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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의 영성가
임실치즈, 지정환 디디에 신부
김정숙_영남대학교 역사학과 명예교수
박해 시대 교회는 믿는다는 결심을 하는 것이 제일 기초였다. 신앙의 자유가 온 뒤에는 교회가 성당을 짓는 등 지상 위에 떳떳이 드러나는 시기였다. 일제강점기에 접어들면서 교회는 세상과 더불어 살아야 했다. 이때부터 교회내에서 개인 구령을 찾던 신앙형태를 벗어나 사회와 더불어 고민하는 신부들이 등장했다. 그리고 이러한 그들의 사회적 관심은 사람들을 주 앞에 불러 모았다.
임실치즈로 알려진 디디에 엇세르테벤스(Didier t'Serstevens, 池正煥, 1931-2019) 신부는 한국전쟁 이후 이 사회에서 필요로 했던 그 도움을 창출한 신부이다. “그저 눈앞에 있는 사람들과 생활한 것뿐"이라는 그의 생애는 주는 이와 받는 이가 함께 얼마나 큰 공동체로 커갈 수 있는지를 보여주는 대표적 사례이다.
하느님 사랑의 실천지로 한국을 선택하고
디디에 지정환은 1931년 벨기에 브뤼셀에서 기사 가문의 5 남매 중 막내로 태어났다. 그는 1950년 고등학교를 졸업하면서 사제성소를 깨달았다. 성직 수도자를 많이 배출한 집안에서는 그를 크게 축복했다. 그는 선교단체나 수도원 단위로 활동하는 것이 아니고 선교지의 교구 신부로서 활동하는 전교협조회(Societas Auxiliarium Missionum, SAM)를 선택했다.
그는 루뱅 가톨릭 대학교 철학과, 전교협조회에서의 연수를 거쳐 1954년 루뱅 예수회 부 설성 알베르토 신학교에 입학했고, 1958년 사제서품을 받았다. 디디에는 고교 졸업 무렵 한국전쟁에 대한 보도를 접했다. 그리고 대학 재학 중에 이효상 교수와 장병화 신부를 만났다. 두 한국인은 1954년부터 2년간 루뱅대학교에 유학했다. 그들은 한국이 할 일 많은 나라라고 했다.
디디에는 아프리카보다 더 가난하다는 한국에 끌렸다. 마침 그가 한국에 올 바탕이 마련되고 있었다. 전교협조회의 당가신부가 한국을 방문했을 때 당시 외국인 신부들이 없던 전주교구 김현배 주교는 이 회를 초청했다. 그리하여 1959년 12월 8일 디디에는 전교협조회 동료 세 명과 함께 전주교구 소속 신부로 한국에 입국했다. 전주교구 부주교였던 김이환 신부가 그의 이름을 '지정환'이라고 지었다.
바다를 메워 농지를 만들고 공소 신설
지정환 신부는 적응기간을 거쳐 1961년 7월 부안본당 주임이 되었다. 전임 신부가 신고를 겪으며 성당 건물을 완공한 직후였다. 신자들은 땅 한 뼘도 없는 농민이 대부분이었다. 마침 부안은 정부 주도로 간척사업을 하고 있었는데, 지 신부는 가톨릭구제회의 지원을 받아 간척사업을 추진했다.
참가자들에게는 간척지 1정보(3000평)씩 나눠주기로 하고, 기증받은 밀가루를 품삯으로 지급했다. 지게와 손수레로 흙과 돌을 날라 쏟아붓고, 태풍에 쓸려나가면 다시 반복했다. 간척이 이루어지면 신자들을 이주, 정착케 하고 공소를 설립했다. 100정보의 땅을 만들어 100가구가 나누게 되었다.
당시 젊었음에도 지 신부에게는 무리한 노동이었다. 게다가 가난한 신자들은 성당을 짓느라 지쳤기도 했고, 또 외국인 신부는 알아서 잘 해결하리라 여겼는지 교무금에 무관심했다. 그는 하는 수없이 식복사를 내보내고, 하루 두끼만 그것도 같은 집 짜장면으로 살았다. 이 과정에서 담낭이 망가졌다. 신부는 벨기에에서 6개월 동안 담낭 제거수술을 받고 치료했다. '쓸개없는 신부'가 되었다. 그러는 사이, 농민들은 받은 땅을 고리대금업자에게 헐값으로 넘겼다. 신부는, 염분이 빠질 때까지 기다리기에는 당장 연명할 끼닛거리가 없는 농민들에게 사전 교육이 필요했음을 절실히 깨달았다.
발효식품 김치나라에 서양 발효식품 치즈공장
신부는 1964년 여름 임실본당의 주임신부로 발령받았다. 임실은 전북에서도 가장 가난한 곳으로 민둥산에 풀만 자라는 척박한 농촌이었다. 문필병 임실군수는 새로 온 신부에게 임실을 위해서 뭔가를 남겨달라고 부탁했다.
지 신부는 당시 오기순 신부가 선물한 산양 두 마리를 기르고 있었다. 그러던 어느 날, 우연히 농촌을 걱정하는 젊은이들을 알게 되었다. 신부는 청년들에게 그들의 시간과 지천에 널린 풀을 이용하여 일하자고 제안했다. 10여 명의 마을 청년들과 산양의 젖을 짜고 사육 두수를 늘리며 협동조합을 설립했지만, 곧 난관에 봉착했다.
산양유는 판로가 한정돼 있었고, 또 산양유는 온도에 민감하여 쉽게 상했다. 신부는 오래 보관할 수 있는 치즈를 떠올렸다. 치즈를 모르는 청년들에게 '우유로 만드는 두부'라고 설명했다. 사실, 신부 자신은 치즈를 좋아하지도 않았고 어떻게 만드는지도 몰랐다. 산양 유를 굳히면 치즈가 되는 줄 알고 약탕기와 비눗갑을 사용해 두부를 만드는 간수도 넣어 보고 누룩도 넣어봤지만 소용없었다.
벨기에에서 가져온 응고제로 첫 치즈를 얻게 되었다. 사제관에서 얻은 첫 치즈에 용기를 얻어 공장을 세우기로 작정했다. 1967년 5평 정도의 건물과 땅굴 발효실을 갖춘 치즈공장을 세웠다. 곧이어 부모께 2천 달러를 청해 공장을 확대했다. 그러나 치즈 생산은 3년 가까이 성과가 없었다. 산양유 대금도 몇 달치씩 밀렸고, 조합원들은 흔들렸다. 조합원에게 줄 산양유 대금은 벨기에 가족으로부터 지원받거나 축의금 등으로 때웠다. '신태근'의 경우, 치즈 판매로가 뚫릴 때까지 7년 동안 가끔씩 형에게서 보리쌀을 얻어다 먹었다.
고심하던 신부는 치즈 생산의 핵심기술을 배우기 위해 유럽으로 갔다. 프랑스와 이탈리아 치즈산업체를 돌며 3개월간 치열하게 공부했다. 신부의 열성에 감동한 이탈리아 공산당 청년이 제조 비법이 담긴 노트를 통째로 건네주어 정보를 다 갖추고 돌아왔다. 그러나 그사이 사람들은 산양을 팔고 떠나고 신태근 한 명만 남아 있었다. 1969년, 드디어 균일한 맛과 향을 지닌 치즈를 만들었다. 냉각기, 전기도 없던 시절 그들의 인고(忍苦)는 컸다.
그러나 이번에는 판로가 문제였다. 신부는 직접 호텔, 남대문의 외국인 전용 상점, 한국 최초의 서울 명동 피자가게를 방문했다. 1971년 신부는 체더치즈 한덩이를 들고 무작정 조선호텔 독일인 주방장을 찾아갔고, 70킬로 납품을 주문받았다. 그는 이 주문에 감격했다. 이어서 신라호텔과 코스모스 백화점 등에도 납품이 이어졌다.
수입을 엄격하게 규제하던 시절, 수제(手製)로 생산된 고품질 국내산 치즈는 귀한 제품이었다. 생산과 판로가 안정되자 신부는 기술을 전수하기 시작했다. 1972년에는 임실치즈 공장을 주민 협동조합으로 개편하고, 공장과 생산시설 일체를 조합에 귀속시켰다. 그리고 1980년 그의 운영권, 소유권 일체를 협동조합에 양도했다.
치즈 생산의 결실은 수없는 실패에도 기다리는 믿음, 형제애와 공동체 정신, 동시에 모두가 자신의 일로 생각하게 되는 협동조합 체제에 있었다. 초기멤버들은 고생하던 시절에 돈버는 사업이라고 생각했으면 견디지 못했을 것이라며 그들은 하나의 생활공동체였다고 증언한다.
이후 공동체는 거대한 희망을 키웠다. 임실군은 임실치즈를 중심으로 교육과 축제, 관광사업을 이어가고 있다. 임실군의 연 수익은 270억 원, 지역경제 파급효과는 1000억원 정도에 달한다. 또 신부와 함께 일했던 '신태근'은 농민운동가로 거듭났고, 작은 임실지역은 농민운동의 성지로 불리게 되었다.
교회문서 연구의 바탕을 마련
농촌 사역, 임실치즈와 신협에 이어 지정환 신부에게 새로운 사목의 기회가 왔다. 지정환 신부는 1970년 초부터 오른발에 마비 증세가 나타났다. 다발성 신경경화증이었다. 1976년 신부는 정밀진단과 치료를 받기 위해 벨기에로 떠났다가 '불치' 진단을 받고 돌아왔다. 신부는 이 병마의 고통 속에서 자신이 할 일을 찾았다. 교회사에 관한 프랑스어 필사본 옛 문서들을 판독하여 타자치는 일이었다. 그는 판독이 난해한 호남선교사들의 서한 1,200여 면을 타이핑했다.
1981년 말, 신부는 한국생활을 정리하고 벨기에로 갔다가 2년 만에 목발을 짚고 태연하게 돌아왔다. 신부는 귀국하자마자 6천 장이 넘는 뮈텔주교의 일기를 판독, 타자로 정서했다. 그는 박해 시대 선교사들의 서한도 차례로 타자했다. 그의 언어 감각과 한국어 실력, 꼼꼼한 작업으로 오판이나 오타가 거의 없다. 그뿐 아니라 그는 타자본과 원본의 영인본 그리고 그것을 담은 CD까지 붙여 각각 책으로 엮어 필요한 연구자들에게 기쁘게 주었다.
동작 하나로라도 장애를 극복할 힘을 얻는다
지정환 신부가 장애를 가진 자신의 마지막 힘까지 한국에 쏟을 것을 각오하고 돌아온 무렵, 전주교구에서는 사목국 내 사회복지부를 활성화했다. 교구는 장애인 모임을 주선했고, 장애인에게 주는 권리를 찾아나가는 '하나회'가 결성되었다. 그리고 지 신부 가 1984년 2월 4일자로 장애인 사목 지도신부로 부임했다.
신부는 다음 달 장애인 협의회를 결성했고, 7월에는 교구 사회복지회의 지원을 얻어 전주시 소재 쌍용아파트 한 채를 전세 내어 장애인들을 위한 임시 숙소를 개원했다. 무지개 가족의 첫발이었다. 이 집은 신자 여부와 관계없이 타지역 장애인들, 혹 보호자 없는 전주지역 장애인들이 치료차 병원에 입원하기 전과 퇴원 후, 가 퇴원 또는 통원 치료시 일시적으로 머물 수 있는 곳이었다. 시간이 지나면서 이용자가 증가하여 보다 넓은 공간이 필요했다.
한편, 교구에서는 1985년 전동에 소재한 성모병원에 '전주 가톨릭 사회복지회관'을 열었는데, 이때 무지개 가족은 이 복지회관으로 이사했고 보다 활성화되었다. 더욱이 이듬해부터 지 신부는 장애인들만 전담하게 되었고, 하나회는 무지개 가족의 재활에 전념할 수 있게 되었다. 지 신부는 장애인과 함께 사는데 그치지 않고, 하나회와 함께 장애인 발생을 방지하기 위한 사회운동을 전개하고, 장애인들이 용이하게 미사참례를 하고 봉사자 없이도 나들이를 할 수 있는 여건을 마련하고자 노력했다.
이후 성모병원이 팔리게 되면서 1989년 전북 완주에 '무지개의 집'을 지어, 무지개 가족이 이주했다. 1991년에는 '제2무지개 가족의 집'이 완성되었다. '무지개 가족'은 중증 장애인들이 생활하는 공동체이다. 지 신부는 코라도 만질 수 있으면, 다음에는 귀나 머리에도 손이 닿을 수 있고, 그 작은 첫 동작에서 생의 희망을 시작할 수 있다고 믿었다.
신부는 그들이 할 수 있는 일은 절대로 돕거나 대신하지 않았다. 반면에, 그들이 스스로 움직일 수 있도록 모든 시설을 맞추어 주고, 재활운동을 시켰다. 예를 들어 누워서만 사는 중증 환자에게 입 근처에 스위치를 연결하는 끈을 매주어 그가 원하는 때에 스스로 라디오를 켜고 끌 수 있게 했다. 이런 모든 장애인 훈련시설은 지 신부가 살피고 설치했다.
그가 신학생 시절 배운 욕창 치유법도 이때 유용했다. 그는 미사를 할 때도 일어설 수 없는 장애인들을 배려해서 모두 앉아서 하도록 했다. 신부는 자신이 장애인이어서 장애인들의 고통과 기쁨에 진심으로 동참할 수 있음에 감사했다.
지 신부는 장애인을 영구적으로 도울 수 있는 여건도 마련했다. 신부는 2002년 호암재단으로부터 사회봉사상을 받았다. 그 때의 상금 1억원과 임실치즈농협과 지정환 임실치즈피자 체인점 들에서 매달 들어오는 돈으로 2007년 '무지개 장학재단'을 설립했다. 전주교구의 장애인 사목이 '남다른 애정과 아이디어'로 활발히 움직이는 데에는 지 신부의 영향이 크다.
•공수신퇴(功遂身退), 문서 연구의 바탕까지 마련
지정환 신부는 정원만 5정보가 넘는 저택에서 나고 자랐다. 그는 가난을 몰랐다. 그렇지만 그는 베푸는 자가 아니라, 사목자로 현지 주민과 똑같이 살았다. 그런데 한 가지가 완성되면 안주할까봐서인지 주께서는 단계마다 그를 새로 부르셨다.
간척지를 나누어 주었으나 담낭 수술을 하러 떠났고, 임실치즈가 자리 잡는 사이 다발성신경경화증이 생겼다. 그는 벨기에에서 다시 입국해서는 자신의 몸에 고통을 달고 35년간을 장애인과 함께 애정과 체력을 소진해 갔다. 그리고 2019년 4월 13일 주께로 돌아갔다. 그는 평소에 이루었다면 곧 물러나야 한다고 했는데, 아마 주께서 보시기에 완성되었던가 보다.
지정환 신부는 2003년 전북대학교 명예 농학박사 학위, 2005년 전주시 명예시 민증, 2016년 한국 국적과 대통령 포장, 임실 명예군민증을 받았다. 그가 선종한 뒤에는 그의 유족에게 국민훈장 모란장이 전수되었다.
철저히 한국인과 뒹군 지정환 신부는 자기 장례식에 서 '만남'이란 노래를 불러달라고 했다. 한국인들과의 만남으로 선교 사목의 길을 새롭게 연 것은 우연이 아니었으리라. 그 길에 서 또 다른 '바람'들이 피어나고 있다.
-집필에 도움을 주신 김진소 신부님, 전주교구청, 임실치즈농협, 임실군청 관계자분들께 감사드립니다.
『영성생활』 62호(2021년 10월) 게재
첫댓글 강 교수님, 글 예쁘게 앉히시느라 고생 많으셨습니다. 감사합니다.
왕성한 활동을 한 사람의 인생을 쓰다 보니, 글 내용이 좀 많고 어렵다는 느낌도 듭니다. 여행하시다 보면, 간혹 휴게소에서, 대부분 편의점 입구에 '임실치즈 코너'를 운영하는 휴게소들이 있습니다. 그 제품들을 보시면 지정환(디디에) 신부가 떠오르기를 바랍니다.
교수님 글 덕분에 '임실치즈'에 디디에 신부님의 거룩한 사랑과 헌신이 내포되어 있다는 것을 처음으로 알게되었습니다.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