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스크
남의 집의 불구경 하듯 했다. 나에게는 먼 꿈나라 같은 얘기였다. 중국 우한에서 폐렴이 발생했다. 인명피해가 나고 그 기세가 들불처럼 무섭게 퍼져가고 있다고 외신이 연일 톱뉴스로 전한다. 미국과 일본은 국력을 과시라도 하듯이 우한으로 특별기를 보내 빠르게 자국민을 탈출시킨다. 우리나라도 비행기로 교민을 철수시킨다. 무슨 난리가 난 것 같다. 우리는 이웃 중국의 아픔이 나의 아픔이라며 마스크 수백만 장을 지원하고 필요하면 의료진의 파견을 검토한다고 한다. 그렇게 코로나바이러스가 세상을 집어삼키는 블랙홀이 되어가고 있다.
지구는 일일생활권으로 국가 간의 인적교류는 어쩔 수가 없다. 2월 18일 이전만 해도 우리나라에는 30여 명의 확진자가 발생하였다. 적은 숫자이기에 역학조사가 이루어지고 했지만, 국민의 큰 관심을 끌지는 못했다. 문제는 대구에 신천지 교인인 31번 환자가 대구를 헤집고 다니는 바람에 남의 집의 일이 아닌 나의 일이 되어 버렸다. 대구에는 하루에 수백 명씩 확진자가 늘어난다. 정부는 사회적 거리 두기와 손을 잘 씻고 마스크를 착용하라고 권고한다. 거리 두기와 손 씻기는 각자 조심하고 실천하면 되지만, 마스크는 개인의 잘잘못을 넘어 구매 과정이 전쟁이다. 진종일 줄을 서고도 구하지 못해 발길을 돌리는 사람들, 원망이 하늘을 찌른다.
대구의 확진자가 4~5천 명을 훌쩍 넘어서자 멀리 있는 지인들로부터 안부 전화를 자주 받는다. 일성이 “괜찮으냐?”다 그리고 마스크는 어떻게 구하느냐며 걱정해준다. 서울의 친구로부터 전화가 왔다. “야 대구는 난리데, 너는 괜찮으냐? 마스크는 확보했느냐?”고 한다. 나는 웃으며“그래 낙동강 전선은 잘 사수하고 있다. 걱정해줘서 고맙다” 하자 대구는 마스크 구하기 힘들다던데 하며 30장을 보내왔다. 정말로 작은 것에 이렇게 고마움을 느껴 보기도 참으로 오랜만이다. 그 어떤 선물보다 고마웠다. 이때가 나도 마스크를 구하기 위해 줄을 서서 기다리며 구입할 때였으니 친구의 정이 새삼 고맙게 느껴졌다. 옛 동료가 10여 장을 보내왔고, 동서가 20여 장을 보내왔다. 그때부터는 마음이 편안해졌다. 6.25 전쟁 때 피난을 가면서 양식을 많이 확보했을 때가 가장 든든했다던 오래전에 들은 어머니의 옛이야기가 새록새록 해져 왔다.
마스크를 여유 있게 확보하지 못했을 때의 풍경은 그림 속의 아픔이었다. 식구들 각자가 사용한 마스크를 베란다 빨래 걸이에 3~4개씩 걸었다. 햇볕에 말리며 재사용을 했다. 바람에 나풀거리는 고만고만한 마스크가 반세기 전으로 나를 내려놓는다. 중학교 시절이다. 집에서 안동 시내에 있는 학교로 기차 통학을 했다. 추운 겨울날 새벽같이 일어나 20여 분을 걸리는 기차역까지 걸어 다녔다. 경제적으로 넉넉하지 못한 시절이라 방한복도 없었다. 지금 같은 패딩은 생각조차 할 수 없는 시절이었다. 내복에 정해진 교복을 입는 것이 고작이었다. 그런데 새벽 일찍 나서면 왜 그리도 추웠는지 누나가 털실로 만들어준 마스크 하나가 옷 한 벌의 방한 효과보다 더 컸던 기억이 난다. 한참을 걸어 기차역에 도착하면 마스크 옆과 눈썹에 하얀 눈 같은 성애가 달리던 그때가 먼 기억 속에 아른거린다.
진흙 속에 연꽃이 피듯이 세상이 코로나에 빠져 허우적거릴 때 작은 정들이 모여 아름다운 세상을 만들어 주고 있다. 어려울 때 친구가 참 친구이고 비를 맞을 때 우산을 들어주는 사람이 진정한 친구가 아닐까? 세상의 아픔을 같이하려는 사람들이 사라지지 않은 한 코로나란 괴질은 반드시 소멸할 것이다. 막힌 하수구가 뚫리듯 하루빨리 이 세상도 뻥 뚫렸으면 좋겠다. 빨랫줄에 걸린 하얀 마스크를 본다. 언젠가는 추억할 진기한 풍광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