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1. 11. 17
한국은 민관 합동으로 세운 ‘법조 공화국’이다. 고소·고발과 ‘정치의 사법화’가 왕성하게 일어나 세계 최고 수준에 이른 나라가 아닌가. 법을 사랑하지 않으면 대통령 되기도 힘들다. 지난 6월 중앙일보는 대통령 후보 여론조사의 상위권을 법과대학 출신 정치인이 싹쓸이하고 있다고 지적했다. 윤석열, 이재명, 이낙연, 홍준표, 추미애, 최재형이 그러하며, 이외에도 정세균, 이광재, 원희룡, 황교안 등 죄다 법대 출신이라는 것이다.
국회의원은 어떤가? 대부분 법대를 나온 법조인 출신이 16대 국회 41명, 17대 54명, 18대 59명, 19대 42명, 20대 49명, 21대 46명 등 늘 전체 의원의 15~20%를 차지해왔다. 너무 많지 않은가? 그럼에도 정당들은 인재 영입 시 법조인을 우대하는 걸 어이하랴. 더불어민주당이 2020년 2월 총선을 앞두고 외부인사를 영입했을 때 전체의 약 30%가 법조인이었다.
왜 그러는 걸까? 전반적인 사회체제의 보수화(또는 안정화), 유권자의 학력·학벌 우대 풍토, 그리고 정치 진입·탈퇴 시 법조인이 누릴 수 있는 호구지책의 비교 우위를 들 수 있겠다. 이 마지막 이유가 중요하다. 법조 출신 정치인은 공천에서 탈락하거나 선거에서 낙선해도 언제건 변호사로 돌아갈 수 있는 자유와 혜택을 누릴 수 있지만, 다른 전문 직종이나 직업을 가진 사람은 비교적 그게 그렇게 쉽지 않다는 것이다.
사실 이 문제는 100여년 전인 1919년 독일 사회학자 막스 베버가 ‘직업으로서의 정치’라는 강연에서 ‘정치를 직업으로 삼는 두 가지 방식’에 대해 말하면서 지적했던 것이다. 그가 말한 두 가지 방식은 정치를 ‘위해’ 살거나 정치에 ‘의해’ 사는 것이다. 물론 이 둘은 상호 배타적인 건 아니다. 많은 정치인들이 정치를 위해 사는 동시에 정치에 의해 살고 있다.
정치를 위해 산다 함은 이기적인 목적이건, 이타적인 목적이건 정신적인 의미에서 ‘정치를 자신의 삶으로’ 삼는 걸 의미한다. 그렇다면 호구지책은 어떻게 할 것인가? 바로 이 측면, 즉 정치를 지속적인 수입원으로 삼는 걸 정치에 의해 산다고 볼 수 있다. 대중은 정치인이 정치에 ‘의해’ 사는 측면에 대해 양 극단의 자세를 취한다. 한 부류는 그걸 너무 인정하지 않아서 탈이고, 또 한 부류는 그걸 너무 인정해서 탈이다.
많은 사람들이 의원들에게 정치는 먹고사는 생계수단이기도 하다는 사실을 인정하지 않는다. 의원들이 생계수단을 놓치지 않기 위해 벌이는 일은 정치인을 저주해야 할 이유가 된다. 이들이 이상적으로 생각하는 정치인은 현실 세계에 존재하기 어렵다는 사실은 아예 논의 대상도 되질 않는다. 평소에 존경받던 운동권, 학계 인사들조차 정치판에 들어가기만 하면 변질되는 이유는 무엇인가? 그 이유 중의 하나는 그들이 정치를 생계수단으로 삼기 시작했기 때문이다.
‘생계수단으로서의 정치’를 인정하지 않는 사람들 중엔 정치를 직업으로 택할 뜻이 전혀 없는 사람들이 많다. 인생의 황금기 중 10년 이상을 정치에 투자한 사람에게 어느날 갑자기 “너 나가라”라고 그러면 그 사람은 이후 무엇으로 먹고사나? 언제든 먹고살 길이 보장돼 있는 변호사들만 정치를 하라는 건가? 그런데 바로 이 ‘변호사 모델’이 한국 정치판에서 잘나가는 정치인의 모델이 되고 있다. 막스 베버도 자신의 강연에서 변호사가 직업정치인으로서 지배적인 역할을 해왔던 이유를 바로 그 점과 연결시키고 있다.
그로 인한 문제는 없을까? 문제가 심각하다는 주장이 끊임없이 제기돼왔다. 2012년 19대 총선을 앞두고 당시 한나라당 대표 홍준표는 ‘법조인 공천 축소’를 내걸면서 “서민과 동떨어진 삶을 살고 있고, 현장의 치열함을 모르고, 제가 잘난 탓에 국민과 소통하는 데 부족하다”고 했다. 자신이 검사 출신임에도 그런 말을 했다는 건 이른바 ‘법조 마인드’의 문제가 심각하다는 걸 시사해준다. 2년 전 경향신문 논설실장 양권모는 “타협이 생명인 정치와 만사 ‘법대로 하겠다’는 데 익숙한 법조인의 속성은 본디 부조화적이다”라고 했다. 전 국민의힘 대선 경선 후보 유승민은 “법조인이라는 분들은 평생 과거에 매달리는 분들인데, 우리는 지금 미래를 만들어가는 대통령이 필요하다”고 했다. 물론 자신을 돋보이게 하기 위해 한 말일망정, 새겨들을 점은 있다.
17년차 검사 정명원은 최근 출간한 책에서 사법시험이라는 관문을 통과하기 위해 오직 공부를 향해서만 진격해온 법조인들에겐 ‘좁게 집중적으로 보기’라는 성향이 있을 가능성과 그 위험에 대해 말한다. “기본적으로 단호함과 성실함을 탑재한 법조인들이 무언가에 대해 확고한 기준을 갖는다는 것이 어쩌면 우리도 모르는 새 어떤 비극으로 이어질 수 있다는 생각, 그것은 무서운 일일 수도 있겠구나 하는 생각”을 했다는 것이다.
법조인들의 권력 지향성을 지적하는 사람들도 많다. 전 법무부 장관 추미애의 책 <추미애의 깃발>엔 이런 이야기가 나온다. 한양대 법대에 장학생으로 입학한 추미애에게 교양과정 교수가 “그렇게 권력 지향적으로 사는 삶이 행복할까?”라고 물었다고 한다. 추미애가 법대생인 걸 알고서 한 결례이자 도발이었다. 추미애는 이렇게 회고한다. “저는 약자 편에서 생각하는 삶을 살고 싶은데 법학 공부를 하고 있다는 이유로 권력을 추구하는 인생처럼 취급받는 게 맞나 하는 억울한 생각과 함께 자존심에 상처를 받은 기억이 납니다.”
그 교수가 저지른 것과 비슷한 실언이 2021년 6월 정치권에 등장했다. 민주당 대표 송영길은 사의를 표명한 감사원장 최재형을 향해 “1981년도에 사법시험에 합격한 분이다. 1980년 광주 시민을 학살하고 등장한 전두환 정권 아래에서 사시에 합격해 판사가 된 분”이라고 비판했다. 명백한 실언인 동시에 누워서 침뱉기 식의 ‘부메랑 발언’이었다.
송영길이야 1994년에 합격했으니 떳떳하다고 할지 모르겠지만, 여권에도 추미애(1982), 소병철(1983), 이재명·정성호·조응천(1986), 전해철(1987) 등 전두환 정권 시절에 사법시험에 합격한 이들이 많기 때문이다. 노무현은 1975년에 합격했는데, 박정희 정권은 괜찮고 전두환 정권은 안 된다는 기준도 이상하다. 문재인은 1980년 10월에 합격했는데, 이 시기는 전두환 정권으로 볼 수 없다는 것인지 그것도 영 이상하다.
‘법조 마인드’의 문제는 앞으로 계속 고민할 가치가 있는 사회적 의제이지만, 우리가 유념해야 할 것은 특정 집단의 속성을 곧장 그 집단에 속하는 개인에게 적용하려고 드는 ‘통계적 차별’일 게다. 통계적 차별은 단순히 편견이라고 할 수 있는 ‘선호에 의한 차별’과는 달리, 개개인에 대한 정보를 갖지 못했을 때 그 개인이 속한 집단의 특성을 고려해서 판단하는 행위를 가리킨다.
나는 그런 ‘통계적 차별’을 거부한다. 그래서 문재인이 국민과 소통하는 데 부족했고, 타협을 거부했고, 과거에 매달렸고, 좁게 집중적으로 보는 성향을 드러냈다고 보는 시각이 있다 해도 그게 법조인 출신이기 때문이라고 믿고 싶진 않다. 거대 양당의 대선 후보로 결정된 이재명과 윤석열이 ‘법조 마인드’의 부정적인 면을 드러낼 것이라고 믿고 싶지도 않다. 내가 믿고 싶은 건 대통령의 특정 마인드가 국정운영에 미치는 영향을 통제할 수 있는 시스템 건설이며, 현 시점에선 후보의 소통 품성이라도 따져보는 일이다.
정치학자 장훈은 내년 대선의 관건은 초(超)대통령제의 해소라고 주장한다. “기왕에 제왕적 대통령제라는 말이 있지만, 지난 10여년 한국 대통령제는 제왕적 대통령을 넘어 슈퍼맨 대통령이 이끄는 초대통령제로 변화해왔다. 대통령은 국회와 사법부 위에 우뚝 선 초월적 권력으로 어느덧 변신하였다. 대통령은 또한 시민 자유의 범위, 내용을 결정하고 정치적 올바름을 정의 내리는 철인왕으로 올라섰다.”
장훈은 “초대통령제라는 위태로운 흐름을 멈춰 세우기 위해, 후보들의 정책보다는 성품에 주목할 것이다”라면서 세 가지 체크 리스트를 제시한다. “후보들은 마음을 열고 두루 듣는 자세를 지녔는지? 민주 정치의 일상사인, 언짢은 이견을 계속 수용할 참을성과 도량을 갖췄는지? 단임 대통령이 대한민국의 모든 문제를 풀 수 없다는 겸손함을 체득했는지?” 나 역시 이 세 가지가 중요하다고 생각한다. 모든 후보들이 이 덕목을 놓고 경쟁하는 대선이 되기를 희망한다.
강준만 / 전북대 신문방송학과 명예교수
경향신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