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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천행(四川行) 1
무정은 눈을 떴다 희뿌연 눈앞의 풍경이 생소했다. 이곳이 자신의 숙소인지....혹은 다른 곳인지 알 수 없었다. 아마도 누워 있는 채로 꽤 시일이 지났을 것이었다. 좀 더 눈을 밝은 곳에 적응시키기 위해 그는 천천히 눈을 떴다.
천정에 보이는 서까래가 낯익게 느껴졌다. 서서히 방안의 풍경이 들어왔다. 작은 대나무 탁자와 의자 두개, 그 위의 자신의 무구와 유등 하나가 있었고 한눈에 보이는 초우(初友.).
그것은 지금 탁자 옆에 비스듬히 등을 기대고 있었다.
자신의 방이었다. 적이 안정이 된 그는 서서히 몸을 일으켰다.
"우......욱!..“
온몸의 근육이 아우성 쳤다. 무정은 씁쓸한 표정을 지었다. 마지막으로 기억나는 것은 마대인의 얼굴뿐, 어떻게 이곳까지 오게 되었는지 전혀 알 수 없었다. 일단은 일어나야 했다.
온몸이 추욱 쳐져있는 것이 너무 오래 누워 있었던 같았다. 무정은 억지로 몸을 일으켰다.
“우두두둑”
근육이 제자리를 찾아가는 파육음(破肉音)과 함께 무정은 침상에서 일어나 걸터 않았다.
창가에 비추는 햇살은 아마도 아침 같았다. 조그만 이름 모를 새소리가 끊임없이 들려왔다.
무정은 자신의 몸을 돌아보았다. 거의 온 몸이 면포(棉包)로 감겨 있었다. 성한 곳은 목 윗부분뿐 인 듯 했다. 그는 무의식적(無意識的)으로 손을 들어 자신의 오른 뺨 위로 손을 가져갔다.
늘 그랬듯이 그의 손끝에는 구불구불한 상처가 만져졌다. 문득 그는 웃음이 나왔다. 소리 없이 웃는 웃음이 방안을 맴돌았다.
흔적 없는....침묵의 시간이 그를 뒤돌아보게 했다.
손가락 끝의 징그러운 감각이 소름 끼칠 정도로 섬세하게 느껴졌다.
그 상처 때문이었다. 모든 것은 여기서 시작되었다. 이 상처를 준 사람을 베기 위해 도(刀)를 들었다.
이 상처를 잊기 위해 무공을 배웠고, 이 상처 때문에 놀림 받지 않기 위해
서 글도 배웠다. 그리고는 세월이 흘렀다.
그와 함께 모든 것이 바뀌었다. 지금은 그 상처 따윈 신경도 쓰지 않는다. 도? 도는 눈앞에 보이는 것을 무조건 베기 위해 쓴다.
무공? 전장에서 살기 위해 수련한다.
글........남들 하는 만큼은 해야겠다고 생각했다. 대학을 읽던 중이었다. 그 내용이야 어찌 되었던.......
갑자기 그는 머리를 흔들었다.
이번 전투가 그를 뒤흔든 것 같았다. 이제껏 수많은 전장을 누비고 살아남았어도 그렇게 사람을 한꺼번에 많이 죽인 적은 없었다.
하귀 때문에 이성을 잃었었다. 그래서 그는 화가 났었고 그 분노는 초우에게 피를 함뿍 머금게 해 주었다.......
그러나...그리고 나서 지금 그가 느끼는 감정은 도대체 무엇인지 무정은 알 수 없었다...
귓가에 들리는 사람들의 비명, 머리에 선명히 떠오르는 붉은 피, 그리고 가슴안쪽의 저 멀리서 울리는 이질적인 감각......모멸감(侮蔑感)......단 한 번도 무정이 느끼지 못했던 감각이었다. 무정은 멍한 눈으로 눈앞의 문을 바라보았다. 그리곤 천천히 일어나 걸어갔다.
바깥 날씨는 따스했다. 오월의 아침햇살은 아직 괜찮았다. 그는 우물가로 다가갔다. 그리고는 온몸을 감싸는 면포를 풀어 헤쳤다.
“촤아아아~”
차가운 지하수가 그의 정신을 일깨웠다. 그는 눈앞이 확연하게 또렷해지는 것을 느꼈다.
그런 그의 눈에 한 인물이 보였다. 이장너머의 시립문에 팔짱을 끼고 문가에 기대고 있는 인물, 비루한 남삼을 입고 영웅건 사이로 까치머리를 한 청년은 광검 남궁추였다.
“정신이 들면 이거라도 걸치지 그래, 비연이 있었으면 정말 좋은 장면인데.......클클~”
장난기 가득한 얼굴로 무정의 아랫도리에 시선을 주던 광검은 손에 쥔 검은 천을 내밀었다. 무정은 몇 번의 물을 더 뿌린 후 천을 받았다.
허리아래 둘둘 둘러버린 무정은 언제나 습관처럼, 우물가에 걸터앉았다. 헐떡이는 그의 크고 넓은 가슴이 번들거렸다. 광검은 그런 무정을 잠시 바라보다 무정의 옆에 걸터앉았다.
“보름동안 누워 있었수..........우리가 마대인 에게 구출된 후부터 ..”
“...........”
짐작은 했지만 상당한 시간이 흐른 것이었다. 무정은 메마른 어투로 물었다.
“다른 조원들은.....떠났나?”
“후...대장이 없는 낭인대가 무슨 힘이 있겠나? 해체되었네, 그리고 이젠 전장도 진정이 된 듯 하고, 일도 없을 것 같고 해서 다들 떠났네. 하나같이 안부전해 달라더군.”
“.......”
무정은 괜스레 한쪽 가슴이 허전해 지는 것을 느꼈다. 싫던 좋던 그들은 동료였고 사선을 함께 넘었다. 언제 죽을지 모르는 전장이었다. 누구도 자신을 완전히 드러내지 않는다. 그것이 동료를 잃었을 때 느끼는 슬픔과 허전함을 조금이나마 적게 해준다.
그저.....친하지 않으니 슬플 것도 없다는 식의 자기위안이었다.
무정역시 수많은 전장에서 그러한 점을 잘 깨닫고 있었고 자신도 그렇게 해왔다. 한부대가 손실되면 또 다른 부대로 편승되는, 그는 그런 삶을 살아왔다. 그렇기에 무정은 자신의 감정을 이해할 수 없었다. 알 수 없는 모멸감에 이어 허전함이라니.........
“나는 그 말을 전하기 위해 남아있었네. 오늘 대장을 봤으니.....나도 떠나겠어.......사실....아들놈 본적도 오래되었고...”
“결혼....했나?”
“핫핫, 했지. 그것도 꽤 빨리 했지. 아들놈이 이제 일곱 살이니,..”
무정이 출정하기 전 군문을 나선다는 말은 받아들여졌다. 일행이 돌아오는 마차 안에서 마대인은 저간의 사정을 설명하고, 낭인대를 해체한 것이었다. 사정을 짐작한 무정은 고개를 끄떡였다.
“그리 이상한 표정은 짓지 말게, 나도 보통사람일 뿐이니..”
무정은 남궁추가 결혼했을 것이라고는 생각하지 못했다. 그러고 보면 낭인대중 그가 가장 모르는 인물이 그였다.
담담한 광검의 말에 무정도 담담히 고개를 끄떡였다. 광검은 잠시 무정의 얼굴을 보다 일어섰다. 그리고 돌아서며 말을 이었다.
“나는 안휘(安徽)성 남궁세가(南宮世家)의 셋째라네, 이제 세가로 돌아가니 언제 한 번 들르게나....”
광검의 몸이 사라지면서 그의 음성도 사라졌다. 무정은 고개를 들어 하늘을 바라보았다.
철지난 꽃잎들이 잔바람에 공중에서 흐느끼고 있었다. 이리저리 몸을 움직이는 그것들의 움직임이 왠지 무정의 눈에 한가득 들어왔다.
“후~욱”
깊이 들이쉬는 호흡이 무정의 입에서 흘러 나왔다. 어느덧 그가 일어난 지도 근 한 달이 되어가고 있었다. 무정은 요즘 작전에 투입되지 않았다. 그자신도 더 이상 전장에 나서고 싶은 생각도 없었다. 왠지 마음 한구석이 허전한 것이, 의욕이 일지 않았다. 사실 더 이상 싸울 이유도 없었다.
우량하족의 야달목차는 오이랏트의 화살에 목숨을 잃었다. 그의 부하들도 뿔뿔이 흩어졌다. 삼천 대(代) 천오백의 주력부대 싸움은 반뇌와 마대인이 어림군(御臨軍)의 화포와 화포수를 구해 왔을 때부터 명군의 승리였던 것이다. 마대인은 이후 무정에게 달려갔고 오이랏트는 이를 정예 어림군의 공격으로 오해를 해 본진에 알려 회군하도록 한 것이었다.
사실상의 휴전(休戰)이었다.
많은 사람들이 전장의 이슬로 사라졌지만 기적 같은 일도 일어났다. 위진천과 타마륵이 살아 있었던 것이었다. 각자 몇 발의 화살을 맞았지만 천운(天運)이었는지 둘은 목숨을 건졌다.
어차피 소강상태(小康常態)의 국면에 접어든 전장이었다. 타마륵을 죽여 소뇌음사를 적대시 할 필요는 없었다. 마대인은 그렇게 타마륵을 치료하고 놓아 주었다.
타마륵은 마라불의 시신을 화장해 납골(納骨)을 만들어 가지고 돌아갔다. 위진천은 멍한 상태에서 구조 되었는데 심적 고통이 큰 듯, 아직도 부상이 낫지 않았다며 군문의 복귀를 거부하고 있었다.
무정도 이젠 군에서의 일보다 무공에 매달렸다. 그가 아는 무공은 군에서 가르친 무공 외에는 없었다. 그는 오로지 이것만을 갈고 닦았다. 그렇게 무정은 자신의 무공을 하나하나 돌아보고 있었다.
문득 무정의 시선이 초우로 향했다. 지금 초우는 칠 척의 장창크기가 아니었다. 약 사척 이촌정도의 도가 되어 있었다. 뒤의 창대부분이 이젠 돌려 조립하는 용도로 만들어져 있었다. 문득 그는 섬서 영중의 목노야가 생각났다.
목노야의 눈이 찢어질 듯이 커졌다. 그의 흰 수염이 부르르 떨리고 있었다.
“무정 ! ... 자넨 이 참마도가 얼마나 대단한 것인 줄 알고 하는 소리인가!”
“.........”
무정은 소리 없이 고개를 끄떡였다. 정말 잘 알아서 그런 것은 아니었다. 그가 한명의 친구로서 잘 안다는 뜻이었다. 목노야는 그런 무정을 보며 한숨을 쉬었다.
“그런 사람이 자루를 잘라달라니....도대체 무슨 생각인 거야!”
노인은 고함을 버럭버럭 지르며 소리쳤다. 하지만 무정은 단호했다.
그것은 마대인의 권유였다. 강호에서는 참마도를 잘 쓰지 않는다. 혹여 쓰더라도 말이나 베는 하류로 취급하기 일쑤였다. 무정이 눈을 뜨고 마대인이 제일 먼저 권유한 것이 그것이었다.
목노야는 갑자기 두 손으로 참마도를 힘겹게 들었다. 그리고는 산수(酸水)수에 집어넣었다. 잠시 동안 담겨진 초우를 보다 목노야는 눈을 빛내며 들어 올려 무정의 눈앞에 내려놓았다.
“ ! ”
무정의 눈이 커졌다. 사척길이에 육촌의 너비를 갖고 있던 초우의 도신에 엄청난 수의 산수화 무늬가 그려져 있었다. 은은한 묵광이 나는 백철인줄 알았는데 그것이 아니었다. 그 문양은 자신이 차고 있는 무구류에도 있는 문양이었다. 허나 무늬 의 간격이 자신의 것과는 비교가 안 되었다.
“ 이 참마도는 일반적인 명검. 명도와는 비교가 안 되네. 이 문양을 보게...그리고 그 간격을....이건 최소한 금속을 오만 번 이상 접고 두드려야 하네, 그러면서도 절대 깨져서는 안 되고, 난 지금껏 이런 도를 본적도, 앞으로도 볼 수도 없네. 물론 이 같은 재질의 자루도 마찬가지일세. 그런데 잘라 달라니......그게 말이 되는가?”
목노야는 거의 애원수준이었다. 금속을 오만 번 이상 접고 두드릴라치면, 최소한 십년 이상은 걸렸다. 게다가 이런 매끈한 표면을 가지려면 족히 사오년 이상은 숫돌에 갈아야 했다. 그렇기에 강도와 표면....그리고 무엇보다도 무게중심이 정확히 맞은 도가 되는 것이었다. 누가 만든 것인지는 모르지만 이 참마도는 거의 한 장인(匠人)이 일평생을 바친 것이나 마찬가지였다.
무정의 눈이 잠깐 흔들렸다. 그러나 곧 다시 예전의 눈빛을 찾았다. 흔들리지 않는 의지의 표현이었다.
“휴.......알았네, 알았어,,,,,,, 삼주 후에나 다시 오게...”
체념한 듯 목노야는 한숨을 쉬며 손을 흔들었다. 그의 아래에 있는 제자들을 모두 불러 모아야 하는 일이었다. 육십을 바라보는 그의 나이로 혼자는 무리였다. 또한 이것 외에는 당분간 손을 떼야 할 것이었다.
무정은 작게 고개를 까딱였다. 그리곤 몸을 돌렸다.
삼주 후 그가 왔을 땐 목노야는 보이지 않았다. 대신 수석제자(首席梯子) 관산(寬?)이 그를 맞았다. 노인은 무리해서 쉬고 계시다는 것이었다. 그는 눈을 돌려 탁상위에 올려진 초우를 보았다. 사척 이십 촌의 길이에 손잡이 끝에 주먹보다 좀 작은 구슬이 달려 있었다.
그의 손이 초우를 잡았다.
“ ! ”
무정의 눈에 감탄의 빛이 일었다. 무게중심이 정확하게 맞은 것이었다. 자루를 잘라내어 어느 정도 힘들 것이라고 생각했다. 그러나 전혀 그런 감은 없었다. 마치 처음부터 이정도의 길이인 듯 했다. 과연 목노야였다.
“ 그 구슬은 보통 구슬이 아닙니다. 일촌정도의 두께에 안쪽에는 연납(鉛?)이 들어가 있습니다. 그 연의 무게를 가감하여 중심을 맞춘 것입니다. 사부님의 모든 것이 담겨있다 해도 과언이 아닙니다.”
관산의 입이 조용히 열렸다. 무정은 손잡이 끝의 구슬을 자세히 보았다. 조그마한 틈도 없었다. 정말 대단한 솜씨였다. 그때 관산의 손이 무언가 내밀었다. 초우의 잘려진 자루였다.
“사부님께서는 자루자체의 질도 대단하시다며 이것도 만드셨습니다....여기 이 부분을 참마도에 끼어 보십시오.”
관산의 말에 무정은 자루를 받아 나선형의 강선이 있는 곳을 초우의 손잡이에 대고 돌렸다.
“끼릭..끼릭...”
금속의 마찰음이 들리며 다시 칠 척의 초우로 변했다. 자루 끝에는 또 하나의 구슬이 붙어있었다. 역시 무게중심을 맞춘 듯 했다. 세근쯤 더 무거워 진 것 같았다. 허나 무정에게는 별 어려움이 없었다.
무정은 만족한 웃음을 지으며 품속을 더듬었다. 자신이 가진 모든 것을 내놓을 작정이었다. 무기 이전에 친구이기에....
“사부님께서 돈은 받지 말라 하셨습니다...그저 당신이 손대셨다는 것만 기억해 달라 하시더이다....”
관산은 손을 흔들며 말을 마치곤 안채로 들어갔다. 최고의 것에 손을 대어 다시 최고의 것에 돌려놓는 것.....장인들에게는 꿈의 경지였다. 창작(創作)보다도 더욱 힘든 것이 바로 이러한 보수(補修)였던 것이다.
문득 무정의 뇌리에 만족스런 목노야의 얼굴이 보이는 듯 했다. 그는 품속에서 손을 빼었다. 그리고는 초우를 들어 자세를 잡더니 옆에 있는 집채만 한 바위를 긁었다.
“ 쩌~엉~”
엄청난 소리와 함께 단단한 화강암이 두 치 두께의 홈을 만들었다. 그는 왼쪽으로 일보를 옮겼다. 그리고 이번엔 초우의 자루를 뻬내어 옆에 내려놓고는 자세를 취해 다시 내리 그었다.
“ 쩌~엉~”
또다시 화강암에 홈이 파였다. 동일한 자세 동일한 힘으로 내리친 일격이었다. 무정은 초우를 도갑에 넣고 자루를 챙겼다. 그의 고개가 내원 쪽으로 깊숙이 숙여졌다가 일어섰다.
그리고는 몸을 돌렸다.
목노야의 눈에 뿌연 안개가 서린 듯, 잘 보이지 않았다. 그는 두 손을 뻗어 각기 한 줄씩 손가락을 대고 밑으로 훑었다.
같았다....마치 그림을 그린 듯, 그의 손끝에서 동일한 도의 잔 떨림이 느껴졌다. 완벽하게 무게 중심이 맞춰진 것이었다. 그의 눈에서 눈물이 흐르기 시작했다. 형언할 수 없는 환희의 눈물이었다. 무정은 대가를 치른 것이 아니라 보여주고 남겨준 셈이었다.........
이 흔적은 당신의 업적을 세상에 알려주겠다는 무정의 약속이었던 것이었다.
“고맙...네.. 무정.....”
목노야는 목이 메었다. 그는 한참을 그 앞에 서있었다. 어느새 안채에서 그의 제자들이 하나 둘씩 모여들기 시작했다. 장인을 꿈꾸는 그들의 눈에 무정의 칼질이 남긴 의미가 읽혔다. 그들은 조용히 허리를 깊숙이 숙이기 시작했다. 섬서제일장(陝西第一匠)에서 천하제일장(天下第一匠)으로 불리우게 될 그들의 사부에 대한 무한한 공경의 표시였다.
첫댓글 감사합니다
감사합니다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