행15:22~41 사람의 길이 자기에게 있지 아니하니
교회는 그동안 복음과 율법, 혹은 율법과 복음이라는 숙제를 특별히 이방 교회에서 어떻게 해결해야 하는가에 대한 문제에 봉착해있었는데, 바울도 복음을 전하면서, 율법주의에 많이 부딪쳤기 때문에, 이 일에 대해서 성령 안에서 어떻게 해야하는지 확신을 점점 가지게 되었고, 베드로도 예루살렘에서 그 문제를 공감하고 있었다. 그러나 아직까지 어떻게 해야 하는가에 대한 방침이 없었는데, 이 때, 예루살렘 교회 회의를 통해서, 이방인들에 대한 율법의 수위를 정하는 지침이 있었다.
이것이 중요한 것은 만일 율법을 다 지켜서 구원을 받는다고 하면, 돼지고기는 먹으면 안되고, 장어구이도 먹지 못하게 된다. 물론 율법은 유대인들에게는 익숙한 것이었으나, 이방인에게는 할례를 비롯하여, 여러 가지 문제가 발생하였다. 그러므로 성령의 감동 아래 사도들이 모여 회의를 하였고, 이 회의를 통해서 4가지 정도만 조심하는 것으로 이방인들에게는 율법을 권장하였다. 첫 번째는 우상제물, 두 번째는 피, 세 번째는 목매어 죽인 것, 네 번째는 음행이다. 이것은 매우 보편적인 양심에 합당한 것으로, 그동안 율법문제로 고심하고 있었던 이방인 교회들에게 자유를 주는 공문이었을 것이다. 주로 먹는 문제에 관한 법이었던 것 같다. 우상제물과 피 목메어 죽인 것 등은 먹는 문제이고, 음행과 이것을 제외하고는 먹는 문제에 자유를 준 것이다. 그러므로 이 서신을 기쁨으로 교회마다 회람하도록 전달하는 특명이 바울과 바나바에게 주어졌는데, 이 서신이 들어간 교회마다 분명히 할렐루야! 이제 돼지고기 장어구이를 맘껏 거리낌 없이 먹을 수 있다 라는 기쁨의 소리가 들렸을 것이다. 바울과 바나바는 이 서신을 수리아 안디옥 길리기아 지방에 전달하라는 특명을 받았는데, 안타깝게도 작은 차이 때문에, 일이 그르쳐질 수 있는 위기에 놓일 뻔하였다.
22 이에 사도와 장로와 온 교회가 그 중에서 사람들을 택하여 바울과 바나바와 함께 안디옥으로 보내기를 결정하니 곧 형제 중에 인도자인 바사바라 하는 유다와 실라더라
-> 예루살렘 회의의 결의를 적은 공문을 전달할 사람을 택하였는데, 바울과 바나바 그리고 유다와 실라였다. 유다와 실라는 회중의 인도자들이었는데, 바-나바는 위로의 아들, 바-사바는 안식의 아들이라는 뜻이라고 한다. ‘바’는 아들이라는 뜻인데, 바-디메오 하면, 디메오의 아들, 바-나바 하면, 나바의 아들, 바-사바 하면 사바의 아들이라는 뜻이라고 한다. 별명으로 보아 아마도 유다는 굉장히 편안한 사람이었을 것 같다. 별명이 ‘안식의 아들’이기 때문이다. 하여간 편지의 내용은 이러하다.
23 그 편에 편지를 부쳐 이르되 사도와 장로 된 형제들은 안디옥과 수리아와 길리기아에 있는 이방인 형제들에게 문안하노라 24 들은즉 우리 가운데서 어떤 사람들이 우리의 지시도 없이 나가서 말로 너희를 괴롭게 하고 마음을 혼란하게 한다 하기로 25~26 사람들을 택하여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을 위하여 생명을 아끼지 아니하는 자인 우리가 사랑하는 바나바와 바울과 함께 너희에게 보내기를 만장일치로 결정하였노라 27 그리하여 유다와 실라를 보내니 그들도 이 일을 말로 전하리라 28 성령과 우리는 이 요긴한 것들 외에는 아무 짐도 너희에게 지우지 아니하는 것이 옳은 줄 알았노니 29 우상의 제물과 피와 목매어 죽인 것과 음행을 멀리할지니라 이에 스스로 삼가면 잘되리라 평안함을 원하노라 하였더라
-> 율법주의 복음을 전하는 자들은 곧 할례당을 가리킨다. 할례를 받아야, 율법을 지켜야 구원을 받는다고 말하는 자들이었다. 오직 구원은 예수 그리스도로 받는다. 아무도 스스로 구원할 사람이 없다. 예수를 믿음으로 구원을 받는다. 십자가에 달리신 예수만이 우리를 죄에서 구원하시고, 죽음에서 구원하신다. 그런데 생각해보면, 초신자 때는 말씀의 차이를 잘 모르고 산다. 그냥 하나님 말씀은 다 옳기 때문에 다 지켜야 한다고 생각한다. 율법주의가 뭔지도 모른다. 유대인이 아니기 때문에, 그러다가 과도기를 지나서, 아 사람이 율법으로는 구원을 받을 수 없구나 라는 것을 깨닫게 된다. 율법은 죄를 깨닫게 한다. 바늘도둑이 소도둑 되지 않게 함이다. 그리고 올바른 방향을 제시한다. 아무튼 복음을 들으면 기쁜데, 율법을 들으면, 마음이 죄의식으로 인하여 우울해진다. 롤러코스터를 타는 것 같다. 물론 성경은 예수 그리스도에 관한 믿음과 하나님께 대한 회개를 가르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시간이 지날수록 복음이 제일 중요하다는 것을 알게 된다. 말씀의 유익은 자발성에 있다. 하나님도 자발적인 순종을 기뻐하신다. 억지로 하는 것은 받지 않으신다. 고후9:5~7, 그러므로 성령님과 교회가 이 공문의 증인으로 이방인 교회들은 이것 4가지만 주의하라고 방침을 정한 것이다.
30 그들이 작별하고 안디옥에 내려가 무리를 모은 후에 편지를 전하니 31 읽고 그 위로한 말을 기뻐하더라
-> 아니나 다를까, 이들이 안디옥에 가서 편지를 읽어 내용을 공포하니, 이방인 교회들이 그 위로의 말을 듣고 기뻐하였다. 이제 이것만 주의하고, 돼지고기와 장어구이를 마음껏 거리낌 없이 먹을 수 있겠구나. 할렐루야! 이들은 아마도 예수 안에 있는 자유를 찬양하였을 것이다.
32 유다와 실라도 선지자라 여러 말로 형제를 권면하여 굳게 하고 33 얼마 있다가 평안히 가라는 전송을 형제들에게 받고 자기를 보내던 사람들에게로 돌아가되 34(없음)
-> 안디옥에서 기쁨이 넘칠 때, 유다와 실라도 여러 말로 형제들을 권면하였는데, 안식의 아들 유다만 돌아간 것으로 보인다. 실라는 이 때, 안디옥에서 34(없음) 풋노트를 보면, ‘실라는 그들과 함께 유하기를 작정하고’ 라는 사본이 있는데, 실라는 돼지고기를 먹기에 눈치 보이는 예루살렘보다 맘껏 제육볶음 장어구이를 먹을 수 있는 안디옥이 편했을지도 모른다. 하여간 실라가 안디옥에 남았는데, 참으로 역사의 아이러니가 여기서 벌어진다.
35 바울과 바나바는 안디옥에서 유하며 수다한 다른 사람들과 함께 주의 말씀을 가르치며 전파하니라
-> 바울과 바나바는 예루살렘 회의에서의 공문 심부름을 안디옥에서 잘 감당하고 많은 사람들에게 말씀을 전하고 있었다.
36 며칠 후에 바울이 바나바더러 말하되 우리가 주의 말씀을 전한 각 성으로 다시 가서 형제들이 어떠한가 방문하자 하고
-> 그리고 바울은 예루살렘 교부의 심부름도 감당할 겸, 수리아와 길리기아 지역 곧 1차 여행의 지역을 다시 가보자는 제안을 하였는데, 안타깝게도 성향의 차이로 인하여 갈라지고 말았다.
37 바나바는 마가라 하는 요한도 데리고 가고자 하나 38 바울은 밤빌리아에서 자기들을 떠나 함께 일하러 가지 아니한 자를 데리고 가는 것이 옳지 않다 하여 39 서로 심히 다투어 피차 갈라서니 바나바는 마가를 데리고 배 타고 구브로로 가고
-> 마가 요한을 품고 가자는 바나바와, 중간에 변절했던 자와 다시 같이 할 수 없다는 바울이 크게 다투는 일이 발생하였는데, 바나바가 참다 폭발한 것으로 보인다. 바울은 목적지향적인 사람이고, 바나바는 관계중심적인 사람이라고 하는데, 특별히 조카 마가의 문제가 걸림돌이 된 것이다. 율법주의자였던 바울, 다소에서 듣보잡이었던 바울을 불러 데려온 사람이 바나바인데, 너는 긍휼이 없냐. 어찌 그렇게 개구리 올챙이적 생각 못하고 내 조카를 매몰차게 대하느냐. 그랬을지도 모른다. 아무튼 바울의 프로모터는 바나바였고, 바울이 선수였던 셈이었는데, 바울이 마가를 버려야 한다고 말하는 순간, 바나바는 화가 나서 마가를 데리고 당장에 고향인 구브로로 가버리고 말았다. 아무튼 이로 인하여 공문 심부름은 갑자기 바울 혼자 감당하게 되었는데, 바울도 충격이 컸을 것이다. 그러나 이 때 마침 안디옥이 좋다고 여기 머물겠다고 작정한 실라가 바나바의 빈자리를 대신하게 되었다. 그런데 훗날 조카 마가는 삼촌 바나바가 챙겨준 덕분에, 교회에서 다시 쓰임을 받았고 마가복음을 쓰게 되었다. 그러므로 나중에 이 바나바의 결정은 옳은 것으로 판명되었다. 바울도 훗날 자신의 잘못을 깨닫고 마가를 찾았는데, 그러나 바울은 복음 중심적으로 살면서 인간관계에 매이지 않았다. 어디를 가던지 친구가 생겼다. 아무튼 이 둘을 끊임없이 살게 한 원동력은 복음이다.
40 바울은 실라를 택한 후에 형제들에게 주의 은혜에 부탁함을 받고 떠나 41 수리아와 길리기아로 다니며 교회들을 견고하게 하니라
-> 바나바는 조카와 구브로로 떠났지만, 바울은 실라를 택하여, 수리아 길리기아에 있는 교회들에게 예루살렘 공문을 전달하고, 교회들을 견고하게 하였다.
분명, 수리아 길리기아 교회에서도 안디옥 교회처럼 예루살렘 회의 서신을 받고 기뻐하였을 것이다. 예루살렘 회의 서신은 예수 안에 있는 자유를 지킨 회의라고 할 수 있다. 이 공문은 이방 교회들이 율법에 찜찜한 부분들을 해소하고, 자유를 누리고 선용할 수 있는 기회가 되었을 것이다. 자유로 말미암아 율법도 감사로 지키고, 자원해서 사랑으로 지키는 것이 되었기 때문이다.
또한 바나바와 갈라진 사건은 바울로 하여금 자신을 돌아보는 계기가 되었을 것이다. 바나바는 이후 밀라노의 감독이 되었다는 설이 있고, 또는 구브로에서 선교하다가 순교하였다는 설이 있는데, 아무튼 이 둘은 나중에 화해한 것으로 보인다. (고전9:6), 이들은 갈라졌음에도, 둘이 열심히 복음을 전하였고, 성향의 차이는 있을지라도 분명히 화해하였을 것이다. 중요한 것은 이들이 갈라졌지만, 그것이 전화위복이 되었다. 마가는 나중에 마가복음을 썼고, 바울은 심복인 디모데와 디도를 만나게 되었고 바나바의 빈자리를 메우면서 자신도 이들의 프로모터가 되었다.
렘10:23 여호와여 내가 알거니와 사람의 길이 자신에게 있지 아니하니 걸음을 지도함이 걷는 자에게 있지 아니하니이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