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산의 아름답던 젊은 날 --
《다산(茶山)과 죽란시사(竹欄詩社)》
동방의 문화 강국(强國) 조선의 밤하늘에
학문을 주관하는 문창성(文昌星) 빛나더니
팔대(八代)가 옥당(玉堂)인 집에 고고의 성 울렸다
아기가 성장하여 실학을 집대성해
조선의 학술사가 찬연한 빛을 냈다
조용히 다산 정약용 젊은 날을 엿보자
다산은 영오(穎悟)해서 칠세(七歲)에 시를 썼다
"큰 산이 작은 산에 가려져 있는 것은(小山蔽大山)
먼 곳과 가까운 것이 같지 않아 그렇다”(遠近地不同)
시를 본 아버지는 기특해 말했다네
“분수(分數)에 밝은지라 자라면 틀림없이
역법(曆法)과 산수(算數)까지도 통달할 것 같구나”
오른쪽 눈썹 위에 홍역의 흔적 남아
눈썹이 세 개 되어 자호(自號)가 삼미자(三眉子)다
열 살 전 지은 삼미집(三眉集) 본 사람들 놀랐다
학문이 호한했던 천하의 정조(正祖)께서
승지(承旨)는 담배 한 대 피우라 명을 하고
신료(臣僚)들 다 필 때까지 시 지으라 하였네
정조는 다산에게 기재(奇才)라 칭찬했고
문임(文任)의 신하들은 천재라 극찬했네
문단에 새로운 별이 찬란하게 빛났다
다산은 한 나라서 같은 때 사는 것은
우연한 일 아니라 연분(緣分)이 있는데도
교유(交遊)가 넓지 못한 것 안타깝게 여겼네
그래서 죽란시사 결성을 주도했다
시사(詩社)는 시인들의 문학적 결사체로
고려때 죽림고회(竹林高會)와 같은 문학 단체다
다산은 뜨락에다 화목(花木)을 많이 심고
대나무 난간으로 보호해 주었기에
시회를 죽란시사(竹欄詩社)라 이름하니 정겹다
나이의 높낮이로 불편을 피하고자
다산의 서른다섯 나이를 기준으로
상하로 네 살까지를 동인(同人)으로 하였다
동인은 이유수와 홍시제 이석하와
이치훈 이주석과 한치응 유명원과
심규노 소고(小皐) 윤지눌 신성모와 한백원
이중련 정약전과 채홍원 다산인데
이 중에 초계문신(抄啓文臣) 출신이 아홉이니
모두가 제제다사(濟濟多士)라 부러워들 하였네
정조는 삼십칠 세 이하의 문신 중에
선발해 규장각서 공부를 시켰는데
당시에 초계문신을 영광으로 여겼다
영의정 체제공(蔡濟恭)은 자신이 젊었을 때
이런 일 없었다며 성원을 보내면서
“성상(聖上)이 인재양성한 효과이다” 하였고
“모여서 임금님의 은택에 보답하고
술 취해 떠드는 짓 일삼지 말라”했다
훈계를 기록하고서 지켰으니 멋지다
정기적 모임 날을 일곱 개 정했는데
살구꽃 피면 열고 도화(桃花)가 피면 열고
참외가 익으면 열고 연꽃 피면 모였고
국화가 피면 열고 큰 눈이 오면 열고
화분의 매화꽃이 웃으면 감상하며
우정을 돈독히 하고 시를 짓고 즐겼다
동인 중 득남(得男)하고 지방관 되면 열고
승진을 하면 열고 자제가 급제하면
축하의 시회를 열어 음주부시(飮酒賦詩) 하였다
자연의 아름다움 즐기며 시를 짓고
인생사 좋은 일을 모여서 축하했던
열한 개 죽란사사의 낭만들이 정겹다
문운(文運)이 융성하던 정조의 시대에서
우정과 낭만들이 별처럼 반짝이며
나라의 문예부흥에 기여하니 장하다
달밤에 호수에서 뱃놀이 즐기면서
모두가 신선으로 자처한 호방함은
그들이 태평성대에 살고 있단 뜻이다
정조의 갑작스런 승하로 판 깨지고
신유년 사옥(邪獄)으로 피바람 몰아쳐서
네 살된 죽란시사는 난파선이 되었네
세월이 흘러가자 열다섯 동인 중에
이유수 윤지눌과 우정이 지속되니
다산은 유배지에서 무상함을 읊었다
십팔 년 귀양살고 백발로 고향에 와
동인인 채홍원에 소식을 전하면서
사라진 죽란시사의 무상함을 그렸다
다산은 죽란시사 동인인 윤지눌과
둘째 형 정약전과 이유수 묘지명을
지어서 세상에 전한 고운 우정 빛난다
다산의 문집에는 시사와 관련 시가
십칠 수 실려 있어 젊은 날 알 수 있다
곡차를 축내면서도 시를 지은 결과다
구름은 흘러가도 흔적이 없지마는
사람은 떠나가도 행적은 남아 있다
다산과 죽란시사는 문학사의 꽃이다
<28수>
카페 게시글
♧ 김진환 시인 방
다산의 아름답던 시절과 죽란시사
유환 김진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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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09.10 12: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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