토요일에는 제가 소박한 성경묵상을 올려 왔는데요. 오늘은 아브라함 카이퍼 목사님이 믿음과 은혜를 담아서 작성하신 경건의 묵상 -그의 장막은 살렘에 있음이여 in 『하나님께 가까이』-을 올립니다. 읽고 큰 은혜를 받으시기를 기원합니다.
그의 장막은 살렘에 있음이여
살렘은 예루살렘의 준말이다. "그의 장막은 살렘에 있음이여"라는 말은 첫째로 문자적인 의미로 광야에서 이곳저곳으로 옮겨 다니며 이번에는 여기서 머물다가 다음에는 저기서 머물렀고, 그러다가 마침내 시온산 꼭대기로 옮겨진 장막을 뜻하고, 따라서 여호와 하나님의 거처는 예루살렘 성벽 안에 있다는 뜻이다.
여기에서 우리에게 이상하게 생각되는 점이 있어 다음과 같은 질문이 자연스럽게 일어난다. 우리 하나님은 어디에나 계시는 하나님이신데, 어떻게 동시에 한 특정한 도시에, 한 특정한 산꼭대기에, 한 장막이나 성전에 또한 계실 수가 있는가? 그리고 또한 이의문도 생긴다. 구약 시대에 하나님께서 땅에서 살렘에 자기의 장막을 두시고 시온에 자기 거처를 두셨다면, 구약 시대의 이스라엘이 지금 우리보다 더 부요로웠던 것이 아닌가? 그렇다면 우리는 앞으로 나갔다기보다는 뒤로 후퇴한 것이 아닌가? 땅에 있는 예루살렘에 대해 더 이상 아무 얘기도 하지 않는 복음은 지상에서 하나님의 임재의 자리를 가리킬 수 있는 그림자인 의식(儀式)들보다 사실은 더 빈곤한 것이 아닌가?
특별히 시편에서, 시온에서 기다리는 "찬송"(시 65:1)과 하나님의 성전의 "문지기"(85:10)에 대해 읽을 때, 모든 하나님의 자녀의 분명한 통찰이 크게 요구된다. 비록 사람이 어렸을 때 이 문장들을 배우고 별 생각 없이 암송할지라도, 나이가 들면 의식은 뜻을 더욱더 분명하게 알기를 요구한다.
이같이 분명한 생각은 역사 공부를 통해서 갖추어지는 것이 아니다. 여기서 모든 것은 여러분이 살아계신 하나님과 의도적으로 인격적인 교제를 갖고 친교를 나누는데 달려 있고, 모든 종교의 핵심이라고 할 수 있는, 더욱더 끊임없이 하나님과 접촉하려는 영혼의 절박한 노력에 달려 있다.
여기서 여러분은 여러분의 지각으로는 결코 해결할 수 없고, 그 앞에서는 모든 과학도 속수무책인 대립(antithesis), 즉 하나님의 무한성과 모든 피조물의 유한성 사이의 지배적인 대립을 항상 만난다.
그동안 이 대립 사이의 간격을 메우기 위한 시도가 두 가지 길에서 진행되어 왔었다. 한 가지는 사람이 그 간격을 메우려고 헛되이 시도하였고, 또 한 가지는 하나님이 실행하셨다.
그 간격을 메우는 일을 이교도들이 헛되이 시도하였는데, 그들은 전능하신 분의 무한성을 형상이라는 유한한 형태에 국한시켰고, 그 결과 사람의 영이 무감각하게 되었고 결국 우상 숭배를 고착화시켰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그 간격을 메우는 일을 하셨다. 자신에 대한 예배를 처음부터한 장소에 집중시키고, 시온에 있는 성전에서 자신을 나타내는 일체의 형상을 금하시며, 예배의 영적 성격을 유지하심으로써 다신교와 우상 숭배를 뒤엎으셨다. 결국 그림자의 시대가 그 소명을 완수한 후에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성육신하신 말씀 안에서 성전을 주시고, 오순절 날에 이 성전을 자신의 모든 회중으로, 새 언약의 이스라엘로 확대시키신 데서 이 일을 이루셨다.
하나님의 이 놀라운 방식을 따라 그 목적이 성취되었다. 그래서 이제는 하나님의 무한성이나 편재성이 조금도 약화되지 않은 채, 하나님의 자녀들은 자기들이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님을 만나려고 해야 한다는 것을 잘 알고 있으며, 성도들의 교제 안에서 하나님과의 사귐을 누릴 수 있고, 성령을 통하여 자신들의 마음이 성령 안에서 더욱더 하나님의 처소가 되어간다는 것을 잘 안다.
이 사실을 따라가다 보면 결국 이르게 되는 분명한 생각은 하나님의 자녀가 어떤 어둠 속에 있든지 어떤 고난을 당하든지 간에, 자기 하나님이 자기에게서 멀리 계셔서 기도 가운데 하나님을 가까이 뵐 수 없다는 생각으로 괴로워할 일이 전혀 없다는 것이다.
하나님의 자녀는 자기가 어디에서 무릎을 꿇든지 하나님이 거기 계시며, 가까이 계셔서 자신의 기도를 들으신다는 것을 알며, 하나님께서 자기를 살피시고 자신의 행위를 속속들이 아시며, 따라서 마음의 줄이 하나님도 모르는 사이에 슬픔이나 기쁨을 당하여 어떤 소리를 내게 되는 일은 없다는 것을 안다. “나의 모든 길과 내가 눕는 것을 살펴보셨으므로 나의 모든 행위를 익히 아시오니 여호와여 내 혀의 말을 알지 못하시는 것이 하나도 없으시니이다"(시 139:3).
그러나 또 한편 하나님의 자녀는 끊임없이 하나님의 위엄과 높으심을 의식하며 지낸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내려오셨다고 해서 하나님의 영광과 거룩하심을 결코 잊어서는 안 된다. 그래서 이 목적을 위해 하나님께서는, 우리 각 사람에게 지극히 가까이 계시는 그 하나님께서 하늘의 보좌에 오르셨고, 거기에서 홀로 자신의 위엄을 드러내시며, 단 한순간도 우리 인간 생명의 왜소함과 하찮음과 유한함에 묻히는 일이 없음을 우리가 깨닫도록 하셨다.
하늘의 생명과 여기 이 땅에서의 생명이 우리 의식에는 분명하게 분리되어 있다. 그래서 여기 이 땅에서가 아니라 오직 죽음의 문을 통과했을 때에야 비로소 우리는 위에 있는 예루살렘에서 충만한 영광 가운데 계신 하나님을 볼 것이다.
이 두 생명 사이에 변화가 있다. 그리스도 안에 있는 변화, 성도 회중 가운데서의 변화, 우리 마음에 성령의 내주하심으로 인한 변화가 있다. 이것이 지금 살렘에 있는 장막이며, 이것이 시온에 있는 하나님의 처소이고, 자기 백성 이스라엘 가운데 있는 하나님의 임재이다.
이 사실이 앞뒤로 작용한다.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 몸은 하늘에 올라갔고, 성령은 우리 마음에 내려오셨다. 그래서 그리스도 안에서와 같이 성령 안에서도 하나님께서 우리의 예배를 받으신다.
여기에 신비가 있다.
그리스도는 인자요 우리 중의 하나이시며 우리의 형제로서 우리 가까이 계시고 우리의 본성을 가지고 하늘에 들어가셨고, 하나님 밖에 계시지 않고 그 자신이 하나님이시며, 그로 말미암아 하나님과 사람의 자녀들 사이에 생각할 수 있는 가장 친밀한 교제를 이루셨다.
또 한편으로, 그리스도께서 모든 사람을 위하시듯이, 성령께서는 내려오셔서 하나님의 모든 자녀의 마음 속에 거처를 정하시고 그렇게 해서 우리 영혼의 은밀한 곳에 살렘을 세우신다. 그곳에서 하나님께서 친히 거하시며, 그곳에서 하나님의 거룩한 생명이 우리를 감화하시고 더욱 고귀하고 거룩한 정서와 기분과 충동을 일으키신다.
이 둘은 끊임없이 서로에게 영향을 주고 서로를 보완한다.
그래서 성령이 없이는 그리스도와의 교제가 없고, 반대로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님과의 교제라는 토대가 없이는 성령의 내주하심도 없다.
우리의 본성은 하늘에서 그리스도 안에 있고, 성령은 땅에서 우리 마음에 계신다. 이와 같이 거룩한 생활의 다리를 하나님께서 친히 놓으셨는데, 다리의 한쪽 끝은 하늘에 닻을 내렸고, 다른 쪽은 우리 마음의 중심에 놓여있다.
그러나 다리를 받치는 두 지점은 또 결합되는 지점을 필요로 한다. 그리고 그 지점은 성도들의 회중 안에 있다.
사람은 누구나 지상의 성도들과 접촉할 때 하나님과의 교제가 자연히 더욱 현실적이 되는 것을 느끼며, 여러분은 오직 이 세상 사람들과만 만날 때 어떻게 이 교제의 명료함과 평온함이 줄어드는지를 스스로 느낀다.
성찬의 깊은 즐거움은 이 교제의 중심으로부터 신자에게 온다. 이 성례는 신자에게 그리스도의 영광을 증거하되, 신자들의 회중 밖에서가 아니라 회중 안에서 증거한다. 그러므로 그리스도께서 잡히시던 밤에 떡을 떼고 포도주를 따르며 거룩한 만찬을 제정하셨을 때만큼 이 제도가 거룩하고 고귀하게 사람에게 전해질 수 없었을 것이다.
우리 영혼과 하나님 사이에 교제가 이루어지는 중심이 여기에 있고, 그 교제에 이르는 모든 길들이 합류하는 지점이 여기에 있다.
그러므로 의견 차이로 인해 그리고 자신의 특정 견해의 옳음을 열렬히 주장함으로 인해 교회 안팎에서 하나님의 성도들과의 교제를 약화시키고 희미하게 하는 사람들의 죄악된 행위만큼 가증스러운 것은 없다.
우리 구주께서는 우리에게 서로 사랑하라는 새 계명을 주셨다. 그리스도께서 우리에게 명하신 이 새로운 사랑은 땅에서 생각할 수 있는 것 가운데 가장 부드러운 사랑이다. 왜냐하면 우리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가까이 오시고 우리를 자신에게까지 높이시려는 것이 바로 이 새로운 사랑 가운데서 하시는 일이기 때문이다.
그런데 이 새로운 사랑을 이해하지 못하고, 자신의 특정 견해를 선전하는데 교회와 이 거룩한 사랑의 교제를 이용하는 사람은 살렘을 파괴하는 일밖에 하지 못한다. 그는 하나님의 장막을 헛되게 만들고, 할 수 있는 한 하나님과의 교제를 방해할 뿐이다.
아브라함 카이퍼, 『하나님께 가까이』, pp.206~208.
첫댓글 깊이가 매우 깊은 묵상입니다.
본문 중 카이퍼 목사님의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 몸은 하늘에 올라갔고" 표현은, 장코뱅이 보기에, 아래 성경 말씀에서 이끌어 오신 것 같습니다. -->
"엡2:5-6허물로 죽은 우리를 그리스도와 함께 살리셨고 (너희는 은혜로 구원을 받은 것이라)또 함께 일으키사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함께 하늘에 앉히시니"
아주 깊은 은혜와 영감이네요!
성도의 삶을 생각해보면 이중적인 키워드가 많은 것 같습니다. 이미이지만 아직이고, 능동이며 수동이고, 죄인이지만 의인이구요.... 지상에 있지만 천상에 있는... 그 가운데서 긴장하기도 하지만 또 소망가운데 안정감을 누리는 것 같습니다.
님이 분별의 중심을 잘 잡으신 것 같습니다. 이미와 아직이 분리되지 않고 구분되며 긴장 관계에 있는 것과 비슷한 이치입니다. 좋습니다.
공감합니다^^
카이퍼 목사님의 따뜻한 어투와 깊은 내용의 묵상과 성경 이해에서 큰 혜를 받습니다.
격려와 공감을 해주셔서 감사하고요. 카이퍼 목사님의 묵상은 언제나 감동을 줍니다.
공감합니다.
심오한 말씀인 것 같아요. 그리스도 안의 회중 가운데서, 그리고 성령의 내주하심으로 성도의 마음 안에서 새생명을 얻는 것을 살렘의 장막 곧 하나님의 처소이며 성전이라는 내용 같습니다... 비록 묵상의 내용의 일부만 이해했지만 예배와 성찬에 대한 사모함 이 생겨나는 듯 합니다. 성령님께서 이해를 더하여 주시기를 기도하며 유익함을 누리겠습니다^^
겸손하고 정직한 댓글을 써주신 아파르님께 감사합니다.
에베소서에는 개혁주의 예정론의 노래 18번 같은 구절이 많지만, 매우 심오하고 난해한 구절도 꽤 있는 것 같습니다.
카이퍼가 칼 같이 정확한 신학만 전개하지 않고 위와 같이 경건의 묵상을 한 것에는 깊이가 깊은 대신 이해하기 조금 어려운 부분도 있는 것 같습니다.
예배와 성찬으로 적용하는 아파르님의 댓글에 공감을 표합니다.
카이퍼는 온화한 경건과 정밀한 신학을 겸비한 분으로 보여서 더욱 존경합니다.
공감합니다.
아파르님이 '일부 이해'하신 이유 중에 제가 타자를 치면서 실수로 원문에서 몇 줄 빼먹은 게 있지 않는가? 싶습니다. 추가한 부분은 /// ... /// 입니다. 본문에 추가 삽입을 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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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그러나 다리를 받치는 두 지점은 또 결합되는 지점을 필요로 한다. 그리고 그 지점은 성도들의 회중 안에 있다.
/// 사람은 누구나 지상의 성도들과 접촉할 때 하나님과의 교제가 자연히 더욱 현실적이 되는 것을 느끼며, 여러분은 오직 이 세상 사람들과만 만날 때 어떻게 이 교제의 명료함과 평온함이 줄어드는 지를 스스로 느낀다. ///
성찬의 깊은 즐거움은 이 교제의 중심으로부터 신자에게 온다. ...
추가로 잘 읽었습니다.
앞뒤로 작용하고, 서로 보완한다는 표현에 주목이 됩니다. 깊은 글이지만 더 읽으며 은혜와 지혜를 가져 가고자 합니다.
공감과 댓글 감사합니다.
문장의 한줄 한줄이 너무나 절묘하게 잘 연결되며 깊은 감동과 지혜와 신학적 힘을 느끼게 해줍니다.
그리스도께서 우리의 본성을 가지고 하늘에 올라가셔서 친밀한 교제를 이루시고, 성령께서는 우리의 마음에 내려오셔서 영혼의 은밀한 곳에 살렘을 세우시고 그곳에 친히 거하셔서 우리를 감화하시고 거룩하도록 역사하신다. 이 둘이 서로에게 영향을 주고 서로를 보완하시는데 성령이 없이는 그리스와의 교제가 없고, 성령의 내주하심도 마찬가지이다. 따라서 우리의 본성은 하늘에서 그리스도 안에 있고, 성령은 땅에서 우리 마음에 계신다.
이 둘의 관계를 이어주는 교량의 연결 지점에서 받쳐주는 것이 필요한데 그것은 회중 안에서 이뤄지며 성찬을 통해서 극대화되었다. 이제 성도는 예수님의 새 계명인 서로 사랑해야 할 의무를 져야 한다.
예수, 성령, 회중의 상관성을 이렇게 깊고도 우아하게 풀어내는 고퀄리티 신학을 조금 맛보았습니다.
요약을 해주셔서 감사합니다.
핵심을 잡고 잘 정리해 주셔서 고맙습니다.
코람데오님의 댓글이 제가 이해하도록 도와주시네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