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머니가 언제 돌아가셨는지 잘 기억이 나질 않는다. 15년 쯤 되지 않았나 싶다. 어머니는 돌아가시 전 몇 해 성당을 다니셨다. 종교가 없으셨던 어머니가 왜? 성당을 가셨는지 알 수는 없다. 아마도 기대고 싶은 누군가가 필요했을것이다. 어머니가 돌아가신 후 형은(형집은 성당을 다니고 있었다) 어머니를 성당에 모시자고 했다. 나는 두말할것도 없이 OK했다. 그 후 명절에 나는 집사람과 애들을 데리고 성당으로 가서 미사를 드렸다. 나는 어떤종교에도 적이 없어 조금은 지루하고, 조금은 절차를 몰라 헤맸지만, 성당에서 성스러운 예배를 드리는것이 나쁘지만은 않았다. 그러다 작은 트러블이 있어 형과 멀어졌고 지금은 명절에 부모님과 장인, 장모님 차례를 우리집에서 모시고 있다. 어머니는 부자집에서 태어나 중학교까지 교육을 받았고 처녀적엔 간호사로 근무를 하신적도 있었다고 했다. 그러다 결혼을 하셨고 아들 하나를 두셨다. 나하곤 이부 형제였다. 1950년 6월 25일 발발한 한국전쟁은 모든 상황을 바꾸었다. 그 전쟁은 한반도에 있는 모든 사람의 인생을 바꾸었을것이다. 어머니의 첫번째 남편도 친정 오빠도 전쟁통에 죽거나 북으로 끌려갔다. 그 와중에 우리 아버지를 어떻게 만났는지 알 수 없다. 이모의 얘기를 들어보면 피난중에 오다가다 만나게 되었다고했다. 전 남편과 애가 하나 있었는데, 시댁에서 피난생활을 하지 않고 친정에서 피난을 한것도 무슨 이유진 알 수 없었다. 단지 내가 전해 들은 말은 피난통에 오다가다 만났다는 말 뿐이었다. 어머니를 생각해보면 참 곱다는 생각이 든다. 그 고운분이 어떻게 부인이 있었던 아버지를 만났을까?(어머니는 아버지를 만났을 당시 그 사실을 몰랐던것 같다. 내가 태어나기 전 아버지의 고향에 가서야 친척들의 전언으로 사실을 알았다고 한다) 그 때는 전쟁통이었고 부모님도 젊은 시절이었다. 아버지는 키가 크고 잘 생기셨다. 형도 키가 크고 사촌들도 키가 큰 편이다. 나먄 키가 작다. 어려서부터 외탁을 했다는 말을 많이 들었다. 부모님은 자식을 6~7명 두었으니 아마도 미워 죽는 사이는 아니었던것 같다. 아버지는 59살에 돌아가셨다. 어머니는 두번 결혼에 두번 남편을 먼저 보냈다. 우리 형제는 6~7명이었다고 하는데 모두 죽고 형과 나만 살아남았다. 첫번째 아들은 전 시댁에서 키우고 있었다. 난 어머니의 슬픔과 고통을 알 수 없다. 자식 5명 앞세우고, 남편을 모두 잃고, 아들을 보고 싶을 때 보지 못하는 삶을 어떻게 견디셨을까? 어쩌면 가난의 고통이 더 심했고, 남아있는 자식들이나마 살리려고 허둥지둥 살다보니 모든걸 잊을 수 있었을지도 모르겠다. 어머니는 내 어릴적부터 달걀, 소금 장사를 다니셨고, 국민학교 때 구로동으로 이사 온 후엔 구로공단에서 애자를 만드는 공장에 다니셨다. 어릴적 공주 대접 받던 생활은 사라지고 복스럽고 탐스럽던 얼굴이 가난에 찌드셨다. 아버지가 돌아가시고 난 후 어머니는 형을 아버지처럼 알고 살았다. 아버지가 돌아가셨을 때 나는 국민학생이었고, 형은 20대 초반의 쳥년으로 공장에 다니고 있었다. 나는 어렸고 형은 나보다 9실이 많았다. 어머니와 내가 단칸방에 살고 있어서인지 형은 우리와 같이 살지 않았고 공장 근처에서 따로 살고 있었다. 내가 고등학교에 들어가고 나서 신정동으로 이사오기까지 어머니는 친구 어머니가 핫도그, 튀김장사를 하셨던 포장마차에서 보조로 같이 일을 하셨다. 그 시절 무슨 돈으로 생활을 하고 학교를 다녔는지 곰곰히 생각을 해봤다. 어머니가 장사 보조를 해서 받았던 돈은 생활하기에 텃없이 모자랐을것 같다. 어머니는 돈을 받아 오시기 보단 장사하고 남은 핫도그나 튀김을 더 많이 받아 오셨다. 나는 그 시절 핫도그나 튀김으로 저녁을 때우는 경우가 많았고 그래서인지 별명이 돼지였다. 우리의 생활비는 아마도 공장에 다니던 형이 부담했던것 같다. 그래서인가 어머니는 형을 아버지처럼 기대고 살았던것 같다. 형도 키가 크고 잘생겼다. 소싯적 여자들에게 인기가 많았다. 어느날인가 형이 어떤 누나를 집에 데리고 왔다. 성격이 참하고 여성스러웠다. 어머니는 그 누나를 내심 며느리로 점 찍은듯 보였다. 그 누나는 일주일에 한번정도는 우리집에 들러 밥도 같이 먹고 놀다 갔다. 그런데 어느 순간부터 잘 보이지 않았다. 그리고 형도 집에 들르는 시간이 점점 줄어 들었다. 내가 고등학교 2학년 때인가 형은 또다른 여자를 집에 데리고 왔다. 그 여자는 미래 내 형수가 되는 분이었다. 어머니는 왠지 처음부터 형수를 탐탁지 않게 생각했다. 다른건 잘 모르겠지만 성격이 강했고 형을 잡는 스타일인것 같았다. 형수는 결혼식도 올리지 않은 상태에서 방2칸짜리를 새로 얻어 같이 살게 되었다. 며느리를 맞은 어머니는 무엇이 마음에 안드는지 집안 분위기가 좋지 않았다. 형은 성격이 참 순했다. 어머니와 형수 사이에서 갈팡지팡 중심을 잡지 못했다. 내가 신경써서 해결될 문제도 아니었고 나는 그럭저럭 살아가고 있었다. 그러다 같이 살고 난 후 2~3달이 지날때쯤 학교를 다녀왔는데 집안에서 크게 싸우는 소리가 들렸다. 어머니도 산전수전 공중전까지 겪으신 한 성격하는 분이셨다. 두 여자가 머릿채를 붙들고 욕을하며 악을 썼다. "죽일년,나쁜년 니가 나를 잡아먹고, 내 아들을 잡아 먹는구나" 마침내 고부갈등은 몸싸움까지 번지게 되었다. 나는 눈에 불이 켜졌다. 형수고 뭐고 보이는것이 없었다. 나는 두여인 사이를 비집고 들어가 떼어논 후 형수를 향해 쌍욕을 발사했다. 오랜시간 어머니와 같이 살아온 나로서는 어머니를 하대 하고 막말하고 심지어 머리채를 붑잡고 몸싸움을 하는 형수를 그냥 두고 볼 수 없었다. 그날 이후 형수는 집을 나갔으나 형은 가타부타 말이 없었다. 몇달이 지난 후 형수의 오빠되는 사람이 엄마를 찾아왔다. 지난일을 사과하며 말했다. "아드님과 제 동생이 아직도 만나고 있으니 어쩌겠습니까? 어르신이 이해를 해주시면 이번 기회에 정식으로 상견례도 하고 결혼식도 올리고 두 사람이 같이 살 수있도록 했으면 좋겠습니다." 어머니와 형의 생각이 무엇인지 알 수는 없었다. 그러나 한달 정도 지나 형과 형수는 결혼을 했고 신혼방을 얻어 다른곳으로 이사를 갔다. 그후로 또다시 나는 줄곧 어머니와 둘이 살게 되었다. 지금 생각해보면 나도 외뤄웠지만 형도 외롭고 힘들었을것 같다. 형은 나보다 아홉살이 많았기에 아버지가 돌아가신 후 우리집 생계유지에 많은 부담을 지고 있었을것이다. 형도 젊은 시절 해보고 싶은것이 많았겠지만 공고를 나오고 바로 구로공단에 취직해 흔히 부르는 "공돌이"로 밥벌이를 해야만 했다. 나와 달리 형은 어머니에게 입도 벙긋하지 않고 어머니가 하라고 하는대로 행동하는 순한 사람이었다. 그러나 결정적으로 어머니의 맘에 들지 않는 여자를 며느리로 데려오면서 아버지의 빈자리와 장남의 의무를 져버리고 말았다. 그런 형과 나는 어머니가 돌아가시고 한 5년이 지나고 나서 부터 10여년 연락없이 지내고 있다. 둘만 남은 형제는 그저 자기 마누라와 자식을 데리고 혼자 사는것이 편한지도 모른다. 나는 아직 형수를 이해하지 못하고 용서하지 못했다. 나의 알량한 자존심은 형에게 연락을 하지 않고 있다. 나이가 60을 넘었으면서도 헛 세상을 살아가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