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 고봉 기대승과 월봉서원
우리는 조선시대의 대학자인 퇴계 이황(李滉, 1501~1570)은 너무나 잘 알지만, 그와 쌍벽을 이루었던 고봉 기대승(奇大升, 1527~1572)은 잘 알지 못한다. 경상도에 퇴계가 있었다면 전라도에는 고봉이 있었다.
고봉 기대승을 기리는 서원이 바로 월봉 서원으로 광주시 광산구 광곡마을(너브실)에 자리잡고 있다. 고봉 기대승을 중심으로 눌재 박상, 사암 박순, 사계 김장생, 신독재 김집 등의 위패를 모셨으나 현재는 고봉 기대승만을 배향하고 있다. 강당인 빙월당은 광주광역시 기념물 제 9호로 지정되어 있다.
월봉 서원은 처음 기대승을 추모하기 위하여 선조 11년(1578)에 낙암(지금의 광산구 신룡동)에 세워졌으나 임진왜란 때 소실되었다. 다시 동천(지금의 광산구 산월동)에 건립되었지만 1868년 대원군의 서원 철폐령으로 헐렸다가, 1941년 지금 위치인 백우산 기슭에 빙월당을 짓게 되었다. 빙월당이란 강당의 이름은 고봉의 고결한 학덕을 상징하는 빙심설월(氷心雪月)의 뜻으로 정조가 하사했다고 전해진다.
그리고 1981년 사당과 장판각, 내 ․ 외삼문의 준공을 보았다. 현재 장판각에는 <고봉집>, <이기왕복서> 등의 목판 474장이 보관되어 있다. 주변에 있는 고봉선생의 무덤을 찾아보는 것도 매우 의미있는 일이 될 것이다.
8년에 걸친 사단칠정 논쟁
과거에 갓 합격한 선비가 명종 13년(1558) 10월, 조선 성리학의 슈퍼스타 퇴계 이황(1501~1570)을 만나 사단칠정론에 의문을 제기한다. 당시 이황은 선비보다 26세 많은 58세였고, 지금 국립대학 총장에 해당하는 성균관 대사성이었다. 몇 달을 고민하던 퇴계는 다음해 1월 선비의 의문 제기에 자신의 학설을 수정하는 편지를 보낸다.
"선비들 사이에서 그대가 논한 사단칠정설(四端七情說)을 전해 들었습니다. 나의 생각에도 스스로 전에 한 말이 온당하지 못함을 병통으로 여겼습니다만, 그대의 논박을 듣고 더욱 잘못되었음을 알았습니다. 그래서 이것을 사단(四端)이 발(發)하는 것은 순리(純理)이기 때문에 언제나 선(善)하고 칠정(七情)이 발하는 것은 겸기(兼氣)이기 때문에 선악이 있다'고 고쳤는데, 이렇게 하면 괜찮을지 모르겠습니다.
사단이란 인의예지가 나오는 네 가지 단초를 말한다. 측은지심은 인(仁)의 단초이고, 수오지심은 의(義)의 단초, 사양지심은 예(禮)의 단초, 시비지심은 지(智)의 단초이다. 칠정은 희로애락애오욕(喜怒愛樂哀惡慾)의 일곱 가지 인간의 정을 말한다. 퇴계는 사단과 칠정은 별개이며 인간은 이성을 가지고 감정을 통제해야 한다는 가치 지향적 입장이었다. 이러한 퇴계의 주장은 이기이원론으로 불린다.
사단과 칠정의 관계 설정은 당시 성리학자들의 주된 관심사였다. 퇴계의 편지를 받은 선비는 “사단과 칠정은 모두 정인데 사단은 이(理)로 칠정은 기(氣)로 분리한다는 것은 맞지 않다”는 편지를 퇴계에게 보낸다. 그는 이와 기는 분리할 수 없으며 사단과 칠정은 섞여 있다는 것이다. 그의 이론은 논리 지향적이며 이기일원론적 입장이다. 이 후 퇴계와 선비는 120 여 통의 편지를 주고받으며 8년에 걸친 사단칠정 논변을 치열하게 벌인다. 이 논쟁을 거치면서 조선의 성리학은 한 단계 더 높은 독자적인 사상체계를 구축하게 되는데, 퇴계와 논쟁을 벌인 그 선비가 바로 우리 고장 광주 출신의 고봉 기대승(奇大升, 1527~1572)이다.
이이와 이황의 고봉 평가
당시 고봉이 어느 정도의 인물인지는 당대 유학계 최고의 거물이었던 이이와 이황의 다음 평가만으로도 충분하다.
“기대승은 젊어서부터 문학으로 세상에 이름이 났다. 넓게 보고 강하게 기억하였으며 기품이 호걸스러워 담론하는 데 있어 좌중 사람들을 능히 복종하게 하였다. 이미 과거에 합격한 뒤로는 청렴한 이름이 났으므로 선비들이 추대하여 영수로 삼았고, 대승도 또한 한 시대를 경륜하는 것으로 자임하였다.” 율곡 이이가 쓴 '석담일기(石潭日記)'의 글이다.
선조 3년(1569), 낙향하는 이황에게 선조가 학문에 조예 깊은 선비를 추천해달라고 조른다. 그러자 이황은 “학문에 뜻을 둔 선비는 지금도 없지는 않습니다. 그 중에도 기대승은 학문을 널리 알고 성리학에 조예가 깊어 그와 같은 사람을 보기가 드무니 가히 통유(通儒)라 할 수 있을 것입니다.” 며 주저 없이 기대승을 추천했다. 퇴계가 김성일, 유성룡 등 널리 알려진 영남의 수제자들을 젖혀두고 기대승을 선조에게 추천한 것은 고봉의 학문 깊이가 어느 정도인지를 짐작하게 해준다.
빙월당 당호는 빙심설월의 뜻
기대승은 중종 22년(1527) 광주 신룡동에서 태어났다. 원래 고봉 집안은 대대로 서울에서 살았는데, 고봉의 작은 아버지 기준(奇遵, 1492~1521)이 기묘사화로 죽자, 그의 부친인 기진이 가문을 보존하기 위해 처가가 있는 광주로 이사를 온 것이다.
명종 13년(1558) 식년 문과에 급제한 후 승문원 정자를 시작으로 홍문관 부수찬, 예조좌랑, 성균관 대사성, 사간원 대사간을 역임했다. 공조참의 이던 세조 5년(1572) 병으로 사직하고 낙향하던 중 고부의 사돈집에서 둔종(臀腫, 일종의 종기)으로 임종한다. 선조가 어의를 보냈지만 명을 되돌리지는 못했다. 47세의 너무도 젊은 나이였다. 선조는 고봉이 명종과 선조에게 강론한 내용을 모아 출간하라는 명을 내렸다. 그것이 뒷날 간행된 ‘논사록(論思錄)’이다.
고봉의 위패를 모신 월봉서원은 고봉 사후 7년만인 선조11(1578) 낙암(현 신룡동)에 세워졌다. 임진왜란 때 피해를 입고 동천(현 산월동)으로 옮겼는데, 1868년 대원군의 서원철폐로 훼철되자, 1941년 현 위치(백우산 기슭 광곡 마을)에 빙월당을 새로 지었다. 빙월당의 당호는 정조가 고봉의 고결한 인품과 학덕을 상징하는 ‘빙심설월(氷心雪月)’의 뜻을 담아 하사했다. 차갑고도 날선 고봉의 고결한 인품이 전해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