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14일 사법 사상 처음으로 대법관 후보로 천거된 법조인 명단이 공개됐으나 법조계 반응이 신통찮다. 대법관 인선 과정에 국민의 의견을 수렴하고 절차를 투명하게 공개해 새 대법관에 대한 신뢰를 높이겠다는 의도가 무색하다는 지적도 나온다. 대법원은 당혹스러움을 감추지 못하고 있다. 천거된 후보 27명 가운데 무려 82%에 해당하는 22명이 법원 내부 인사이고, 나머지 5명도 현직 변호사 일색이다. 검찰이나 학계 인사는 단 1명도 없고, 여성 후보는 민유숙(50·사법연수원 18기) 서울가정법원 수석부장판사가 유일하다. 변호사 출신 후보 가운데도 4명이 대한변호사협회나 서울지방변호사회 등 변호사단체에서 추천하거나 추천했던 인물이다.
이 때문에 "차려진 밥상이 빈약하다"는 평가가 법조계 안팎에서 나온다. 대법원 관계자도 "누구나 천거할 수 있게 문호를 열어뒀는데도 외부인사가 너무 적어 국민이 기대하는 대법관 다양화를 실현할 수 있을지 의문"이라고 우려를 표시했다.
◇"청문회 공포에… 업무도 많고 어려워"= 대법관 후보군이 당초 기대에 못 미칠 정도로 대폭 줄어든데는 다양한 이유가 거론되고 있다. '신상털기식', '창피주기식' 인사청문회에 대한 부담감이 우선적으로 꼽힌다. 재경지법의 한 부장판사는 "최종 후보에 오르게 될지 알 수 없는 단계에서 무작정 검증에 동의하기가 쉽지 않았을 것"이라고 말했다. 다른 판사도 "인사청문회가 후보자의 흠집잡기식으로 흘러가면서 가족들에 대한 미안함 등으로 망설이는 분들도 많은 것으로 안다"고 했다. 이번에 대법관 후보로 천거됐지만 검증에 동의하지 않아 후보군에 오르지 않은 한 법조인은 "명단 공개보다 인사청문회에 대한 부담감이 컸다"며 "인사청문회가 전문성 등 자질 검증보다 신상털기 위주로 간다면 이런 현상은 앞으로도 지속될 것"이라고 우려했다.
대법관 직에 대한 매력이 떨어지고 있다는 점도 후보 기피 현상을 부채질 하고 있다. 대법원에 접수되는 상고심 사건이 연간 3만8000건에 달해 대법관은 1인당 연간 3000여건 이상을 처리해야 한다. 폭주하는 상고사건을 처리하느라 평일 야근은 물론이고 주말이나 여름휴가까지 반납하고 기록과 씨름해야 한다. 더구나 올해는 상고심 사건 접수 건수가 더욱 늘어 4만건 돌파가 확실시 되고 있는 실정이다. 그럼에도 접수 후 2년이 넘도록 선고를 내리지 못하고 있는 상고심 사건이 지난 3월말을 기준으로 615건에 달해 '늑장 재판'이라는 비판을 감수해야 한다.
한 전직 대법관은 "대법관 임명장을 받는 날을 빼고는 퇴임하는 날까지 재판업무에 파묻혀 지내지 않은 날이 없다"며 "최고법원의 판사라는 명예와 보람은 있지만 환갑 언저리의 나이에 버텨내기가 쉬운 일이 아니다"라고 토로했다. 천거됐지만 포기한 다른 법조인도 "대법관 업무 자체에 대한 회의감이 컸다"며 "대법원이라는 성에 갇혀 일만 하고 행동도 자유롭지 못한 생활을 6년씩이나 할 자신이 없다"고 말했다.
부장검사 출신의 한 변호사는 "대법관 업무에 대한 부담감이 변호사 특히 학계나 검찰에서 후보자가 나오지 않는 이유"라며 "대법원이 연간 처리하는 수를 대폭 줄여야 법관 출신이 아닌 사람도 충실히 판단할 수 있게 되는데, 지금 같은 상황이라면 실무에 익숙한 법관들이 사건 처리를 맡을 수밖에 없다"고 지적했다. 재경지법의 한 부장판사도 "상고법원 설립 등을 통해 상고심 제도를 근본적으로 개편하지 않는 한 대법관 다양화는 그림의 떡일 뿐"이라고 지적했다.
◇퇴임 후 진로 불투명… 변호사업계 눈치도= 대법관 임기를 마친 뒤 진로가 불투명하다는 것도 문제점으로 지적된다. 전관예우 논란이 거세지면서 퇴임 후 변호사로 활동하기가 쉽지 않기 때문이다. 최근 대한변협은 전직 대법관의 로펌행을 공개적으로 비판하며 마찰을 빚기도 했다. 한 변호사는 "김소영(50·19기) 대법관처럼 상대적으로 나이가 젊어 퇴임 후에도 은퇴연령까지 수십 년이 남은 경우도 있는데, 전임 대법관의 변호사 활동을 제한하려 든다면 누가 선뜻 대법관 후보에 나설수 있겠는가"라고 말했다.
대한변협이 재야 출신 후보자를 천거하면서 그 명단을 앞서 공개한 것도 영향이 있다는 말도 나온다. 법원장 출신의 한 변호사는 "변협이 자신들이 천거한 후보자의 명단을 미리 공개해 같은 변호사들끼리 경쟁하는 모양새가 되니 다른 변호사들이 나서기가 쉽지 않았을 것"이라고 했다.
천거된 후보 27명 중 학계·검찰인사 없고 여성은 1명 뿐
'신상털기' 인사청문회에 부담… 무작정 검증동의 쉽지 않아
과다한 업무에 퇴임 이후 활동 제한도 걸림돌로 작용한 듯
이 같은 이유로 이번 대법관 후보 천거과정에서도 법관 32명과 비법관 출신 10명 등 모두 42명이 천거됐지만 법학교수 5명과 법관 10명이 검증에 동의하지 않아 최종적으로 27명만 후보로 남았다. 앞서 지난 2월 퇴임한 신영철(61·8기) 전 대법관의 후임 대법관 인선 과정에서도 비슷한 일이 벌어졌다. 법관 27명, 비법관 18명 등 모두 45명이 천거됐지만 비법관 중 현직 검사 4명을 포함해 10명이 검증에 동의하지 않았고 법관 11명도 포기해 결국 법관 16명, 변호사 6명, 교수 2명 등 모두 24명의 후보군만을 놓고 인선 작업이 이뤄졌다.
◇명단 공개는 시대 흐름= 기대와 달리 다양한 후보자들이 나오지는 않았지만 대법관 후보로 천거된 법조인의 명단을 공개하는 것에 대해서는 시대의 흐름에 따른 것이라며 환영하는 목소리가 더 크다.
서울중앙지법의 한 판사는 "그동안 대법관 인사가 밀실에서 진행된다는 불만이 많았던 만큼 천거된 후보자의 명단을 외부에 공개해 법원 인사의 공정성을 보여주는 것은 바람직하다"고 말했다.
천거된 후보자들에 대한 국민 의견 수렴 절차를 통해 부적격 후보자를 걸러내고 오해가 있는 부분에 대해서는 미리 소명할 기회가 충분히 주어질 수 있다는 장점도 있다.
대법원 관계자는 "의견 수렴을 통해 드러난 문제를 청문과정에서 정리하는 것이 바람직하다"며 "그동안은 청문회에서 갑자기 부각된 문제점이나 정치공세가 후보자의 발목을 잡아 대법관 공석 사태가 길어지는 일도 많았다"고 했다.
◇차기 대법관 유력 후보는= 대법관후보자추천위원회(위원장 김종인 건국대 석좌교수)는 천거된 27명의 후보자에 대한 국민들의 의견을 오는 24일까지 수렴한다. 이어 다음달 초순 회의를 열어 대법관 제청후보 적격자 3~4명을 선정해 양승태(67·2기) 대법원장에게 추천할 예정이다. 양 대법원장은 이 가운데 1명을 박근혜 대통령에게 대법관으로 임명제청한다. 외부인사로는 황정근(54·15기) 변호사가 유력하게 거론되고 있다. 법관 출신으로 상고심 재판 업무를 무리없이 수행할 자질을 갖고 있는데다 선거법 분야 최고 전문가로서의 전문성도 갖고 있다.
'법조계의 논객'으로 평가받고 있는 그는 사회 전반을 내다볼 수 있는 넓고 균형잡힌 시각을 갖추고 있다는 점도 장점이다. 내부인사로는 강형주(56·13기) 법원행정처 차장과 성낙송(57·14기) 수원지법원장, 강민구(56·14기) 부산지법원장, 이강원(54·15기) 창원지법원장, 민유숙 서울가정법원 수석부장판사 등이 물망에 오른다. 이 원장은 성균관대 출신으로 비(非) 서울대 출신이라는 점이, 민 수석부장판사는 여성이라는 점이 강점이다.
한편 서울지방변호사회(회장 김한규)는 16일 대법관 후보자로 천거된 22명의 법원 내부 인사 가운데 법관평가에서 하위법관으로 선정됐던 인물이 2명 있다며 이들이 대법관으로 임용돼서는 안된다고 밝혔다. 서울변회는 "불성실한 재판 진행과 부적절한 언행 등으로 하위법관에 선정된 법관이 2명이나 포함돼 있고 이 가운데 A법원장은 2012년부터 2014년까지 3년 연속 하위법관으로 선정됐다"며 후보 천거 기준에 의문을 나타냈다.
출처 법률신문 홍세미 기자
첫댓글 청문회 공포로 후보 거부했다는 건 설득력이 떨어집니다. 뭐가 떳떳하지 않다는 건지?
알아서 걸러졌으니 잘 된 거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