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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83. 2. 28. 방통대 학보에 실린 내용을 스크랩 해두고 여러번 읽은 내용인데 마음을 가다듬기 위해 텍스트화 하여 올린다.
텍스트화 하면서 일부 오자, 탈자는 수정하였다. 원문을 마지막 부분에 첨부한다.
(요약)
1974년 德壽商業高等學校 卒
1976년 韓國放送通信大學 經營學科3回卒
1980년 成均館大學校 法律學科 卒
1982년 서울大學校 大學院 法學科 卒
1974년1월 韓國銀行 入行
1980년6월 第22回 司法試驗 合格
1982년8월 司法研修院 第12期 修了
1983년 서울民地方法院判事
2023년 대법원 대법관 (2023년 7월 18일 퇴임)
한 굽이 세월 돌아서
방통대 학보 1983. 2. 28.
조재연 同門
司法試驗 首席 合格體驗記
이글은 본 대학 졸업생(76년 경영학과 3회 졸)으로 제22회 사법고시에 수석 합격한 조재연 동문이 수석합격의 영광에 이르기까지의 어려웠던 지난 일을 회고하여 쓴 글이다. 같은 처지와 같은 길을 걷는 학우들에게 많은 도움을 줄 것으로 믿는다. 조재연 동문은 현재 본 대학 총동창회 부회장직을 맡고 있다. <편집자 주>
略歷
1956년6월1일 경북 울진 출생
1974년 德壽商業高等學校 卒
1976년 韓國放送通信大學 經營學科3回卒
1980년 成均館大學校 法律學科 卒
1982년 서울大學校 大學院 法學科 卒
1974년1월 韓國銀行 入行
1980년6월 第22回 司法試驗 合格
1982년8월 司法研修院 第12期 修了
現在 서울民地方法院判事
總同窓會 副會長
論文=「우리나라 인플레이션의 現況과 課題」 (政經研究 1977.11)
「稅法上의 減價償却에 관한 硏究」 (碩士學位 論文)
주소 및 연락처:100-00 서울 중구 서소문동 37 서울민사지방법원 제7부판사실 (777-8771)
一,
因果律 ― 이 세상의 모든 일이란 그저 우연히 아무렇게나 이루어진 것이 아니고 거기에는 다 그 나름대로 원인과 까닭이 있다. 다만 우리 인간의 知能力의 한계로 말미암아 그 모든 여유와 결과를 일일이 알지 못할 뿐이다. 이러한 입장에서 생각해 본다면 우리가 누리고 있거나 얻고 있는 知識·名譽·財産·友情·사랑 기타 모든 것은 거저 생기는 법은 없다. 우리가 원하는 것이나 하고자 하는 일은 그 무엇이든지 간에 거기에는 資本과 時間, 勞力과 忍耐, 訓鍊과 苦痛이 따르게 마련이다. 때때로 남이 잃어버린 돈이나 그밖에 값나가는 것들을 줍게 되는 경우도 있으나 그것이 그대로 자기의 소유로 되지는 않는다. 즉 이러한 때에는 원래의 주인에게 돌려주거나 경찰서에 제출하여야 하며 그렇게 하지 않고 임의로 가져버리면 처벌받게 되는 것이다. (遺失物法 第1條, 刑法第 360條) 감나무 밑에 가서 같이 떨어지기만을 기다리는 사람을 어리다고 손가락질하기 전에 우리는 자기 자신을 돌아다 보자. 그리고 이렇게 말하자. 「열매를 거두기 위해서는 스스로 씨를 뿌리고 가꾸는 수고를 해야 한다」고.
二,
부모님들은 내가 태어난 곳이 경북 울진군 호산이라는 어촌마을이라고 말씀해주셨으나, 주위에 대해서 의식의 눈을 뜨게 되었을 무렵 우리 가정은 강원도 통리라는 탄가루 날리는 곳에 와 있었다. 그리고 그때부터 이미 나는 가난의 슬픔과 배고픔의 고통을 느끼게 되었다. 1주일이 넘도록 된장 국물 외에는 아무것도 먹을 것이 없어서 가족들 모두가 방에 누워서 죽음만을 기다리던 중 때마침 救護糧穀으로 배급 나온 옥수수를 삶아 먹고 겨우 굶어 죽는 것을 면하기도 하였다. 문자 그대로 눈물의 보릿고개이자 목구멍이 원수였으니 이웃집에서 찬밥 한 그릇이라도 얻어오게 되면 부모님들은 그래도 다른 식구들을 제쳐놓고 나에게 먹도록 해주셨는데, 이것은 전통적인 男兒偏愛의 발로였다.
탄광으로 일하러 가셨던 아버님과 누나가 1달을 겨우 일하고 더 견디지 못한 채 장맛비가 주룩주룩 쏟아지는 어느 여름날 밤 돌아오시게 되자 우리 가정은 다시 짐을 꾸려 어머님의 친정인 北平이라는 곳으로 이사를 하였다. 그러나 세상인심은 야박한 것이어서 초라한 歸鄕을 반겨줄 사람은 없었다.
오히려 가진 자가 못 가진 자의 등을 벗겨 먹으려는 횡포 때문에 다시 반년만에 새로운 생활의 터전을 찾아 忠北 제천으로 이사를 하고야 말았다. 그리고 나는 이곳에서 국민학교와 중학교를 졸업하였다. 십 리가 조금 넘는 거리를 처음에는 걸어서 다녔고 나중에는 자전거로 통학하였다. 산에 가서 땔감 나무를 하기도 하였고 또 어느 학생잡지사의 지방판매원이 되어 잡지 판매를 해보기도 하였다. 어느 해 봄날이던가 나는 마치 무엇에 홀리기라도 한 듯이 진달래꽃 만발하고 아지랑이가 피어오르는 마을 뒷산을 헤매면서 어린 마음에도 이 가난의 굴레를 벗어버리고야 말겠다는 아픈 다짐을 하였다.
가는 봄 三月 三月은 삼질
江南제비도 안 잊고 왔는데
아무렴은요
설게도 이때는
못 잊게 그리워
(素月)
중학교를 졸업하고 나는 서울의 德壽商高에 진학하였다. 實業系 학교에 가야만 조금이라도 쉽게 직장을 구할 수 있으리라는 생각이 들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가정의 경제 사정은 더욱 나빠지기만 하였다. 仁旺山 중턱의 판잣집에서 東大門까지 교통비가 없어서 걸어서 다닌 일도 한두 번이 아니었다. 누군가 『가난은 결코 부끄러운 것이 아니다. 단지 조금 불편할 뿐이다.」 라고 말했다고 한다. 물론 自己의 中心은 다른 사람이나 外界의 事物에 있지 아니하고 自己 內部에 있다는 점에서 본다면 부유하다고 해서 자만심을 가져서도 안 되고 가난하다고 해서 수치심을 느낄 이유도 없을 것이다. 그러나 가난도 정도 문제이지 계속되는 生活苦에 나의 心身은 너무도 지쳐 있었다. 그래서 그런지 나는 오히려 「經濟的 自由 없이는 政治的 自由도 없다」는 프랭클린 루스벨트의 말에 더 共感이 간다. 高3에 올라가기 직전의 겨울에 아버님은 뜻하지 않게 중풍에 걸려 下半身을 못 쓰게 되었고 동네 老人亭 한쪽 구석방에 자리 잡은 우리 가정은 매일매일이 한숨의 연속이었다.
그해 가을 韓國銀行의 入行試驗에 합격하고 나서 나는 學院에서 英語를 강의하고 또 한편으로는 中學生의 가정교사로 일하면서 번 돈으로 근근이 가계를 꾸려 나갔다. 1974년 1월부터 韓國銀行에 근무하기 시작하여 처음으로 월급이라는 것을 받게 되었고 그 첫 월급을 病床에 누워계시는 아버님의 손에 쥐어 드렸을 때 우리 가족 모두가 북받쳐 오르는 설움에 울고야 말았던 것이다. 그 몇 푼 안 되는 지폐뭉치가 무엇이길래 그렇게도 사람을 울리기도 하고 웃기기도 한단 말인가. 好事多魔라는 말 그대로 그 두 달 후 아버님은 타계하셨다. 以北에서 월남하신 후 한 많은 고향 땅을 그리워하며 갖은 모진 고생을 겪다가 이제 자식이 취직되었는데도 그 효도를 받지도 못한 채 눈을 감으시고 만 것이다.
조상님 뼈 가서 묻힌 곳이라
송아지 동무들과 놀던 곳이라
그래서 그런지도 모르지마는
아아 꿈에서는 항상 고향입니다.
(素月)
三,
銀行이라고 하는 안정된 직장을 얻긴 하였으나 처음부터 그것은 내 목표나 정착지가 아니었다. 그리하여 나는 더 배우고 向上 發展하기 위해서 새로운 도전을 하지 않으면 안되었다.
그것은 다름 아닌 大學 進學이라는 문제였다. 그러나 당시 나는 취직시험만을 준비하여 공부하여 왔으므로 대학 입학 예비고사는 어정쩡하게 합격하였으나 본고사를 치를 만한 실력도 없었고 뿐만 아니라 대학 등록금 준비는 아예 생각도 못 할 처지였다. 그때 선배 한 분이 나에게 방송통신대학이라는 것이 있는데 함께 입학하여보자고 권해왔다. 처음으로 통신대학이라는 말을 들었기 때문에 이곳에 들어갈 것인가 아니면 1년 동안 진학 준비를 하여 다른 대학에 들어갈 것인가로 한동안 고심하였다.
그런 통신대학도 엄연히 국가에서 인정하는 초급대학이고 무엇보다도 등록금이 다른 대학에 비하여 10분의 1도 안 되는 싼값이라는 점에 생각이 미치자 나는 과감히 입학하기로 결심하였다. 「현재 나의 형편에 비추어 경제적으로도 부담이 없고 스스로 터득하며 공부할 수 있다. 여기를 졸업하고 그 자격으로 다시 다음 과정으로 나아가자」 그것은 하나의 모험이 그 모험은 성공하였다. 당시로서는 통신대학에 관해서 일반에게 알려진 것이 별로 없었으므로 이러한 생소한 상태에서 입학한다는 것이 하나의 모험이었다면 그곳에 입학하여 좋은 성적으로 졸업하고 다시 다른 대학에 편입할 수 있었다는 것은 하나의 성공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그 과정은 순탄한 것만은 아니었다 내가 입학 후에 겪은 어려움을 미리예측할 수 있었더라면 아마 그렇게 쉽게 입학 결심을 할 수는 없었을 것이다. 무엇보다도 심각했던 것은 내가 새벽 늦은 밤에 흘러나오는 방송 강의를 제대로 듣지 못한 데서 비롯된 자책감이었다.
그것은 직장생활에서 오는 피로감과 나 자신에게도 이제는 다소 생활이 안정된데서 어떤 나태감이 깃들었기 때문이었다. 이렇게 방송 강의를 제대로 듣지 않고서도 과연 내가 떳떳이 통신대학을 다닌다고 말할 수가 있단 말인가? 실로 개구리가 올챙이 시절을 모른다는 말과 같이 눈물로 밥 먹던 시절을 벌써 잊었단 말인가?
나는 다시금 각오를 새롭게 하였다. 방송 강의도 될 수 있는 대로 열심히 들으려고 애썼고 또 나름대로 교과서의 정독에 힘을 기울였다. 그런데 그다음에 일어난 문제는 출석 수업에 참석 여부였다. 직장에서 특별한 배려를 해줄 수 없던 상황이었을 뿐만 아니라 10일 정도 결근한다는 것 자체가 쉬운 일이 아니었다. 다행히 나는 시간을 낼 수 있는 부서에 근무하고 있었기 때문에 2년간의 출석 수업을 무사히 마쳤지만 그렇지 못하여 중도에서 탈락한 사람들도 많았다. 2학년이 되자 이번에는 또 대학편입학 자격 검정고시를 준비하지 않으면 안 되었다. 나는 상업학교에 다닌 덕분으로 회계학의 기초가 있었으므로 회계학을 선택하고 또 별도로 국어와 영어를 약 3개월간 공부하여 응시한 결과 의외로 전체 수석으로 합격하였다.
그러나 그것으로 일이 끝난 것은 아니었다. 2학년 마지막 시험을 준비함과 아울러 동시에 一般 大學에의 編入 工夫도 하지 않으면 안 되었다. 나는 다른 친구들이 一般 大學에 다니고 있어서 나도 또한 編入해야겠다는 단단한 각오를 하고 동네 讀書室에 자리를 마련하고 3개월간 직장이 끝나면 讀書室로 직행하여 그곳에서 12시 가까이까지 공부한 다음 집에 돌아오는 생활을 계속하였다. 그 결과 1976년 1월에는 成均館大學校 二部 法律學科에 編入學 合格되었고 그해 2월 28일에 放送通信大學 第3回 卒業式에서는 평균 점수 3.66으로 전체 수석으로 졸업하는 영광을 누리게 되었다. 아버님 돌아가신 뒤 혼자서 나를 뒷바라지하신 늙은 어머님께 자식으로서의 도리를 조금이나마 한 것 같은 기쁨이었으니 이것이야말로 苦盡甘來가 아니고 그 무엇이랴!
생활이 그대를 속일지라도
슬퍼하거나 노하지 말라
슬픈 날을 참고 견디노라면
즐거운 날이 오리니...
(푸시킨)
四,
나는 원래 韓國銀行에서의 업무와도 관련이 있고 하여 經濟學에 관심을 갖고 있었다. 그리하여 1977년 政經文化社에서 주최한 제1회 靑年·學生·현상 論文모집에서 「우리나라 인플레이션의 現況과 課題」라는 論文으로 金賞에 당선되어 副賞으로 10만원의 상금을 타기도 하였다. 그러나 資本主義社會에 있어서 經濟原理에 대한 이해가 중요한 것 이상으로 現代의 法治主義 社會의 질서 규범인 法에 대한 이해도 중요함을 느끼게 되었고 여기에서 經濟原理와 法治原理에 대한 相互 補完的인 이해를 위해서 法學科로의 전과를 택하게 된 것이다. 그리하여 나는 지금도 경제학 및 경영학에 대한 관심을 계속 갖고 있으며 한편으로 法學에 있어서도 주로 租稅法·國際去來法·企業法 등에 대해서 관심을 기울이고 있다. 어쨌거나 成大 法科에 편입을 하기는 하였으나 낮에는 직장생활을 하고 밤에는 학교 강의를 듣다 보니 자연히 사법시험에 대한 준비는 엄두도 내지 못하였다. 그런데 당시 成大에 다니면서 느낀 것 중의 하나는 똑같은 학교에 다니면서도 前期 大學에서 낙방하고 온 학생은 좌절감과 열등감을 갖고 있는 경우가 적지 않았으나 곧바로 야간대학으로 온 학생은 어떤 자부심을 갖고 있더라는 점이다. 이와 같이 동일한 학교를 다니면서도 거기에 대한 느낌은 학생마다 같지 않다는 것은 결국 주어진 환경을 어떻게 받아들이느냐 하는 태도의 차이에서 비롯되는 것이다.
너는 자꾸 멀리만 가려느냐
보아라 좋은 거란 가까이 있다.
다만 네가 잡을 줄만 알면
행복은 언제나 거기 있나니.
(괴테)
司法試驗에 응시해야겠다는 막연한 희망이 구체화된 것은 내가 防衛召集服務를 마치고 난 1978년 10월부터였다. 그런데 때마침 나의 업무가 電子計算業務로 바뀌게 되어 그해 말까지는 컴퓨터 프로그래밍의 기초이론을 습득하느라고 제대로 시험 준비를 할 수 없었다. 그러는 가운데 제21회 사법시험 공고가 나고 정신을 차려서 1차 객관식 시험을 준비하게 된 것이 1979년 정월이었다.
1차 시험 일자까지 약 2달이 좀 넘는 기간이 남아있었다. 다시 그 옛날로 돌아가서 직장의 근무 시간에도 틈나는 대로 시험 준비를 하고 직장이 끝나면 곧바로 成大 도서실로 가서 문제집을 풀 곤하였다. 밤늦게 도서실을 나오면 차가운 겨울바람이 얼굴을 때렸지만 불타는 고시 열은 오히려 전신을 녹여주는 듯하였고 날로 향상되는 실력을 感知할 때면 그 어떤 뿌듯한 기쁨이 밀려오는 것만 같았다. 그동안 학교 강의와 내 나름대로의 독서를 통하여 憲法·民法·刑法 등 기본과목에 대한 이해를 하여 둔 것이 짧은 기간동안의 受驗 準備에 큰 저력이 되었다. 英語는 원래부터 늘 쉬지 않고 하여 온 터라 어느 정도 자신이 있었다. 그러나 워낙 준비기간이 짧아서 1차 시험을 치르고 난 후 실력 부족을 통감하게 되었다. 그리하여 이제는 결단의 시기가 온 것 같아서 1979년 3월15일 만 5년 2개월 동안 정들었던 한국은행은 퇴직하였다. 얼마 안 되는 퇴직금을 집에 맡기고 나는 成大에서 司試 準備生을 위하여 특별히 설치한 司馬軒이라는 독서실에 입실하였다. 그 후 발표된 1차 시험에는 다행히도 합격이 되었으나 앞으로 1개월 남은 2차 시험에는 도저히 力不足이었다.
그러나 나는 최선을 다하기로 하였다. 2차 시험까지의 1개월 동안 나는 일찍이 할 수 없었던 노력을 발휘하여 비장한 각오로 법서를 읽어 나갔다. 마침내 결전의 날은 왔다. 1개월간의 2차 시험 준비로 그 어렵다는 司法 高地에 도전한다는 것은 너무나도 무모한 일이었지만 나는 내심으로는 불안하면서도 겉으로는 호기 탕탕하게 출전하였다. 원래 빈 수레가 소리는 더 요란한 법이니까. 그러나 司法 高地는 그렇게 호락호락하게 넘어가지는 않았다. 처음 대해보는 주관식 2차 시험인 데다가 실력마저 너무나 부족하여 침착을 잃고 말았으니 실력 부족은 불안을 넣고 불안은 곧 당황으로 변하여 얼마간 알았던 것도 제대로 쓰지 못하고 말았다. 그러나 결코, 좌절하지 않고 4일간의 2차 시험을 끝까지 견뎌내었다. 조금도 부끄럽지 않았고 오히려 열심히 더 노력하면 반드시 합격할 수 있다는 필승의 신념을 갖게 되었다. 결국 실력배양이 焦眉之急임을 크게 깨우치는 소득을 얻고 나는 조금도 주저함이 없이 2차 시험이 끝난 바로 다음 날부터 즉시 계획을 짜서 체계적인 司試 준비에 들어갔다. 그 후 발표된 2차 시험의 결과는 예상대로 낙방이었으나 그것은 지극히 당연한 것이었으므로 나는 거기에 조금도 동요되지 않았고 오히려 나의 성적이 전체적으로 한 과목의 科落도 없이 평균 점수로 합격선에 약1.5점 정도 미달한 것을 알고는 더욱 용기백배하여 다음 해의 시험에 대한 합격의 信念을 굳혔다. 이것이야말로 내가 단기간 내의 준비로 사시에 합격할 수 있었던 비결 중의 하나였다. 매일 아침 규칙적인 보건체조와 성대 뒷산의 약수터까지의 산책은 건강 유지에 큰 도움이 되었으며 불타는 信念은 精神力의 강화로 학습을 올리게 하였다.
대학 캠퍼스에 찾아온 봄도 나에겐 무관하였고 5월의 하늘 아래 울려 퍼지는 祝祭의 노랫소리도 무심하게 들렸다. 직장을 다닐 때 항상 느껴온 것이 하루 종일 원 없이 공부해 보았으면 하는 소망이 아니었던가 1979년 6월에 실시된 교내 모의 사법시험에서는 담당 2위의 성적을 기록하여 주목을 끌기도 하였다. 그해 7월 중순부터 월말까지 약 2개월 동안은 수원에 있는 成大기숙사에서 공부하였다. 고시 준비생에게는 더없이 좋은 시설이었다.
매일 아침마다 운동장을 뛰었고 또 때때로 축구 시합을 가져 땀을 흘렸으므로 학습의 능률이 저하되기 쉬운 여름철에도 계속하여 진도를 유지할 수가 있었으며 8월 말에 다시 본교 司馬軒으로 돌아올 때는 여름을 잘 활용했다는 만족감을 느꼈다. 가을에 접어들면서 때때로 코막힘 증세로 고생하였고 이로인해 한동안 학습능률도 감퇴되었다. 그러던 중 10.26사태가 발생하여 학교가 문을 닫게 되자 나는 짐을 꾸려 집으로 돌아왔다. 그러나 아무래도 집에서 공부하는 것은 성과가 그리 좋지 못하였다. 자꾸 게을러지는 나 자신을 발견하고 한 달 만에 다시 보따리를 싸 들고 청평에 있는 考試村을 찾아갔다. 여기서 그다음 해 2월 초까지 있으면서 암기에 치중하였다. 그곳에서의 생활은 좋은 동료들이 함께 있었기 때문에 나에게 많은 도움이 되었으나 2개월이 지나자 다소 나태해지기 시작하였고 또 시험 일자가 가까워질수록 서울에 있는 것이 여러모로 유리할 것 같아 그곳을 떠나기로 작정하였다. 청평을 떠나오기 전날 밤 동료들이 베풀어준 환송연으로 인하여 모처럼 밤새도록 술과 노래로 청평호반을 수놓은 것은 잊을 수 없는 수험생활 중의 한 낭만이었다.
다시 司馬軒에 복귀하여 최종 정리를 가다듬었고 모의시험에서는 좋은 점수로 1위를 하여 모두들 나에게 기대를 거는 것 같았다. 그러나 시험이 가까워 올수록 처음의 자신만만하던 기백은 점차 약화되었고 막상 4일간의 시험기간 동안은 극도의 긴장으로 식사도 제대로 하지 못할 정도였다. 시험이 끝났을 때 나는 어느 정도 합격을 자신할 수 있었다. 발표일까지는 만일에 낙방하는 경우를 대비하여 다시 책을 잡았으나 이전처럼 열심히 할 수는 없었다. 드디어 발표날이 다가왔다. 나는 아침을 드는 둥 마는 둥 하고 집을 나와 영화 한 편을 관람하고 나서 12시경 考試雜誌社로 전화를 걸었다. 다이얼을 돌리는 손도 떨렸고 나의 수험번호를 어떻게 말했는지도 모르겠으나 전화를 받은 상대방이 「축하합니다. 합격입니다」라고 말해주는 것이 아닌가? 곧바로 택시를 타고 집에 돌아오니 벌써 신문기자들이 와있었고 그들로부터 내가 首席 合格하였다는 말을 들었다. 도무지 실감이 나지 않았다. 그러나 그것은 사실로 눈앞에 와있었다. 그때의 그 흥분 그 감격、그 눈물, 그것은 지난 1년 2개월간의 忍苦의 대가요、아니 어린 시절 고향 뒷산에서 한 맹세의 실현이기도 하였다.
五,
고시 준비뿐만 아니라 무릇 모든 배움의 길에 있어서 근본적인 자세에 관하여서는 이미 옛 聖賢께서 이를 간단명료하게 설파한 바 있다.
學而不思則罔 思而不學則殆 (論語)
「배우기만 하고 생각하지 않으면 어두우며 생각만 하고 배우지 않으면 위태롭다」
따라서 그 이상으로 무엇을 더 말한다는 것이 어리석을지도 모르겠으나 후배들의 학습에 참고가 되었으면 하는 마음에서 그동안 내가 受驗 生活에서 느낀 몇 가지를 적어보고자 한다.
(1)
평소에 노력을 하자.
일정한 노력도 없이 좋은 성적이나 어떤 시험에서의 합격을 기대함은 젊은이의 자세가 아니며 배우는 자의 도리가 아니다. 지금 하고 있는 일이나 학습은 크게는 자기자신의 인생 그 자체에 그리고 작게는 다른 어떤 일이나 시험에 있어서도 알게 모르게 다 밑거름이 된다는 사실을 잊지 말자.
(2)
體系的인 整理를 중요시하자.
시간은 한정되어 있고 공부할 양은 무한한 이상 항상 공부하고 있는 것을 체계적으로 정리하는 일이 중요하다.
잡다한 지식을 어설프게 알기보다는 단 몇 가지만이라도 확실하게 체계적으로 소화하는 것이 낫다. 무기가 아무리 많고 우수하더라도 그것이 정비되어 있지 않으면 제구실을 하지 못하는 것과 마찬가지로 산만한 기억은 아예 모르는 것만도 못한 경우가 많다. 따라서 특정 주제에 대한 깊이 있는 연구가 아닌 이상 평소의 학습이나 시험 준비를 위해서는 이것저것 여러 가지를 보는 것보다는 어느 한 가지라도 확실하게 보는 것이 좋다. 體系的으로 정리하는 것은 개인별로 그 방법이 천차만별이겠으나 나는 교과서를 한눈에 알아볼 수 있도록 굵기를 달리하여 밑줄을 긋고 또 노트 정리를 하는 방식으로 체계화하였다.
(3)
적어도 語學 하나 정도는 수준급이 되도록 하자.
어느 試驗에서나 어학이 없는 시험은 없다. 그리고 시험 준비 중 가장 많은 시간이 드는 것도 語學 科目이다.
그러므로 평소에 어느 나라 말이든지 한 가지 정도는 숙달해두어야 다른 과목을 위해서 시간을 늘릴 수 있다. 語學 實力이 부족한 사람은 어느 시험에서나 일단 不利한 위치에 서야한다는 것을 명심하자.
(4)
집중적인 노력이 필요하다.
시험이라는 것이 답안지에 나타난 것만을 기준으로 삼고 또 사람의 기억에도 한계가 있는 이상 특정기간 동안에 최대한의 집중을 하는 것이 필요하다. 즉 평소에도 노력하되 인간인 이상 언제나 최대한도의 노력을 발휘할 수는 없으므로 거기에도 强弱의 조절이 있어야 한다는 말이다. 마치 권투선수가 평소에도 연습하되 시합상대방과 일자가 정해지면 거기에 맞추어 계획을 세우고 이에 따른 하드 트레이닝에 돌입하는 것과 같다.
(5)
끝으로 특히 司法試險등 각종 고시를 준비하는 사람들을 위해서 몇 가지 적는다. 교과서의 선택은 일반적으로 定評이 나 있는 것을 고르되 가급적이면 最新의 것을 선택하도록 한다. 어떤 사람들은 교과서 외 문제집이나 논문집 등을 많이 참고하나 일단 어느 수준에 도달할 때까지는 선택한 基本書 單卷主義를 지키는 것이 좋으며 그 이후에 있어서도 항상 교과서 중심으로 공부할 것이다.
講義는 문제의 핵심을 알려주고 또 출제가능한 것이 어떤 것인지를 알려주므로 그 중요성은 아무리 강조해도 지나치지 않는다. 山寺에서 獨學으로 공부하던 시대는 지나간지 오래다.
試験에 임해서는 初案作成에 심혈을 기울여야 한다. 문제를 받고 나서 초안을 작성하기까지의 약 10분간에 當落이 결정되는 것이다. 答案은 큼직한 글씨로 또박또박 적되 중요한 用語에 한해서는 漢字를 쓰는 것이 좋다. 지나치게 漢字를 많이 쓰는 것은 時間이 많이 소요될 뿐만 아니라 誤字의 위험도 있어 피하는 것이 바람직하다. 매 과목당 중요한 문제 20가지 정도는 완전히 외우고 있는 것이 요망된다. 모르는 것을 아무렇게나 써보는 것은 감점의 요인이 되므로 피하여야 하며 답안을 작성하고 나서 꼭 읽어서 誤字·脫字를 바로잡는 것이 필요하다. 答案의 구성 방법은 科目별로 또 問題 별로 구체적인 경우에 따라서 다르겠지만 시험이란 원래 일정 수준에 도달하였는지의 여부를 판정하기 위한 것이므로 지나치게 독창적인 체제로 작성하는 일은 피하여야 할 것이다.
법률 과목의 경우라면 대개 ①문제의 핵심(?)이나 출제자의 의도를 생각해 본 다음 ②義·槪念 ③제도의 趣旨·沿革·實益 ④ 성질과 종류 ⑤ 要件 ⑥ 효과(원칙과 예외) ⑦ 관련된 제도 또는 문제점 ⑧ 판례 및 방법론 ⑨ 관련 법조문의 명시 ⑩ 결론 등에 의하면서 이러한 항목 중의 어느 하나가 누락되지 않도록 주의하여 답안을 구성한다면 무난히 합격점수를 받을 수 있으리라고 본다. 풍부한 실력을 쌓으면 답안의 내용도 훤히 빛나는 것이므로 답안작성의 기술을 서서 실력을 쌓아야 함은 물론이다.
六,
우리는 인생을 살아가면서 작든 크든 수많은 문제들에 직면하게 되고 그때 우리는 어떤 결정을 하지 않으면 안 된다. 낡은 타성에 젖어 현실에 안주하고 있는 한 발전이란 기대할 수 없다. 콜럼버스가 新大陸을 발견하게 된 것도 식량이 떨어져 가는 상황에서 위험을 무릅쓰고 항해를 계속하기로 결단을 내린 데에서 비롯된 것이다. 새 포도주는 새 부대에 담아야 하듯이 인생의 중대한 轉換點(turning point)에서 그 어떤 결단이 없이는 새로운 가능성도 희망도 있을 수 없다. 그러므로 나는 감히 단언한다. 「決斷 없이 發展 없다」
다음, 현대의 사회는 이미 專門化를 중심으로 하여 움직이고 있다는 점을 그냥 지나쳐서는 안 될 것이다. 종래의 官僚制(bureaucracy)는 이제 技術 官僚制(technocracy)로 변모해가고 있는 것이다. 이러한 사회에서 필요로 하는 사람은 과거에 서처럼 만능 박사가 아니라 어느 특정 분야에 대한 전문적인 지식을 가진 사람이다. 쉽게 말해서 技術 없이는 밥을 먹고 살아가기가 힘든 세상이 된 것이다. 法律 분야만 하더라도 한 사람의 法律家가 모든 법적 문제를 해결할 수 있는 시대는 지나가고 있다. 특정의 법률 분야에 대해서 깊이 있게 알지 못하면 행세하기가 어려운 것이 현실이라고 할 수 있다. 그러므로 가급적 남이 하지 않는 분야를 개척하고자 하는 노력이 필요하고 또 한 가지 이상의 전문 기술을 습득하는 일이 중요함을 다시 한번 강조하고자 한다. 「억울하면 專門家가 되어라.」
天才는 남다른 努力家란 말도 있듯이 아무리 우수한 지능을 가졌다고 하더라도 강인한 의지와 끈기가 없이는 치열한 경쟁에서 승리할 수 없다.
고시 준비라는 것도 결국 그 절반쯤은 자기 자신과의 투쟁이라고 할 수 있다. 그러기에 이를 가리켜 흔히 「孤獨한 灰色 生活)이라고도 부르는 것이다. 여기에서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내일에 대한 희망을 풀고 불타는 信念으로써 목표에 도전하는 과감한 투쟁 정신이다. 무엇이 진정한 소망이며 무엇이 허황된 꿈인가는 실제로 시도해보고 체험해보기 전에는 제대로 알 수 없는 것이다. 어떠한 곤경에 처해 있을지라도 반드시 빠져나갈 길이 있으며, 어떠한 어려운 문제일지라도 반드시 해결책이 있으리라는 확신을 갖고 노력하는 자세가 필요하다. 세월은 화살과 같이 흐르고 한 번 지나간 시절은 두 번 다시 돌아오지 않는다. 생각에만 잠겨있기에는 우리들의 청춘이 너무도 아깝지 않은가! 「일을 동반하지 않은 신념은 죽은 신념이다.」
신념과 행동이 발휘되기 위해서는 우리는 자기 자신을 소중히 생각하지 않으면 안 된다. 만일 자기 자신을 못난 인간이라고 생각한다면 자연히 일거수 일투족이 그렇게 될 것이며 남들도 또한 나를 못난 인간으로 취급해버리고 말 것이다. 실로 삼라만상의 중심은 나에게 있다는 깨달음이 있어야 한다. 이것은 속된 利己主義가 아니라 자기의 존재 이유를 긍정적으로 받아들이는 自肯心인 것이다.
자기 자신을 존중하지 않는 사람이 어찌 다른 사람을 존중할 수 있겠는가. 하늘도 스스로 돕는 자를 돕는다고 하였다. 이 인생은 남이 대신 살아줄 수도 없고 또 두 번 다시 살 수도 없는 오직 하나뿐인 인생인 것이므로 이를 소중히 생각하지 않을 수 없는 것이다. 「우리의 결함 중에서 가장 비열한 것은 자신의 존재를 멸시하는 일이다.」(몽테뉴)
우리는 흔히 과거의 過誤·損失·충격으로 인하여 고민하고 괴로워하는 경우가 많이 있다. 또 그와 똑같은 정도로 미래에 대해서 불안해하기도 한다. 그러나 과거에 집착하고 있는 한 향상과 발전은 있을 수 없다. 聖書에서도 惡을 떠나 善을 행하라고 가르치고 있다. 참회한답시고 애만 태우는 사람은 실제로는 돌아섬이라는 일에 써야 할 가장 요긴한 힘을 움켜쥐고만 있는 셈이다. 바꾸려 해도 바꿀 수 없는 것이 過去之事요, 이미 해버린 일을 白紙로 無效化 시킬 수는 없는 노릇이다. 그럴 바에야 과거로부터 돌아서서 오늘을 충실히 사는 것이 낫지 않겠는가. 또 우리는 내일을 두려워할 필요도 없다. 내일의 일에 대해서 걱정을 많이 하면 할수록 지금 당장 부닥치고 있는 문제들과 싸울 힘은 점점 약해지는 것이다.
중요한 것은 바로, 이 순간이다.「過去를 갖지 않은 聖者는 없고 未來가 없는 罪人도 없다.」 (페르시아 格言)
大地 위에 두 발을 힘차게 딛고 서되 가슴 속에는 높고 원대한 理想을 품도록 하자. 떡갈나무는 도토리 속에서 잠자고 거대한 나무도 그 조그만 종자 속에서 자라고 있으며 새는 알 속에서 때가 올 것을 기다리고 있다. 꿈과 비전을 소중히 키우자 자기의 미래를 스스로 설계하고 개척해나가는 자기 자신의 주인이 되자. 천박한 인간은 운을 믿고 어질고 강한 인간은 원인과 결과를 믿는다고 하였다. 나태와 무관심과 무기력 속에서 내일에의 아무런 희망도 없이 바람 부는 대로 물결치는 대로 자기 자신을 던져버리고 하루하루를 그냥 보내버리기에는 인생이 너무도 아깝지 않은가. 사회변화의 속도는 가속도적으로 빨라지고 있다. 시간적으로도 우리의 사고나 감각을 과거의 틀에서부터 해방시켜서 20세기 후반에 적응시켜야 할 뿐만 아니라 공간적으로도 좁은 장소의 틀에서 벗어나서 국제화 시대에 적응할 수 있는 안목을 가져야 할 것이다.
여기에 덧붙여 하나의 知識人으로서 우리의 사회와 역사에 대해서 使命感과 責任感을 느끼는 고민도 필요하다.
七、
과거를 뒤돌아본다는 것은 현재 위치를 생각하고 미래를 준비하기 위함이다. 지나온 한국이 세월을 돌아볼 때 영광과 기쁨의 순간도 있었으나 또 한편으로는 인간적인 고뇌와 실수의 순간도 있었다. 특히 어려운 시절에 이를 극복한 데에는 은사님들을 비롯한 주위 여러분들의 도움이 컸음을 고백하지 않을 수 없다.
세월의 한 모퉁이를 돌아서면 또다시 가야 할 인생길이 눈앞에 다가온다. 날마다 날마다 새로워지고 이제는 조금은 내가 받은 은혜에 보답하는 생활이 되어야 함을 느낀다. 인간적인 자기 수양의 길은 죽을 때까지 끝이 없다고 하지 않던가. 앞으로의 생활도 쉬지 않고 노력하여 보다 향상 발전하는 인간이 될 것을 마음속으로 다짐해 본다.
강한 욕망에 이끌려
자신의 힘을 모아서
이 세상 그 어느 것에도
패하지 않겠다고 마음먹게 될 때까지
한 인간의 능력을 완전히 알아낼 수는 없다.
(聖 저메인 클라우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