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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혁주의 종말론 요약(안토니 후크마)
육체의 부활
기독교의 독특한 교리인 육체의 부활은 성경의 종말론적 메시지의 중심이다. 그리스도께서 죽은 자들로부터 일어나셨기 때문에, 그에게 속한 모든 자들도 영화(榮華)로운 육체들로 부활할 것이다.
1. 부활의 시기(時期)에 관한 문제
여기서 우리가 먼저 생각해보아야 할 것은 부활의 시기에 대한 전(前) 천년주의의 견해이다. 이 견해에 대해서 우리는 다음과 같은 반대 의견을 제시한다.
1) 성경은 불신자와 신자의 부활이 동시에 일어난다고 가르친다
“땅의 티끌 가운데서 자는 자 중에 많이 깨어 영생을 얻는 자도 있겠고 수욕을 받아서 무궁히 부끄러움을 입을 자도 있을 것이다”(단12:2) 즉 이 구절은 신자와 불신자의 부활이 긴 시간적 간격으로 분리될 것이라고 말하지 않는다. 또한 “....무덤 속에 있는 자가 다 그의 음성을 들을 때가 오나니....”(요5:28-29)의 말씀에서도 부활의 구체적인 시간을 언급하고 있다. 그런데 세대주의자(世代主義者)들은 25절에 언급된 “때”가 복음세대 전체를 포함하고 있기 때문에 28절의 “때”를 천년의 기간으로 나누어진 두 개의 부활로 주장한다.
그러나 요한은 “때”라는 단어를 적어도 한 번 이상의 다른 의미들로 사용하고 있음을 알아야 한다. 즉 아직 도달하지 않은 어떤 구체적 시기이거나(7:30, 8:20), 이미 도달한 구체적 시기인 것으로(12:33, 13:1, 16:21, 17:1) 사용하고 있다. 즉 이 음성은 한 번만 울려 퍼질 것인데 어떤 이들은 생명의 부활로 다른 이들은 심판의 부활로 대(大) 부활에 참여하게 될 것이다. 또한 사도행전 24;15의 부활(anastasin)은 단수로 사용되었다. 즉 천년 기간으로 나누인 두 개의 부활이 아니라 “하나의 부활”을 말하는 것이다.
계 20:11-15의 묘사를 전 천년주의자들은 불신자들의 부활이라고 주장한다. 그러나 이러한 해석은 매우 상징적인 책을 매우 문자적으로 해석하는데서 기인(基因)한 결과이다. 죽은 자들의 영역인 음부(陰部)는 불신자로서 죽은 자들만이 아닌 모든 죽은 자를 포함하고 있는 것이다. 12절의 책들을 펴는 상황은 오직 정죄 받을 일들만을 기록하고 있다는 흔적은 보이지 않는다. 생명책이란 일반적으로 하나님의 선택자들의 명단을 의미하는 것으로 이해되어 왔다. 백(白)보좌 앞에 섰던 자들 모두의 이름이 생명책에 기록되지 않았다고 이 구절은 암시하고 있지 않다.
그러므로 계시록에 묘사되고 있는 부활은 오직 불신자에게만 국한(局限)되는 부활이 아니다. 모든 죽은 자들의 대 부활 사건을 묘사하고 있는 것이다. “무론 대소(大小)하고 죽은 자들”, “죽은 자들이 심판을 받으니”, “바다가 그 가운데서 죽은 자들을 내어주고”. “사망과 음부도 그들 가운데서 죽은 자들을 내어주매 각 사람이 자기의 행위대로 심판을 받더라”
2) 성경은 신자들이 “마지막 날”이라고 불리우는 그리스도 재림의 때에 일으킴을 받으리라고 가르친다.
살전4:16, 빌3:20-21, 고전15:23의 구절들은 신자들의 부활이 재림 시(時)에 발생하게 될 것이라고 가르친다. 그런데 전 천년주의에 따르면 신자들이 부활하게 될 때는 최종 상태가 시작되기 적어도 천년 쯤 된다고 한다. 그러나 신자들이 죽은 자들 가운데서 살아나게 될 때를 예수님은 “마지막 날”이라고 칭하신다. “내 아버지의 뜻은 아들을 보고 믿는 자마다 영생을 얻는 이것이니 마지막 날에 내가 이를 다시 살리리라”(요6:40) 즉 종말 전(前) 천년의 한 때를 “마지막 날”이라고 부를 수 없는 것이다.
3) 살전 4:16과 고전 15:23-24에 근거하여 두 단계 부활을 주장하는 것은 결정적일 수 없다.
바울이 불신자에 관해 언급하고 있지 않는 이유는 불신자들의 부활과는 원리상 다를 수밖에 없는 신자들의 부활을 다루고 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이 두 구절은 불신자들이 신자들과 동시에 부활하지 않는다는 사실을 입증해 주지 않는다. 전천년론자들은 “먼저 일어나고”란 표현이 불신자들보다 먼저 일어나는 신자들의 부활이라고 주장한다. 그러나 이 구절은 신자의 부활과 그리스도 재림 시에도 살아 있는 신자들의 휴거(携擧)와의 관계를 대조시키고 있는 것이다.
이처럼 고전 15장에서 바울의 관심은 오직 신자들의 부활에 관한 것이기 때문에, 바울은 불신자들의 부활에 대해 한 마디도 언급하지 않는다. 이로 보아 성경의 분명한 교훈은 그리스도의 재림 시에 신자와 불신자의 대 부활이 있을 것이며 이 대 부활 후에 심판이 뒤따를 것이라는 것이다.
2. 부활의 본질에 관한 문제
1) 선지서에서
① 이사야 26:19 - 여기서는 믿고 죽은 자들(주의 죽은 자들)의 미래의 운명과 유다의 원수들의 운명을 대조시키고 있다. 즉 신자들의 미래의 육체 부활, 특히 이스라엘 중 신자들의 미래적 육체 부활에 관해서만 이야기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② 다니엘 12:2 - 이는 불신자와 신자 모두의 부활을 말하고 있다. “영생(히브리어-올람)”이란 표현이 구약성경 중 유일하게 나타나고 있다. 그리고 이 단어가 경건한 자들의 축복상태나 불경건한 자들의 불행한 상태를 동일하게 수식하고 있음을 볼 수 있다. 그러므로 우리는 영생과 영벌에 나타날 육체의 부활에 관해 구약이 명백하게 말하고 있는 경우를 보고 있는 것이다.
2) 신약성경에서
① 고전 15;20 - “첫 열매”란 단어는 추수의 첫 부분을 의미하는데, 이 첫 부분은 추수의 미래적 완성을 보증하는 의미를 지니고 있는 것이다.
② 골 1:18 - 그리스도를 “먼저 나신 자”라고 부르는 것은 그리스도의 형제자매들도 장차 죽은 자들 가운데서 일어날 것이라는 사실을 내포하고 있는 것이다.
③ 롬 8:11 - 여기서 우리는 그리스도의 부활과 신자들의 부활 사이에 밀접한 연관성이 있다는 사실을 배울 뿐만 아니라 신자들의 부활이 성령의 사역이라는 사실도 배우게 된다.
④ 빌 3:20-21 - 바울은 신자들의 부활한 육체가 그리스도의 부활육체와 비슷하게 될 것이라고 말한다. 우리 육체를 “우리의 낮은 몸”이라고 부르고 있는데, 이는 죄의 결과로서 오는 고통, 질병, 죽음 등을 연상(聯想)할 수 있다. 그러나 부활을 통해 신자들의 육체들은 모든 죄의 결과들, 즉 사망까지도 제거된 그리스도의 영광의 육체와 같이 될 것이다.
3. 부활에 관한 수많은 질문들에 대한 바울의 답변 - 고전 15장
12절을 보면 그리스도의 육체 부활이 고린도에서 부인(否認)되고 있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교인 중 얼마가 신자들의 육체 부활을 부인하고 있었다는 것이 분명해진다. 이는 아마도 헬라 사상의 영향이었기 때문이라고 짐작된다.
1) 부활의 사실(fact) : 12-34절
이것의 증명은 그리스도의 부활이다. 누구든지 그리스도의 부활을 부인하지 않고서는 신자들의 부활을 부인할 수 없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누구든지 그리스도의 부활을 부인한다면 그의 신앙은 헛될 것이며, 그는 아직도 그의 죄 가운데 있게 되는 것이다. 여기서 첫 번째 “모든 사람”은 인류를 가리키며, 두 번째 “모든 사람”은 신자들을 말한다. 그런데 여기서 바울의 관심은 신자들의 부활에 관한 것이며, 따라서 그리스도 안에 있는 모든 자들은 그와 함께 부활할 것이라는 것이다.
2) 부활의 양태(樣態) : 35절
이 구절을 통하여 우리의 현재 육체들이 장차 부활할 육체의 세포나 씨앗을 담고 있다는 사변적(思辨的) 추론(推論)의 인식을 해서는 안 될 것이다. 여기서 바울이 말하고자 하는 것은, 하나님께서는 제각기의 알곡이나 씨앗에게 그것들에게 맞는 나름대로의 “육체”를 주신다. 하물며 하나님께서 인간의 육체에 대해서 이런 일을 하실 수 없겠는가 하는 것이다. 여기서 바울은 세 가지 요점을 말하고 있다.
① 씨가 씨로서 죽지 않는다면 부활의 육체가 나타나지 않듯이 육체가 현(現)상태의 육체로서 죽지 않는다면 부활의 육체가 나타나지 않는다.
② 씨앗의 형체를 보고 그 미래의 식물의 형체를 말할 수 없듯이, 사람은 현재의 육체를 보고 미래의 부활육체가 어떠할 것인가에 대해 정확하게 말할 수 없다.
③ 씨앗과 그 씨앗의 식물 사이에 연속성이 있듯이, 현재의 육체와 부활의 육체와의 사이에도 연속성이 있을 것이다.
이렇게 씨 뿌리고 거두는 표상(表象)이 42-44절에서 계속되고 있는데, 이 표상을 통하여 바울은 현재의 육체와 부활육체 사이의 현저(顯著)한 대조를 표현하고 있다.
① 부패와 부패되지 않음의 대조
현재의 육체들은 부패의 육체이지만 장차 썩지 아니할 상태로 부활할 것이다. 우리는 더 이상 죽음을 향해 가는 존재가 아니다.
② 욕됨과 영광의 대조
장례란 항상 큰 불명예(dishonor)에 불과하다. 그러나 신자들의 육체들은 영광 중 부활할 것이다. 그러나 우리는 우리 자신이 그것을 보고 경험하기 전까지는 이 영광이 어떠한지 알 수 없을 것이다.
③ 약함과 강함의 대조
현재의 육체는 완전히 무기력해질 것이지만, 부활 시에 이러한 육체는 능력 가운데서 일어날 것이다. 모든 연약함들은 그때에 가서는 더 이상 있지 않게 될 것이다.
④ 자연적 육체와 영적 육체의 대조
많은 사람들은 부활육체를 비신체적인 것으로 잘못 생각하는 경향이 있다. 그러나 그리스도의 부활육체는 분명히 물질적, 신체적인 것이었다. 여기서 “신령한(프뉴마티코스)”이란 자연적 충동들에 인도(引導)되고 있는 자들과는 달리, 최소한의 원리상 성령의 인도함을 받고 있는 자들을 가리키고 있는 것이다.
첫째 아담과 연관되어 있는 사람은 쉽게 유혹받을 수 있지만, 그리스도 안에 있는 사람은 유혹을 물리칠 수 있으며 마귀에 대하여 “아니오”라고 말할 수 있다. 그러나 현세의 삶 속에서 우리의 순종은 아직도 불완전한 상태로 남아 있다. 따라서 우리의 죄를 날마다 고백해야 한다는 것을 인식하고 있는 것이다. 그러나 우리의 미래는 성령의 지배를 받게 되는 존재로서 죄와는 영원한 결별을 선언한다. 그러므로 부활육체를 가리켜 신령한 육체라고 부르는 것이다.
만일 부활육체가 비물질적이거나 비신체적이었더라면, 마귀는 위대한 승리를 쟁취하였던 것이나 다름없다. 왜냐하면 하나님은 육체적 몸이 없는(천사 같은) 전혀 다른 종류의 피조물로서 인간의 육체적 몸들을 변화시켜야만 했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구속(救贖)의 목표는 육체적 몸의 부활이며 영원히 살 수 있는 새 땅의 창조인 것이다. 즉 우주는 파괴되는 것이 아니라 새롭게 되는 것이며, 하나님은 승리를 하게 되시는 것이다.
3) 육체부활의 필연성에 관한 문제 - 고전 15:50-57
50절의 “혈과 육은 하나님의 나라를 유업으로 받을 수 없다”는 뜻은, 인간의 현재 상태는 깨어지기 쉽고 썩어질 존재이므로 하나님의 영화롭고 천상적(天上的)인 왕국에서 거(居)할 자리가 없다는 뜻이다. 즉 반드시 변화가 있어야만 한다는 것이다. 이렇다면 이 변화는 재림 시까지 이미 죽었던 신자들에게 뿐만 아니라, 그때까지도 살아 있는 신자들에게도 일어나야 할 것이다.
51-52절은 “필연적 변화”는 살아 있는 자나 죽은 자나 모두에게 필요한 것이라고 말하고 있다. 즉 그리스도의 재림 시에 죽은 자들의 부활과 산 자들의 변화가 거의 동시에 홀연히 일어날 것이다. 또한 살전 4:16-17절도 신자들의 휴거가 그 후에 즉시 일어나게 될 것이라고 말한다.
54절에서 바울은 신자들이 미래의 삶의 영광들을 즐기기 위해서는 죽은 신자들의 부활과 살아 있는 신자들의 변화는 절대적으로 필요하다는 것을 역설하고 있다. 이러한 일이 있은 후에 죽음에 대한 최후적 승리가 있게 될 것이다.
4) 부활의 연속성과 차이점
① 연속성
이 땅의 현재 주민들과는 전혀 다른 새로운 사람들이 존재하게 된다면, 우리는 구태여 부활을 이야기할 필요가 없게 된다. 바울은 신자들의 부활과 그 후의 교회의 휴거에 대해 묘사한 후에 계속해서 말하기를 “그리하여 우리가 항상 주와 함께 있으리라”(살전 4:17)고 했다. 부활이나 변화 후에 주님과 항상 있게 될 사람은 다름 아닌 우리인 것이다.
② 차이점
마 22:30에 따르면 장차 올 세상에서는 결혼이 없을 것이라고 한다. 그러나 천사와 같게 된다는 것은 육체적 몸이 없다는 뜻이 아니다. 즉 남녀의 성적(性的)분별이 없을 것이라는 뜻은 아닌 것이다. 다만 결혼이라는 제도가 그때에는 존속하지 않을 것이며, 새로운 자녀를 낳아야 할 하등의 이유가 없다는 것이다. 또한 고전 6:13의 “폐한다(카타르게오)”에서 볼 때, 이 구절은 육체의 소화기(消化器)적 기능이 장차 올 세상에서는 더 이상 필요치 않을 것이라는 뜻을 나타낸다고 할 수 있다.
그러나 우리가 고백해야 할 일은, 성경은 부활육체의 정확한 본질에 대해 거의 말하고 있지 않다는 사실이다. 약간의 힌트는 주어졌으나 대부분의 문제에 관해 침묵을 지키고 있기 때문이다. 우리는 우리가 경험하지 아니한 것들을 어느 정도 알고 있는 셈이다. 그러나 우리가 무엇을 경험하게 되는지에 관해서는 아는 바가 별로 없다. “하나님이 자기를 사랑하는 자들을 위하여 예비하신 모든 것은 눈으로 보지 못하고 귀로도 듣지 못하고 사람의 마음으로도 생각지 못하였다”(고전 2:9)
최후심판
사람들은 이미 현세에서 심판을 받고 있다고 할 수 있다. 즉 그리스도를 믿기를 거부하는 자들에게는 이미 심판이 임했다는 것이다. 그러나 성경은 또한 역사의 종말에 최후의 심판이 있을 것도 말하고 있다.
1. 최후심판의 필요성에 관한 문제
1) 반대의견
① 각자의 운명은 이미 죽음의 순간에 신자와 불신자로서 결정되어졌다.
② 그러므로 심판은 재림 시에 살고 있는 자들에게나 필요하다.
③ 개인의 생애 마지막에 구원의 여부를 결정짓는 “조사(調査)적 심판”이 있을 것이다. 이는 누가 부활할 것인지, 누가 변화될 것인지를 결정한다.(제칠일 안식일교)
2) 변증으로서의 최후심판의 목적
① 각 사람의 최종적 운명을 나타내심으로서 하나님의 영광과 주권을 드러내시기 위함이다. 자기 백성들을 구원하심으로 은혜를, 원수들을 정죄하심으로 공의를 나타내신다. 그러므로 심판의 날의 핵심은 개인의 운명이 아니라 하나님의 은총이다.
② 각 사람이 받게 될 보상과 형벌의 정도를 나타내기 위함이다.
③ 각 사람에게 심판을 행사하셔서 영원토록 지내야 할 장소를 정해주신다.
④ 이 위대한 날은 재판이라기보다는 선고와 집행의 날일 것이다.(E.A.Litton)
2. 최후심판의 시기와 기간
세대주의자들은 재림 혹은 휴거 시에 있을 신자들의 심판, 천년기 바로 직전에 있을 이방인들의 심판, 천년기 직전에 있을 이스라엘의 심판, 천년기 직후에 있을 이미 죽은 악한 자들의 심판 등의 복수부활을 주장한다. 그러나 성경의 가르침은 네 가지 종류의 심판들이 아닌 오직 유일한 최후심판이 동시에 있다는 것을 암시하고 있다. 왜냐하면 최후심판은 대부활 사건 후에 일어나기 때문이다.
① 최후심판은 현세대의 종말에 일어날 것이다.(벧후 3:7)
② 사람들의 최종적 운명의 향방은 세상 끝에 있게 될 것이다.(마 13:30-43)
③ 심판의 날을 지금과 같은 시간의 날로 생각할 필요는 없다. “날”이라는 단어는 종종 긴 시간을 의미하곤 한다.
3. 최후심판의 상황들
1) 누가 재판장인가?
① 하나님 아버지가 재판장이시다.(벧전 1:17), 하나님의 심판대(롬 14:10)
② 그리스도가 재판장이시다.(요 5:22, 행 17:31, 딤후 4;8, 고후 5:10)
그리스도께서 최후심판 날에 심판자가 되신다는 것은 너무도 적합한 일이다. 이 심판의 행위는 그리스도의 최종적 높아지심과 최고의 승리를 반영해 주는 것이. 즉 심판행위란 그리스도의 모든 원수를 굴복시키고 그의 왕국을 완성시키는 것을 의미하며, 그 후에 그는 왕국을 하나님 아버지께 바치게 될 것이다.(고전 15;24)
그리스도는 심판의 사역을 집행하심에 있어서 천사들과 성도들의 보좌를 받으실 것이다. 천사들은 최후심판에 한 몫을 담당한다.(마 13:41-43) 성도들도 그들의 영화로운 상태에서 심판사역의 일익을 담당하게 될 것이다.(고전 6:2-3) 헤르만 바빙크(Herman Bavinck)는 "....성도들이 세상과 천사들을 심판함에 있어서 진정한 역할을 행사하고 있는 것을 가리키고 있는 내용으로 이 구절을 이해해야 한다“고 했다. 이 해석의 가부(可否)를 논하기 전에, 한 가지 분명한 것은 영화롭게 된 성도들도 심판의 날에 한 부분을 담당하게 될 것이라는 점이다.
2) 누가 심판받을 것인가?
천사들이 심판 받을 것이며(벧후 2:4, 유 6절), 이 땅위에 살았던 모든 인간들이 최후 심판대 앞에 설 것이다.(마 25:32, 롬 2:5-6, 계 20:12-13) 그리고 모든 사람이 심판대 앞에 나타났다면 모든 신자들도 이 속에 포함되었음에 틀림없다.(고후 5:10, 히 10:30, 롬 14:10)
비록 신자들이 심판대 앞에 모두 나타나야 할 것이지만, 그들은 심판의 날을 두려워 할 필요가 없다. 왜냐하면 그리스도 예수 안에는 정죄함이 없기 때문이다.(롬 8:1) 하나님 안에 거하는 자는 심판 날에 담대함을 갖게 된다.(요일 4:17) 신자들은 심판의 날을 기뻐하는 마음으로 기대한다. “....나는 머리를 높이 들고 하늘에서 오시는 참 심판자를 기다릴 것이라는 것이다. 그는 벌써 나를 위하여 하나님의 심판을 받으셨고, 모든 저주를 나에게서 없게 하셨다는 위로이다....”(하이델베르그 교리문답 제52항의 답변)
3) 무엇이 심판될 것인가?
이 현재의 삶 동안에 이루어졌던 모든 일이다.(고후 5:10) 사람이 행동으로 옮기는 모든 것은 실상 그 사람의 마음의 근본적 방향이며, 따라서 심판의 날에 참작이 될 것이다. 이 속에는 사람의 행위들, 말들, 생각들이 포함되어 있다.
① 행위들이 심판의 대상이다.(마 25:35-40, 계 20:12)
② 선악간의 행실들이 심판 때에 고려될 것이다. (엡 6:8, 히 6:10)
③ 우리가 내뱉었던 말들도 심판의 대상이다.(마 12:36, 고전 4:5)
그러나 반드시 명심해야 할 중요한 사실은 신자들의 이러한 죄와 잘못들은 용서된 죄들로서 심판 때에 드러나게 될 것이라는 점이다. 이것을 늘 신자들이 생각하고 산다면 그들은 현세에서 죄와 싸우고, 하나님께 대한 봉사를 게을리 하지 아니할 것이며, 헌신된 삶을 살려고 계속 힘쓰게 될 것이다.
4) 사람이 판단 받게 되는 기준은 무엇인가?
① 판단기준은 하나님의 계시된 뜻일 것이다. 그러나 이것은 모든 사람에게 동일하지는 않을 것이다. 어떤 이들은 다른 이들보다 더 풍부한 하나님의 뜻의 계시를 받았다.(마 11:20-22) 즉 신약과 구약에 나타난 하나님의 뜻이 충만한 계시를 받은 자들은 그들이 이 성경 전체에 어떻게 반응했는지에 의해 판단 받게 될 것이다. 구약만을 갖고 있었던 자들은 그들의 구약성경에 반응한 정도에 따라 판단 받게 될 것이다.(눅 16장의 부자와 나사로의 비유)
② 구약이나 신약에 나타난 계시들을 전혀 받지 못한 자들은 그들이 가졌던 빛 아래서 판단 받게 될 것이다.(롬 1:18-21) 또한 하나님의 뜻이 풍성한 계시를 받지 못한 자들을 심판하심에 있어서 하나님은 “그들 마음속에 쓰인 율법의 사역”에 대해 그들이 취한 반응에 근거하여 판단을 하신다고 하였다.(롬 2:12-16)
③ 분명한 사실은 사람은 그들이 받지 못한 계시에 근거해서가 아니라, 그들이 갖고 있었던 빛에 근거해서 판단 받게 된다는 것이다. 많은 특권을 가졌던 자들은 많은 책임을 갖게 될 것이요, 적은 특권들을 가졌던 자들은 적은 책임을 갖게 될 것이다. 그러므로 버림받은 자들이 당하게 될 고통에도 “등급”들이 있는 것이다.(눅 12:47-48)
④ 하나님의 계시의 풍성한 빛을 받은 자들에게 관해서, 즉 성경 전체에 계시된 하나님의 뜻을 알고 있는 자들에 관해서 가장 중요한 판단 기준은 그들이 믿음 안에서 그리스도와 하나가 되고 그의 완전한 의로움으로 옷 입었느냐이다. 사람의 영원한 향방(向方)을 결정하는 가장 중요한 요인은 그리스도 예수님에 대한 자신들의 관계인 것이다.(요 3:36, 5:24, 롬 8:1)
5) 왜 성경은 행위들에 따라 심판된다고 가르치고 있는가?
① 이는 신앙과 행위간의 밀접한 관계성 때문이다. 신앙은 행위들 속에서 그 자체를 나타내야 하며 행위들은 참된 신앙의 증거들이다.(약 2:26, 갈 5:6) 칼빈은 이를 잘 요약했다. “의롭다 하는 것은 오직 믿음이다. 그러나 의롭다 하는 믿음은 혼자서가 아니다” 즉 행위에 따른 심판은 실질적으로 믿음에 대한 심판인 것이다.(약2:18)
② 마 25:31-46의 심판은 양(羊)들이 그들을 위해 준비된 나라를 유업으로 받을 만큼 선한 행위들을 했는지를 결정하기 위하여 양들의 삶을 조사한 심판이 아니라, 오히려 이러한 결정이 옳고 적절한 이유들을 공적으로 나타내기 전에 이미 그들의 최종적 운명에 관해 내려진 은혜로운 결정의 심판이다. 양들은 “나의 아버지의 복 받을 자들”이라고 불리고 있는데, 즉 하나님의 무한한 은총의 대상들이라는 것이다.
그리고 그들이 놀란 것은 그들이 영생을 공로로 얻기 위하여 아무 일도 하지 아니하였다는 것을 보여준다. 오히려 그들의 놀람은 그리스도의 형제들에게 사랑을 보여줌으로써 그리스도에게 참된 헌신을 표현했다는 것을 자연스럽게 반영하고 있는 것이다. 한편 염소들은 그리스도의 형제들에게 사랑을 보여주지 못함으로써 결국 그리스도에 대한 사랑을 나타내지 못했던 것이다. 이와 같이 그들은 참된 신자들로 나타내지 못했던 것이다.
6) 상급(rewards)에 관한 문제
① 므나 비유(눅 19:12-19)
여기서 중요한 사실은 주어진 상급의 변수(變數)는 종들이 원래 받았던 므나와 이익으로 남긴 므나의 숫자에 맞게끔 결정되었다는 것이다. 이 비유의 중요한 교훈은 주님께서 주신 은사들을 충실하게 다루어야 한다는 것임에 틀림없다. 이 경우 상급이란 증가되는 기쁨이라는 측면보다는 증가되는 책임의 문제라는 것인 듯하다.
② 고전 3:10-15 - 이 구절이 언급하고 있는 일차적 주제는 가르침에 관한 것이지만, 이 의미를 좀더 연장시킨다면 그것은 사역(행위)에 관해서도 적용될 수 있다. 그리고 시험하게 될 불은 분명히 심판의 날을 가리키고 있음에 틀림없다. 그런데 두 가지 종류의 건축자들은 모두 은혜로 말미암아 구원을 얻게 된다. 왜냐하면 둘 다 그리스도 예수님이 터가 된 기초 위에 집을 세웠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여기서 해를 입게 된다는 것은 상급을 상실한다는 뜻이다. 즉 어떤 사람은 상급을 얻을 것이고 또 다른 사람은 상급을 얻지 못할 것이라는 점은 분명해진다.
③ 그러나 예수님은 분명히 못 박아 말씀하시기를, 그러한 상급들은 인간의 행위공로가 아니라 하나님의 은혜의 선물이라는 것이다.(눅 17:10) 그러므로 우리의 행위와 미래의 상급 사이의 관계는 기계적으로가 아니라 유기적으로 이해되어져야 한다. 어떤 사람이 음악을 공부하여 악기를 잘 연주할 수 있게 되었다고 한다면, 그의 음악을 즐기는 능력 역시 크게 증가될 것이다. 이처럼 그리스도와 그의 왕국을 위한 우리의 헌신과 봉사가 커질수록 지금과 미래의 그리스도 왕국의 축복들을 향유(享有)할 수 있는 우리의 용량 역시 커질 것이다.
7) 심판 날의 중요성은 무엇인가?
각 개인의 구원과 영생은 그리스도 예수님에 대한 관계에 달려 있으며, 이는 최후심판의 날에 최종적으로 나타날 것이다. 그러므로 이 사실은 그리스도인의 삶에 있어서 도덕적 노력을 게을리 하지 않도록 권고하고 있다. 심판의 날은 하나님의 구속사역의 최종적 승리를 의미하며, 죽임을 당한 어린 양의 승리가 최종적으로 제시되는 날이다. 그러므로 심판의 날은 모든 의심의 그림자를 넘어서 세상 끝에 하나님의 뜻이 완전하게 이루어졌음을 드러낼 것이다.
영원한 형벌
하나님의 심판대 앞에 나타나는 자들의 최종상태는, 그리스도 안에 있는 자들은 새 땅에서 영원한 축복상태를 누리게 될 것이며, 그리스도 안에 있지 아니한 자들은 지옥의 영원한 형벌에 처하게 될 것이다.
1. 영벌(永罰)교리를 부정하는 주장들
19세기에 이르러 얼마간의 신학자들이 영원한 형벌 교리를 부정하기 시작했다. 그러나 이미 4세기 경에 아르노비우스(Arnobius)는 악한 자의 완전 소멸을 가르쳤다. 16세기 중엽의 소시니안파(the Socinians)들도 불신자들은 결국 소멸되어 버릴 것이라고 가르쳤다. 현시대에서는 제칠일 안식일교와 여호와의 증인들이 소멸이란 악한 자, 사단, 귀신들에 대한 형벌이라고 가르치고 있다.
1) 보편주의(universalism)
지옥과 영원한 형벌은 사랑과 능력의 하나님이라는 개념과 조화를 이룰 수 없다는 주장이다. 결국 모든 사람이 구원을 얻게 된다는 것이다. 다만 좋지 못한 삶을 살았던 사람들은 사후(死後)에 얼마간 형벌을 받아야만 한다고 하지만, 어느 누구도 궁극적으로 버림받지 않는다는 주장이다. 2세기의 오리겐(Origen)은 결국 인간뿐만 아니라 마귀와 귀신들도 구원받게 된다고 가르친 바 있다. 현재는 유니테리안(Unitarian)에 의해서 만인구원론(universal salvation)으로 발전되어 있다.
2) 전멸주의(annihilationism)
① 인간은 죽지 않도록 창조되었으나 계속적으로 죄를 짓는 자들은 불멸성을 탈취 당하게 되고 완전히 전멸(全滅)되어 버린다. - 비존재상태로 환원
② 조건적 불멸성 - 사람은 죽도록 창조되었으며, 신자들은 은혜의 선물로서 불멸성을 받아서 사후에 축복상태 속에서 계속적으로 존재하게 된다. 반면에 불신자들은 선물을 받지 못하며 죽음의 때에 완전히 소멸(消滅)되어 버린다.
2. 영벌교리에 대한 성경적 증거
영벌에 관한 교리에 대해 사람들이 갖는 어려움들을 우리는 이해할 수 있다. 우리 모두는 그러한 무서운 운명에 대해 생각하기를 주저하는 본성이 있다. 그러나 이 교리는 받아들여져야 한다. 왜냐하면 성경이 분명히 가르치고 있기 때문이다.
1) 그리스도의 가르침
헤리 뷰이스(Hary Buis)는 “사랑 많으시고 현명하신 구세주께서 성경에 나타난 그 어떤 사람보다 지옥에 대해 더 많이 말씀하고 계시다는 것은 참으로 사고를 자극하는 놀라운 일이다”라는 핵심적인 논평을 한다. 산상 설교에서 우리는 적어도 세 번에 걸친 지옥에 대한 언급을 찾아낼 수 있다.
2) 게헨나
지옥으로 번역된 이 장소는 형벌의 최후장소를 가리키는 신약의 단어이다. 이 장소는 예루살렘 남쪽의 계곡인 “힌놈의 골짜기”를 의미하는데, 이 골짜기는 구약시대 이래로 죄와 저주의 대명사가 되었고 종말론적 지옥불 혹은 형벌의 장소를 가리킨다. 그리고 이 단어의 용도에서 형벌은 결코 끝이 없다는 사실이 분명해진다. 마 10:28의 말씀은 마 5:29-30과 연관을 맺고 있으면서, 지옥의 고통들은 영혼과 육체 위에 내려지는 고통들이며 따라서 육체의 부활을 전제로 하고 있다는 사실을 분명히 해주고 있다. 이로써 예수님은 지옥불이 사람들이 어느 날엔가 풀려나올 수 있는 잠정적(暫定的) 형벌이 아니라 영원히 끝나지 아니하는 형벌이라는 것을 가르치시고 있는 것이다.(마 18:8-9)
3) 꺼지지 않는 지옥불(막 9:43)
이 구절은 지옥의 형벌이 끝이 없다는 사실을 잘 드러내준다. “거기는 구더기도 죽지 않고 불도 꺼지지 아니하느니라”(48절)는 말은 이사야 66:24의 인용문인데, 이사야의 문맥은 종말론적 문맥이었다. 따라서 이 말은 문자적으로가 아니라 상징적으로 해석되어야 할 것이다. 즉 구더기로 상징되고 있는 내면적 고통과 고민이 결코 멈추지 아니할 것이며, 불이 상징하고 있는 외적 고통 역시 결코 끝나지 아니하고 영원토록 계속될 것이라는 것이다.
마 13:41-42은 지옥의 아비규환(阿鼻叫喚) 상태를 묘사하고 있다. 여기서 사용되고 있는 표상(表象)들-“울며 이를 갊”-은 자책의 쓰라림과 낙망적인 자기 저주를 나타내주고 있으며, 마 25:30은 “바깥 어두움”이라는 버림받은 자의 비참한 고독과 하나님의 은혜로운 교제로부터의 영원한 분리를 보여주고 있다.
4) 형벌과 구원의 영원성(마 25:46) - 아폴리미, 아이오니오스
“저희(임금의 좌편에 있는 자들)는 영원한 형벌(콜라씬 아이오니온)에, 의인들은 영원한 생명(조엔 아이오니온)에 들어가리라” 특히 요3:16의 “멸망하다”는 뜻은 영원한 형벌에 청한다는 뜻이다. 또한 36절에서도 하나님의 진노가 그 위에 머물러 있다는 것은 영원한 형벌을 받게 된다는 뜻이 아니고 무엇이겠는가?
① 아폴리미(멸하다, 파괴하다/ 수동태-멸망하다, 잃어버린바 되다)
영벌교리를 반대하는 자들은 신약에서 악한 자의 결말을 표현하기 위해 사용되는 <아폴리미>의 뜻을 “멸절시키다, 존재를 말살시키다”의 뜻이라고 주장한다. 그러나 신약의 이 단어는 결코 완전소멸을 의미하고 있지 않다. 눅 15장에서 이 단어는 단순히 “잃어버렸다”는 의미이다. 또한 마 9:17에서는 “쓸모가 없게 되다”는 뜻을 갖는다. 즉 가죽부대가 “터져서” 쓸모없게 된 것이다. 때때로 <아폴리미>는 “죽이다”의 뜻을 갖는다.(마 2:13) 그러므로 “완전 진멸(盡滅)론”이란 말도 안 되는 주장이다. 썩어져 버리는 육체도 어떤 형태로든 존재하기 때문이다.
이런 분명한 가르침의 빛 아래서 우리는 <아폴리미>란 단어가 잃어버린 자의 최종적 운명에 대해 사용되었을 경우는 “멸하다”, “멸망하다”등으로 번역된 말이 마치 악한 자들은 완전 소멸될 것으로 이해되지 않도록 각별히 조심해야 한다.
② 아이오니오스(영원한, 무한한)- 1)시작이 없는 2)시작이나 끝이 없는 3)끝이 없는
이 단어가 하나님의 백성이나 악인 등의 미래 운명을 묘사하고자 사용되었을 경우 그 뜻은 “끝이 없는”이다. (롬 16:26) 또한 마 25:46에서는 하나님의 백성의 끝없는 미래의 축복상태를 묘사한다. 그러므로 <아이오니오스>란 단어는 형벌이든 축복이든 그것이 끝이 없는 상태로 지속된다는 뜻으로 사용되고 있는 것이다.
5) 사도들의 가르침
잃어버린 자의 고통을 가장 생생하게 묘사해 주고 있는 곳은 살후 1:7-9이다. 여기서 “영원한 멸망”은 “올레트론 아이오니온”이다. “올레트로스”는 여기서 완전소멸을 뜻하지 않는데, 만일 그렇다면 이 구절의 의미가 통하지 않게 되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이것은 주의 은혜로운 면전으로부터 영원히 추방된다는 의미의 영원한 파멸 혹은 끝없는 형벌을 의미하게 된다.
로마서의 5:5과 8-9절에서도 악한 자들의 미래의 몫을 언급하고 있다. 비록 버려진 자의 형벌이 영원토록 계속될 것이라고 구체적으로 언급되어 있지 않았지만, 하나님의 진노와 분노에 관해 언급하고 있는 내용은 우리에게 무엇인가를 암시하고 있는 것이다. 히브리서에도 이 형벌의 영원한 지속에 관해 언급되고 있지는 않지만 언약의 파괴자들의 운명의 비참함에 관해선 뚜렷하게 나타나 있다.(히 10:28-31)
버려진 자들의 영원한 형벌에 관해서 베드로는 예수님께서 말씀하신, 버려진 자들이 내어 쫓겨질 “바깥 어두움”을 연상하도록 만든다.(벧후 2:17) 유다서에서는 구체적으로 형벌의 기간이 영원토록 계속될 것이라고 언급하고 있다.(13절) 계시록 14:10-11에서 묘사되고 있는 표상은 매우 무섭고도 생생하여 우리로 하여금 예수님께서 말씀하셨던 꺼지지 않는 불과 두려운 진노를 연상하도록 한다.
그런데 이처럼 지옥의 형벌들을 묘사하고 있는 성경의 여러 다양한 표상(表象)들을 단순히 문자적으로 해석해서는 안 될 것이다. 만일 문자적으로 이러한 표상들을 취한다면 서로 모순 되는 경향이 있게 된다. 그리고 이런 버림받은 자의 고통에는 “차등”이 있다는 것을 기억해야 한다. 하나님은 완전하시고 공의로우시기 때문에 각 사람은 자기들이 받아야 할 만큼의 고통을 겪게 될 것이다.
6) 지옥의 장소성(場所性)
우리가 말할 수 있는 모든 것이란 성경의 자료에 동의하면서 어디엔가 지옥이라고 불리는 곳이 있어야만 한다는 것이다. 그러나 우리는 그곳이 어디에 있는지 알지 못한다.
7) 영벌교리의 중요성
지옥에 관한 성경의 가르침은 우리로 하여금 우리의 설교와 성경 가르침에 더욱 진지하도록 인도한다. 우리는 망설임과 슬픔 아마도 눈물마저도 가지면서 지옥에 대해 말해야 할 것이다. 그러나 우리는 마땅히 해야 할 말을 하는 것이다.(히 2;2) 지옥의 교리는 우리로 하여금 선교적인 일에 대하여 열정과 긴급성을 갖게 한다. 만일 저 먼 나라에 살고 있는 사람들이 복음을 듣지 못하여 그리스도 없는 영원의 형벌을 향하여 가고 있다면 우리는 마땅히 복음을 그들에게 전해야 할 것이 아니겠는가! “그런즉 저희가 믿지 아니하는 이를 어찌 부르리요 듣지도 못한 이를 어찌 믿으리요 전파하는 자가 없이 어찌 들으리요”(롬 10:14)
새로운 땅
“중간상태” 속에서 신자들은 즐거워 할 것이다. 그러나 이것은 잠정적이며 불완전한 것이다. 이 즐거움이 완성되기 위해서는 육체의 부활과 함께 하나님의 구속사역의 결정체로서 창조하실 새 땅을 바라보아야 하는 것이다.
1. 새 땅에 대한 교리의 중요성
1) 장차 올 생명(생활)을 올바로 이해하기 위하여 중요하다.
성경은 하나님께서 새 땅을 창조하실 것이며, 그 땅위에 우리는 영화롭고 부활된 육체를 가지고 하나님을 찬양할 것이라고 전해준다. 그리고 하나님께서 거하시는 곳이 바로 하늘이기 때문에 우리는 새 땅에 있으면서도 하늘에 있는 것이다. 왜냐하면 하늘과 땅이 더 이상 나누어져 있지 않고 하나가 되기 때문이다.(계 21:1-3)
2) 구속계획의 충만한 다양성들을 올바로 이해할 수 있다.
그리스도의 완전한 사역이란 이 모든 창조세계를 죄의 영향력들로부터 구속해내는 것을 의미한다. 이는 하나님이 새로운 땅에 도래(到來)하실 때 비로소 성취된다. 즉 잃어버렸던 낙원이 회복되는 것이다.
3) 구약의 예언과 밀접한 연관이 있다.
예언들은 우리에게 미래의 어느 때에 땅이 현재보다 더 풍성한 곡물들을 낼 것이며, 사막에서 장미가 피고 쟁기로 밭을 갈기도 끝나기 전에 추수 때가 될 것이며, 산들이 달콤한 포도주를 낼 것이라고 말하고 있다. 왜냐하면 물이 바다를 덮음같이 여호와를 아는 지식이 세상에 충만할 것이기 때문이다.
그런데 예언들은 세대주의자들의 주장과는 달리 그 성질상 상징적인 언어로 표현되었다는 사실을 명심해야 한다. 이 예언들은 “새 땅”을 상징적으로 묘사하고 있는 것이다. 그리고 새 땅은 천년동안만이 아니라 영원무궁토록 존재할 것이다. 그러므로 새 땅에 관한 성경적 가르침을 염두에 두고 구약 예언자들의 예언과 선포를 읽어 내려가면 새로운 차원에서 그 의미들을 발견하게 된다.
2. 새 땅에 대해 성경은 무엇이라고 말하는가?
“땅은 너로 인하여 저주를 받고” - 인간이 죄를 지었을 때 땅을 지배할 수 있는 권한 역시 상실 되었다. 그러나 인간의 타락 후 즉시 하나님은 인간에게 “어머니 약속”을 주셨다.(창 3:15) 그러므로 땅이 인간의 죄로 말미암아 저주 받았다는 사실은 역설적으로 약속된 승리의 한 부분으로, 저주와 그 밖의 모든 결과들은 마땅히 제거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이러한 의미에서 볼 때 새 땅에 대한 기대는 이미 창세기 3:15의 약속 안에 포함되어 있었다.
그러므로 아브라함과 후손들에게 주어진 은혜언약의 구약시대에는 땅의 유업(遺業)이 가나안 지경에 국한되었지만, 신약시대에는 땅의 유업이란 “온 땅”을 포함하고 있는 것이다. 이미 아브라함은 자기에게 약속된 유업의 완전한 성취로서 새 땅을 바라보았다.(“지으실 터가 있는 성” 히11:9-10) 동시에 다른 족장들도 이러한 전통 가운데 서 있음이 명백하다.
또한 히브리서 4장으로부터 가나안 땅은 하나님의 백성들을 위해 예비 된 영원한 안식의 모형(type)임을 알 수가 있다. 불신앙과 불순종으로 인해 가나안 땅의 안식에 들어갈 수 없었던 광야의 이스라엘 백성들은, 비슷한 불순종을 범함으로써 장차 올 새 생활 속에서 우리를 기다리는 “안식할 때”에 들어가지 못할 사람들의 원형으로서 묘사되고 있다. 그러므로 가나안은 그 자체가 목적일 수가 없다. 가나안은 장차 올 새 땅을 가리키는 표지판과 같다.
이처럼 구약의 사상이 신약에서 확대되었다는 원리 아래서 우리가 다시 창세기 17:8을 읽어본다면 우리는 모든 하나님의 백성들이 영원토록 소유하게 될 새로운 땅에 관한 약속이 담겨져 있음을 새롭게 발견할 것이며, 하나님의 백성이란 넓은 의미에서 아브라함의 후손들을 지칭하고 있으며 가나안은 영원한 새 땅의 모형에 불과하다는 사실도 알게 된다.
3. 우주 갱신(更新) 이론
1) 벧후 3;13, 계 21:1 - “카이노스”
“네오스”는 시간과 기원에 있어서 전혀 새롭다는 뜻이며, “카이노스”는 본성이나 질에 있어서 새롭다는 뜻이다. 그러므로 “카이노스”를 사용한 이 구절들은 현재의 우주와 동질이되 영화롭게 갱신된 우주의 창조를 말하고 있는 것이다.
2) 롬 8:20-21
바울의 요점은 장차 종말에 현재의 창조세계가 전혀 새로운 세계가 되는 것이 아니라 모든 부패로부터 자유케 될 것이라는 점이다.
3) 그리스도와 함께 일어난 사람들은 전혀 새로운 인종이 아니라 바로 이 땅위에 살았던 하나님의 백성들이다. 그러므로 새 땅은 현재의 땅과 전혀 다른 종류가 아니라 놀랍게도 새롭게 변한 현재의 땅이다.
4) 만일 하나님께서 현재의 우주를 완전 소멸시켜야 한다면 결과적으로 사단이 승리를 쟁취하게 된다. 사단이 현재의 우주와 창조질서를 치명적으로 부패시키는 데 성공했기 때문에 하나님도 병든 우주를 다루실 수 없어서 완전소멸하게 되었다는 결론에 이른다. 그러나 이 땅을 새롭게 하시고 사단의 악한 음모의 결과들을 이 땅에서부터 완전히 제거하실 바로 그 때이다.
4. 새 땅에 대한 성경의 묘사들
이사야 66:22-23의 “매 월삭”, ‘매 안식일“의 용어들은 장차 모든 나라들로부터 모여들 하나님의 백성들이 영원토록 지속될 예배를 하나님께 드리게 될 것이며, 이러한 예배는 새 땅에서 즐거움을 만끽하고 살게 될 영화로운 새 존재에게는 잘 어울리게 될 것임을 말하고 있는 것이다.
벧후 3장에서 강림의 약속을 조롱하는 자들에게 하는 베드로의 답변은 주께서 자기의 다시 오심을 지체하고 계시니 이는 아무도 멸망치 않고 다 회개하기에 이르기를 원하시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그러므로 장차 다가올 사건들에 대한 올바른 태도는 왜 그러한 시기가 늦게 오는가 하며 조롱하는 태도가 아니라 간절한 마음으로 그리스도의 재림과 재림 후 있게 될 새 땅을 기다리는 일이다. 이러한 기다림 속에서 살 때 현재 이곳의 우리의 삶이 질적으로 변화되어야 할 것이다.
또한 계시록 21:1-4에서 “카이노스(새로운)”는 새 하늘과 새 땅의 “새로움”을 묘사한다. 즉 요한이 본 세계는 지금의 것과 전혀 다른 우주가 아니라 오히려 현재의 우주가 영화롭고 새롭게 된 상태임을 명심해야 할 것이다.
5. 새 땅에 대한 가르침이 우리에게 주는 것들
새 땅의 교리는 우리에게 무한한 소망과 용기와 낙관(樂觀)을 준다. 비록 악이 횡행(橫行)하는 세상이지만 그리스도께서 이미 최후의 승리를 확보하셨기 때문에 우리는 무한한 안위(安慰)를 얻게 된다. 그러므로 하나님 나라의 시민들로서 우리는 현재의 땅이 완전히 소멸되는 것으로 간주(看做)해서도 안 되고, 그렇게 되는 것을 기뻐해서도 안 될 것이다. 마땅히 더 좋은 세계를 만들기 위해 힘써야 할 것이며, 그리스도 왕국을 충만하게 노출시키기 위해 힘쓰는 노력들은 영원한 가치가 있는 값진 것들이다.
이 땅에 살면서 우리는 이미 하나님의 새 땅에서 살 준비를 하고 있다. 하나님의 왕국을 위한 현재의 봉사를 통해서 새 땅의 건설을 위한 자재들이 이미 모아지고 있는 것이다. 그리고 이 역사의 중앙에는 죽임당하시고, 죽은 자의 첫 열매가 되시고, 후에 온 땅의 왕들의 왕이 되신 “어린 양”이 있다. 장차 그 어느 날엔가 우리는 우리의 면류관들을 벗어 그 발 앞에 놓고 “경이(驚異)와 사랑 그리고 찬양”속에 깊이 빠질 것이다.
종말론에 관한 최근의 경향들
1. 알브레흐트 리츨(Albrecht Ritschl, 1822-1889)
리츨은 왕국을 하나님의 선물로 생각하지 않고 인간의 임무로 간주(看做)하고 있다. 그에 의하면 “기독교는 도덕적 종교”이며 왕국은 예수의 윤리적 가치들과 목표들이다. “지금 여기”에서 하나님께 대한 순종과 관련이 있는 왕국은 인간의 임무인 것이다. 그러므로 리츨의 왕국관에서 종말론은 아무런 역할도 하지 못한다.
2. 아돌프 본 하르낙(Adolf von Harnack, 1851-1930)
하르낙은 하나님의 왕국은 인간 개개인들의 마음속에서 이루어지는 지배라고 말한다. 복음이란 하나님의 아버지 되심, 인간 영혼의 무한한 가치성 등의 개념으로 표현될 수 있다고 단정한다. 그는 리츨처럼 하나님의 왕국의 종말론적 측면들을 배척하며, 예수를 단지 “도덕선생”으로 보게 된 것이다.
3. 요하네스 봐이스(Johannes Weiss, 1863-1914)
왕국은 인간의 임무가 아니며 또한 인간의 행위로 말미암아 도래(到來)하지도 않는다. 그것은 전적으로 하나님의 사역이다. 이러한 봐이스의 주장은 예수님의 가르침 속에서 미래 종말론이 중심을 이루고 있다는 사실을 인식하고 있다. 그러나 그는 왕국이 전적으로 미래적인 것으로서, 현재적일 수 없다고 주장한다.
4. 알버트 슈바이처(Albert Schweitzer, 1875-1966)
슈바이처는 “철저한/연속적 종말론(consequent/consistent eschatology)"을 주장했다. 그는 예수님에 대한 "도덕적 모범자나 윤리의 선생"상(像)을 깨뜨려 버리는데 공헌했지만, 홀름스트룀(Holmstrom)의 논평은 의미심장하다. “슈바이처의 철저한 종말론은 계속적인 자유주의적 기독론을 남겨 두게 되었다. 그의 형식적인 종말론의 우선권은 실제적으로는 종말론을 파산시키게 되었다. 그의 윤리는 리츨의 윤리주의보다도 더욱 기독교의 진리로부터 멀리 벗어난 도덕주의로 남아 있게 되었다”
5. 찰스 헤롤드 도드(Charles Harold Dodd, 1884-1973)
그의 “실현된 종말론”은 슈바이처의 “철저한 종말론”에 대한 강한 반응이다. 도드는 왕국의 실체가 예수의 사역 속에서 실현되었다고 한다. 그러나 도드는 문자적 그리스도의 재림의 교리를 신화로서 취급함으로써, 재림과 왕국의 미래적 완성에 대한 분명한 가르침을 우리에게 제시하는 데 실패했다.
6. 게르할더스 보스(Geerhardus Vos, 1862-1949)
보스는 그리스도의 오심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왕국이 도래했고 최후의 종말론적 세기가 시작되었다는 점을 주장했다. 그리고 도드와는 달리 재림과 부활, 최후심판을 가르치고 있다. 이렇게 하여 보스는 성경의 종말론에 대해 균형 잡힌 접근을 하며 성경의 충만한 권위를 인정한다. 이는 성경의 가르침의 전체성을 공평하게 다루는 처사(處事)인 것이다.
7. 오스카 쿨만(Oscar Cullmann)
쿨만은 “구원사”학파의 대표적 학자이다. 그의 입장은 실현된 종말론과 아울러 미래 종말론을 위한 여지를 남겨놓고 있다. 그는 육체의 부활과 창조세계의 새롭게 되는 것이 앞으로 다가올 사건이라는 것을 확인한다. 역사의 위대한 중앙점이 그리스도의 초림 시에 발생했기 때문에 오늘날 신자들은 새 세대 속에 살고 있다는 진정한 의미가 있다. 그러나 재림, 대부활사건 그리고 온 창조세계의 새로워짐 등을 포함할 하나님 왕국의 최종적 완성은 아직도 미래 속에 놓여져 있다. 즉 “이미”와 “아직” 사이의 긴장인 것이다.
8. 수직적 종말론(vertical eschatology) - 칼 바르트
바르트의 종말론이란 미래에 발생하게 될 어떤 사건이 아니다. 그리스도를 직면하는 순간마다 믿음과 회개를 통하여 예수 그리스도를 포용하는 것이다. 이것을 “무시간적 종말론”이라 부를 수 있을 것이다. 즉 재림이란 미래적이 아니라 “인간의 실존적 상황 속에서 영원에 대한 끝없는 간절(懇切)성에 대한 무시간적 상징”인 것이다. 이것을 “수평적 종말론”과 구별되는 의미에서 “수직적 종말론”이라고 부를 수 있다. 영원자(Eternal one)는 항상 우리 위에 있는 존재이므로, 그가 우리에게 말씀할 때에는 언제고 우리는 그에게 반응해야 한다. 우리가 반응하는 그 순간에 영원은 시간과 교차하게 되며, 이것이 곧 종말론인 것이다.
이렇게 된다면 결국 미래 종말론에 관한 여지는 없게 된다. 이런 이해는 재림이나 최후의 심판 등의 기대를 중세기의 잔해물(殘骸物) 정도로 여기게 할 소지를 줄 수 있다. 사실상 현재와 미래, “이미”와 “아직”사이의 정확한 관계성에 대해 바르트의 입장은 모호한 점이 많다.
9. 실존주의적 종말론(existentialist eschatology) - 루돌프 불트만
그의 종말론은 미래에 일어나게 될 어떤 사건들과 관계가 있는 것이 아니라, 이 세상 속에 오신 예수 그리스도와 개개인들이 그에 대해 취하여야 할 결정과 관련이 있다고 한다. 즉 “예수 그리스도가 그 자체인 종말론적 사건은 말씀이 전파될 때 지금 여기서 발생하는 것”이다. 특히 그는 요한복음을 통해 최후의 심판이란 없다고 말한다. 심판은 그리스도를 통하여 이미 왔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요한복음에 나타나는 종말론적 사건들은 후기 편집자에 의해 삽입된 것이라고 한다.
이처럼 불트만은 실존주의 철학자들(하이데거)의 빛 아래서 신약의 종말론을 재해석 하고 있다. 그는 말씀의 선포에 대한 결단의 필요성을 역설(力說)했고 그리스도에 대한 믿음을 통해서만 자신의 진정한 존재를 찾을 수 있다고 말했다. 그러나 미래 종말론을 거절하는 사고(思考)나 성경의 메시지를 단순히 인간론으로 환원시키려는 의도는 마땅히 배척되어야 한다.
10. 미래주의적 종말론(futurist eschatology)
몰트만의 종말론은 “그리스도와 그의 미래”에 관한 것이다. 그는 “재림이란 실제적으로 떠났던 사람이 돌아오는 것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임박한 도착’을 의미한다...그것은 우리를 향하여 오고 있는 것의 임재, 즉 도착하는 미래이다”라고 말한다. 그러나 몰트만에게 있어서 하나님의 왕국이란 현재가 아니라 미래일 뿐이다. 기독교는 하나님의 왕국을 기다리는 자들의 공동체로 이해되기 때문이다. 그리고 왕국이 오직 미래라는 사실은 우리의 현재의 존재는 우리의 미래적 존재와 모순이 된다는 것을 의미한다.
몰트만은 하나님의 왕국을 단지 미래적으로만 보는 일방적 강조를 하고 있다. 그리고 계시를 전적으로 약속이라는 측면에서만 해석하고 있다. 또한 그는 미래를 모호하고 단순히 형식적이며 구체적 내용을 결여하고 있는 것으로 묘사하고 있다. 그의 말을 듣고 있노라면 새롭고 놀라운 그 무엇이 미래에 일어날 것이지만, 아무도 무엇이 일어날 것인지에 관해서는 모른다는 느낌을 얻게 될 것이다.
결론 - 종말론적 연구들에 의해 세워진 요점들
1)종말론적 교훈들은 성경의 일관성 있는 메시지로서 간과되어서는 안 될 것이다.
2)어느 의미에서 우리는 지금 마지막 날들 가운데 놓여 있다.
3)다른 의미에서 역사의 최종적 종말론적 완성은 아직도 미래 속에 놓여 있다.
4)하나님의 왕국은 현재적이며 미래적이다. 즉 성경적 종말론은 그것이 완성되기 위해서는 현재적 실체들과 아울러 미래의 소망들을 함께 다루어야만 한다.
<要約後記>
육체의 부활과 최후의 심판 그리고 영원한 형벌에 관한 교리는 성경이 말씀하는 바 진리이다. 우리는 이러한 것들이 있기에 더욱 그리스도인으로서의 생애(生涯)를 이어나가는 소망을 가지게 된다. 그리고 종말과 함께 재림하시는 예수 그리스도와 새로운 하늘과 땅은 우리 믿음의 결국이다. 이는 베드로 사도의 가르침에서도 일목요연(一目瞭然)하게 나타나고 있다. “예수를 너희가 보지 못하였으나 사랑하는도다 이제도 보지 못하나 믿고 말할 수 없는 영광스러운 즐거움으로 기뻐하니 믿음의 결국 곧 영혼의 구원을 받음이라”(벧전 1:8~9)
안토니 후크마의 「개혁주의 종말론」은 오늘날 유행하는 잘못된 종말론의 오류를 지적할 수 있는 중요한 변증의 역할을 하고 있다고 생각한다. 사람들은 종말이라고 하면 마지막에 있게 될 소위 '최후 정점(頂點)의 종말' 만을 생각하는 경향이 있다. 이러한 잘못된 종말론은 종말에 대한 개념을 잘못 가지는 데서부터 출발한다. 종말과 주의 재림의 징조를 지나치게 강조하는 부류(部類)는 역사적으로 이단들에게서 강력하게 나타났다. 이들은 추종하는 신도(信徒)에게 지상 천년왕국 같은 내세의 행복한 삶을 위하여 현세의 삶을 전적으로 포기하라고 하는 이념을 주입시켜서 재산과 모든 것을 바치게 함으로써 그들의 삶을 피폐하게 만들었다.
잘못된 종말론의 특징은 현존(現存)하는 하나님 나라를 알지 못하기 때문에 세상 중에 존재하는 하나님 나라에서의 성실한 삶에 대해서는 그다지 강조하지 않고 주로 오게 될 세상에 대해서만 이야기하는 것이다. 따라서 징조를 해석함에 있어서는 전적으로 도래(到來)할 세상의 임박성에 맞추어서 자신들에게는 유리한 쪽으로 해석하는 작위적 조작의 일색(一色)이 되어 버린다. 그러나 모든 것의 마지막 때 있게 될 최후 정점에서의 주님의 재림과 심판은 불신자들에게는 경악의 사건이 될 것이나 성도들에게는 최상의 기쁜 날이 될 것이다.
이런 점에 있어서 「개혁주의 종말론」은 성경적 입장에서 편견 없이 교리를 해석해주고 있다. 특히 최후의 심판과 영원한 형벌을 인간적인 노력으로 피해보려는 신학적, 철학적, 사상적 노력들에 일침을 가하는 아주 시원한 해석이다. 분명 육체의 부활과 함께 일련의 사건으로 이어지는 최후의 심판의 목적은 두 가지로 나타나날 것이다. 그것은 의인에 대해서는 구원의 완성을 이루어 주시는 것이며, 악인에 대해서는 영원한 형벌이 결정되는 순간이다. 이는 곧 심판(영원한 분리)을 뜻한다. "환난 받는 너희에게는 우리와 함께 안식으로 갚으시는 것이 하나님의 공의시니 주 예수께서 저의 능력의 천사들과 함께 하늘로부터 불꽃 중에 나타나실 때에 하나님을 모르는 자들과 우리 주 예수의 복음을 복종치 않는 자들에게 형벌을 주시리니"(살후 1:7~8)라고 함으로써 의인에게는 안식을 주시고 악인에게는 형벌을 주신다고 하는 심판이 묘사되어 있다.
주님이 성육신하신 목적은 물론 세상의 구원이지만 세상의 심판도 그 목적에 포함되는 것이다. 그리고 그 심판의 날을 이루시려고 재림하시는 것이다. 그러므로 심판이 없다 하거나 영벌이 없다고 주장을 한다면, 이는 불신앙이나 다름이 없는 것이다. 반면에 이 종말에 관한 성경의 교리들을 믿는 신자라면 더욱 더 하나님을 경외하며 이를 속히 이루시도록 “주의 기도”를 기쁨과 소망으로 아뢰어야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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