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후계 이이순의 생애와 사상
이원걸(문학박사)
(목차)
1. 머리말
2. 생애와 문집 체제
3. 성학 추구
4. 역사은감론
5. 경세택민 의식
1. 머리말
한국의 아름다운 산수를 배경으로 하여 수많은 구곡시가 창작되었다. 특히, 도산 지역은 이러한 구곡 문화의 발흥지로서 의의를 확보하고 있다. 낙동강이 도산 경내로 흘러 들어와 강을 이루어 도산은 강과 산이 조화된 구곡원림 형성의 최적 조건을 갖추었다.
퇴계 후학들은 퇴계가 강학 활동을 전개하던 도산을 중심으로 하여 구곡을 설정하고, 구곡시 창작 활동을 통해 선조 퇴계의 학문 전통을 이어가며 영남 학맥을 공고히 하려는 노력을 이어갔다. 이 과정에서 퇴계가의 후계 이이순, 광뢰 이야순, 하계 이가순의 역할이 매우 주목된다.
이 글에서는 퇴계 가학의 충실한 계승자 후계의 전기적 검토와 사상적 측면을 정리하여 퇴계가 도산구곡 창작 연구의 기반을 마련하고자 한다.
2. 생애와 문집 체계
1) 생애
後溪 李頤淳(1754-1832)의 자는 穉養, 호는 後溪이다. 본관은 眞城으로, 退溪의 9세 손이다. 고조부는 杲로 군수를 지냈다. 증조부 守謙은 무신란 때 의병장으로 활약했으며 현령을 역임했으며, 조부는 世憲이다. 부친은 龜蒙이며 모친은 의성 김씨 佐郞 宅東의 따님이다. 후계는 1754년(영조 30)에 2월 3일에 溪上 옛집에서 6남 2녀 중 차남으로 태어났다. 그는 어려서부터 남다른 기질을 지녔다. 여러 아이들과 함께 어울려 놀 때에 함부로 웃거나 가볍게 말하지 않았다.
8세 무렵에 族祖 櫟窩 李世胤(1730-1798)에게 나아가 학문을 익혔다. 당시 세윤은 그에게 소학 공부에 치중할 것을 권면했다. 역와는 퇴계 학문을 정통으로 계승했으며, 사치를 경계하고 청렴을 실천한 선비였다. 역와는 靑壁 李守淵(1693-1748)의 막내로, 부친을 통해 가학을 이어받고 가학 계승을 일생의 과제로 여겼다.
이 같은 사실을 익히 알고 있던 후계의 조부 이세헌은 손자를 역와에게 퇴계 가학을 잇게 했다. 역와는 후계에게 소학을 익히게 하고 나서, 사서 및 심경을 통달하게 했다. 이어 주자대전 및 퇴계전서를 깊이 연구하도록 지도했다. 이로 인해 후계는 자연스럽게 퇴계의 학문 전통을 이어받았다.
1771년(18세)에 예안이씨 李漢佑의 딸과 혼인했으며, 1774년(21세) 8월에 稱慶 庭試를 보기 위해 도성에 들어갔다. 어려서부터 퇴계의 학문을 익힌 그는 1779년(26세)에 생원시에 합격을 하고 그 다음 해에 성균관에 입학하여 학문 연구에 전념했다. 그는 그곳에서 늘 몸가짐을 단정히 하고 가학 연구에 치중하여 퇴계선생 유집과 퇴계언행록을 탐독했다.
당시 정조가 성균관 영화당에서 성균관 유생들에게 과거를 보게 하여 상을 베푼 적이 있는데 정조는 남들 보다 뒤에 서 있는 그를 앞으로 오게 하여 가문과 조상이 누구인지 자세히 묻고 격려했다. 당시 방백인 이 아무개가 참판 李鼎揆에게 성균관 유생 가운데 경술과 덕행에 뛰어난 인물이 누구냐고 묻자, 이정규는 하계를 추천했다. 후계는 성균관 유학 시절에 이미 학문과 덕행으로 인정을 받았다.
이어 1786년(33세)에 晩村으로 이사하여 집을 ‘晩窩’라 했으며, 1790년(37세) 2월에 모친상을 당해 예제를 다했다. 이어 1799년(46세) 봄에 「國朝史詩」를 지었다. 이내 孝陵參奉에 제수되어 근실하게 직무를 수행했으며 孝齋日錄을 남겼다. 1800년(47세)에 부인상을 당했다. 이어 1802년(49세)에 繕工奉事가 되었다가 軍資直長으로 옮겼다. 1803년(50세)에 禁府都事가 되었다.
1804년(51세)에는 靖陵直長에 임명되었다가 다시 軍資直長이 되었다. 1805년(52세)에는 軍資主簿로 승진되었는데 그는 공무 중 여가가 생기면 외부 출입을 금하고 단정히 앉아 독서에 열중했다. 이로 인해 모두들 그를 두고, ‘출신을 물어 보지 않더라도 퇴계 선생 가문의 후손임을 알겠다’라고 하며 입을 모아 칭찬했다.
1806년(53세)에 恩津縣監에 임명되었다. 그 고을은 강과 바다의 경계에 있어 주민들이 이권을 다투는 송사가 빈번한 지역이었다. 그는 그곳에 부임하자마자 방을 내걸고 주민들을 계도했으며 구습을 혁파하는 한편 송사를 공평하게 처리하여 했고 請囑을 엄금하자 고을의 행정과 기강이 바로 잡혔다. 후계는 당시 監營에 아부해 군역을 기피하던 양민 장정을 다스리고, 공사를 바르게 집행하려고 하다가 감영의 뜻을 거슬렀다고 하여, 1807년(54세)에 파직되었다. 이 해에 부친상을 당해 법도에 따라 슬픔을 다해 모셨다.
1811년(58세)에 집 뒤 시냇가에 두 칸 茅屋을 짓고 室은 ‘兢齋’라고 이름을 지었고, 堂은 ‘後溪’라고 편액했다. 이후 그는 그곳에서 주야로 퇴계가 남긴 글과 경서에 심취했다. 퇴계의 학문과 정신을 계승하기 위해 ‘謹’․‘拙’ 두 글자를 가법으로 삼고 「無忝歌」를 지어 자손들을 교육했다. 그리고 「朔會宗案」의 규정을 마련하여 자손들을 모아 퇴계집과 주자서절요를 강독했다.
1817년(64세) 봄에 退溪集을 改刊했으며, 1831년(78세)에 유림들과 의논하여 퇴계 선조가 즐겨 찾았던 청량산에 精舍를 지었는데 당호를 ‘吾山’이라 했다. 이처럼 선조의 학덕을 추존하는 일에 평생을 다했던 후계는 1832년(순조 32) 12월에 향년 79세로 정침에서 세상을 떠났다.
그는 별세 사흘 전에 병이 일시적으로 호전되었지만 말이 어눌한 상태에서 평소 강독하던 퇴계집의 구절과 주자의 시를 암송했다. 임종에 직면했지만 그의 학문 추구의 열정을 식지 않았던 점이 일화로 남아 전한다. 이어 1833년(순조 33)에 통정의 직첩이 내려 왔는데 그가 별세한 후여서 반납을 했지만 다시 내려 왔다. 그 해 3월 26일에 봉화현 탄당촌에 안장되었다.
2) 문집의 간행과 체제
후계집은 생전에 그가 스스로 교감을 보고 보관해 두었다. 사후에 아들 李彙炳과 종질 李彙寧이 家藏草稿를 바탕으로 유문을 수집해서 편차하고 부록 문자를 첨부하여 1861년경에 6권 3책의 활자로 初刊本을 간행하였다. 이후, 이휘병이 초간본을 바탕으로 하고, 從孫 李晩淑이 지은 「遺事」를 비롯한 부록 문자와 초간본에서 빠진 내용을 증보하고 편차도 재정리하여 10권 6책의 목판으로 문집을 간행하였다.
이어 1860년대 후반에 重刊本을 간행하였다. 중간본에는 卷1․2에 430여 수의 시가 실려 있다. 卷3에는 상소문․서, 卷4에는 서간문이 실려 있다. 卷5에는 잡저․喪葬儀節, 卷6에는 서문․기문․통문․정문․전, 卷7에는 지․발문․잠․상량문․애사․뇌사․축문이 실렸다. 卷9에는 「묘지명」․「묘갈명」․「行述補略」․「溪書堂重建上樑文」․「言行序次草略」․「事行記聞續」․「遺事」 등 다양한 글이 수록되어 있다.
증보된 중간본을 초간본과 비교해 보면, 권1-2의 시가 105제에서 279제로 증보되었고, 초간본에 없던 산문인 소, 상량문, 통문, 전, 애사, 뇌사 등이 수록되어 있다. 또한 초간본의 「묘갈명」과 「遺事」는 이휘병이 직접 지은 것인데 비해, 중간본에서는 묘갈명의 내용에 변화가 있다. 「遺事」는 제목이 「考大夫府君言行序次草略」으로 바뀌어 수록되었으며, 이와 함께 종손 李晩淑의 「遺事」도 실려 있다. 이어 후계의 사상적 측면을 정리하기로 한다.
도산구곡 제8곡 : 성재 금난수(퇴계 제자)의 유적지 고산정(경북 안동시 도산면 가송리). 드라마 (미스터 선샤인) 촬영지.
3. 성학의 추구
먼저 성리학을 추구하는 그의 사상을 살펴보기로 하자. 후계는 역와를 거쳐 퇴계 가학 전통을 계승했으며, 생원시 합격 후 성균관에 입학하여 퇴계학 연구에 전념했다. 이런 후계의 의식 저변에 성리학을 추구의 열정이 기초하고 있다. 관련 시를 보기로 한다.
두 성인이 전한 열 여섯 글자 二聖相傳十六文
고금의 심학 예서 연원했다네 古今心學此淵源
주자 정자가 관건 열지 않았다면 如非閩洛抽關鍵闢
경이 입도의 문임을 누가 알겠소 一敬誰知入道門
후계는 만촌 우거 시절에 심경을 읽고 나서 선조 퇴계가 성재의 시에 차운한 것을 보고 광뢰에게 감회를 털어 놓았다. 심경에 온축된 성리학의 요체를 터득하고 이에 대한 학문 연원을 회고하면서 정자와 주자의 학문을 지속 추구하겠다는 마음을 다졌다. 성리학을 열어준 정자와 주자에게 무한한 신뢰와 함께 ‘경’을 실천하겠다는 의지를 표명하였다. 이어지는 시에서도 이러한 성학 추구의 내심이 표백되어 있다.
날마다 부지런히 이십 년 했고 日日孜孜二十年
고금 통하려 해도 학문은 넓어 道通古今學窮天
천 년토록 전할 심법 오묘하니 恭惟千載傳心妙
밝은 달 환하게 냇물에 비치네 明月昭昭照萬川
부지런히 성학을 익혀 고금의 이치에 통달하려고 노력을 했지만, 학문의 영역은 하늘만큼 광활하다. 세세토록 전할 심법이 오묘하다고 감탄함으로써 성리학의 학문 경지가 심오함을 재천명하였다.
때문에 말미에서는 경물 묘사로 대치하여 밝은 달이 세상의 온 시냇물에 환히 비치듯, 성리학이 영속되리라는 점을 강조하였다. 하늘에 구름이 제거되고, 밝은 달이 환하게 비친다는 표현은 인욕이 제거된 ‘광풍제월’의 경지를 희구하는 시인의 소망이 이렇게 표현된 것이기도 하다. 이러한 후계의 성학 추구 정신은 역동서원 원장인 족대부 李級(1721-1790)에게 보낸 서간문에서도 파악된다.
일전에 역동서원에서 유림들을 모아 심경을 강론하셨다고 들었는데 참으로 성대한 일입니다. 저는 마침 출타할 일이 생겨 강론이 끝나기 전에는 참석하여 강론을 듣고자 계획했었습니다. 다 시 듣건대 향대부의 초상으로 인해 중도에서 그만 두게 되었다니 안타까웠습니다. 제 생각에 경 전의 뜻을 강론하고 밝히는 것이야 말로 유자로서 제일 먼저 해야 할 공부로, 우리 고을에 전해 지는 아름다운 규범이었습니다. 그런데 근래 초학의 선비들은 오로지 과거 공부만 힘쓰고 다시 는 이러한 일에 마음을 두지 않고 있습니다. 저는 매번 ‘과거 공부만 암송하면 마음이 흔들려 문 득 벗을 잃는다’는 구절을 외울 때마다 탄식하고 개탄하지 않은 적이 없습니다. 비록 그렇다 해 도 이는 선비들만의 책임이 아닙니다. 실제로는 지도자 격에 있는 분들이 장려하고 이끌지 못한 데 그 원인이 있습니다.
후계는 족부에게 역동서원에서 선비들을 모아 심경을 강론하는 자리를 마련한 점에 대해 상당히 흥분되어 있었다. 그런데 자신은 출타 계획이 잡혀 있어 줄곧 참석하기가 어려워 강석 끝부분에 참석하리라 기대했지만 향대부의 초상으로 인해 강론이 중도에서 그만 두게 됨 것을 애석해 하였다.
그러면서 근래 안동 선비들이 과거 공부에 주력하느라 이러한 성리학 공부에 전심하지 못한 점이 내내 우려된다고 하였다. 이러한 원인은 결국 지방 유림들을 지도하는 계층의 책임 소홀 때문이라고 했다.
이어지는 글에서 이에 대한 처방책으로, 서원의 본래 기능 회복을 촉구하였다. 서원의 설립 목적이 애당초 도의를 강론하는 터전이 되어야 함에도 불구하고 현재 그러한 기능이 상실된 점을 상기시켰다.
서원을 설립한 목적이 애당초 도의를 강론하고 사학을 펼치기 위함인데 근래에는 가르치는 방 도가 크게 무너지고, 선비로서 도리어 서원에서 노니는 것을 부끄럽게 여기고 탓하니 참으로 한 심한 일이 아닙니까?
후계는 이에 대한 처방으로, 매월 초하룻날에 향교나 서원에서 정기적 강독을 실시함으로써 강독 규정 준수 및 강론 질서를 확립하는 것이 급선무라고 하였다. 다음 단계로, 덕망이 있는 자를 골라 훈장으로 모셔 그 일을 전담케 하여 선비들의 학문 분위기를 쇄신해야 함을 강조하였다. 이렇게 함으로써 선비들의 습성이 크게 변하고 유풍이 크게 진작될 것임을 확신하였다.
이와 함께 후계는 교육 과정 재편성을 촉구하였다. 정자가 ‘한 달 강독 기간 중 20일은 강독, 10일은 과거 공부를 시킨다’는 언급에 기초하여 본원에서는 열흘에 시 10수씩 짓게 하여 과거 공부에 대비시키는 것이 바람직하다고 건의했다. 이러한 상기의 개선책 제시는 자신을 비롯한 안동 지방 선비들의 지극한 기대이므로, 저버리지 않기를 간곡히 부탁하였다.
이처럼 후계는 안동 지방 선비들의 유풍을 혁신하여 바람직한 방향으로 선회함으로써 성리학 본연의 기능 회복 및 유학 진흥에 기여해야 함을 퇴계의 학문 전통을 계승하길 내심 기대했던 것이다. 이러한 후계의 성학 추구 정신은 1802년(순조 2)에 지은 시를 통해서도 파악된다.
아름다운 우리 동방의 조선 猗哉我東方
본디 예의의 나라로 불렸네 素稱禮義國
일찍 유명한 선비들 배출돼 名儒曾輩出
우리 도가 극처로 돌아갔네 吾道有歸極
공자 맹자 외워 법을 삼고 孔孟皆誦法
정자와 주자를 공경했다네 程朱是矜式
우리나라는 공자․맹자․정자․주자의 정통 성리학 전통을 이어 예의와 염치를 존중하는 선진 문화를 지녔다. 때문에 예부터 훌륭한 선비와 성리 학자들이 연이어 배출되어 유학의 도가 크게 진흥했다. 공자와 맹자를 모범으로 삼고 정자와 주자의 학문과 덕행을 추존하게 된 배경을 설명했다. 문제는 서학의 범람으로 인해 유학이 심한 타격을 입어 심각한 폐해가 노출되는 점이다.
어리석고도 천한 사람들이야 蠢而愚賤徒
물들어도 괴이하지 않겠지만 無怪或染冒
아! 안타깝게도 많은 선비들 哀哉士夫類
어이하여 여기 빠져들었을까 何事亦浸溺
선왕께서 이것을 염려하시어 先王爲此懼
형벌 내려 심한 자 제거했네 以刑去其特
풍속을 교화해서 바로잡자면 愚俗要化誘
유학으로 붙들어 세워야하리 儒術事扶植
이 시는 서학이 전래되던 시대를 배경으로 하고 있다. 이와 함께 국내에서는 영조와 정조 대에 걸쳐 탕평책이 시행되고 있지만 당쟁의 불씨는 여전히 남아 있었다. 이러한 가운데 정치적으로 패퇴하여 진출의 뜻을 접고 정치 현실을 원망하는 소외 집단이 형성되었다. 성리학이 그들의 정치와 학문 이상 실현의 기반이 아님을 인식하고 성리학 지상주의에 대한 비판 의식과 함께 자유로운 사상을 희구하는 소외 집단이 형성되었다.
이런 분위기 속에서 실학이 대두되고, 현실을 부정하려는 정감록의 등장 및 주자 학설에 반기를 든 양명학이 대두되었다. 이와 함께 서학을 신봉하는 사상도 싹텄다. 영조는 아들 장헌세자를 죽인 일이 있는데, 이 사건을 계기로 사도세자의 죽음을 동정하는 시파와 그의 죽음을 정당하다고 주장하는 벽파의 대립이 발생되었다. 이러한 시파와 벽파는 또 다른 분파를 낳아 당쟁을 더욱 격화시켰다.
위의 시는 당시 시파와 벽파의 논쟁이 치열했던 역사를 배경으로 하고 있다. 당시 벽파에 가담했던 노론 계열의 인사들이 정조 당시 중앙 정계에 대거 진출하였는데, 시파에 가담했던 남인들을 1801년(순조 1) 신유박해를 빌미로 삼아 천주교 신자로 내몰아 대대적인 숙청을 감행했다.
이에 대해 후계는 그들의 정치적 명분도 명분이지만 유학자로서 체신을 상실한 행위를 엄히 문책했다. 사학에 물든 선비들의 가벼운 처신에 대해 단호하게 대처해야 한다고 강조하였다. 이러한 서학의 번성을 저지하고 유학의 쇠퇴를 막는 방법은 오직 유학의 중흥에 있다고 천명한다.
유교 쇠퇴한 지 얼마나 되었나 儒敎寢衰幾許年
서학이 조선 땅에 침범해 왔네 西洋來犯海東天
사학 물리치는 건 우리 유학뿐 闢邪惟在扶吾道
한 부 주자서로 냇물 막는다네 一部朱書障百川
후계는 서학의 침범이 이처럼 왕성하게 된 궁극적인 원인은 유학의 도가 쇠퇴했기 때문이라고 진단하며, 사학을 물리칠 수 있는 도는 오직 유학을 굳건히 수호해 나가는 길 뿐임을 강조했다. 결론적으로 후계는 주자서 한 부로 이단사설을 모두 막아낼 수 있다고 자부했다.
그의 의식과 학문 전반 영역에 걸친 기저에는 성리 주자학을 추구하는 내심이 자리하고 있다. 그는 평생 가학 계승을 자임하여 유학을 신봉하였다. 후계는 주자학을 계승한 퇴계학 연구에 심혈을 쏟았다. 그의 이런 성리 사상이 학문 바탕을 이루어 그는 평생 퇴계를 답습하기 위한 노력을 계속했다. 이런 그의 소망과 기대는 성학 추구의 일환이다. 이어 역사관을 검토하기로 한다.
4. 역사은감론
후계는 사육신의 묘를 지나면서 감회를 다음처럼 표현하였다. 이러한 논리 속에 그의 유교적 역사관을 간취할 수 있다.
금강이 서로 흘러 강물 이루고 錦江西流爲路江
강가에 무덤 총총 들어서 있네 江上有塚何纍纍
노릉께 육신들은 모두 충신이니 魯陵有六臣皆忠
천고에 마른 뼈를 여기 의탁했네 千古枯骨托於斯
씩씩하고 굳센 기상 언덕 휘감고 凜凜勁風隣一隴
서래의 조목 아직 의심을 전하네 西來深目尙傳疑
지난 일 창망해 새만 울고 있고 往事蒼茫鳥鳴呼
여기 오니 문득 눈물 쏟아진다네 行路到此輒涕洟
동쪽 흰 구름 깊은 곳 바라보니 東望白雲深深處
꽃 시든 석양 무렵 두견새 우네 殘花落月啼子規
들판 가운데 우양은 조용히 놀고 野中牛羊不敢道
무성한 봄풀이 이슬 머금어 있네 春草萋萋露垂垂
영남 과객 하마해 예를 표시하며 嶠南過客爲下馬
석양에 서성대며 비석 어루만지네 斜日低徊拊短碑
금강의 사육신 묘소를 지나면서 역사 감회를 표현했다. 금강 가에 사육신 묘소가 나란히 자리하고 있음을 주시했다. 단종에게 충절을 바친 이들의 마른 뼈를 간직한 무덤이 지나가는 시인을 맞는다. 지난 역사 감회와 단종과 사육신에 대한 연민 정서가 복합되어 애상감 표출로 이어진다.
사육신의 굳센 기상이 언덕을 감돌고 있지만 이들의 충정은 세월이 갈수록 아득해져 안타까움을 금할 수 없다. 이즈음 시인의 마음을 달래기라도 하듯 새가 슬피 울고 있다. 이 때문에 시인의 애상감은 절정에 이르러 급기야 눈물을 흘리게 된다.
여기서 후계는 무엇을 생각하며 눈물을 흘렸을까? 이는 단종을 옹립하려던 이들의 행위에 대한 긍정적 시각을 확보한 탓이라고 봐야 한다. 유교적 역사 관점에서 이들의 행위에 대한 정당성을 부여하는 작가 의식이 투영되어 있다고 할 수 있다. 석양 무렵, 구슬피 우는 ‘두견새’는 ‘단종의 혼’을 대변해 주고 있다. 이러한 논리 속에 지난 역사 반추 및 유교적 역사관이 표출되었다.
이어지는 후반부의 시에서는 감정 절제에 따른 경물 묘사가 주를 이루고 있다. 시인은 충절을 바친 사육신에 대한 회고 정서를 조절하면서, 비석을 어루만지며 추모하였다. 이러한 후계의 역사 인식론은 1799년(46세)에 지은 「國朝史詩二百八十韻」 오언 장편고시를 통해 명쾌하게 제시된다. 이 시에서 후계는 역대 제왕 가운데 순리대로 왕통을 계승하여 유교 법치 국가를 추구했거나 선비를 우대하고 유교적 이상 정치 실현을 모색했던 제왕에게 후한 평을 주었다. 반면에 우리 역사를 후퇴하게 만들고 각종 폐단을 조장하여 국론 분열은 물론 급기야 왜구 및 이민족의 침략을 초래했던 제왕에 대해서는 엄한 비판 의식을 토로했다.
후계는 이 시의 말미에서 붕당의 폐해를 지적하면서 역사는 반드시 후대의 엄정한 평가를 받는다는 ‘역사은감론’을 제시하였다. 시의 후반에서 당쟁의 폐해를 다음처럼 간파했다.
우리나라의 폐해를 따지면 嗚呼我國弊
당론이 무엇보다 심했다오 黨論爲其最
따져보자면 선조 임금 때 越自宣廟世
심의겸 김효원에서 출발해 沈金始釀醱
벼슬 통색 이조정랑에 달려 通塞一銓衡
동인 서인으로 나눠졌다네 東西互分別
이어 남인 북인으로 갈라져 轉爲南北岐
온남 급북 소론 노론 다투고 緩急又肉骨
명재 우암 소론 노론 다투고 尼懷戰老少
미수 허적 청남 탁남 꼽혔네 眉社目淸淈
(…)
근원 미미하나 흐름이 커져 源細而流大
졸졸 흘러 점차 허물어졌네 涓涓漸潰泬
사림들이 중앙 정계에서 주도권을 장악하면서 정치에 참여하는 양반 계층의 수는 점차 증가하게 되었다. 이로 인해 제한된 관직을 서로 차지하기 위한 권력 쟁투가 발생하게 되었다. 당쟁 발생의 직접적인 원인은 선조 초기에 이조전랑을 차지하려는 과정에서 심의겸과 김효원을 중심으로 한 양파의 대립에서 시작되었다.
이후 동인(이황, 조식 문인)과 서인(이이, 성혼 문인)으로 분쟁을 하게 되어 동인이 득세하여 서인을 압도하게 되었다. 동인 가운데 서인에 대한 강경파와 온건파로 나뉘어져 결국 남인(이황 문인)과 북인(조식 문인)이 대립하게 되었다. 다시 서인에서 윤증을 중심으로 한 소론, 송시열을 중심으로 한 노론으로 갈리었다. 그리고 남인은 다시 청남(미수), 탁남(허적)까지 갈라지는 당쟁의 역사를 개괄하였다.
이런 정치 혼란을 무마하기 위해 제시된 것이 탕평책인데, 이는 영조를 거쳐 정조대에 실현되었다. 이 제도 실시로 인해 노론과 소론, 남인과 북인을 골고루 등용하여 당쟁은 어느 정도 안정세를 유지했지만 근본적인 문제는 해결되지 못한 채 관직 숫자만 증대시키는 결과를 초래했다.
후계는 사소한 논쟁을 일삼고 격렬한 정쟁을 하느라 국력은 소진되고 민심이 이반된 현실 위기를 지적하였다. 직설적 표현 이면에 이러한 역사를 만든 장본인들에 대한 질책을 쏟아내고 있다.
(…)
그 누가 탕론을 제기하였던가 誰起蕩平論
결국엔 죄안을 불태워 버렸오 竟至獄案爇
야사의 기록 아직 남아있으니 尙有野史筆
옳고 그른 시비 덮을 수 없소 是非不可迾
성상께서는 효로 다스리시니 聖上以孝治
오래 백성들 편안케 하시리라 無疆惟休恤
남산처럼 장수하시길 바라며 臣甫南山頌
절 올리며 시 끝에 붙인다오 拜手繫篇跋
후계는 붕당과 당쟁 폐해가 이처럼 극심하다는 점을 상기시키면서 탕평책을 내놓아도 성공을 거두지 못했던 점을 지적하였다. 후계는 이러한 폐해가 지속되어서는 안 된다는 점을 다시 경각시켰다. 이러한 소모적 정쟁을 종식하는 길만이 상생의 도리임을 선언하며 주상께서 그러한 길을 열어주길 염원하며 마무리했다.
이처럼 역사는 반드시 후인들에게 감계를 제공하는 것이므로, 위정자들의 정치 득실은 백성의 안위에 직결되는 문제라고 했다. 이에 못지않게 제왕의 모범적 정치 운영 형태가 바람직하다는 사실도 강조했다. 이러한 후계의 역사 인식은 제왕의 정치 득실은 후대의 감계 대상이라는 당부로 확대 표출된다.
후계는 가전 작품 「화왕전」을 남겼다. 이를 이은 이가원의 「화왕전」 역시 주제 표출면에서 호색과 사치를 경계하고 있다. 그런데 이가원의 화왕전은 작품의 후반에 설총의 「화왕계」 요체를 수용하되, 신료의 충간을 수용하지 못해 결국 여색에 빠져 망했다는 것을 극복하고 그것을 용케 극복할 줄 알았다는 현명함을 강조했다.
아울러 선덕여왕의 모란 고사를 들어 당태종을 탄복케 한 여왕의 기지를 조명하는 등의 주체적 우월성을 강조하고 있다. 이러한 꽃을 가전의 대상으로 한 작품의 근원은 설총의 「화왕계」에서 그 유래를 찾아야 한다. 후계는 이 작품에서 등장하는 꽃의 속성을 의인화하여 풍자와 교훈을 제시한다. 내용을 분절하면 다음과 같다.
① 화왕인 모란이 작약을 재상으로 삼아 三皇의 어진 정치를 하고자 하였다.
② 매화와 대나무와 국화를 불러들였는데 국화는 가지 않았다.
③ 화왕은 뒤에 경국지색인 해당화에 빠져 결국 나라가 망한 뒤로 자살하였다.
④ 화왕에 부름을 받아 나아갔던 매화는 버림을 받았고 대나무는 겨우 절개만 지켰다.
⑤ 반면에 국화만 초연하게 화를 면했다.
⑥ 평결
이 작품의 주제 의식은 두 가지로 집약된다. 화왕의 주색잡기에 대한 풍자와 명철보신한 은일의 국화를 칭송하고 있다. 먼저 화왕의 주색잡기 놀음에 대한 부분을 보면, 화왕은 해당화가 경국지색임을 듣고 그녀를 불러 들여 날마다 미색에 빠진다. 이에 대나무는 중국의 오왕이 서시의 미색에, 당나라 현종이 양귀비의 미색 때문에 패가망신했던 전례를 들어 자중해 줄 것을 충간했지만 화왕은 수용하지 않았다.
이로 인해 결국 정치를 망치고 나라는 도탄지경에 빠졌으며 화왕과 작약은 함께 죽고 말았다. 이로써 대나무는 겨우 목숨만 부지했고 매화는 버림을 받았지만 국화만 초연히 화를 면했다. 후계는 화왕에 대한 주색잡기를 풍자하면서 역사는 위정자의 정치 득실에 대해 엄격한 비판과 함께 후대의 평가가 필연적임을 강조했다. 그러므로 위정자의 정치 행적은 반드시 후대인에 의해 평가를 받기 마련이란 점을 경각시켰다. 이로써 첫 번째 큰 주제 의식은 추출되었다.
이와 함께 은일자중한 국화에 대한 평가도 주목할 필요가 있다. 후계는 시경을 인용하여 명철보신한 국화의 처세를 극찬하였다. 이어 국화를 사람에 빗대어 만년에 절개를 잘 지켜 자중하는 것이 매우 주요한 과제라고 했다.
이는 퇴계의 출처를 찬미하는 의식과 연관된다. 후계는 결말 부분에서 시경의 “旣明且哲 以保其身”의 구절을 인용함으로써 은일로 유일하게 명철보신한 국화의 처세에 대해 칭송하고 있다.
이는 곧 선조 퇴계의 행적을 우의적으로 그리고 있다는 점에서 주목된다. 퇴계는 19세 때에 기묘사화를 목격했으며, 45세 때에는 을사사화의 회오리를 몸소 겪었다. 이 당시 수많은 선비들이 죽임을 당하고 귀양을 가는 참상을 겪었고, 46세 때에는 둘째 부인 권씨가 세상을 떠났다. 48세 둘째 아들 寀가 21세의 나이로 요절했고, 50세 때는 넷째 형 李瀣가 李芑의 모함을 받아 甲山으로 귀양 가던 중 사망하는 불행을 연이어 당했다.
이런 가정의 불행과 벼슬살이에 염증을 느낀 퇴계는 사실상 43세 때부터 관직에서 물러날 것을 다짐하고 수십 번에 걸쳐 사직 상소문을 비롯하여 퇴거하게 해달라는 호소를 계속 해왔다. 이후 51세에 퇴계 서쪽에 한서암을 지었고, 52세 때에는 한서암을 아들에게 살림집으로 내어주고 퇴계 북쪽에 계상서당을 다시 지어 본격적 은거 생활을 시작했다. 57세에 도산의 남쪽에 거처를 마련하고 도산서당을 건립해 61세에 완공하였다. 이후 퇴계는 제자 양성과 학문을 완성했다.
여기서 후계가 이중적 주제를 부여하고자 했던 바는 바로 은일자중하여 명철보신한 국화의 형상화이다. 이는 선조 퇴계의 출처관과 밀접한 연관이 있다고 봐야 한다. 그러한 후계의 문예적 역량이 군왕의 호색에 대한 감계를 1차적 주제로 내세웠지만, 국화의 처세가 현명했던 점을 들어 퇴계의 처세 찬미 의식을 드러내었다.
결국 이 작품은 큰 주제 의식은 군왕의 호색에 대한 경계 및 사치를 경계한 것으로, ‘군왕의 정치 득실은 반드시 감계의 대상이 된다는 점’을 강조하고 있다. 이런 의식이 곧 유가 정신에 입각한 후계의 역사관이라 할 수 있다. 이러한 후계의 정학 추구와 유교적 역사관은 애민 정서가 확대된 경세택민 의식으로 발전된다.
도산구곡 제8곡 : 성재 금난수(퇴계 제자)의 유적지 고산정(경북 안동시 도산면 가송리). 드라마 (미스터 선샤인) 촬영지.
5. 경세택민 의식
후계의 유가 이념에 근거한 투철한 역사 인식론은 애민 정서로 확대된다. 다음 시를 보기로 한다. 서생의 시각에서 농촌 백성들의 어려움을 주목한 작품이다.
세모에 추위가 위세 부리는데 歲暮寒威重
병든 몸은 자유롭지 못하여라 身病不自安
지팡이 끌고 산 위로 올라가니 携笻上山上
쇠잔한 낙엽을 거두어 모아 落葉收餘殘
이따금 돌다리를 건너면서 間關石磴路
넘어지며 지팡이 끌고 오네 顚倒曳而還
금방 언 구들장이 따뜻해져 須臾煖生突
창문의 추위를 피할 만하여 窓櫳爲辟寒
두 손을 화롯불에 쪼이나니 擁爐煮雙手
훈기가 쇠한 얼굴에 퍼지네 薰氣遍衰顔
다시 책상을 당겨 책 펼쳐서 更引丌頭卷
두세 장의 책을 읽어 본다네 披閱二三端
문밖엔 세금 독촉 아전 와서 門外催租吏
돈 내라는 고함을 크게 질러 索錢何太讙
흉년당한 백성들 고통스러워 荒歲多民苦
천장 올려 보며 긴 탄식하네 仰屋復長歎
후계는 일반 서생으로 세모를 맞아 온기가 사라진 방을 데우기 위해 손수 낙엽을 모으기 위해 산에 오른다. 이리저리 넘어지며 고생을 하며 모은 낙엽을 가지고 서재로 돌아와 아궁이에 불을 지핀다. 이내 구들장이 데워지고 훈기가 감돈다. 창문에 몰아치는 강추위를 어느 정도 막아내는가 싶어 화롯불에 양손을 녹인다.
그리고 책상을 끌어당겨 책을 몇 쪽 읽는 가운데 세금을 닦달하는 아전이 출현하여 모처럼의 독서를 방해하고 만다. 세금을 재촉하는 포악한 아전들의 횡포를 익히 알고 있기에 근심에 잠긴다. 흉년을 당한 백성들이 이들의 등살을 견뎌내는 것이 여간 힘겹지 않음을 알기에 천장을 올려보며 탄식만 내뿜는다. 서생이 일반 백성들의 조세 징수 독촉에 연민 시각을 주어 표현한 작품이다. 이는 후계 내면에 연민 의식이 내재해 있기에 가능한 표현이다.
이러한 후계의 애민 정서는 그 범위가 확대된 경세 의식으로 발전된다. 그가 1798년(45세)에 지은 ‘조적에 대해 논한 글’에서 조세 제도의 문란과 이로 인해 고통을 받는 백성들의 입장을 대변하였다. 이 논설에서 그는 조세 제도 운영의 비합리성과 비리를 비판하며 대안까지 제시하는 경세택민 의식을 담아내었다. 조적의 폐단 배경을 언급하며 논의를 시작한다.
세상에서 시폐를 이야기하는 이들은 반드시 삼정인 ‘군결’․‘군적’․‘조적’을 거론한다. 이 세 가지 사안은 국가의 큰 의무이다. 그러나 전결과 군적이 비록 폐단이 있다고는 하지만 조적처럼 심하지는 않다. 전결과 군적은 그 폐단이 갑자기 변통한 것은 아니지만 조적이 변통된 점은 인정된다. 아! 우리나라 백성들의 폐단 가운데 조적보다 더 심한 것은 없다. 조적의 폐단을 대체만 언급하면, 춘궁기에 덜 채 운 말에 쭉정이 곡물을 빌려주고 가을에는 말을 꽉 채운 알곡을 거둬들인다. 겉으로 보기에는 몇 말 정도 줄어들 정도로 비슷하지만 실제 곡물 수량을 따져보면, 두 배 이상 다섯 배 정도이다. 명목상 빌려준 것을 거둬들인다고 하지만 실제로는 마구 거두어들이는 행패와 다를 바 없다.
‘삼정’의 폐해 가운데 ‘조적’의 폐단이 가장 심하다고 하였다. 조적의 피해에 대해 구체적으로 설명을 하는데, 농민들이 춘궁기에 나라에서 빌려주는 곡식을 궁여지책으로 빌려 연명을 해나가야 하는 극한 상황이다. 그런데 빌려주는 곡식은 정량에 미치지 않는 부실한 곡물임에 비해 회수하는 곡식은 정량 이상 알곡을 강제 징수하므로 실제 차이를 비교해 보면, 갑 절 이상이나 다섯 배의 차이가 난다.
이와 함께 징수관들의 억지 논리에 항의하지 못한 채 강제 징수를 당해야 하는 농민들의 슬픈 현실의 정황이 보고된다. 이러한 악순환의 고리는 1년 만에 종결되지 않는다. 매년 그런 악한 폐습이 반복되며 지속된다. 그렇지만 농민들은 그 악습에서 벗어날 도리가 없다. 명목상 ‘빌려주는 것’이지만 실제로는 공권력이 수반된 ‘강제 회수’의 모순 현실이다.
잘 사는 사람들은 이를 모면할 방책을 찾아 나라 곡물을 받지 않겠지만 빈민들만 그런 피해를 당한다. 빌린 곡식이 많게는 10여 석에 이르고 적어도 5-6석은 된다. 그런데 빈민들 가운데 가을 추수 곡식이 5-6석 되는 이는 거의 없다. 때문에 추수한 곡물을 몽땅 바쳐야 한다. 그렇게 하고도 모자라면 땅을 저당 잡히거나 소를 팔아야 한다. 또 부족하면 뿔뿔이 흩어져 몸을 숨긴다. 그래서 그 부담을 이웃에게 전가시키거나, 친척들에게 떠맡기는 근심을 끼치거나 무고한 사람들에게 떠넘긴다. 이외의 폐단도 가지각색으로 많아 백성들이 견뎌내지 못한다.
관아에서는 부실한 곡물을 춘궁기에 죄다 방출하기 위해 안간 힘을 쓴다. 그래서 잘 사는 사람들은 애써 이를 받지 않으려고 둘러대지만 빈민들은 또 악순환의 사이클에 합류할 수밖에 다른 도리가 없다. 이로 인해 빌린 곡식이 많게는 10여 석에서 최소한 5-6석은 된다. 그렇기 때문에 가을에 추수하는 알곡을 몽땅 수납해야만 하는 참담한 현실 위기에 봉착한다.
문제는 수납을 감당하지 못하는 경우이다. 이런 경우는 남은 토지를 전당 잡히거나 소를 팔아 납부 조치를 한다. 이렇게 할 형편이 못되는 빈민들은 아전들의 닦달을 견디지 못해 가족과 생이별을 하며 몸을 숨기게 된다. 이에 유랑 농민들이 대거 발생하게 되고, 그들의 채납 부담은 친척이나 이웃에게 전가 되어 이른바, ‘隣徵’과 ‘族徵’의 폐단을 확대재생산하게 된다. 이제 후계는 현장의 농민들 속으로 들어가 고충을 경청한다.
이에 백성들은 춘궁기 곡식이 떨어질 무렵에 곡식 한 말이나 한 되를 구해 하루하루 연명해 간다. 이즈음 나라에서는 기꺼이 곡물을 빌려주지만 받는 백성들은 기쁨보다는 가을에 갚아야 할 것을 근심한다. 어깨에 쭉정이 곡물을 메고는 오지만 미간에는 근심이 잔뜩 끼여 있다. 이러한 채 1년이 지나면 또 1년의 근심이 되고, 종신토록 내내 근심이 되어 모두들 ‘환곡이 있는 한 우리는 살 수 없으니, 환곡이 없어져야 우리가 살 수 있다’고 한다. 한 가정만 미루어 보면 그 경내 사정이 모두 그러하다는 것을 파악할 수 있다. 한 경내만 미루어 보면 한 도 전체가 그러하다는 것을 알 수 있고, 한 도만 미루어 보면 온 나라가 모두 그런 형편이라는 것을 이 때문에 알 수 있다. 생각컨대 조정에서 경리의 책임을 맡은 관리는 필시 굉장한 대책을 지녔으며 이러한 폐단을 건질 수 있으련만 백성들의 고충은 한 마디도 들어주지 않는다.
식량이 바닥난 보리 고개를 만난 농민들의 슬픈 이야기를 보도하였다. 농민들은 구걸하다시피 식량을 빌려 연명을 해나가야 하는데 그 과정에서 나라에서 빌려주는 곡식을 어깨에 메고 오지만 갚아야 하는 부담 때문에 걸음이 무겁다. 이에 농민들은 이 환곡제의 모순을 깊이 인식하고 있기에 환곡 때문에 살 도리가 없다는 탄식을 한다.
후계는 이러한 형편이 조선 팔도 전체에 만연해 있다고 진단했다. 조정에서 이러한 책임을 맡은 이들이 분명 해결 방안이 있겠지만 전혀 시행하지 않는 현실 앞에 분개한다. 빈한한 농민들의 고충을 귀담아 듣지 않는 조정 관료들에 대한 질책의 의미가 담긴 대목이다. 이에 후계는 길손과 질의, 응답 과정을 통해 이러한 모순 현실 극복 대안을 제시한다. 이러한 논리 전개 속에 경세 의식을 반영하였다.
어떤 길손이 나를 방문해 다음처럼 말했다. “그대는 초야의 선비로 망령되이 백성과 나라 정사에 대해 논했으니, ‘분수를 지켜 지나치지 않는다’는 가르침에 어긋난 처사가 아닙니까?”
내가 그의 말에 응했다. “대학은 학자로서 일삼아야 할 책입니다. ‘수신’에서 시작하여 ‘치국평천하’까지 미치라고 했습니다. ‘평천하’의 도 역시 학자로서 마땅히 수행해야 할 일 가운데 들어 있습니다. 지금 이러한 논의는 ‘백성을 좋아하고 미워하는 마음을 미루어 재물을 일으키는 도까지 미치게 하는 것’이니 대학에서 말한 ‘혈구지도’가 아니라 할 수 없습니다.”
논의를 시작하면서 이 논의 전개의 정당성 근거를 확보한다. 초야의 선비로서 조정대사를 논의할 수 있겠느냐는 길손의 질문에 대한 답변이다. 후계는 이러한 논의의 정당성 근거를 대학 ‘수신’→‘제가’→‘치국’→‘평천하’의 명제를 들어 비록 초야의 선비이지만, ‘치국’의 도를 논할 수 있다는 논리를 점을 천명한다. 이제 환곡제의 비리에 대한 구체적 논의를 진행한다.
길손이 또 말했다. “환곡의 법은 한 번 나누어 주고 한 번 거둬들이는 것으로, 상하로 빙 돌아 다시 돌아오는 것인데, 어찌하여 그것이 강제로 거둬들인다는 비난을 받습니까? 이제 그대 말을 듣고 보니, 바로 강제로 마구 거둬들인다는 혐의를 벗을 수 없을 것 같습니다.”
내가 말했다. “그대 말씀이 맞습니다. 근래 ‘환곡’은 빈 쭉정이 곡식을 빌려주고 알곡을 거두어들이는 제도입니다. 말에 덜 차게 곡식을 담아 빌려주고는 말에 넘치게 곡식을 거둬들입니다. 빌려주는 2-3석의 곡식은 거둬들이는 곡식 1석과 비교가 되지 못합니다. 그러므로 실제로는 강제로 거둬들이는 것과 다르지 않으니 백성들은 견디지 못해 원한을 품고 죽으려 합니다. 일 호마다 1석씩 거둬들인다면 백성은 힘들어하지 않으면서 즐겁게 따를 것입니다. 그렇게 되면 환곡은 ‘강제로 징수하는 것’이 아닌, ‘백성을 이롭게 하는 것’이 될 것입니다.
환곡은 ‘빈민 구제를 목적으로 평소 양곡을 저장했다가 흉년이나 춘궁기에 대여해 주고, 추수 후에 회수하는 것이다. 이는 원래 ’의창‘의 소관이었지만 16세기에 들어오면서 의창은 元穀이 부족하여 유명무실하게 되었으며, 물가 조절 기관인 상평창이 이를 대신했다. 그런데 환곡을 회수할 때, ‘耗穀’이라는 명목으로 10%의 이자를 함께 받았다.
그런데 이는 점차 고리대로 변질되었으며, 전세 수입이 감소되자 환곡은 국가 재정의 주요 기반으로 정착되었다. 조선후기에 이르러, 탐관오리들은 이를 빌미로 하여 허위 장부를 조작하는 ‘反作’, 비축해야 할 양곡을 개인적으로 대여한 ‘加分’, 곡물에 겨나 돌을 섞어 한 섬을 두 섬으로 불리는 ‘分石’, 창고에는 없지만 실제 곡물이 있는 것처럼 보고하는 ‘虛留’ 등의 횡포가 만연했다.
이처럼 ‘환곡제’가 원래 목적에 벗어나 강제 징수제로 변한 모순을 낳았다. 현행 환곡제도가 애당초 백성들의 삶을 보장하기 위한 복지 정책에 위배된 제도로 변질된 것에 대한 담론을 전개한다. 관아의 횡포가 공개되고 있다. 빌려 주는 곡식은 형편이 없지만 징수하는 곡식은 알곡을 요구하고 빌려주는 것보다 몇 배를 더 징수하기에 농민들의 고충과 원한은 더욱 깊어 죽음을 택한다.
후계는 이러한 폐단을 구제하는 방안으로 호마다 1석씩 곡식을 거두자고 제안한다. 이렇게 하면 ‘환곡제’는 정착되어 백성들의 삶은 유익하게 될 것이라고 한다. 이러한 발상은 환곡제의 혁파를 촉구하는 격앙된 목소리로 증폭되어 보고된다.
길손이 말했다. “옛 사람들이 이르기를, ‘옛 법을 고치지 말고 새로운 법을 만들지 말라’고 했습니다. ‘환곡’ 시행은 우리나라 400년 전통의 옛 제도인데 하루아침에 고칠 수 있겠습니까? 게다가 호구의 谷은 예전과 다르지 않으므로 새로운 법을 만드는 것 보다는 예전의 이리의 ‘평적제’나 주자의 ‘사창제’를 시행하는 게 나을 것 같습니다. 그렇게 할 수 없다면 옛 제도를 근거로 하여 간소하게 뜯어 고치는 게 더 좋을 것 같습니다.”
내가 답했다. 한나라 애제 때 사단이 건의하기를, “군자가 정치를 하면 인습을 버리지 않고 그대로 따르는 것은 귀하게 여기고, 이미 만든 제도를 고쳐 다시 만드는 것을 소중히 여긴다’고 했습니다. 그러나 다시 고치는 이유는 장차 급한 형편을 구하기 위함입니다. 지금 환곡의 법은 변통해서 급한 것을 구제하지 않으면 안 될 형편입니다. 만약 급한 것을 구제하려면 이것 외에 다른 방도가 없습니다. 이리의 ‘평적제’를 제시하여 한 해 농사 작황을 상중하로 해서 흉년이 들었을 때를 대비하는 것을 법으로 제정했습니다. 그런데 환곡은 논밭에 세금을 부과하던 데서 비롯되었습니다. 이는 현재 실행되고 있으니 더 많이 징수해서는 안 됩니다. 주자의 ‘사창제’도 참으로 좋은 것입니다만 현재로서는 향주가 빌려 주고 거둬들이는데 이란 정치를 해서는 안 됩니다. 이 두 가지 조목은 대책문에서 이미 언급했지만 시행되지 못하고 있습니다. 옛 제도에 근거하여 간략히 고치면 그것은 좋은 방책이 될 것입니다. 그런데 아침에 고쳤다고는 하지만 저녁이 되면 예전과 같아 일마다 폐단이 발생되어 구제할 수 없게 되었으니 구제할 만한 한 가지 도는 내 주장만한 것이 없습니다. 그러나 이 법은 처음 만든 것은 아닙니다. 월령에 의하면, ‘당나라 때에 조용조 제도를 만들었다’고 합니다. ‘조’라는 것은 ‘좁쌀’과 ‘쌀’을 거둬들인 제도로, 예전에 그런 제도가 없었다고 할 수는 없습니다. 그런데 세상의 도리가 강하의 운세처럼 변하고 법과 제도도 시대 변천에 따라 바뀝니다. 성인이 법을 만들지라도 오래 되어도 낡아지지 않거나, 낡아지지만 변하지 않을 법은 없습니다. 어이하여 옛 것을 고쳐 새롭게 만드는 게 어렵다고만 하고, 급한 것을 구제하는 제도를 혁파하려는 시도를 하지 않습니까?”
위에서 언급된 李悝를 보면, 위문후가 그를 재상으로 임명하자, 그는 토지 생산력을 높이는 방안에 대한 글을 지어 부국강병책을 주장했다. 그는 “곡식의 값이 폭등하면 백성들의 삶이 고달파지고, 곡식의 값이 너무 싸면 농사짓기가 어려워진다”고 주장하면서 백성들을 위한 ‘平糴法’을 제정했다. 그는 매년 농사 작황을 상․중․하로 나누어 남은 곡식을 거두어 흉년이 들어 발생하는 부족한 분량을 보충하게 했다. 그 결과, 자연 재해로 인해 기근이 발생할 지라도 곡식 값이 폭등하는 일을 막았다. 이로 인해 위나라는 경제적으로 획기적인 발전을 이루어 전국 초기에 전국 칠웅 가운데 최고의 강국이 되었다.
위 글에서 후계는 ‘조적제’의 폐단을 개혁할 당위성을 강조하였다. 먼저 길손의 언급을 통해 우리나라에서 400년 이상 지속적으로 시행되어 온 환곡 제도를 하루아침에 고치기 어려운 점을 들었다. 해서 길손은 이런 폐단을 보완하기 위한 장치로, 이리의 ‘평적법’이나 주자의 ‘사창제’ 시행을 건의했다. 그렇지만 여의치 못할 경우, 옛 제도를 근간으로 해서 부분적 보완책을 강구하는 것도 한 방법이라고 했다.
이에 대한 후계의 대답은 간명하다. 한나라 애제 때 사단이란 자가 옛 제도 개선의 장점을 언급한 사례를 들어 현행 환곡법 체제를 전면 재조정해야 한다고 단언했다. 그리고 사실 ‘평작제’나 ‘사창제’ 역시 나름대로 한계를 노출하고 있기 때문에 조선에 그대로 적용하는 것은 사실상 무리라고 하였다. 전면적인 ‘환곡제’의 개혁만이 민생들의 고충을 덜어 주고 살 길을 마련하는 첩경이라는 점을 경각시켰다. 이어 구체적 개혁 방안을 모색한다.
객이 말했다. “법이 오래되면 폐단이 발생하여 시대에 따라 쉽게 바뀌어도 크게 해로울 것은 없습니다. 다만 지금 조정에서 운영되는 도성 바깥 지출의 재원이 대부분 환곡에서 나옵니다. 환곡제가 시행될 때는 재물 쓰임이 부족할까 근심되지만 ‘환곡제’를 폐하면 도성과 외부의 지출을 장차 어디에서 충당할 수 있을까요?”
내가 웃으며 답했다. 도성과 외지의 지출 경비 재원은 논과 밭에서 내는 세금과 봄과 가을에 무명이나 모시를 내고 있습니다. 환곡에서 나오는 세금은 그 일부에 불과할 뿐입니다. 현재 집집마다 거두는 곡식이 큰 고을에는 만 석, 작은 고을에는 천 석이 됩니다. 그 절반을 도성과 외부 지역의 지출 경비로 쓰고, 그 절반은 구휼하는 재원으로 지출해야 합니다. 도성과 외부의 지출 경비는 응당 일반 지출 경비보다 많겠지만 이는 특이한 사안은 아닙니다. 우리나라는 관청의 관원들이 도성이나 외지를 막론하고 탐욕스럽고 더러운 습속과 분수에 넘치는 사치의 풍조가 만연한 이유는 모두 국고 재원이 많기 때문이며, 백성들의 곤궁과 고통은 점점 깊어지고 피폐가 끊이지 않는 것은 모두 세금을 마구잡이 거둬들이기 때문입니다. 주역에서 ‘아래 사람의 것을 덜어 윗사람을 이롭게 하면 손해이며, 윗사람의 재물을 덜어 아랫사람을 이롭게 하면 유익하다’고 했고, 대학에서는 ‘재물이 모이면 백성들은 흩어지고, 재물이 흩어지면 백성들은 모인다’고 했습니다. 만약 환곡의 제도를 폐지한다면 재물이 일반 백성들에게 몰려 집집마다 재물이 넉넉해 질 것입니다. 여항의 사이에서도 위로 부모를 모시고 아래로 자식을 키우는 즐거움을 누리게 될 것이며 오두막집에 사는 백성들도 탄식하고 근심하는 원성이 사라질 것입니다. 공자가 이른바, ‘백성들의 생활이 풍족하면 그 어느 임금인들 부족하겠는가’라고 한 것이 이런 이유 때문이다. 그런데 그대는 왜 나라의 지출 재원이 부족함을 근심하십니까?”
길손의 걱정은 만약 현행의 ‘환곡제’를 혁파하면, 당장 도성과 외부의 지출 경비 마련 재원이 바닥나고 이를 충당할 대안이 없다는 것이다. 이에 후계는 도성과 외지의 지출 경비는 논과 밭에서 거두는 세금과 봄가을로 거둬들이는 무명과 모시로 충당할 수 있으며, ‘환곡제’를 통해 징수된 것은 그 일부에 지나지 않는 것임을 강조했다.
첫째, ‘환곡제’를 통해 수입된 곡물 절반은 도성과 외지 지출 경비로 지출하고, 절반은 구휼 경비로 지출해야 한다고 했다. 둘째, 우리나라에 사치 풍조가 만연한 것은 국고 재원이 넉넉하기 때문이며, 이는 결국 마구잡이식으로 백성들에게 징수한 데서 재원이 마련된 것이다. 그 결과, 백성들은 질곡의 늪에서 벗어날 수 없다는 점을 간파했다. 셋째, 이러한 ‘환곡제’를 폐지하면 자연히 재물 분산이 이루어져서 하층민들의 삶이 윤택해 지며 안정될 것이라 하였다. 이어지는 글에서도 ‘환곡제’의 개혁을 촉구한다.
객이 말했다. “환곡은 국가 재용일 뿐만 아니라 특히 백성들을 구제하는 재원이기도 합니다. 불행하게도 2300여 리에 걸쳐 가뭄이 들면 나라에서는 어떻게 구제할 것입니까? 갑자기 국경 지역에 급한 사태가 발생하면 수십 백만의 백성들을 나라에선 어떻게 먹여 살립니까?”
내가 답했다. “아! 지금 환곡제로 환란 때 백성들을 구제할 만한 식량이 비축되어 있는지요? 명목상 절반을 비축한다고 하지만 해마다 곡식 창고는 비워집니다. 알곡을 거둬들이지만 이것이 쌀겨로 변해 버리니 이는 나누어 주는 폐단 때문입니다. 만약 집집마다 1 년을 묵혀 두고 번갈아 사용하게 한다면 그 곡식은 그대로 남게 될 것입니다. 고을마다 비축한 곡식이 있어 쓰임에 족할 것입니다. 각 도별로 산성에 비축해 둔 곡식을 나누어 주라는 명을 내리지 않아도 해마다 팔고 사게 되어 곡식이 귀할 때나 천할 때와 상관없이 되어 평상시처럼 거래될 것이니 이것이 큰 도움이 되지 않겠습니까? 흉년이 되어 곡물 가격이 폭등하면 비축한 곡식 절반을 쓰지 않고도 도성과 외부 지역에서 지출하는 재원을 마련하게 될 것입니다. 그 곡식의 과반수로 가난한 백성들을 도와주면 훌륭한 흉년 대비책이 아니겠습니까? 이렇게 하나 저렇게 하나 그 쓰임은 족할 것이니 환곡제와 비교될 수 없을 만큼 좋을 것입니다.”
길손의 걱정은 가뭄과 전란과 같은 국가 위기에 대해 어떻게 대처해 내겠느냐는 것인데, 후계는 현재 ‘환곡제’로는 이런 자연 재해나 국가적 위기에 절대적으로 대응할 역량이 없다고 단언한다. 명목상 곡물의 전량 가운데 절반을 비축한다고는 하지만 실제로 창고는 텅 비어있다고 하였다. 알곡을 거둬들이지만 이를 관리하는 중간 계층의 농간에 의해 알곡이 겨로 둔갑하는 전횡이 만연해 있는 현실을 개탄했다.
이러한 폐단 발생의 근본 원인이 백성들에게 곡식을 나누어주는 폐단 때문이라고 한다. 대안으로 집집마다 곡물을 비축하게 하여 번갈아 사용하게 함으로써 곡물 통용은 안정세를 회복하게 될 것이며, 특히 산성에 비축된 곡식은 절로 유통이 되어 곡물 가격도 안정을 찾게 된다고 했다. 이는 국가 대란이나 흉년에 대비하는 좋은 방책임을 깨우쳐 주었다. 길손은 이 글의 마무리 단계에 이르러 후계의 ‘환곡제’ 폐단 수습 대안 제시를 수긍한다.
객이 질문했다. “재물에 관한 정치는 일반 사람들과 논의할 수 없습니다. 사람의 재주가 시대를 구제하고, 나라를 위해 도모하는 계책을 지닌 자라야 더불어 고을과 나라의 정치를 논해 당대에 그러한 이익을 누리게 하고 그 법을 후세에 전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지금 나는 재주가 노둔하고 거칠고 뜻과 사려가 짧고 얕습니다. 한 가구 열 식구도 구제하고 거느리기가 어렵습니다. 식구들이 주리거나 추위에 떨면 어쩌나 하는 염려를 떨쳐버리지 못하는 주제에 망령되이 한 나라의 정치를 논할 수 있겠습니까? 스스로 역량을 헤아려보지 못하고 참람하고 망령스럽기만 합니다.”
내가 답했다. “아! 나는 그대가 사물에 달통한 분으로 여겨 묻는 대로 소견을 말했는데 큰 실수를 저질렀습니다. 참으로 제 말씀이 우임금이나 신하인 직이 있은 이후 파종에 대해 언급했겠으며, 주공이 있는 이후 정전제에 대해 언급했겠습니까? 관자의 그릇은 작아 재물의 경중을 논했으며 이리가 이익을 숭상하여 ‘평작법’을 만들었겠습니까? 이는 군자로 옛 제도 익히는 것을 좋아하고 ‘경세택민’의 책임을 지며 세상을 구제할 정치에 대해 논할 수 없겠습니까? 이 말씀을 허황된 말로 쓸 데 없는 것으로 여기시는 것은 옳지 않습니다. 그렇다면 공자는 왜 재물 쓰임에 대해 논했으며, 맹자는 왜 백성들의 제어에 대해 서술했겠습니까? 이는 반드시 그럴 만한 이유가 있었기 때문입니다. 이에 객이 눈이 휘둥그레져서 스스로 실수했다고 하며 뒷걸음치며 나갔다.
후계는 중국 역대 어진 제왕이나 어진 신하들의 경세 행적을 거론하면서, 자신이 길손의 답변에 응하면서 제시했던 ‘경세택민론’의 당위를 강조하였다. 군자로서 경세택민 의식을 논하는 것은 지극히 당연한 행위이며 이는 재야의 선비로서 마땅히 지녀야 할 책임 의식임을 경각시켰다.
정리하면, 후계는 퇴계 가학을 계승하여 성리학을 추구했으며, 역사는 후대 사람들에 의해 엄정한 평가를 받는다는
역사은감 의식과 경세택민 의식을 지닌 인물로 요약할 수 있다. 말하자면 그는 철저한 성리학 사유 체계를 갖추었고 유교적 역사관과 경세애민 정신을 지닌 인물이라 할 수 있다.
6. 맺음말
도산구곡시 창작 배경과 활동 양상 연구를 거쳐 도산구곡 문학 전개사의 토대를 마련하기 위해 일차적으로 퇴계 가학을 충실히 계승했던 후계의 생애와 사상적 측면을 정리하였다.
후계는 후계서당을 건립하여 후학들을 지도하며 퇴계의 학문과 정신을 이어가도록 추동하였다. 이와 함께 그는 퇴계학 연구에 전념하면서 가업 계승에 주력했을 뿐만 아니라 족친들에게까지 가학 전승의 중요성을 인식시키고 자부심을 진작시키는데 큰 역할을 담당했다. 그는 도산서원 수장으로, 퇴계 문집 200여 판의 오류를 정밀하게 수정하여 개간하였으며 임종 1년 전까지 청량정사 수축에 참여할 만큼 선조 추숭 사업에의 열정이 강했다.
후계집은 1861년경 6권 3책의 활자로 간행되었다. 그 후, 이휘병이 내용을 증보하고 재편하여 10권 6책의 목판으로 문집을 간행하였다. 이어 1860년대 후반에 중간본이 간행되었다. 중간본을 초간본과 비교해 보면 권1-2의 시가 증보되었고, 초간본에 없던 산문도 추록했다. 초간본과 중간본을 비교해보면, 초간본에 비해 중간본에서는 「묘갈명」과 「유사」의 변화를 시도하여 하계의 인정 기술을 풍부하게 하려는 흔적이 드러난다.
후계는 가학 계승을 자임하며 철저하게 성리학을 추구했으며, 서학의 침범에 따른 우려의 목소리를 제시하였다. 서학의 침범을 막는 유일한 대안이 철저한 성리학 신봉이라고 하면서 투철한 성리 학 재무장을 강조하였다.
아울러 그는 역사는 후대 사람들에 의해 엄정한 평가를 받는다는 역사은감 의식을 지닌 인물이었다. 그런 점에서 그는 철저한 성리학 사상 체계 기반 위에 유교적 역사관을 체득한 인물로 평가할 수 있다. 그리고 ‘조적론’을 통해 유교적 명분에 입각한 어진 정치를 구현하라는 연민 의식이 확대된 경세택민의 목소리를 전했다. 애민 정신의 확대 개념인 경세택민 의식은 후계의 사상 가운데서도 주목되는 부분이다.
이후 하계의 문학 활동과 행적을 면밀하게 정리하여 퇴계가 도산구곡 창작 동인을 밝혀 내고자 한다. 점차 외연을 확장하여 광뢰, 하계와의 상관성과 변별성 파악 및 도산구곡 문학 운동 형태 조망을 거쳐 도산구곡 문학 전개사의 연구를 이어가고자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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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 출처 : 안동의 누정(樓亭) Ⅱ-삼구정,고산정,체화정[三龜亭,孤山亭,棣華亭] http://blog.naver.com/ohyh45/221325525850
출처 : 이원걸, '후계 이이순의 생애와 사상', [안동학 연구], 한국국학진흥원, 201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