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배려를 최고선最高善으로 삼고
자율성을 바탕으로
동행의 가치를 실현하는
이현세
광주시립교향악단 상임지휘자
▢ 대담_이영진(음악평론가. 음악저널 편집위원)
평생의 동반자나 다름없는 바이올린 연주가의 업을 훌훌 털고, 오랜 미국 생활에서 돌아 와 결국 같은 음악의 길이지만 결코 평탄치 않은 행보를 내딛은 지 어언 10여 년. 어쩌면 편안한 노후까지 보장된 미국에서의 교수 생활을 접고 오케스트라 지휘자로 변신한 이현세 광주시향 상임지휘자. 그는 자신이 이끌고 있는 광주시립교향악단 홈 페이지에 ‘서정적이며 또한 극적인 표현을 아끼지 않는 지휘자’로 소개된 대해, 사실 표현된 글보다 훨씬 진보적인 음악세계를 추구한다고 고백한다.
이념적 진보를 의미하기보다, 오히려 보수적인 클래식 음악계의 틀에 갇혀 있기를 거부하는 반작용으로서의 진보이다. 그래서 이현세의 오케스트라 어법에는 어느 부분에도 거친 저항이 없다. 단원들의 일탈을 두려워하지 않으며 ‘동행’이라는 자신의 큰 그릇에 담아내려 한다. 광주시향의 음악이 지휘자 이현세의 <동행론>에 침윤浸潤되어, 이제 곧 따뜻한 느낌의 색깔로 변색되어갈 모양이다. 바로 그 작업을 위해 대구와 광주를 오가는 일이 수개월 째 반복되어도 이현세 선생은 지휘봉을 잡는 순간을 후회한 적이 없었다고 단언한다. 그래서 그 동안 KBS교향악단, 서울시향, 코리안심포니, 부산시향과 다수의 유럽 교향악단을 지휘했지만, 내 나라 땅에서 비지땀 흘리며 만들어 내는 음악이 자신의 음악인생에 가장 소중하다고 그는 실토한다. ▢
이영진 선생님은 음악활동의 상당기간을 미국에서 생활하셨는데, 미국의 음악 토양과 국내의 음악 토양에 대해 포괄적으로 비교해서 말씀해 주시 고, 특별히 국내 음악토양의 개선점 또는 장려할 점에 대해 평소 생각 한 바는?
이현세 네, 저는 미국에서 바이올린 교수로 활동하다가 국내에 들어 와서 지휘자로 변신한 케이스지만, 미국에서의 음악이나 국내에서의 음악이나 사실 똑같은 음악을 했다는 것을 먼저 말씀드리고 싶어요. 미국에서 연 주하거나 가르쳤던 음악도 서양 음악이고, 국내에서도 마찬가집니다만, 분명한 점은 두 나라 사이에 다양성이 존재한다는 점입니다. 물론 당연 한 현상이겠지요.
굉장히 조심스런 얘깁니다만, 먼저 국내 오케스트라 운영시스템에 많은 차이가 있다고 생각됩니다. 제가 미국에서는 지휘 활동을 그다지 많이 하지 않았기 때문에 제 얘기가 모두 맞는 건 아니지만, 제가 지휘 공부 를 하면서 만난 몇 분 선생님들의 말씀과 또 객원지휘를 통해 경험한 외국 오케스트라의 운영 시스템을 봤을 때 국내 오케스트라와는 많은 차이가 있다는 걸 깨닫게 되었어요.
공교롭게도 제가 국내에서 지휘자로 활동한 오케스트라가 모두 직업 오 케스트라인데, 다 국·공립 오케스트라에 해당하는 셈이지요. 그런데 어 떻게 이해해야 좋을지 모르겠습니다만, 제가 경험한 직업 오케스트라의 운영 시스템이 거의 같다는 사실 이예요. 저는 이게 이해가 안 되는 겁 니다. 단원들의 출퇴근 시간까지 똑같이 만들어 놨으니까. 좀 과장되게 표현하자면, 국내 모든 국공립 오케스트라는 운영 시스템이 동일하다고 보면 되겠지요.
이렇게 운영돼 가지고는 각 지역별로 특화된 오케스트라를 키울 수 없 다고 봅니다. 예를 들면 눈을 감고 들어도 아, 저건 광주시향의 연주구 나, 아 저건 포항시향 사운드구나 하는 분명한 색깔이 나와야 하는데 음악 외 적 요인이긴 하지만 국내 직업 오케스트라의, 여기서 제가 말 씀 드리는 직업 오케스트라는 이른바 국공립 오케스트라를 말씀드리는 겁니다. 아까 음악토양에 대한 말씀을 하셨는데 바로 이런 비효율적인 국내의 음악 토양이 하루 빨리 개선됐으면 하는 바램입니다.
아, 그리고 미국의 음악정서를 물으셨는데, 말씀 드렸듯이 저는 미국에 서 주로 바이올린 교수로 활동했었기 때
문에 음악교육적 측면에서 예를 하나 들어 보겠습니다.
제가 경험한 바로는, 미국에서는 가능성이 크게 보이지 않던 학생이 점 점 잠재력을 발휘해서 훌륭한 연주자가
되는 경우를 흔히 볼 수 있는데 비해, 국내에서는 그 반대의 현상을 자주 경험하게 됩니다. 이런 경우지 요. 테크닉도 좋고 음악성도 뛰어 난데 일정한 수준에서 한계에 부딪치 는 겁니다. 저는 그런 학생들과 연주자들을 많이 봐 왔습니다. 이게 무 슨 이유 때문인가 하면, 표현력의 차이에서 오는 엄청난 결과인 거지요. 서양 음악은 고도
의 자기 표현력이 요구되는 분야인데 우리나라 사람들 은 정서적으로 이게 잘 안 되는 모양입니다.
성격적인 것도 작용하겠지요. 같은 맥락에서 말씀드리자면 미국 사람들 이 음악을 대하는 자세가 아주 적극적
이라면 우리나라 사람들은 그에 비해 매우 소극적이라고 봐야겠지요. 열정은 있는 거 같은데 그 열정을 표현하
는 방법이 대부분은 소극적으로 보입니다. 이런 부분 하나만 개선 돼도 국내 음악계의 토양은 충분히 발전적 일 것으로 봅니다.
제가 가르치고 있는 학교에서도 마찬가집니다. 강의 시간에 학생들하고 주로 질문도 많이 받고 토론식으로 강
의 분위기를 이끌어 갑니다만, 어 떤 주제를 갖고 학생들에게 질문하면 갑자기 분위기가 어색해지는 거예 요.
모두 어쩔 줄 몰라 하는 그런 분위기가 되는 겁니다. 계속 그런 시 간을 보낼 수 없어서 제가 살짝 웃으면서 분
위기를 바꿔줍니다만, 이런 게 우리 학생들의 공통된 정서인 거 같습니다.
그러나 음악 하는 사람들의 표현력 문제는 자꾸 좋아지고 있는 것만은 사실입니다. 제가 맡고 있는 광주 시향만
하더라도 취임 당시와 몇 개 월이 지난 지금과 비교하면 많이 향상됐다는 느낌을 제 자신이 강하게 받고 있으니
까요.
이영진 이선생님은 바이올린이 전공이신데 평소 연주회의 선곡은 어떤 측면 을 제일 많이 고려하시고, 또 선호
하는 장르나 시대조류가 있다면?
이현세 관점에 따라서는 제가 전공이 바이올린이니까 바이올린 곡을 주로 선곡할 거라고 생각할 수 있겠습니다만, 사실 저는 어떤 특정 장르의 곡이나 특정 시대 또는 특정 작곡가의 작품에 크게 비중을 두는 편이 아닙니다. 제가 존경심을 갖는 지휘자들 가운데는 사이클 연주회를 주 무기로 하는 분들도 계십니다만, 솔직히 저는 그런
쪽으로는 내공이 약 해서 감히 엄두를 내지 못합니다. 베토벤을 연주한다, 말러를 연주한다 고 하면 적어도 두
시간 가까이 굉장한 집중력을 갖고 그 작곡가에 몰 두해야 하는데 저에겐 그런 의지력이 아직 없는 가 봅니다
(웃음).
과거 바이올린 연주가로 활동할 때는 저는 바하를 무척 선호 했습니다. 그래서 어떤 작곡가의 작품에 우선해서
바하 곡을 연주했었습니다. 그러 다가 어느 해부터는 또 근현대 쪽 작곡가의 곡에 심취해서 버르토크라 든가 스
트라빈스키, 쇼스타코비치 같은 작곡가 곡을 주로 연주했던 때도 있었어요. 하지만, 오케스트라 지휘자가 된 후
로는 어떤 특정 작곡가를 고집 하지 않습니다.
글쎄, 적당한 표현이 될지 모르겠습니다만 나이를 더해 갈수 록 식성도 바뀌듯 연주회 레퍼토리도 자꾸 변해가는 것 같습니다. 어느 해엔 낭만 주의 때를 좀 비중 있게 선곡했다가, 또 어느 해엔 고전주의 쪽에 비중 을 두고…… ……마치 이런 거 같습니다. 우리가 아무리 웰빙 식으로 오 리고기가 좋다고 해도 세끼를 다 오리 고기만 먹을 수 없듯이, 그래서 저의 연주회 선곡 스타일은 절충형이다, 이렇게 말씀드릴 수 있겠습니 다. 그리고 모든 지휘자가 다 저와 같을 순 없겠지만, 솔직하게 말씀드 리면 일단 지휘자가 좋아하는 곡 또는 관심이 가는 곡이 우선 포함된다 고 해야겠지요. 그리고 청중들의 귀에 익은 곡 한 두곡, 그리고 좀 색다 른 곡이지만 새로운 곡 정도를 정기연주회 때 선곡해 왔습니다. 결론적 으로 말씀드리면 저는 이것저것 가리지 않고 골고루 섭취하는 셈입니다.
이영진 국내 오케스트라 지휘자로서는 비교적 짧은 기간 동안 대구시향과 경북도립 그리고 포항시향의 지휘자
로 활동하다가, 금년 1월에 광주시 향상임지휘자로 부임하셨지요. 아직 일 년이 안 되셨지만, 서로 다른 지 역 정서를 넘나들면서 음악 외적인 생각도 많으리라고 짐작됩니다. 미묘 한 질문이지만 이선생님이 느낀 두 지역의 음악 정서와 분위기, 그리고 광주시향 지휘자로서 음악적 지향점은 어떤 것이고, 특별히 목표를 두고 있는 부분이 있다면?
이현세 가까운 지인 가운데 한 분이 저에게 이런 말씀을 하셨어요. 제가 대 구시향 지휘자로 부임했을 땐데 현세야, 네 고향이 대구였어?(웃음) 사 실, 저는 대구라는 곳을 미국에 교수로 있을 때 친구의 초청으로 처음 방문했
어요. 이번에 광주시향 지휘자로 왔을 때도 비슷한 얘기를 주변에 서 들었습니다만, 서울이 고향인 저로서는 광
주도 처음이고 대구도 처음 인 셈입니다. 아직 호남 사투리는 익히지 못했습니다만, 대구 사투리는 어쩌다 배우
게 돼서 가끔 집 사람한테 써 먹기도 합니다.
참 신기하다고 느끼는 것은 좁은 땅덩어리인데도 불구하고 경상도와 전 라도의 억양이 그렇게 다르다는 점인데요. 저는 바로 이런 일상적인 차 이, 표피적인 차이인데 그 언어의 뉘앙스가 우리 음악에서는 분명하게 나타나자나요. 제가 깊이 있게는 모르지만 국악에서는 이런 음악적 정서 의 차이가 분명하게 나타나고 있는 걸로 아는 데요. 같은 아리랑이라 해도, 밀양 아리랑하고 진도아리랑하고 그 맛이 전혀 다르듯이 말 입니 다. 그래서 저는 처
음에 아, 경상도 사투리와 전라도 사투리가 이렇게 다르니까 음악도 확실히 다르겠구나. 또, 표현력에도 차이가 있겠구나 라고 생각했는데 전혀 그렇지 않은 거예요.
말하자면 언어 표현이 다르다고 사람이 다른 것은 아니지요, 결국 같은 사람이 자나요. 그래서 말입니다. 제가 경험한 영남 지역의 오케스트라 와 호남지역의 오케스트라가 궁극적으로 다를 게 없다고 본 겁니다. 이 말씀은 다
른 뜻으로 오케스트라의 차별성을 갖기 어렵다는 얘깁니다. 물 론 지휘자에 따라서 곡의 해석 측면이라든가 음
색, 화성 등 지휘자가 특별히 요구하는 면에서 전체적인 앙상블의 차이는 있겠지만 특화된 사 운드, 예를 들면
앞에서도 비슷한 말씀을 드렸는데 아, 저건 암스텔담 허보우의 소리구나, 아 저 소린 빈 필이구나 할 수 있는 그런, 그 오케 스트라만이 가질 수 있는 소리를 낼 수 있는 오케스트라가 아직은 국내 에서 찾아보기 힘들다는 사
실입니다.
아, 그리고 제가 영호남 지역을 짧은 기간 동안 함께 경험하면서 느낀 건데 아시다시피 수도권을 제외하곤 대개
의 국공립 오케스트라 단원들 이 그 지역 출신이 자나요. 우리가 항상 어떤 현상을 대할 때 이분법적 입장에서 생각할 때가 있습니다. 예를 들어 광주시향이다 하면, 그 지역 출신들로 단원이 구성돼야 한다고 주장하는 입장과 출신지역을 떠나서 실력 있는 단원들로 이루어져야 한다고 보는 입장이 있습니다.
결론부터 말씀드리자면 저는 이 부분도 절충적이어야 한다고 봐요. 만약
에 어느 오케스트라가 그 지역출신들로만 단원들을 구성했다면 언젠가 하긴 하겠지만 발전 속도가 굉장히 느리
겠지요. 반면에 아주 기량이 뛰 어나고 많이 공부한 단원들로만 선발해서 오케스트라를 운영한다면 분 명, 좋은 소리와 눈부신 발전을 기대할 순 있겠지만, 그 지역 출신 음대 생들은 삼십년이 지나도 단원으로 들어갈 기회를 얻지 못할 수도 있다 는 얘깁니다.
그렇기 때문에 두 조건을 적절하게 배합한 형태의 단원구성을 가지면 발전도 가져오고, 또 그 지역 출신 음대생
들의 일자리도 만들어주고 하 게 되는 거지요. 그리고 말씀 나온 김에 이런 기회에 한 가지 제안 드 리겠습니다. 오케스트라 단원들 말입니다. 저희 광주시향 뿐만 아니라, 직업오케스트라 단원 대부분의 처우에 관한 문제인데, 현실적으로 너무 적은 급여를 받고 생활하는 안타까운 분들이 많이 있습니다. 음악저널 같은 곳에서 이런 내용
들을 공론화하여 모든 오케스트라 단원들의 처우 가 진심으로 개선됐으면 합니다. 정말 거듭 부탁드립니다.
이영진 일반적으로 현악기 출신의 지휘자들은 오케스트라 사운드를 조련할 때 오케스트라의 통합적인 구축미
보다 선율선이 많이 강조된다는 평론 가들의 분석이 있습니다. 이선생님은 평소 오케스트라 단원들에게 연습 과정에서 어떤 부분을 많이 요구하고, 본질적으로 어떤 점을 최고 가치 로 여기는지?
이현세 네. 이 위원님이 말씀하신 그 점에 대해선 저도 동의합니다. 이번에 교향악 축제 때도 어느 평론가 선생
님이 저에게 정말 소중한 조언과 호 평을 주셨는데 저는 오케스트라 단원들에게 항상 자율성에 대해 강조하 는
편입니다. 무서운 지휘자가 되어 호령하고 나를 따라 연주하라는 식 의 지휘자가 요즘 세상에 있겠습니까만, 단
원들 개개인이 음악적으로 어 느 경지까지 성취한 분들인데 그 분들에게 강압적인 방법으로 연주할 곡을 이끌고 간다면 그 음악은 지휘자나 단원 모두에게 무거운 짐인 거 지요.
그래서 저는 최대한 단원들의 자율성을 이끌어 내는 지휘를 통해 선율 이면 선율, 화성이면 화성을 끄집어내려
고 합니다. 그런데, 제 뜻은 그 렇지만 이게 생각대로 만족하게 안 되는 건, 우리나라 사람들은 앞서 말씀 드린
대로 자기표현이 소극적이 자나요. 그러니까 지휘자는 길을 안내해 주고 단원들이 다른 길로 가지 않도록 조력
해 주는 역할인데 제 가 경험한 바로는 잘 안 될 때가 많아요. 사실 제가 꿈꾸는 가장 높은 지휘자로서의 이상
이 바로 자율성인데 말입니다. 자율성을 바탕으로 한 배려. 저는 오케스트라는 작은 사회라고 늘 생각합니다.
그 가운데는 뛰어난 사람도 있고, 부족한 사람도 있고, 많이 배운 사람, 또 좀 못 배운 사람, 능력 있는 사람, 그
렇지 못한 사람 이렇게 다양한 사람들이 오케스트라에도 존재합니다. 이렇게 작은 사회에 정작 필요한 게 저는
배려라고 봅니다. 배려가 뭡니까? 함께 가는 거지요. 동행하는 겁니다. 혼자 뛰지 않고 함께 가는 거. 저는 우
리 오케스트라에 필요한 게 바로 이것이라고 생각해요. 모든 단원들이 배려하며 동행하는 오케스 트라를 위해
저는 광주시향의 지휘자로서의 역할에 최선을 다하려고 합 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