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창세기05 노아이야기
이제 다섯 번째 강의를 하기 위해서 제가 섰는데요.
그냥 저는 내려가고 우리 집사님께서 최 원장님께서 더 말씀을 해주시면 어떨까 그런 생각이 좀 듭니다.
아 정말 저한테도 너무나 깨우침을 크게 주는 그런 말씀들이고 정말 너무나 저한테 큰 축복의 기간인 것 같습니다.
제가 잠깐 우리 아침 먹을 때 우리
김철우 장로님하고 같이 대화하는 중에 이제 그런 말씀을 드렸어요.
제가 여기서 한 이제 삼일째 머물면서 제 아내나 사모나 저나 너무너무 귀한 축복과 또 영적인 쉼을 경험하면서 이곳이 성소가 되었으면 좋겠다.
그러니까 하나님이 계신 곳 언제나 하나님의 말씀이 듣고 싶으면 이곳에 와서 하나님의 음성을 들을 수 있고 또 성도와의 교제를 통해서 서로를 보면서 그 서로의 속에 담겨 있는 그 예수님을 보면서 나는 어떻게 살아야 되는지를 느낄 수 있고 언제나 회개하고 싶고 뭔가 영적으로 내가 병들어 있다고 하면 언제나 찾을 수 있는 그런 곳 그곳이 다니엘 빌리지가 됐으면 좋겠다는 그런 말씀을 드렸습니다.
정말 그 너무나 주옥같은 말씀 제게도 필요한 말씀 하나님께서 우리 최 원장님을 통해서 들려주셔서 감사하고요.
우리의 마음속에 이 말씀들이 떨어지지 않고 새겨져서 우리의 일상을 통해서 계속 계속 우리가 이 말씀대로 살아가는 축복들을 경험할 수 있게 되기를 간절히 바라겠습니다.
이제 절반을 지나가고 있는데요. 그 좀 창세기의 말씀을 이제 오늘부터 노하 홍수에 대한 이야기를 좀 들려드리려고 하는데요.
인류 역사를 육천년으로 볼 때 지구 역사를 크게 세 등분으로 나눌 수 있다고 합니다.
첫 번째는 이 창조가 이제 큰 시작이죠 시작부터 언제를 기점으로 한 텀을 나눌 수 있을까요? 세 등분할 때
노하우수까지입니다. 예 이걸 창조시대라고 하는데 천칠백 년의 역사가 흘러가요.
두 번째는 노항수 때부터 그럼 언제까지 또 볼 수 있을까요? 인류 역사를 크게 세 등분으로 한다.
그러면 예수님의 초림까지 이걸 초림을 기다리는 시대라고 합니다.
이게 이삼백 년이 흘러가요.
세 번째는 예수님의 초림부터 예수님의 재림까지 이천 년의 역사가 또 흘러가고 있습니다.
그래서 이 노아 홍수는 초기 인류 역사가 한 사이클이 돌고 끝나는 역사적인 사건이 벌어지는 거예요.
역사는 어떻게 된다? 반복되어 진다고 하기 때문에 특별히 노하우 수는
역사의 종말을 살고 있는 우리들에게 대단히 중요한 메시지와 교훈을 주고 있기 때문에 우리는 면밀히 살펴서 오늘 이 시대에 우리에게 적용시켜야 된다고 하는 것입니다.
특별히 그 중에서 어제 제가 말씀드린 에녹과 노아는 역사의 마지막에 여자의 남은자손 종말에 살아남은 자 다시 말해서 하나님의 인을 받은 진짜 재림 성도로 살아간 사람으로 볼 수 있어요.
노아가 언제 태어났는가 하면 이제 아담이 930에 죽죠 그리고 백이십육 년이 지나가서 아담의 창조 후에 천오십육 년에 노아가 태어납니다.
노아 홍수는 천육백오십육 년에 터져 육백 년을 더 지나가죠.
어제도 말씀드린 것처럼 사람들은 아담이 죽을 때 그들은 이제 인류 종말의 때가 가까이 오고 있다고 느꼈을까요?
아 진짜 끝나는구나. 세상에 사람들이 이제 죽어가 나가는 거예요.
근데 여러분 아담이 세상을 떠난 후에 인류 두 번째로 폭력으로 죽는 사람은 있어요 살인 사건으로 두 번째로 자연사에서 죽은 세상을 떠난 사람 죽었다기보다 세상을 떠난 사람이 누구죠? 노아 아담이 사라지고 난 다음에
아담 사후에 영적인 스승이라고 할 수 있는 또 한 사람이 사라져요.
누가 사라졌죠? 두 번째로 이제 세상을 떠난 사람 에녹입니다.
에녹 무드셀라가 태어난 후 삼백 년 동안 이분이 뭘 전했죠? 세상에 종말이 옵니다.
계속 외쳤어요. 우리 준비합시다. 그래서 에녹이 구백팔십칠 년, 아담이 사망한 지 오십칠 년 후에 세상을 떠나 하늘로 승천합니다.
이렇게
죽지 않고 올라가요. 이 에녹은 하나님께서 홍수로 세상이 멸망할 것에 대한 계시를 받은 후에 노아처럼 삼백 년 동안 가장 열렬하게 열정적으로 구원을 위한 기별을 전한 선교사이자 대선지자예요.
아담이 가르쳤던 것 아담이 봤던 것들을 그대로 다 전할 거야.
이거를 가감하지 않고 이 복음을.
근데 그 사람이 어느 날 사라진 거에요.
근데 그가 마지막까지 전한 한 마디는 뭔가 하면 내 아들이 죽을 때 내 아들이 죽을 때 그때 홍수가 온다는 기별을 전하며 하늘로 사라졌습니다.
세상이 이제 에노까지 사라졌으니까 이제 너무나 어지럽고 점점 더 죄악으로 가득 차 가고 있었어요.
그러면서도 하나님의 백성들은 이제 종말을 대비하여 어떻게 살아야 될지 무엇을 대비해야 될지를 계속 기도하며 하루하루 살고 있었는데 근데 에녹이 승천한지 육십구 년 후에
노아라고 하는 인물이 태어납니다. 그때 무드셀라의 나이는 삼백육십 구가 되겠죠 삼백 년 동안 동행하고 에녹이 승천했으니까.
그런데 죄악의 조수는 세상에 너무나 편만하게 퍼져 들어가고 있었고 그러던 차에 하나님이 이 노아라는 인물이 다시 사백팔십 년이 되던 때 팔 사백팔십살이 되던 해 무드셀라의 나이가 팔백칠십구세가 되던 해 그 때 하나님은 이제 백이십 년 후에 홍수가 온다고 하는 기별을 전합니다.
전화기 합니다. 타임 세팅이 딱 되는 거예요.
그러면 이제 무드셀라도 아 이제 내 생명이 몇 년 남았다 몇 년 남았다 들어왔던 게 있잖아요.
세상이 끝나는 날은 내가 죽는 날이잖아요.
근데 백이십 년 후에 홍수가 온다 했으니까 이제 내가 몇 살 산다 백이십 년 후에 죽는다는 걸 알겠지 그때 세상에 종말이 온다는 걸 알게 돼.
그때 그때를 대비하여 주어진 기간 세상을 구원하기 위해 이들은 무엇을 해야 될까? 하나님은 방주를 지으라고 하는 말씀을 하셨어요.
근데 그때 이제 그 당시에요 방수를 지으라고 하는 기별이 전화지고 있는 그때 그때 당시 사회적 사상 상황과 인간의 모습이 어떤 모습인지를 보여주는 성경절들이 짧은 말씀이지만 굉장히 우리에게 교훈을 주는 많은 말씀들이 있어요.
그리고 예수님은 언제나 말씀하실 때 인자가 올 때도 이와 비슷한 사회적 상황이 벌어질 것이라고 주님께서 말씀하셨기 때문에 당시의 사회적 상황을 살펴보는 것은 이 시대를 분별하는 대단히 의미 있는 내용들이라고 생각합니다.
먼저 창세기 육장 일절부터 삼 절까지의 말씀을 먼저 한번 보도록 하겠습니다.
먼저 육장 일절에 보면 세상에 사람들이 번성하기 시작할 때라는 말은 사람들이 기하급수적으로 많아지고 있었다고 하는 거
여러분 지금 사람들은 1천 년을 살아요.
다시 말하면 지금으로부터 고려시대 때 살았던 사람이 아직까지 죽지 않고 계속 계속 살아오는 거예요.
사람들이 살인 사건이 벌어지지 않으면 안 죽어요.
계속 계속 살아가는 그러니까 이 당시의 인구는 오늘날 이 세상의 인구와 거의 비슷해요.
그러니까 사람이 많은데 안 죽어요. 또 애기 애기를 낳으면 또 그 아이 태어나는 거예요.
그러니까 사람이 많은 만큼 기하급수적으로 막 사람이 늘어나면 막 폭발적으로 늘어나겠죠 그래서 막 세상에 꽉 차는 거야 세상 사람들이.
근데 이 절에 보면 그 당시 노하우수 전이에요.
그때 이런 일이 벌어졌다고 합니다. 그것은 바로 하나님의 아들들이 사람의 딸들의 뭐를 보고 아름다움을 보고 자기들이 좋아하는 모든 여자를 아내로 삼는지라 하는 이야기가 나온다.
여기서 말하는 이 하나님의 아들은 누구죠? 누구죠? 하나님의 아들들은 새의 후손 그러니까 다시 말하면 하나님의 여자의 후손이죠.
여자의 후손 하나님 백성들이에요. 사람의 딸들은 가인의 후손 가인의 사람의 딸들은 가인의 후손 중에 여자들을 말하는 거죠.
근데 문제는 이 하나님의 아들들이 사람들의 사람의 딸들의 아름다움을 보았다고 하는 것은 무엇을 말하는 것인가 하면
이것은 셋의 후손들이 하늘에 속한 거룩한 아름다움을 바라보는 것을 더 이상 그치고 하늘에 속한 거룩한 아름다움이 아니라 뭐에 끌리기 시작한다? 가인의 후손의 여인들의 그 관능적인 아름다움에 끌리기 시작했다고 하는 거예요.
여러분 이것은 무슨 말일까요? 창세기 3장 십오절의 그 복음은
우리의 타락한 정욕과 타락한 본성에 대항하는 거룩한 영향력을 하나님께서 넣어주겠다고 하는 약속의 말씀이에요.
그래서 우리의 타락한 본성이 사단의 유혹으로 끌려가려고 할 때 그것이 잘못된 것이고 그렇게 끌려서 끌려가서는 안된다고 하는 것을 인지하고 날마다 매 순간 나의 타락한 본성을
성령의 뜻에 우리를 복종하게 만드는 영향력이에요.
이게 바로 뭔가 하면 복음의 영향력입니다.
근데 세세 후손이 하늘에 속한 거룩한 아름다움이 아니라 세상에 타락한 여인들의 관능적 아름다움에 끌리기 시작했다고 하는 것은 이게 뭐예요? 죄에 감염된 거예요 전부 다.
그 하와가
하나님의 말씀을 버리고 사단의 말씀을 받아들일 때 어떻게 되었죠? 선악과가 보암직도 하고 먹음직도 하고 지혜롭게 할 만큼 탐스럽게 모였다고 하는 건 뭐예요? 사단이 다 말해준 거잖아요.
그게 다 자기에게 다 그대로 적용되는 거예요.
내가 그렇게 보기 시작하는 거예요. 세상
여러분 이것을 오늘날의 모습으로 적용하면 오늘날 교회 안까지 하나님 백성들이잖아요 교회 안까지 성적 문란함이 들어오기 시작했다고 하는 거예요.
다시 말해 세상에서 벌어지는 죄악들이 교회 안에서도 벌어지고 있다고 하는 것을 말해주는 거예요.
이 말은 교회가 복음의 능력을 다 잃어버리고 전부 다 앉아 있는 사람들이 전부 다 뭐다?
육신적 그리스도인으로 가득 차기 시작했다고 하는 말과 똑같은 말이에요.
세상으로 사단이 교회 안까지 점령해 들어오는 거예요.
여러분 하나님께서 노아 홍수 직전 세상에 종말이 오는 모습 가운데 보여주신 첫 번째 장면은 악인의 타락을 먼저 보여주신 것이 아니라 의인들의 타락의 모습을 먼저 보여주고 있습니다.
이 말은 다시 말하면 교회의 타락을 먼저 보여주고 있다고 하는 거예요.
여러분 당시 이 세상 사람들이 이 모습을 보면서 어떤 생각을 하게 되었을까요? 어떤 생각을 하게 되었을까요? 그것 봐라 실제 신앙이라고 하는 건 다 가짜야 에 혹은 복음의 능력이 뭐가 있어 다 그 거짓말이야.
봐라 세세 후손들이랑 거기 살고 있지만 다 똑같이 우리랑 똑같이 살아가고 있지 않냐 다 위선이다.
이런 말을 하는 거예요.
그러면서 진리의 영향력이 급속히 약화되어지면서 세상을 구원할 빛이 사라지기 시작하는 거예요.
교회에 기대가 안 해 이제. 그런데 오늘날 세상의 형편이 이런가요 여러분 그런데 실제로 소돔과 고모라가 멸망할 때도 창세기 십팔장 십구장 이야기를 읽어보면 그 시작에 소돔성이 멸망할 수 밖에 없는 이유로 하나님과 아브라함 사이의 대화가 일어나요.
어떤 얘기를 하죠?
하나님 아브라함은 거기 의인들이 있지 않습니까? 왜 의인들과 악인들을 함께 멸망시키려고 합니까? 라고 말했을 때 하나님이 뭐라 그런가 하면 그 안에 그 소동성 안에 의인 오십 명만 있어도 아니 사십오명만 있어도 아니 열 명만 존재했어도 그 이 의인 열 명으로 인해서 소돔성에 대한 자비를 베풀려고 한다고 하는 거예요.
이 말은 무슨 말인가 하면 소돔성을 멸망시키지 않고 구원의 빛을 유지하려고 하셨다고 하는 거
그들에게 희망을 계속 줄 수 있게 하겠다는 거 그 사람들을 통해서 계속 보면서 타락하지 말고 복음의 능력을 회복하라고 계속 계속 그들을 통해 일하려고 했다고 하는 거예요.
그런데 소돔성에 의인들이 급속하게 타락하며 사라져 갈 때 그때 세상에 무엇이 사라진다? 희망이 사라지고 멸망이 찾아오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여러분 그래서 어떻게 보면 여자의 남은무리는 무엇이다? 인류의 희망일 수 있는 거예요.
다시 말해 이 마지막 시대 인류의 희망이자 마지막 보루는 하나님의 계명을 지키며 예수의 믿음을 가진 여자의 남은무리라고 불리는 오늘 우리들이라고 하는 거예요.
그래서 오늘 우리의 이 삶과 인생을 우리가 어떻게 살아내는가 하는 그 결과를 통해서 오늘 이 마지막 시대에 역사의 흐름과 세상의 판도가 바뀌어질 수 있다고 하는 것이 오늘 이 노아 홍수 이야기를 통해서 우리에게 들려주는 굉장히 중요한 기별이라고 하는 것입니다.
여러분 그래서 하나님은 다니엘 당시에도 보면요
드부아네스 왕이 세상을 세상을 지배하고 있지만 하나님은 그 사람보다 누구를 더 중요하게 보고 있는가 하면 유다가 멸망한 이후에 바벨론에 끌려간 그 청년이에요.
스무살도 채 안된 다니엘과 새 친구들을 주목하고 있었어요.
왜냐하면 그 사람들이 세상에 희망이에요.
오늘날 시진핑이라든가 무슨 저기 오바마라든가 트럼프라든가 문재인 대통령이 아니라 오늘 이 시대의 희망은 누구 하나님이 관심 갖고 있는 대상은 뭔가 하면 오늘 여러분과 이 교회라고 하는 사실이에요.
이 두 번째 노아 홍수 전 하나님께서 보여주신 세상의 모습은 삼절을 통해 보면 노아 홍수 직전 사람들의 모습은 삼절 이렇게 기록해 놓고 있어요.
어떻게 기록해 놓고 있는가 하면 여호와의 신이
성령이 더 이상 사람과 함께 할 수 없는 상태였다고 하는 거예요.
이것은 또 다른 표현으로 하면 삼절 하단에 보면 다 사람들이 뭐가 되었다? 육체 육체 육신이 되었다고 이 말이 무슨 말인가요?
사람들은 육체잖아요. 당시 사람들이 육체가 되었다는 이 말이 무슨 말일까요? 이 말은 거의 모든 사람들이 성령의 이끄심에 성령 하나님의 호소에 전혀 반응하지 않고 있어요.
정반대로 행하고 있었다고 하는 거야.
여러분 노아 홍수 때나 소동과 고모라 때나 재림 직전의 상황이 모두 비슷할 것이라고 주님은 말씀하고 있어요.
그래서 사람들이 육체가 되었다고 하는 이 모습은 똑같이 창세기 십구장에 소동과 고모라가 멸망하기 직전 당시 사회의 모습을 하나님이 보여줘요.
왜 이 도성이 멸망할 수 밖에 없는지 다시 말하면 노아 홍수가 왜 일어날 수밖에 없는지를 보여줬죠 똑같이 소동과 고모라가 멸망하기 직전 하나님이 왜 그 도성이 멸망할 수밖에 없는지를 보여줘요.
당시 사회의 모습을 보여줄 때 하나님은 그때 어떤 모습을 모세를 통해서 기록하게 했는가 하면 소덤 거인들이 어떻게 하죠? 당시 가장 불쌍하고 힘없는 나그네에요.
이 사람들은 우리 보통의 사람들의 마음을 가지면 동정심이 일어나야 되는데 그런 게 하나도 없어요.
그 사람들을 데려다가 어떻게 하려고 하냐면 동성애를 하려고 하는 장면을 보여줍니다.
여러분 노아 홍수 시대나 소동과 고모라가 멸망할 때도 언제나 보여지는 모습은 사람들이 더 이상
우리 양심에 호소하시는 지금도 우리 최 원장님을 통해 여러분들이 계속 마음에 호소하고 있죠 계속계속 호소하고 있어요.
이렇게 자는 게 진리라고 하는 거 호소하시는 그 성령의 호소에 사람들이 귀를 기울이지 않아요.
예 오직 모든 사람들이 귀를 기울이는 건 뭐냐 그러면 육체의 소욕이에요.
여기에 아주 철저하게 충실하게 반응하며 살아가고 있는 모습을 볼 수 있다고 하는 거예요.
이 상태를 조금 더 구체적으로 설명하는 구절이 창세기 6장 5절입니다.
여호와께서 사람의 죄악이 세상의 관영함과 그의 마음으로 생각하는 모든 계획이 항상이에요.
이게 중요한 게 항상 항상 악할 분임을 보셨다고 합니다.
하나님이 세상 사람들을 보는데 아침부터 저녁까지 하루 종일 생각하는 것이 뭔가 하면 육신의 생각이에요.
아침부터 저녁까지 항상 악한 생각으로 가득했다고 하는 거예요.
여러분 이게 뭐다? 종말 직전 세상의 모습이에요.
오늘날 스마트폰을 보면서 하루 종일 음란한 동영상을 바라보면서 하루 종일 살아가는 사람이 있죠 하루 종일 게임을 하면서 사람들을 죽이는 것에 쾌하게 그 붙들려 살아가는 사람들이 얼마나 많은지 몰라요.
그리고 그것을 실제 삶을 통해서 생활 속에서 막 이렇게 적용하는 사람들이 있잖아요.
여러분 그때나 지금이나 비슷하게 흘러가고 있어요.
여러분 주목해봐야 돼요. 예 여러분 근데
당시 사람들은 하루 종일 아침부터 저녁까지 항상 애가 악한 생각으로 가득했다고 하는데 한번 생각해보세요.
여러분들은 한 주기를 다시면서 오늘 여러분들의 마음과 생각에는 어떤 생각들이 여러분들의 마음과 생각에 담겨지고 쌓여지고 있는가 한번 생각해보세요.
정로의 계단에 보면 이런 말씀이 있어요.
제가 이 말씀을 참 소중히 생각하는데요.
우리가 누구의 누구의 편에 속해 있는지 우리가 어느 쪽에 속해 있는지 우리가 어떻게 알 수 있는가 이 질문을 먼저 던져요.
다시 말해서 내가 예수님께 속해 있다는 것을 우리가 어떻게 알 수 있을까라는 질문을 던진 후에 그다음에 답으로 진술되어지는 내용이죠.
같이 읽어볼까요? 이 말씀은요 시작
정말 중요한 말씀이에요. 누가 우리의 마음을 지배하고 있는가 하는 거예요.
예 여러분 그리스도와 사단 사이의 선악의 대쟁투의 핵심은 우리의 마음에서 벌어지는 전쟁입니다.
우리의 마음에서 더 정확하게 표현하면 우리의 마음을 지배하기 위해서 하나님과 사단 사이에 벌어지는 전쟁이에요.
그 전쟁터는 어디에요? 우리의 마음이에요.
우리의 마음에서 하나님과 사단 사이에 전쟁이 지금 벌어지고 있어요.
치열한 전쟁이. 그래서 누가 우리의 마음을 지배하든지 그 지배하는 쪽에 뭘 받는다? 영향을 받는다고 하는 거 그래서 그거를 방어하게 하기 위해서 어떻게 해야 된다? 믿음으로 살아야 한다고 하는 거예요.
끝없이 끝없이 하나님 말씀을 받아야 되고 그 말씀의 말씀을 받아들이는 훈련을 자꾸 해야 돼요.
우리 여러분 그래서 우리가 매일 육신의 생각이 사단이 우리의 타락한 육신을 통해 들려주는 생각과
또 하나는 하늘로부터 오는 성령의 생각이 서로 우리의 마음을 모하기 위해서 지배하기 위해서 우리 마음속에서 싸움을 싸우고 있는 거예요.
이것이 노아 홍수 당시에 인류를 지배하기 위해 사단과 하나님 사이에 벌어진 싸움이고 이것이 예수님이 광야에서 40일 동안 시험 당할 때 예수님과 사단 사이에 싸우는 싸움이었어요.
이게 시대의 전망에 보면 자세하게 나와요.
더하여서 지금 이 마지막 시대 지금 현재 우리의 마음속에서도 벌어지고 있는 싸움이라고 하는 거예요.
이 싸움을 우리가 싸우고 있는 거예요.
여러분 오늘 우리에게 계속 두 가지 생각이 들려올 거예요.
지금 이 순간에도 마찬가지일 거예요.
어떤 걸 선택해야 될지 하나는 육체에서 들려오는 내 타락한 본성을 따라 행하라고 하는 생각과 또 하나는 성령께서 우리를 인도하시는 생각이 들려올 거예요.
그런데 오늘 우리가 어디에 속해 있는가 하는 것은 오늘 내가 어느 생각을 따라서 어느 생각을 받아들이면서, 어느 말씀에 반응하면서 날마다 이끌리며 행하고 있는가에 따라서 오늘 우리의 삶의 열매가
전혀 달라지게 될 것이라고 하는 거예요.
마지막 시대도 마찬 마지막 때도 마찬가지죠 여러분 그래서 날마다 순간마다 우리의 마음의 흐름을 살펴봐야 돼요.
다시 말하면서 자기 멋대로 흘러가게 내버려 두거나 방치해서는 절대로 안 된다고 하는 거예요.
그래서 우리가 매일 아침마다 새벽마다 일어나서 이 기도의 시간 와서 무릎 꿇고 기도하는 것이고, 수시로 말씀을 듣는 것이고, 수시로 우리가 하나님께 예배하는 거예요.
그 순간은 뭐니 멈추는 거예요. 내 마음 상태가 괜찮은지, 이대로 가도 되는지
다시 말해서 아무런 생각이나 막 떠오르는 대로 덥썩덥썩 따라가서는 안 된다고 하는 거예요.
매 순간마다 그 생각이 어디서 온 것인지를 분별해야 되는 거예요.
그렇지 않으면 순식간에 우리는 어둠 속에 빠질 수가 있고, 평안을 잃어버릴 수 있고, 또 어떤 부정한 생각에 매여서 우리의 영혼을 병들게 하거나 더럽힐 수 있다고 하는 거예요.
여러분, 우리의 마음이 얼마나 연약한지 아셔야 돼요.
우리 마음이 얼마나 연약한지 아셔야 돼요.
우리는 순식간에 환경의 변화나
누구의 말 한마디나 또는 상황의 변화에 영향을 받을 수 있을 만큼 연약한 존재라고 하는 거예요.
그래서 우리는 사람을 믿을 수가 없는 거예요.
여러분 마찬가지로 여러분 자신의 마음을 절대로 믿지 않게 되기를 바라겠습니다.
이 말은 방치하지 말라고 하는 말입니다.
늘 수시로 관리하고 청소하지 않으면 분명히 그 마음은 하나님이 계시지 못할 만큼 온갖 쓰레기로 오염되어져 있을 수 있다고 하는 거예요.
왜냐 그러면 우리의 본성은 그렇게 흘러가게 돼 있어요.
사단은 계속 계속 쓰레기들로 우리의 마음속을 더럽히고 채우고, 밝은 것을 다시금 어둡게 만들 거고, 진리가 오류처럼 보이게 만들 거고 계속 계속 흔들리게 만들 것 이 말씀을 듣고 있다가도 밖에 나가서 돌아가면 갑자기 순식간에 그 영양 감화령을 다 잃어버릴 수도 있어요.
여러분 그래서 무릎 지킬 만한 것보다 더욱 무엇을 지키라 내 마음을 지키라 하는데 이 말씀을 아는데 어떻게 우리가 우리의 마음 성전을 지켜낼 수 있는가 하는 것이
여러분 오늘 우리 최 원장님께서도 데살로니가전서 오장 십팔 절에 항시범이라고 하는 이 성경 말씀을 잠깐 인용해 주셨는데 이 생각의 싸움에서 우리의 마음을 지킬 수 있는 저는 가장 강력한 무기라고 생각합니다.
여러분 우리는 언제 기도해야 돼요? 항상 기도해야 돼 항상 항상 기도해 항상 기도해야 되는 그 기도 속에서 매 순간 잊지 말고 고백해야 될 게 있어요.
그게 뭐다?
모든 일에 감사하는 거야. 걸어가면서도 감사하고 오늘 이곳에 있게 한 것도 감사하고 내가 어떤 일을 당하든지 항상 감사해야 돼.
왜 우리가 모든 일에 감사해야 되는가? 우리는 어떤 상황이 우리 어떤 상황이 우리 삶에 벌어져도 하나님께서 그것을 계획하시고 인도하시기 때문에 하나님은 그 상황을 통해서 항상 우리에게 가장 최선의 것을 주신다고 하는 것을 우리가 믿기 때문이에요.
왜 우리가 그렇게 믿는가? 그것은 바로 하나님이 우리를 너무나 사랑하신다는 것을 알기 때문이에요.
여러분 그래서 다니엘이 사자굴 속에 들어가는 그 순간에도 그는 이전에 하던 대로 예루살렘을 향해 창문을 열고 그 순간에도 하나님께 무슨 기도를 드렸어요? 감사의 기도를 드렸다고 하는 거예요.
여러분 감사하다고 하는 건 하나님 저는 주님을 믿습니다.
당신을 신뢰합니다. 그리고 이 모든 것을 하나님께 맡깁니다.
이 상황이 벌어지는 것 다 하나님께 맡깁니다.
하나님의 섭리 하에 벌어진다고 저희들이 믿습니다.
여러분 아픔이 오고 고통으로 가득 찬 이 종말 세상에서, 다시 말해 세상의 모든 기쁨과 즐거움이 다 사라지고 있는 이 종말적 세상에서 우리가 어떻게 행복하게 살아갈 수 있는가? 그 답은 하나입니다.
여러분 여러분의 마음의 성전에 예수님을 모셔야 돼요.
여러분 하나님이 우리의 마음에 계셔야지만 우리가 평안할 수 있어요.
그래야 힘이 옵니다. 다시 말해서 하나님께서 여러분의 마음을 지배하시고 통치하셔야지만 우리의 마음이 항상 기뻐할 수 있어요.
그래서 우리가 해야 될 일은 뭔가 하면 수시로 기도하며 우리의 마음 상태를 점검하고 수시로 감사를 고백하며 하나님을 계속 계속 인정하는 범사의 그분을 인정하는 삶을 살아가는 거예요.
그럴 때 그 결과를 어떻게 하신다? 하나님은 계속 우리 안에 들어오셔서 우리의 환경에 관계없이 우리로 하여금 기뻐할 수 있는 삶을 살아가게 해주신다고 하는 거예요.
기뻐하는 거는 우리가 할 수 없어요.
우리는 기도하고 감사하는 거예요. 기뻐하는 건 하나님이 주셔야 돼요.
그죠? 이게 성령의 열매잖아요. 희락이라고 하는.
근데 우리가 스스로 기뻐한다는 건 뭐예요? 기뻐할 수 없는데 막 기뻐하면 어떻게 되는 거예요? 그거는 정상이 아닌 거죠 예 하나님이 주셔야 되는 거예요.
항상 기뻐하는 거
항상 우리의 마음 상태를 점검하며 주님께서 내 마음속에 임지하셔서 나를 통치하시고 지배하실 수 있도록 계속해서 사단의 감정을 물리치고 주님께서 내 안에 승할 수 있도록 우리의 마음의 전쟁터에서 주님이 승리할 수 있도록 계속 주님을 주님께 믿음으로 고백해 드리는 그런 분들이 오늘 이 자리에 계신 모든 분들이 될 수 있기를 간절히 바라겠습니다.
다시 돌아가서 세상에 종말이 다가오며 나타나는 현상 중에 하나는 무엇이다? 의인들의 타락이다.
즉 하나님의 백성들이 다 탈락하는 모습이 보여집니다.
이것이 노화 홍수 직전 창세기를 통해 보여주는 하나의 모습이에요.
그런데 그때 전반적으로 하나님 백성들이 다 무너져 갈 때 그때 그 가운데 남아있는 적은 무리가 등장해요.
오늘날 적은 무리가 있죠. 그들이 바로 누구인가 하면 노아와 무드셀라 라메 같은 인물이에요.
근데 그들이 하나님과 교통하며 이 어두운 마지막 시대를 비추는 기별을 전하면서 시대의 등대 같은 역할을 하고 있어요.
오늘 이런 기별을 우리 집사님이 전해주시는 게 바로 뭐냐 그러면 이 다 어두워진 시대에 진짜 살아있는 말씀을 전하는 그런 역할들을 하고 있잖아요 그렇죠? 그런 분들이 당시에도 있었다고 하는 거예요.
무드셀라, 노아 이런 많은 사람들이 있었고 그 당시에 많은 그리스도인들이 있었지만
정말 어떻게 보면 이 어떤 그런 기별을 전하고 있는 사람이 노아와 몇 안 되는 사람들이었어요.
그런데 노아 홍수 때처럼 계시록에 보면 역사의 마지막에 하나님의 백성이라고 일컫는 교회가 다 타락해서 그러니까 다 달아가는 거예요.
그래서 교회가 계시록 십칠 장에 보면 음료로 변해갈 때 동일하게 그 여자의 남은무리가 등장할 것을 계시록은 예언하고 있습니다.
그들이 바로 오늘 우리들이 되어야 할 사람이 들이라고 얘기하고 있는 거죠 그렇죠? 근데 삼절에 보면 이들의 날은 이들의 날은 이제 백이십 년이 되리라고 하는 그런 기별이 전해지는데 근데 지금 이때가 노아 홍수가 시작되기 전 백이십 년 전 노아의 나이 사백팔십 살이라고 말씀을 드렸습니다.
근데 이때 노아에게 하나님의 계시가 임하였다고 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이때는 아담으로부터 시작해서 천오백삼십육 년이 되는 해에요.
이때로부터 하나님은 세상을 카운팅해서 이제 세상은 백이십 년 후에 종말이 온다고 노아에게 이야기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창세기 6장 3절부터 시작해서 노아 홍수가 터지는 칠장 십일절까지 이 백이십 년 동안의 이야기예요.
이게
육장 삼절부터 시작해서 창세기 칠장 십일절까지가 백이십 년 동안의 이야기가 흘러가는데 여기에 담긴 모든 이야기는 우리가 한 절 한 절 다 빠짐없이 살펴보아야 할 대단히 중요한 이야기입니다.
근데 이 기간에 다 다루지 못하지만 여러분들이 돌아가서라도 철저하게 연구하고 또 연구해야 될 내용이라고 저는 생각을 해요.
그러면 먼저
노아 홍수전 세장의 형편을 또 다른 관점으로 설명하고 있는 사절의 이야기가 나오는데 일절부터 삼절은 교회 형편을 보여주는 거고요.
사절부터 이야기는 세상의 형편뿐 아니라 세상과 동일하게 흘러가는 또 교회의 형편을 보여줘요.
자
사절 같은 여기도 보니까 뭐가 나와요? 하나님의 아들들이 나오죠 그죠? 당시 땅에는 세상에는 내피림이 있었는데 후에도 앞에 있는 벌어지고 있 일 다음에 후에도 하나님의 아들들이 이제 사람의 딸들과 결혼해서 뭐가 만들어지고 있는가 하면 용사들이 만들어져요.
근데 이 사람들이 다 어떤 사람인가 하면 지금 역사에 다 사라졌지만 당시 시대에는 굉장히 명성 있는 오늘날로 말하면 스타들이에요.
스타 영웅들이에요. 이런 사람들이 막 당시에 이름 내는 거예요.
세상에 그 이름 대면 다 알아 그런 사람들이 막 등장했었어요.
여기에 본문에 보면 당시에 땅에는 내피림이 존재했다고 하는데 이 말이 어떤 말인가 하면 내피림이라는 말이 뭐예요? 우리가 거인으로만 알고 있는데 이 단어의 원래 의미는요 언어를 보면 습격자 약탈자 침략자 또 어떤 번역을 보니까 사람을 죽이는 자요.
쳐서 죽이는 자 쓰러트리는 자 이런 의미가 담겨 있어요.
그 히브리어로 히브리어를 헬라오로 번역한 게 칠십인력이라고 하는데 그 역본에는 기간테스라고 하는 단어를 썼는데 거기서 거인이라는 말이 거인이라고 하는 말로 번역되어지기 시작했어요.
그러니까 이 단어는 재림교회 성격 주석을 보면 이 내피림은 육체적인 거인들을 뜻하기 보다는 난폭한 자 또는 폭행자를 가리키는 의미라고 얘기를 해요.
왜냐하면 그 이유가 뭐냐 그러면 재림교회는 뭐가 있죠? 부조화 선지자가 있잖아요.
거기 보면 당시에 인류가 다 어떤 사람들이죠? 거인이잖아요.
아담과 하와도 굉장히 키가 컸잖아요.
오늘날로 보면 전부 다 거인 같은 존재였기 때문에 이 말은 신장보다는 뭐다? 그들의 난폭한 성격을 가리키는 것으로 해석되어지는 게 마땅하다고 하는 거예요.
그래서 내피림의 가장 정확한 해석은 사람을 쳐 죽이는 자 쓰러트리는 자라는 의미라 의미가 가장 올바른 해석이라 그럽니다.
근데 사절에 보면 이들이 고대에 뭐다? 사람을 죽이고 쳐죽이고 하는 사람들이 뭐다? 고대의 용사 명성이 있는 사람 그 시대의 영웅이 되었다고 하는 거예요.
그래서 그 시대에 유명한 영웅들이 전부 누구인가 하면
아주 유명한 살인광들 사람을 몇 명 죽였다.
이게 뭐야? 자랑이에요. 그게 영웅이에요.
그리고 그들의 자랑은 자신이 얼마나 많은 사람을 죽였는가가 자랑이 되는 시대가 어떤 시대다? 노아 홍수 전의 시대라고 하는 거예요.
실제 창세기 사장 이십삼절에 보면 가인의 후손 중에 라메이라고 하는 사람이 쓴 시가 나옵니다.
그 시의 내용이 아시죠? 누군가
내가 누군가로 말미암아 상처를 받았는데 그 상처로 말미암아 내가 사람을 어떻게 했다? 죽였고 내가 상함으로 말미암아 내가 누구를 죽였다? 소년이라고 하는 말은 젊은 사람을 내가 쳐 죽였다고 하는 거야.
그러면 사람을 죽인 것을 찬양하는 시가 성경에 나온 최초의 시에요.
제가 얼마 전 뉴스를 보면서 너무나 충격을 받은 것이 있는데 이게 창세기를 작년에 제가 강의할 때 벌어졌던 뉴스에요.
어떤 고등학생들이 한 연약한 힘없는 아이를 붙잡아 놓고 노예처럼 금품을 갈취하고 재미로 때리는데 온몸이 멍들고 부울 정도로 때리고 또 때리고 그러다 그것도 모자라서 어떻게 하는 건 비닐 랩으로 물고문을 하는데 그걸 지우고 근데 그 아이들이 그것을 즐기며 그 아이가 고통 받는 모습을 보면 막 아파 죽겠다고 막 하는데 노래를 부르고 있어요.
그게 이제 막 촬영 대 나왔어요. 결국 피해자가 그 맞고 맞는 그 아이가 결국에는 그렇게 왔다가 죽는 일이 벌어졌어요.
여러분 사람이 아무리 아프고 고통스럽다고 해도 전혀 동정이 잃지 않는 마음 정말 무서운 거예요.
하나님의 성령이 아무리 아무리 호소해도 들어갈 수 없는 그런 마음 하나님의 성령이 전혀 인간의 마음에 호소할 수 없는 그런 시대 그 시대가 바로 어떤 시대였다? 노아 수전 시대였다고 하는 거예요.
여러분 근데 오늘날이 그런 시대가 되어가고 있다고 하는 사실을 잊어서는 안 된다고 하는 사실입니다.
근데 문제는 이런 무서운 세상에 죄를 견제할 수 있는 세력이 사라진 거예요.
다시 말해 세대 후손들이 하나님의 아들들도 하나님의 은혜로 기도로 문제를 해결하지 않고 세상 사람들과 똑같이 폭력을 쓰고 힘을 쓰고 세상적인 힘을 의지하여 살아가고 있었다고 하는 이야기가 나오는 거예요.
심지어 여기 보니까 이 사람들이 누구예요 이 용사들이 누구예요? 하나님의 아들들과 사람의 딸들이 결혼해서 낳은 아이들이에요.
전부 다 어떤 사람들이
복음을 받아 알고 있는 사람들이잖아요.
근데 이 사람들이 세상보다 더 악하게 복수하며 살았을지도 몰라요.
오늘날 우리가 악해지면 육신적 그리스도인으로 살면 세상 사람들보다 더 못하게 살 수 있는 거예요.
속은 완전히 무너져 있지만 겉으로는 착한 적, 선한 척 하지만 안 보이는 데서 온갖 나쁜 짓 다 하고 살 수 있어요.
완전히 철저하게 위선으로 살 수 있어요.
복음을 받아들이지 않고 교회만 다니고 있다고 하면
이게 바로 뭐예요? 바리새인들이었잖아요.
심지어 가장 거룩하신 예수님, 가장 사랑한 사랑스러운 의로운 분이었던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 박아 죽인 사람들이 누구인가 하면 교회를 다니는 사람들이었다고 하는 것이 그래서 이 경건이 상실된 시대, 이 사회 안에 진리가 살아있는 모습을 거의 찾기 어려운 시대, 죄에 대한 분명한 경고의 음성을 발해줄 진리의 세력이 무너지고 있던 그 시대가 바로 노하우 전의 시대였다고 하는 것입니다.
세상이 이렇게 악해져 가고 있지만 모든 교회가 지금은 다 힘을 잃고 빛을 잃고 있습니다.
그 이야기가 바로 사절에 하나님의 아들들의 자녀들이 모두 뭐로 변했다 내 피림으로 변해버렸다고 하는 이야기 속에 내포되어져 있는 중요한 기별이라고 하는 것이 여러분 이 이야기가 부조한 자의 몸은 담겨 있습니다.
범죄와 비참하고 불행한 일이 신속하게 증가하였다.
결혼 관계나 재산의 소유권도 존중되지 않아 누구든지 이웃의 아내나 소유물이 탐이 났을 때 누구든지 폭력으로 빼앗았으며 사람들은 그의 난폭한 행위를 어떻게 했는가 하면 의시대며 자랑했다.
제가 한 얘기들이 그대로 나오고 있죠 그게 자랑의 시대에요.
불륜을 자랑하고 육체의 폭력적인 힘을 자랑하는 시대 그들은 동물을 죽이는 일을 낙으로 삼았다.
그리고 육식을 함으로 음식물에 대한 얘기가 나오고 있어요.
그들은 더욱더 잔인하고 피에 굶주리게 되었다.
그리하여 마침내 그들은 인간의 생명을 놀랍도록 대수롭지 않게 여기게 되었다.
세계는 그 초기에 있었으나 죄악은 매우 깊고 널리 퍼져서 하나님께서 더 이상 그것을 참을 수 없으셨다.
이게 부조화 선지자 92페이지에 나오는 이야기입니다.
다시 말해서 사회가 점점 더 악해져가면서 점점 더 많은 내피린들이 등장하고 있었고 세상은 더욱더 잔인해져 가고 있었고 오늘날로 말하면 사이코패스가 점점 더 늘어가는 거예요.
아무 이유 없이 기분 내키는데 사람을 죽이는 거예요.
그 시대가 노하우 전의 시대라고 하는 거예요.
예 이게 교육으로 막을 수 있습니까? 못 막아요.
그런데 이런 세상의 장면들을 하나님께서 하늘에서 쫙 보시는 거예요.
그리고 그때 세상을 바라보시는 하나님의 마음이 이러하셨다고 모세가 이렇게 적고 있습니다.
창세기 육장 오 절부터 칠절 말씀을 같이 한번 읽어보겠습니다.
여왕께서 사랑의 사람 이 세상에 가득함과 우리의 마음으로 생각하는 모든 일을
세까지 그리하니 이는 내가 그것을 지었음을 하나
이때 세상이 완전히 타락할 때 사람들의 마음이 항상 악해져 가며 하나님으로부터 멀어져가는 그때 팔 절에 보면 누가 등장하는가 하면 노아가 등장합니다.
근데 노아에 대한 기록이 나오는 거예요.
완전히 앞에는 어둡죠 칠절까지는 완전히 어두워요.
세상에 하나님의 아들들도 다 타락하고 있어요.
근데 팔 절에 노아는 여호와께 은혜를 입었더라.
구절 이것이 노아의 족보이라 노아는 의인이요.
당대 그 시대에요. 완전한 자라고 하나 너무나 귀한 기록 아니에요 그리고 복음으로 어떻게 변해질 수 있는지를 보여주는 너무너무 귀한 기록이에요.
우리가 믿음으로 살게 될 때 어떤 모습이 나타날 수 있는지를 보여주는 너무나 귀한 기록이에요.
그리고 그는 어떻게 했다?
하나님과 동행하였다 육체의 본성을 완전히 다 믿음으로 정복하고 하나님과 동행하고 있었다고 하는 거야.
근데 이 내용은 앞절의 상황과 전혀 다른 스토리가 노화를 통해 시작되고 있어요.
그러니까 앞에서 등장하는 세상 모든 사람들이 끌려가고 흘러가는 그 방향과 정반대에요.
그 사람보다 조금 나은 게 아니에요.
완전히 다르게 가는 거예요. 예 다르게 행하고 있는 사람이 바로 누군가 하면 노아라고 하는 거예요.
여러분 세상은 항상 악해져 가고 있는데 그들은 하루 종일 어떤 생각에 사로잡혀 있어요.
악한 생각만 하는데 노아는 하나님과 동행하는 생각으로 하나님과 같은 생각으로 주님의 마음을 계속 받으며 그 생각으로 꽉 차 있는 거예요.
하루 종일 생각하는 게 뭘까요? 하나님의 품성 예수님의 사랑 그 다음에 성령이 나에게 말씀하시는 게 뭘까? 오늘 나에게 말씀하신 하나님의 뜻이 무엇일까? 항상 기도하고 항상 감사하고
주님 제가 이 이렇게 기쁨이 전혀 사라진 이 시대에 이 무시무시한 시대 시대에 여호와로 말미암는 기쁨이 충만한 사람으로 살아가고 있었다고 하는 거예요.
세상은 온갖 음란과 쾌락에 파묻혀 살아가고 있는데 전혀 다른 의로운 삶을 살아가고 있었다고 하는 거예요.
다시 말해 그는 그 시대를 거스를 수 있는 힘과 파워를 가지고 있는 거예요.
세상을 정복하며 살아가는 사람이 그래서 이 둘 사이의 구분이 완전히 지어질 정도로 완전히 다르게 열매가 나타나고 있어요.
여러분 창세기 3장 15절로 돌아가서 세상은 두 무리로 나누어진다고 했죠? 다시 말해서 오늘 내 안에 복음의 씨가 있다면 정확하게 말하면 그리스도께서 말씀을 통해 내 안에 넣어준 그 씨가 있다면 다시 말해 그것이 믿음을 통해 내 안에 담겨 있다면 아니면 반대로 사단이 넣어준 씨를 품고 살아가고 있다면 그 씨가 어떻게 된다?
자랑하고 성장해서 주님이 오신 날 완전히 드러난다고 하는 의로운 자는 그대로 이렇고 악한 자는 그대로 악해지는 완전히 열매 맺는 날이 온다고 하는 거예요.
그게 왔잖아요. 지금 오고 있는 거예요.
그래서 이게 하나님의 인과 짐승의 표로 구분되어질 날이 온다고 하는 거예요.
오늘 오전에 들은 말씀처럼 하나님의 진리를 하나님의 품성으로 나타낼 때가 온다고 하는 거예요.
그래서 여러분 오늘 내가 어떤 씨를 담고 살고 있고 내가 어디에 반응하며 살아가고 있는지 우리의 마음 상태를 계속 점검해야 돼.
우리 영적 수신기를 계속 바르게 세워야 돼.
그게 바로 뭔가 하면 건강 기별도이잖아요.
우리가 건강식을 해야 되고 그다음에 우리가 진짜 채식을 하고 그렇게 해야 될 이유가 뭔가요? 우리의 영적 수신기를 더욱더 예민하게 하기 위해서 그렇게 하는 거예요.
여러분 어쩌면 노아는 계시록 십이장 십칠절에 나오는 하나님의 계명을 지키며 예수의 증거를 가지고 이제 바다 모래 같은 이 용의 후손들
다시 말하면 사단의 후예들 이 사람들과 더불어 싸워야 하는 여자의 남은 자손이에요.
근데 그가 용과 더불어 싸우면서 해야 될 일이 무엇인가 하면 하나님께서 구체적인 일을 지시합니다.
뭐를 하라? 세상을 구원할 방주를 지으라고.
이게 이제 오늘 저녁에 이제부터 조금 더 디테일하게 나눌 말씀인데요.
오늘 우리도 마찬가지로 이 세상을 구원할 구원의 방주를 지워야 할까요? 여러분 방주를 지으면서 그 망치 소리에 세상 사람들이 전부 다 종말이 오고 있다는 소리를 들었어요.
저 사람이 산 꼭대기에서 방주를 짓고 있잖아요.
실제로 살고 있어요. 진리대로 살고 있어요.
순종하면서 세상 사람들이 우리가 전하는 기도를 통해 우리가 살아가는 삶을 통해서 세상에 종말이 오고 있다고 하는 소리를 들어야 돼.
우리가 그렇게 살아야 한다고 하는 그리고 그가 짓고 있는 그 방주를 보면서 세상 사람들이 그리스도 안에서의 피난처를 발견한 것처럼 저렇게 살면 믿음으로 살면 어떻게 된다? 우리의 마음이 평안을 얻고 우리의 이 불행한 마음들을 해결할 수 있는 구원자가 계시다고 하는 것을 믿고 그리고 그리스도 안에 피난처를 발견했던 것처럼 오늘 우리도 지금 이 시대 세상 사람들에게 종말이 올 때 우리가 머물고 있는 이 믿음의 삶을 통해 이 진리 안에 들어올 때 그리스도 안에 피난처가 있음을 알려줘야 한다고 하는 것입니다.
근데 무엇이 노아로 하여금 그렇게 악한 시대에 하나님과 동행하게 만들었을까요? 다시 창세기 삼장 십오절을 생각하면 너 노아는 무엇을 받아들인 사람이다? 복음을 받아들인 사람인데 그래서 그는 십자가의 사랑이 그를 강건하고 있는 사람이고 그래서 그는 하나님과 동행하며 하나님께 순종하는 사람입니다.
그리고 그는 선교사로 살아가는 사람이에요.
그렇죠?
근데 여기서 창세기 삼장 십오 절에 복음을 받아들인 자를 설명하는 또 하나의 특성이 설명되어지고 있는데 이 팔 절에 보면 어떤 얘기가 나오죠? 노아는 하나님의 은혜를 받은 자라고 하는 이야기가 나와요.
무엇으로? 하나님 말씀으로 복음을 받아들임으로 이 하나님의 은혜가 그를 당대 완전한 자로 의인으로 그리고 하나님과 동행하게 만들었다고 합니다.
그럼 여기서 하나님의 은혜가 무엇을 말하는지 이거 한 가지를 오늘 제일 중요한 핵심이니까 이거 하나만 우리가 듣고 기도의 시간을 갖도록 하겠습니다.
이 하나님의 은혜가 뭘까 생각을 해야겠죠 이게 이 구절을 기점으로 해서 노아의 삶이 달라졌어요.
이 구절로 말미암마 노아가 그 시대를 역행했다고 하는 거 이 규절은 굉장히 귀한 기절이겠죠 그러나 노아는 앞에 이렇게 이렇게 해왔는데 그러나 노아는
여러분 삼절부터 칠절에 보면 하나님께서 가라사데 하나님 말씀이 나오는데 이것은 누구에게 이러시는 걸까요? 생각해보세요.
이것은 그 시대에 하나님과 교통하는 선지자였던 노아에게 말씀하시는 거예요.
물론 이 창세기는 모세가 적었지만 노아가 하나님 말씀을 다 든 거예요.
그렇죠?
하나님은 이제 내가 창조한 사람을 세상에서 멸망시킬 수 밖에 없다는 것을 노아에게 알립니다.
하나님이 가라사데 이 말씀을 노아가 들어요.
그 본문의 구조를 가만히 보면 이 이야기를 다 듣고 난 다음에 노아는 여호와께 어떻게 되었다? 은혜를 입었다고 하는 결론이 나오는 문맥이 그렇게 돼있어요.
예 그런데 하나님께서 노아에게 들려주신 이 이야기가 무엇일까요? 그 시대를 구원하기 위해서 주님께서 주신 하나님의 말씀이요.
이거를 저는 오늘날로 해석하면 영원한 복음인 현대 진리예요.
근데 그 진리가 다시 말해 그 은혜 은혜가 노아로 하여금 당대 의인이 되게 하고 완전한 자가 되게 하고 그 은혜가 그 진리가 그로 하여금 하나님과 동행하게 하였다고 하는 게 이 문명의 구조에요.
분장의 구조를 보면 그렇게 나옵니다.
그래서 노아로 하여금 하나님과 동행하게 만든 그 결과는 그 시대에 주신 그 하나님의 말씀 그 진리의 말씀을 그가 듣고 믿음으로 받아들이고 삶의 법칙으로 삼고 그렇게 살아가기로 결심할 때 그 결과 노아가 하나님의 은혜를 입었던 어떤 그런 말씀으로 나오는 거예요.
또 하나
히브리 원문에 가장 가깝게 번역한 킹 제임스 버전에 보면 이 창세기 6장 8절은 노아가 여호와께 은혜를 입었다는 이 말을 어떻게 번역하고 있는가 하면 여기 보면 노아가 하나님의 눈 속에서 은혜를 발견했다고 하는 식으로 번역되어져 있어요.
노아가 발견했다 무얼 발견했다 은혜를 발견했다.
어디에서? 주님의 눈속에서 이렇게 킹 제임스 원문 번역에 보면 그렇게 나와요.
노화가 주어요. 여기서는 다시 말해 노아는 다른 사람들이 보지 못하는 이 하나님의 은혜를 노아는 하나님의 눈속에서 보고 있었다고 하는 거예요.
그러니까 노아는 계속 하나님의 눈 속에서 그 은혜를 바라보며
그 시대의 죄악을 이기고 불순종을 넘어서 하나님과 동행하며 마침내 당대 그로 하여금 의인이 되게 만들었다고 하는 거예요.
근데 노아가 발견한 그 하나님의 눈속에 있는 그 은혜는 도대체 무엇일까 그것을 설명해주는 것이 바로 하나님의 말씀이에요.
이 말씀을 듣고 그가 그 하나님의 눈속에서 은혜를 보기 시작하는 거예요.
예 오 절 육절에 보면 이게 다 노아에게 들려주신 말씀이거든요.
하나님께서 땅 위에 사람 지셨음을 한탄하고 슬퍼하며 이르시되 노아에게 뭐라고 하시는가 하면 넘겨주세요 피피티 이르시되 노아에게 내가 이제 세상을 이제 창조한 모든 사람들을 내가 세상에서 멸망시킬 수 밖에 없다는 것을 노아에게 알렸다고 하는 이야기가 나와요.
근데 이 이야기를 노아에게 말씀하시면서 육절에 보면 하나님은 땅 위에 사람 지셨음을 한탄하고 근심하셨다고 하는데 이 근심하다고 하는 이 단어를 실제 원어는
히브리어로는 아짜부라는 단어를 써요.
근데 이 단어 하나하나를 제가 원어 프로그램을 다 디지에 다 봤어요.
이게 도대체 어떤 의미인지를 근데 이 단어의 의미는 조금 번역이 제가 번역했으면 조금 아쉬워요.
이 단어의 의미는 어떤 의미인가 하면 고통으로 가득 차서 보통으로 꽉 찼어요.
가득 차서 비통행하며
정확하게 말하면 통곡하며 눈물을 흘리는 모습을 표현할 때 이 단어를 사용해요.
가장 슬플 때를 표현하는 단어에요 이 아자부라고 하는 단어가 그러니까 이 단어를 통해서 창세기 육장 오 절부터 칠절까지의 내용을 다시금 재해석하면 하나님께서 인간이 타락해 갈 때 이제 이 땅에 사람 지으셨음을 후회하며 이제 이 인간 쓰레기들을 막 청소하듯 쓸어버리려고 하는 것이 아니라 마치 하나님은
이 하나님의 형상대로 창조한 너무나 귀한 자신의 자식들이 죄로 더럽혀져 가고 망쳐가고 불행해져가고 멸망해가는 그 모습을 모시고 슬퍼하는 그 아버지의 마음을 통곡하는 그 하나님의 마음을 노아는 어떻게 하였다? 보았다고 하는 거예요.
뭐 하면서 말씀을 들으면서 오늘 우리가 시대의 소망을 읽고 성경을 읽고 할 때마다 이 마음을 봐야 돼요.
하나님이 얼마나 인류를 사랑하시는지 그 마음을 가슴 터지도록 봐야 돼요.
그렇게 당신의 생명을 바쳐서 그들을 구원하시고자 하시는데 그 모든 은혜를 다 거부하고 이제 영원한 멸망이 확정되어져 가는 그 인간들을 바라보며 슬퍼하며 통곡하는 그 하나님의 사랑의 눈물을 노아는 매일 매 순간 보고 있는 거예요.
뭘 통해서? 말씀을 통해서 계속 보고 느끼고 있는 거예요.
더 이상 책망할 수도 없고 이제 더 이상 사랑할 수도 없는 이제 영원히 자기의 기억에서 지워야만 하는 그 영원한 이별의 아픔을 앞둔 하나님의 마음을 노아는 계속 봤다고 하는 거 실제 살아가면서 현실 속에서 매일 보는 것처럼 그렇게 살아가고 있는 거
여러분 제가 이렇게 생각하게 된 이유의 근거가 뭐냐? 그러면 아짜무라고 하는 단어가 사무엘라 십구장 이 절에 보면 다윗이 그 압살롬이 죽은 후에 그 다윗이 그 아들을 위하여 슬퍼한다고 할 때 이 슬퍼하다고 하는 단어가 무슨 단어인가 하면 아잡으라는 단어예요.
그러니까 어떻게 번역을 해야 될까?
하나님께서 세상에 사람들이 항상 악해져 갈 때 이 나쁜 놈들 하는 게 아니라 어떻게 하고 있다 그들을 향해서 너무너무 안타까워 하시면서 통곡하고 있는 거예요.
그거를 표현하기 위해서 히브리어로 그렇게 번역을 쓴 거예요.
원어에는 그렇게 담겨 있는 거예요. 자식의 죽음을 앞에 두고 다윗이 깊이 슬퍼할 때 그때 사용한 단어가 바로 얕잡으라고 하는 것입니다.
근데 그 슬퍼함이 하나님의 마음에 지금 있다고 성경은 이야기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 하나님의 사랑이 노아의 마음에 부어지게 될 때
이 사랑을 노아가 노아는 마치 하나님의 눈속에 흐르는 눈물처럼 느끼며 보며 살아가고 있었다고 성경은 표현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노아가 그냥 방주를 지은 것이 아니에요.
이걸 통해서 노아가 방주를 지은 걸 생각해보면 이 하나님의 마음 그 인류를 구원하시고자 발을 동동 구르며 안타까워하시는 그 하나님의 사랑의 마음을
그 통곡하며 눈물을 흘리는 그 사랑의 마음을 느끼고 바라보며 노아가 하나님 어떻게 하면 좋을까요? 주님을 도와서 제가 어떻게 살면 좋을까요? 방주를 지으라고 하니까 얼마나 열심히 방주를 지었겠어요 그죠? 그렇게 순종하는 거예요.
하나님이 원하시는 거 저도 원해요 그렇게 살고 싶습니다 하는 거예요.
주님과 동행하는 거예요. 방주를 당시에 지으라고 하는 건 어떤 일이에요? 세상과 완전히 등지고 살라고 하는 건 한 번도 비가 내린 적이 없는데 산 꼭대기에다 방주를 짓고 사람들을 구원하라고 하는데 어떻게 순종할 수 있습니까?
그 순종이 가능한 이유는 뭔가 하면 그가 날마다 하나님의 눈 속에 있는 그 사랑을 보며 살아갔기 때문이라고 하는 이 하나님의 마음으로 그 사랑으로 인류를 한 명이라 더 구원하기에 방주를 짓는 일을 의무적으로 순종하는 것이 아니라 스스로 기쁘게 자원하여 방주를 짓게 되었다고 하는 거예요.
여러분 그래서 노아가 순종하는 이 순종은 이렇게 이루어진 순종이라고 하는 걸 기억해야 돼요.
하나님의 은혜가 부어지니까 순종이 이루어지는 거예요.
가장 불가능한 순종이 이루어지는 거예요.
그 은혜라는 게 무엇이다? 하나님의 눈속에 흐르는 그 사랑을 보는 거예요.
오늘 말씀을 통해서 날마다 날마다 우리가 배우고 느껴야 될 것은 바로 뭔가 하면 그 하나님의 사랑이에요.
그것을 믿음으로 말미암아 우리가 순종하며 살아가는 것입니다.
여러분 그 사랑이, 그 은혜가, 그 진리가, 그 하나님의 말씀이 노화로 하여금 그 시대와 다르게 살게 만든 것입니다.
여러분 오늘 우리도 이 마지막 시대에 노아처럼 살기 위해서 오늘 우리도 나를 위해서
그리고 내 이웃을 위해서 지금 인류가 죽어가는 인류를 구원하기 위해 흘리시는 그 사랑의 흐르는 눈물을 오늘 우리도 볼 수 있게 되기를 간절히 바라겠습니다.
이 창세기에 하나님은 지금 우리를 구원하시기에 동일하게 눈물을 흘리시는 그 하나님이라고 하는 것입니다.
마치 예루살렘 도성이 멸망 직전에 있을 때 주님께서 어떻게 아셨습니까? 암타기 자기 그 품으로 그 모든 새끼들을 모으기 위해서 막 그렇게 애쓰시면서 눈물을 흘리시는 것처럼 그렇게 오늘 동일하게
그 예수님께서 우리를 사랑하시며 우리를 구원하기에 애쓰신다고 하는 사실을 꼭 깨달으시고, 오늘 이곳에서 들려지는 모든 복음의 기별들이 여러분의 마음속에 담겨져서 그 사랑으로 이 마지막 시대에 세상의 모든 기쁨이 사라지는 그 시대 하나님께 감사하며 행복하고 기쁘게 살아갈 수 있는 복음의 능력을 우리 모두가 체험할 수 있게 되기를 간절히 바라면서 오늘 말씀을 드리도록 하겠습니다.
하늘 아버지 우리는 너무나 어둡고
너무나 그 하나님의 사랑을 조금밖에 느끼지 못하고 있는 그런 존재들입니다.
그러므로 말미암아 우리에게 부여하신 그 모든 순종이 너무나 버겁고, 우리에게 말씀하시는 그 모든 것들이 아직도 우리에게 정말 노아처럼 기쁘게 순종되어지지 않는 그러한 우리의 형편을 주님 극렬히 여겨주시옵고,
주님이 이곳에 머무는 동안 우리의 영안이 열려서 성령을 통해서 우리의 마음에 풍성하게 구워지는 그 하나님의 사랑을 우리가 느끼고 깨달을 수 있도록 도와주셔서 오늘 우리도 노아가 그 말씀을 통해 하나님의 눈속에 흐르는 그 하나님의 눈물을 보았던 것처럼, 그 사랑을 보았던 것처럼
우리도 그것을 보며 살아갈 수 있는 믿음의 사람들로 다 거듭날 수 있도록 주님 도와주시옵소서.
기도할 때마다 주님 부어주시고 주님 말씀을 들을 때마다 우리에게 들려주셔서 하나님의 사랑으로 풍성한 그런 이 기간이 될 수 있도록 도와주시옵소서.
주님 저희들이 무릎 꿇고 기도할 때 주님 저희들에게 말씀하여 주시고 하나님의 뜻과 그 사랑이 더욱 분명하게 보여지는 이 기도의 시간 될 수 있도록 축복해 주시옵기를 예수님 이름으로 기도드렸습니다.
아멘.
https://youtu.be/kYWXs3EjFlo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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