저는 삼성전자 팬이었지만 이원우를 싫어하지는 않았습니다.
왜냐하면 이원우의 국가대표 시절 활약을 굉장히 높게 평가하기 때문입니다.
아래 글들에 써있는대로 이원우는 전 농구대잔치 경기중 매너가 나빴던 기억도 많습니다.
하지만 저에게는 이원우가 엄살이 심하고 심판에게 어필하는 그 장면 자체가 추억에 남는 볼거리였습니다
이원우는 국가대표팀에서의 활약은 대단했습니다.
바야르로 1990년 북경아시안게임때입니다.
한국은 80년대 중후반 허재-이충희-김현준-김유택-ooo
맨마지막 5번자리를 비워놓은 것은 안정적으로 그 자리를 매워주는 선수가 별로 없었다는 뜻입니다.
한기범은 키는 크지만 마른 체형이고 투지가 부족했으므로 아쉬었고,이문규는 투지가 넘치고 몸싸움도 일가견이 있고 드리블도 준수하고 외곽슛도 강하지만 신장이 4번이나 5번으로 뛰기에 작고...
1990년 북경아시안 게임전에
그런데 위에서 소개한 베스트 5 중 중대한 문제가 발생합니다.
주포 이충희가 1988년 올림픽이 열리기 몇개월전 대만에서 벌어진 존스배에서 대만선수의 거친 파울로 다리쪽에 심각한 부상을 당합니다.그런데도 불구하고 올림픽에서 강팀 유고와의 경기때도 접전을펼치게 할 정도로 맹활약을 하고, 중국(당시는 중공이라고 불렀습니다.)과의 7,8위 진출 결정전에서도 이충희의 맹활약으로 한국은 승리하고 1987년 ABC때의 역전패를 설욕합니다.
한국은 서울 올림픽에서 8위,중공은 9위 또는 10위를 차지한 걸로 기억합니다.
그런데 올림픽이 끝나고 이충희는 대만 존스배에서 벌어진 부상때문에 하향세를 걷게 됩니다.
안타까운 일입니다.
조국을 위해 열심히 뒨 죄로 결국 자기몸에 이상이 생겼고 이로인해 1989년 중국 북경에서 벌이진 중국과의 결승에서 불과 7점을 기록할 정도로 졸전을 펼칩니다.
(물론 중국은 이 대회에서 심판을 매수해서 엄청난 장난을 한국과의 경기에서 저지릅니다.당시 MBC에서 변웅전 아나운서,최인선 해설위원(당시 기아코치)이 중계했는데 변웅전 아나운서가 한말이 기억납니다.
"어쩌다 한국에 유리한 콜을 심판이 한개 불어주는군요."
이 멘트로 보아 얼마나 중국이 한국과의 경기에서 편파판정을 일삼았는지 알수 있습니다.)
베스트 5중 중요한 슈터인 이충희가 부상으로 정상 컨디션이 아니자,1990년 북경 아시안 게임 감독으로 선임된 김인건 감독님은 고민에 빠집니다.
대표팀 코치인 정광석 현대전자 감독도 고민하기는 마찬가지입니다.
누굴 그 자리에 집어넣을까?
김인건 감독은 이 고민으로 밤잠을 설칩니다.
설상 가상으로 5번자리에 뛰어야 하는 한기범은 부상으로,이문규는 알 수없는 사정으로 대표팀에서 제외됩니다.이문규의 제외는 역시 나이가 많아서 라고 추정됩니다.
그래서 김인건 감독은 이충희 자리에 이원우,한기범 자리에 서대성을 투입합니다.
이원우의 교체멤버는 강동희,서대성의 교체멤버는 최병식,이민형으로 작전을 구상합니다.
강동희는 1991년 고베 ABC때 부터는 주전 포인트 가드로 자리메김을 합니다.
허재는 그 때부터 대표팀내에서 포인트 가드에서 슈팅가드로 변신합니다.
한국은 북경아시안게임에서
허재-이원우-김현준-서대성-김유택의 라인업을 토대로 가동시킵니다.
이 때 이원우는 조예선,8강준준리그에서 이충희의 공백을 훌륭하게 매꿉니다.
다만 중국과의 준결승에서 한국이 전반한 때 15:8로 앞서가고 있을 때 외곽슛을 너무 남발한 관계로 그 때는 부진했습니다.
반면에 김현준은 이 경기에서 한국이 중국에 15:8로 앞서갈 때 사이드슛을 성공시키는 등 맹활약합니다.
김현준은 중국과의 경기에서는 늘 좋은 활약을 보여주는데,
제 기억으로는 이 경기가 중국과의 경기 중 김현준이 가장 잘한 경기가 아니었나 생각합니다.
(한국이 중국을 결승에서 안만나고 준결승에서 만난 이유는 8강준준리그 2조에서 일본에게 접전을 펼치다가 패했기 때문입니다.그래서 필리핀과 일본이 준결승에서 만나고,반대편에선 한국과 중국이 준결승에서 만납니다.)
이 경기는 한국이 88:92로 패하는데 한국이나 제3국에서 벌어졌으면 한국이 이겼을 경기입니다.
왜냐하면 중국이 심판을 매수해서 심판판정으로 장난을 쳤고 중국의 4,5번인 마지안,공샤오빈이 대표팀에 처음으로 선보이며 막 발돋음 하기 시작했을 때 였고 기량이 완숙의 경지에 도달하기 한참전이기 때문입니다.
중국은 결승전에서 필리핀에 승리를 거두는데 필리핀 감독도 경기후 심판 판정이 엉망이라고 불평을 늘어놓을 정도로 중국의 편파판정은 심했습니다.
한국은 준결승에서 편파판정으로 중국에 패하고,3,4위 결정전에서 8강준준리그에서 패한 일본을 다시 만나 20여점 가까이 설욕하는데 완전히 일본선수들을 가지고 놀더군요.이원우는 이 경기에서도 맹활약했습니다.
당시 이 경기는 한국 tv에서는 중계하지 않았는데 마침 저희집에 위성통신 tv를 가지고 있어 일본방송을 트니까 이 경기가 방송되고 있었습니다.
이 때 일본이 한국에 실점할 때 마다 아나운서의 "음-"하고 길게 빼는 절망하는 멘트가 기억에 납니다.
또 한가지 이원우에 대한 기억은 국가대표팀에서 생활할 때 선수들이 허락된 외박을 하고 대표팀에 다시 모였는데 허재가 약속된 시간보다 늦게 태능선수촌으로 들어왔습니다.
이충회와 같이 이원우가 나서서 허재를 운동장을 돌게 하는 벌을 주었다는 일화를 읽은 적이 있습니다.
또 현대가 어떤 팀(아마도 삼성으로 기억합니다.)과의 경기에서 포인트 가드 유도훈이 상대팀과의 볼을 쟁탈하는 과정에서 넘어졌는데 자신의 파울을 심판이 불자 넘어져 있는 상태로 발을 동동 구르고 있었는데 이원우가 유도훈을 손을 잡고 일으켜 주면서 달래주는 모습이 지금도 선합니다.
제 기억으로는 연대 출신인 유도훈(2014년 12월 현재 프로농구 전자랜드 감독)은 대학시절 라이벌 고대와의 대결에서 거의 이겼습니다.
대단히 영리한 포인트 가드이자 꾀돌이입니다
코트의 여우라는 별명을 가지고 한 시대를 나름대로 풍미했던 이원우 선수를 추모하며,오늘 그 선수가 기억이 나서 글을 썼습니다.
혹시 이 글을 읽는 독자분들중 80년대 국가대표팀 경기나 프로농구가 생기기전 농구대잔치에 관한 질문을 남겨주시면 제가 아는 한도내에서 성심성의껏 답변드리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