빙판길을 걸으며

[손진숙]

빙판길을걸으며

김형진

  잠자리에서 일어나 담배를 물고 발코니에 나가 선다. 유리창에 성애가 하얗다. 두껍게 낀 성애가 제법 입체적이다. 손가락을 대보니 움찔할 정도로 차갑다. 바깥 사정이 궁금해 담배 연기를 뿜어보지만 성애는 끄덕도 않는다. 입을 가져다 대고 한참 동안 입김을 분 뒤에야 겨우 녹기 시작한다. 손가락으로 문질러 밖을 내다볼 정도의 유리가 본색을 드러내자 바깥 사정을 염탐한다. 새로 눈이 내리진 않았는데 늘어붙은 눈이 빙판 져 번들번들하다. 회색 빛 하늘도 잔뜩 심통이 나 있다. 오늘 아침나절에 외출할 일이 있는데 일처리보다 저 빙판을 어떻게 걸어야 할는지가 더 걱정이다.

  아침을 먹은 뒤 외출할 채비를 한다. 두툼한 바지에 파카를 입고 모피목도리를 두른다. 거기에 방한모를 눌러 쓴다. 거울에 비친 그런 모습이 영 낯설지만 한데서 강추위를 견디려면 달리 방법이 없다. 수납장을 뒤져 장갑을 챙긴다.

  현관 바닥에 있는 구두와 운동화가 허접스러워 보인다. 저것으로는 단단히 언 빙판길을 무사히 헤쳐 나길 수 없다. 신장을 열고 등산화를 꺼낸다. 여러 해 전 준비해 놓긴 했으나 몇 해 동안 몇  번 신지 않아 아직 새 신발이다. 등산화를 신고 신발 끈을 단단히 맨다.

  엘리베이터에서 내리니 얼굴에 찬 기운이 끼쳐온다. 장갑을 끼고 모자를 눌러 쓴 다음 계단을 딛고 내려간다. 계단과 인도는 경비원들의 수고로 바닥이 드러나 있어 안심하고 걸을 수 있다. 눈이 쌓인 차도에는 자동차 바퀴 자국이 두 줄로 나 있다. 매운 바람 한 줄기가 볼을 핥고 지나간다.

  아파트 정문 밖은 인도도 빙판이다. 조심조심 발을 옮긴다. 다행히 담 바로 밑엔 눈이 있어 옹색하지만 눈을 밟고 걷는다. 담을 낀 인도가 끝나자 네거리가 나선다. 네거리는 빙판으로 번들번들하다. 신호등도 없는 도로여서 사방을 살피고 네거리로 내려선다. 등산화를 믿고 빙판에 내려서긴 했지만 온 신경이 발바닥에 쏠린다. 한길에 다다를 수 있는 오른쪽 길을 향해 대각선으로 조심조심 발을 뗀다.

  높은 옹벽과 아파트 사이에 있는 중앙선도 없는 도로, 아파트쪽에 인도가 있긴 하나 쌓인 눈이 두껍게 얼어붙어 들어설 엄두가 나질 않는다. 옹벽 쪽 얼어붙지 않은 눈을 밟고 걷는다. 얼마 걷지 않앗는데 주차해 있는 자동차가 앞을 막는다. '이 좁은 길에 주차까지 하다니!' 불평을 하며 어쩔 수 없이 앞뒤를 살핀다. 지나는 자동차가 보이지 않는다. 주차한ㄴ 차에 바짝 붙다시피 하여 빙판길로 들어선다. 차 옆에는 눈이 엷게 덮여 있어 별 생각없이 발을 내딛는다.

  두어 걸음 딛었을 때, 한쪽 발바닥이 미끄러져 몸이 기우뚱한다. 등골이 오싹하다. 그러나 몸만 기우뚱했을 뿐 넘어지지 않아 다행이다. 빙판길 낙상으오 입원 환자가 많다는 보도에 지레 겁을 집어먹은 터인데, 몸을 추스른 다음 발가락 끝에 힘을 주어 조심조심 다시 걷는다.

  어릴 적에는 빙판이 좋았다. 동네 앞 무논에 얼음이 얼면 신이 났었다. 판자때기에 굵은 철사를 대어 만든 스케이트를 타며 바람을 가르는 재미에 끼니때를 놓칠 때가 많았다. 실수로 넘어지는 일이 잦았지만 겁은커녕 즐겁기만 했다. 청장년 때에도 눈길, 빙판길 가리지 않고 걸었다. 혹시 넘어지더라도 툴툴 털고 일어서면 그만이었다. 십여 년 전 퇴근길에 얇게 눈이 쌓인 비탈길에서 미끄러져 뒤로 벌렁 넘어진 적이 있었다. 깜짝 놀라 벌떡 일어서 주위부터 둘러보았다. 다행히도 아무도 없었다. 뒤로 넘어지자 본능적으로 후방낙법이 작동한 모양이었다. 그러나 엉덩이와 팔꿈치가 얼얼했다. 엉덩이는 별 탈이 없었는데 팔꿈치는 며칠 동안 찌릿찌릿 아팠다.

  얼마 가지 않아 또 자동차가 앞을 막아선다. 절로 눈살이 찌푸려진다. 가슴이 쿵쾅쿵쾅 뛰는 것도 같다. 쓴웃음이 나온다. 지금 넘어지면 성한 몸으로는 일어설 수는  없을 것이라는 지레짐작에 겁부터 먹고 쩔쩔매는 꼴이라니…. 백여 미터 빙판길 걷기가 인생의 한 고비를 지나는 것만큼이나 어렵다.

  빙판길에서 벗어나니 한길이 앞을 막는다. 육차선 차도에서는 자동차들이 줄을 지어 씽씽 달리고 있다. 건널목 입구에서 푸른 신호등을 기다리며 지나온 빙판길을 돌아본다. 나도 몰래 안도의 한숨이 나온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