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배경음악 : 007
송도신도시 센트럴파크를 처음 찾은 사람들
첫마디가 이렇다. “여기가 우리나라 맞나요?”
하늘을 향해 곧게 높이 뻗어 올라간 고층빌딩들.
여기는 미국 뉴욕이 아니라
인천광역시 연수구 송도동,
송도국제도시 한복판이다.
밤이 되면 은하수 같은 야경
“여기 홍콩이야, 싱가포르야?”
여기는 당연히 송도 센트럴파크.
송도 센트럴파크의 야경은 어떨까?
나가사키 홍콩 시카고에 못 미치지만
도시의 아름다움은 결코 뒤지지 않는다.
비행기를 타지 않아도 찾아갈 수 있고
전망 레스토랑에 들어가지 않아도 되며.
누구나 지하철 타고 쉽게 갔다 올 수 있다.
송도 센트럴파크 면적 41만 ㎡
해수로 산책로가 1.8km나 된다.
해수로 양옆으로 곡선 산책로 조성
센트럴파크 왕복 4km는 족히 넘는다.
.........송도국제도시(松島國際都市)..........
송도경제자유구역은 인천국제공항 인프라를
배후로 지어지는 경제자유구역상하이, 싱가포르,
두바이 등 신규 국제도시들의 대규모 개발을 토대로
2003년부터 2020년까지 인천광역시 연수구와 남동구의
해안에 여의도의 17배에 해당하고 인근 경기도 부천시의
관할 면적보다 큰 55 km²를 매립, 간척지 위에 신도시 개발
송도국제업무지구 개발은 게일
인터내셔널(Gale International)과
포스코연수구와 남동구 앞바다를 매립
매립 안한 바다를 사이에 두고 다리로 연결
10만명이 사는 인공섬 지역은
해외 관광객이 많이 늘어나고
인천 최대도시인 송도국제도시.
인천 최고의 도시이며 미래 도시.
..........................................
간척지 근방 원래 지명은 옥련(玉蓮).
1936년 10월 인천시가 부천군 문학면
일부를 편입하면서 송도(松島)로 변경
송도의 유래는 동학농민운동 이후
인천항을 수시로 드나들던 일본 군함
'마쓰시마(松島 훈독)호'에서 유래되었다.
일제 강점기 일본이 마쓰시마호를 기리는
의미로 일본식 지명인 송도로 개명하였다.
그 외에도 송도(松島)라는 지명은
일제 이전까지는 존재하지 않았으며,
그 일대에 '송도'라는 지명의 섬도 없었다.
연안부두.,해수탕
전복라면
2018.6.1 을왕리 해수욕장
무의도 실미도는
인천국제공항에서
자기부상열차를 타면
약 1시간 쯤 거리에 위치.
인천국제공항을 이용하는
외국인 관광객 승무원들이
즐겨 찾을 수도 있는 휴식처.
서해 경기만
덕적군도 길목
무의도 실미도는
머지 않은 장래에
개발 '노하우'에 따라
국제적인 관광자원으로
무한 잠재 가치가 있는 곳.
서해 관광 벨트 해역
3 꼭지점 .,포스트 섬.
무의도, 백령도. 이작도.
평소, 빌딩 숲에 갇혀 사는 수도권 시민들.
주말에는 서해의 도서지역 해안 절경을 보며
탁 트인 서해 해상 삼각벨트 해역에서 드라이브.
또는, 크루즈 해상 여행.
1코스 : 무의도 ~ 이작도
2코스 : 이작도 ~ 백령도
3코스 : 백령도 ~ 무의도.
수도권에서 1박2일 여행지.
또는 당일 여행도 가능하다.
'영종도 인천국제공항' 곁.,무의도.
최우선 개발해야 할.,국제 해양관광지.
인천국제공항 외국인을 배려하는 휴식처.
항공기 운항시간이 연착되거나
연결운항 시간까지 기다려야 할때
틈새 시간 동안 피로를 풀 곳으로 적합.
인천국제공항 이용 외국인 관광객 숫자가
지금보다 훨씬 더.,급등할 것으로 여겨진다.
실미도는 과거 어느 한 시점에
684 특수부대가 주둔한., 무인도.
'인간병기' 북파 공작원 훈련장소.
007 영화를 방불케하는
<실미도> 영화., 촬영장.
실미도 사건이 일어났던 곳.
007 제임스 본드 (영화 시리즈)(James Bond)는
《살인 번호》를 첫 작품으로 하는 영화 시리즈이다.
전 세계인이 가장 좋아하고 즐겨보는., 007 영화 시리즈.
전 세계 여배우들에게 본드걸
배역은 출현 ;선망의 대상'이다.
.........살인면허............
국가로 부터 비밀요원에게
합법적으로 암살 권한을 부여
영화 007 시리즈에서 제임스 본드
첩보원명 007의'00'은 영국 외부무
MI6에서 허가해 준 살인면허이다.
'7'은 '살인면허를 가진
일곱번째 요원'이라는 뜻.
'제임스 본드'는 이외에도
영국 해군 중령 직함 소유.
영국 비밀정보국법
(Intelligence Services)
Act 1994 9·11 테러 이후 급증해,
2009년에만 500건의 외무장관 서명.
................................................
전 세계 강대국들 간에는
보다 강력한 비밀정보국을
경쟁적으로 육성하려고 시도.
소련 비밀경찰 KGB
미국 '네이버 실' 등.
9.11 테러 3초전
오사마 빈 라덴
2011.05.02 '알카에다 지도자' 빈 라덴 사망.
카다피 최후
특전사
UDT
해병대
대한민국 특수부대(大韓民國의 特殊部隊)는
대한민국 국군에서 비정규전을 맡는 특수부대
.....................대한민국........................
한국(韓國:Korea) 또는 남한(South Korea)
이라고도 불린다. 한국이라는 명칭은 남·북한을
통틀어 말하는 넓은 의미를 가지고 있으나,
좁은 의미에서는 대한민국을 가리킨다.
한국을 가리키는 코리아(Corea, Korea)는
고려 또는 고구려에 대한 호칭인 고려가
유럽에 전해지면서 표기되기 시작했다.
1945년 8월 15일 해방 후
38°선을 경계로 국토 분단
1950년 6·25전쟁의 동족상쟁.
대한민국은 1948년 8월 15일
정부수립과 함께 영토를 한반도와
그 부속도서로 규정하고 대한민국의
통치권이 한반도 전체를 통괄함을 선포.
1953년 휴전 이후
통치영역이 휴전선
이남으로 한정되었다.
.............................
일본 제국으로부터 대한민국이 광복을 맞이한 이후,
조선인민유격대가 남한에 잠입해 교란작전을 전개하자,
이에 대응하여 1948년 10월 이범석 국방부 장관의 명령으로
육군 본부 정보국에 제803독립대대 "보국", 1949년 2월 25일에
호림부대, 1948년 11월 25일에 수색학교, 11월 6일에 유격대
등의 부대를 신설한 것이 시초이다. 호림부대는 5, 6대대로
편성되어 설악산에서 활동하였다.
6.25 전쟁이 발발하기 9달전인 1949년 9월 11일에
5, 6대대 부대원 44명이 한 달 전인 1949년 8월 중순,
강원도 인제와 양양군 일대의 북한땅에 침투하여
양민을 학살했다는 혐의로 평양 모란봉에 있는
최고재판소 특별 법정에서 피고 전원 사형 선고
호림부대 부대원 44명 가운데 일부는
한국전쟁 당시 전향해 인민군으로 참전.
호림부대가 해체된 후, 호국군에 편입되고
남은 병력은 현역 주한 미군 군사 고문단(KMAG)의
반대로 취소하였고 6.25 전쟁 발발한 뒤에 7월 10일 해체.
같은 해, 군정기를 마친 주한 미군
(United States Force In Korea)이
철수하면서 KLO부대를 창설하였다.
1950년 6월 25일 한국 전쟁이 발발하자,
기존의 KLO부대 외에도 백골병단, 영도유격대
등 여러 특수부대들이 한반도 각지에서 창설되었다.
이들은 조선인민군의 후방으로 침투하여
주요 구조물을 파괴하고 요인을 납치하거나
암살 또는 첩보, 정찰하는 등 특수 작전을 맡았다.
1951년 KLO부대를 포함한 비정규전 부대는
제8군 G-3 부서의 제8086부대 잡무단 예하
제8240부대 주한 유엔 유격군(UNPFK)으로 통합
한국전쟁때 활약한 KLO부대와 각종 유격대들은
8240 부대로 통합되었다가, 1953년 휴전을 맞아
같은 해 8월에 국방부 제8250부대로 통합되었다.
이듬해 1월에 육군백문오오키나와현에 주둔하고 있는
미국 육군 특수부대인 제1특전단제1공수특전단으로 개편
1.21사태 및 울진지구와 삼척지구에서의
공비침투사건을 통해 북한의 대규모 특수부대의
존재와 위력이 알려지자, 한국군에서도 육군 특수전
부대의 규모를 대폭 늘릴 필요성을 느끼고, 제1공수특전단과
동해안경비사령부의 제1, 2유격여단(1969년 1월 1일 창설)을 통합
969년 8월 18일 특수전 사령부 창설,
1970년대 동안 특전사령부 예하의
공수특전여단들을 추가로 창설
1970년 1공수특전단은
1공수특전여단으로 증편
1, 2 유격 여단은 각각 3(비호),
5(흑룡) 공수 특전 여단으로 개편
1982년 4월 17일, 12·12 군사 반란으로
특수전사령관이 직접 지휘할 수 있는 부대의
필요성과 1988년 하계 올림픽에 따라 "국가 대테러
활동지침"을 세우고 제707특수임무대대를 창설하였다.
1993년엔 특전사 707특임대로부터 해상 대테러 임무가
1999년에 5월에 창설되었다. 이러한 임무확대와 규모증편
과정을 거친 후, 2000년 1월 1일에 특수전여단이 창설되었다
특수전여단은 2012년 2월 1일, 전단으로
또 한번 증편되어 해군 특수전 전단이 된다.
이런 공식적인 부대명칭의 변경과는 무관하게,
간단히 UDT 혹은 UDT/SEAL이라고 흔히 불린다.
.............
..............
대한민국 해군 또한 한국 전쟁에서의 성과를 바탕으로
특수한 목적의 부대의 필요성을 느끼고 1954년 미국 해군
수중 폭파대폭발물 제거(EOD) 임무가 추가되었고, 1976년
네이비 실처럼 해상뿐이 아닌, 육지와 공중임무가 추가되었다.
1993년 특전사 707특임대
로부터 해상 대 테러 임무.
1968년 1월 21일 조선인민군 124부대의
청와대 습격에 대한 보복하는 차원에서
공군 정보부는 똑같이 김일성 암살을 위해
20 특무 전대(2325 부대)에서 209 파견대
"684부대 실미도를 창설하여 훈련시켰다.
무의도
영종(용유)도 남쪽 1.4km에 있는 무의도.
부속 도서로는., 실미도·해녀도·사렴도 등.
'선녀가 내려와 춤을 추었다.' 하여 무의도.
'호랑이와 용' 힘겨루기 '전설의 고향' 호룡곡산.
하나개해변 하나개암장은.,클라이머 여름 피서지.
'잠진도선착장~무의도 큰무리선착장' 5분 남짓 뱃길.
거지 갈매기떼가
뱃길을 따라오며
새우깡 구걸 행각,
'새우깡이 물고기보다 맛있을까?'
'큰무리 선착장~ 당산~ 실미해수욕장'
30/40분 걷고 .,개인적으로 실미도 산책.
.
1968년 ‘1·21사태’ 대응으로 1968년 4월 1일
북한침투작전을 위해 창설된 실미도 부대가
3년 4개월 훈련받다가 24명이 탈출한.,실미도.
.
무의도는 인천광역시 중구에 위치.
육지에서 5분쯤 배를 타야 갈 수 있다.
주변에는 실미도, 소무의도 등의 섬이 있다.
과거 무의도에서 소무의도로 작은 어선을 이용
현재는 '광명항선착장~소무의도' 연륙교가 연결
도보로 10분~15분이면 소무의도에 걸어갈 수 있다.
................소무의도.................
소무의도의 다른 이름은 ‘떼무리’다.
인도교와 연결되는 서쪽마을 선착장
이름도 "떼무리선착장"으로 불리운다.
해안선 길이가 2.5km인 아담한 섬
역사는 300년 전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박씨 가족이 세 딸과 함께 들어와 섬을 개척
유씨 청년을 데릴사위로 삼아 유씨 집성촌 형성
인근에서는 새우 등이 많이 잡혔고,
한때는 안강망 어선이 40여 척이나
될 정도로 부유했던 "떼무리섬"이다.
소무의도는 인천상륙작전 당시
군 병참기지로 사용되기도 했다.
섬에 풍어제를 올렸던 터가 있다.
박정희 전 대통령이 가족과 함께
휴양차 들렀다는 해변이 아름답다.
섬 주변은 간조 때 해변길을 드러낸다.
낚시꾼이나 찾았던 외딴 섬
사연이 구구절절한.,소무의도
.......................................
소무의도 풍어제
'큰무리선착장~ 광명항'은
무의도 마을버스가 다닌다.
소무의도 비경을 감상하기 위해서는
무의바다누리길 8코스를 걸어야 한다.
1시간 정도 소요되며 '소무의 인도교길'과
'명사의 해변길' 따라 서해 경치를 볼 수 있다.
무의도에는 두개의 해수욕장이 유명하다.
하나개 해수욕장과 사유지 실미해수욕장.
하나개해수욕장
하나개암장
실미해수욕장에서는
썰물 때 바닷길이 열려
실미도까지 걸어갈 수 있다.
실미해수욕장
실미도 가는 길
실미도
또 하나개해수욕장에서는
하나개해벽 암벽연습장을 비롯
호룡곡산, 국사봉 등산도 가능하다.
.............하나개 해수욕장...............
무의도에서 가장 큰 갯벌' 뜻말 하나개
선착장에서 차로 10분 정도면 도착한다.
밀가루처럼 입자가 고운 모래가 깔린 갯벌
맑은 날에 황해도 장산곶까지
멀리 보일 정도로 경관이 좋다.
바닷가 원두막식 방갈로 숙소를
정하면 색다른 경험을 할 수 있다.
특히 권상우, 최지우 주연
'천국의 계단' 드라마 세트장
방문객 발길이 끊이지 않는다.
........................................
............실미해수욕장..............
2km에 달하는 초승달 모양의 해변
모래사장과 100년생 소나무 군락지.
산림욕장과 텐트야영장이 인기높다
썰물 때에는 실미해수욕장과 실미도
사이 갯벌에 아직도 낙지가 집을 짓고
민챙이와 칠게, 고동이 살아숨쉬는 등
갯벌이 살아 숨쉬고있는 곳이기도 하다.
....................................................
실미도(實尾島)
1·21 사건을 계기로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에
보복하기 위해 김형욱 중앙정보부장의 지시로
설립된 684 부대의 설립부터 시작해서 혹독한
훈련을 통해 완전한 전투력을 갖췄음에도 불구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에 침투하는 것이
하루하루 늦어지다가 결국 불만이 폭발해
실미도 사건이 일어나게 된 역사의 현장
《실미도》는 백동호의 원작 소설
2003년 12월에제작된 대한민국 영화
영화 실미도는 관객동원 1108만명
국내 최초로 천만 이상 관객을 동원
영화 흥행 후, 관광지가 된.,실미도.
실미도는 인천광역시 중구 무의동
면적 253,594 m² 무인도 무의도에서
북서쪽으로 약 400 m 떨어져 있고,
인천항썰물 때 무의도와 연결 된다
흔히 '실미도 부대'라고 부르는 684 부대
1968년에 일어난 1·21 사태에 대한 보복을
목적으로 그해 4월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에
침투해 김일성 암살을 위해 혹독한 훈련을 받았다.
1971년 남북 화해 분위기가 조성되면서
작전 자체가 불확실해지자 같은 해 8월 23일
감시병들을 살해하고 서울로 잠입한 실미도 사건
684부대
공식적으로 2325부대 209파견대로,
1968년 4월부터 1971년 8월까지 존재하던
대한민국 공군의 북파공작부대였다.
경기도 부천군 용유면 무의리
(현 인천광역시 중구 무의동) 실미도
1968년 1월 21일,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은
조선인민군 124부대 소속의 김신조 등 31명을
박정희 대통령 암살 목적으로 대한민국에 남파
당시 김형욱 중앙정보부장과
이철희 중앙정보부 제1국장은
이를 보복하기 위하여 각 군별로
보복 부대를 만들도록 지시했는데,
공군 정보부가 대북 정보수집을 주임무로
공군 2325부대에 명령하여 같은 해 4월 창설
209 파견대는 청와대 기습 31명과
인원수를 맞춰 북파 부대를 신설했고,
창설연도와 달을 따 684부대 위장명 사용
최재헌 준위(교육대장/안성기 준사관
북한을 20번 이상 드나든 베테랑 요원이며,
부대를 정리하라는 상부 명령을 받고 권총 자살.
그가 훈련시켜 배출한
자신의 부하 부대원들을
자신의 손으로 죽일 수 없어
스스로 자신의 목숨을 끊었던 것.
결국, 그들을 제거하라는
상부 명령대로 기간병들은
그들 모두 제거하려고 하였다.
.
그러나, 인간병기로 길들여진
특수부대원들은 상황 10분만에
실미도 담당 기간병들 모두 제거.
1971년 8월23일 새벽 6시.
탈출을 위한 행동개시와 함께
실미도는 피비린내 나는 살육의 현장
특수부대원들은 인천으로 상륙,
송도 외곽에서 시외버스를 탈취,
육군 보병 및 특전사 병력들과 교전
대방동 유한양행 앞에서 전원 자폭
71년 8월 23일 서울이 발칵 뒤집힌다.
신원을 알수 없는 무장요원 군인 24명
인천에서 버스를 탈취하여 서울로 진입.
공비침투라는 군당국의 발표를 들은
시민들은 전쟁의 공포에 휘말리게 된다.
뒤늦게 연락을 받고 대기중이던 군인과
총격전 끝에 청와대로 향하던 이들은
전원 수류탄 자폭으로 최후를 마친다.
...............
...............
이들 특수부대의 교육과정은
그냥 단순한 훈련이 아니었다.
목숨이 오락가락 할 수준이었다.
완전무장한 채로 파도가 넘실대는
거친 바다 위에서 1.5Km 전투 수영.
지칠 수가 없다. 파도와 싸우다 지치면
그대로 죽음이므로 자기 자신 이외에는
684 부대원을 지켜 줄 이는 아무도 없었다.
그래서 이들은 임무를 완수하고
생존능 위한 훈련을 죽도록 했다.
무에서 유를 창조하는 684 부대원들.
이들에게 불가능은 아예 없었다.
손에 잡히는 뭐든 상황에 맞게 활용.
해양침투 수상 훈련에서도 마찬가지.
바다 위에서 판초 하나 있으면
몇 시간이라도 거뜬히 견뎌냈다.
판초 하나로 체력 소모를 줄이고
부레 역할을 해주는 생명줄로 활용.
그러나, 이들이 하는 훈련에는
항상 죽음의 그림자가 도사렸다.
모든 훈련이 위험하기 때문이었다.
잠시라도 긴장의 고삐를 늦추면 사고
이들에게 사고는 죽음으로 직결되었다.
실미도 훈련과정에서 적응하지 못하면
실전에 투입돼도 임무를 완수하지 못하고
죽을 수밖에 없다는 사실은 이들이 스스로
알고 있었기에 혹독한 훈련도 달게 받았다.
684 부대원들은
바다에 뛰어들어
해양침투 수상훈련.
오후 2시경. 그날도
단체로 물에 뛰어들어
훈련받고 나오기를 반복.
그런데 한사람이 보이지 않았다.
전 대원이 잠수하고 찾아보았지만
찾지 못하다가 2시간 뒤 썰물이 빠진 뒤
수색작업 끝에 바위틈에 끼여 숨진채 발견.
해상훈련 중 익사한 훈련병에게는
실미도 684부대 훈련기간 중 희생된
7명의 훈련병 중 유일하게 부대 차원에서
실미도 내 무덤을 만들고 장례식까지 치뤘다.
훈련기간 중 모두 7명이 죽었다.
부대 창설 3개월 만에 두 명이 희생
이들은 야간독도법 훈련 중 탈출하여
실미도 인근 무의도 마을의 민가로 몰래
들어가 부엌 아궁이에 숨어 있다가 발각.
훈련이 너무 힘들어 견디지 못하고 탈출
붙잡혀 통신선으로 포박당한 채 끌려온
이들 두 명은 배신자는 즉결 처형한다고
선언한 대로 기간요원이 지켜보는 가운데
즉석에서 몽둥이로 맞아 그 자리에서 절명.
폐병환자도 낮에 똑같이 훈련을 받았다.
폐병보다 더한 환자라도 예외는 없었다.
폐병환자 부대원은 훈련에는 참여 시키고
잠잘 때와 식사 때는 토굴을 파서 철저히 격리
약은 소대장이 무의도 보건소에서 타다가 먹였다.
이들은 누굴 위해
목숨건 훈련을 했나?
그러나 불행하게도 이들을
지켜줄 이는 이 세상에 없었다.
국가의 부름을 받고
명령에 따라 움직이는
이들이 정작 국가로부터는
철저히 외면을 받았던 것이다.
실미도 684 특수부대원들은
국가의 명령만 있을 뿐이지
이들의 인권을 챙겨줄 기관은
대한민국 그 어디에도 없었다.
병나도 고쳐줄 군의관이 없었다.
폐병에 걸린 훈련병이 있었지만
특별한 치료약이 있을 리 없었다.
그렇다고 폐병에 걸린 훈련병을
육지로 내보낼 수는 더욱 없었다.
왜냐하면 외부에 알려지지 않은
그들은 철저하게 신원이 은폐된
특수부대원들이기 때문이었다.
.............
.............
그러나 이들은 공비가 아닌
북한 주석궁 침투를 목적으로
비밀리에 지옥훈련을 받아왔던
실미도 특수부대원으로 밝혀진다.
기간병들을 사살하고
청와대로 진입하려던
684 특수부대 난동사건은
진실을 밝힐 기회조차도 없이
역사 속에 흔적없이 묻혀 버린다.
실미도 특수부대원으로
마지막까지 남아 있다가
살아남은 자는 기간병 6명과
당시 김방일 소대장 뿐이었다.
그는 왜 지금까지
입을 다물었던 걸까?
"너무 가슴에 한이 맺혔습니다.
이사건을 가슴에 묻고 죽을때
무덤까지 가지고 가려 했습니다.
그러나 더 이상 사건이 왜곡되는 걸
이대로 두고 볼 수가 없어서 이제는
밝혀야 할때가 되었다고 결심했습다"
북파목적으로 창설되었다는
실미도 특수부대 정식 명칭은
2325 전대 209 파견대였다.
68년 4월에 창설되어
'684부대' 라고 불렀다.
특수부대 창설은
1968년 김신조가 이끄는
북한무장공비 31명이 청와대를
습격하기 위해 서울에 침투했던
1·21 사태에서 비롯된다. 침투한
공비 31명중 29명이 사살되었으며
한명은 자폭하고 김신조는 생포된다.
청와대를 노린 무장공비 침투에 분노한
박정희가 보복 조치로 만든 실미도 부대.
'눈에는 눈 이에는 이' 라며 부대 인원도
김신조 특공대와 똑 같은 31명으로 구성.
훈련요원과 동일한 수 기간 요원이 있었다.
모든 교육을 총괄하는 교육대장과
직접 교육병들을 담당하는 소대장,
통신병, 의무병, 보급병 등이 있었다.
실미도 부대는 당시 권력실세였던
김형욱 중앙정보부장, 대북 공작책
제1국장 이철희에 의해 만들어졌고
부대관리와 훈련은 공군이 맡았다.
그러나, 실미도 특수부대 창설
3년 4개월만에 31명 모두 죽는다.
이 사건은 역사 상 씻을 수 없는 오욕.
1971년 8월23일 난동 당시
총알을 피해 살아남은 기간요원은
모두 6명. 변소간에 숨어있거나 매트리스에
몸을 숨겨 구사일생으로 목숨을 건졌던 것이다.
실미도 최고 실무책임자 소대장으로
유일하게 현장을 마지막까지 지켜본
김방일씨는 당시 상황을 떠올리며 눈물.
"끔찍했습니다.
전쟁으로 폐허가
된다 해도 이보다 더
처참 할 수는 없을 것.
훈련병들에 의해 피살된 기간요원들
시신이 여기 저기 흩어져 있고 머리가
으깨져 뇌수가 방안 천장과 벽에 흩어진
현장을 보는 순간 먼저 죽었으면 싶었습니다"
"만들어만 놓고
책임지는 사람이
아무도 없었어요.
지옥같은 훈련을 3년 이상
받으면서 이대로 방치하면
앞으로 무슨일이 일어날지
모른다는 생각을 했습니다.
그런데 아니나 다를까…"
실미도는 인천에서 남서쪽 직선 거리로 20 km
해발 80m, 2제곱 km 사람이 살지 않는 무인도.
중앙정보부가 북파 특수부대를 훈련시킬 최적지.
그들은 3년4개월동안
체포되면 죽는다는 교육을
하루에도 몇번씩이나 받았다.
조국 통일을 위해서는 목숨을
기꺼이 바칠 각오가 되어 있었다.
북한 침투훈련을 위해 위성사진을 본따
북한 지형의 모형을 만들어 놓고 훈련했다.
독도법 호신술 산악훈련 폭파기술 등을 배웠다.
기간요원과 훈련병 모두 한결같이
처음에는 사기가 하늘을 찌를듯 했다.
국가를 위해 충성하고 임무를 완수하면
새로운 인생을 살수 있을 것이라는 희망.
김신조부대를 능가해야 한다는 각오로
산악구보를 해도 그들보다 빨리 달렸다.
훈련 중에 동료 7명이 목숨을 잃었지만
실미도 특수부대원들의 기량은 최고조.
목숨을 건 훈련 3개월만에
목표물이 어디서 어떻게 움직여도
그들의 사격실력은 백발 백중이었다.
훈련요원과 기간요원이 함께 먹고 자며 생활.
당초에 약속했던 3개월이 지나면서 상부로부터
보급과 지원이 줄고 문제점이 드러나기 시작했다.
실전명령만 눈빠지게 기다리며
참아온 몇 달 후 마침내 그들은
북한이 코앞에 보이는 백령도에서
평양침투를 위한 작전 명령을
대기하라는 지시를 받는다.
그러나 예정되었던 1968년 11월에는
북한침투 명령이 떨어졌다가 전격 취소.
그후 지옥훈련을 3년이나 견디며
작전 명령을 기다려 왔지만 그들에게
단 한번도 북파기회는 주어지지 않는다.
그리고는 마침내
실미도 사건으로서
끔찍한 최후를 맞는다.
당시 실미도 밖 상황은 남북 화해
분위기로 빠르게 급변하고 있었다.
중앙정보부장은 684 부대를 만든
김형욱에서 이후락으로 바뀌었고
실미도 처리문제는 계속 미루어진다.
국제 데탕트의 영향을 받아
남북한 대화노선으로 나간다.
이후락은 마침내 평화통일안을
천명하고 남북회담으로 이어진다.
북한 침투를 목적으로 창설한
실미도 특수부대의 존재가치는
그 무렵에 더 이상 존재하지 않았다.
어느누구 나서는 사람없이
버려진 684 실미도 특수 부대.
마침내 끔찍한 최후의 날이 다가온다.
1971년 8월23일 새벽 6시.
탈출을 위한 훈련병들의 행동개시
실미도는 삽시간에 살육의 현장으로 바뀐다.
특수훈련 훈련병들이 일당백 기량으로 기간병을 습격
24명의 기간요원중
교육대장이던 준위등
12명이 사살되고 6명은
바다로 피하려다 익사한다.
1971년 8월23일 실미도 사건 당시
현장에 있던 24명의 기간요원 중에서
구사일생으로 살아남은 사람은 모두 6명.
김방일씨는 인천으로 외박을 나가는 바람에
소대장을 맡은 사람으로서는 유일하게 생존자
기간병 김태수씨는 화장실 밑에 숨어 겨우 생존
이틀전에 화장실 청소를 했기 때문에
구사일생으로 살아남을 수가 있었다.
황석종씨는 매트리스 속에 들어가
오른팔로 머리 모양을 해서 살았다.
훈련병들은 그가 위장한 팔을
머리로 알고 쏴 생명을 건졌다.
훈련병들은 인근섬 무의도에 들어가
배를 타고 낮 12시 30분경 실미도를 나와
3년4개월만에 인천 독배부리 해안에 상륙한다.
12시 53분 송도외곽에서 탈취한
시내버스를 타고 가다가 연락받고
대기중인 육군 24명과 총격전을 벌인다.
그들이 타고가던 버스의 바퀴가 펑크나자
마주오던 버스를 탈취하여 서울로 향한다.
오후 2시 15분경
운전기사가 탈출하자
실미도 훈련병이 차를 몬다.
대방동 로터리 유한양행앞에서
그 버스가 가로수에 받혀 멈춘다.
그리고 수류탄 자폭으로 최후를 맞는다.
생존자 4명에게는 사형이 집행되고 이사건은
철저하게 은폐되어 영원한 미궁에 빠지게 된다.
사건발생 3일후 당시 국방장관이 전격 사표
이사건은 의문을 가질 기회도 없이 종결된다.
28년간 묻혀있던 실미도 문제를 다시 세상에
들고 나온 사람은 소설 실미도를 쓴 백동호씨.
'MBC 이제는 말할수 있다' 라는 프로에서 방영
대한민국 특수부대
대한민국 인천광역시 미추홀구 숭의동
옐로우 하우스는 1960년대 발전하였으나,
'2012~ 2018년 현재', 철거를 진행하고 있다.
..........................인천......................................
구석기 시대의 고토양층과 구석기 유물이 확인되었다.
서구원당동과 불로동 등 인천 내륙지역에서 발굴 조사
신석기시대 유물 여러 곳으로 보아 일찍기 사람이 거주.
.
남구 학익·문학·주안동 등지 고인돌(支石墓)로 보아
청동기시대에는 부족세력이 자라고 있었다고 보이며,
이것이 『삼국사기』 비류(彌鄒忽國) 건국설을 뒷받침.
청동기시대의 유물·유적으로는 연수구 옥련동
인천광역시립민속박물관의 학익지석묘(鶴翼支石墓),
남구 숭의동의 주안지석묘(朱安支石墓), 서구 대곡동의
검단대곡리지석묘군(인천광역시 기념물 제33호)이 있다.
.
삼국시대 초기에는 백제에 속해 미추홀이라 불렸으며
백제가 중국과 통교하는 데 중요한 위치를 차지하였다.
백제가 동진(東晉)에 사신 파견한 372년(근초고왕 27)부터
475년(문주왕 1) 웅진으로 남천하기까지 약 100년간 지금의
남구 옥련동 능허대(凌虛臺) 밑 한나루[大津]를 통해 중국과 통교.
그뒤 한강 유역이 고구려의 영토가 되자
이곳에 매소홀현(買召忽縣)이 설치되었다.
진흥왕 때는 신라의 영토가 되었으며,
757년(경덕왕 16) 소성현(邵城縣)으로
개칭되어 율진군(栗津郡)의 영현이 되었다.
1018년(현종 9) 소성현은 수주(樹州)에 속하였다.
숙종 때 소성현이 모후 인예태후(仁睿太后) 출신지라
경원군(慶源郡)으로 개칭, 승격되었고, 인종 때도 모후
순덕왕후(順德王后)의 출신지라 해 인주(仁州)로 개칭.
1390년(공양왕 2) 7대 어향(御鄕)이라 경원부 승격,
이것은 문종조에서 인종조까지 7대에 이르는 동안에
인주이씨 5왕비가 나왔고, 5왕이 인주이씨 왕비의 소생
인주이씨는 80년간 외척으로서
귀족정치시대 최대의 문벌귀족.
자연도(紫燕島: 영종도)는 고려와 송나라와의
국교와 교역에서 중간기항지로서 경원정(慶源亭)
객관은 송나라의 사신과 상인들을 접대하던 곳이다.
1392년(태조 1) 경원부가 인주로 환원되었다가
1413년(태종 13) 인천군(仁川郡)으로 개편되었다.
1460년(세조 6) 세조의 모후인 세종의 비 소헌왕후
(昭憲王后)의 외향이라 해 인천군이 도호부로 승격.
이곳에는 김포굴포지가 남아 있는데,
김포굴포는 인천 쪽의 서해와 김포 쪽의
한강을 연결하려던 운하계획이다. 고려시대 이후
조운하는 데에서 중도에 강화 손돌목과 같은 험로가
가로놓여 있어 안전한 운송이 어려웠는데, 이 험로를
회피할 방도로 강구된 운하계획이었다.
이것은 고려시대부터 계획되다가
조선 중종 때 김안로에 의해 착수되어
양편에서 동시에 공사를 진행시켜 40리에
달하는 운하를 팠으나, 중간에 가로놓여 있는
원통현을 뚫지 못해 공사가 중단되었다.
근세에 들어와 이곳은 문호개방과 통상을 요구하는
열강과의 관계에서 갑자기 각광을 받기 시작하였다.
1866년(고종 3) 병인양요 때 프랑스함대가 나타나
정박한 곳이 물치도(勿淄島, 작약도) 앞이고, 1871년
신미양요 때 미국함대가 나타나 정박한 곳도 물치도 앞.
1875년 운요호사건(雲揚號事件) 때는
영종도가 일본군함의 포격을 받아 함락
1882년 한미수호통상조약이 화도진(花島鎭)에서 체결,
한영수호통상조약과 한독수호통상조약도 이곳에서 체결.
1883년 인천이 개항됨으로써 서양의 근대문물을 수입하는
수도의 관문으로서 우리나라 근대화에 이바지하게 되었다.
1895년 23부제 실시
인천부가 설치되었고
1896년 경기도 인천부.
1914년 행정구역 개편에 따라 개항장으로 국한되고,
구인천부의 대부분과 부평군이 통합되어 부천군 신설
1936년과 1940년 이 지역들이 다시 인천부에 편입되었다.
1949년 인천시로 개편되었다.
1950년 6·25전쟁 때 9월 15일
연합군의 인천상륙작전으로
수도를 회복하고 패주하는
공산군의 북상로를 차단
인천시는 이를 기념하기 위해
1980년 월미도 상륙지점에 표지석
1984년 송도에 인천상륙작전기념관 건립.
1963년 1월 1일 부천군 작약도가 편입되었고,
1968년 1월 1일 동·중·남·북구의 4개 구가 설치
1974년 제2독이 준공되어 국제항으로서의 면모
를 갖추고 우리나라 공업화에 이바지하게 되었다.
1981년 7월 1일 직할시로 승격되었으며,
1988년 서구와 남동구가 신설되어 6개 구가 되었다.
1989년 1월 1일 김포군 계양면과 옹진군 영종·용유면이 편입
도시과밀화현상을 해소하고
인천 앞바다의 섬지역을 확보
해양관광시설 용지를 마련하였다.
1995년 1월 1일 광역시,
3월 1일 북구가 부평구
계양·연수구가 신설되었다.
소무의도
소무의도.,바다누리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