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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2부: 한번 구원받으면 영원히 구원받는 것인가?
서론
선택을 할 수 있는 능력은 하나님께로부터 오는 놀라운 선물입니다. 그러나 사람이 선택할 수 없는 것이 하나 있는데, 그것은 아무도 타락하고 이기적인 본성을 가지고 태어나기 싫다고 해서, 자신이 원하는 대로 그렇게 태어나지 않을 수 없다는 것입니다. 사람이면 누구나 싫든 좋든 간에 이기적인 죄인의 본성을 가지고 태어날 수 밖에 없습니다. 우리의 삶에 가장 큰 영향을 미치는 출생에 관한 결정은, 이미 오래 전에 우리의 선조들에 의해서 이루어졌습니다. 우리가 태어나면서부터 갖게 되는 죄의 본성에 대해서는 아무런 선택의 여지가 없습니다. 우리 모두는 죽을 수 밖에 없는 죄의 본성을 가지고 태어납니다. 만약 그리스도의 능력을 통하여 죄의 본성이 변화되지 않는다면, 우리는 영원한 죽음에 이르게 될 것입니다.
그러나, 비록 우리가 영생을 잃어버릴 수 밖에 없는 죄인으로 태어나긴 하지만, 하나님께서는 우리에게 이 본성을 바꿀 수 있는 선택권을 주셨습니다. 이것은 그 어느 누구도 빼앗아갈 수 없는, 우리 자신들의 당당한 권리입니다. 이 선택이야말로, 우리가 살아있는 동안에 하게 되는 가장 중요한 결정입니다. 이 선택은, 죄의 본성을 따라서 살다가 영원히 죽을 것인가, 아니면 그리스도를 믿는 믿음을 통하여 새로운 품성을 받아서 영원히 살 것인가에 대한 것입니다.
우리 모두에게 제공된 이 선택에 대해서 사람들은 서로 매우 다른 견해들을 가지고 있습니다. 수많은 사람들은 하나님께서 다음과 같은 말씀을 그들에게 하셨다고 생각하는 듯 합니다.” 너희들의 불행한 운명을 바꿀 수 있는 한가지 결정권을 줄게! 일단 네가 구원받기로 선택하기만 하면, 너는 결코 다시 멸망 당할 수 없단다. 너는 그 결정을 바꿀 수 없어. 네가 그리스도를 너희 구주로 받아들이게 될 때, 그것은 너의 영원한 운명에 대하여 네가 할 수 있는 마지막 선택이다. 나중에 네가 생각을 바꾸어서 너의 결정을 포기한다고 할지라도, 그것은 이미 너무 늦었단다. 아무리 네가 멸망 당하기를 원하고, 네가 과거에 하였던 회개를 후회한다고 할지라도, 너는 결코 영생을 피할 수는 없단다. 네가 아무리 큰 반역을 일으키고 고의로 신성을 모독하고 악한 생애를 산다고 할지라도 구원받기로 한 너의 결정은 바뀔 수 없지. 나는 네가 예수를 너의 구주로 받아들인 후에는 더 이상의 어떤 선택을 하도록 허락할 수 없단다.”
기본적으로, 이것이 구원에 대한 영원한 보장의 교리를 주장하는 대부분의 그리스도인들의 생각입니다. 한편 또 다른 그룹의 신실한 그리스도인들은, 하나님께서는 언제든지 우리가 마음을 자의로 바꿀 수 있도록 문을 열어 놓고 계신다고 믿습니다. 그들은, 구원은 과거에 이루어진 단 한번의 번복할 수 없는 선택에 기초한 것이 아니라, 신자들의 그리스도와의 지속적인 개인적 관계에 기초된 것으로 믿으며, 고의적인 불순종에 의해서 하나님과의 사랑의 관계가 깨어질 때, 신자는 더 이상 참 신자가 아니며 구원에 대한 어떤 보장도 가질 수 없게 된다고 믿습니다.
위태로운 수백만의 영혼들
오늘날 수많은 그리스도인들은 “Once Saved, Always Saved”(예수를 믿음으로서 일단 한번 구원받으면, 품성과 믿음의 영적인 성장에 상관없이, 그리고 하나님의 말씀에 대한 불순종에 상관없이 무조건 구원받게 된다는 의미로 사용되는 표현)라는 구원론을 받아들이고 있습니다. 구원의 문제가 이처럼 매혹적으로 제시되기 때문에, 많은 사람들이 그것에 압도되어 따라가고 있습니다. 만약 신자들의 미래의 구원이 무조건적으로 보장된다면 그것은 가장 놀라운 교리가 될 것입니다. 그러나 만일 그것이 진실이 아니라면, 그것은 세상에서 가장 위험한 오류가 될 것입니다. 이 점에 대하여, 어떤 결정을 내리느냐에 따라서 수백만의 영혼이 구원받을 수도 있으며, 잃어버린 바 될 수도 있을 것입니다.
오늘날, 너무도 많은 영혼들의 영원한 운명이 바로 그 교리의 진위에 달려 있습니다. 우리는 다음과 같은 질문들에 대해서 스스로 답해 볼 필요가 있습니다. “우리는 구원과 신앙에 대한 우리 자신의 생각을 바꿀 수 있습니까? 우리가 회개하고 그리스도를 믿기로 결정할 때, 우리는 더 이상의 선택권을 포기하는 것입니까? 구원은 한 순간의 결정으로 완성되는 것입니까? 아니면 그러한 결정 후에도, 그리스도의 구원의 은혜 안에서 계속 성장해야 합니까? 하나님께서는 더러운 죄들이 당신의 왕국 안으로 들어가도록 허락하실까요?” 다행스럽게도, 이러한 질문들에 대해서 답해주는 분명한 구절들이 성경에는 많이 있습니다. 우리 함께 그 성경절들을 살펴보고, 아울러 “일단 구원받으면 그것이 끝”이라는 교리를 뒷받침해 주는 것으로 생각되는 몇몇 성경 구절들도 찾아보십시다.
계속되는 생명이 계속적인 삶의 비결임
계속해서 살아 있으려면 계속적인 생명이 있어야 한다는 사실을 유의 하십시오. 사람이 그리스도 안에서 살지 아니하면, 그는 시들어 죽고 결국에는 불에 살라집니다. 이 사실은 신자와 그리스도와의 관계가 단지 과거의 경험에 기초된 정지된 상태의 것이 아님을 말해줍니다. 그리스도와의 관계란, “우리 생명이신 그리스도”(골로새서 3:4)께로부터 나오는 생명을 신자가 계속적으로 나누어 받는 것을 말합니다. 가지가 포도나무로부터 분리될 때, 생명의 근원은 없어지고 그 결과는 죽음 뿐입니다.
그리스도께서 하신 이 말씀은 너무도 분명해서 누구나가 쉽게 이해할 수 있습니다. 산 포도나무와 연결된 신실하고 믿음 있는 그리스도인이라도 원하기만 하면 포도나무로부터 분리될 수 있습니다. 그 순간부터, 그들은 죽게 되며 불에 던지어져서 살라지는 운명에 처하게 됩니다. 예전에는 살아 있었던 것이, 지금은 시들어서 죽을 수 있는 것입니다. 영생에 대한 보장은 오직 그들의 믿음이 그리스도께 고정되고, 그들의 마음이 “우리 생명이신” 그분과 연결된 사람들에게만 영원한 것입니다. 우리는 과거에 어떻게 구원받았었든지 간에 다시 잃어버린바 될 수 있습니다.
예수께서는 씨 뿌리는 자의 비유에서 영원한 생명을 잃어버리게 되는 상황에 대해서 말씀하고 계십니다. 가시덤불과 돌짝 밭에 떨어진 씨앗에 대해서 설명하시면서, “길가에 있다는 것은 말씀을 들은 자니 이에 마귀가 와서 그들로 믿어 구원을 얻지 못하게 하려고 말씀을 그 마음에서 빼앗는 것이요. 바위 위에 있다는 것은 … 잠깐 믿다가 시험을 받을 때에 배반하는 자”(누가복음 8:12-13)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이 비유에서 우리가 유의해야 될 몇 가지가 있습니다. 첫째로, 오직 한 부류의 사람들만이 최종적으로 구원을 받게 될 것이라는 점입니다. 많은 열매를 맺는 사람들만이 구원을 받게 될 것입니다. 길가와 바위 위와 가시 떨기에 떨어진 씨로 비유된 사람들은 구원받지 못할 것입니다. 얼마 동안만 신실하였던 사람들은 얼마 동안만 구원받은 상태로 있다가 유혹의 때에 떨어져 나갔습니다. 물론 그들은 결국 잃어버린바 되었습니다. 이것은, 사람들이 얼마 동안 구원하는 믿음을 소유하고 있다가 후에 믿음을 잃으면, 멸망 받게 된다는 주님의 분명한 가르침입니다.
구원은 잃어버릴 수 있는 것이다!
그리스도의 비유를 또 하나 읽어보면, 신자들에 대한 계속적인 용서는 조건적이라는 사실을 확인할 수 있습니다. 그 이야기는 마태복음 18장 23-35절에 나오는 하나님의 용서하심에 대한 이야기 입니다. 어떤 왕이 자기 종의 간청에 응하여 엄청난 빚을 탕감해 주었습니다. 하루는 그 종이 자기에게 약간의 빚을 진 동료 종을 만나게 되었는데, 그가 자신에게 빚을 갚을 수 없다고 해서, 무자비하게 그를 감옥에 집어 넣었습니다. 이 사실을 왕이 듣고 나서 분노하여, 그가 전에 그 종에게 탕감해 주었던 많은 빚을 취소하고, 그 종이 빚을 다 갚을 때까지 옥에 가두어 놓았다는 이야기 입니다.
아무도 이 비유의 분명한 가르침을 부인할 수 없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용서를 구하는 모든 사람들을 용서해 주시지만, 그 용서가 조건 없이 주어지는 것은 아닙니다. 우리가 다른 사람들을 무자비하게 대함으로써, 이미 받은 용서를 잃어버릴 수 있습니다. 이것은 에스겔 33장 13절의 말씀과 일치하는 말씀입니다. “가령 내가 의인에게 말하기를 너는 살리라 하였다 하자 그가 그 의를 스스로 믿고 죄악을 행하면 그 모든 의로운 행위가 하나도 기억되지 아니하리니 그가 지은 죄악 중 곧 그 중에서 죽으리라.” 이 원칙은 18절에서 다시 되풀이되고 있습니다. “만일 의인이 돌이켜 그 의에서 떠나 죄악을 지으면, 그가 그 가운데서 죽을 것이”라.
영원한 구원의 비결은 구원의 근원되시는 그리스도와 올바른 관계를 계속해서 유지하는데 있습니다. 예수께서 말씀하시기를, “끝까지 견디는 자는 구원을 얻으리라”(마태복음24:13)고 하셨습니다. 시험과 유혹을 받을 때, 하나님의 능력을 의지하여서 그것을 물리치지 않는 사람들은 결국 구원받지 못할 것입니다. 끝까지 견디지 못하는 자들은 그들의 이름이 생명책에서 제거될 것입니다. 영생에 대한 무조건적인 영원한 보장을 주장하는 자들은 다음에 나오는 성경 말씀이 말하고 있는 진리를 부인하지만, 요한계시록 3장 5절은 진실한 그리스도인들이 죄에 대해서 승리할 수 있다는 사실을 증거하고 있습니다. “이기는 자는 ... 내가 그 이름을 생명책에서 반드시 흐리지 아니하” 리라. 이 말씀에 함축된 의미는 명확합니다. 이기지 못하는 자 - 끝까지 견디지 못하는 자 - 는 그들의 이름이 지워진다는 말씀입니다.
이 모든 구절들은 똑같은 진리를 말하고 있습니다. 고의적으로 범하는 죄는 영생을 얻을 수 있는 관계를 단절시킵니다. 영생에 대한 보장에는 항상 조건이 따른다는 사실을 잊지 마십시오. “저가 빛 가운데 계신 것같이 우리도 빛 가운데 행하면, ... 그 아들 예수의 피가 우리를 모든 죄에서 깨끗하게 하실 것이요”(요한일서 1:7). “너희는 처음부터 들은 것을 너희 안에 거하게 하라. 처음부터 들은 것이 너희 안에 거하면 너희가 아들의 안과 아버지의 안에 거하리라”(요한일서 2:24). “또한 뒤로 물러가면 내 마음이 저를 기뻐하지 아니하리라”(히브리서 10:38). “사람이 내 안에 거하지 아니하면 가지처럼 밖에 버리어 말라지나니”(요한복음 15:6). “사람이 내 말을 지키면 죽음을 영원히 보지 아니하리라”(요한복음 8:51). “너희가 만일 하나님의 인자에 거하면 그 인자가 너희에게 있으리라. 그렇지 않으면 너도 찍히는 바 되리라”(로마서11:22). “너희가 이것을 행한즉 언제든지 실족지 아니하리라”(베드로후서 1:10 “너희가 육신대로 살면 반드시 죽을 것이로되”(로마서8:13).
버림 받을 위험
사도 바울은 육체적 죄의 성향을 재갈먹이지 않는다면, 결국 하나님의 면전으로부터 버림받게 될 것이라는 사실을 잘 깨닫고 있었습니다. “내가 내 몸을 쳐 복종하게 함은 내가 남에게 전파한 후에 자기가 도리어 버림이 될까 두려워함이로라”(고린도전서 9:27). 바울이 여기서 사용한 “버림”이라는 말은 꽤 흥미로운 말입니다. 그것은 헬라어로 “아도키모스”로서 다른 곳에서도 버리운다는 뜻으로 사용되었습니다. 고린도후서 13장 5절은 예수그리스도께서 버리운(아도키모스)자의 마음에 거할 수 없음을 말합니다. 디도서1장16절은 “모든 선한 일을 버리는(아도키모스)” 자들의 가증함과 순종치 아니함에 대하여 말합니다. 바울은 자신의 생애가 다시 죄에 사로잡히도록 허용한다면 멸망 당할 수 밖에 없음을 생각한 것입니다.
바울은 또한 중생(거듭남)을 경험한 신자들이 파멸을 당할 가능성에 대하여도 말하고 있는데, 이는 그들이 주의 만찬을 합당하게 먹지 않기 때문이라는 것입니다. “주의 몸을 분변치 못하고 먹고 마시는 자는 자기의 죄를 먹고 마시는 것이니라”(고린도전서 11:29). 이 사람들은 기성 그리스도인들이며, 구원을 함께 나누어 가졌던 교인들임을 부인할 사람은 아무도 없을 것입니다. 그런 사람들이 심판을 받아 멸망 당할 수 있습니까? 바울은 그렇다고 말합니다. 어떤 사람들이 심판을 받습니까? 디모데전서 5장12절에 그 대답이 나옵니다. “처음 믿음을 저버렸으므로 심판을 받느니라” 신자가 “처음 믿음을 저버리고” 마지막 때에 심판을 당하게 될 수 있음이 얼마나 분명합니까?
나는 영생에 대한 영원한 보장을 주장하는 사람들이, 부모와 자녀의 관계를 비유로 들면서 자신들의 주장을 설명하는 것을 많이 들어왔습니다. “내 자녀는 나의 가족으로 태어났으므로, 그들은 항상 나의 자녀이다. 그들은 이미 태어난 존재이다. 나의 자녀와 나의 관계 즉 부모와 자식 간의 관계는 분리될 수 없다. 자녀가 순종하든지 불순종하든지를 불문하고, 그는 항상 나의 자녀인 것이다.” 이 논리는 중대한 것 하나를 빠뜨리고 있습니다. 문제는 자녀가 다시 태 속으로 들어갈 수는 없지만, 자녀가 병들어서 죽을 수 있다는 점입니다. 의사들은 어머니들에게 여러 가지 주의 사항을 이야기 해줍니다. 아이가 죽지 않고 건강하게 잘 살아있도록 하기 위해서는 해주어야 할 권고와 경고들이 많이 있습니다. 만약 아기가 잘 먹지 않는다면 그 아기는 죽을 것입니다. 마찬가지로 예수님께서도,“인자의 살을 먹지 아니하고 인자의 피를 마시지 아니하면 너희 속에 생명이 없느니라”(요한복음 6:53)고 하셨습니다.
자 이제, 최종적인 구원을 위해서는 계속적인 순종이 필요하다는 사실을 분명히 이해하셨습니까? 바울은,“너희 자신을 종으로 드려 누구에게 순종하든지 그 순종 함을 받는 자의 종이 되는 줄을 너희가 알지 못하느냐?”(로마서 6:16)라고 말했습니다. 사람이 더 이상 그리스도를 순종하지 않기로 선택한 후 사단에게 순종할 때, 그는 더 이상 그리스도께 속하지 않고 사단에게 속하게 됩니다. “의를 행하는 자는 ... 의롭고, 죄를 짓는 자는 마귀에게 속하나니”(요한일서3:7,8). 히브리서 저자는 믿음에서 떠나는 일에 대하여 특별한 경고를 거듭해서 하고 있습니다. 히브리서 10장 23절은, 일단 한번 구원받으면 그 구원이 계속되며, 아무도 그 구원을 번복할 수 없다고 주장하는 사람들의 입장을 곤란하게 만듭니다. “우리가 믿는 도리의 소망을 움직이지 말고 굳게 잡”을 것에 대해서 경고하고 있습니다. 그 후에, 신자들의 모임에서 뒤로 물러가도록 유혹 받을 수 있는 사람들에 대한 권면이 주어집니다. 이것은 분명히 뒷걸음질에 대한 경고 중의 하나입니다. 이 편지서의 저자(나는 그가 바울이라 생각합니다만)는 이 경고의 대상에 자기 자신도 포함시키고 있습니다.
그는 기록하기를 “우리가 진리를 아는 지식을 받은 후 짐짓 죄를 범한 즉 다시 속죄하는 제사가 없고 오직 무서운 마음으로 심판을 기다리는 것과 대적하는 자를 소멸할 맹렬한 불만 있으리라. 모세의 법을 폐한 자도 두 세 증인을 인하여 불쌍히 여김을 받지 못하고 죽었거든 하물며 하나님 아들을 밟고 자기를 거룩하게 한 언약의 피를 부정한 것으로 여기고 은혜의 성령을 욕되게 하는 자의 당연히 받을 형벌이 얼마나 더 중하겠느냐”(히브리서 10:26-29). 여기에 묘사된 사람들은 진리에 대한 이해와 지식을 가지고 있지만, 고의적으로 배도에 빠진 사람들을 말하는 것입니다. 사람이 자신의 확신을 버리고 멸망에 빠질 가능성이 없다면, 하나님의 위대한 사도가 왜 이러한 분명한 경고를 남겼겠습니까?
히브리서 6장 4-6절에서, 우리는 또 다른 두려운 말씀을 볼 수 있습니다. “한번 비췸을 얻고 하늘의 은사를 맛보고 성령에 참예한 바 되고 하나님의 선한 말씀과 내세의 능력을 맛보고 타락한 자들은, 다시 새롭게 하여 회개케 할 수 없나니 이는 자기가 하나님의 아들을 다시 십자가에 못 박아 현저히 욕을 보임이라” 중생을 경험했으나 후에 하나님을 거역하고 그리스도를 부인하며 성령을 버린 자들에 대해 이보다 더 잘 묘사하기는 어려울 것입니다. 이 성경절이 경고하고 있는 사람은 자신의 행동과 결정에 의해서, 하나님의 영향력 밖에 자기 자신을 두는 사람을 말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그러한 사람은 자신의 불순종을 통하여 그리스도를 계속해서 십자가에 못박는 한, 구원받을 수 없습니다.
가지가 꺾여 나갈 수 있음
로마서 11장에서, 바울은 육신적 이스라엘 자손 중의 많은 사람들이 하나님의 아들을 거절하여 꺾여 나간 사실에 대해 논하고 있습니다. 그는 감람나무를 사용하여 예를 들었습니다. 17절에서 20절까지에 의거하면, 가지는 이스라엘 자손들을 의미하는데, 그들의 불순종으로 인해서 그들은 꺾여 나갔습니다. 그 후에 돌 감람나무 가지가 접붙여졌는데, 그것은 이방인이었다가 그리스도교로 개종한 사람들을 나타냅니다. 이제 다음 권면을 주의해보십시다. “하나님이 원 가지들도 아끼지 아니하셨은즉 너희도 아끼지 아니하시리라. 그러므로 하나님의 인자와 엄위(준엄하심)를 보라. 넘어지는 자들에게는 엄위(준엄하심)가 있으니 너희가 만일 하나님의 인자에 거하면 그 인자가 너희에게 있으리라. 그렇지 않으면 너도 찍히는바 되리라”(21,22절).
그 가지들에 대한 안전은 전적으로 나무와의 연결에 달려있음을 유의하십시오. 영생에 대한 안전과 보장은 조건적인 것입니다. 베드로도 이러한 바울의 생각에 동의하고 있습니다. “이런 것이 없는 자는 소경이라 원시치 못하고 그의 옛 죄를 깨끗케 하심을 잊었느니라 그러므로 형제들아 더욱 힘써 너희 부르심과 택하심을 굳게 하라 너희가 이것을 행한즉 언제든지 실족지 아니하니라”(베드로후서 1장 9-10절). 확실히 이것은 그리스도인들이 은혜로부터 떨어져 나갈 수 있음을 지적해 줍니다. 사람이 그리스도에게서 떠나, 심지어 구원받았다고 공공연히 말한 후에라도 멸망될 수 있다는 사실을 말해 주는 성경의 가장 중요한 구절은 베드로후서 2장 20-22절입니다. “만일 저희가 우리 주 되신 구주 예수 그리스도를 앎으로 세상의 더러움을 피한 후에 다시 그 중에 얽매이고 지면(패배하면), 그 나중 형편이 처음보다 더 심하리니 의의 도를 안 후에 받은 거룩한 명령을 저버리는 것보다 알지 못하는 것이 도리어 저희에게 나으니라. 참 속담에 이르기를 개가 그 토하였던 것에 돌아가고 돼지가 씻었다가 더러운 구덩이에 도로 누었다 하는 말이 저희에게 응하였도다.” 이 말씀이 주는 교훈은 너무도 명백합니다.
그러나 “무조건적인 구원의 보장”의 입장을 취하는 사람들은 하나님의 자녀들이 개나 돼지로 비유될 수 없다고 말합니다. 그러나 이 말씀이 주는 교훈은 너무도 명백합니다. 그들은 하나님과 구주 예수 그리스도를 아는 지식을 통하여 세상의 더러움에서 벗어났었습니다. 그들은 회개하였습니다. 그들은 그리스도의 편에 가담했습니다. 그들은 그들의 생애를 주님께 의탁하였습니다. 그러나 그들은 세상과 죄의 “구덩이”를 다시 생각했습니다. 애굽에서 나왔던 옛 이스라엘 백성들처럼, 그들은 “고기 가마”와 “부추와 파”를 그리워했습니다. 그들은 죄의 즐거움을 생각하게 되었고, 마치 돼지가 씻었다가 더러운 구덩이로 가서 도로 눕듯이, 그리스도를 떠나서 다시 세상으로 돌아갔습니다. 어떤 그리스도인도 돼지처럼 살지 말아야 합니다. 그러나 베드로의 교훈은, 그것이 모든 그리스도인들에게 생길 수 있는 가능한 일임을 보여 줍니다.
하나님의 영도 이 문제에 대하여 분명한 경고를 주고 있습니다. 들어봅시다. “그러나 성령이 밝히 말씀하시기를 후일에 어떤 사람들이 믿음에서 떠나 미혹케하는 영과 귀신의 가르침을 좇으리라.”(디모데전서 4:1). 이것이 언제 일어나겠습니까? 언제 어떤 사람들이 “믿음에서 떠나”가겠습니까? 그것은 지금 입니다. 그것은 우리가 살고 있는 이 시기이며, 우리 앞에 놓인 때입니다. 전에 한번도 이런 것을 생각해보지 않으셨다면, 한번 깊이 생각해 보십시오. 틀림없이 지금은 위험한 시기입니다.
셀 수 없이 많은 사람들이 믿음에서 떠나고 있습니다. 그들은 믿음 안에 있어 온 사람들입니다. 형제들과 함께 예배 드리고 함께 교회에 출석하며, 함께 기도회에 참석하였던 사람들입니다. 그들은 열성적으로 복음을 전하며 교회 사업에 자금을 드리던 사람들입니다. 그들은 교회의 목사들이었으며, 제직들이었고, 지도자적 위치에 있어온 평신도들이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들은 믿음에서 떠나갑니다. 그들은 견고하지 못하며 충성되지 못합니다. 이제 마지막 때에 위험한 시기가 올 것입니다. 핍박과 말할 수 없는 어려움들이 올 것인데, 어떤 이들은 굳세게 서있지 못할 것입니다. 그들은 세상의 사물들에 유혹되고 악한 영에 미혹될 것입니다. 슬프게도 그들은 십자가의 구주께 대한 충성심을 버릴 것입니다. 그들은 그리스도를 사랑한다고 공언하지만, 그리스도께서 말씀하신 진리에는 등을 돌립니다. 그들도 전에는 그리스도의 편에 섰었습니다. 그러나 세상의 유혹과 시련이 왔을 때, 그들은 그리스도의 원수의 편에 가담할 것입니다.
그러나 들어보십시오! 만일 여러분들이 “영생의 무조건적 보장”을 진정으로 원하신다면, 여러분은 그것을 가질 수 있습니다. 그것은 매일 매일, 순간 순간을 그리스도 안에 있음으로써 가능합니다. 여러분들이 그리스도를 선택하고, 그분 곁에 머문다면 여러분은 승리하게 될 것입니다. 그리스도께서는 실패가 있을 수 없습니다. 그분께서는 실패하지 않으십니다. 그분은 신실한 분이십니다. “네 짐을 여호와께 맡겨 버리라. 너를 붙드시”리라(시편 55:22). 여러분들이 그분 곁에 서 있는 한, 그분은 언제나 여러분 곁에 서 계실 것입니다. 예수께서는 친히 말씀하셨습니다. “내가 곧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니”(요한복음14:6)라고. 요한도 주님에 대해 기록하기를, “또 증거는 이것이니 하나님이 우리에게 영생을 주신 것과 이 생명이 그의 아들 안에 있는 그것이니라. 아들이 있는 자에게는 생명이 있고 하나님의 아들이 없는 자에게는 생명이 없느니라” (요한일서 5:11-12).
뒷걸음질친 자가 항상 죽기 전에 주님께로 돌아오는가?
아니요. 천만에! 이스라엘의 첫 왕이었던 사울에 대한 이야기는 그것을 잘 말해줍니다. 사울에 대하여 성경은, “그가 새 사람이 되”었다고 기록했습니다. “네게 여호와의 신이 크게 임하리니 너도 그들과 함께 예언을 하고 변하여 새 사람이 되리라” (사무엘상10:6). 그러나 사울은 그의 높이 들린 위치에서 뒷걸음질 쳐서 하나님을 거역하고 결국 스스로 목숨을 끊었습니다(사무엘상 31:1-6 참고). 사울 왕은 새 사람이 되었으나, 뒤로 물러나서 죄악 속에 빠지게 되었고, 끝까지 하나님께 반역하며 그분의 말씀에 순종하지 않다가 결국에는 아무런 회개도 하지 못한 채 죽었습니다.
어떤 사람도 빼앗길 필요가 없음
마지막으로 영원한 보증의 교리를 가장 잘 지지해 주는 것으로 인용되고 있는 구절을 한번 살펴 보십시다. “내가 저희에게 영생을 주노니 영원히 멸망치 아니할 터요, 또 저희를 내 손에서 빼앗을 자가 없느니라. 저희를 주신 내 아버지는 만유보다 크시매 아무도 아버지 손에서 빼앗을 수 없느니라”(요한복음 10:28-29).
하나님을 신뢰하고 따르는 모든 자녀들에게 이 얼마나 놀라운 약속입니까? 언뜻보기에 이것은 영적으로 잃어버릴 가능성이 전혀 없는 불변의 보증처럼 보입니다. 그러나 문맥 전체를 자세히 읽어 보세요. 27절을 읽지 않는다면, 이 말씀을 기록한 요한의 의도를 심각하게 왜곡하게 됩니다. 27절은 28절과 29절의 약속을 성취시키는데 필요한 조건을 제시합니다. “내 양은 내 음성을 들으며 나는 저희를 알며 저희는 나를 따르느니라 내가 저희에게 영생을 주노니” 하나님의 보호하시는 손길 안에서 편히 거하는 자들은, 오직 그분을 진실하게 따르는 자들임을 잊지 마십시오. 그분께서는 당신의 음성을 듣고 당신을 따르는 충성스러운 양들에게만 영생을 주십니다.
사단과 그의 부하들에 의해서 흔들려 떨려나가지 않고 영원히 그분 안에 거할 수 있는 방법은, 그분의 말씀을 듣고 따르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보호는 우리 안에 있는 양을 훔쳐가려고 기회를 노리고 있는 원수들로부터의 보호를 말하는 것이지, 양 우리의 주인 되시는 그리스도를 더 이상 따르지 않기로 결정하고 양우리 밖으로 나간 불순종한 양들의 보호를 말하는 것이 아닙니다. 아무도 그들을 하늘 아버지의 손에서 빼앗아 갈 수는 없지만, 그들은 언제라도 스스로 아버지의 보호 밖으로 뛰어나갈 수는 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결코 당신을 따르는 사람들의 선택의 자유를 빼앗지 않으실 것입니다. 죄인이 하나님께서 선물로 주시는 구원을 받아들이기로 선택할 수 있듯이, 그리스도인도 멸망 받기로 선택할 수 있습니다.
만약 배도가 불가능한 것이라면, 배도에 대해서 경고하고 있는 성경의 수없이 많은 구절들이 얼마나 무용한 것인가를 생각해 보십시오. 만일 사람이 멸망 당할 수 없다면, 왜 성령께서는 바울이나 베드로 혹은 그 밖의 사도들로 하여금 영원한 멸망에 대해서 그토록 심한 경고와 권면을 남기게 하셨을까요? 만약 한번 구원받으면 그것이 영원히 보장된다는 것이 성경이 말하는 진리라고 가정한다면, 마귀는 신자들이 멸망 당하도록 노력하는 것이 쓸데없고 불가능한 일임을 잘 알기 때문에 신자들을 빼앗기 위해서 시간을 낭비하는 일을 결코 하지 않을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 모두는, 사단이 성도들로 하여금 그리스도를 따르지 못하게 하고자 더욱 열심히 일하고 있음을 알지 않습니까?
이제 우리는, 구원이 과거나 현재의 한 차례의 취소할 수 없는 공약에 의한 것이 아니라는 결론을 내릴 때가 되었습니다. 구원을 받는다는 것은, 하나님의 입혀주시는 의와 나누어주시는 의를 계속해서 받아들이는 그리스도인의 삶을 사는 경험입니다. 그것은 영원한 생명의 원천되시는 그리스도와의 계속적이고도 역동적인 관계가 없이는 결코 현실화 될 수 없습니다. 구원받는 문제를 성서적으로 온전하게 이해하기 위해서는, 구원을 과거, 현재, 미래의 세 시제 안에서 살펴보아야 합니다. 구원은 과거에 일어났고, 현재 일어나고 있으며, 미래에도 계속되어야 합니다.
과거, 현재, 미래의 구원
한번은 어떤 사람이 육지에서 멀리 떨어진 곳에서 고기를 잡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갑자기 배가 뒤집혀 물속으로 가라 앉게 되었습니다. 그는 수영을 잘하지 못했습니다. 바로 그때, 다른 고기잡이 배가 다가왔습니다. 그러나 그 배는 많은 화물을 싣고 있어서 더 이상의 또 다른 승객을 태운다는 것은 불가능 했습니다. 그러나 그들은 불쌍한 이 사람을 구조해 주고 싶었기 때문에 그에게 밧줄을 던졌습니다. “여기 이 밧줄을 잡으세요. 우리가 당신을 해안까지 끌어다 주겠습니다” 라고 그들은 말했습니다. 그 사람은 밧줄을 잡자마자 “하나님, 정말 감사합니다. 저는 구조되었습니다”라고 말했습니다. 맞습니다! 그가 밧줄을 붙잡고 있는 한, 그는 구조 받은 상태에 있는 것입니다.
구원은 바로 그런 것입니다. 그러나 그 구원 속에서 그가 해야 할 몫이 있습니다. 언제든지 그가 밧줄을 붙잡고 있던 손을 놓고 다시 잡기를 거절한다면, 그는 구조되지 못할 것입니다. 죄로부터 구원함을 받은 사람도 마찬가지 입니다. 그가 그리스도의 손을 잡고 있는 한, 그는 구원된 상태로 남아 있을 것입니다. 그가 잡은 손을 놓기로 마음먹고, 그 대신에 마귀의 손을 잡는다면 그는 멸망 당한 것입니다. 그의 구원은 그가 결정하는 선택에 달려 있습니다.
실제로 우리는 구원을 세 시제로 나누어서 말할 수 있습니다. 즉, 과거, 현재, 미래. 그가 밧줄을 잡았을 때, “나는 구원받았다”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그가 배에 매달려서 끌려오고 있을 때,“나는 구원받고 있다”라고 말할 수 있으며, 그가 해안에 발을 들여 놓기까지,“나는 구원받은 자가 될 것이다”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회개한 사람은 죄의 형벌로부터 구원받았습니다. 신학적으로, 우리는 이것을 “칭의”라고 말합니다. 또한 그가 현재 죄의 세력으로부터 구원받고 있다면, 이것을 “성화”라고 말합니다. 그리고 그리스도께서 오실 때, 그는 죄의 본성과 육체로부터 구원받을 것입니다. 그것을 “영화”라고 말합니다. 이 세가지 시제가 모두, 성경이 구원에 대하여 설명할 경우에 사용되고 있습니다.
영어 성경에는 보다 분명하게 세 가지의 시제가 나와 있습니다. 로마서 8장 24절에“우리가 소망으로 구원을 얻었으매”라는 표현이 있습니다(과거: We were saved). 고린도전서 1장 18절에는“구원을 얻는 우리에게는”이라고 되어 있고(현재: We are being saved), 사도행전 15장 11절에는“우리가... 주 예수의 은혜로 구원받는 줄을 믿노라”라고 기록되어 있습니다(미래: We shall be saved). 이렇게 하여, 우리는 성경에서 구원에 대하여 설명하고 있는 세가지 시제 즉, 과거와 현재와 미래를 모두 보았습니다.
위에 언급한 예화를 잘못 이해하는 분이 있을지도 모르므로, 좀더 상세하게 설명해 보겠습니다. 구조 받기 위하여, 그가 밧줄을 꽉 붙잡아야만 했던 사실이, 우리가 우리 자신의 행위로 구원을 획득할 수 있다는 뜻입니까? 절대로 그렇지 않습니다. 그는 밧줄을 스스로 만들지도 못하며, 다만 배에서 던진 밧줄을 붙잡고 있었을 뿐입니다. 그 자신이 아닌 다른 힘에 의해서 그가 끌려갔던 사실을 기억하십시오, 그는 단지 그 힘에 협력했을 뿐입니다. 그는 밧줄을 잡고 있었을 뿐입니다. 그가 안전하게 끌려오기 위해서는 그렇게 해야만 했습니다.
그리스도인으로서, 우리도 그리스도에 대한 우리의 믿음을 고백해야 하고, 그분께 계속해서 붙어있어야만 합니다. 그분께 확고부동하게 남아있음으로써 순종의 열매를 맺어야 합니다. 그것이 그리스도를 붙잡는데 있어서, 우리가 해야 할 몫입니다. 그분은 결코 우리를 돌아가라고 쫓지 않을 것입니다. 그분에게서 우리 자신을 분리시킬 수 있는 오직 한가지 방법은, 우리 자신을 그분께로부터 끊어 버리는 것입니다. 우리에게는 그렇게 할 수 있는 선택권이 주어져 있습니다. 우리가 그리스도인이 된다고 해서, 우리의 의지가 제거되는 것은 아닙니다.
우리가 그리스도인으로 생활하는 동안에도, 우리는 언제든지 돌아서기로 결심하고, 하나님과 하늘의 사물들 대신에 세상의 사물들을 선택할 수 있습니다.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를 우리의 구세주로 믿는 믿음을 통하여서만 구원받습니다. “다른 이로서는 구원을 얻을 수 없나니 천하 인간에 구원을 얻을 만한 다른 이름을 우리에게 주신 일이 없음이니라”(사도행전4:12).
그러나 우리는 우리의 행위로써 우리의 믿음을 증거하게 됩니다. 그것은 그분께 대한 우리의 사랑의 표현입니다. 하나님의 계명을 지키고 옳은 일을 행하는 것은, 단지 우리의 마음 속에 성령께서 거하시는 결과 입니다. 바로 이러한 결과들이 성령의 열매입니다. 우리는 구원을 받기 위해서가 아니라, 구원받았기 때문에 행함이 나타나게 되는 것입니다. 그리고 우리가 마음을 다해 주님을 사랑하기 때문에, 그분께 순종하려고 할 것입니다. 우리는 결코 밧줄을 놓지 않을 것입니다. 우리는 우리의 유일한 소망이신 그리스도께 계속하여 굳게 붙어있어야 합니다. “행함이 없는 믿음은 죽은 것이니라”야고보서 2장 26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