태일도(太一道)와 창시자 소포진(蕭抱珍)
- 태일도의 창시자, 소포진
여진족(金)이 중원을 장악할 즈음, 북방에서 가장 먼저 일어난 도교 문파는 태일도(太一道)이다(금金의 천권天眷, 1138~1140년 연간에 창립). 그 창시자는 소포진(蕭抱珍, ?~1166)이다. 소포진의 이름은 원승(元昇)이라고 하는데, 급군(汲郡) 사람이다. 그의 본적과 소년 시절의 행적에 대해서 참고할 자료는 찾을 수 없다.
그러나 소포진이 교파를 창립하는 과정에 대한 자료는 많은 서적에서 찾을 수 있다. 왕약허(王若虛)의 <일오진인전(一悟眞人傳)>에 따르면, 소포진이 태일교(혹은 태일도)를 창립하기 전에 구파(부록파)의 한 도인(동이계 선인으로 추정됨)에게서 부록(符籙)의 비법을 배웠으며, 이를 창립과 포교의 주된 방식으로 삼았다고 한다.
- 태일도의 창시
도교 3대 문파의 하나인 태일도(太一道)는 1138년경 중국 금나라 때 시작되었다. '태일(太一)'이란 천지가 혼돈되고 태극이 가려지지 않은 채 하나의 이(理)로 통일되었다는 뜻이다.
창시자 '소포진'은 금나라에선 '태일진인(太一眞人)', 원나라 때는 '일오진인(一悟眞人)'이라 불리었다. 당시 금나라 수도인 대도(大都, 지금의 길림성 장춘) 일대에서는 공포의 황충(蝗蟲,메뚜기) 떼가 나타나 농작물을 해치고 농민들을 도탄에 빠뜨리고 있었다. 금 황실마저 속수무책으로 지켜보는 위급상황에서, 소포진이라는 도인이 나타나서 뛰어난 법술로 황충들을 모두 제거했다고 한다. 이 사건은 만 백성의 환영을 받았으며, 금나라 황실에까지 알려졌다. 마침내 황실로부터 소포진은 '태일진인'이라는 칭호를 하사 받았고, 이때부터 황실의 지원 하에 민간에 널리 태일도가 알려지기 시작하였다.
- 태일(太一)
태일은 천지만물의 생성 근원 또는 우주의 본체를 이르는 말이다. 〈예기(禮記)〉에는 태일을 예악의 근본으로서 천지·음양·사시·귀신을 분화시키는 본원으로 풀이하고 있다. 〈여씨춘추(呂氏春秋)〉 나 〈공자가어 (孔子家語)〉에서도 같은 뜻으로 보고 있다. 특히 〈여씨춘추〉에서는 태일에서 양의와 음양이 생겨난다고 하여 이것을 '태극(太極)'과 같은 것으로 보고 있다.
〈장자 莊子〉에는 노자의 주요사상을 '태일'이라고 했는데, 여기서 태일은 '도(道)'를 가리킨다. 도는 일(一)에서 나오므로, 도 자체가 바로 태일이다.
태일은 때때로 종교적 숭배의 대상이 되었다는 점에서 태극이나 도와 구별되기도 한다. 고염무(顧炎武)의 고증에 의하면, 고대에서부터 천자가 봄·가을에 동남쪽 교외에서 태뢰를 사용하여 태일에 제사지냈다고 하며, 특히 한나라 무제(武帝) 때는 태일이 종교적 숭배대상으로서 각종 천신이나 지신보다 더 중요하게 취급되었다고 한다.
- 지고무상의 태일신
태일(太一)은 본래 천지신명의 칭호로서, 그 유래가 매우 오래 된다. 한(漢) 때에 들어온 태일신앙은 도교에서 매우 중요한 위치를 차지했다. 전통적인 구궁격국설(九宮格局說)에 따르면, 태일은 가운데 자리에 위치하면서 밖을 제어할 수 있는 지고무상의 신이다. 태(太)는 최고를 뜻하고 일(一)은 시원을 의미하기 때문에, 태일신(太一神)은 절대무비의 지위에 있다(북극성은 천극성天極星 또는 천제성天帝星이라 불렸으며, 하늘의 제왕인 태일신太一神이 상주하는 곳이라고 믿었다).
태일신은 도교가 생겨난 후에 자연히 신선계보에 편입되었다. 다만 북송 이전에는 태일을 주신으로 하는 도교 유파가 형성되지 못했을 따름이다. 소포진이 비로소 우주의 주재자로서 태일신의 신격을 확립하고, 하늘에서 내려와 생령을 구제하는 지상신(至上神)으로 삼은 것이다. 소포진이 전한 비법은 <태일삼원법록지술(太一三元法籙之術)>이라 한다.
태일신의 이름을 빌려 만든 부적이 바로 태일록(太一籙)이다. 이 부적은 세 가지 방식이 있어 삼원(三元)이라고 한다. ‘삼(三)’은 천지수(天地水)이고 일월성(日月星)이며 천지인(天地人), 상중하(上中下)이다.
초기의 장도릉(?~156년)의 천사도(天師道)에는 ‘삼원금서옥록(三元金書玉籙)’이 있었는데, 상중하 식으로 나눴다. 천사도의 ‘옥록’이 소포진이 만든 ‘태일삼원법록’의 오리지널 버전이 아닌가 한다.
- 소포진 이후의 법맥
소포진이 창립한 태일도는 장도릉의 천사도와 한 가지 유사점이 있다. 바로 하나의 성씨로 명맥을 유지한다는 점이다. 태일도에서 장문인 되려면 원래 소씨 성이 아닐 경우, 반드시 소씨로 성을 바꿔야 한다. 이것은 사실 천사도의 전수방식을 모방한 것으로 보인다.
소포진 이후로 ‘태일삼원법록’을 전수 받은 사람은 대대로 끊이지 않았다. 2대 종사(宗師)가 된 한도희, 3대 종사 왕지충은 소도희(簫道熙), 소지충(簫志沖)으로 성을 바꿨다. 4대 소보도(簫輔道), 5대 소이거수(簫李居壽), 6대 소이전우(簫李全祐), 7대 소채천우(簫蔡天祐)이다. 그러나 그 이후 태일도는 점점 쇠퇴했다.
- 태일도의 교풍
소포진이 태일도를 창립한 후부터 7대 채천우가 주관할 때까지, 태일도는 세상에 널리 알려졌고 교단조직도 부단히 정비되어 갔다. 비록 태일도의 수뇌 인물들이 구(舊) 부록파로부터 도가의 비법을 배웠지만, 그것만이 다는 아니었다. 그들은 태일을 기본 틀로 삼아 교리의 내용을 끊임없이 보완하고 변혁하였다.
시조 소포진은 여성의 임신 중 고통을 단서(丹書)를 복용시킴으로써 완화시키고, 제3조 소지충은 황해(蝗害) 즉 황충(메뚜기 떼)의 피해)를 제거하고, 부수(符水, 부적을 태운 물)에 의해서 치병을 하였다고 한다. 따라서 태일도 교법의 중심은 부적에 의한 치병, 재앙 제거 등으로 보인다.
태일교에서 부록을 써서 재앙을 제도(濟度)하였다는 사실은 종래의 도교와 같은 계통이라 하겠다. 또한 태일교는 특수하게 조식법보다는 묵념법(염결법)을 주요 수련방법으로 하였다. 그런데 묵념법은 한겨레 고유의 선도에서 가장 중요시한 수련법이었다. 한편, 태일도에서는 중도(中道)를 중히 여기고 대처(帶妻)·음주(飮酒) 등을 엄금하는 등 개혁적인 면도 있었다.
또한 교세를 확장하는 과정에서 태일도에서는 <도덕경>의 '유약(柔弱)' 사상에 비추어 일을 처리하는 원칙을 처음으로 만들었다. 효도와 인륜을 돈독히 할 것을 제창하고, 구제와 보시를 즐겨하고, 겉치레를 좋아하는 과거의 폐습을 바로잡았다.
태일교는 천지혼돈과 지리순일(至理純一)을 신봉해 누구나 본원의 자리로 돌아갈 것을 주장했다. 이는 순박한 옛 유풍의 구현이자 당시 민중의 현실적 요구를 반영한 것이다. 이로 미루어볼 때 태일교는 다분히 민중성을 띠고 있었음을 알 수 있다.
- 우리 선도(仙道)와의 관계
금(金)은 한겨레의 방계부족인 여진족이 세운 나라이며(여진 완안부의 아골타가 1115년 건국함), 우리와 같이 백두산을 연원으로 삼고 있다. 시조 소포진은 금의 수도(장춘)에서 처음 세상에 등장하였고, 또한 금나라 황실의 후원 하에 수도 일대에서 도교 문파(태일교)를 조직해 본격적인 포교 활동을 하였다. 따라서 그의 활동무대나 수도경력, 도맥전승 등의 중요무대는 바로 만주 일대였다. 그런데 만주는 고구려의 옛 강토이며, 그 당시만해도 그곳에는 고구려의 선맥이 계속 이어져 왔을 것으로 추정된다.
또한 그가 교범으로 삼은 천사도의 장도릉 등도 역시 동이계 도인들로 보고 있다. 그리고 태일도의 주된 수련법도 고조선의 선도에서 가르쳐온 묵념법을 계승하여, 중심으로 삼고 있다. 이런 여러 사실들로 보아, 소포진은 고구려 선도의 맥을 계승한 선인으로 추정된다.
<참고>
1) 장지상, <원극공법> 제1권
2) 다음 백과, 위키 백과
3) 잔스촹(중국 하문대학 교수), <도교문화 15강>
4) 무애, <기공이란 무엇인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