절을 보면 사도 바울은 “나는 어떠한 형편에서든지 자족하기를 배웠다”고 했습니다. 진정한 감사는 어떤 환경에서든지 하는 것입니다. 우리가 잘 아는 예화지만 언제나 감동을 주고 있습니다. 독일의 어느 크리스천이 불행하게도 혀암(舌癌)에 걸려 끝내 혀를 절단하지 않으면 안될 지경이 되었습니다. 집도하는 의사가 물었습니다. “혀를 잘라내기 전에 마지막으로 할 말이 있습니까?” 그때 이 크리스천은 이렇게 대답했다고 합니다. “예수님, 감사합니다.” 지독한 불행과 고통의 극한 속에서도 감사하는 것이 진정한 감사입니다. 우리도 이러한 감사의 사람이 되어야 하겠습니다. “그 아홉은 어디 있느냐?” 예수님은 지금 우리에게 묻습니다.
◆ 말씀을 정리합니다. 우리는 무정하고 감사가 메말라버린 시대를 살고 있습니다. 큰 은혜를 받았건만 감사할 줄 몰랐던 아홉 명의 무심한 심정이 오늘의 세대와 같습니다. 이러한 때일 수록 예수님께 돌아와 감사한 문둥병자였던 한 사람과 같이 우리도 감사의 성도가 되어야 하겠습니다. 올해도 하나님의 은혜가 풍성한 추수감사절을 맞이했습니다. 한사람의 사마리아인처럼 진정한 감사의 사람이 됩시다. 기독교 시인 황금찬 선생의 시가 생각납니다.
“어머니는 배추 두 포기를 이시고/ 나는 작은 지게에다 무우 두 뿌리를 지고/ 10리도 넘는 길을 걸어/ 추수감사절 예배에 참석했다. / 색깔 고운 과실과/ 살찐 배추와 무우,/ 수수 이삭이며 조 이삭도/ 모두 탐스럽게 강단 위에 진열되어 있다./ 그 중 우리가 드린 배추와 무우가/ 가장 여위어 보였다./ 어머니와 나는 부끄러워/ 한나절 예배가 끝날 때까지/ 머리를 들지 못했다./ 예수님은 모든 것 주셨는데/ 지금 나는 왜 있는 것을/ 모두 드리지 못할까/ 순수한 그 마음, 그때로 돌아가고 싶다.“
“너희 구원을 이루라”
빌 2:12
그러므로 나의 사랑하는 자들아 너희가 나 있을 때뿐 아니라 더욱 지금 나 없을 때에도 항상 복종하여 두렵고 떨림으로 너희 구원을 이루라 (빌 2:12)
- 사중복음을 중심으로 -
구원의 교리를 바로 알고 확신을 가져야 합니다.
“그러므로 나의 사랑하는 자들아 너희가 나 있을 때 뿐 아니라 더욱 지금 나 없을 때에도 항상 복종하여 두렵고 떨림으로 너희 구원을 이루라”
구원은, 이미 받았으나 지금도 받아야 하고 앞으로도 받아야 하는 여러 단계의 구원이 있습니다. 우리 성결교회의 중심교리인 사중복음(四重福音, Four-fold Gospel)은 이러한 구원의 전 과정과 그 중요성을 잘 설명해 주고 있습니다.
본문 말씀 중 ‘너희 구원을 이루라’고 한 것을 문자적으로 해석하면 혹 어떤 이는 “아직 나는 구원을 못 받았단 말인가?”하고 낙심할지 모릅니다. 그러나 사중복음 곧 중생(重生), 성결(聖潔), 신유(神癒), 재림(再臨)에 대하여 올바르게 알면 과거의 구원, 현재의 구원, 미래의 구원이라는 서로 다른 시점의 구원이 있고 다른 국면의 구원이 있음을 알 수 있습니다. 그리하여 성도로서 구원의 확신을 갖게 되고 아직 예수 그리스도를 믿지 않는 사람이나, 믿더라도 구원의 확신이 없는 사람에게 복음을 바로 전할 수 있게 됩니다.
우리들이 예수님을 믿는다고 하면서도 쉽게 낙심하다가 세상의 유혹을 받는 것은 구원의 확신이 없기 때문입니다. 요한 일서 5장 13절을 보면 그 당시 소아시아 지방에 살던 신자들도 구원의 확신이 부족했던 것 같습니다. 사도 요한이 이단에 대해 싸우고 또 믿음을 지키라는 편지를 쓰려고 계획했다가 서신의 목적을 바꾼 이유는 소아시아 지방 사람들이 하나님의 아들을 믿으면서도 구원을 받았는지 잘 모르기 때문에 구원의 확신을 심어주기 위해서였습니다.
구원을 받고 나서도 구원이 무엇인지, 그리고 그것이 구원인지 아닌지 모르는 경우가 있습니다. 그래서 ‘구원을 이루라’는 말을 대하면 받은 바 구원도 다 잊어버린 것 같고, 자신이 생기지 않아 어떻게 신앙생활을 해야 하는지 당황해 하는 사람들이 의외로 많습니다. 이러한 영적 혼란의 틈새를 비집고 이단이 들어와 잘못된 길로 인도할 수도 있습니다. 거듭 말씀드리자면 우리 성결교회의 교리적 특징인 사중복음은 이러한 문제를 해결해 줍니다.
참고로 이 사중복음(四重福音)의 중(重)은 ‘무겁다’의 의미가 아니라 ‘중복되어 있다’, 또는 ‘겹으로 되어 있다’는 뜻입니다. 그래서 사중복음을 영어로 'Four-fold Gospel'이라고 합니다. 가끔 이것을 사복음서(Four Gospels)와 혼동하는 사람이 있는데 사중복음은 네 가지의 복음서라는 말이 아니라 예수님께서 선포하신 복음을 네 가지 국면에서 강조한다는 의미로 ‘사중복음’이라고 말합니다. ‘겹쳐진다’, ‘중복된다’라는 fold란 말을 복음이란 Gospel이란 용어에 앞에 붙여 'Four-fold Gospel'이라고 단수로 씁니다. 그 내용은 여러분이 잘 알듯이 ‘중생’, ‘성결’, ‘신유’, ‘재림’입니다. 복음의 진수요 핵심입니다. 그러면 구원의 도리로서의 사중복음에 대하여 자세하게 살펴보도록 하겠습니다.
첫째로, 중생에 대해서 말씀 드리겠습니다.
초보적 구원, 또는 과거의 구원으로서의 중생(重生, Regeneration)
‘중생’이란 다른 말로는 ‘거듭남’, ‘새로남’, ‘하나님께로부터 남’이라고 할 수 있는데 영어로는 ‘Regeneration’ 또는 ‘born again’이라고 합니다.
요한복음 3장을 보면 어느 날 밤에 유대인의 선생인 니고데모가 예수님을 찾아왔습니다. 그리고 영생의 길을 물을 때 예수님이 말씀하시기를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네게 이르노니 사람이 거듭나지 아니하면 하나님나라를 볼 수 없느니라”라고 하셨습니다(요 3:3). 거듭나지 아니하면 하나님 나라에 들어가기는커녕 볼 수도 없다고 하셨습니다. 이에 니고데모는 사람이 다시 어머니 뱃속에 들어갔다가 두 번째 태어나야 하는 줄로 알았습니다. 하지만 예수님의 말씀은 니고데모가 생각했던 육신으로의 다시 태어남을 말씀하신 것이 아니라 영적으로 다시 태어나는 것을 말씀하신 것입니다. 왜냐하면 육으로 난 것은 여전히 육이기 때문입니다(요 3:6). 하나님의 나라는 혈과 육으로 가는 나라가 아닙니다(고전 15:50). 구원의 첫걸음이 바로 이 중생입니다. 예수 믿고 구원받으라는 말은 곧 ‘중생’하라는 말입니다.
그렇다면 왜 중생하라는 말씀을 하셨습니까? 중생 곧 다시 난다는 것은 죽은 사람에게 필요한 것입니다. 그렇다면 우리가 죽은 자입니까? 예, 살아있으나 죽었었습니다.
죽음에는 두 가지 죽음이 있습니다. 바로 육체의 죽음과 영혼의 죽음입니다. 영혼의 죽음이란 무엇입니까? 에베소서 2장 1절에 보면 ‘너희의 허물과 죄로 죽었던 너희’라고 표현되어 있습니다. 죄와 허물 때문에 하나님과 관계가 단절되었고 이로 인하여 우리의 영이 죽게 된 것입니다.
모든 인류는 태어나는 순간부터 죄인입니다. 그 까닭을 거슬러 올라가 보면 우리의 조상인 아담과 하와가 하나님의 말씀을 어기고 금하신 열매를 따먹었기 때문입니다. 열매 자체가 문제가 아니라 하나님의 명령을 어겼다고 하는 점에서, 하나님의 사랑을 불신앙하고 의심했던 점에서 죄악이 시작되고 있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을 거역하고 하나님의 금하신 열매를 따먹음으로 아담과 하와가 죄를 짓게 되었고, 하나님이 “네가 만일 먹는 날에는 정녕 죽으리라.”고 엄히 경고하신 대로 그들은 죽었습니다. 목숨이 떨어져서 숨이 끊어지는 것만이 죽음이 아니라 더 중요한 죽음인 하나님과의 관계가 단절된 영적인 죽음이 오게 된 것입니다. 그리하여 죄지은 아담과 하와를 하나님은 에덴에서 내보내셨습니다. 에덴을 쫓겨난 이후에 아담은 물론 그 후손들 전체는 아련한 기억 속에 옛날 우리가 머물던 낙원을 생각하게 합니다. 본향을 그리는 나그네가 된 것입니다.
그래서 어떤 사람들은 낙원에 이르는 길을 불교에 가서 찾기도 하고, 어떤 사람들은 회교 또는 미신들에게서 찾고 있습니다. 인간이 타락한 이후에 이성도 타락하여 하나님 아닌 것을 하나님으로 알고, 진리가 아닌 것을 진리인 것으로 알고 따라가는 잘못을 저지르고 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구원의 길을 밝히 보여 주셨는데 “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독생자를 주셨으니 이는 저를 믿는 자마다 멸망치 않고 영생을 얻게 하려 하심이니라.” 말씀하신 대로 ‘믿는 자’가 구원을 받습니다.
무엇을 믿습니까? 예수 그리스도를 구주로 믿고 “나는 타락해서 도저히 스스로 구원의 길을 발견할 수 없는 죄인입니다.”라는 사실을 고백해야 합니다. “하나님이 도와주지 아니하시면 나는 죽을 수밖에 없습니다. 영원한 멸망에 갈 수밖에 없습니다.”라는 사실을 인정하고, 하나님 앞에 찾아와 나의 죄를 고백하며 구원을 요청할 때에 하나님이 구원해 주십니다. 요한 일서 1장 9절에 보면 “만일 우리가 우리 죄를 자백하면 저는 미쁘시고 의로우사 우리 죄를 사하시며 모든 불의에서 우리를 깨끗케 하실 것이요.”라고 하셨습니다. 죄를 인식하고 하나님 앞에 자복하는 일이 구원의 첫걸음입니다. 우리 영혼이 하나님 앞에서 단절된 상태로, 하나님을 알지 못하는 상태로도 물론 건강할 수도 있고, 공부도 잘 할 수 있고 또는 사업도 잘 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을 모르는 채 내 맘대로 사는 것은 육체의 삶일지는 몰라도 영적으로는 죽어있는 것입니다.
우리가 잘 아는 탕자의 비유 속에서 아버지의 집을 떠나 버린 둘째 아들이 외국에 가서 허랑 방탕하며 돈을 다 허비했습니다. 설상가상으로 흉년이 와서 직장은 커녕 먹을 것도 구할 수 없는 지경이 되었습니다. 돼지 키우는 집에 가서 품꾼 노릇을 하는데 너무 배가 고파 돼지먹이로 배를 채웁니다. 그는 말하기를 “나는 여기서 주려 죽는구나, 내 아버지 집에 가리라.”고 합니다. 이것이 바로 회개의 시작입니다. 회개라는 것은 방향 전환입니다. 육체를 위해 살고 세상을 향해 가던 발걸음을 돌이켜서 아버지의 집으로 향하는 것입니다. 탕자는 마음을 돌이켰을 뿐 아니라 발걸음을 옮겨 드디어는 아버지 집에 이르렀습니다. 이것이 회개입니다.
멀리서 바라보신 아버지는 뛰어나와 아들을 영접하고 껴안고 기뻐하면서 그에게 새 옷을 입히고, 반지를 끼우고, 새 신발을 신기며, 잔치를 베풀어 환영했습니다. 그때 이 아버지가 하는 말이 “이 내 아들은 죽었다 살았으며 잃었다 다시 찾았기에 우리가 기뻐하는 것이 마땅하도다”(눅 15:24)라고 했습니다. 이 탕자가 죽을 지경에서 돌아온 것이지 숨이 끊어져 죽은 것은 아니었습니다. 그런데 왜 그 아버지는 아들에 대하여 죽었다가 살아났다고 합니까? 영적인 눈으로 보면 아버지 집을 떠나는 순간 그 아들은 죽은 것이었습니다. 신앙적으로 하나님 앞에서 쫓겨난 인간들은 그 순간부터 영이 죽은 상태에 놓여 있는 것입니다.
그러면 구약시대는 어떻게 구원을 어떻게 받을 수 있다고 했습니까? 율법을 통해서 구원을 얻는다고 말합니다. 그리하여 구약시대 사람들은 자기의 죄를 씻기 위하여 율법에 명한 대로 제사를 드리게 되었습니다. 그 제사에 있어 제물로는 주로 양이나 소를 죽여 드려야 했습니다. 이렇게 제물로 바쳐진 소나 양처럼 죄인을 대신하여 죽는 것을 ‘대속’(代贖)이라고 합니다.
그러나 바울 사도는 이 율법은 단지 죄를 깨닫게만 해줄 뿐이지 구원을 얻게 하는 것은 아니라고 했습니다. 우리 예수님은 나시기 전에 이미 이름을 ‘예수’라고 하셨습니다. “네가 아들을 낳으리니 이름을 예수라 하라”(마 1:21) 하였으니 여기서 예수라는 말은 ‘구원자’라는 의미입니다. 즉 “자기 백성을 저희 죄에서 구원할 자”이셨습니다. 구원자 예수님이 오셔서 이 세상에서 모든 사역을 마치시고 마지막 만찬 자리에서 제자들에게 말씀하셨습니다. “내가 많은 사람의 죄사함을 위하여 피를 흘리노니 이 잔은 나의 흘리는 피니라. 이 잔을 나누라.” 마지막 만찬 석상에서 포도즙을 나누셨습니다. 또 떡을 나눠주시며 “받아먹어라. 너희를 위하여 주는 나의 몸이니라.”라고 하셨습니다. 예수님이 십자가에서 몸이 상하셨으며 그리고 피를 쏟으셨습니다.
그로 말미암아 하나님께 나아가는 구원의 길이 열렸습니다. 누구든지 믿는 자가 담대함으로 하나님 앞에 갈 수 있는 것은 예수님께서 죄인을 위하여 대신 죄의 값을 치뤄 주셨기 때문입니다. 죄의 값은 사망인데, 예수님은 죄 없이 여자의 몸에서 나신 의로운 분이시지만 우리의 죄를 대신 지셨습니다. 세례 요한도 요단강에서 예수님이 오시는 것을 보고 “보라 세상 죄를 지고 가는 하나님의 어린양이로다”(요 1:29)라고 했습니다.
저와 여러분의 죄를 대신 지신 하나님이 준비하신 어린양입니다. 그분이 피를 흘림으로 우리는 거저 구원을 받습니다. 누구든지 믿는 자는 멸망당하지 않고 영생을 얻습니다. 자기의 죄인된 것을 고백하고 예수님이 나를 위해 이 땅에 오신 것을 감사하고 예수님을 나의 구주로 영접할 때에 그는 지금까지 지은 모든 죄를 용서함 받는 축복을 누리게 됩니다.
그래서 중생의 단계에서는 다른 말로는 ‘의인’(義認)이라고 합니다. 의롭다고 인정해 주신다는 뜻입니다. 또는 ‘칭의’(稱義)라고도 합니다. 의롭다 일컬어 주신다는 뜻입니다. 나는 죄인이지만 예수님이 흘리신 보혈로 용서받게 되는 것입니다. 의인(義認)이란 말은 신적 법정 용어입니다. 죄를 짓고 감옥에 갇혀서 내 돈으로 내 힘으로 나갈 수 없을 때 어떤 사람이 대신 돈을 내 줍니다. 그러므로 감옥에서 나갈 수 있습니다. 구약적인 의미에서는 노예로 팔리면 자기 스스로 속량 할 길이 없습니다. 노예가 되는 까닭은 노예의 아들로 태어났을 때와 자유인이라도 빚을 너무 많이 지어 빚을 못 갚아 노예로 팔려 가는 경우가 있습니다. 이 노예는 스스로 자기 자신을 구속(救贖)할 수가 없습니다. 자기가 열심히 일을 해도 노예이기 때문에 자기가 일한 모든 댓가는 주인에게 돌아가게 됩니다. 도저히 스스로 자기를 구원할 길이 없지만 속량하는 사람이 와서 이 노예의 값을 대신 내주고 이 노예를 사서 노비문서를 찢어버리면서 “너에게 자유를 준다!”고 할 때 그 종에게 자유가 주어집니다. 이때 치르는 돈을 속전(贖錢)이라 합니다. 예수님이 피로 우리를 사셨습니다. “그러므로 너희는 너희 것이 아니다. 피로 사신 바 된 하나님의 것이니 너희 몸으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라.”(고전 6:20)하신 것입니다. 우리 예수님이 대신 치르신 속전을 믿음으로 받아 가져 구원을 받는 단계가 중생입니다. 중생은 죽었던 영이 살아나는 것입니다.
둘째로, 성결에 대하여 말씀 드리겠습니다.
성숙된 구원, 또는 현재적 구원으로서의 성결(聖潔, Sanctification, or Holiness)
‘성결’은 ‘거룩함’, ‘신성함’, ‘온전함’으로 이해될 수 있습니다. 원어의 의미로는 ‘성결해지다’, ‘구별되다’, ‘깨끗하게 하다’, ‘봉헌되다’의 뜻입니다.
성경은 허물과 죄로 죽었던 너희를 살리셨고 하나님께서 그리스도와 함께 너희를 일으키셨다고 했습니다. 그래서 구원받은 기쁨이 얼마나 감사한지 ‘주의 말씀 처음 들은 날 참 기쁘고 즐거운 날’이라고 찬송을 부르며 구원의 기쁨을 노래합니다. 그런데 얼마만큼 지나다 보면 또 다시 마음속에 의심도 들고, 시험에 들고, 회의에 빠지게 되는 까닭은 인간의 구성이 영(靈)만 있는 것이 아니라 혼(魂)이라는 것이 있는데, 영이 죽을 때 혼도 같이 타락했기 때문입니다. 이 혼은 생각을 주관하는 부분입니다. 이것은 생각이라고도 말할 수 있고 마음이라고도 말할 수 있는데, 느끼고 판단하고 감각하는 기관이 혼이라는 부분입니다. 인간의 타락으로 영이 죽을 때 혼도 같이 타락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과 교제하는 부분은 영입니다. 그래서 “예배하는 자는 신령과 진정으로 예배하라”고 하셨습니다. 범죄로 영은 죽었고 혼은 완전히 부패해져서 하나님 아닌 것을 하나님이라 하고 또 올바른 가치판단을 할 수 없도록 인간이 타락해 버렸습니다. 그래서 사랑해야 할 것을 사랑하지 못하고 사랑하지 않아야 할 것을 사랑하는 이런 비뚤어진 존재가 되고 말았습니다.
중생으로 영은 구원받았어도 아직 혼이 타락한 채 깨끗해지지 못했기 때문에 가끔씩 지나간 날에 죄악의 즐거움을 생각나게 합니다.
애굽을 떠난 유대인들이 430년간 애굽에서 종노릇할 때를 생각하며 광야에서 불평하던 것을 생각해 봅시다. 애굽을 떠나 홍해를 건넜다는 것은 영적으로 볼 때 중생한 자를 말합니다. 중생한 성도들은 죄악의 장소인 애굽을 떠나 가나안을 향하는 광야의 나그네와 같습니다. 그러나 그 구원의 감격도 있지만 살다 보면 때때로 우리 육체가 요구하는 쾌락을 탐할 때가 있습니다. 로마서 7장에 기록된 대로 “내가 마음으로는 하나님의 법을 즐거워 하지만 내 육체 속에 또 다른 법이 있어서 나를 죄의 법 아래 사로잡아 오는구나 오호라 나는 곤고한 사람”(23, 24)이라고 탄식하는 것과 같습니다.
구원받은 감격이 넘쳤지만 어떤 때는 나쁜 생각과 행동이 우리를 낙심시킵니다. ‘나는 구원을 못 받은 것은 아닌가? 하나님이 나를 버리신 것은 아닌가?’ 이런 것은 마귀가 주는 생각입니다. 마귀는 우리에게 ‘한번만 죄를 지어 봐라’고 유혹하고 우리가 죄를 지으면 “그래 너는 틀렸어”라고 낙심을 줍니다. 그래서 우리를 쓰러뜨리려 합니다. 살아가는 동안 범하는 죄와 허물을 그때마다 회개함으로 깨끗함을 유지해야 합니다. 중생한 사람은 죄를 짓지 않고 사는 것이 원칙이지만 죄를 짓게 되고 약해지는 까닭은 우리의 혼이 아직 깨끗하지 못해서 그렇습니다. 바울 사도는 정과 욕심을 십자가에 못박았다고 했습니다. 바로 이 정과 욕심을 십자가에 못박은 상태를 ‘혼의 정결’ 즉 성결(聖潔)이라 합니다. 이것은 또 성령이 충만한 상태를 가리킵니다.
성령충만을 받으면 육체의 욕심과 이 세상에 대한 미련이 전혀 나지 않습니다. 이제는 내가 사는 것이 아니요 내 안에 그리스도께서 사신다고 고백하는 이러한 상태가 바로 거룩입니다. 혼이 깨끗해지는 성결은 성령의 충만함을 받을 때에 체험하게 됩니다. 이러한 성결의 은혜는 우리가 하나님 앞에 구원의 기쁨을 감사하며, 성령의 충만을 간절히 구하면 주신다고 하셨습니다. “너희가 떡을 달라고 할 때 돌을 주며, 생선을 달라고 할 때 뱀을 주며, 알을 달라 할 때 전갈을 줄 아버지가 있겠느냐? 너희가 악할지라도 자기 자식에게 좋은 것으로 줄 줄을 알거든 너희가 어찌하여 모든 것을 아시는 아버지께서 너희에게 좋은 것으로 주실 줄 알지 못하느냐?”(마 7:9~11)고 하십니다. 그러면서 “구하는 자에게 성령을 주시지 않겠느냐”고 말씀하십니다.
사도행전에 성령의 충만을 받고 난 제자들이 변화되었습니다. 전에는 겁에 질려 있던 제자들이 말씀을 힘있게 전파하지 못했지만, 이제는 성령의 충만함을 받고 변화를 받아 거리에 나가서 담대하게 복음을 전했습니다. 그래서 사람들이 그 제자들을 새 술에 취했다고 했던 것입니다. 아무리 핍박을 받아도 기뻐하며 복음을 전했습니다. 이처럼 성령충만하면 겁이 나지 않고 담대하여 생명을 아끼지 않고 복음을 전할 수 있게 됩니다. 성령이 충만할 때에 ‘나는 보이지 않고 구속한 주만 보이도다’ 라는 고백이 흘러나오는 것입니다.
성령충만은 과거에 한번 받았다고 해서 끝나는 것이 아닙니다. 계속하여 성령충만하기를 구해야 하는 것입니다. 사도행전 2장 4절에 보면 “오순절에 저희가 다 성령의 충만함을 받고 … ” 했지만, 4장 31절에 관원들이 위협하며 핍박했던 것을 이야기하며 그것을 위하여 빌기를 다하매 무리가 다 성령이 충만하여 기도했다고 합니다. 이처럼 한번 성령을 받았더라도 계속하여 성령의 충만을 받게 되는 것을 우리가 알 수 있습니다.
히브리서 12장 14절에 거룩함이 없이는 아무도 예수님을 볼 수 없다고 했습니다. 이처럼 성결의 은혜를 받아야 우리의 행실이 의로와 질 수 있고 하나님 보시기에 아름다운 삶을 살아갈 수가 있는 것입니다. 신랑이신 예수님이 신부를 맞으러 오신다고 했는데 그 신부가 깨끗한 세마포를 입었다고 했습니다(계 19:8). 여기서 깨끗한 세마포는 바로 성결입니다. 우리 모두도 성결의 은혜를 입어 늘 기쁘고 축복된 하루하루를 승리하며 살아가시기를 원합니다.
셋째로, 신유에 대하여 말씀 드리겠습니다.
육신의 현재적 구원으로서의 신유(神癒, Divine Healing)
신유(神癒)란 하나님의 능력으로 병에서 깨끗함을 받는다는 뜻인데, 현재 건강을 유지하고 있는 것도 신유의 은혜입니다. 영이 거듭나고 혼이 깨끗해 졌어도 육체의 늙는 것을 막을 자가 없습니다. 우리가 영이 새로 남으로 중생하고 혼이 깨끗함을 성결이라 하는데, 몸이라는 것은 한계가 있습니다. 모세가 말하기를 인간의 수명이 70이요 건강하면 80이라고 했습니다(시 90:10). 인간은 짧은 수명을 가지고 있습니다. 또한 잠언 31장에 보면 고운 것도 헛되고 아름다운 것도 헛되나 오직 여호와를 경외하는 여자가 아름답다고 했습니다. 육체라는 것은 힘이 있고 아름답게 보이는 것 같지만 늙고 병이 들게 되면 추해지게 됩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 우리 안에 들어와 살고 계신다고 하십니다. 고린도전서 3장 16절을 보면 “하나님의 성령이 너희 안에 거하시는 줄을 너희가 알지 못하느냐?”라고 하십니다. 하나님이 거하시는 곳이 성전인데 하나님이 우리 안에 거하신다고 하셨습니다. 우리들도 새롭게 이사를 가서 집이 더럽고 추하면 새롭게 고칠 수가 있습니다. 이와 같이 성령이 우리에게 오시면 성령의 거하실 집, 즉 육신의 장막을 아름답고 깨끗하게 고쳐 주신다고 하셨습니다.
고린도전서 15장에서 만일 우리가 이 세상에서 살다가 연수가 다되어 죽고 난 후 그것이 끝이라고 한다면 예수 믿는 사람이 가장 불쌍한 사람이라고 했습니다(19절). 그러나 예수 그리스도께서 부활의 첫 열매가 되셔서 우리에게 부활의 소망을 주셨습니다.
우리의 몸은 병들고 늙어 죽을 수밖에 없지만 이사야 53장에 예수님이 우리의 허물을 인하여 상할 뿐만 아니라 우리의 질병도 담당하신다고 하셨습니다. 우리의 허물과 연약을 친히 담당하신 예수님이 계시기 때문이 그가 피흘림으로 영혼이 구원받는 것뿐만이 아니라 육체도 구원을 받게 되는 것입니다.
이 은혜를 믿고 의지하면 우리가 나음을 얻게 된다는 것입니다. 병에서 나음을 받는 것도 성경에서 구원이라고 표현했습니다. 소경 바디매오에게 하신 예수님의 말씀은 “가라! 네 믿음이 너를 구원하였느니라.”(막 10:52)고 표현합니다. 이와 같이 우리의 몸이 병에서 깨끗함을 받는 것도 구원이라고 표현되어 지고 있습니다. 성결교회의 원로이자 성결교신학교를 설립하신 고(故) 김응조 목사님이 본인의 병을 위해 기도하여 깨끗하게 고침 받게 됐다는 간증을 ‘나는 기도하여 얻었다’라는 책에서 자세하게 기록하고 있습니다. 육체의 모든 질병에서부터 하나님의 은혜로 고침을 받는 신유의 은사를 받으신 것입니다.
여기서 우리가 또 한가지 잘 알아야 할 것은 질병에서부터 나음을 받는 것도 신유이지만, 더 중요하고 넓은 의미로서의 신유는 우리가 병에 걸리지 않고도 건강하게 사는 것을 말합니다. 그런데 많은 사람들이 병에 걸렸을 때에 오히려 더 많은 기도와 헌신하는 것을 봅니다. 반면에 몸이 건강하면 하나님께 대한 감사와 헌신을 덜 하게 되는 경우도 종종 보게 됩니다.
미국에서 어떤 성도 한 분이 평소에는 예배시간에 늦지 않았지만 어느 날 주일 예배에 늦게 참석하게 되었다고 합니다. 그리하여 예배가 끝난 후 목사님이 그 이유를 물었는데, 그 성도가 하는 말이 “하나님께 정말로 감사를 드립니다. 교회에 오는 길에 큰 사고로 인하여 마차가 언덕에서 굴러 죽는 줄로만 알았는데 이렇게 다치지 않고 살아 있게 되어서 참 감사를 드립니다.” 그 말을 듣고 있던 목사님이 “저는 더 감사를 드립니다.”라고 하셨습니다. 이 성도가 “아니, 목사님도 사고가 나셨습니까?”라고 물으니 목사님이 대답하시기를 “아닙니다. 저는 아직 사고를 당하지 않아서 오히려 하나님께 감사드립니다.”라고 말씀했다는 이야기가 있습니다. 여기서 우리는 우리가 건강할 때 더 하나님께 감사하고 기도해야 한다는 것을 배우게 됩니다. 이처럼 우리에게는 육체의 질병으로부터 고침을 받을 때도 감사해야 되지만, 병이나 사고를 당하지 않고도 더욱 건강하게 살아갈 수 있을 때 하나님께 더욱 감사를 드려야 할 것입니다.
우리는 범사에 감사해야 되는 것입니다. 이렇게 우리가 평소에 건강하게 해주시는 것이 바로 하나님의 신유의 은혜로 말미암은 것입니다.
그러므로 예수를 믿고 그 마음에 온전히 성령님을 모시고 살게 되면 하나님이 주시는 은혜로 인하여 건강하게 될 수 있습니다. 우리 중에 병든 자가 있다면 믿음으로 이 은혜에 들어가도록 깨끗하고 정결한 마음으로 기도할 것이며, 온전히 하나님께 자기의 삶을 맡기는 중에 하나님의 온전한 치유하심을 바라보아야 할 것입니다(약 5:14~16). 이렇게 하나님의 신유의 은혜 속에서 영과 육이 아울러 강건하여 늘 감사와 기쁨으로 하루하루를 살아가야 하겠습니다.
넷째로, 재림에 대해서 말씀 드리겠습니다.
궁극적 구원, 또는 미래에 완결될 구원으로서의 재림(再臨, Second Coming)
‘재림’이란 ‘임재’, ‘도착’이란 뜻을 가진 헬라어 ‘파루시아’(παρουσἰα)에서 연유하고 있는데, 예수 그리스도께서 심판의 주로 다시 오신다는 뜻입니다. 인간이 살수 있는 연한을 어떤 이는 120살까지도 살 수 있다고 하지만 죽음이 끝이라고 한다면 신자가 모든 사람들 중에 가장 불쌍한 사람이라고 할 수밖에 없습니다. 이러한 짧은 연수 가운데 육체가 하고 싶은 일이 너무 많습니다. 좋은 시간을 보내야 되고 여가도 즐겨야 하며 여러 가지 자기의 하고 싶은 일을 다 해도 모자라는 것이 시간입니다. 그러나 이렇게 짧은 시간을 아무리 오래 살아야 120년밖에 살지 못한다고 합니다. 이렇게 살다가 그것이 끝이라고 한다면 그 동안 우리가 하나님을 믿으며 주일날 교회에서 봉사하고 세상의 친구들과 어울리지 못하고 세상의 향락의 자리에 가지 않고 믿음을 지키는 것은 아무런 의미가 없다고 할 수밖에 없습니다. 결국 우리는 인간의 수명이 다하면 육신의 장막이 허물어져 죽음에 이르게 됩니다.
그러나 예수를 믿는 이에게는 진정한 소망이 있습니다. 바로 ‘부활’의 소망입니다. 우리가 죽어서 땅 속에 들어가 썩어 없어진다고 걱정할 것 없습니다. 낙원에 있던 영혼이 신령한 몸으로 변화된 육체와 다시 결합하게 됩니다. 그리고 살아있는 성도는 예수님처럼 아름다운 모습으로 바뀌게 됩니다.
고린도전서 15장에 보면 혈과 육은 하나님의 나라를 상속할 수 없다고 했습니다. 어머니로부터 난 몸으로는 천국에 들어갈 수가 없습니다. 두 번 세 번 난다고 되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으로부터 다시 나야 영이 살게 되는 것이고 예수님께서 다시 오실 때에 육체도 썩지 아니할 몸으로 다시 나게 되는 것입니다. 죽은 성도는 부활하고 살아있는 성도는 변화하여 예수님을 만나게 되는 데 이것을 영육의 온전한 구원이라고 합니다. 이것은 예수님의 재림 때에 이루어집니다.
우리가 이 세상을 살다가 죽고 난 후에도 또 다시 살아날 수 있다는 소망이 있는 것은 우리 예수님이 부활 하셨기 때문입니다. 머리되신 예수님께서 부활하심으로 인하여 우리 지체들도 역시 부활할 수 있다는 소망 가운데 사는 것입니다. 부활의 몸은 완전한 것입니다. 그때는 시간의 제한을 받지도 않고, 애통하는 것, 우는 것, 늙은 것, 죽는 것도 없다고 했습니다. 예수님이 오시면 우리도 예수님처럼 바꿔지게 되기 때문입니다. 먼저 죽은 자들이 부활하고 그 후에 살아있는 신자들도 변화됩니다.
데살로니가 교회 신자들 가운데 죽은 자가 생겨 근심에 싸여 있을 때, 사도 바울이 그들을 위로하며 다시 살게 될 소망에 대하여 자세하게 말했던 것을 성경을 통해 알 수 있습니다. 나사로의 무덤 앞에서 예수님이 말씀하십니다. “나는 부활이요 생명이니 나를 믿는 자는 죽어도 살겠고 무릇 살아서 믿는 자는 영원히 죽지 아니하리라”고 하셨습니다(요 11:25, 26).
예수님 다시 오실 때에 신부된 우리는 거룩한 몸으로 신랑되신 그리스도와 결합이 될 것입니다. 이게 바로 그리스도와의 결혼이며 결합입니다. 성경에서 이 비밀이 크다고 했습니다(엡 5:31, 32). 이 말은 부부간의 일치와 같다고 합니다(엡 5:32). 부부가 둘이 하나인 것처럼 교회와 그리스도도 하나입니다. 그가 부활했기 때문에 그에게 결합될 교회도 거룩해야 할 것이며, 재림 때 성도들은 영광의 몸을 입게 될 것입니다. 그때가 바로 구원이 완성되는 때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소망 가운데 재림의 날을 기다립니다.
로마서 8장에 보면 성령의 처음 익은 열매를 받은 우리까지도 속으로 탄식하며 구속의 날 곧 몸의 구속을 기다린다고 하였습니다. 우리 몸이 건강하다 할지라도 늙어지고 죽을 수밖에 없는데 몸이 구속을 받는 날은 썩지 않는 몸으로 갈아입는 날입니다. 이렇게 영화롭고 즐거운 날을 맞이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날이 바로 재림의 날입니다.
중생․성결․신유․재림의 신앙으로 온전한 구원을 이룹시다.
이처럼 중생으로 시작된 구원은 재림으로 완성됩니다. 예수 믿고 중생하는 것이 구원의 전부가 아닙니다. 중생, 성결, 신유, 재림을 통하여 온전한 구원이 이루어지는 것입니다. 그래서 마태복음 10장을 보면 예수님께서 제자들을 보내시면서 육체를 죽이는 사람을 두려워하지 말고 육체와 영을 함께 지옥에 던질 수 있는 하나님을 두려워하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육체와 영혼이 함께 지옥에 떨어지는 죽음이 바로 죽음의 세 번째인 영원한 죽음입니다.
영원한 죽음은 영과 육이 지옥에 함께 떨어지는 것입니다. 하지만 영원한 구원은 재림하실 때 예수님을 만나서 다시는 죽지도 않고, 다시는 병들지도 않으며, 다시는 늙지도 않는 몸으로 변화되어 예수님의 영광에 참여하게 되는 것입니다. 이러한 구원에 대하여 명확하게 지적해 주는 교리가 바로 우리 성결교회의 사중복음입니다. 이 얼마나 아름다운 복음입니까? 이 사중복음을 바로 알면 믿지 않는 사람들에게도 복음을 담대하게 잘 가르칠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날마다 하나님이 주시는 이 생명을 감사하며 지난 날 우리를 죄와 사망의 몸에서 구원하여 주신 중생 뿐만 아니라 오늘의 삶 속에서 항상 성령충만하여 하나님과 사람 앞에 의의 열매를 맺을 수 있는 성결의 은혜를 받고, 또한 날마다 강건하여 하나님께 온전히 헌신할 수 있는 신유의 은혜를 누리며, 예수님 다시 오시는 날 영과 육이 새롭게 변화되는 온전한 구원을 이루어야 할 것입니다.
“너희는 두렵고 떨림으로 이 구원을 이루라”고 하십니다. 이 놀라운 과거와 현재와 미래의 온전한 구원의 은혜를 주신 하나님을 늘 찬송하면서 날마다의 삶 속에서 승리하는 하나님의 자녀들이 되기를 축원합니다. 아 멘.
샬롬! 샬롬!
삿 6:19~24
기드온이 가서 염소 새끼 하나를 준비하고 가루 한 에바로 무교전병을 만들고 고기를 소쿠리에 담고 국을 양푼에 담아서 상수리나무 아래 그에게로 가져다가 드리매 하나님의 사자가 그에게 이르되 고기와 무교전병을 가져 이 반석 위에 두고 그 위에 국을 쏟으라 기드온이 그대로 하니 여호와의 사자가 손에 잡은 지팡이 끝을 내밀어 고기와 무교전병에 대매 불이 반석에서 나와 고기와 무교전병을 살랐고 여호와의 사자는 떠나서 보이지 아니한지라 기드온이 그가 여호와의 사자인 줄 알고 가로되 슬프도소이다 주 여호와여 내가 여호와의 사자를 대면하여 보았나이다 여호와께서 그에게 이르시되 너는 안심하라 두려워 말라 죽지 아니하리라 하시니라 기드온이 여호와를 위하여 거기서 단을 쌓고 이름을 여호와살롬이라 하였더라 그것이 오늘까지 아비에셀 사람에게 속한 오브라에 있더라
샬롬이란? 조화를 이루어 온전한 것, 즉 사랑, 우애, 건강, 축복, 승리, 성공, 풍년, 평화 등 광범위합니다. 그래서 샬롬! 샬롬! 두 번은 아주 반가운 사람끼리 만났을 때 서로 인사하는 말입니다.
여호와 샬롬이란 말씀의 뜻은 ‘여호와는 평강’이라는 뜻입니다. 이 말씀이 유대인의 인사가 되어 사용되어지고 있습니다. 샬롬 즉 평안하기를 바랍니다. 예수께서도 누가복음 10장 5절에 전도하러 가서 “평안할 찌어다”라고 가르쳐 주셨습니다.
본문 말씀은 사사 시대 기드온이 하나님께 부름 받았을 때 되어진 일입니다. 그 당시는 미디안 족속들이 이스라엘 백성을 못살게 괴롭혔습니다. 그런 상황에서 불안하여 떨고 있는 기드온에게 어떻게 함으로 여호와 샬롬이 이루어졌는지를 찾아봄으로 은혜를 받고자 합니다.
1. 자기 사명에 충실히 일할 때 여호와 샬롬이 이루어 졌습니다
하나님의 축복의 역사는 자기 직무에 충실한 사람에게 나타났습니다. 들녘에서 양치는 일에 충실한 다윗에게 왕좌가 주어졌고, 양치는 목자에게 천군 천사를 통해서 구주 탄생을 제일 먼저 알려 주었고, 성전에서 직무에 충실한 사무엘에게 대선지자의 역사를 맡기셨습니다.
당시의 미디안 사람들과 아멜렉 사람들이 토지의 소산이 날 때면 습격하여 약탈해 가며 양이나 소나 나귀도 남기지 아니하였다고 했습니다(삿 6:4~5). 이때 기드온이 미디안 사람에게 알리지 아니하려고 포도주 틀에서 타작을 하고 있었습니다. 언제 그들이 나타나서 기습을 할지 몰라 몹시 불안 중에 있었습니다.
그때 여호와의 사자가 나타나서 “큰 용사여 여호와께서 너와 함께 하시는도다”라고 하셨습니다(삿 6:12). 불안한 기드온의 심중에서 샬롬의 역사가 시작되었습니다.
미디안이 온 것이 아니라 여호와의 사자가 와서 하나님이 함께 하신다는 약속을 들을 때 초조, 긴장, 불안, 공포가 아침 햇빛에 안개같이 사라지기 시작했습니다. 하나님이 함께 하신다는 약속을 받고 또 우리가 그 약속을 믿을 때 분명 우리에게서 불안, 공포가 물러갈 것입니다.
야곱은 당시 외로운 몸으로 하란에 가서 20년간 머슴살이를 하여 성공한 후 고향에 다시 돌아온 사람입니다. 그가 하란으로 도망갈 때 “내가 너와 함께 있어 네가 어디로 가던지 너를 지키며 너를 이끌어 이 땅으로 돌아오게 할지라 내가 네게 허락한 것을 다 이루기까지 너를 떠나지 아니하리라”고 하신 하나님의 약속을 받고 갔기에 그는 마음 든든함이 있었을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하신 약속의 말씀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그는 우리에게 말씀하시기를 “ … 내가 세상 끝날까지 너희와 항상 함께 있으리라!” 고 하셨습니다(마 28:20).
이 약속대로 예수님과 동행만 하면 <여호와 샬롬>이 이루어집니다. 노약자와의 동행이 아닙니다. 나에게 도움이 되지 못할 힘없는 사람과의 동행도 아닙니다. 우주를 창조하시고 섭리하시는 전능자와의 동행입니다. 폭력으로 다스리는 분이 아니라 사랑의 아버지로서 알뜰히 간수하며 함께 하시는 분이십니다.
“두려워 말라 내가 너와 함께 함이니라 내가 너를 굳세게 하리라 참으로 너를 도와주리라 참으로 나의 의로운 손으로 너를 붙들리라”고 이사야 40장 10절에 기록된 말씀입니다. 이 약속의 말씀을 확신하시기 바랍니다. 이 약속은 오늘 여러분 개인, 개인에게 하신 약속인 줄 믿으시기 바랍니다.
세상이 험하고 악하여도 하나님의 능력을 앞서지는 못합니다. 능력의 예수님이 함께 하시기만 하면 두려움이 변하여 기도가 되고 한숨이 변하여 노래가 될 것입니다.
“주와 같이 길가는 것 즐거운 일 아닌가 어린아이 같은 우리 미련하고 약하나 주의 손에 이끌리어 생명길로 가겠네”란 찬송가 가사와 같이 예수님의 능하신 손에 꼭 잡혀 함께 가기만 하십시다. 우리 앞을 막아서서 두렵게 하던 존재들이 맥없이 쫓겨가고 말 것입니다. 할렐루야!
기드온이 부름 받았을 때 “주여 내가 무엇으로 이스라엘을 구원하리이까 보소서 나의 집은 므낫세 중의 극히 약하고 나는 내 아비 집에서 제일 낮은 자니이다”라고 자신의 약함을 고백할 때, 여호와께서 그에게 이르시기를 “내가 반드시 너와 함께 하리니 네가 미디안 사람 치기를 한 사람 치듯 하리라”고 하셨습니다. 하나님이 함께 계시며 역사하여 주신다면 약함이 있을 수 없고, 하나님이 함께 하시지 않으시면 강함이 없는 줄로 믿습니다.
2. 하나님께 예배할 때 여호와 샬롬이 이루어졌습니다
예배는 예수님과 만남의 시간입니다. 예배를 통해 우리에게 응답하십니다.
기드온이 소 새끼 하나를 준비하고, 가루 한 에바로 무교전병을 만들고 고기를 소쿠리에 담고 국을 양푼에 담아서 상수리나무 아래 그에게 가져다가 드렸습니다. 어떤 대상에 드린다는 것은 그 대상에게 소속되는 것을 의미합니다. 그러므로 예수께서는 “네 보물이 있는 그곳에는 네 마음도 있느니라”고 하셨습니다. 바울은 “너희 몸을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거룩한 산 제사로 드리라 이는 너희의 드릴 영적 예배니라”고 하였습니다.
우리들이 몸과 귀한 것을 하나님께 발칠 때 하나님이 주시는 참 평안과 기쁨을 맛보게 됩니다. 시간을 바쳐 주일예배에 참여하여 하나님께 예배드릴 때 평안이 옵니다. 주일을 지키지 못했을 때 마음속에 평안이 없는 상태가 정상적인 상태입니다. 이런 성도는 주일을 범할 수가 없게 됩니다. 주일을 범하고도 심중에 불안이 생기지 않는 것은 이미 타락하고 있는 증거입니다. 예수님께 바쳐야 할 헌금을 바칠 때 평안이 있음을 우리는 경험합니다. 바칠 것을 안 바칠 때 불안이 와야 정상적인 신앙심리입니다. 하나님께 바칠 것을 모든 일을 하기 전에 깨끗이 우선적으로 바치십시오. 그리하면 반드시 <여호와 샬롬>은 이루어집니다.
잘 아는 권사님 한 분이 있었습니다. 이 권사님이 자기 집을 마련하려고 돈을 모아 두었습니다. 지금부터 5년 전이니까 많은 돈이었습니다. 부부가 직장 생활을 하여 푼푼이 모든 돈이었습니다. 집을 사려고 찾아다니고 있을 때 고향에서부터 잘 아는 목사님이 천막을 치고 개척교회를 시작하였습니다. 권사님 부부는 고민이 생겼습니다. 집을 사느냐 교회에 바쳐 예배당을 짓느냐? 어떻게 했겠습니까? 생각 끝에 집을 살 돈을 몽땅 교회에 바쳤습니다. 그리하여 그 헌금에 큰 힘이 되어 아담한 교회당을 짓고 집회를 하게 되었습니다. 그때 그 권사님이 찬송 인도를 하였는데, 권사님 자신이 얼마나 기뻐하는지 본인도 모르는 사이에 보는 사람들로 하여금 큰 기쁨을 끼쳤다고 합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여러분의 마음속에 평안을 누리기를 바랍니까? 그렇게 되려면 예수님께 최상의 것을 바치십시오. 그리하면 최상의 축복과 최상의 평안을 받게 될 것입니다.
아브라함은 이삭을 모리아 산에서 번제로 바치려고 칼을 잡고 아들을 바치려고 할 때에 여호와의 사자가 아브라함을 불러 그 일을 멈추게 하고 수양을 대신하여 번제물로 드리게 하셨던 것입니다. 자식을 단에서 내려놓고 수양을 번제물로 드려 놓고 아버지와 아들이 함께 하나님께 예배를 드릴 때 아브라함의 마음속에 넘치는 감격과 평안을 이루 형용할 수가 없었을 것입니다. 독자까지 아낌없이 드린 아브라함에게 주신 하나님의 상급이었습니다.
하나님께 바치십시다. 우리의 생애와 가장 귀한 것들이 예수님의 나라에 필요하다면 바치십시다. 그러면 반드시 더 큰 축복과 평안이 임할 것입니다.
3. 응답이 임할 때 여호와 샬롬이 이루어졌습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응답을 받아야 합니다. 다윗은 주께 항상 응답을 받으며 살았습니다.
제물을 드렸을 때 여호와의 사자가 손에 잡은 지팡이 끝을 내밀어 고기와 무교전병에 대매 불이 반석에서 나와 고기와 무교전병을 불살랐습니다. 이렇게 불이 임하여 제물을 사른 것은 하나님의 응답이 있었습니다.
엘리야가 갈멜산 위에서 바알 선지자들과 어느 신이 참신인지 불의 응답으로 판가름하기로 하고 기도했을 때 바알신은 불로 응답을 못했고, 엘리야의 하나님 여호와께서는 불로 응답하여 제물과 나무를 태우고 도랑의 물가지 핥았습니다. 이는 곧 하나님의 응답의 표현이었습니다,
우리의 삶은 하나님께 응답을 받고 사는 삶이 되어야 합니다. 기도의 응답이 있어야 합니다. 예배를 드릴 때 반드시 응답을 받아야 합니다. 응답이 없는 예배는 허공을 치는 것과 같은 것입니다. 베드로가 갈릴리 바다에 빠져 가면서 “주여 나를 구원하소서”하며 다급하게 부르짖자 예수께서 즉시 손을 내밀어 저를 붙잡으시며 배 위로 올려 주셨습니다. 그때 베드로에게 응답이 없었다면 그는 죽었을 것입니다. 우리가 하나님께 응답을 받을 때 평안이 있는 것입니다.
믿음이 좋은 어머니가 자식이 교회에 잘 나오기를 기도하고 있었습니다. 늙은 몸이라 지팡이를 짚고 새벽마다 교회에 가서 자식 위하여 기도했으나 그 자식이 교회에 나오는 것을 못보고 죽었습니다. 장례를 마치고 그 아들이 무심코 현관을 보니 어머니가 짚고 다니던 지팡이가 임자를 잃고 있는 것을 보고 회개를 했다고 합니다.
어머니의 기도가 죽은 후에 이루어진 것입니다. 하나님은 살아 계셔서 우리들의 기도를 들어주십니다. 하나님은 응답의 하나님이십니다. 다윗이 아들 압살롬을 피하여 다닐 때 지은 시(詩) 중에 “내가 나의 목소리로 여호와께 부르짖으니 그 산성에서 응답하시는도다 내가 누어 자고 깨었으니 여호와께서 나를 붙드심이로다 천만인이 나를 둘러치려 하여도 나는 두려워 아니하리로다” 시편 3:4~6의 말씀입니다. 이 시는 하나님이 응답만 하여 주신다면 천만인의 원수가 몰려와도 겁날 것이 없다는 뜻입니다. 여러분 중에 중대한 목표를 세워 두고 기도하고 있는 성도들이 있습니까? 그 기도가 응답 받기를 예수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낙심하지 아니하면 때가 이르매 거둘 것이니 응답을 받을 때까지 무릎을 땅에서 띄지 않는 간절함이 있기를 바랍니다. 여호와 하나님께 응답을 받으면 여호와 샬롬이 이루어지는 것입니다.
1945년 제2차 대전이 끝나고 결정된 유네스코 헌장의 서문에 “전쟁은 인간 중심에서 발생하는 것이므로 인간 마음속에 평화의 방패를 건설하지 않으면 안될 것입니다.”라고 쓰여져 있다고 합니다. 우리 마음속에 꼭 있어야 할 것은 “여호와 샬롬” 입니다.
하나님이 주시는 평강, 얼마나 좋습니까? 세상이 주는 것과는 질적으로 다른 영원하고 거룩한 평안이 이 말씀을 듣고 읽는 온 성도들, 마음속에 넘치기를 축원합니다.
박넝쿨의 교훈
욘 4:1~2
요나가 심히 싫어하고 노하여 여호와께 기도하여 가로되 여호와여 내가 고국에 있을 때에 이러하겠다고 말씀하지 아니하였나이까 그러므로 내가 빨리 다시스로 도망하였사오니 주께서는 은혜로우시며 자비로우시며 노하기를 더디하시며 인애가 크시사 뜻을 돌이켜 재앙을 내리지 아니하시는 하나님이신 줄을 알았음이니이다 (욘 4:1~2)
적국인 수리야의 서울인 니느웨에 전도하라는 하나님의 명령을 불순종하고 다시스로 배를 타고 도망하던 요나는, 갑자기 풍랑이 일어나 모든 선객들이 사경에 이르게 된 원인이 자기의 죄 값이라는 책임을 지고 바다에 던짐을 받아 큰고기 뱃속에서 3일 3야를 고생하던 중 회개한 결과 죽지 않고 살아났습니다(욘 1:2).
두 번째 하나님의 명령을 받은 요나는 니느웨로 가서 외치기를 40일 후면 니느웨가 멸망한다고 경고를 합니다. 이에 왕으로부터 시작하여 백성에 이르기까지 굵은 베옷을 입고 재를 무릅쓰고 회개를 하였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저들의 회개를 보시고 40일 후에 내리시려든 멸망을 거두시었습니다.
이것을 본 요나는 자기 예언대로 되지 않으니 선지자의 자기의 체면 손상이요 적국이 멸망을 면하게 되니 마음이 편치를 아니했던 것입니다.
요나는 그렇게 된 것을 싫어하여 심히 노하며 하나님께 기도하기를 “나는 사는 것이 죽는 것만 못하니 속히 죽이어 달라”고 원망하였습니다.
하나님은 이렇게 성내는 것이 합당치 않다고 일러주셨지만, 요나는 종래 불만을 품고 니느웨 성 동문밖에 나가서 일간 초막을 짓고 거기 앉아 장차 니느웨가 어떻게 되는 것을 보려고 하였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이러한 요나를 교훈하기 위하여 박넝쿨 하나를 하룻밤 사이에 자라게 하여 요나의 초막을 덮게 하였다가 또 하룻밤 사이에 벌레로 박넝쿨을 씹게 하고 동풍을 불게 하사 시들어 마르게 하셨습니다. 뜨거운 햇빛이 쪼이는지라 요나는 또 성이 나서, 하나님 이럴 바엔 차라리 죽여 달라고 발악을 했습니다.
선지자 요나는 하룻밤에 났다가 매말라 버린 박넝쿨을 애석하게 여겨 성낼 줄은 알았지만 그 박넝쿨이 자기를 교훈하기 위함인 줄 몰랐습니다.
그 박넝쿨은 요나만을 위한 교훈이 아니라, 오늘날 우리에게도 보여주는 교훈이 얼마나 큰가를 잊어서는 안됩니다.
1. 하나님께서 준비한 박넝쿨
요나가 니느웨 성의 되어지는 것을 보기 위하여 초막을 짓고 앉아있는 그 초막 위에 하룻밤 사이에 박넝쿨 하나가 올라가 뒤덮여서 서늘한 그늘이 되어 줄 때, 요나는 이렇게 된 것이 우연인 줄 알고 기뻐했지만 그것은 하나님께서 요나를 가르치기 위하여 준비한 것입니다.
본서에 하나님께서 요나를 교훈하기 위해 준비한 것이 4가지가 있습니다.
① 큰 고기를 예비하셨고 ② 박넝쿨을 준비하셨고 ③ 벌레를 준비하셨고 ④ 뜨거운 동풍을 준비하셨습니다.
그러므로 풀 한 포기, 벌레 한 마리가 우연이 된 것이 없고, 무의미 또는 목적이 없는 것이 하나도 없습니다.
그런즉 우주의 삼라만상은 사람이 사용하기 위해 주셨지만, 동시에 사람들을 교훈하기 위해 하나님께서 일일이 준비하신 것이라고도 볼 수 있습니다.
다윗은 "하늘이 하나님의 영광을 선포하고 궁창이 그 손으로 하신 일을 나타내는도다"(시 19:1), 바울은 “창세로부터 그의 보이지 아니하는 것들 곧 그의 영원하신 능력과 신성이 그 만드신 만물에 분명히 보여 알게 되나니 그러므로 저희가 핑계치 못할지니라” (롬 1:20)고 하였습니다.
애굽의 수도사 성 안토니우스는 “나의 책은 하나님이 창조하신 만상의 자연이라.”고 하였고, 플라톤은 “우주는 참 하나님의 편지라.”고 하였으니, 이는 모두 만물이 하나님께서 사람들을 가르치기 위하여 준비하신 실물 교재(책)란 말입니다. 요나를 가르치기 위하여 박넝쿨을 준비하신 하나님께서 인생을 가르치기 위하여 우주 만물을 준비하셨던 것입니다.
꽃은 인생의 무상함을 가르쳐주고, 개미는 인생의 근면을 가르쳐주고, 메뚜기는 사회 생활의 질서를 가르쳐주고, 대나무나 송죽은 절개를, 청산(靑山)은 침묵을 가르치며, 대해(大海)는 아량을, 잠자리는 라이트 형제에게 비행기를 가르쳐 주었고, 천장에 흔들리는 등잔은 갈릴레오에게 전자의 원리를, 거북이는 이순신 장군에게 전투함을 만드는 법을 가르쳐 주었습니다.
요셉은 애굽의 흉년을 위해 준비했고, 에스더를 왕후 위에 세움은 이스라엘을 하만의 살인 계획에서 구원키 위함입니다.
그러므로 우주 만물이나 되어지는 역사는 하나님께서 우리를 가르치고 교훈하기 위하여 준비하신 것이니 자연 만상에 귀를 기울이고 하나님의 음성을 들을 줄 알아야 합니다.
2. 박넝쿨로 인하여 성내지도 말고 기뻐하지 말라(욘 4:6)
요나는 박넝쿨이 초막에 덮일 때 매우 기뻐하였습니다. 그러나 하루 밤에 그것이 시들어 버리고 뜨거운 햇볕이 요나의 머리에 쪼이매 혼돈하여 지고 스스로 죽기를 구하여 말하기를 “사는 것보다 죽는 것이 좋겠다”고 발악을 하면서 성을 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요나에게 “네가 이 박넝쿨로 인하여 성내는 것이 합당치 않다”고 하셨으나, 요나는 “내가 성내어 죽기까지 할지라도 합당하다고” 하면서 항의하였습니다.
사실인 즉 요나가 박넝쿨로 인하여 기뻐할 바도 못되고 성낼 바도 아닙니다. 기뻐할 것이 없는 이유는 박넝쿨이란 조만간에 벌레가 씹던지 뜨거운 바람이 불던지 하여 곧 시들어 버릴 것이 정한 이치인 까닭입니다. 성낼 것이 없는 것은 수고도 아니하고, 배양도 아니하고, 절로 났다가 절로 시들어 졌는데 무슨 까닭에 누구에게 성을 내는가 말입니다. 하루 밤에 났다가 시드는 박넝쿨은 하나님께서 요나 자신을 교훈하기 위하여 준비한 것인 줄도 모르고 일시 서늘한 그늘이 자기를 가리운다고 하여 그것으로 인하여 기뻐하는 것처럼, 이 세상에는 언제 시들지 모르는 박넝쿨 같은 것을 인하여 기뻐하는 자들이 많습니다. 젊음이라는 박넝쿨, 권력이라는 박넝쿨, 혹은 돈이라는 박넝쿨, 남편․자식이란 박넝쿨 등 그 그늘에 앉아서 좋다고 하는 사람들이 많이 있습니다. 한쪽에서는 벌써 박넝쿨을 씹는 벌레가 준비된 줄도 모르고 말입니다. 동풍이 준비된 줄도 모르고 말입니다.
사실상 파스칼이 말한 데로, 우리 인생은 추운 겨울에 아이들이 양지 족에 모여서 금을 그어가며 따뜻한 양지쪽을 뺏다가 해 넘어 갈 때면 부모님의 부름으로 집으로 돌아가는 것과 같습니다.
▶ 너, 청춘의 아름다움을 자랑치 말라. 어느덧 하루 밤에 시드는 박넝쿨 사라지는 박꽃같이 되리라.
▶ 너, 권력의 박넝쿨을 기뻐하지 말라. 알렉산더도 열병의 바람에 시들어 버렸고, 나폴레옹도 쎈트헬레나 고도에서 시들었다. 씨이저의 권력도 하루 아침 한줌의 흙으로 돌아가 버렸다.
▶ 너, 돈이란 박넝쿨로 기뻐하지 말라. 남편이란 박넝쿨, 자식이란 박넝쿨을 좀이 먹고 도적에게 빼앗길 날이 오고야 말 것이다.
이는 다 하루 밤에 덮였다가 하루 밤에 시드는 박넝쿨이니 그것을 인하여 기뻐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그리고 또한 기뻐하던 박넝쿨이 하룻밤 새에 시든다고 성내지 말라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주셨다가 하나님께서 걷어 가시니 가르쳐 주시는 교훈이 무엇인가를 알아보는 것은 합당한 일이로되 성내는 것은 합당치 않다는 것입니다.
욥은 재물, 자녀, 건강이란 박넝쿨이 하루 아침에 다시들고 말라 버렸지만 “하나님이 주셨다가 하나님이 찾으시니 가히 여호와를 찬송하리로다.”고 하나님께 성내기는커녕 오히려 감사하며 찬송했던 것입니다.
때때로 사람들은 혹 사업에 실패하고, 혹 병고에 시달리고, 혹 자기 소원이 이루어지지 않거나, 기타 무슨 손해라도 뜻밖에 보게 되면 하나님을 원망 내지 그 존재를 의심하고 믿지 않습니다.
“안 믿는다, 교회에 나간다 안 나간다” 하는 사람이 있는데, 이 모두가 다 박넝쿨로 인하여 성내는 사람과도 같습니다. 박넝쿨이 한번 생겼다가 시드는 것은 정한 이치이듯, 이 세상 흥망성쇠가 모두 하루 밤에 났다가 하루 밤에 망하는 박넝쿨 같은 것이니 박넝쿨 같은 것 때문에 공연히 기뻐하거나 성내지 말아야 하겠습니다. 자기환경이나, 자기 가정이 나쁘다고 불평하지 마세요. 자기 직장이 나쁘다고 불평하지 마세요. 자기 교회가, 교우가, 목사가 나쁘다고 불평하지 마세요. 하나님의 깊은 뜻을 찾아 감사하십시다.
3. 역지사지(易地思之)의 교훈을 보여줍니다.
전도자의 목적은 죄인이 회개하여 구원을 얻게 함이요, 전도자의 기도는 죄인에게 내리실 재앙을 내리지 않도록 간구해야 합니다. 요나는 니느웨에 가서 전도한 결과 저들이 회개하는 것을 도리어 싫어하였고, 하나님께서 40일 후에 내리시겠다는 재앙을 내리시지 않는다고 도리어 성을 내며 하나님께 화풀이를 했으니, 저가 전도인으로는 아직 미흡한 점이 많으며, 박넝쿨이 시들었다고 성을 내어 하나님께 죽여 달라고 화풀이 기도했으니 요나는 선지자로서 매우 편협한 것입니다.
이러한 요나를 가르치기 위하여 하룻밤에 피었다 시들게 한 하나님께서, 시들은 박넝쿨을 인하여 성난 요나에게 말씀하시기를 “네가 수고도 아니하고 배양도 아니하였고 하룻밤에 났다가 하루 밤에 망한 이 박넝쿨을 네가 아끼거늘 하물며 이 큰 성읍 니느웨에는 좌우를 분별치 못한 자가 12만 명이요 육축도 많이 있나니 내가 아끼는 것이 합당치 아니하냐”고 하셨으니, 이는 곧 처지를 바꾸어 놓고 생각하라는 교훈입니다.
“너는 수고도 배양도 아니한 박넝쿨도 사랑하는데 내가 양육한 니느웨성 백성을 어찌 사랑치 않겠는가 너는 한 개의 박넝쿨도 아끼는데 생명을 소유한 그 많은 니느웨 사람을 어찌 아끼지 않겠는가?” 역지사지 - 바꾸어 놓고 생각하면 하나님의 관용을 요나도 충분히 이해할 수 있을 것입니다.
사람은 누구나 하나님의 광대하신 계획과 무한하신 그 자비와 사랑을 다 이해할 수 없습니다. 그런데 사람들은 자기의 기준에 의해서 자기 마음에 들지 않으면 토라져서 불평, 불만하며 살아가고 있습니다. 그러나 항상 역지사지하면 하나님의 마음을 잘 이해할 수 있을 것입니다.
▶ 기도 응답에 대하여 / “너희가 악할 찌라도 좋은 것을 자식에게 줄줄 알거든 하물며 하나님께 구하는 자에게 좋은 것을 주지 않겠느냐”
▶ 헌물에 대하여 / “눈먼 것, 병든 것, 저는 것을 너희 총독에게 드려 보라 받겠는가? 하물며 하나님께 드릴 수 있겠는가”
▶ 의식 문제에 대하여 / “새도 먹이시고 백합화도 입히시는 하나님께서 하물며 사랑하는 자녀들에게 의식을 주지 않겠느냐”
▶ 나 같은 죄인도 나의 자녀들이 나를 거역하고 불순종하면 맘이 아픈데, 하물며 하나님께서 패역하고 불순종하는 자에게 통분하지 않겠는가.
이렇게 모든 일을 하나님과 우리 입장에 바꾸어 생각해 보면, 하나님께서 하시는 모든 일을 이해할 수 있으며 순종할 마음이 생기게 되는 것입니다.
결 론
하루 밤에 있다가 망한 박넝쿨도 하나님이 준비하신 것입니다. 박넝쿨로 인하여 기뻐하지도 성내지도 말아야 하겠습니다. 박넝쿨을 아끼는 심정으로 역지사지해야 하겠습니다. 그리하면 박넝쿨 하나를 보고도 하나님께서 하시는 모든 일을 이해할 수 있을 것입니다. 하루 밤에 있다가 망한 박넝쿨 하나도 우리에게 주는 교훈이 이렇게 크다면 이 우주에 충만한 삼라만상은 얼마나 많은 교훈을 지니고 있을까요? 우리 모두는 조용히 귀를 기울이고 하나님의 음성을 들어보십시다.
이러한 직분을 주옵소서
요 2:1~11
사흘 되던 날에 갈릴리 가나에 혼인이 있어 예수의 어머니도 거기 계시고 예수와 그 제자들도 혼인에 청함을 받았더니 포도주가 모자란지라 예수의 어머니가 예수에게 이르되 저희에게 포도주가 없다 하니 예수께서 가라사대 여자여 나와 무슨 상관이 있나이까 내 때가 아직 이르지 못하였나이다 그 어머니가 하인들에게 이르되 너희에게 무슨 말씀을 하시든지 그대로 하라 하니라 거기 유대인의 결례를 따라 두 세 통 드는 돌항아리 여섯이 놓였는지라 예수께서 저희에게 이르시되 항아리에 물을 채우라 하신즉 아구까지 채우니 이제는 떠서 연회장에게 갖다 주라 하시매 갖다 주었더니 연회장은 물로 된 포도주를 맛보고 어디서 났는지 알지 못하되 물 떠온 하인들은 알더라 연회장이 신랑을 불러 말하되 사람마다 먼저 좋은 포도주를 내고 취한 후에 낮은 것을 내거늘 그대는 지금까지 좋은 포도주를 두었도다 하니라 예수께서 이 처음 표적을 갈릴리 가나에서 행하여 그 영광을 나타내시매 제자들이 그를 믿으니라
자신의 소유나 지위에 대해서 불만을 가진 사람이 빠지게 되는 함정이 비교의식입니다. 이러한 경우에 적용되는 옛말이 있습니다. “남이 떡이 더 커 보인다”는 속담입니다. 하찮아 보일지라도 일단은 자족(自足)하는 자세를 생활화하면 자연스럽게 감사의 생활로 연계가 되고 그로 인하여 자신에게 은혜가 더해 질 것입니다.
● 민수기 4장은 성막이 다른 곳으로 옮겨질 때의 상황을 설명하는 내용입니다. 광야의 성막을 요즈음 말로 표현한다면 조립식 이동식 교회입니다. 성막 위에 있는 구름기둥이나 불기둥이 떠올라서 움직이면 이스라엘 전체가 구름기둥이나 불기둥의 인도를 따라서 행진하여야 합니다. 조립식으로 되어 있는 성막은 해체작업을 거쳐 고핫 자손, 게르손 자손, 므라리 자손들에 의하여 운반되었습니다.
고핫 자손은 엘르아살의 감독 하에 해달의 가죽, 수놓은 세마포, 순청색 보자기. 청색보자기. 홍색 보자기 등으로 포장된 성소와 성소의 모든 기구들을 어깨로 메어 운반하는 일을 하였습니다. 이때 성소의 모든 성물들의 포장은 제사장(아론의 아들들)이 담당합니다. 단지 고핫 자손은 포장되어진 성물들을 어깨로 메어 운반하는 일을 하였습니다. 이들에게 두 가지 엄한 명령이 주어졌는데 한가지는 “어깨에 메어 운반하라”이며, 다른 한가지는 “성물을 만지지도 말며 성소를 잠시라도 보지 말라”는 것입니다(민 4:15, 20).
고핫 자손의 입장에서 가지는 불만과 불평이 있을 수 있습니다. 같은 레위 지파인데 제사장들은 옷도 멋이 있고 자신들처럼 힘든 일도 하지 않습니다. 그런데 자신들은 어깨로 짐을 나르는 막 노동을 하여야 합니다. 실제로 고핫 자손 중에 고라라는 사람이 모세와 아론을 대하여 반역을 일으킨 내용이 민수기 16장에 나옵니다.
레위의 증손 고핫의 손자 이스할의 아들 고라와 르우벤 자손 엘리압의 아들 다단과 아비람과 벨렛의 아들 온이 당을 짓고 2) 이스라엘 자손 총회에 택함을 받은 자 곧 회중에 유명한 어떤 족장 이 백 오십 인과 함께 일어나서 모세를 거스리니라 3) 그들이 모여서 모세와 아론을 거스려 그들에게 이르되 너희가 분수에 지나도다 회중이 다 각각 거룩하고 여호와께서도 그들 중에 계시거늘 너희가 어찌하여 여호와의 총회 위에 스스로 높이느뇨 (민 16:1~3)
스스로 높아지려는 생각과 자신이 하고 있는 일에 대한 불만이 합쳐지면서 교만과 반역의 열매를 맺게 되었습니다. 내게 주어진 은사를 감사하고 내게 맡겨진 역할에 대하여 감사하는 자세를 가져야 합니다. 투덜거림과 억지봉사는 제2의 고라당을 형성할 뿐입니다.
이 원리를 깨달은 고라 자손은 이러한 시를 지었습니다.
주의 궁정에서 한 날이 다른 곳에서 천 날보다 나은즉 악인의 장막에 거함보다 내 하나님 문지기로 있는 것이 좋사오니 여호와 하나님은 해요 방패시라 여호와께서 은혜와 영화를 주시며 정직히 행하는 자에게 좋은 것을 아끼지 아니하실 것임이니이다 (시 84:10~11)
군대는 계급사회입니다. 병들이나 위관, 영관의 입장에서는 별을 단 장군이 하늘처럼 보이게 됩니다. 별을 단 장군도 화장실에 갈까하는 의문을 가지게 됩니다.
젊은 군목의 전도로 별을 단 장군이 예수님을 영접하고 교회에 출석하게 되었습니다. 이분이 예배에 참석하여 말씀을 듣고 은혜를 받게 되었습니다. “목사님 무엇이든지 시키는 대로 다 하겠습니다. 교회 청소를 제가 맡아서 하고 싶습니다." 사단장이 교회청소를 하겠다는 말을 들은 목사님은 망설이다가 다른 일감을 이분께 맡기게 되었습니다. “사단장님은 매주일 교회 입구에서 들어오는 모든 사병들에게 예배 순서지를 나누어주십시오.” 이제까지는 경례를 받는 위치에서 한사람 한사람에게 머리를 숙여 정중하게 인사를 하면서 모든 부하들을 섬기는 일을 하였습니다. 그야말로 성전의 문지기가 되는 생활을 하였습니다.
게르손 자손도 아다말의 감독 하에서 성막의 부속물을 어깨로 운반하였습니다(민 4:25~26).
므라리 자손은 제사장 이다말의 감독 하에서 성막 중에서 제일 무거운 부분들을 운반하게 되었습니다. 므라리 자손은 왜 우리만 무겁고 힘든 일을 해야 하느냐는 항의를 하지 않았습니다. 그저 성실하고 묵묵히 직무를 다 감당하였습니다(민 4:31~32).
이들이 각자의 직무를 감당하는데는 원칙이 있었습니다. 성물을 만지거나 들여다보면 죽음을 당하게 됩니다(철저한 겸손). 반드시 어깨에 메어야 합니다(정성을 다하는 봉사).
그런데 사무엘하 6장에는 이러한 원칙을 무시하였던 웃사가 즉사하는 장면이 나옵니다.
저희가 나곤의 타작 마당에 이르러서는 소들이 뛰므로 웃사가 손을 들어 하나님의 궤를 붙들었더니 여호와 하나님이 웃사의 잘못함을 인하여 진노하사 저를 그 곳에서 치시니 저가 거기 하나님의 궤 곁에서 죽으니라 (삼하 6:6~7)
법궤가 옮겨질 때 성직을 위해 구별된 레위지파 중 고핫 자손들이 어깨에 메어야 한다는 원칙을 무시하였던 것입니다. 그런데 레위 지파도 아닌 웃사가 감히 하나님의 법궤를 만진 것입니다. 법궤가 다윗 성으로 옮겨진다는 기쁨 때문에 원칙을 무시한 체 열심만 앞서게 되었습니다. 법궤를 구별된 성직자들의 어깨에 메어 옮기라는 명령 가운데는 하나님의 말씀을 거룩하고 귀하게 여기라는 의미가 담겨 있습니다. 그런데 웃사는 소들이 놀라 뛰고 법궤가 흔들리며 수레에서 떨어지려고 하자 손을 내밀어 법궤를 붙잡았습니다. 열심도, 정성도, 염려해주는 것도 좋지만 하나님께서 정하여 주신 직무와는 전혀 상관이 없는 일을 해서는 안됩니다.
아무리 법궤가 떨어지려고 한들 그것이 떨어지겠습니까? 사실 이스라엘은 과거에 법궤를 블레셋에 빼앗기는 큰 수모를 겪었습니다. 이보다 더 큰 실수와 수모가 어디에 있겠습니까? 그러나 하나님은 그곳에서도 기적을 일으킴으로 우상들을 다 때려부순 다음에 블레셋 사람에 의해 정중히 수레에 실려 법궤가 되돌아왔습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교회는 하나님께서 세우신 곳이요, 하나님을 위해 세워진 곳이며, 하나님에 의하여 움직여지는 교회인 줄 믿으시기 바랍니다. 내가 아는 지식과 내가 하는 열심만으로 교회가 되어지는 것은 결코 아닙니다. 하나님의 일을 할 때도 법과 질서가 있어야 합니다. 여러분들 중에는 그러한 사람이 없을 줄로 믿습니다만 공연히 하나님의 일을 한다고 웃사와 같이 월권을 해서는 안됩니다. 사울 왕이나 웃시야 왕처럼 하나님의 종만이 할 수 있는 일들을 자기네들이 하려다가 축복 대신 재앙을 받는 일이 있어서는 안됩니다.
기독교 복음은 이렇게 많은 학자나 재능있는 사람들에 의해서 여러가지 많은 업적을 남겼지만, 그 반면에 무식하고 연약한 사람들에 의해서도 수없이 많은 업적이 남겨졌습니다.
수많은 진리를 알면서도 진리를 기초로 해서 살지 아니한 사람들이 많이 있습니다. 그러나 이름도 없이 빛도 없이 산 사람들은 비록 진리가 무엇인지를 이론상으로 잘 몰랐지만 이들은 진리를 위해서 희생하기를 조금도 두려워하지 않았던 사람들입니다.
그들의 이름이나 그들의 직업은 보잘 것 없어도 그들이 남긴 신앙적 행위(업적)만큼은 그 누구보다도 소중한 것이었습니다. 그들이 남긴 책 한 권 없고, 그들이 남긴 명언 한 마디 없어도 그들이 남긴 신앙적 행위는 그 무엇보다도 진실하고 그 누구보다도 뜨거웠던 것입니다.
성경에는 이러한 사람들의 이야기가 많이 나오고 있습니다. 본문에 나오는 가나의 잔칫집의 하인들이 이러한 사람들이었습니다. 그들은 신랑 신부나 또는 손님에 비해서 보잘 것 없는 존재에 불과했지만 예수님의 사역에서 이들은 가장 중요한 인물이 되었던 것입니다.
예수님의 공생애 중에 제일 먼저 기적을 베푸신 가나의 잔칫집은 기독교 복음의 위치상 대단히 중요한 의미를 갖추고 있습니다. 이 잔칫집은 교회를 상징하기도 하는 장소이기도 한데, 이 잔칫집에는 많은 사람들이 있었습니다. 초청을 받은 예수님과 어머니 마리아 그리고 제자들이 있었습니다. 그리고 당연히 신랑 신부가 있었으며, 손님으로 먹고 즐기는 사람도 많았을 것입니다. 또 잔치를 주관하는 연회장도 있었고, 물을 긷고 험한 일을 하는 종들도 있었습니다. 이 중에 오늘 우리가 함께 초점을 맞추고자 하는 인물은 물을 길어다 돌항아리에 부은 하인들입니다.
1. 이들은 명령에 따라 봉사한 평범한 사람들입니다
이 잔칫집에서 즐거움을 주는 사람이 누구입니까? 먹고 노는 손님도 아니며 그렇다고 연회장과 같은 직분자도 아닙니다. 이름도 없이 믿음을 가지고 땀흘려 수고한 하인들이 이 잔칫집에 기쁨과 즐거움을 되찾게 해주었습니다.
오늘도 교회를 지키는 사람이 누구인가? 목사님만은 아닙니다. 손님처럼 교회 생활에서 교회의 어려움을 모르고 그저 교회에 왔다가 가는 그러한 사람도 아닙니다. 하인들처럼 교회의 어려움을 안고, 남 몰래 눈물을 흘리며 기도도 하고, 땀 흘리는 수고하고, 뼈 빠지는 봉사도 하는 그러한 평범한 사람들이 있었기에 교회는 더 발전하게 되는 것입니다.
오늘도 예수님은 교회에 오셔서 묵묵히 수고하고 희생하는 평범한 사람들을 통해서 역사하십니다. 지금도 돌 항아리같이 보잘 것 없는 평범한 사람들일지라도 그곳에 예수님은 생수의 말씀 채워 주시고, 나중에는 귀한 포도주와 같은 사람으로 변화시켜 남들을 기쁘게 해 주는 큰 일을 하게 하십니다.
2. 이들의 순종으로 기적이 일어났습니다.
종들은 예수님이 말씀하실 때마다 순종했습니다. 물을 채우라고 했을 때 순종했습니다. 물을 연회장에게 갖다 주라고 했을 때도 순종했습니다. 순종은 신앙생활을 하는 사람이 하나님께 보이는 가장 기본적인 신앙적 자세입니다. 신앙생활을 하는 사람이 다른 모든 것이 남들에 비해 부족하고 또는 없을지라도 순종하는 믿음만 있으면 하나님의 은혜를 받을 수 있습니다.
하나님은 사람을 사용하실 때 먼저 순종을 달아보실 경우가 많습니다. 하나님은 사람의 많은 재능 중에서도 순종하는 사람을 가장 귀하게 사용하십니다.
돌 항아리는 귀한 그릇이 아닙니다. 물이 두말 반정도 들어가는 돌항아리에 불과합니다. 거기에 채운 물은 밥상에 오르는 먹는 깨끗한 물이 아닙니다. 그렇다고 세례를 줄 때 사용하는 정결한 물은 더욱 아닙니다. 발 씻기는 물로 별로 귀한 것이 아닙니다. 천하고 천한 것이 천한 사람들에 의하여 천한 곳에 들어왔을지라도 순종이 있을 때에는 하나님께서 그러한 곳에라도 기적을 만들어 주신다는 말입니다.
특별히 하나님께서는 당신이 쓰시는 종들을 통하여 많은 역사를 이루어 오셨습니다. 지금도 그리하실 것입니다. 우리네들도 이렇게 쓰임을 받을 때가 있었을 것입니다. 언제입니까? 하인들과 같이 이름도 없이, 빛도 없이, 묵묵히 어린양과 같이 순종했을 때가 아닙니까? 오늘날 하나님께서 이러한 사람들과 함께 일하시기 위하여 우리들 중에 임하실 것입니다. 여러분 모두가 다 하나님께 쓰임을 받는 종들이 되시기 바랍니다.
그런데 어느 때부터인지 교회에는 바리새인처럼 모세의 자리에 앉아서 예수님과 같이 명령만 하고 자기 자신들은 손끝 하나 움직이려 하지 않고 또 마리아처럼 하인들에게 순종만 하라고 말하는 사람이 많아졌습니다. ‘이만큼 하면 됐지’하며 일하던 손을 놓고 손님들처럼 편안히 먹고 즐기려 하고 있습니다.
예수님의 공생애를 초기, 중기, 말기로 나누었을 때에 초기, 중기에는 많은 말씀을 전파하시고 기적도 베푸셨지만 말기로 가면서는 제자들에게 십자가를 질 것을 명령하시거나 섬기는 자가 되라고 강조하셨습니다. 그리고는 전파하신 말씀을 실천으로 보여 주시는 시청각 교육을 하셨습니다. 마지막에는 맡겨진 일에 최선을 다하기 위해 온 인류의 구원을 위해 십자가에 못박히셨습니다.
본문에 나오는 하인들이 주는 교훈이 있다면 예수님의 말씀에 순종했다는 것이 귀한 것이라고 말입니다.
오늘도 마당에 놓인 항아리처럼 사람에게는 별로 인정받지 못하는 사람이 있습니다. 그가 가진 재능이나 환경도 별것이 아닙니다. 그러나 예수님께 순종함으로 귀히 쓰임을 받는 사람들도 있다는 말입니다.
대개 사람들은 순종이 어렵다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순종은 어려운 것이 아닙니다. 종이 물을 항아리에 채우는 것은 당연히 해야 되는 일이요 능히 할 수 있는 일입니다. 그렇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은 하기 어려워서 순종하지 못하는 것보다 우리의 불신앙과 불성실이 순종의 장해가 되는 경우가 많이 있습니다. 하나님의 축복은 어떤 축복이던지 반드시 이면에 성도의 순종이 그 바탕을 이루고 있는 것입니다.
신앙이 좋으면 좋을수록 늘 순종하는 생활을 해야 합니다. 아브라함처럼 어떠한 일에도 순종할 수 있어야 합니다. 사람이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지 못하는 생활은 하나님과 점점 멀어져 가는 생활의 증거입니다.
하인들이 순종했을 때 그들의 수고로 다른 많은 사람들에게 기쁨을 주었던 것처럼 순종하는 사람은 그 열매로 많은 사람들에게 유익을 주고 기쁨을 주는 것입니다.
3. 믿음의 용기를 가진 사람들이 있습니다.
종들은 순종으로 돌 항아리에 물을 채웠습니다. 이제 남은 일은 물을 떠서 연회장에게 갖다 주어야 합니다. 예수님은 하인들에게 그들이 갖다 채워둔 물을 포도주로 연회장에게 갖다 주라고 하셨습니다. 사실 이일은 물을 항아리에 붓는 일보다 더 어려운 일입니다. 어떻게 물을 가져다가 주면서 이것이 포도주라고 말할 수가 있겠습니다. 그러나 하인들은 일단 포도주가 되리라는 예수님의 말을 믿었던 것입니다. 현재는 물이 변하여 포도주가 되지 않았지만 어느 시점에는 틀림없이 그렇게 될 것을 분명히 믿었습니다. 바로 그들 자신이 조금 전에 갖다 부은 물로 말입니다. 물을 가져다 붓는 것은 그리 어려운 일만은 아닙니다. 그러나 물을 떠서 연회장에게 가져다주는 것은 기적을 믿지 않고는 감히 엄두도 못낼 순종입니다.
사실 알고 보면 믿음처럼 쉬운 것은 없지 않습니까. 우리가 기적을 베푸는 것도 아니고 전지전능하신 하나님께서 베푸시는 일인데도, 왜 그렇게 나 자신부터가 잘 안 믿어지는지 모르겠습니다. 아예 종들처럼 처음부터 순종하여 순종으로 끝마칩시다. 히브리서 11장에 나온 믿음의 조상들처럼 하나님의 전지전능하심을 믿고 그분의 명령만을 순종한다면 오히려 기적은 쉽게 일어날 것입니다. 한 번 다시 백부장의 믿음을 생각하며 우리의 믿음 없음을 고백하고 믿음이 더하여 지기를 기도하십시다.
물이 변하여 포도주가 된 사실에 대하여 3가지 반응이 나왔습니다.
① 물로 된 포도주를 맛보고 연회장은 어디서 났는지 알지 못하여 신랑을 불러 “사람마다 먼저 좋은 포도주를 내고 취한 후에 낮은 것을 내거늘 그대는 지금까지 좋은 포도주를 두었도다”라는 반응 즉 맛있는 좋은 포도주가 있다는 사실에 대하여 감탄을 하였습니다. 되어진 사실 즉 기적만을 보고 감탄하는 것입니다.
② 예수님께서 이 처음 표적을 갈릴리 가나에서 행하여 그 영광을 나타내시매 제자들이 기적을 일으키시는 예수님을 더욱 믿게 되었습니다. 믿음이 기적을 통하여 더 좋아지는 경우입니다.
③ 물 떠온 하인은 어디서 포도주가 났는지 알더라고 하였습니다. 이는 왜 포도주가 만들어졌으며, 어떻게 해서, 누가, 무엇으로 만들었는가를 분명히 알았습니다. 어떤 점에서 보면 그곳에 있던 사람들 중에 가장 가까이에서 목격하고 진리를 나름대로 깨달은 사람이었습니다. 다음에도 기회가 있으면 그렇게 할 것입니다.
결 론
(롬 1:1) 예수 그리스도의 종 바울은 사도로 부르심을 받아 하나님의 복음을 위하여 택정함을 입었으니
로마서는 바울이 3차 여행을 하던 중 고린도에서 겨울을 지내면서 로마의 성도들에게 쓴 편지입니다. 이 서신은 비서 더디오가 바울의 구술을 받아 적었고 여집사 뵈뵈가 전달했습니다. 바울은 편지를 교회에 쓸 때마다 종이란 말을 많이 사용했습니다.
당시 로마에는 전체인구의 절반도 넘는 노예가 살았는데 그들은 전혀 인격적인 대우를 받지 못하는, 그야말로 생산수단에 불과한 자들이었습니다. 그래서 흔히 ‘노예와 당나귀는 같다. 노예는 말을 할 수 있고 당나귀는 말을 할 수 없는 것이 다를 뿐이다’는 속담이 생겨날 정도였습니다. 반나체가 된 노예가 시장에 나와 있으면 지나가던 자유인이 마음에 드는 노예를 손가락으로 지적하고 값을 지불하면 그의 것이 되었습니다. 이처럼 노예란 비참하기 그지없는 신분이었습니다. 그런데 바울이 사용하고 있는 ‘종’은 바로 이 노예를 의미하고 있는 것입니다. 노예에게는 족보도 없고, 이름도 없고, 인격적인 대우는커녕 짐승과도 같은 대우를 받을 뿐입니다. 아마도 당시에 노예가 되기를 자진하는 사람은 없었을 것입니다.
그런데 바울은 본분에서 ‘종’이라는 개념을 사용하면서 어쩔 수 없는 상황 속이기에 자신을 ‘종’이라고 표현하고 있는 것이 아닙니다. 오히려 바울은 기쁨과 열정에 들떠서 종이 된 것을 자랑하고 있는 것입니다.
예수님이 세상의 구원자라는 사실을 확인하게 되었을 때, 세상의 구원자 예수님이 핍박자의 괴수이며 살인자인 자기를 용서해 주셨을 뿐만 아니라 사도의 직분까지 주셨다는 것을 깨닫게 되었을 때 바울은 얼마나 감격했을까요? 이 경험 때문에 그는 그의 길이 험악한 십자가의 길(행 9:16)이며, 멸시와 조롱의 길(고전 4:9)이라는 것을 잘 알면서도 종으로서 자기 자신을 철저히 부인하고, 이제는 빚진 자가 되어 많은 영혼들을 위해 죽을 각오(행 20:24)를 하게 된 것입니다.
여기에서 종에게는 갖추어야 할 자격이 있습니다. 자기 자신에 대한 3중 부정, ‘나는 주인이 아니다’, ‘내 것은 아무 것도 없다’, ‘내 마음대로 살면 안 된다’가 그것입니다.
어떠한 핍박도 두려워한다거나 피하지 않고 십자가를 지고 묵묵히 앞에 계신 예수님만 바라보며 갑니다. 아무리 힘들고 어려워도 맡겨진 일에 기쁨으로 최선을 다합니다. 이름도 없고, 빛도 없을지라도 십자가에 못 박혀 무덤 속까지 들어갑니다. 오직 하나님의 영광과 그리스도의 복음 전파를 위해서라면 말입니다. 하나님은 오늘날도 이와 같은 충직한 마지막 때의 추수꾼으로 부르시고, 그러한 일꾼들에게 능력을 베푸사 그들을 통하여 기적을 베푸실 것입니다.
나눔은 기적을 낳는다
요 6:5~13
예수께서 눈을 들어 큰 무리가 자기에게로 오는 것을 보시고 빌립에게 이르시되 우리가 어디서 떡을 사서 이 사람들로 먹게 하겠느냐 하시니 이렇게 말씀하심은 친히 어떻게 하실 것을 아시고 빌립을 시험코자 하심이라 빌립이 대답하되 각 사람으로 조금씩 받게 할지라도 이백 데나리온의 떡이 부족하리이다 제자 중 하나 곧 시몬 베드로의 형제 안드레가 예수께 여짜오되 여기 한 아이가 있어 보리떡 다섯 개와 물고기 두 마리를 가졌나이다 그러나 그것이 이 많은 사람에게 얼마나 되겠삽나이까 예수께서 가라사대 이 사람들로 앉게 하라 하신대 그 곳에 잔디가 많은지라 사람들이 앉으니 수효가 오천쯤 되더라 예수께서 떡을 가져 축사하신 후에 앉은 자들에게 나눠 주시고 고기도 그렇게 저희의 원대로 주시다 저희가 배부른 후에 예수께서 제자들에게 이르시되 남은 조각을 거두고 버리는 것이 없게 하라 하시므로 이에 거두니 보리떡 다섯 개로 먹고 남은 조각이 열두 바구니에 찼더라
요한복음 6장은 71절까지 있는 매우 긴 장입니다. 1절부터 끝절 71절까지는 여러 날에 걸친 것이지만,그 안에 주어진 교훈은 계속적인 것입니다.
48~50 “내가 곧 생명의 떡이로다 너희 조상들은 광야에서 만나를 먹었어도 죽었거니와 이는 하늘로서 내려오는 떡이니 사람으로 하여금 먹고 죽지 아니하게 하는 것이니라 나는 하늘로서 내려온 산 떡이니 사람이 이 떡을 먹으면 영생하리라 나의 줄 떡은 곧 세상의 생명을 위한 내 살이로다”,
53~56 “인자의 살을 먹지 아니하고 인자의 피를 마시지 아니하면 너희 속에 생명이 없느니라 내 살을 먹고 내 피를 마시는 자는 영생을 가졌고 마지막 날에 내가 그를 다시 살리리니 내 살은 참된 양식이요 내 피는 참된 음료로다 내 살을 먹고 내 피를 마시는 자는 내 안에 거하고 나도 그 안에 거하나니”
이 말씀은 다시 누가복음 22장 14~20절로 연결이 됩니다.
“때가 이르매 예수께서 사도들과 함께 앉으사 이르시되 내가 고난을 받기 전에 너희와 함께 이 유월절 먹기를 원하고 원하였노라 … 이에 잔을 받으사 사례하시고 가라사대 이것을 갖다가 너희끼리 나누라 … 또 떡을 가져 사례하시고 떼어 저희에게 주시며 가라사대 이것은 너희를 위하여 주는 내 몸이라 너희가 이를 행하여 나를 기념하라 하시고 저녁 먹은 후에 잔도 이와 같이 하여 가라사대 이 잔은 내 피로 세우는 새 언약이니 곧 너희를 위하여 붓는 것이라”
‘너희가 이를 행하여 나를 기념하라’는 이 말씀은 명령으로, 후일 제자들은 예수님의 이 말씀을 그대로 실행하였고 우리도 지금 성만찬을 행하고 있는 것입니다.
본문에서 예수님은 큰 무리가 당신에게로 오는 것을 보셨는데, 저녁이 되매 제자들이 나와 염려하면서 “이곳은 빈들이요 때가 이미 저물었으니 무리를 보내어 마을에 들어가 먹을 것을 사먹게 하소서”라고 건의를 하였습니다. 이에 예수님은 “갈 것 없다 너희가 먹을 것을 주어라”고 하셨습니다. 한 아이가 예수님께 잡수시라고 드린 것이지만, 제자들이 보리떡 다섯 개와 물고기 두 마리를 가지고 왔을 때 예수님은 그것을 가지시고 하늘을 우러러 축사하시고 제자들을 통하여 무리들에게 나누어 주셨습니다. 왜 예수님이 제자들에게 먹을 것이 없는 줄을 누구보다 잘 알고 계시면서 “갈 것 없다 너희가 먹을 것을 주어라”라고 말씀하셨겠습니까? 받아먹는 것만이 아닌 남에게 주는 것이 너희들의 해야 할 의무요 또 그렇게 할 때 기적이 일어남을 보이시기 위함입니다.
사람은 세상에 태어나서 3단계를 거쳐야 성숙한 인간이 된다고 합니다. 첫째는 받는 단계요, 둘째는 가지는(소유하는) 단계요, 셋째는 나누는 단계입니다. 첫째는 부모의 도움으로 사는 생활이요, 둘째는 자립하여 살며 자기 것을 만드는 생활입니다. 마지막은 내 것을 남에게 나누어주는 생활입니다. 이 셋째 단계에 들어서면 인간은 성숙해집니다. 이러한 단계가 분명하게 표현된 예는 야곱의 경우였습니다. 1단계는 루스(창 28장)까지, 2단계는 얍복강가(창 32장)까지, 3단계는 그 후부터 입니다.
이제 우리 모두는 특히 한국 기독교인들은 성숙한 신앙생활을 위하여 이러한 삶을 살아가야 합니다. 하나님께서 나에게 무엇을 주실까만을 기대하는 것에서 벗어나서, 사도행전 3장에 나오는 베드로와 요한처럼 하나님께 받은 은혜를 남에게도 줄 수 있어야 합니다. 세상이 내게 무엇을 해줄 것이냐 기대만 하는 것이 아니라 반대로 이 세상이 내게 무엇을 원하고 있는가, 즉 내가 이 세상을 위하여 무엇을 할 수 있는가를 생각하는 여유있는 성숙한 사람이 되어야 합니다.
사실 이 세상에서 남을 돕고 나누는 생활처럼 기쁘고 즐거운 것은 없습니다. 성경은 “받는 자보다 주는 자가 복이 있다”고 가르칩니다. 이런 삶은 현대를 사는 사람들에게 다소 거부반응을 일으키는 역설적인 논리로 들릴지 모르나 변치 않는 진리입니다.
기독교는 나눔의 종교입니다. 나눔은 기적을 낳습니다. 사랑을 나누면 마음이 커지고, 고통을 나누면 고통이 적어집니다. 돈을 나누면 돈의 가치가 커지고, 물질을 나누면 만족이 커집니다. 비록 보잘 것 없는 작은 것이라도 서로 나누며 살면 오늘과 같은 각박한 세상에서도 장미꽃이 피고 포도나무에 주렁주렁 열매가 열리는 기적이 일어날 것입니다.
구약성경 창세기의 기사를 읽노라면 그 당시 사람들이 적어도 700~900년의 긴 세월을 살았습니다. 그러나 그들 중에 몇 사람을 제외하고는 “누가 누구를 낳고 몇 년을 더 살다가 몇 살에 죽었다”는 기록 밖에 없는 것을 보면 오래 살기는 했으나 별다른 가치와 의미가 없는 삶인 것 같습니다. 세상에 태어났으니 살고, 때가 되니 죽은 것뿐입니다. 그러므로 인간의 삶의 가치는 얼마나 오래 사느냐에 있는 것이 아니라 얼마나 값지게 살았느냐에 있습니다.
이들에 비하면 예수님의 33년의 생애는 너무도 짧았습니다. 당시를 사는 다른 사람과도 비할 정도가 아닙니다. 그러나 예수님처럼 의미 있게 살고 그분처럼 역사에 위대한 업적을 남긴 사람은 없었습니다. 그 비결은 무엇이었을까요? 하나님으로서 이 땅에 내려오셔서 그렇게 하신 것은 당연한 것이요, 하나님이시기에 그렇게 행하셨다라고 우리는 쉽게 말할는지는 모르나, 예수님은 우리에게도 그러한 길을 가야할 것을 분명히 말씀하셨습니다. 곧 예수님이 걸어가신 길은 금강산을 구경하는 것처럼 우리가 유람하며 감탄만을 하는 것이 아니라 우리도 가야 하는 좁은 길인 것입니다. 예수님은 세상에 오신 목적과 사명을 분명히 하셨습니다. 예수님이 세상에 오신 것은 섬기는 것이요, 나누는 것이요, 주는 것이었습니다. 우리의 생애가 이러한 생애로 전환될 때 우리는 예수님께 속한 사람이 되며 참 포도나무의 가지로서 열매도 맺게 될 것입니다.
본문은 오병이어로 오 천명을 먹인 디베랴 광야의 기적 이야기입니다. 요2장에는 물로 포도주를 만드신 기적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이는 질(質)을 바꾸신 기적입니다. 그러나 요6장의 기적은 양(量)을 바꾸신 기적입니다. 질적인 변화이든 양적인 변화이든 먼저 우리가 되새겨야 할 점은 ‘나눔은 기적을 낳는다’는 것입니다.
어떻게 그 많은 사람들이 광야에 모일 수 있었을까요. 이 천년 전의 시골 빈들에 몇 백 명도 아닌 오 천명의 군중이 운집할 수 있었겠습니까? 그러나 그때는 마침 유월절 명절이 가까운 때였습니다. 유대인들에게는 일년에 세 차례 지키는 큰 명절이 있었는데 그중 가장 큰 명절이 유월절입니다. 이 유월절은 과거 이스라엘 백성들이 애굽에서 종노릇하다가 하나님이 베푸신 기적으로 인하여 그곳을 나온 것을 기념하는 절기입니다. 이 유월절에는 12세 이상이면 거의 다 예루살렘으로 모입니다. 그러니까 갈릴리 근방에 사는 유대인들이 이런 순례 도중에 디베랴 광야로 모였던 것입니다.
이렇게 많은 군중이 모인 이유는 무엇입니까? 이에 대한 대답은 두 가지로 추리할 수 있습니다. 하나는 요한복음 6장 2절 말씀에 보면 “큰 무리가 따르니 이는 병자들에게 행하시는 표적을 봄이라”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기적을 보았거나 소문을 들었기 때문입니다. 두 번째는 예수님이 자기네들을 로마로부터 구원해 주실 분이라는 정치적인 이유도 있었습니다.
예수님의 말씀에 심취하고 기사 이적에 놀란 무리들은 점심때가 지나 저녁때가 가까운 것마저 잊어버렸습니다. 이때 제자들이 예수께 와서 아뢰었습니다. “여기는 빈들이고 날도 저물었습니다. 그러니 무리를 흩어서 제각기 먹을 것을 사먹게 마을로 보내는 것이 좋겠습니다.” 제자들의 방법은 달랐지만 그래도 무리를 생각하기 시작한 것은 잘한 것입니다.
이 때 예수님은 허기진 군중을 바라보시면서 동정심을 금할 수가 없었습니다. 그래서 빌립에게 “어디서 떡을 사서 이 사람들을 먹일 수 있겠는가”(5절)하며 그 가능성을 물으셨습니다. 이때 빌립은 잠시 계산을 해본 다음에 “이 많은 사람들에게 조금씩이라도 먹을 것을 주려면 200데나리온 상당의 떡을 사올지라도 오히려 부족할 것이며, 또 민가도 없는 빈들에서 어떻게 떡을 구할 수가 있겠습니까?”라고 반문하며 불가능하다는 회의적인 대답을 했습니다.
예수님은 빌립의 대답을 듣는 순간 이러한 비상한 상황에서 도전을 결심하셨습니다. “이 굶주린 대중을 위해 너희들이 가지고 있는 것이 무엇이냐?” 예수님의 긍휼은 뜨거운 결심과 실행으로 옮겨졌습니다. 예수님은 다시 말씀하셨습니다. “너희가 먹을 것을 주라”(마 14:16)
이 세상에서 어려운 일을 해결하는 길은 합리적인 계산만으로는 안 되는 것이 많습니다. 또 동정심만으로도 해결할 수 없습니다. 이런 상황에서는 하나님을 전적으로 의지하는 과감한 믿음이 있어야 합니다.
그러나 유감스럽게도 수많은 군중들이 있었지만 먹을 것을 내놓는 사람이 없었습니다. 그런데 뜻밖에 한 소년이 제자를 통하여 보리떡 다섯 개와 물고기 두 마리를 ‘예수님 잡수시라’고 드렸습니다. 아마도 이 음식은 집을 나설 때 그의 어머니가 만들어 준 것이었습니다. 예수님은 혼자서 잡수신 것이 아니라, 이 오병이어를 손에 들고 축사하신 후 군중에게 나누어 주셨습니다. 여기서 나눔으로 인한 기적이 일어났습니다. 이 놀라운 기적은 한 무명의 어린 소년의 희생적인(사실 희생이라기보다는 한 끼니의 식사에 불과한 것임) 나눔에서 시작되었습니다. 오병이어는 오 천명이 먹을 양식에 비하면 아무 것도 아닙니다. 그러나 이 소년에게는 보잘 것 없는 것이기는 하였지만 그것이 전부였습니다. 위대한 기적은 전부를 드린 이렇게 작은 희생적 나눔에서 일어났던 것입니다.
이 기적은 특별한 것을 바침으로 일어난 것이 아닙니다. 소년이 가지고 있던 것, 자기 어머니가 점심으로 만들어 준 보리떡 다섯 개 물고기 두 마리, 그것을 아무 조건 없이 대가를 바라지 않고 바침으로 일어났습니다. 만일 이 소년이 ‘내가 먹으라고 어머니가 만들어 준 음식인데 나만 먹으면 되지 않느냐?’고 생각했더라면 어떻게 되었을까요? 그렇다고 그 소년이 이것을 드리면 오 천명이 먹을 수 있으리라는 믿음이 있었던 것도 아닙니다. 단지 예수님 잡수시라고 드린 것이 이러한 기적을 일으킨 나눔이 된 것입니다.
우리도 하나님 앞에 드려야 할 것이 있습니다. 하나님이 어떤 일을 하실 때 우리에게 요구하시는 것이 있습니다. 그것은 우리의 작은 충성입니다. 적은 물질도 요구하십니다. 적은 시간과 지혜와 능력을 필요로 하시기도 합니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이렇게 적은 것을 가지고 무엇을 하겠느냐고 하며, 우리의 작은 나눔을 평가절하 할 때가 많습니다. 그러나 이 작은 것이라도 생명의 씨가 될 때에는 틀림없이 기적을 일으키게 됩니다.
하나님은 내가 갖고 있지 않는 특별한 것을 요구하시지 않습니다. 우리가 할 수 있는 일, 바칠 수 있는 것을 요구하십니다. 내 시간의 일부, 내 지식의 일부, 내 물질의 일부를 요구하시기도 하십니다. 그런데 그 적은 것이 의로운 일, 값있는 일에 바쳐질 때 즉 하나님께 드려야 하고 드려진 것이 나누어 질 때 기적은 일어납니다.
미천하기 만했던 베드로와 요한이 성전에 올라 갈 때, 미문에 앉아 구걸하는 거지에게 “은과 금은 내게 없다. 그러나 내게 있는 것으로 네게 주노니 나사렛 예수의 이름으로 일어나라”고 하자 앉은뱅이는 벌떡 일어나 걸었습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우리의 일생은 짧습니다. 우리에게 주어진 기회는 항상 내 곁에 머물러 있지 않습니다. 기회란 나팔을 불고 우리에게 찾아오지 않습니다. 강도 만나 죽어 가는 것을 본 그 순간입니다. 성전에 올라가다 구걸하는 앉은뱅이를 보았을 때도 잠간입니다. 지나쳐 버리면 그만입니다. 기회는 나만 기다려 주는 것이 아닙니다.
오늘 우리가 할 일은 작은 것도 아니요 그렇다고 큰 것도 아닙니다. 매일 매일 해야할 일들 중에 하나이기도 합니다. 그리고 우리가 나누어 줄 것은 우리에게 없는 것이 아니라 능히 나누어 줄 수 있는 우리에게 있는 것입니다. 능히 우리로서 할 수 있는 일입니다. 우리 자신이 먼저 한 알의 밀알이 되어 땅에 심기어질 때 많은 열매가 맺힐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