몽구
손진숙
새로 입주한 친구 집에 구경을 갔다. 점심을 먹고 나자 친구는 이삿짐을 정리하느라 피곤했던지 풋잠이 들었다. 혼자 살그머니 밖으로 나왔다. 산 쪽으로 난 길을 따라 조금 오르니 산 초입에 다다랐다. ‘출입 금지’ 팻말이 서 있었다. 발길을 되돌려 내려왔다.
한적한 길이 이어지다가 넓은 들 가운데로 뚫린 길이 나타났다. 다시 되돌아서 걸음을 옮겼다. 그때 컹컹 개 짖는 소리가 들렸다. 소리 나는 방향으로 고개를 돌렸다. 전원주택 현관 앞에 누런 털빛의 개 한 마리가 줄에 묶인 채 나를 향해 짖고 있었다. 대문에는 궁서체로 ‘개 조심하시 개’라 써 붙여 놓았다.
친구가 이 마을로 이사 오기 전에 살던 산골에서였다. 그림을 그리거나 시를 짓겠다며 귀촌해 살고 있었다. 지난해 봄, 그 집에 갔을 때 웬 강아지 한 마리가 있었다. 어떤 친구가 귀촌한 친구를 위해서 어미젖을 뗀 지 얼마 되지 않은 강아지를 분양해 준다기에 사양했지만, 기어이 데려다 놓고 갔다고 했다. 어떻게 키워야 할지 모르겠다던 친구는 썩 잘 키우고 있었다. 피할 수 없으면 즐기라 했다고 몽구夢丘라 이름까지 지어 불렀다. 집 앞을 빙 둘러싼 산자락이 꿈꾸는 언덕처럼 느껴진다고 했다.
어쩌다 놀러 갈 적이면 쑥쑥 몸피가 자라 있었다. 봄에 나물을 캐러 갈 때, 여름에 얕은 계곡에서 다슬기를 잡을 때도 몽구는 아장아장 앞서기도 하고 졸래졸래 뒤따르기도 하며 우리를 안내하고 호위했다.
지난여름 휴가철이었다. 친구들 모임을 귀촌한 친구 집에서 가졌다. 섹소폰을 부는 회원이 있어 음악소리와 함께 시끄럽게 떠들고 놀아도 인가가 한참 멀어 이웃에 신경 쓰지 않아도 되어 좋았다.
몽구를 분양해 준 친구도 같이한 모임이었다. 몽구에 대한 남다른 애정이 대번에 드러났다. 몽구와 생활하던 친구도 몰랐다는데 분양해 준 친구는 단박에 몽구 몸에 까부단지*가 있음을 발견했다. 몸을 도사리며 필사적으로 버둥대는 몽구를 맞붙잡고서 반 뼘 정도의 누런 털을 헤치고 까부단지를 잡아주었다. 거머리처럼 찰싹 달라붙은 콩알만 한 진드기를 떼 내자 살갗에 피가 비치기도 했다. 아프다고 말 못 하는 짐승이지만 오죽이나 견디기 고통스러웠을까.
몇 개월이 지나 몰라보게 덩치가 커진 몽구에게 나쁜 버릇도 생겨 있었다. 하루는 친구가 외출에서 돌아와 지갑을 현관 밖 탁자 위에 올려두었다고 했다. 잠깐 실내에 들어갔다 나온 사이 지갑이 사라져버렸다. 집 주변을 샅샅이 살피다 집 둘레 풀숲에서 찾았는데 물어 뜯겨 있더란다. 지갑은 손재주가 특별한 친구의 바느질로 본양을 되찾았지만 몽구에 대한 친구의 믿음은 깨어져 버렸다. 더는 방치할 수가 없어 그늘막을 짓고 목줄을 사다가 채웠다. 몽구는 꼼짝없이 묶이는 신세가 되었다.
그런 얼마 뒤, 친구는 근 열흘간 해외여행을 떠나게 되었다. 홀로 남게 된 몽구를 위해 사료와 물을 듬뿍 챙겨주었겠지만, 그 말을 전해들은 내 마음은 편하지 않았다. 공동생활을 하는 우리 아파트로 몽구를 데려올 수도 없고, 차량으로 세 시간가량 소요되는 거리인데다가 대중교통마저 중도에 끊어진 두메산골로 몽구를 보살피러 가기도 어려웠다.
자유롭게 다니며 집 옆 계곡물을 마실 수 있게 목에 매었던 줄을 풀어놓았다고 했다. 누가 막지도 잡지도 않아 어디로든 떠날 수 있었으나 집주인이 돌아오기만을 기다렸던 몽구. 기다리는 동안 꿈인 듯이 펼쳐진 언덕을 마주하고 멍멍거리며 단심가를 읊었을 것 같다.
몽구 입맛이 사람과 닮았는지 사료는 먹다 남겨도, 사람이 먹던 음식은 싹 다 비웠다. 식은 밥, 치킨, 멸치 다듬은 머리 등을 몽구 밥으로 가져다준 적이 있다. 몽구 밥그릇에 담아주면 게걸스럽게 먹어 치웠다.
그 뒤부터 몽구에게 줄 음식을 냉동실에 모으기 시작했다. 그날도 시장에 다녀와 가자미 머리를 손질하며 몽구에게 가져다줄 생각을 하고 있는데 몽구를 떠나보냈다는 소식이 왔다. 외떨어진 그 집을 팔고 고향 인근에 땅을 사서 집을 짓기 시작하면서 몽구를 돌볼 수 없었다는 게 이유였다. 어디로 보냈는지 몽구의 행방을 나는 알지 못한다. 그간 모아둔 음식을 버리려고 음식물 쓰레기통 뚜껑을 열자 눈망울 글썽이는 몽구 얼굴이 보였다.
예전 시골집에 살던 엄마는 늘 황구와 함께했다. 특히 노년에 혼자이던 엄마는 적적함을 달래기 위해서 누렁이를 엄마 눈길이 자주 머무는 창고 앞이나 디딜방앗간 앞에 매어 두었다. 말은 통하지 않아도 서로 의지하고 싶은 마음이 통했으리라.
부처님은 개에게도 불성이 있다고 가르쳤다. 개라고 어찌 꿈이 없으랴. 언제 어디서나 인간과 더불어 살아가는 개였다. 이 세상 모든 몽구는 일체중생이 차별 없고 평화롭기를 꿈꾸며 살지 않았을까.
*까부단지 ‘진드기’의 방언(경북).
《한국수필》 2018, 10 특집 2 계간수필문학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