태초에 대립이 있었다. 대립의 내용은 중요하지 않다. 그냥 대립이 있다. 그리고 하나의 대립이 세상의 모든 대립으로 복제된다. 선과 악, 명과 암, 진보와 보수, 인간과 동물, 동양과 서양, 문명과 야만, 물질과 영혼은 모두 복제된 상이다.
상호작용 한 마디로 될 것을 이항대립은 두 단어를 쓰므로 멱살잡이 싸움이 일어난다. 언어가 문제다. 인간의 투박한 언어를 족쳐야 한다. 사람들이 말을 헷갈리게 해서 사단이 일어난다. 말을 똑소리나게 잘해서 평화를 가져오도록 하자.
만남과 맞섬은 동전의 양면이다. 만남은 둘 사이를 보고 맞섬은 둘을 각각 본다. 만남은 일원론이고 맞섬은 이원론이다. 둘은 하나다. 틀어진 것은 인간의 관점이다. 물리적 실재는 불변이다. 인간이 안경을 바꾸고 시각을 교정해야 한다.
페이지는 두 쪽이지만 종이는 한 장이다. 원인과 결과를 하나의 사건, 하나의 변화로 받아들일 때 비로소 에너지의 방향성이 보이고 사건의 다음 단계가 예측된다. 모든 2를 1로 바꾸어 교착을 타개하고 실마리를 푸는 연습이 필요하다.
2로 보든 1로 보든 더하고 빼면 결과는 같지 않느냐는 이의제기가 가능하지만 1로 봐야 기능이 발견된다. 객체를 통제할 수 있게 된다. 조절장치를 움직일 수 있게 된다. 천칭저울의 접시는 둘이라도 인간은 하나의 눈금으로 판정한다.
생각을 하려면 단서가 필요하다. 첫 단추를 꿰는 문제다. 우리는 일단 이항대립을 만들어놓고 하나를 선택하려고 한다. 이는 무의식적으로 자기 자신에게 역할을 주려는 권력적 기동이다. 축구를 보더라도 한 팀만 응원해야 재미가 있다.
관객은 히어로를 응원하지만 감독은 균형을 맞춘다. 아직 상영시간 100분을 채우지 못했기 때문이다. 빌런을 죽여도 관객의 애를 태우다가 막판에 가서 죽인다. 우리는 감독의 시선을 놓치고 관객의 시점에 매몰되는 실패를 저지른다.
상호작용 일원론의 눈을 얻어야 한다. 둘의 대립 그 자체가 단서가 된다. 이게 다 빌런 때문이라거나 이게 다 히어로 때문이라거나 하고 남탓할 일이 아니라 둘의 팽팽한 대립이 인간의 에너지를 끌어내는 엔진이라는 사실을 알아야 한다.
맞섬을 뒤집으면 만남이다. 동력은 둘의 연결에서 얻어진다. 만나야 연결한다. 맞섬은 만남의 타이밍을 재고 밸런스를 조절하는 절차다. 모든 맞섬은 사건을 연결하여 에너지를 끌어내는 절차이고 마지막에 만남으로 기능은 완성된다.
인간은 자신에게 역할을 주려는 권력의지 때문에 맞섬을 보되 만남을 보지 못한다. 그것은 관측자의 개입에 의한 사유의 오염이다. 노이즈를 제거하여 이항대립을 일항타개로 바꿔야 한다. 관측자를 배제하고 물리적 실재를 추적해야 한다.
빛과 어둠은 광자와 암자의 대립이 아니라 광자 하나의 진행이다. 인간은 빛과 어둠이 별도로 있는 것처럼 착각한다. 선과 악이 그렇고 진보와 보수가 그렇다. 자연은 하나의 밸런스를 조절할 뿐인데 밸런스의 축이 이동하면 둘로 보인다.
답은 에너지다. 계에 에너지를 태울 때 이항맞섬은 타개되어 일항만남이 된다. 계에 에너지가 부족하면 다툼이 일어난다. 먹이가 없으면 싸우지만 먹이가 풍족하면 나눠주는 권력을 차지하려고 하므로 둘의 대결이 하나의 조화로 바뀐다.
옛사람들은 인의예지 사단에서 인간의 행동을 규율하는 궁극의 단서를 찾으려고 했다. 우리가 찾는 것은 사유의 출발점이 되는 단서다. 단서의 단은 첨단이고 말단이고 발단이다. 단端짜를 살펴보면 산山이 하나 서立 있음을 알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