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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조문제
진리충격
자동차가 터널을 빠져나올 때 눈이 부시다. 터널로 들어갈 때도 긴장된다. 서로 다른 의사결정 단위에 속하는 두 계가 마주치는 접점을 통과할 때 강한 충격이 발생한다. 하나의 결맞음 뭉치와 또 다른 결맞음 뭉치 사이에 결어긋남이 있다. 충격은 그곳에 있다. 그 충격이 나에게 있어서는 소크라테스가 들었다는 다이몬의 목소리다.
우주 탐사선 보이저 1호가 태양권을 벗어나면 말단충격을 받는다. 태양풍이 성간 매질과 충돌하여 속도가 느려진 데 따른 충격파가 있다. 비행기는 이륙할 때와 착륙할 때가 특히 위험하다. 배는 항구를 떠날 때와 도착할 때 충격이 있다. 통통배가 뱃전에 폐타이어를 주렁주렁 매달고 있는 이유다. 자동차라면 변속충격이 있다. 자동변속기라도 킥 다운이 발생한다. 서로 다른 두 세계가 만나는 모든 곳에 결코 피해 갈 수 없는 충격이 있다.
에너지는 방향성이 있다. 에너지의 방향성이 켜를 이룬다. 켜와 켜가 모여 결을 이룬다. 의사결정이 일어나는 사건의 마디와 마디 사이에 결어긋남이 있다. 인간의 모든 잘못은 결어긋남에 따른 충격을 회피하려는 과정에 일어난다.
서로 다른 성별이 만날 때, 서로 다른 신분이 만날 때, 서로 다른 문화가 만날 때, 서로 다른 언어가 만날 때, 서로 다른 피부색이 만날 때, 서로 다른 문명이 만날 때 강한 충격파가 만들어진다. 그곳에서 큰 소리가 난다. 그럴 때 인간은 당황한다.
모든 연결부위는 구조적으로 취약하다. 계를 이루는 자원들은 중심의 코어를 바라보고 결맞음을 이룬다. 힘이 꺾이는 관절 부위는 자원들이 서로 등을 돌리고 있다. 조직의 연결부위에서 파동의 진행 방향이 꺾인다. 그곳에서는 어느 장단에 춤을 추어야 할지 모르게 된다. 조직의 약한 고리가 만들어진다.
사람은 인지충격이 있다. 개인은 인지부조화로 충격을 회피한다. 집단은 집단사고와 확증편향으로 주변과 동조화해 충격을 줄인다. 그러다가 일이 커져서 사태는 걷잡을 수 없게 된다. 동조화할수록 충격이 증폭되기 때문이다.
충격을 회피하는 사회적 기술이 발달한 사람은 비위가 좋다. 그들은 유들유들하고 뻔뻔스럽다. 충격을 조절할 수 있는 사람은 게임의 판을 설계한 사람이다. 그들은 조절장치를 쥐고 있다. 그들은 긴장하지 않는다. 쫄지 않고 당당하다. 그 조절장치를 권력이라고 부른다. 그것을 과시하는 사람도 있다. 그들은 위세를 부리고 거들먹거린다. 그 기술로 남을 괴롭히는 사람도 있다. 이지메와 왕따와 텃세와 신고식과 얼차려다. 발달한 사회적 기술로 무장하고 다른 사람을 곤경에 빠뜨리고는 즐거워한다.
어디를 가나 백래시가 있다. 정치판의 역린과 같다. 정치인이 민중을 제압하려다가 인지충격을 유발하면 역린이 작용한다. 정치인과 대중 사이의 심리적 간극을 들킨 데 따른 결어긋남이다. 정치인은 자신이 심리적인 공격으로 대중을 곤경에 빠뜨렸다는 사실을 모르고 당황한다. 시장에서 오뎅을 먹는 기술로 대중과의 심리적 간극을 숨기는 사람도 있다. 약은 사람이다.
언제나 어떤 둘을 연결하는 문제를 고민하게 된다. 연필을 쥐든 젓가락을 쥐든 문제가 있다. 힘 조절이 필요하다. 익숙하지 않으면 긴장하고 허둥댄다. 누구든 처음에는 서투르다. 무엇을 하든 사전 준비동작과 사후 마무리 동작이 필요하다. 이런 쪽으로 어리숙한 숙맥도 있고 능란한 선수도 있다.
계는 충격을 최소화하는 방향으로 움직여야 한다. 역방향은 곤란하고 순방향으로 가야 한다. 한 방향으로 계속 연결하는 방법으로 충격을 극복하고 계속 전진할 수 있다. 진리는 만유의 연결됨이다. 우주는 커다란 하나의 사건이다. 우주를 통째로 연결하는 논리가 진리다. 한 번의 변속레버 조작에 우주 전체가 작동하는 변속기다.
지하철 2호선 신도림역에서 마주 오는 사람과의 충돌을 피하려면 좌측통행해야 한다. 충격을 최소화하는 방향으로 동선이 설계되어야 한다. 고속도로의 분기점과 같다. 꼬리에 꼬리를 물고 한 방향으로 계속 나아가야 한다.
사건은 의사결정 단위의 연결이다. 사건의 마디가 있다. 갈림길에서 판단해야 한다. 정답은 연결의 최대화와 충격의 최소화다. 충격을 무릅쓰고 들이받아도 안 되고 충격을 회피하여 단절해도 안 된다. 오케스트라의 지휘자처럼 모두 연결하여 밀고, 당기고, 조이고, 풀고, 기름치기를 자유자재로 할 수 있어야 한다. 하모니를 끌어낼 수 있어야 한다. 조절장치가 있으면 가능하다.
충격을 피하려고 연결을 끊으면 고립된다. 고립되면 작아진다. 남들은 연결하여 갈수록 커지는데 자신은 단절되어 있으면 상대적으로 작아진다. 작으면 외부 충격에 취약하다. 언젠가 센 놈을 만난다. 충격을 극복하려면 연결하여 몸집을 키워야 한다. 그러려면 자신이 깨지지 않는 한도 안에서 외부 충격을 감수하고 계속 연결해야 한다.
양방향으로 연결하면 약한 고리가 생긴다. 정치인이 중도를 자처하며 양쪽으로 연결하다가 망하는 것과 같다. 원래 부러져도 중간이 부러진다. 척추가 부러진다. 조직은 한 방향으로 가야 몸집을 키워 충격을 다스릴 수 있다. 그러려면 애초에 판을 크게 시작해야 한다. 놀아도 큰물에서 놀아야 한다. 천하를 다투는 큰 게임을 벌여야 한다.
딜레마다. 네거리에서 시작하면 집적대는 놈이 많아서 크기 어렵고, 구석에서 시작하면 찾아오는 손님이 없어 성장을 못 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가운데로 가야 한다. 사람들이 나오지 않는 새벽에 일찍 나가서 광장을 선점해야 한다.
잔머리 쓰는 사람이 있다. 게임 중에 한 판을 이기면 내가 이긴 걸로 하고 여기서 끝내자는 사람이다. 먹튀 전략이다. 그들은 앞뒤를 끊어내고 자신이 유리한 지점에서 한 번만 이기면 된다고 생각한다. 각종 음모론, 괴력난신, 외계인, 환빠, 사차원, 초고대 문명, 내세, 천국 따위 사이비를 마구잡이로 투척하면 운 좋게 하나쯤 걸리지 않을까 싶지만 그렇게는 안 된다. 앞뒤를 잘라내고 치고 빠지기 수법으로 한 번 이길 수는 있으나 이길 때마다 충격을 만든다. 그 대미지는 누적된다. 구멍 난 그물과 같아서 많이 들기는 하는데 하나도 건져 올리지 못한다.
각종 사이비의 공통점은 앞뒤를 끊어서 진위를 판단할 수 없게 만드는 것이다. 그들은 단절 지상주의 사고를 한다. 모든 이슈가 맥락이 없이 투척된다. 뜬금없이 UFO 나오고 뜬금없이 외계인 나온다. 앞뒤의 맥락을 잘라내어 단절하는 방법으로 검증을 피하려는 꼼수다. 사건은 모두 연결되어 있다. 앞을 당겨서 뒤를 얻고 뒤를 당겨서 앞을 얻는데 거짓은 앞뒤를 잘라냈으므로 무엇을 선택했다 한들 그것을 내게로 가져올 수 없다. 최종단계에서 엎어진다.
바둑과 같다. 계속 연결하면 대마불사다. 작은 집을 여럿 지으면 승산이 높을 것 같지만 각개격파 된다. 백래시 때문이다. 끊는 곳마다 충격을 받고 그때마다 손실이 발생하고 그 대미지는 누적된다. 반면 큰 집 하나로 이기려면 모두 연결해야 하며 그러려면 끝까지 가봐야 한다. 큰 승부를 벌이고 장기전을 해야 한다. 그것을 받쳐줄 에너지가 있느냐다. 뚝심이 있어야 한다.
자동차의 연비운전 방법은 브레이크를 밟지 않는 것이다. 브레이크를 밟을 때마다 운동에너지를 도로 바닥에 내동댕이치게 된다. 브레이크는 단절이다. 연결하면 이기고 단절하면 진다. 한 방향으로 계속 연결하여 가면서 몸집을 키우고 충격을 극복하며 끝까지 가는 것이 진리다.
진리는 커다란 충격이다. 그것은 인생을 송두리째 흔든다. 모든 단절을 모든 연결로 바꾼다. 실리를 합리로, 개인을 팀으로, 이원론을 일원론으로, 국지전을 전면전으로, 단기전을 장기전으로, 수동을 능동으로, 수비를 공격으로 바꾼다. 그것은 하나의 큰 충격으로 모든 작은 충격을 극복하게 하는 백신이다. 약은 사람들은 진리를 회피하는 사회적 기술을 발휘한다.
구조문제
매조지 문제가 있다. 한옥을 지을 때 마지막 귀퉁이는 조립할 수 없다. 약간 헐겁게 만들어 억지로 끼워야 한다. 조립식 장난감도 마찬가지다. 부품 한 개는 본드로 붙이거나 나사를 써야 한다. 어떤 작업이든 끝단의 처리가 완벽하지 않다. 내부에서 자체적으로 해결이 안 되고 외부의 도움을 받아야 하는 찜찜함이 남는다.
실내에 좌석을 꽉 채우면 안 되고 최소 한 칸은 비워야 한다. 문을 안으로 여는 버스가 그렇다. 만원 버스라도 문 앞 공간은 비워놓게 되어 있다. 어떤 구조물이든 구조문제 때문에 완전효율을 달성할 수 없다. 항상 여유분이 필요하고 약간의 손실은 감수해야 한다. 빗자루로 방을 쓸어도 마지막 찌꺼기는 걸레로 닦아야 한다.
게는 속으로 살이 찐다. 살이 차면 움직일 수 없다. 허물을 벗어 게딱지 내부에 여유 공간을 확보해야 하는 만큼 비효율이 발생한다. 조직의 생장은 안에서 밖으로 커지는 확산 방향이고 에너지의 작용은 밖에서 안으로 좁혀지는 수렴 방향이다. 세상의 모든 문제가 이 하나의 근본모순에 의해 일어난다는 사실을 알아야 한다.
건축은 안에서 밖으로 커지는데 자재는 밖에서 안으로 들여온다. 조직의 중간은 입구와 출구를 따로 만들어 해결하지만, 말단부는 입구와 출구가 겹친다. 지하철은 승객이 내리고 난 다음 타야 한다. 집의 대문은 입구가 출구다. 중간 부분은 로터리처럼 입구와 출구를 분리하면 되는데 말단부는 구조문제를 피할 수 없다.
의사결정은 조직의 중심에서 일어난다. 중심은 내부에 갇혀 있다. 이는 모순이다. 에너지는 밖에서 들어오므로 의사결정이 밖에서 일어난다. 전쟁을 해도 의사결정은 중앙의 왕이 하는데 전투는 바깥에서 장군이 지휘한다. 판단은 내부에서 CEO가 하고 실행은 외부에서 말단직원이 한다면 이는 앞뒤가 맞지 않은 것이다.
생물이 문제를 해결하는 방법은 껍질을 만들어 외부를 내부화하는 것이다. 세포벽의 탄생이다. 원핵과 진핵, 단세포와 다세포, 겉씨식물과 속씨식물, 단성생식과 양성생식, 체외수정과 체내수정이 그러하다. 진화는 의사결정 지점을 안전한 조직 내부로 들여오는 것이다. 장군이 위화도 회군을 하고 왕이 되는 것이 진화다.
구조문제는 우주의 근본문제다. 무엇을 하든 이 문제에 부딪히며 반드시 손실이 일어난다. 손실을 줄일 수는 있어도 문제를 피해 갈 수는 없다. 구조문제는 원리적으로 해결이 안 되지만 문제를 완화해서 적당히 넘어가는 방법은 있다. 그것은 생물의 진화와 문명의 진보다. 완전 해결은 아니지만 미래로 떠넘길 수는 있다.
컴퓨터에서 나는 열을 완벽하게 잡는 방법은 원리적으로 없다. 에너지가 들어갈 수는 있어도 되돌아나가는 일이 없기 때문이다. 회로에 들어간 에너지를 빼려면 에너지를 투입하여 밀어내야 한다. 에너지 손실 제로의 이상적인 구조는 우주 안에 없다. 조금이라도 움직이면 무조건 손실이 일어난다. 의사결정 비용 때문이다.
입구가 출구다
돔은 돌 하나만 빠져도 전체가 무너진다. 위태롭다. 그러나 반대로 생각해야 한다. 하나만 빠져도 전체가 무너지는 구조는 절대 무너지지 않는다. 하나도 빼놓지 않고 전체에 고루 힘이 전달되기 때문이다. 모두 맞물려 있으므로 하나가 전체를 돕고 전체가 하나를 돕는다. 하나라도 힘을 받지 않고 따로 노는 구조가 있다면 그게 오히려 위험하다. 빠져도 되는 구조는 결국 빠진다. 빠지면서 주변에 영향을 미친다. 대미지가 누적되어 붕괴한다.
우주의 건축도 마찬가지다. 하나만 무너져도 전부 무너지게 되어 있다면 그 하나는 무엇인가? 16가지 기본 입자에 질량을 부여하는 힉스 보손이 그러하듯이 그것이 없으면 안 되는 그것이 있다. 그것은 최초의 탄생이다. 탄생하지 않고 존재하는 것은 우주 안에 없다. 시간과 공간과 물질이 원래부터 그냥 있었다는 식의 억지는 곤란하다. 모든 존재하는 것은 탄생과정을 거쳐 비로소 존재하게 되는 것이다. 그런데 그 탄생과정이 위태롭다.
이는 존재의 기본모순이다. 탄생은 안에서 밖으로 커지는데 에너지는 밖에서 안으로 좁혀진다. 입구가 출구다. 밖에서 안으로 들어오는 에너지와 안에서 밖으로 나가는 탄생이 문간에서 충돌한다. 인간의 모든 실패가 여기서 비롯된다. 잘 나가다가 막판에 한 번씩 꼭 막히는 이유다. 조직의 말단부가 곤란해진다. 폭탄 돌리기와 같다. 폭탄을 넘겼는데 다시 내게로 돌아온다. 내가 폭탄의 입구인데 동시에 출구다. 검사가 도둑이고 왕이 역적이다.
문제를 해결하는 방법은 없지만 물타기 하는 방법은 있다. 그것은 게임 참가자 숫자를 늘리는 것이다. 더 많은 사람이 폭탄 돌리기를 하면 한 숨 돌릴 수 있다. 폭탄이 돌아오기 전에 죽으면 된다. 우주의 팽창과 생물의 진화와 문명의 진보는 본질에서 폭탄돌리기다. 모순을 안고 가는 것이며 한계를 알고 가는 것이다. 지속가능성의 문제다. 언젠가는 끝이 나야 하지만 잠시 시간을 번다. 우주에 완전한 것은 없고 오래 가는 게임이 있을 뿐이다.
괴델의 불완전성의 정리와 같다. 모든 존재는 하나 이상 입구와 출구가 겹친다. 자기 자신과 대칭되는 꼭짓점이 있다. 그 지점은 보증인이 없고 자기가 자기를 증명해야 한다. 말미잘은 입이 곧 항문이다. 음식물을 소화하다가 도로 뱉어내므로 비효율이 따른다. 도둑이 들어간 문으로 나와야 한다면 문간에서 잠복하고 있는 경찰에 잡힐 수밖에 없다. 그런 구조적인 취약점이 반드시 있다. 조직은 그런 약한 고리를 보호하는 과정에 발전한다.
조직은 힘을 양쪽에서 전달받는 코어가 약점이다. 모든 동작은 코어에서 시작하고 코어에서 끝난다. 코어 근육을 강화해야 하는 이유다. 생물은 말단부를 보강하는 갑각류에서 중심부를 강화하는 척추동물로 진화한다. 갑각류가 전선을 방어하는 장군이라면 척추동물은 중앙을 보호하는 왕이다. 코어를 그냥 방치하면? 과일의 핵을 제거하면 형태가 길어진다. 씨 없는 포도나 씨 없는 수박에서 형태가 짜부라져 길이가 길어진 것을 볼 수 있다.
모든 존재는 최초 탄생의 관문에서 딱 걸린다. 거기서 하나가 무너지면 전부 무너진다. 정체가 의심스러운 것은 최초 탄생과정을 추궁하면 진위가 가려진다. 우리는 존재의 탄생과정을 해명하지 않고 중간부터 시작했다. 원자론이 첫 단추를 잘못 끼웠다. 원자의 쪼개지지 않는다는 설정은 우주를 완전한 구조로 가정한 것이다. 모든 탄생한 존재는 원리적으로 취약하다. 존재는 약점을 보완하며 발전하므로 이상적인 구조는 원리적으로 없다.
모순이야말로 우주를 팽창시키고, 생물을 진화시키고, 문명을 진보시키는 동력원이다. 가장 강력한 구조는 부단히 환경과 상호작용하며 약점을 보완하는 구조다. 폭탄 돌리기 게임의 참가자 숫자를 늘려가는 것이다. 모순이 변화를 낳고, 변화가 시공간을 낳고, 시공간이 존재를 낳는다. 모순을 그냥 방치해도 위태롭다. 그사이에 조절장치가 있다. 우주의 조절장치는 각운동량 보존에 따른 등가원리다. 구조론이 존재의 조절장치를 해명한다.
감시자 문제
'감시자는 누가 감시하는가?' 그래픽 노블과 영화로 나온 '왓치맨'의 주제다. 말단의 실수는 윗선에서 바로잡는데 근본의 문제는 누가 바로잡는가? 독재자를 감독할 사람이 없고 검사를 검사할 사람이 없다. 이는 우주의 근본모순에서 비롯된 것이다. 에너지의 입구와 출구가 겹치는 문제다. 위로 자라는 생장과 아래로 내려오는 에너지가 가운데서 충돌하는 문제다.
감시자를 감시하려면 특별한 방법을 써야 한다. 그것이 우리의 민주주의다. 여기에는 시간이 걸린다. 공간에서의 즉각적인 맞대응은 불가능하다. 민주주의가 이기려면 끝까지 가야 한다. 생명의 진화와 문명의 진보는 감시자를 감시하여 시스템의 약점을 보완하면서 계속 가는 구조다. 이윽고 새로운 모순이 일어나면 새로운 보완으로 대응하는 상호작용이 반복된다.
생명은 원핵에서 진핵, 단세포에서 다세포, 단성생식에서 양성생식, 겉씨식물에서 속씨식물, 체외수정에서 체내수정, 무척추동물에서 척추동물로 진화하며 아날로그를 디지털로 바꾼다. 아날로그는 의사결정의 접점이 외부에 노출되어 취약하므로 디지털로 감싸야 한다. 시스템 바깥에서 일어나는 의사결정을 조직 내부로 끌어들여 감시자를 감시하는 게 진화다.
보호자는 누가 보호하는가? 연체동물이 단단한 껍질로 자신을 보호하면 상어가 역시 단단한 이빨로 깨 먹는다. 상어를 피하려고 껍질을 버리고 빠른 속도를 얻으면 척추동물인 경골어류가 더 빠른 속도로 쫓아온다. 동물의 눈과 귀와 코와 더듬이는 외부를 감시하여 자신을 보호하는 장치다. 뇌는 외부의 감시인을 조직 내부로 끌어들여 보호자를 보호하는 장치다.
털과 귀와 눈과 코와 혀는 생명체 외부의 바람과 소리와 빛과 냄새와 맛을 생명체 내부로 들여오는 장치다. 바깥을 내부로 끌어오면 새로운 바깥이 생겨서 더 넓은 외부를 감시해야 하므로 도로 아미타불이 된다. 그런데 그 와중에 약간의 시간을 번다. 외부의 더 높은 단위가 개입하기까지 벌어놓은 시간만큼 잠시 번영하다가 다시 취약해지는 패턴이 반복된다.
자식은 부모가 감시하고 부모는 자식의 자식이 감시한다. 부모가 자식을 학대하면 자식은 후손을 낳지 않는다. 이런 피드백은 시간이 걸리므로 부모와 자식의 관계는 비대칭이다. 그러나 비대칭에도 숨은 대칭이 있다. 공간의 대칭은 없지만 시간의 대칭이 있다. 각운동량 보존에 따라 공간의 거리를 잃는 대신 시간의 속도가 빨라지는 것이 자기 자신과의 대칭이다.
자식이 후손을 낳지 않으면 세력이 약화된다. 부모는 자식을 학대하는 것이 자기 자신을 해치는 일이라는 사실을 깨닫는다. 그것이 자기 자신과의 대칭이다. 왕이 백성을 학대하면 적군이 국경을 범한다. 백성이 외부의 타자가 아니라 자신의 일부라는 사실을 왕이 깨닫는 데는 긴 시간이 걸린다. 이런 식의 피드백은 완벽하지 않다. 이는 우주의 근본 모순이다.
동적 세계관
어린 시절이다. 뭔가 크게 어긋나 있었다. 세상과의 결어긋남이다. 나는 그것을 언어의 문제로 여겼다. 생각을 감시하는 것은 언어다. 인간의 언어는 그다지 신뢰할만한 도구가 아니다. 언어가 잘못되면 생각이 잘못되고 생각이 잘못되면 행동이 잘못된다. 첫 단추를 잘못 끼우므로 이후 모든 것이 잘못된다. 언어에서 생각을 거쳐 행동까지 우리는 너무 멀리 와버렸다.
원리> 언어> 생각> 행동> 연동
누군가는 말했어야 했다. 감시자가 미쳤다. 임금이 벌거숭이다. 검사가 폭주하고 있다. 우리는 인간의 행동을 나무라기 이전에 그것을 감시하는 생각을, 인간의 생각을 나무라기 이전에 그것을 감시하는 언어를, 인간의 언어를 나무라기 이전에 그 언어에 의미를 부여하는 원리를 바로잡아야 한다. 모든 감독자를 감독하는 근원의 원리를 해명하는 것이 구조론이다.
세상을 뒤집어 놓은 사람은 갈릴레이다. 사실은 뒤집힌 것을 바로잡은 것이다. 그런데 충분히 뒤집지 못했다. 어디 지구만 돌겠는가? 태양도 돌고, 은하계도 돌고, 소립자도 돌고, 우주 안의 모든 것이 돌고 있다. 돌지 않는 것은 없다. 세상은 안정된 것의 집합이 아니라 움직이는 것의 연결이다. 겉으로는 멈추어 있는 듯이 보여도 내부에서 활발하게 움직이고 있다.
동적 세계관을 얻어야 한다. 갈릴레이는 조금 뒤집다가 말았다. 모든 것을 뒤집어야 한다. 큰 판을 벌여야 한다. 세계관을 송두리째 뒤집어야 한다. 머리털부터 똥꼬털까지 탈탈 털어야 한다. 돌아올 수 없는 강을 건너야 한다. 사물의 세계에서 사건의 세계로, 물질의 세계에서 성질의 세계로, 정적 세계관에서 동적 세계관으로 가는 문명 차원의 갈아타기가 필요하다.
지구가 도느냐 태양이 도느냐가 문제는 아니다. 성질이 도느냐 물질이 도느냐가 더 중요하다. 사건이 도느냐 사물이 도느냐가 더 윗길이다. 정지한 것이 어떤 외적인 이유로 돌게 되는 것이 아니라 원래 돌고 있는 것이 나란히 움직이면 외부의 관측자에게는 정지한 듯이 보인다. 우리는 거꾸로 생각해야 한다. 도는 것은 당연하고 정지한 것이 특별히 교착된 것이다.
문제는 인간이다. 우리는 내부의 원인과 외부의 원인을 구분하지 못한다. 정지한 것이 갑자기 움직이게 될 때는 원인이 바깥에 있지만 움직이는 것이 한 번 더 변화할 때는 원인이 계 내부에 있다. 직구의 홈런은 원인이 타자에게 있고 변화구의 땅볼은 원인이 투수에게 있다. 똑바로 날아오는 공은 골키퍼가 잘 막은 것이고 휘어져 들어오는 공은 키커가 잘 찬 것이다.
생물이라도 원핵에서 진핵, 단세포에서 다세포, 겉씨에서 속씨, 단성생식에서 양성생식, 체외수정에서 체내수정. 무척추에서 척추동물로 갈수록 내부적인 원인의 비중이 커진다. 그만큼 외부 환경의 영향을 덜 받는 것이다. 체외수정과 겉씨식물은 농부의 수확량이 날씨에 좌우될 수 있다. 아날로그는 환경의 영향을 크게 받고 디지털은 환경의 영향을 받지 않는다.
세상은 돈다. 움직이는 것은 모두 대칭이 있다. 계는 대칭을 조절장치로 사용하여 움직임을 통제한다. 모든 대칭에는 비대칭의 코어가 숨어 있다. 비대칭도 대칭이 있다. 공간으로는 자기 자신과의 대칭이고 시간으로는 자식과의 대칭이다. 비대칭의 대칭은 형태의 대칭이 아니라 에너지의 대칭이다. 그것은 무형의 대칭이다. 우리는 무형의 대칭을 탐구하지 않았다.
유형의 대칭 - 공간의 즉각적 맞대응
무형의 대칭 - 시간의 각운동량 보존
무형의 대칭은 얼핏 대칭이 아닌 듯이 보인다. 씨앗은 하나인데 수확은 열이면 비대칭이다. 대칭은 일 대 일이어야 하는데? 거기에 들어간 햇볕과 영양소를 놓친 것이다. 풍선효과가 천천히 나타나면 정치인은 모른다. 우리는 일정한 시차를 두고 일어나는 에너지의 밸런스 복원을 놓친다. 각운동량 보존의 형태로 성립하는 무형의 대칭을 보는 눈을 얻어야 한다.
역사 이래 인류는 아날로그 세계를 다루어 왔다. 움직임이 내부에 감추어진 디지털 세계를 보지 못했다. 움직이는 것은 자기 자신을 바라본다. 도무지 말을 들어 먹지 않는다. 제 자리에 멈춰 서 있는 당구공은 사람이 치는 데로 굴러가지만, 회전이 걸린 공은 자기 가고 싶은 데로 간다. 불은 타고 싶은 데로 타고, 물은 흐르고 싶은 데로 흐른다. 완전히 다른 세계가 있다.
'도둑을 뒤로 잡지 앞으로 잡나.' 하는 속담이 있다. 움직이는 것은 정면으로 들어가면 안 되고 뒤로 돌아들어 가야 한다. 그곳은 역설이 작용하는 세계다. 물고기를 잡더라도 정면으로 들어가면 물고기는 수풀에 숨는다. 뒤로 돌아들어 가서 먼저 물고기를 수풀 밖으로 끌어내야 한다. 물고기를 그물에 쓸어 담는 것은 그다음이다. 우리는 이 세계를 탐구하지 않았다.
자발적인 변화
움직이는 것은 계가 있고, 계의 중심이 있고, 코어가 있고, 자기 자신을 바라본다. 내부의 코어를 바라본다. 움직이는 공 두 개가 충돌하면 강하게 반발한다. 움직이는 것은 자체 동력을 가지고 내부적인 원인에 의해 자발적인 변화를 일으킨다. 인류는 이 세계를 탐구하지 않았다. 뉴턴이 해명한 것은 외부 작용에 의한 변화의 세계다.
뉴턴 역학의 세계 - 멈춘 것이 외력의 작용에 의해 움직인다. 외력의 작용을 추적하면 된다.
자발적 변화의 세계 - 나란히 움직이는 것의 내부 밸런스가 무너져서 변화가 일어난다. 내부구조를 봐야 한다.
서로 다른 두 세계가 있다. 인류는 뉴턴의 세계를 탐험했을 뿐이다. 훨씬 더 큰 미지의 영역이 남아 있다. 과일은 익는 시기를 자신이 정한다. 사람이 대신 수확기를 정할 수 없다. 인간은 남의 연애를 대신 해줄 수 없고 남의 결혼을 강제할 수도 없다. 내부적인 요인에 의해 일어나는 자발적인 변화의 세계를 인류는 탐구하지 않았다.
갈릴레이는 지구가 돈다고 말했을 뿐이다. 우주 안에 돌지 않는 것은 없다. 모든 움직이는 것은 자체 의사결정 단위를 가지고 그 단위에 속한 자원들은 닫힌계 내부를 바라본다. 남의 말을 듣지 않는다. 지켜야 할 자기 세계가 있다. 우리는 객체 자체의 결을 존중해야 한다. 나무를 다루어도 나이테를 보고 결 따라 대패를 밀어야 한다.
형태의 대칭이 아닌 에너지의 대칭, 유형의 대칭이 아닌 무형의 대칭, 타자와의 대칭이 아닌 자기 자신과의 대칭, 사물의 대칭이 아닌 사건의 대칭을 보는 눈을 얻어야 한다. 정적 세계관이 아닌 동적 세계관이 필요하다. 닫힌계 안에서 자발적으로 일어나는 변화를 탐구해야 한다. 의미 있는 변화는 닫힌계 안에서 자발적으로 일어난다.
정부에서 하지 말라고 해도 기어코 부동산 투기를 한다. 이는 계 내부에서 일어나는 자발적 변화다. 시장 내부에 밸런스의 축이 작동하고 있기 때문이다. 나쁜 사람의 나쁜 마음이 원인이 아니고 닫힌계 내부 밸런스 붕괴가 원인이다. 빈 곳이 있으면 그쪽으로 이동하는 것은 물리학이다. 눈먼 돈이 있으면 누가 먹는 것은 자동이다.
계는 의사결정의 감시자다. 양 떼를 지키는 것은 울타리, 세포를 지키는 것은 세포벽, 단세포를 감시하는 것은 다세포, 원핵을 감시하는 것은 진핵, 조개를 지키는 것은 껍질, 사람을 감시하는 것은 집단이다. 목자는 안에서 감시하고 양치기 개는 밖에서 감시한다. 뼈는 근육 안에서 감시하고 조개껍데기와 게딱지는 밖에서 감시한다.
진화는 감시자를 조직 내부로 들여오는 것이다. 조개껍데기가 근육 내부로 들어가서 뼈가 되는 것이 진화다. 감시자를 감시하려고 새로운 감시자를 보냈더니 그 새로운 감시자를 감시하는 문제가 생겼다. 일이 커진 것이다. 진화가 격발되는 원리다. 다세포는 다양한 구조문제를 겪는다. 암의 발생이나 거인증, 말단비대증이 그러하다.
겉씨식물은 너무 많은 꽃가루를 뿌린다. 체외수정을 하는 물고기도 터무니없이 에너지를 낭비한다. 동물이 하루 종일 교미하다가 죽는 수도 있다. 어떤 사슴은 뿔이 너무 크고 인도공작은 꽁지깃이 너무 길다. 혼자 있으면 괜찮은데 둘이 힘을 합치는 순간 해결되지 않는 문제가 나타난다. 감시자를 감시하다가 일이 커진 것이다.
변속충격
우주는 대칭으로 전부 설명된다. 대칭은 짝짓기다. 동물의 짝짓기는 신중하게 진행된다. 신체가 준비되려면 먼저 호르몬이 바뀌어야 한다. 호르몬은 동물을 흥분시켜 극도로 예민하게 만든다. 짝짓기는 서로에게 큰 충격을 준다. 하던 짓을 멈추어야 짝짓기하는데 동작을 멈추는 순간 잠복해 있던 내부의 관성력이 튀어나온다. 자동차의 변속충격과 같다.
경주마를 생산하는 씨수말이 암말의 발길질에 채는 수가 있으므로 암말이 준비될 때까지는 종마를 대신하는 시정마가 투입된다. 시정마는 암말에게 채다가 결정적인 순간 종마에게 양보한다. 더비가 경주마의 인공수정을 허용하지 않기 때문이다. 암말도 충격을 받고 시정마도 충격을 받는다.
이 문제를 완벽하게 해결하는 이상적인 구조는 우주 안에 없다. 대개 큰 소리가 나거나 열이 나고 연비가 떨어진다. 무단 변속기를 써도 체인 때문에 슬립이 일어난다. 우리는 이 부분에 대한 이론적인 확신을 가져야 한다. 절대로 그렇다. 예외는 없다. 보편진리는 있다.
컴퓨터에 열이 나는 문제를 완벽하게 해결하는 방법은 없다. 엔트로피의 일방향성이다. 혹시 모르잖아 하면 안 되고 절대로 그렇다는 확신이 있어야 한다. 그래야 1+1=2가 되는 사람이다. 자동차의 변속충격과 기계장치의 백래시는 우주의 근본모순이다. 충격을 줄일 수는 있으나 완전한 해결은 절대로 없다.
인간은 두 가지 전략을 쓴다. 첫 번째는 변속충격을 오히려 증폭시켜 집단에 위험을 경고하는 것이다. 왕따, 이지메, 차별, 텃세, 서열, 신고식과 같은 각종 패거리 행동은 집단이 변속충격을 증폭시키는 사회적 기술이다. 많은 희생을 낳지만, 백신효과가 있다. 집단 전체가 위험해지는 것을 막는다. 두 번째는 변속충격을 완화하는 것이다. 인지부조화가 대표적이다.
인지 호들갑 - 작은 문제는 변속충격을 강조하여 집단에 경고하는 방법으로 개인을 희생시키고 집단은 백신효과를 얻는다.
인지 부조화 - 개인이 감당할 수 없는 큰 문제를 회피하다가 집단 전체가 위험해지는 것이 집단사고다.
인간은 짝짓기가 필요한 상황에서 크게 흥분하여 호들갑을 떨거나 아니면 처음부터 관심이 없었던 것처럼 무시한다. 피할 수 없으면 즐긴다는 말과 같다. 감당할 수 있으면 흥분하여 달려들고 감당할 수 없을 때는 외면한다. 흥분하는 자들 때문에 개인이 희생되기도 하고 회피하는 자들 때문에 집단이 위험해지기도 한다.
정치인은 선거에 졌을 경우를 생각하지 않는다. 그것을 생각하는 순간 스트레스를 받아 선거운동을 못 하게 되기 때문이다. 이차대전을 일으킨 독일과 일본은 졌을 경우를 생각해보지 않았다. 인종주의 시대다. 전쟁에 진다는 것은 독일과 일본이 열등하다는 의미이고 열등한 인종은 사라져야 한다고 믿으므로 전쟁에 지는 경우 독일과 일본의 소멸은 피할 수 없는 숙명이다. 죽음처럼 결과가 정해져 있다면 생각할 필요가 없다.
우주 안의 모든 존재는 궁극적으로 다세포다. 단독으로는 성질을 가질 수 없으므로 존재가 불성립이다. 혼자로는 외력의 자극에 반응할 수 없다. 반응하지 않는 것은 없는 것이다. 존재는 집합이기도 하고 집단이기도 하다. 집단은 필연적으로 구조모순을 처리해야 하는 상황을 만나게 된다.
각각의 존재는 서로 다른 의사결정 단위에 속해 있다. 의사결정 단위가 다른 두 집단이 마주치면 경계면에서 큰 소리가 난다. 내부에 숨은 관성력이 밖으로 튀어나온다. 인류는 그것을 증폭시키거나 혹은 무시하는 사회적 기술을 발전시켰다. 사회적 기술이 떨어지는 사람이 벌거숭이 임금을 폭로한다. 틀린 것을 보고 틀렸다고 말한다. 때로는 그런 눈치 없는 사람이 필요하다. 발달한 사회적 기술이 집단의 확증편향과 집단사고를 부추긴다. 우리는 때로 좀 어리숙하고 고지식해야 한다.
인지충격
우주 탐사선이 태양권을 벗어날 때 말단 충격을 받는다. 보이저 1호가 2004년 12월에 이 충격파를 통과했다고 한다. 이와 반대되는 뱃머리 충격도 있다. 어떤 두 세계가 만나는 경계면은 매질이 다르므로 민감한 반응이 일어난다. 물도 밀도가 다르면 쉽게 섞이지 않는다. 의사결정 단위가 다르면 서로 호환되지 않는다.
두 마리 개가 울타리를 사이에 두고 맹렬하게 짖어대는 것과 같다. 모든 존재는 경계면에서 충돌을 일으켜 에너지를 손실한다.
인간은 첫 입학, 첫 소풍, 첫 입대, 첫 키스, 첫사랑을 잊지 못한다. 서로 다른 두 세계가 충돌하는데 어찌 충격파가 없겠는가? 전율함이 그 가운데 있다. 그 지점을 통과하면 이후 모든 것이 바뀐다.
내부적으로 톱니가 서로 맞물려 돌아가는 것이 계다. 서로 다른 계가 맞물려 돌아가며 연동될 때 강한 충격파가 발생한다. 자동차의 변속충격과 같다. 기차가 출발해도 그렇고 버스가 정차해도 그렇다. 숨은 관성력을 노출하면서 큰 울음을 토한다.
문명인과 부족민이 처음 만나면 어떻게 될까? 강한 충격파가 발생한다. 백인을 처음 본 부족민은 백인이 신고 있는 부츠를 보고 백인은 말이나 소와 같은 발굽동물이라고 생각한다. 흉노족을 처음 본 그리스인은 켄타우로스를 떠올렸다. 각국의 종교탄압은 문명권의 충돌에 따른 충격파를 의식한 것이다.
필자가 구조론에 뛰어든 이유는 그 충격파의 존재와 부재를 민감하게 느꼈기 때문이다. 그것은 어색함, 당황스러움, 위화감, 낯섦, 부자연스러움, 불편함으로 나타난다. 벌거숭이 임금님과 같다. 나는 매우 어색한데 다들 모른 척한다. 당황하고 만다. 그 상황을 천연덕스럽게 넘기는 사람은 사회적 기술이 발달한 것이다. 나는 극도로 긴장해 있는데 그들은 덤덤하게 받아넘긴다.
동양의 화가들은 근경과 원경이 충돌하여 묘사하기 곤란한 부분을 여백으로 처리한다. 일종의 꼼수다. 원근법을 배우지 못했기 때문이다. 문제를 정면으로 해결하지 않고 우회로를 개척한다. 심지어 그걸 자랑으로 안다. 평원법이니 고원법이니 심원법이니 하고 거창한 이름을 붙인다. 그게 그냥 못 그린 것이다. 부끄러운 줄 알아야 한다. 그 지점에서 나는 크게 당황했는데 그들은 전혀 당황하지 않았다는 말인가?
그냥 눈으로 보면 보이는 소실점을 동양인들이 5천 년 동안 보고도 보지 못한 데는 이유가 있다. 그들은 적당히 눙치고 뭉개고 얼버무리는 사회적 기술이 발달해 있었다. 그리기 곤란한 것은 적당히 왜곡한다.
서로 톱니가 맞물려 돌아가는 것을 건드리면 큰 충격이 발생한다. 그냥 곰과 새끼 딸린 엄마 곰의 차이다. 사람이 등산하다가 곰을 한 번 발견했다면 곰은 그새 사람을 50번 발견한 것이다. 보통은 곰이 사람을 피한다. 그러나 새끼 딸린 엄마 곰은 주변의 모든 잠재적 위험 요소를 철저히 파괴하고 난 다음에 제 갈 길을 간다. 엄마 곰은 새끼곰과 운명이 맞물려 돌아가고 있기 때문이다.
꼼수로 적당히 회피하는 기술은 보통 곰에게 먹힌다. 엄마 딸린 새끼 곰을 만나면 깨지는 사태를 피할 수 없다. 기슭에서 먹히던 기술이 정상에서는 먹히지 않는다. 정신 차려야 한다.
부족민의 돌도끼
존재는 의사결정 단위를 이룬다. 단위에 소속된 자원들은 코어를 바라본다. 계의 중심을 바라본다. 단위가 다른 둘이 만나서 단위를 통합할 때 방향 충돌이 일어난다. 각자 다른 방향을 바라보고 있기 때문이다. 단위를 통합하여 새로운 계에 새로운 중심을 만들고 새로 정렬하는 과정에 상당한 에너지 손실이 일어난다.
상호작용하는 계가 다르면 인지적 충격파가 발생한다. 톱니가 맞물리는 방식이 다르면 백래시가 발생한다. 요즘은 젠더 백래시로 말이 많다. 그 지점에서 인간은 당황한다. 어색하고 부자연스럽고 낯설다. 민망하고 창피하다. 인간의 발달한 사회적 기술이 그 문제를 해결한다. 적당히 눙치고, 뭉개고 얼버무린다. 뒤로 밀어주고, 당겨주고, 편 먹고, 짜고 친다. 반대로 그 부분을 부각해 텃세를 부리고, 소대장 길들이기를 시도하고, 기선제압 목적의 신고식을 강요하기도 한다. 이지메, 왕따, 편견, 차별주의는 문명 간 변속충격을 완화하는 심리 장치다. 많은 경우 오히려 충격을 증폭시킨다. 충격에 익숙해야 더 큰 충격에 적응할 수 있다는 점에서 예방주사가 되기도 한다.
인간이든 자연이든 의사결정의 단위가 다르면 말 섞지 않는다. 한편으로는 그것을 피해 가는 요령이 발달해 있다. 먼바다를 지나가는 커다란 범선을 뻔히 보고도 알아보지 못하는 폴리네시아 부족민과 같다. 부족민은 해양 민족의 뛰어난 시력으로 작은 카누가 지나가는 것은 귀신같이 알아본다.
처음으로 섬에 상륙한 백인이 그동안 뻔질나게 앞바다를 지나다닌 범선을 보지 못 했느냐고 물으면 부족민은 본 적이 없다고 대답한다. 진짜 못 봤을까? 관심이 없으면 그럴 수 있다. 벌거숭이 임금님이다. 봐도 말하지 않는다. 생각하지도 않는다. 보려고 하지도 않는다. 눈동자의 맹점과 같다. 인간은 자신이 보지 못한다는 사실을 볼 수 없다. 색맹이 뭔가 이상하다는 것을 느껴도 그것을 표현할 방법이 없다. 문제가 있는데 대응할 방법이 없으면 적응한다.
오지를 탐험하는 백인 탐험대가 돌도끼를 쓰는 부족민 마을에 쇠도끼를 선물했다. 부족민은 장정 네 사람이 다섯 시간에 걸쳐 작업한 끝에 겨우 나무 한 그루를 자른다. 탐험대는 쇠도끼로 나무를 자르는 방법을 시범 보이고 부족민에게 실습까지 시켰다. 5분 만에 나무를 자르는 쇠도끼의 위력에 부족민이 감탄했음은 물론이다. 마을을 떠나면서 백인 탐험대는 부족민 마을에 작은 산업혁명이 일어나지 않을까 하고 상상했다. 돌아오는 길에 다시 마을에 들러보니 쇠도끼를 버리고 돌도끼로 돌아가 있었다. 부족민에게 쇠도끼는 불화를 낳는 요물이다. 주술사가 가만있지 않는다.
뉴턴이 미적분을 하지 않았다면 인문계니, 이공계니 하는 다툼도 없었을 것이다. 부족민에게 첨단 지식은 인간들 사이에 불화를 일으키는 요물이다. 양자역학도 비슷하다. 무지의 지다. 양자역학은 오만한 인간의 콧대를 꺾었다. 판도라의 상자는 함부로 여는 게 아닌데 말이다. 물질 위에 성질 있다. 양자역학은 겁도 없이 그 세계를 건드린 것이다. 아인슈타인의 고뇌를 이해할 수 있다. 인류는 완전히 다른 세계로 넘어온 것이다.
인간은 자신이 설명할 수 없는 것을 만나면 뻔히 보고도 모른 척하는 기술을 쓴다. 여우가 죽은 척하는 것과 같다. 부족민의 카누로 범선의 속도를 따라잡을 수 없으므로 어차피 못 먹는 감을 찔러보지 않고 포기한다. 전부 아니면 전무 전략이다. 쇠도끼 하나로 부족민의 삶을 다 바꿀 수는 없으므로 과감하게 포기한다. 쇠도끼를 쥔 자가 권력자가 되어 마을을 쥐고 흔드는 꼴을 두고 보지 못한다. 모두가 총을 가지거나 아무도 총을 가지지 않거나다. 보수가 진보를 시기하는 이유다.
거인의 어깨를 밟다
'내가 더 멀리 보았다면 그것은 거인의 어깨 위에 올라서 있었기 때문이다.' 갈릴레이의 어깨 위로 내다본 뉴턴의 말이다. 과학은 스승의 어깨를 밟고 넘어가는 것이다. 인문학은 스승의 어깨를 밟지 않는다. 인문학은 부족민의 방법을 쓴다. 집단의 불화를 원치 않기 때문이다. 쇠도끼가 부족민 마을에 불화를 일으키는 요물이라는 사실을 간파한 주술사의 대응과 같다.
지식은 한 계단씩 밟고 올라가는 것인데 인문학은 미리 한계를 그어놓고 ‘금 넘어가기 없기’를 시전한다. 아인슈타인과 같은 대학자도 예외가 아니다. 그의 정적우주론이 그러하다. 내가 초등학생 때 고민했던 시간의 시작점 문제를 아인슈타인이 생각해보지 않았을 것이라고는 믿기 어렵다. 전부 해결하지 못한다고 해서 전무로 가버린다면 비겁하다.
문제는 인간의 사회적 본능이다. 삼인시호와 같다. 세 사람이 바람잡이 짓을 하면 인간은 속는다. 노숙자가 길에서 자는 이유는 주변에 세 사람이 노숙하는 것을 봤기 때문이다. 반대로 주변 세 사람이 설득하면 집으로 돌아간다. 그들에게는 의지할만한 가족들과 협력해줄 동료와 따르는 자식이 필요하다.
지구가 둥글다는 사실은 그냥 보면 보인다. 그런데 아무도 말하지 않는다. 주변 세 사람을 납득시킬 수 없으면 본 것도 안 본 것으로 친다. 보려고 하지도 않는다. 우주의 문제는 개인이 감당하기 어려운 것이다. 지구인 전부를 설득하려니 엄두가 나지 않는다. 나처럼 눈치 없는 사람이 넘어가지 말아야 할 금을 넘어가는 것이다.
진리는 가까운 곳에 있다. 평범한 사람도 진리를 발견할 수 있다. 소실점은 그냥 보면 된다. 5천 년 동안 동양인 중에 아무도 못 한 것을 할 수 있다. 가슴이 뛰어야 한다. 전율해야 한다. 진리와 비진리 사이에서 일어나는 충격을 느끼지 못한다면 나도 할 말이 없다.
구조론은 내가 아홉 살에 착수한 사업이다. 뭔가 이상해서다. 어색하고 민망하고 당황스럽다. 말로 표현하기 어렵지만 뭔가 이건 아닌데 싶다. 도저히 그냥 넘어갈 수 없어서 인류가 다 틀렸고 내가 옳다는 증거를 찾으려고 한 것이다. 구조론은 우연히 발견된 것이 아니다. 작심하고 단서를 수집했다. 보려고 하니까 보였다. 진리는 개별적으로 파악되지 않는다. 세상은 전부 연결되어 있다. 나는 그 연결지점에 예민했을 뿐이다.
지구는 돈다는 갈릴레이 말 한마디로 끝나는 게임이 아니고 다른 행성도 조사해봐야 한다. 그것은 세계관을 바꾸는 문제다. 사람들은 다른 많은 사실과 연결하는 것이 부담스러워서 눈앞의 진리를 포기한다. 판도라의 상자를 닫는다.
부족민은 자연의 모든 것을 쓸모 있는 것과 쓸모 없는 것으로 나눈다. 인류학자가 어떤 것에 대해서 질문하면 '바보야. 그건 못 먹는 거야.'하고 핀잔을 준다. 먹을 수 있는 것은 사소한 것도 일일이 이름을 부여하지만 못 먹는 것은 관심을 두지 않는다. 현대인도 같다. 인간들은 여전히 개념이 없다. 지적 용기가 필요하다. 벌거숭이를 봤거든 벌거숭이라고 말해야 한다. 인간이 스스로 만든 눈치의 장벽을 넘어야 한다.
이론적 확신의 힘
건물의 아치를 처음 만든 사람은 간이 큰 사람이다. 그냥 돌을 쌓는 것은 중력에 의지하는 것이다. 중력은 수직에 강하고 수평에 약하다. 아치 구조는 서로 맞물리는 힘에 의지하므로 강력하다. 아치를 그냥 눈으로 보면 불안하다. 돌 하나만 빠져도 다 무너지는 게 아치 구조다. 세월이 흐르면 살살 흔들려서 돌이 조금씩 빠질 것 같지만 그건 그냥 느낌이고 이치를 따져보면 아치 구조가 더 견고하다는 사실을 알게 된다. 지진으로 폐허가 되고 아치만 남아있는 유적지는 흔하다. 외부의 충격에 의해 흔들리면 아치는 오히려 견고하게 맞물린다. 아치와 돔뿐만 아니다. 달걀도 둥근 것이 의외로 잘 깨지지 않고 통조림 캔도 둥근 것이 생각보다 견고하다.
아치도 귀퉁이를 잘못 만들면 무너진다. 교회의 종탑을 아치로 만들 때가 그러하다. 무거운 종을 작은 아치에 매달아 놓고 양쪽 귀퉁이를 보강하지 않으면 무너진다. 돔을 떠받치는 하단부의 배가 나와서 돔이 무너지기도 한다. 그러나 인간은 시행착오를 거듭하며 조금씩 전진하여 마침내 완벽한 수준에 도달했다. 아치와 돔은 견고하다. 이 부분에 대한 이론적인 확신이 필요하다.
라이플도 처음에는 장전 속도가 느렸다. 탄환이 총열과 맞물리게 하려면 가죽이나 천으로 감싸야 하기 때문이다. 화승총은 확실히 칼보다 느리다. 그래도 단점을 개선하여 조금씩 인류는 전진해 왔다. 결국은 총이 칼을 완벽하게 이긴다. 영화나 만화에는 칼이 총을 이기지만 말이다.
우리가 이론적 확신의 힘을 믿어야 한다. 초반 시행착오를 감수하고 끝까지 가면 아치가 더 강하다는 믿음을 가져야 한다. 스승의 어깨를 밟고 넘어가는 자세가 필요하다. 그러나 사회적 기술이 발달한 인간은 집단의 눈치를 본다. 모든 사람이 총을 가질 수 없다면 누구도 총을 가지지 말아야 한다는 식이다. 포수의 총알이 떨어지기를 기다리며 칼을 고집한다. 혹시 무너질까 봐 걱정되어 아치 구조의 건축을 시도하지 않는다. 그런 동양인들도 성문은 아치로 만든다. 성문이 무너지면 피하면 되니까 자다가 깔려 죽을 일은 없다.
이론적 기반을 갖춘 좋은 구조가 초반 시행착오를 거쳐 어느 정도 선을 넘으면 견고해진다. 잠수함이 물속으로 깊이 잠수할수록 해치는 단단하게 닫힌다. 탄력을 받으면 완전히 다른 세계가 펼쳐진다. 변속충격이 두려워서, 초반 시행착오가 두려워서, 신고식과 텃세와 길들이기가 두려워서 바다를 건너가는 범선을 보고도 모르쇠를 시전하면 발전할 수 없다.
인문학은 집단에 불화를 가져오면 안 된다는 부족민의 터부를 깨뜨려야 한다. 어떤 안정된 이상에 도달한 다음 그 자리에 안주하려는 비겁한 자세를 버려야 한다. 인생에 한 번은 돌도끼를 버리고 쇠도끼를 받아들여야 한다. 다시 태어나야 한다. 낡은 세계와 결별해야 한다.
함무라비 법전에는 돔이 무너져서 딸이 죽으면 건축가의 딸을 죽인다는 내용이 있다. 이에는 이, 눈에는 눈 규정이다. 실제로 돔이 무너지는 사고가 여러 번 있었던 것이다. 석굴암은 돔을 잘못 만들어서 천장돌이 셋으로 쪼개졌다. 중앙에 집중되는 하중을 분산시킨다고 불필요한 외부 돌출부를 만들었다. 안 해도 되는 짓을 한 것이다. 이론을 따르지 않고 느낌을 따른 결과다.
세상의 벌거숭이들
나는 인간들이 죄다 벌거숭이라고 말한다. 진실은 집단에 불화를 가져올 수 있지만 극복해야 한다. 이것은 인류문명의 OS를 바꾸는 문제다. 하나가 바뀌면 다 바뀌어야 한다. 인류는 문명 단위의 변속충격을 감당해야 한다.
척력은 있어도 인력은 없다. 그런 말이 없다. '민다'라는 말은 있어도 당긴다는 말은 없다. 정확히는 '잡아당긴다'고 말해야 한다. '당긴다'는 말은 '잡아서'가 생략된 것이다. 척력의 반대는 인력이 아니라 굳이 말하자면 집력執力이다. 이것은 내가 발견한 많은 벌거숭이 중에 하나다.
우리가 말은 편하게 할 수는 있지만 과학을 편하게 하면 안 된다. 우주 안에 당기는 힘은 없고 붙잡는 힘이 있을 뿐이다. 붙잡는 힘은 미는 힘이 꼬인 것이다. 결국은 우주에는 미는 힘뿐이다. 힘이 두 가지나 있다는 건 이상하다. 같은 힘이 척력으로도 나타나고 인력으로도 나타난다. 그런데 척력이 먼저다. 모든 힘은 궁극적으로 척력이고 인력은 척력이 상호작용에 잡힌 것이다.
무엇보다 힘이 무엇인지를 파악해야 한다. 힘은 입자가 깨지는 절차다. 입자는 힘의 밸런스에 의한 코어의 성립이다. 무너진 밸런스의 복원과정에 공간을 확보하는 것이 힘이다. 그러므로 척력이다. 무너진 밸런스는 공간을 확보하는 방향으로 움직인다.
칼을 나무에 찌르면 칼날이 박혀서 빠지지 않는다. 그 칼의 붙잡는 힘은 찌르는 칼에서 온 힘이 보존된 것이다. 나무가 칼을 잡아당기는 것은 아니다. 그렇게 느껴질 수는 있는데 그것은 그냥 느낌이다. 과학을 느낌으로 하면 안 된다.
인력과 척력뿐 아니라 모든 대칭되는 것은 에너지의 방향성 논리 하나로 일원화할 수 있다. 모든 이항 대립을 깰 수 있다. 모든 대칭은 비대칭으로 바꿀 수 있다. 에너지 일원론으로 이원론의 교착을 타개할 수 있다. 모든 이원론은 관측자가 개입한 오염이다.
존재는 변화다. 불변은 움직이지 않으므로 자기 자신을 드러낼 수 없다. 무언가 있다는 것은 외부의 자극에 맞서 반응한다는 것이고, 반응한다는 것은 힘의 진행 방향이 바뀐다는 것이고, 그것은 변화다. 질량보존에 의해 변화가 생겨날 수는 없고 감추어져 있는 것이 드러날 수 있을 뿐이다.
존재는 변화하고, 변화는 움직이고, 움직임은 자리바꿈이고, 자리바꿈은 바꿀 공간이 필요하며 공간을 확보하는 것이 미는 힘이다. 그런데 주변을 붙잡고 버티면 더 잘 밀 수 있다. 인간이 힘을 쓰는 것은 지구 중력을 붙잡고 미는 것이다. 줄다리기해도 실제로는 발로 땅을 민다. 줄다리기가 아니라, 줄 잡고 발로 땅 밀기다. 인력의 시합이 아니라 척력의 시합이다.
발로 땅을 미는 것은 보이지 않고 손으로 줄을 당기는 것은 보인다. 인간은 움직이는 것에 민감하게 반응하기 때문이다. 땅은 머물러 있고 줄은 움직이므로 움직이는 줄만 쳐다본다. 이런 식으로 인간의 잘못을 낱낱이 바로잡자면 끝이 없다.
인간은 이런 내밀한 의사결정 메커니즘에 해당하는 부분을 대충 뭉개고 넘어가려고 한다. 판도라의 상자를 열고 싶지 않기 때문이다. 내막을 하나하나 들추자면 세제곱으로 복잡해진다는 사실을 알고 두려워하기 때문이다.
양질전환 문제
헤겔의 양질 전환은 조금만 생각해보면 말이 안 된다는 사실을 알 수 있다. 엔트로피의 법칙과 어긋난다. 물이 끓었다고 질이 바뀐 것은 아니다. 질이 바뀌려면 물이 H2O가 아닌 다른 물질이 되어야 한다. 물은 끓어도 물이다. 혼선이 빚어지는 이유는 질과 양에 대한 개념을 엄격하게 정의하지 않기 때문이다. 양 비슷한 것이 질 비슷한 것으로 변했다. 그건 그냥 느낌이다. 느끼고 싶으면 무엇인들 못 느끼겠는가?
무한동력은 없지만 느낌은 많다. 태양도 무한동력, 풍력도 무한동력, 지열도 무한동력이다. 계곡에 흐르는 물도 무한동력이다. 수력발전소의 발전기는 무한히 돌아간다. 그러나 이는 그냥 느낌이다. 과학을 느낌으로 하면 안 된다.
물이 끓는 것은 양이 늘어난 게 아니다. 물은 조금도 늘어나지 않았다. 온도가 증가한 것도 아니다. 불의 온도가 물의 온도로 옮겨간 것이다. 서울에서 부산으로 이사를 하면 질이 변한 것인가? 물에 설탕을 타면 단맛이 난다. 질이 변했는가? 물이 변화를 일으킨 것이 아니고 사람이 작위 한 것이다.
양은 질이 될 수 없다. 양이 변하면 질량보존의 법칙을 어긴다. 헤겔이 양의 변화라고 말한 것은 용기에 들어간 열의 양의 변화다. 그것은 용기와 열의 관계다. 양이 변한 것이 아니라 관계가 변한 것이다. 하긴 헤겔과 마르크스가 물리학자도 아니고 말이다.
물이 끓는 것은 물과 열을 가두는 그릇이 깨진 것이다. 대기압이 물을 누르고 있다. 대기압도 그릇의 일부다. 작은 그릇에 물과 열을 너무 많이 넣어서 그릇이 깨졌다. 문제는 이게 초딩 수준의 착각이라는 점이다. 어휴! 인간들이 생각을 너무 안 하고 산다.
이는 닫힌계를 정의하지 않은 데 따른 오류다. 구조론은 질과 양을 엄격하게 정의한다. 질은 결합이고 양은 분리다. 질은 전체, 양은 부분의 합이다. 부분의 합은 전체보다 작다. 부분의 결합에 드는 구조비용까지 계산해야 한다.
남자와 여자를 한 방에 넣어놓고 1년 후에 가봤더니 부부가 되어 있다. 솔로가 커플 되고 양질전환이라. 무엇이 변했나? 관측자가 변했다. 사람이 판단기준을 바꾼 것이다. 양과 질은 그대로인데 헤겔이 움직였다. 온도 변화를 말하다가 물의 변화를 주장한다. 이중기준의 오류다. 이게 하지 말라는 자기소개다. 객체의 사정에 대한 해명이 아니라 관측자 자신의 입장이 개입한다.
분명히 말한다. 온도는 증가하지 않는다. 단지 이전될 뿐이다. 요즘 인공지능과 관련하여 창발성이니 양질 전환이니 하는 모양이다. '밀가루를 헝겊으로 덮어 놓으면 쥐가 발생한다.' 이런 게 과학인 척했던 시절이 있었다. 이른바 자연발생설이다. 요즘도 항아리 속에서 물고기와 수초가 자연발생 했다는 이야기가 SBS '세상에 이런 일이'에 나오더라. 새똥에 섞여 들어간 것이다. 파스퇴르가 백조목 플라스크로 실험하기 전까지는 그런 수법이 먹혔다.
중요한 건 탄생이다. 최초의 탄생에서 딱 걸린다. 그곳에서 말단충격이 일어나기 때문이다. 밀가루에서 쥐가 탄생하려면 그 최초 탄생지점이 규명되어야 한다. 우주는 발생이 아니고, 탄생이다.
불은 가운데로 모인다
구조론은 닫힌계 안에서 자발적 대칭성 깨짐에 의해 일어나는 변화를 추적한다. 이것이 내가 발견한 벌거숭이다. 임금 하나만 벌거숭이가 아니라 그 광장에 모인 모두가 벌거숭이다.
양질전환의 오류와 무한동력의 오류는 닫힌계 안에서 일어나는 자발적인 변화와 외부의 작용에 의한 수동적 변화를 구분하지 못한 데 따른 혼선이다. 구조론은 닫힌계 안에서 일어나는 자발적 변화를 추적한다. 자체 엔진에 의해 일어나는 능동적 변화다. 인류는 외부의 작용에 의한 수동적 변화는 아는데 계 내부에서 일어나는 자발적 변화는 모른다. 인류 전체가 다 모른다. 그것을 생각한 사람도 없다. 비슷하게 근처에 간 아이디어도 없다.
자발적 변화 - 구조론 - 자체 엔진이 있다. 계 내부의 코어와 밸런스의 이동으로 판단한다.
수동적 변화 - 뉴턴 역학 - 자체 엔진이 없다. 외부에서 가해지는 힘의 작용으로 판단한다.
모닥불을 피워보면 알 수 있다. 불은 가운데로 모이는 성질이 있다. 불이 잘 타게 하려고 부지깽이로 뒤적이다가 불을 꺼트리게 된다. 항상 의도와 반대로 된다. 불이 공기를 빨아들이고 뱉어내는 방향이 있다. 힉스입자의 자발적 대칭성 깨짐과 같다. 불은 공기와 접촉해야 타지만 아궁이를 만들어 주변 공기가 들어오지 못하게 틀어막아야 한다. 사방에서 들어온 공기가 가운데서 충돌하여 난류가 발생하면 불이 꺼진다. 대칭성을 깨서 비대칭을 유도하는 방법으로 난류를 잡아야 한다. 아궁이는 공기가 한 방향으로 들어와서 한 굴뚝으로 빠져나가게 한다. 공기가 두 방향에서 들어와 가운데서 충돌하면 난류가 발생하고 불이 꺼진다. 산비탈에서 상승기류를 만난 헬기가 떨어지고 난류를 만난 여객기가 공항에서 하드랜딩을 하는 이유다.
이는 모닥불에만 해당되는 게 아니다. 우주 안의 거의 모든 문제가 일종의 난류 문제다. 난류는 유체에서 잘 관찰되지만, 강체도 여럿을 모아서 닫힌계에 가두면 유체가 된다. 사람이 둘만 모이면 유체와 같이 행동한다. 생각해서 판단하지 않고 그냥 빈 공간을 찾아서 기계적으로 움직인다. 그러다가 점점 빨라진다. 내가 발견한 빈자리를 뺏기지 않으려고 달려가기 때문이다. 지하철 구내에서 볼 수 있다. 이는 레밍의 이동과 같다. 북극 들쥐가 일제히 절벽에 떨어져 죽는다. 스프링벅의 질주도 같다. 무리의 맨 앞에 가는 스프링벅은 누 떼가 뜯어먹고 새로 난 어린 순을 먹는다. 스프링벅 숫자가 많아지면 서로 앞자리를 차지하려고 경쟁하며 일제히 질주하다가 절벽에 떨어져 죽는다.
결맞음 - 불이 거세게 타오르게 한다.
결어긋남 - 난류를 일으켜 불이 꺼진다.
어떤 둘이 처음 만나는 공간은 위태롭다, 결이 맞으면 흥하고 결이 어긋나면 망한다. 결맞음은 불의 입구와 출구가 분리되어 거세게 타오르게 하는 것이고 결어긋남은 난류가 발생하여 불이 꺼지게 하는 것이다. 서로 다른 결과 결 사이에 충격파가 있다. 인간의 사회적 기술은 충격을 회피하는 쪽으로 발달해 왔다. 인간들은 곤란한 것은 눈을 감지 않아도 보지 못하는 재주가 있다. 파섬이 곤란한 상황을 당하면 죽은 체를 하고 주변에 악취를 풍기는 것과 같다.
자전거를 타면 알게 된다. 핸들을 꺾는 방향으로 자전거가 가지 않는다. 달리는 자전거의 직진성 때문이다. 자전거 몸통을 기울여주면 핸들이 저절로 꺾어진다. 익숙해지면 핸들을 놓고 커브를 돌 수 있다. 사실 간단하지 않다. 자전거를 왼쪽으로 꺾으려면 먼저 오른쪽으로 살짝 꺾었다가 직진성에 의해 되돌아오는 반동의 힘에 편승하여 왼쪽으로 크게 꺾어야 한다. 왼쪽 깜빡이 넣고 오른쪽으로 핸들 꺾는 식이다. 핸들은 무조건 S자로 꺾어야 한다. 단 처음은 작은 곡률로 꺾고 다음은 크게 꺾어야 한다. 훈련하면 엉덩이를 씰룩이기만 해도 자전거가 알아서 내가 원하는 방향으로 간다.
집단의 자발적인 변화는 이중의 역설이다. 내가 가고자 하는 방향의 반대쪽을 먼저 노크한다. 갈림길에서 오른쪽으로 가려면 먼저 왼쪽에 발을 살짝 담가야 한다. 그쪽으로 오지 못하게 완강하게 막아서는 힘이 있다. 그 반동력의 힘을 이용해서 오른쪽으로 틀어야 한다. 모든 방향 전환은 S자를 따른다. 뱀이 몸을 S자로 만드는 이치다. 생각해보면 인간의 모든 신체 동작에 S가 숨어 있다. 권투선수가 왼손 잽을 넣었다가 빼면서 되돌아오는 반동력으로 오른손 주먹을 치는 기술과 같다. 먼저 신체의 좌우대칭을 만들고 그 대칭을 깨면서 앞뒤대칭을 만들어 상대를 가격한다. 이런 이중동작은 우주의 보편적 원리다. 반드시 사전 동작이 있어야 한다.
에너지의 결맞음
에너지는 유체다. 유체가 아닌 것도 닫힌계에 여럿을 투입하고 압박하면 유체로 행동한다. 하나의 강체라도 내부에서 전달되는 파동은 유체다. 한강 다리는 강체지만 그 강체의 진동은 유체다.
집단이 결속하여 외력의 작용에 맞서 하나의 의사결정 단위로 행세하는 것이 에너지다. 풍선에 구멍이 나면 바람은 전부 빠져나온다. 하나의 물체가 이동하듯이 깡그리 옮겨가는 것이다.
에너지는 인간의 의도와 상관없이 자체의 가는 길이 있다. 그것이 구조다. 유체의 몰아주는 성질 때문이다. 닫힌계를 중심으로 밸런스의 원리가 작동한다. 이는 엔트로피의 일방향성으로 증명된다. 댐에 작은 구멍을 내면 댐 전체가 무너진다. 이는 외력의 작용과 상관없이 내부 모순에 의해 일어나는 자발적인 변화다.
민중에게도 그러한 역린이 있다. 한비자의 세난은 군주의 역린을 말하지만, 지금은 역린이 국민에게 있다. 외부에서 작용하면 대중은 반대로 움직인다. 정치인이 수를 낼수록 난류가 발생하여 항공기의 착륙은 하드랜딩이 된다. 부지깽이로 모닥불을 잘못 건드려서 불을 꺼트리는 것과 같다. 더 많은 바람과 접촉하게 하여 불이 활활 타오르게 할 요량으로 들쑤시면 양쪽에서 들어온 바람이 가운데서 충돌하여 교착된다. 연기가 난류에 갇혀서 빠져나가지 못하므로 불이 꺼진다.
인류가 저지르는 대부분의 시행착오는 원리가 같다. 에너지의 입력부와 출력부를 분리하지 않아서 일어나는 실패다. 의사결정의 자궁을 만들어주지 않는다. 에너지는 유체다. 유체는 난류를 방지하고 한 방향으로 움직이려고 한다. 때로는 그 방향을 인위적으로 만들어줘야 한다. 별사탕을 만들 때 좁쌀로 핵을 만들어 주는 것과 같다. 정치인은 에너지의 입구와 출구를 분리하여 대중이 가는 방향을 만들어줘야 한다.
불을 이용하려면 불 자체의 치고 나가는 기세에 편승해야 한다. 불을 질러놓고 인간은 뒤로 빠져야 한다. 불은 산소가 들어가는 입구와 연기가 빠져나오는 출구를 찾는다. 입구와 출구는 반대편에 있어야 한다. 보통은 더 많은 입구를 만들었다가 내부에서 교착되어 망한다. 양쪽에서 밀고 들어가다가 가운데 끼어서 압사 사고가 일어나는 격이다.
에너지 - 입력부와 출력부는 반대편에 있다. 에너지는 한쪽에서 들어와 맞은편으로 나가야 한다.
난류 - 인류가 저지르는 모든 시행착오의 원인이다. 안철수의 극중주의처럼 양쪽에서 들어온 에너지에 협살당한다.
정치인은 대중이 가야 할 방향을 지시할 것이 아니라 대중이 가지 말아야 할 곳을 막아줘야 한다. 그래야 대중이 자체 동력을 만들어 스스로 치고 나가는 관성력을 획득한다. 대중의 움직임 내부에 S자가 만들어져야 한다.
양치기 개는 양 떼를 세모꼴로 만들고 셋 중에서 가지 말아야 할 둘을 차단한다. 나머지 한 방향은 양 떼가 스스로 찾아낸다. 정치인과 대중의 관계는 양치기 개와 양 떼의 관계다.
정치인이 국가의 핸들을 꺾으려는 것이나 사람이 자전거의 방향을 트는 것이나 원리가 같다. 손이 쥐는 핸들은 자전거 바깥에 있다. 엉덩이는 자전거 중심에 있다. 엉덩이는 체중을 실어 자전거와 하나가 된다. 정치인도 마찬가지다. 밖에서 팔을 잡아채느냐, 안에서 마음을 흔드느냐다. 진보는 밖에서 지나가는 사람 팔을 잡아채는 역린정치로 망한다. 안에서 매력을 보여주는 것이 순리다.
작은 당구공을 치는 것은 인간의 의도대로 된다. 큰 양 떼를 모는 것은 양치기 개 마음대로 안 된다. 훈련된 양치기 개가 양 떼를 몰 수 있다. 계에 에너지가 걸리면 상황은 항상 의도와 반대로 흘러간다. 강체와 유체는 에너지 작용이 반대라는 사실을 알아야 한다. 우주를 에너지의 결로 해석하는 눈을 얻어야 한다.
단계를 뛰어넘기
진주만을 기습한 일본군의 산소어뢰는 영국이 먼저 개발에 착수했다가 중단한 것이다. 산소는 폭발위험이 커서 다루기 어려운 물질이다. 영국이 쓸만한 어뢰를 개발했다는 언론의 오보 때문에 일본군도 다급해졌다. 영국이 하는데 우리 일본이 못한대서야 말이 되냐고? 산소 폭발이 무섭다고? 영국 신사도 한다는데 너희들의 사무라이 정신은 폼이냐? 겁내지 말고 몸으로 때워.
서구의 제강 기술도 마찬가지다. 아랍은 인도의 우수한 철광석을 수입해서 유명한 다마스쿠스 강을 만들었다. 십자군 원정에서 깨진 유럽인들은 원료인 철광석이 다르다는 사실을 모르고 따라잡기에 나섰다. 아랍도 하는 것을 우리 유럽이 못한대서야 말이 되는가? 그들은 무수히 시도한 끝에 제강 기술을 발전시켰다. 이와 비슷한 사례는 많다. 애플이 하면 갤럭시도 하고 한국이 하는 것은 중국도 한다. 인간들이 그렇다. 남이 안 하는 것을 먼저 개척하지는 못하는데 남이 하는 것을 보고 따라잡기는 잘한다.
인간은 단계를 뛰어넘는 문제에 약하다. 반면 주어진 단계 안에서는 막강하다. 상호작용구조 안에서 경쟁이 붙으면 강력하다. 단위가 다르면 판도라의 상자를 닫고 모르쇠를 시전한다. 포기하는 것이다. 엄두를 내지 못한다. 인류문명은 1만 년 동안 사물의 단위에 갇혀 있었다. 구조론이 새로 사건의 단위를 열었다. 물질의 세계에서 성질의 세계로 넘어왔다. 안정의 세계에서 변화의 세계로 버스를 갈아탔다. 정적 세계관에서 동적 세계관으로 갈아탄 것이다. 인류는 루비콘강을 건너 완전히 다른 세계로 와버렸다.
사건 - 사물
성질 - 물질
변화 - 안정
동적 - 정적
사물의 고유한 속성을 따지는 세계에서 대칭과 짝짓기로 파악하는 세계로 넘어왔다. 고유한 속성이라는 말은 얼버무리는 말이다. 그런 것은 우주 안에 없다. 세상에는 오로지 짝짓기 간격이 있을 뿐이다. 체내수정이냐 체외수정이냐, 속씨식물이냐 겉씨식물이냐, 양성생식이냐 단성생식이냐, 진핵세포냐 원핵세포냐, 의사결정이 닫힌계 안에서 일어나는가 밖에서 일어나는가. 디지털이냐, 아냘로그냐. 우주 안의 모든 것은 이런 짝짓기 방식의 차이가 결정한다.
집단의 자발적 변화 - 개체의 수동적 변화
디지털 - 아날로그
체내수정 - 체내수정
속씨식물 - 겉씨식물
양성생식 - 단성생식
다세포 - 단세포
갈릴레이가 지구는 돈다고 말한 이후로 최대의 세계관 갈아타기다. 이왕 발걸음을 떼고 길을 나섰으면 끝까지 가봐야 한다. 지구만 돌겠는가? 우주도 돌고 물질도 돌고 소립자도 돌고 모든 것이 돈다. 돌지 않는 것은 없다. 도는 것은 중심이 내부에 있다. 내부를 바라본다. 관성력은 내부를 바라보기 때문에 일어나는 마찰이다. 인지충격은 내부를 바라보기 때문에 일어나는 외부와의 불화다. 이 문제는 더 큰 껍질을 씌우는 방법으로만 해결이 가능하다.
생각의 도구
인간의 뇌는 자극과 반응의 상호작용에 맞추어져 있다. 환경이 먼저 인간을 자극하고 인간은 수동적으로 반응한다. 지능의 발달은 인간이 능동적으로 환경을 자극하고 그 반응을 예상하고 대비하는 것이다. 그것이 모방이다. 어린이는 어른의 동작을 모방한다. 그것은 능동적인 선제 대응이다. 먼저 말을 거는 것이다. 어린이는 에너지가 넘친다. 자체 동력이 있다. 그래야 한다.
어린이는 하는데 어른은 못 한다. 에너지를 잃어버렸다. 흥분해야 하는데 차분하다. 설레어야 하는데 긴장한다. 호기심을 잃어버렸다. 어른은 도구를 쓴다. 도구는 능동적이다. 도구를 사용하여 이것저것 건드려 본다. 그런데 생각은 그렇게 못한다. 생각의 도구를 사용하지 않기 때문이다. 옷을 입고 총을 든 문명인 앞에 알몸에 맨손인 부족민과 같다. 선제공격은 불가능하다.
수학문제를 풀어도 공식을 펼쳐놓고 숫자를 대입해서 풀어야 한다. 공적인 자리에서 조리 있는 말을 할 때는 먼저 사건을 제시하고 그 사건의 흐름을 따라가는 말을 해야 한다. 그냥 생각나는 대로 말하면 외부의 자극에 반응하는 형태가 되고 그것은 무언가를 싫어하고, 배척하고 혐오하고, 거부하고, 말대꾸하고, 남 탓하고 흉보는 말이다. 주도권 문제 때문에 자연히 그렇게 된다.
능동이냐, 수동이냐다. 능동적으로 움직여서 내가 판을 설계하고 주도권 잡고 대화를 이끌어야 한다. 훈련되지 않으면 그렇게 못한다. 총이 있으면 하는데 총이 없어서 못 한다. 도구가 있으면 하는데 도구가 없어서 못 한다. 수동적으로 외부 자극에 반응하자면 반응하기 좋은 쪽으로 자리를 옮겨가게 된다. 방어하기 좋은 위치는 공격하기 나쁘다. 사유는 불리한 구조에 갇혀 버린다.
당구의 모아치기다. 세리 기술을 쓰면 점차 구석으로 간다. 구석은 반응이 빠르므로 말하기 쉽지만, 그 공간은 좁다. 사유는 협량해진다. 같은 말을 반복하게 된다. 창의할 수 없게 된다. 넓은 가운데로 나와야 새로운 기술을 보여줄 수 있다. 이것은 권력의 문제다. 한 번 밀리면 끝까지 밀린다. 권력은 조절장치다. 상대를 조절하지 못하고 거꾸로 환경에 조절 당해 버리는 것이다.
생각을 그냥 한다는 사람은 답답한 사람이다. 그것은 배우지 못한 사실을 들키는 것이다. 기술을 써야 한다. 다른 모든 분야의 프로들과 마찬가지다. 시를 읊더라도 압운과 평측이 있다. 마구잡이로 단어를 투척하는지 나름대로 터득한 기술을 구사하지는 단박에 알 수 있다. 어른들의 대화 상대가 되는지는 거기서 가려진다.
사실주의로 가지 않으면 내용이 협량해진다. 일본만화 슬램덩크는 그림체가 사실주의다. 땀방울을 하나하나 그려서 공포스러울 정도다. 스타일이 사실주의로 정해지면 할 이야기가 풍부해진다. 허영만과 이현세를 비교하면 알 수 있다. 허영만 만화의 주인공은 실제로 있다. 타짜의 짝귀는 가수 송창식이다. 허영만 만화에는 어디서 본 듯한 사람이 등장한다. 사실주의로 가면 캐릭터 간 상성이 도드라진다. 할 이야기가 열 배로 증폭된다. 경상도의 짝귀와 전라도의 아귀에 지리산 작두의 스타일을 비교하는 식이다. 전통적인 만화로 가면 복수극밖에 할 이야기가 없다. 상대가 먼저 때려서 내가 받아친다는 천편일률적인 내용이다. 복수는 갑의 행동이 아니라 을의 행동이다. 권력 게임에서 지고 들어가는 것이다. 빌런은 자유롭고 창의적인데 히어로는 도덕이라는 굴레가 씌어져 손발이 묶여 있다. 할 수 있는 이야기가 그다지 없다. 무협지는 동료 간에 합을 맞추는 이야기가 없다. 선하다 악하다를 비교하고 강하다 약하다를 비교하고 그다음에는 할 이야기가 없다. 억지 이야기를 꾸며내므로 궁중 사극처럼 음모가 난무한다. 사실주의로 가면 캐릭터들 간에 케미가 맞느냐 호흡이 맞느냐에 따라 할 이야기가 열 배는 늘어난다. 앙숙인 커플, 잉꼬부부 커플. 일방적으로 당하는 커플 등 인간관계는 여러 가지가 있다. 주도권이 작가에게 있다. 심리묘사는 끝이 없다. 무협지는 심리묘사가 없다.
방어만으로 자신의 역할을 좁히면 무대가 축소된다. 점차 구석으로 몰린다. 방어할만한 곳은 협곡과 같은 좁은 지형이기 때문이다. 방어 지향적 사고는 아이디어의 적이다. 대화를 해도 비판만 하고 험담만 하는 사람은 그것밖에 할 수 없다는 사실을 들키는 것이다. 자신의 포지션을 을로 정해놓고 들어가기 때문이다. 항상 악당이 먼저 공격하고 주인공은 받아치는 주먹질만 할 수 있다.
인공지능도 비슷한 문제에 봉착해 있다. 능동이 아니라 수동이다. 스스로 모방한다는 느낌이 없다. 어린이는 먼저 질문한다. '아빠 이거 뭐야?' 하고 집요하게 물어서 어른을 피곤하게 한다. 인공지능은 수동적으로 반응할 뿐 능동적으로 응수타진한다는 느낌이 없다. 스스로 모방하는 인공지능이 나와야 한다. 상대를 자극하고 반응을 끌어내서 정보를 수집해야 한다.
자기소개 하지마라
두 사람이 스마트폰을 보면서 길을 가다가 충돌한다. 밖을 보지 않고 자기 내부를 바라보고 있다. 다들 자기 자신을 바라보며 나르시시즘에 빠져 있다. 무슨 말을 해도 자기소개다. 모든 차별과 불화의 원인이다. 패스하지 않고 단독드리블만 하는 사람과는 함께 축구할 수 없다.
오해하면 안 된다. 이것은 생각하는 방법에 관한 것이다. '자기소개하지 마라'는 네거티브보다 '기술을 구사하라'는 포지티브에 방점을 찍어야 한다. 그래야 대화가 된다.
과학적 탐구에 있어서는 자신의 주관적인 느낌을 근거로 무언가를 주장하면 안 된다. 관측자의 입장과 상관없이 객체 자체에 내재한 질서를 찾아야 한다. 거기에는 기술이 들어간다. 조건반사와 같은 무의식적인 반응은 곤란하다. 문제는 인간이 무의식적으로 자기소개를 하게 된다는 점이다. 무의식이 자신을 쳐다보기 때문이다. 그것은 능동적으로 생각하는 것이 아니라 수동적으로 외부의 자극에 반응하는 것이다.
'햄버거가 맛있다'고 말하면 안 된다. 그것은 햄버거를 기준으로 내 입맛을 소개한 것이다. '햄버거는 콜라와 어울린다'고 말해야 한다. 일상적인 대화는 햄버거가 맛있다고 해도 되는데 과학을 그런 식으로 하면 안 된다. 사적인 대화와 공적인 공간에서의 '조리 있는 말하기'는 다른 것이다.
왜 이게 문제가 되는가? 사유의 함정 때문이다. '나는 짜장이 좋다.'고 말하면 상대는 '나는 짬뽕이 좋은데?' 로 받는다. 인간은 대칭을 세워서 사고하는 동물이다. 본의 아니게 말대꾸하게 된다. 내가 '짜장에는 군만두지.'라고 해야 상대가 '짬뽕에는 탕수육이지.' 로 받아낸다. 이 경우 꼬리에 꼬리를 물고 한 방향으로 계속 가서 대화가 풍성해진다.
패스가 있는 말하기라야 한다. 상대를 받쳐주는 말하기라야 한다. 달팽이가 둥글게 말리듯이 말꼬리를 자기 집으로 가져가면 상대는 선택지가 없다. 똑같이 말하면 반향어고, 맞장구를 치면 추종자고, 반대로 가면 싸움 난다. 어느 쪽이든 좋지 않다.
사유는 나뭇가지처럼 한 방향으로 계속 뻗어가야 하는데 보통은 제 자리를 맴돈다. 중심이 내부에 있기 때문이다. 외연이 차단된다. 자기 자신을 개입시키기 때문이다. 정치인의 역린이 그렇다. 논객은 대중의 말대꾸를 유도하는 대칭구조로 몰아가는 실수를 저지른다. 에너지의 입구와 출구가 분리되지 않아 난류가 발생하는 것이다.
입구와 출구를 분리하려면 대립된 둘을 통일하는 더 높은 관점을 제시해야 한다. '공을 찬다.'는 좋지 않다. '축구한다.'가 되어야 한다. 공은 내가 차는 것이다. 내가 개입되면 자기소개다. 축구는 두 팀 사이의 게임이다. 하나의 공을 보지 말고 두 팀 사이를 봐야 관중도 역할이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된다. 항상 둘을 통일하는 전체를 봐야 한다. 밑바닥 판을 봐야 한다.
돼지 불을 까는 요령이 있다. 주둥이를 말뚝에 묶어놓으면 몸을 뒤로 뻗댄다. 뒤로 물러나려고만 하는 것이다. 농부가 뒤로 가서 불을 까버린다. 인간도 이와 같다. 자기소개형 말하기는 일종의 줄다리기다. 객체와 자신을 묶어서 도깨비 씨름을 하고 있다. 돼지는 그 말뚝에 묶인 줄을 잘라야 한다. 인간은 객체를 놓고 그 내부를 들여다봐야 한다. 자신과의 연결을 끊어야 한다. 자극과 반응이라는 무의식의 줄다리기를 버려야 한다.
힙합 가수의 랩은 죄다 자기소개다. 그러다가 서로 디스를 주고받는다. 그것도 문화라면 문화지만 왜 힙합 가수는 서로를 비난하는지 생각을 해봐야 한다. 힙합 가수 이하늘이 욕을 먹는 데는 이유가 있다. 생각할 줄 모른다. 그렇게 훈련되었다. 그런 사람은 어른들의 대화에 끼워줄 수 없다. 그게 소아병이다.
내가 '산은 높다'고 선창하면 상대는 '물은 깊다'로 받아야 한다. 다 같이 '천하는 넓다'로 나아가야 한다. 그 과정에 사유의 지평이 확대된다. 말은 이렇게 바깥으로 가지를 쳐야 한다. 보통은 자기 내부로 기어들어 간다. 그 경우 모든 대화는 '난 이게 싫어'가 된다. 수렁에 빠져버린다. 첫 단추를 잘못 끼운 게다.
바보들의 대화는 공식이 있다. 나는 어떤 음식이 싫어. 나는 어떤 사람이 싫어. 각종 '싫어'와 혐오와 포비아를 확대재생산 하는 방향으로 대화한다. 오직 그런 쪽으로만 뇌를 작동시킬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럴 때만 머리가 팍팍 돌아간다. 그들은 무언가를 반대하고 거부하고 혐오하는 쪽으로만 창의할 수 있다.
긍정어법은 사실 쉽지 않다. 막연한 긍정은 추종에 불과하다. 긍정 모드로 가면, 좋아. 나도 그렇게 생각해. 잘했어. 정도를 말하고 대화가 끝난다. 더 이상 할 말이 없으니 분위기가 서먹서먹해진다. 결국 누군가를 까고, 씹고, 물어뜯는 대화를 하게 된다. 남의 흉을 보게 된다. 나는 그런 자리를 피한다.
역설은 대화의 상식이다. 한 바퀴 꼬아서 들어가는 게 기술이다. 내가 원하는 말을 상대방 입에서 끌어내야 한다. 뇌를 사용한다는 증거를 보여야 한다. 저절로 생각이 나는 게 아니라 의식적으로 생각을 해야 한다. 수동이 아니라 능동이라야 한다. 자체 엔진이 있어야 한다. 이것이 난류의 문제다. 에너지의 입구와 출구는 하나이고 쌍방은 에너지의 방향성을 공유해야 한다.
삼국지만 읽어봐도 중국인들은 말을 꼬아서 한다는 사실을 알 수 있다. 자신이 싫어하는 사람을 칭찬하는 방법으로 상대방을 격동시킨다. 상대가 화를 내면 '내 말이 그 말이야.'로 받는다. 이는 의도적으로 기술을 쓰는 것이다.
사유는 자신과의 대화다. 남과 대화할 때는 자기도 모르게 상대를 이겨 먹으려고 한다. 그래야 말을 한마디라도 더 할 수 있기 때문이다. 거기서 보이지 않는 권력 게임이 벌어진다. 서로 면박을 주고 약을 올린다. 그러나 자신과의 대화는 점잖게 한다. 자신이 받을 수 있는 토스를 올린다. 되도록 랠리가 길게 이어지는 배구를 한다. 애초에 그게 목적이기 때문이다.
명사와 동사의 차이다. 동사의 메커니즘을 공유하면서 명사를 살짝 틀어야 한다. 명사를 공유하며 동사를 차별하므로 '난 좋다', '난 싫다'가 된다. 상대가 '좋다'를 선점했으므로 나는 '싫다'로 받을 수밖에. 무의식적으로 상대의 잘못된 대응을 강요한다.
바람이 부는 게 아니라 '부는 그것'이 바람이다. 움직이는 동動의 메커니즘을 머리에 띄워야 한다. '때렸다'가 아니라 권투를 보고 '찼다'가 아니라 축구를 봐야 한다. 보다 큰 단위로 올라선다. 난쏘공의 굴뚝 청소부 이야기와 같다. 상대가 어떻게 했는지가 아니라 그 공간이 어떤 공간인가에 주목해야 한다.
인간들의 대화는 스쿼시와 같다. 공은 언제나 자기 자신에게 되돌아온다. 사유는 주변을 맴돈다. 좋다. 싫다. 밉다. 나쁘다. 짜증 난다. 괴롭다는 말 밖에 못한다. 방어만 한다는 것은 공격 기술이 없다는 사실을 들키는 것이다. 헐뜯는 말은 생각하는 기술이 없다는 사실을 들키는 자기소개다.
초등학생이 일기를 쓸 때는 맨 앞에 '나는 오늘'을 쓴다. 쓰지 않아도 되는 말이다. '나는 오늘'을 쓰는 이유는 '내게 오늘 무슨 일이 있었지?' 하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쓸 이야기가 없는 데 억지로 쓴다는 사실을 들키는 것이다. 무의식적으로 선생님이 일기를 검열한다는 전제를 깔고 들어간다. 일기는 선생님에게 올리는 보고서가 된다. 지고 들어가는 게임이다. 이래서는 창의가 나올 수 없다. 보통은 천편일률적으로 무엇을 깨고 꾸지람 듣고 반성했다는 내용이 된다. 거기에 저급한 기술이 들어간다.
폭력적인 사람은 폭력적인 행동으로 주변을 제압하는 기술을 은연중에 터득한 것이다. 문제는 본인이 그 사실을 의식하지 못한다는 점이다. 자신이 기술을 구사한다는 사실을 모른다. 본인은 그냥 화가 나니까 화를 내는 것이다. 그런데 왜 화가 날까? 화를 내는 방아쇠가 만들어져 있다. 몸에 배어 있다. 심리학을 배운 사람은 다 아는 이야기다.
귀족이 나쁘다. 지주가 나쁘다. 부르주아가 나쁘다. 자본가가 나쁘다. 양반이 나쁘다. 하는 식의 사고는 초딩에도 미치지 못하는 유아틱한 사고다. 귀족과 지주와 부르주아 계급과 자본가를 벽으로 세워놓고 스쿼시한다. 공은 언제나 자기에게로 되돌아온다. 수준은 제 자리를 맴돈다. 생산력이라는 본질은 깨닫지 못한다. 이게 전형적인 자기소개다. 내가 화가 났다는 사실이 혁명이라는 행동의 근거가 된다. 인간이 변화를 추구하는 것은 자체 동력이 있기 때문이고 그 동력은 역사의 흐름에서 나오는 것이며 인간은 거기에 편승한다. 왜? 내게 그만한 기술이 있기 때문이다. 화가 났다며 자기소개하지 말고 내가 가진 기술을 보여줘야 한다. 민중의 손에 총이 쥐어졌기 때문에 주도권을 가져오려고 혁명을 하는 것이다. 혁명은 손에 총을 쥔 자가 총질을 하는 것이다. 지식이 총이 되고, 깨어 있는 시민의 결집된 힘이 총이 되고, 생산력의 혁신이 총이 된다. 총을 쏘는 게 혁명이다.
놀고 있는 개 두 마리 사이에 울타리를 설치하면 갑자기 서로를 향해 사납게 짖어대기 시작한다. 인간의 실패도 그러한 동물의 본능이다. 개는 상대가 싫어서 짖는 게 아니라 내 앞을 막아선 울타리를 보니까 왠지 방어해야 한다는 생각이 들어서 짖는 것이다. 일종의 최면에 걸린 것이다. 울타리가 난류를 일으켰다. 울타리가 내 앞을 막고 나와 대치했다. 울타리가 내게 적대행동을 했다. 그렇다면 나는 공격한다. 인간은 거의 개다. 현해탄이 울타리가 되어 한국과 일본이 서로를 향해 맹렬히 짖어댄다.
우주 안의 모든 것은 움직이는 것이고 움직이는 것은 코어가 있다. 계에 속한 자원은 언제나 코어를 쳐다본다. 아기는 엄마를 쳐다본다. 엄마가 집단의 중심이다. 패거리는 동료를 쳐다보며 집단사고에 빠진다. 경계면에서 인지충격이 일어난다. 인지충격을 회피하여 눈을 내리깔고 자기를 쳐다본다. 난류의 원인이자 불화의 이유다. 의식적으로 밖을 바라봐야 한다. 더 큰 단위로 올라서야 한다.
동사의 방향성을 보면 계 내부의 압력이 발견된다. 유체는 압이 걸려 있다. 기압과 수압과 유압이 있다. 계에 밀도가 걸려 있다. 민중의 분노는 집단 내부에 걸린 압력이다. 한국과 일본도 내부에 스트레스가 걸려 있다. 일본의 섬나라 스트레스에 한국의 반도 스트레스다. 중국 주변에 있으면 스트레스받는다. 러시아 주변국, 인도 주변국도 같다.
압壓은 방향성이 있다. 압력의 방향성을 발견한 사람이 꼬리에 꼬리를 무는 대화를 할 수 있다. 압력은 조절되기 때문이다. 입구와 출구가 분리된다. 입구와 출구의 간격을 조절하는 방법으로 불의 세기를 조절할 수 있다. 대화를 하든 생각을 하든 조절장치를 작동시켜야 한다.
교착의 난맥상
인간들은 같은 상호작용구조 안에서만 용맹하다. 매질이 같고 밀도가 같고 집단이 같을 때만 유능하다. 원래 남이 하면 잘한다. 남이 안 하면 못한다. 일본이 산소어뢰를 만든 것은 영국이 이미 성공했다고 착각했기 때문이고, 유럽이 산업혁명을 성공한 것은 아랍인에게 특별한 제강 기술이 있다고 착각했기 때문이다. 그들은 남이 하니까 한 것이다. 스스로 하지는 못한다.
외부가 아니라 내부를 바라보는 본능 때문이다. 아랍인에게 뛰어난 제강 기술이 있다면 인류의 내부다. 내부에 있는 것은 쉽게 대응한다. '범인은 이 안에 있다'고 확신하는 순간 내가 해야할 일은 명백하다. 범인이 아닌 사람을 한 명씩 제외하면 최종적으로 남는 자가 범인이다. 범인이 금 밖에 있다고 생각하는 순간 인간은 포기해 버린다. 거기서 뇌는 작동을 정지한다.
동양인이 돔 구조의 건물을 못 만든 것은 내가 모르는 어떤 이유에 의해 천장이 무너질지 모른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그 경우는 범인이 바깥에 있다. 즉시 뇌가 작동을 정지한다. 지진이 날 수도 있고 세상에 별일이 다 있으니까 말이다.
불은 자기 타고 싶은 데로 타고, 물은 자기가 흐르고 싶은 데로 흐르고, 자전거는 자기가 가고 싶은 데로 간다. 그것을 결정하는 것은 자발적 변화를 일으키는 내부 밸런스다. 인간은 그 흐름과 기세에 편승해야 한다. 그것을 흔들려고 하면 역린을 건드린 셈이다. 반드시 혼쭐이 난다. 국민은 자기가 뭉치고 싶은 데로 뭉친다. 역린은 그곳에 있다. 대중은 옳고 그름을 판단하는 것이 아니라 의사결정의 코어와 방향성을 따라 움직인다. 입구와 출구를 분리해주면 대중은 활발해진다.
이는 심리학 이전에 물리학이다. 정치를 심리로 알고 감동적인 연설을 해도 민중은 시큰둥하다. 논리적으로 설득해도 시큰둥하다. 말은 맞다면서 행동은 주저한다. 그런데 우리가 힘을 합쳐서 막아야 할 외부의 적이 어디에 있는지 알려주면 어느새 똘똘 뭉쳐 있다. 이 경우는 팀플레이가 되기 때문이다. 뱀이 몸을 S자로 만들듯이 민중은 내부에 S자 구조를 만든다. 의사결정의 코어를 만들고 코어를 이동시킬 수 있는 구조가 S다. S자는 동그라미 두 개의 연결인데 방향이 다르다. 동그라미는 대칭이다. 코어를 움직여서 이 대칭에서 저 대칭으로 갈아타는 게 핵심이다.
불은 가운데로 모인다. 입구와 출구를 하나로 만들어야 한다. 바람이 양쪽에서 들어와 교착되면 난류를 일으킨다. 민중은 난류를 싫어한다. 연통으로 적절히 연기가 빠져줘야 한다.
지구만 둥근 것이 아니다. 모든 것이 둥글다. 지구만 도는 것이 아니다. 모든 것이 돌고 있다. 둥글게 무리 지어 도는 것은 모두 내부의 코어를 바라본다. 부분이 전체를 대표한다. 에너지는 치고 나가는 방향성이 있다. 그리고 서로 다른 존재와 만날 때 격렬한 충격을 받는다. 서로 다른 방향성의 충돌 때문이다. 계를 구성하는 자원들이 내부를 바라보고 있기 때문이다.
강체를 유체로 만들면 답이 나온다. 외부를 바라보는 시선을 얻게 된다. 뱀처럼 몸을 S자로 만들어 전진한다. 내부 교착의 난맥상을 타개하고 외부로 뻗어나갈 수 있다. 바둑을 두어도 그렇다. 내부를 바라보면 포도송이처럼 말려서 두 눈을 만들지 못하고 대마가 죽는다. 외부와의 밸런스에 민감해야 한다. 충격파를 느껴야 한다. 충격파를 피하여 안으로 말리면 죽는다.
벽을 뜯어야 한다
중학생 때 선생님께 들은 이야기다. 잘 사는 독일인들은 전기와 수도와 가스는 그냥 벽에서 나오는 것으로 알고 있다고. 하긴 부유한 독일에 우물도 없고 펌프도 없고 두레박도 없을 테니까. 그런데 한국의 젊은이들은 자기 집에 나오는 수돗물이 팔당 물인지 영등포 물인지 알고나 있을까?
어느 유튜브 채널에서 과학자가 한 말이다. 영재 소년이라면 전기가 어디서 나오는지 궁금해서 벽을 뜯어봐야 한다고. 그걸 모르고 잠이 오느냐 말이다. 어렸을 적에는 전구 소켓에 쓸데없이 손가락을 집어넣어 전기를 먹은 적이 여러 번인데 요즘 아이들은 전기 좀 먹고 사는지 모르겠다. 하긴 220볼트는 위험하다.
도무지 인간의 분별력을 믿을 수 없다. 지구가 둥근 것을 맨눈으로 식별할 수 있다. 여섯 살 때 큰 충격을 받았다. 경주 남산 중턱에 올라 경주 시내를 처음 내려다봤는데 엄청난 광경이었다. 형들에게 저게 서울이냐고 물었더니 시내란다. 경주 시내라고? 그럼 대구는? 대구 옆에 팔공산은? 서울이 안 보이면 서울을 가리고 있는 소백산맥은? 답답해서 미치겠는데 이 문제로 대화할 사람이 없다.
서울이 안 보이는데 어떻게 잠을 잘 수 있지? 우주의 끝단을 확인하지 않고 어떻게 편하게 잠을 잘 수가 있지? 진리의 끝단을 확인하지 않고 어떻게 태연히 잠을 잘 수가 있지? 이걸 대충 뭉개고 넘어가려고 하는 사람과는 대화할 수 없다. 답을 찾아야 직성이 풀린다. 가려서 안 보인다면 그 안 보이는 지점을 찾아야 한다. 안 보인다면 안 보이게 하는 그 무엇이 보여야 한다.
마술사의 속임수 때문이라면 마술사가 어떤 속임수를 쓰는지 알아내야 한다. 야바위가 쓰는 기술을 파헤쳐야 한다. 벽을 뜯어서 내 눈으로 확인해야 한다.
문제는 사유가 중간부터 들어가므로 경로를 확인할 수 없다는 점이다. 인간이 시행착오를 되풀이하는 이유다. 우리가 모든 것의 출발점을 사유하지 않을 수 없다. 태초에 무엇이 있었는가? 복제가 있었다.
라고한다의 법칙
결어긋남을 느꼈다. 세상과 나 사이에서 인지충격에 따른 불화다. 둘 중 하나는 틀렸다. 세상이 틀렸거나 내가 틀렸거나다. 내가 틀렸다면 죽어야 하고 세상이 틀렸다면 벌거숭이라고 말해줘야 한다.
인간들이 도무지 뇌를 사용하지 않고 있다는 사실을 알았다. 아예 생각 자체를 안 하고 있었다. 내가 옳고 세상이 틀렸다. 그런데 그것을 말해줄 방법이 없다. 우주 안에서 혼자 고아가 된 느낌이다. 구조론은 작정하고 덤벼든 것이다. 인간들이 눈으로 뻔히 보고도 알아보지 못한다는 증거를 찾으려고 노력했다.
소실점이 대표적이다. 내가 주목한 것은 소실점의 존재가 아니라 뭔가 문제가 있다는 사실을 알고도 회피하는 비겁함이다. 과거 만화가들은 입을 얼굴 옆에다 그리는 식의 이상한 짓을 했다. 코를 그리기가 힘들기 때문이다. 코를 뾰족하게 그리면 얼굴은 측면이 된다. 입이 뺨으로 옮겨붙는다. 그게 어색하지 않다는 말인가? 아직도 그렇게 그리는 사람이 있다. 특히 무협지에 많다. 순정만화는 아예 코를 그리지 않는다. 대신 눈을 크게 그려서 남는 빈 공간 문제를 마사지한다. 나는 그런 거짓에 분노한다. 코가 그렇게 무섭다는 말인가? 굴복할 일인가? 포기할 것인가?
이집트 벽화가 그렇다. 가슴은 정면이고 발은 측면이다. 동양화도 초상화는 발의 각도가 어색하다. 고구려 벽화는 활을 왼손으로 당기고, 김홍도 그림은 오른손과 왼손이 바뀌어 있고, 신윤복 그림은 발 각도가 180도다. 문제는 작가들이 문제의 존재를 정확히 알고 있었다는 점이다. 알면서도 해결하지 않고 꼼수를 쓴다. 비겁하게 말이다. 사실상 그들은 원근법을 먼저 발견하고도 회피한 것이다. 사실주의가 무서웠기 때문이다.
만화 그리는 요령이 있다. 독자와 작가의 암묵적인 약속이 있다. 만화고기가 대표적이다. 만화에만 있는 정체불명의 커다란 고기다. 그런 암묵적인 약속을 깨고 리얼리즘으로 가면? 일본 만화 베르세르크의 작가 미우라 켄타로는 54살에 죽었다. 과로사로 불 수 있다. 작가들이 편법을 쓰는 이유다. 그들은 살고 싶었던 것이다.
사실주의로 방향을 틀면 모든 것을 정확하게 그려야 한다. 도무지 엄두가 나지 않는다. 편하게 만화체로 밀어보자. 만화가는 거짓말을 해도 되는 특권을 부여받은 척하자. 그래야 산다. 그렇게 망가졌다. 동양이 서양에 뒤진 이유다. 꼼수와 요령과 잔머리와 실용주의가 켜켜이 쌓여 사유를 가두는 거대한 감옥을 만들었다.
서양의 발달한 과학을 실전에 써먹은 역사는 불과 300년이다. 그리스인의 지혜도 3천 년 동안은 공리공론이었다. 우공이산은 서양이 실천했다. 그들은 꼼수로 도망가지 않고 무소의 뿔처럼 혼자 버텼다.
관성은 지동설을 반대하는 사람이 먼저 포착했다. 옛날에는 모든 것은 제 자리에 머무르려고 하는 성질이 있으며 움직이는 것은 추진력이 있다고 믿었다. 지구가 돈다면 그 추진력은 어디서 나오지? 관성은 에너지가 계에 숨는 성질이다. 속도는 가속하거나 감속하여 변할 때만 보인다. 갈릴레이는 거기에 관성이라는 이름을 붙였다. 뉴턴은 그것을 계산했다. 갈릴레이의 적들은 단서를 잡고도 그 성과를 갈릴레이와 뉴턴에게 양보했다. 어리석은 일이다.
혹시 모르잖아. 도박 한 번 하자는 거지. 갈릴레이 말이 의심스럽지만 맞다치고 지구가 돌아도 우리는 그것을 느낄 수 없다는 이론을 만들어봐? 젊은 혈기로 도전해 봐? 만약 그랬다면 대박이 나는데 말이다. 갈릴레이는 반대파의 공격을 방어하려다가 사고실험으로 관성을 발견했다. 그것은 반대파도 생각해낼 수 있는 것이다.
뭐든 뒤집어서 반대쪽을 검토해 보는 것은 상식이다. 이쪽이 있으면 저쪽도 있다. 고정관념을 의심하는 것은 당연하다. 단 엄두가 나지 않을 뿐이다. 세상은 톱니가 맞물려 돌아가기 때문이다. 하나를 뒤집으면 전부 뒤집어야 하기 때문이다. 만화에서 요령과 꼼수를 빼면 고쳐야 할 것이 수십 가지가 된다. 누가 작정하고 하나하나 지적하면 피곤하다. 도망쳐야 한다.
지구가 둥글다는 사실도 그렇다. 그냥 보면 보이는데 사람들은 보지 않으려고 노력한다. 리얼리즘이 무섭기 때문이다. 지구가 둥근 것을 내 눈으로 보는 순간 괴력난신은 물 건너간다. 모든 것을 일일이 확인해야 한다. 음모론도, UFO도, 초능력도, 사차원도, 초고대 문명설도, 내세도, 천국도, 윤회도, 사이비종교도, 환빠도 다 물 건너간다. 그 많은 거짓을 다 쓰레기통에 버리기는 아까우므로 지구가 둥근 것은 보지 않는 걸로 하자. 짜고 치기 들어간다. 인간들 수준이 그렇다.
하늘이 두 쪽 나도 아닌 건 아닌 거다. 나는 진실을 말하기로 했다. 인간들이 죄다 벌거숭이라는 단서를 하나씩 수집했다.
1. '라고 한다의 법칙'이다. 이름이 이상하지만, 이는 초딩이 기억하기 쉽게 하려는 것이다. 거북이가 토끼의 경주다. 거북이가 토끼를 이긴다고? 터무니없다. 거북이가 토끼를 이기는 걸로 한다. 문장 뒤에 '라고 한다'를 붙이니까 단박에 이해가 되었다. 사실 여부의 문제가 아니다. 이것은 일종의 게임이다. 게임에는 룰이 있다. 교과서는 룰을 그렇게 정한 것이다.
도무지 세상이 게임이라는 사실을 알아버렸다. 게임이라고? 이런 식으로 나온다, 이거지. 그럼 나도 맞게 대응해주마. 이해가 안 되는 어른들의 말에는 모두 '라고 한다'를 붙여 봤더니 너무나 잘 이해가 되었다. 선생님도 나름대로 고충이 있었구나. 정부도 나름대로 고충이 있었구나. 그렇게 말해야 하는 속사정이 있었구나. 표현이 그런 것이고 의미는 각자 헤아려서 접수하면 되는구나.
2. '의하여와 위하여의 법칙'이다. 학이 체온을 절약하기 '위하여' 한쪽 다리를 들고 냇가에 서 있다는 내용을 책에서 읽었다. 이상하다. 그럼, 여름에는? 관찰했더니 거의 모든 새가 심심하면 한쪽 다리를 들고 있었다. 새는 원래 신체 구조가 한쪽 다리로 설 수 있게 되어 있다. 두 다리로 서는 것보다 한쪽 다리로 서는 것이 뇌의 입장에서 의사결정하기 편하다. 두 다리에 체중을 고루 분배하는 것은 신경이 곤두서는 일이다. 새는 목이 짐벌이라서 원래 균형잡기에 능하다.
'위하여'는 인과법칙과 맞지 않다. 일상적으로는 '위하여'라는 표현을 쓸 수는 있으나 과학적인 탐구에 있어서는 위하여를 쓰면 안 된다. 특히 진화생물학은 위하여를 남발한다. 건강한 유전자를 얻기 위하여? 그럴 리가 있나? 성 선택설이 대표적이다. 좋은 유전자를 획득하고자 하는 의도가 동물에게 있을 리 없다. 동물이 뭘 안다고? 성 선택이 아니라 성적 조절장치다. 지나친 짝짓기 몰입을 막고 다른 종과 교미하는 실패를 피하려면 종을 분별하고 암수를 구분하는 표지가 필요하다. 사슴의 거대한 뿔이나 공작의 화려한 깃은 성적 조절장치다. 말이 소와 교미하는 실패를 막으려면 성적 표지가 필요하다.
문제는 이게 중요한데도 사람들이 뇌를 사용하지 않는 것이다. 이건 초딩이 알아낸 초딩도 알 수 있는 문제다. 그런데 아무도 벌거숭이를 보고 벌거숭이라고 말하지 않았다. 인류 모두가 잘못된 사고에 빠져 있을 뿐만 아니라 진지한 관심도 없다는 사실을 나는 알아버렸다. 사소한 것은 열심히 따지고 중요한 것은 모르쇠를 시전하며 얼버무린다.
문명의 기반은 과학이고, 과학의 기반은 수학이고, 수학의 기반은 인과율이다. 그런데 인류 중에 인과율을 제대로 아는 사람이 없다. 알아도 써먹지 않는다. 왜 결과를 원인으로 돌려막기를 하는가? 위하여는 미래다. 미래는 현재의 원인이 될 수 없다. 남을 위한다는 말은 거짓말이다. 내 안의 스트레스와 집단 무의식에 의하여다. 자식을 '위하여'라고 말하지만, 사실은 그래야 부모 마음이 편하기 때문이다. 자식과의 동일시에 따른 부모 마음의 불편함이 자식을 챙기는 원인이다. 그게 숨은 권력의지다. 자식을 뜻대로 조종하려는 것이다. 자녀를 조종하려는 부모의 권력의지에 '의하여'라고 말할 수는 없잖아. 이게 다 너 잘되라고, 이게 다 너를 '위하여' 하는 일이란다. 위하여가 말하기는 편하지만, 진실은 아니다.
3. 사전찾기 숙제를 하다가 국어사전이 특별한 기술 체계 없이 주먹구구로 되어 있는 사실을 알고 충격을 받아 나중 어른이 되면 국어사전을 기술하는 체계를 정립해야 하겠다는 생각을 한 것이 구조론을 연구한 계기다. 사전을 어떻게 쓰느냐 하는 게 중요한 것은 아닌데 인류 전체가 다 틀렸다는 증거를 찾으려고 하니까 그런 게 보였던 것이다. 이 문명은 뭔가 나사가 하나 빠져 있다. 모든 존재는 접근경로가 있고 발생경로가 있을 텐데 왜 아무도 그것을 지적하지 않지? 인류가 하지 않으면 내가 하마.
4. 자석에 쇠붙이를 붙이는 실험의 결과를 말하려다가 일종의 장 개념을 발견했다. 모든 사건의 모든 원인이 어떤 실체에 있지 않고 주변과의 관계에 있다는 말이다. 어떤 객체 하나를 가지고 설명하면 무조건 틀렸다. 무엇을 설명하든 'A면 B다' 하는 메커니즘으로 설명해야 한다. 언제나 A와 B를 통일하는 C가 원인이다. 그냥 방망이가 공을 때려서 공이 날아간 게 아니고 야구라는 게임 속에 방망이와 공의 대결이 있다. 대립하는 둘을 가두는 또 다른 하나를 발견해야 한다. 진보와 보수 이전에 문명을 발견하고, 선과 악 이전에 사회성을 발견해야 한다. 원인은 수평구조에 없고 그것을 가두는 더 높은 단계의 수직구조에 있다.
독일이 침략해서 전쟁이 일어났다거나 북한이 남침해서 전쟁이 일어났다는 식은 제대로 짚은 것이 아니다. 이는 수평적인 접근이다. 그 이전에 범게르만주의와 범슬라브주의 간이 대결이 있었고 그 이전에 제국주의 식민지 경쟁과 인종주의가 있었고 그 전에 맬서스 트랩에 대한 공포가 있었다. 북한이 남침하기 전에 미소 냉전구도가 만들어져 있었다. 역학구도가 있었고 불균형이 조성되어 있었다. 그것을 말해야 한다. 모든 변화는 하나의 균형에서 또 다른 균형으로 갈아타는 것이기 때문이다.
5. 잘 모르는 산수 문제는 극단적인 비교를 통해 답을 유추할 수 있다. 축구 시합에 12명이 뛰는 경기와 10명이 뛰는 경기 중에 어느 경기가 더 많은 골이 터지겠는가? 1 대 1 축구와 100대 100 축구를 비교하면 된다. 1 대 1은 페널티킥이다. 당연히 선수의 숫자를 줄여야 더 많은 골이 터진다. 실험할 필요없이 사고실험으로 알 수 있다.
6. '에서 으로의 법칙'이다. 이름이 얄궂지만, 에너지의 방향성을 말하려는 것이다. 모든 변화는 화살표다. 벡터 개념과 같다. 원인과 결과는 두 개의 사건이 아니라 하나의 사건이다. 원인과 결과를 별도로 분리하는, 즉 잘못되고 만다. 궁수와 과녁 둘로 설명하지 말고 날아가는 화살의 방향성 하나로 설명해야 한다. 모든 이원론은 일원론으로 바꿔서 설명할 수 있다. 오컴의 면도날과 같다. 뭐든 대칭되는 것은 더 간단하게 일원으로 설명해야 한다.
7. 무한은 없다. 불교의 윤회설과 같이 과거로 무한하다는 식은 모두 '에서 으로의 법칙'을 어긴다. 과거와 미래는 없다. 현재도 없다. 하나의 화살표를 보되 머리를 보느냐, 가운데를 보느냐, 꼬리를 보느냐다. 과거, 현재, 미래는 인간의 관측 방법일 뿐 자연에 없다. 실제로 있는 것은 변화다. 변화는 화살표다. 시간은 화살표다. 자연에 무한은 없고 연속이 있을 뿐이다. 수학의 무한대 개념도 잘못이다. 그게 귀납적 접근이다. 수학은 연역이다. 연역으로 보면 연속이다.
8. 귀납은 없다. 모든 둘씩 짝지어져 대칭되는 것은 관측자의 개입에 따른 귀납의 오류다. 화살은 하나인데 관측자와의 관계가 둘이다. 관측자를 개입시키지 말고 자연 그대로를 봐야 한다. 귀납은 관측된 정보를 타인에게 전달하면서 방향이 바뀌는데 다른 오류다. 운동회 날 이어달리기를 하는데 반대 방향으로 달리는 어린이가 있다. 그런 실수다. 인류문명은 통째로 다른 사람에게 전달하는 데 맞추어진 귀납문명이다. 자연과 일치하는 연역문명으로 갈아타야 한다.
9. 린네의 생물 분류를 배우면서 무생물을 분류한 사람이 없다는 사실을 깨닫고 무생물을 질, 입자, 힘, 운동, 량으로 분류한 것이 구조론이다. 무생물도 탄생과정을 거쳐서 존재하는 것이다. 발생 경로가 있어야 한다.
10. 교생 선생님이 말해준 제논의 궤변이 큰 깨달음을 주었다. 아킬레스와 거북이의 경주다. 그것은 크기가 무엇인지를 묻는 것이다. 귀납을 연역으로 바꾸면 된다. 크기는 귀납이고 연역으로 보면 비례다. 우주에 크기는 없다. 모든 크기는 비교된 크기다. 아킬레스가 거북이를 추월하는 문제가 아니라 둘이 서로를 향해 다가가는 문제다. 척도가 되는 제삼자가 없을 때 아킬레스와 거북이는 서로를 향해 접근하고 있다.
11. 양질전환은 없다. 양질전환처럼 보이는 것은 모두 섞이는 것이다. 온도가 올라가면 물이 끓는 게 아니라 불의 열이 물로 옮겨간 것이다. 물에 설탕을 타서 설탕물이 된 것과 물에 열을 타서 끓는 물이 된 것은 정확히 같다.
12. 인력은 없다. 굳이 말하면 집력集力이다. 모든 힘은 밸런스의 복원력에 의해 공간을 차지하려는 척력이다. 척력이 교착되면 인력처럼 보인다. 하나 안에 둘이 들어가면 모순이다. 계의 모순을 해소하려면 공간이 필요하다. 더 많은 공간을 확보하여 언밸런스가 밸런스로 바뀌는 게 척력이다. 인력은 척력이 꼬인 것이다. 두 척력이 등을 맞대면 더 많은 공간을 차지할 수 있다. 인력은 계가 특정한 수학적 구조에서 더 쉽게 밸런스에 도달하는 것이다.
13. A의 변화가 B의 변화를 끌어낼 때 A와 B를 통일하는 C는 변하지 않는다. 변하지 않는 C가 변할 때는 방향성이 있다. 그 방향성이 순환의 오류에서 탈출하여 변화를 추적하게 하는 단서다.
14. 우주 안의 모든 변화는 하나의 플랫폼을 공유한다. 세상은 원자의 집합이 아니라 플랫폼의 공유다.
15. UFO는 없다. UFO라는 말은 언어적으로 불성립이다. 미확인이면 비행도 아니고 물체도 아니다. 인간들이 의미 없는 말을 하고 있다. 의미가 없는 것은 없는 것이므로 UFO는 없다. 의미가 있으려면 동력 비행 사실의 확인에 더하여 금속 물체의 질량이 확인된 상태이나 운전자의 정체는 미확인이라고 말해야 한다. 뜻을 싣지 못하면 말이 아니다. 역사 이래 유의미한 UFO 포착사례는 한 건도 보고된 것이 없다. 유명한 가평 UFO는 참깨가 카메라에 튄 것이다. 얼마 전의 설악산 신흥사 UFO는 새똥으로 보인다. 사진을 보면 초딩도 그게 가짜라는 사실을 알 수 있다. 그게 눈에 보이지 않는다는 말인가? 딱 봐도 색깔과 질감이 물체가 아니잖아.
생각해둔 것이 많았는데 돌아다니느라 다수 잊어버렸다. 이것은 세계관이 다른 문제다. 문제를 바라보는 방식의 차이다. 세상 모든 것은 연결되어 있고 연결부위에서 인지충격이 발생하고 그러므로 거짓은 반드시 들킨다고 생각하는 사람과 그 반대로 인지충격은 인지부조화로 뭉개고 물타기 하여 얼렁뚱땅 넘어가려는 사람은 대화가 불가능하다.
중요한 것은 권력이다. 평원으로 나와서 회전을 하자는 사람과 숲에 숨어서 게릴라전을 하자는 사람의 차이다. 경찰은 평원으로 나와서 따져보자고 하고 도둑은 숲에 숨어서 수를 내보려고 한다. 이해관계가 다르므로 타협은 불가능하다. 진리는 권력이다. 진리가 발견될수록 자신이 을이 될 확률이 높아진다는 사실을 인간은 본능적으로 안다. 컴퓨터가 등장하자 자신은 아무 잘못이 없는데도 졸지에 컴맹으로 몰리는 것과 같다.
사실주의로 가면 베르세르크의 미우라 켄타로 같고, 슬램 덩크의 이노우에 타케히코 같은 극소수의 독종만 살아남고 엉성한 그림체로 이세계물이나 그리며 어영부영 때우는 보통 작가들은 설 자리가 없다는 사실을 본능적으로 아는 것이다. 그러나 우리가 세계시장을 다 먹으려면 독종이 되어야 한다. 우공이산을 실천해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