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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2과 하나님을 공경하라
레 10:1~11, 20:1~5, 24:10~16,23, 26:2
기억절
“그러므로 우리가 진동치 못할 나라를 받았은즉 은혜를 받자 이로 말미암아 경건함과 두려움으로 하나님을 기쁘시게 섬길지니 우리 하나님은 소멸하는 불이심이니라”(히 12:28,29).
그대와 하나님과의 관계는 무엇보다도 중요하다
하나님께서는 창조주이시며 모든 생물이 다 그 은혜 아래 존재하고 있다는 점에서 공경을 받아 마땅하다. 우리는 경건함으로 그분께 나아가며 경외함으로 그분을 섬기는 법에 대하여 깨달아 아는 것을 우리의 생애에서 가장 우선적인 것으로 삼아야 한다.
개관: 하나님을 공경하라
레 10:1~ll | 레 20:1~5, 26:2 | 레 24:10~16, 23 |
거룩한 직무 | 영적 예배, 안식일, 성소 | 경건한 말 |
마음과 성품과 뜻을 다하여
예수님께서는 “율법과 선지자”(마 22:40)에 대하여 두 원칙을 말씀하실 때 첫 번째 원칙은 신명기 6장 5절을, 두 번째 원칙은 레위기 19장 18절을 그 근거로 삼으셨다. 신명기 6장 5절에는 “너는 마음을 다하고 성품을 다하고 힘을 다하여 네 하나님 여호와를 사랑하라”고 기록되어 있다. 레위기에는 이 내용 그대로는 아니나 동일한 진리가 나오고 있다.
우리는 하나님과 그 아래 속한 것에 대하여 경의를 표해야 한다. 이 사실은 출애굽 기간 중 일어났던 두 사건 속에서 명료하게 예시되고 있다. 이 가운데 하나는 두 제사장 곧 아론의 아들 나답과 아비후와 관계된 사건이었다. 이들은 하나님께서 십계명을 반포하신 뒤 모세, 아론, 그리고 칠십 장로와 함께 시내 산에 올라가 그 영광을 보았으며, 그 앞에서 언약의 식사를 했었다(출 24:1, 8~ll 참조). 그런데 훗날 이 두 사람은 성소에서 불경스러운 행동을 하여 죽고 말았다. 하나님께서는 백성을 다루시는데 있어 차별을 보이지 않으신다. 또 하나는 이방인 남자와 결혼한 여인에게서 태어난 아들과 관계된 사건이었다. 그의 이름은 알려져 있지 않다. 그의 아버지는 애굽 사람이었고 그의 어머니는 이스라엘 사람이었다. 그는 다투던 중 사람들 앞에서 주님의 이름을 비방하고 저주하였다. 하나님께서는 그를 돌로 쳐 죽이라고 명하셨다.
하나님께서는 인자하시며 거룩하시다. 그분으로부터 창조 받은 존재들은 그분의 임재 앞에서 경의를 나타내어야 한다. 그분께서 거룩하신 것처럼, 그분을 섬기는 것과 관계된 모든 것 - 안식일, 예배당, 교회 예배의식 - 역시 거룩하다. 이번 주 교과에서 우리는 하나님과 그 아래 성별된 것에 대하여 보다 더 공경의 예를 갖추도록 배우게 될 것이다.
거룩한 직무(레 10:1~11)
레위기에는 두 가지 역사적 사건이 전반부와 후반부에 각각 하나씩 기록되어 있다. 첫 번째 사건은, 새로 성별된 제사장 가족이 거룩한 직무를 행하던 첫날에 일어난 비극적인 것이었다.
아론의 맏아들 나답과 둘째 아들 아비후는 어떤 행동을 하여 하나님으로부터 즉시 형벌을 받았는가? 왜 심판이 그토록 신속하고 가혹했는가?(레 10:1,2).
답:
나답과 아비후는 아론과 그들의 두 형제와 함께 이스라엘 나라에서 가장 성스러운 직무를 맡았다. 그들은 거룩하신 하나님과 그 백성 사이에서 중재자의 역할을 했다. 그들은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바로 그 백성으로서의 본을 이스라엘 앞에 보여야 했다. 그러나 그들은 가인처럼 하나님의 교훈과 반대로 행하였다. 그들은 번제단 위의 신성한 불이 아니라 속된 불에서 숯을 취하여 분향했던 것이다(레 16:12 참조). 그들은 또한 지성소에 들어가려 했었을지도 모른다(레 16:1,2 참조).
하나님의 대변자 모세는 그 직접적인 심판에 대하여 어떻게 설명했는가? 그의 말은 오늘날 거룩한 직무를 맡아 일하는 이들에게 어떤 의미가 있는가?(레 10:3).
답:
하나님의 선택을 받은 사람들은 보다 더 잘 알아야 한다 “모세의 말은 이처럼 쉽게 풀이할 수 있다. ‘하나님께 가까이하면 할수록 그 신성성과 영광에 대하여 더욱더 주의를 기울여야한다.’ 그의 말의 이면에는 대제사장의 아들들이 그처럼 주제 넘는 행동을 하지 말고 보다 잘 알았어야 했다는 의미가 담겨 있다. … 이스라엘의 모든 지도자들 중 가장 위대한 지도자였던 모세 역시 하나님의 명을 어겨서, 즉 ‘너희가 나를 믿지 아니하고 이스라엘 자손의 목전에 나의 거룩함을 나타내지 아니한 고로’(민 20:12) 그의 평생의 소원을 이루지 못하였다”(G. J. 벤햄, 레위기. Grand Rapids Mich.: William B. Eerdmans Publishing Company, 1979, 156).
“진리를 가르치는 교사들 중 그리스도의 학교에서 첫번째 교과를 배워야 할 필요가 있는 이들이 있다 목사들은 그 마음 가운데 하나님의 감화시키시는 능력을 지니고 있어야 한다. 그렇지 않다면, 그들은 다른 일을 찾아야 할 것이다. 만일 그리스도의 대사(大使)들이 사람들에게 진리를 증거 하는 것에 대하여 그 엄숙성을 인식한다면, 그들은 진지하고 사려 깊을 뿐 아니라 하나님과 함께 하는 일꾼들이 될 것이다. 만일 그들이 그리도께서 제자들에게 맡기신 임무를 바르게 알고 있다면, 그들은 경건한 마음으로 하나님의 말씀을 펴서 그 교훈을 듣고, 하늘의 지혜를 구할 것이며, 또한 죽은 자와 산 자 사이에 서서 그들이 한 일에 대하여 하나님 앞에서 회계해야 할 것을 깨달을 것이다”(목사들에게 보내는 증언, 142).
두 제사장이 그처럼 주의 없이 제사 의식을 시작했을 때, 그들의 신체적 상태는 어떠했었는가?(레 10:8~11).
답:
랍비 전설에 의하면, 나답과 아비후는 술에 취하여 모독 행위를 범하였다고 한다.
“나답과 아비후가 술을 마셔서 얼마큼 취하게 되지 않았더라면 그 치명적인 죄를 결코 범하지 않았을 것이었다. 저들은 하나님의 임재하심이 나타났던 성소에 나오기 전에 주의 깊고 엄숙만 준비가 필요한 것을 알았다. 그러나 저들은 부절제로 인하여 거룩한 직무를 수행할 자격을 잃어버렸다. 저들은 정신이 혼란하게 되고 도덕적 식별력이 둔하여 져서 신성한 것과 속된 것의 차이를 통찰할 수 없었다”(부조와 선지자 상권, 477).
왜 아론과 그의 남은 두 아들 엘르아살과 이다말은 나답과 아비후 죽음에 대하여 어떠한 슬픔의 표시도 해서는 안 되었는가?(레 10:6,7)
답:
어떤 사람들이 잘못을 하여 견책이나 형벌을 받아야 할 때, 만일 우리가 그들의 불평에 대하여 동정을 보인다면, 어떻게 우리는 그들에게 상처를 입히는 것이 되는가?
답:
“여호와께서는 다른 사람들이 두려워하도록 그분의 백성에게 그분의 징계의 공의로움을 깨닫도록 가르치고자 하셨다. … 죄를 변명하는 데 노력하는 죄인에 대한 저 거짓된 동정심 위에 하나님의 책망이 있다. 도덕적 지각력을 무디게 하는 것은 죄의 영향이요, 그래서 악을 행하는 사람은 위반의 중대성을 깨닫지 못한다. 그리고 성령의 능력에 대한 인정 없이는 그는 영구히 그의 죄에 대하여 눈이 어두운 가운데 남는다. 이 잘못을 저지르고 있는 사람들에게 저들의 위험을 보여 주는 것은 그리스도의 종들의 의무이다. 죄의 참 성질과 결과에 대하여 죄인들의 눈을 어둡게 함으로 경고의 효과를 없이 하는 사람들은 저들의 동정의 증거를 나타낸 것같이 스스로 아첨한다. 그러나 저들은 하나님의 성령의 역사를 직접 반대하고 방해하는 일을 하고 있다. 저들은 죄인을 멸망의 벼랑 위에서 쉬도록 달래고 있다. 저들은 스스로 그의 죄의 분담자가 되어, 그가 회개하지 않는 데 대한 무서운 책임을 부르고 있다. 많고 많은 사람들이 이 거짓되고 기만적인 동정의 결과 멸망으로 달려갔다”(부조와 선지자 상권, 476,477).
(생각해 봅시다) 하나님께서는 그분의 법과 명령을 소홀히 여기는 것에 대하여 이스라엘 백성에게 죽음의 형벌을 내리셨다. 만일 우리가 오늘날 그분의 법에 욕을 돌린다면 우리는 어떤 형벌을 받겠는가?
영적 예배(레 20:1~5, 26:2)
이스라엘은 가나안에서 생활하면서 줄곧 어떤 유혹을 받았는가? 그 유혹은 오늘날도 계속하여 그리스도인을 괴롭히고 있는가?(레 18:21, 20:1~5; 요일 5:21과 비교).
답:
우상 숭배는 대개의 경우 잔인하고 퇴폐적인 데도 불구하고 시내에서부터 바벨론 포로 기간 때까지 이스라엘 백성에게는 끊임없는 유혹 물이었다. 마음으로 우상을 숭배하는 일(겔 14:3 참조)은 아담 때부터 지금까지 유혹물이 되고 있다. 첫째 계명은 언제나 나 외에는 다른 신들을 네게 있게 하지 말지니라(출 20:3)고 하며 헌신과 재 결단을 내리도록 촉구한다.
애정의 첫째 자리. “영원하시고 자존하시고 창조 받지 않으신 한분, 만물의 근원이시요, 보전자(保全者)이신 여호와께서 최고의 존경과 예배를 받으실 유일한 분이시다. 사람은 어떤 다른 대상물에게도 저들의 애정과 봉사 첫째 자리를 주는 것이 금지되어 있다. 하나님께 대한 우리의 사랑을 감소시키거나 마땅히 그분께 드릴 봉사를 방해하는 것을 우리 마음속에 품으면, 그것을 우리가 신으로 만드는 것이 된다. … ‘나 여호와 너의 하나님은 질투하는 하나님이’시다. 하나님과 그분의 백성의 친근하고 신성한 관계는 결혼 형태로 표현되어 있다. 우상 숭배는 영적 간음으로서 그것에 대한 하나님의 불쾌는 적합하게도 질투라고 불리었다”(부조와 선지자 상권, 399,400).
하나님께서는 우상 숭배를 하지 말도록 거듭 명령하시는 것 외에 그리스도인들을 위하여 특별한 의미를 지닐 어떤 두 가지 명령을 더하셨는가?(레 26:1,2, 19:30과 비교)
답:
안식일은 하나님을 창조주로 가리킨다. 성소는 오늘날 교회에서 복음이 가리키는 것처럼 하나님을 구속주로 가리킨다. 만일 우리가 안식일을 준수하지 않고 교회에 참석하지 않는다면 우리는 하나님을 잊어버리게 될 것이다.
하나님께서는 출애굽기 31장 13~17절에서 오늘날 영적 이스라엘(교회)에게도 여전히 적용되는 안식일에 대한 어떤 세 가지 중요한 진리를 강조하셨는가?
13, 14절
15, 16절
17절
안식일 계명-인(印). 넷째 계명은 십계명의 첫째 판을 종결짓는다. 첫 네 계명은 창조주에 대한 우리의 의무에 초점을 맞추고 있다. 첫째 계명은 십계명의 인과 같은 역할을 하며, 십계명을 명한 권위로 하늘과 땅의 창조주를 제시한다. 출애굽기 31장은 안식일의 세 측면에 대하여 강조하고 있다. 안식일은 (1) 죄로부터 거룩하게 하시는 하나님의 능력의 표징이며, (2) 만물을 창조하신 하나님의 능력의
표징이며, (3) 하나님과 그 백성 사이의 언약 관계의 표징이다. 죄인들이 거룩하게, 즉 죄에서 벗어나게 되는 것은 새 생명으로 재창조하시는 하나님의 능력을 통해서이다(시 51:10; 고후 5:17 참조). 안식일 준수를 통하여 신자는 구속주를 바라보게 되고 인류 가족이 하나님의 손에 의하여 창조된 것을 기억하게 된다. 그리고 안식일은 언약 관계를 일깨워 준다. “나는 … 너희 하나님이 되고 너희는 나의 백성이 될 것이니라”(레 26:12). 신자와 하나님과의 언약관계는 마치 부부 관계와 같다. 그 관계는 마음으로 긴밀하게 연합하는 데서 우러나오는 따뜻하고 특별한 사랑을 수반한다(렘 31:32 참조).
“안식일은 창조와 구속의 표징이요, 하나님을 생명과 지식의 근원으로 가리키며, 사람의 창조함을 받던 당시의 영광을 회상케 하고, 그리하여 하나님께서 당신의 형상대로 우리를 재창조하시고자 하시는 뜻을 입증하여 주는 것이다. 안식일과 가정은 마찬가지로 에덴에서 제정되고 하나님의 목적가운데 있어서 피차에 분리될 수 없는 관계를 가지고 있다. … 하나님의 사랑은 노동의 필요를 제한하셨다. 하나님께서는 안식일에 당신의 자비하신 손길을 펴신다. 하나님께서는 당신의 날에 가족들이 하나님으로 더불어 교제하고 만물로 더불어 교제하며 또한 서로 교제할 기회를 가지도록 하셨다”(교육, 321, 322).
이스라엘 백성은 성소에 대하여 어떤 자세를 가져야 했는가?(레 26:2)
답:
비록 교회 건물이 이스라엘의 성소 건물과 서로 다른 면에서 그 역할을 하고 있을지라도, 그리스도인들은 이스라엘 백성이 성소에서 행한 것처럼 교회에서도 주의하여 행해야 하는가? 솔로몬은 하나님 앞에서 신자가 어떻게 행동할 것을 권면하는가?(전 5:1,2)
답:
“겸손하고 믿음이 있는 심령들에게 땅 위에 있는 하나님의 집은 하늘의 문이다 찬송, 기도, 그리스도의 대표자들에 의하여 이야기된 말씀들은 하늘 교회와, 불경스러운 것이 전혀 끼일 수 없는 보다 고상한 예배를 위하여 예비시키고자 하나님께서 제정하신 매체들이다. … 하나님께 예배를 드릴 곳이 있는 사람들은 그 곳이 어떠하든지, 도시에 있든지 바위산의 동굴 가운데 있든지, 초라한 오두막에 있든지 또는 광야에 있든지 행복한 이들이다. 만일 그 곳이 주님을 위하여 마련할 수 있는 최선의 곳이라면, 주님께서는 친히 임하셔서 그 곳을 거룩하게 하실 것이다. 그리하여, 그 곳은 만군의 주님 앞에서 신성한 곳이 될 것이다.
하나님의 집이 거의 경의를 받지 못하고 있는 것이 사실이다. 신성한 것과 신성한 곳이 구별되지 못하고, 거룩하고 존귀한 사람이 존중받지 못하고 있다. … 우리가 자주 하나님께서 친히 히브리 백성에게 주신 기별을 읽어야 하지 않겠는가? 우리는 우리에게 비취는 영광스러운 진리의 빛을 가지고 하나님의 집에 대하여 이스라엘 백성이 경외한 것처럼 해야 하지 않겠는가? … 우리는 유대인 이상으로 우리의 예배에서 더욱 경의를 표해야할 이유를 가지고 있다“(교회증언 5권, 491,492,495,496).
(알아봅시다)나는 어느 곳에서든지 하나님께서 나의 예배를 가납하실 수 있는 생활을 하고 있는가? 하나님께서는 나의 찬송과 기도를 가납하실 수 있는가?
경건한 말(레 24:10~16,23)
레위기에 기록된 두 번째 사건은 진(陳) 중에서 두 사람 사이에서 일어난 싸움과 관련된 것이었다. 한 사람은 이스라엘 사람이었다. 다른 한 사람은 이스라엘 백성이 애굽의 노예 생활에서 탈출할 때 운명을 함께한 “잡다한 종족”(출 12:38)에 속한 사람이었다. 그 잡다한 종족 중에는 애굽 사람뿐만 아니라 이스라엘 사람과 결혼한 애굽 사람도 있었다. 이 사건에서 그의 아버지는 애굽 사람이었고 그의 어머니는 단 족 출신 이스라엘 사람이었다.
이방인과 결혼한 이스라엘 여인의 아들인 그는 한창 다투던 중 무엇을 했는가? 그 죄는 어떻게 심각한 것이어서 모세가 하나님의 직접적인 자문을 구하게 되었는가?(레 24:10~12).
답:
하나님께서는 어떻게 지시하셨는가? 왜 심판이 그토록 엄했는가? 그리고, 왜 증인들은 그 저주한 자의 머리에 안수를 해야 했는가?(레 24:14~16,23, 5:1).
답:
앞서 이스라엘 백성에게 부모를 거역하고 저주하는 자들을 처리하는 방법에 대한 지시는 있었으나(출 21:17 참조) 하나님을 대항하여 비방하고 저주하는 자에 대한 것은 없었다. 하나님을 비방하고 모욕한 행위는 참람죄이다. 격분을 발하고 불경스러운 말을 한 것은 그의 속을 그대로 드러낸 것이었다. 형벌은 관대한 현대 사회에 살고 있는 우리에게는 너무 심한 듯이 보인다. 그러나 이 형벌은 다른 사람들이 배도와 불순 가운데 빠지는 것을 막았다.
사랑과 공의는 형벌을 요구한다. “격분을 이기지 못해 한 말에 대하여 그처럼 혹독한 형벌을 가하시는 하나님의 사랑과 공의에 대하여 의심을 품을 자들이 있다. 그러나 하나님께 대하여 악의로 한 말들이 큰 죄라는 것을 나타내는 것은 사랑도 공의도 요구하는 바다. 최초의 범죄자에게 내려진 형벌은 다른 사람들에게, 하나님의 성호는 존중히 여김을 받아야 한다는 경고가 된다. 만일, 이 사람의 죄를 형벌하지 않고 묵과하였더라면 이는 다른 사람들을 타락시켜 그 결과로 많은 사람의 생명이 마침내 희생당하였을 것이다”(부조와 선지자 하권, 10).
불경스러운 말은 셋째 계명을 범하는 것이다. “너는 너의 하나님 여호와의 이름을 망령되이 일컫지 말라 나 여호와는 나의 이름을 망령되이 일컫는 자를 죄 없다 하지 아니하리라”(출 20:7). 성경에서 ‘이름’이라는 낱말은 실제로 인격과 속성을 대표한다.
하나님의 어떤 속성이 그 이름에 의하여 밝혀졌는가?(출 34:4~7).
답:
하나님을 섬기는 사람들은 어떻게 그 ‘이름'에 영광을 돌리거나 욕을 돌릴 수 있는가? 어떻게 하나님의 이름이 예수님의 기도에 대한 응답으로 거룩’하게 될 수 있는가?(마 6:9, 딤전 6:1과 비교)
답:
우리는 말뿐 아니라 생활을 통해서도 주님의 이름에 욕을 돌릴 수 있다 그리스도인은 아버지와 아들과 성령의 “이름으로” 침례를 받는다(마 28:19 참조). 결과적으로 우리는 부모가 그 자녀의 행동을 통하여 ‘평가’되듯이 우리의 생활을 통하여 하나님께 영광 또는 욕을 돌리게 된다. 하나님의 이름으로 불려 그 가족의 일원이 되는 것은 하나의 특권이다. 그러나 거기에는 가볍게 여겨서는 안 될 큰 의무가 있다.
“이 이름은 하늘의 천사들에 의하여 타락하지 않은 세계의 거민들에 의하여 거룩히 여김을 받는다. ‘이름이 거룩히 여김을 받으시오며’라고 기도할 때, 그대는 그 이름이 이 세상에 의해서도 그렇지만 그대 자신에 의해서도 거룩히 여김을 받도록 간구한다. 하나님께서 사람들과 천사들 앞에서 그대를 당신의 자녀로 인정하셨으므로, ‘일컫는바 그 아름다운 이름을’(약 2:7) 손상하지 않도록 기도하라. 하나님께서는 그대를 당신의 대리자로 세상에 보내신다. 그러므로 생활 하나 하나에서 하나님의 이름을 나타내야 한다. 이러한 간구를 드리려면 하나님의 특성을 소유하지 않으면 안 된다. 만일 생활과 품성으로 하나님의 생애와 품성을 나타내지 않으면, 그대는 그분의 이름을 거룩하게 할 수 없고 그분을 이 세상에 나타낼 수 없다. 그대는 오직 그리스도의 은혜와 의를 받아들임으로써만 이 일을 할 수 있다”(산상보훈, 238~241).
어디에서 불경스럽고 참람스러운 정신이 시작되는가?(마 15:19)
답:
불경건한 자가 회심하여 경건한 생활을 할 수 있는가?(딤전 1:12~15)
답:
“겸손과 존경이 하나님 앞에 나오는 모든 사람들의 특징이 되어야 한다 예수님의 이름으로 우리는 확신을 가지고 그분 앞에 나아가도 좋으나, 그분께서 마치 우리와 같은 수준에 계시는 것같이 주제넘게 뻔뻔스러운 태도로 그분께 접근하지 말아야 한다. 가까이 하지 못할 빛 가운데 거하시는 위대하시고 전능하시고 거룩하신 하나님께 저희가 동등한 사람이나 열등한 사람에게 보통 말하듯이 말하는 사람들이 있다. 어떤 지상 통치자의 알현실(謁見室)에서도 감히 하지 못할 행동을 하나님의 집에서 행하는 사람들이 있다. 이런 사람들은 저희가 스랍들이 예배하고 그의 앞에서 천사들이 얼굴을 가리는 그분께서 보시는 앞에 있다는 것을 기억해야 한다. 하나님은 크게 존경을 받으셔야 한다. 참으로 그분의 임재를 깨닫는 사람들은 다 하나님 앞에 겸손히 머리를 숙일 것이다”(오늘의 나의 생애, 281, 부조와 선지자 상권, 326-역자 주).
적용
나는 가정에서 어떻게 자신과 가족에게 더욱더 축복이 되는 안식일을 지킬 수 있는가?
나의 행동은 가정이나 직장에서나 하나님에 대하여 경외하는 자세를 나타내는가?
어떻게 나는 다른 사람들에게 하나님을 사랑하고 경외하도록 격려할 수 있는가?
(연구와 명상) 교회증언 5권 49l~500쪽을 읽어라.
요약
십계명에서 첫째 판은 하나님에 대한 우리의 의무를 밝힌다. 레위기에 기록된 사건과 권면들은 우리에게 하나님의 신성성과 엄위성을 교훈하여 십계명의 이 점을 분명하게 가르치고 있다. 우리는 안식일을 즐거이 지키며 교회 예배에 신실하게 참석할 때 하나님을 우리 생활의 중심에 모실 수 있다. 하나님께서 우리의 생활 가운데 임재하실 때 우리는 그분을 경건하게 섬길 수 있게 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