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 이별
여름방학이 된 지도 엿새가 지났다. 대체로 방학이 되면 다른 애들은 과제물을 미루다가 개학 때가 가까워지면 밀린 과제물을 정리하느라 쩔쩔매는 경우가 많았는데 나는 일기 쓰는 일을 제외하고 며칠 치 과제를 앞당겨 쓰거나 풀어내곤 해서 대체로 열흘 이내에 전 과제물을 미리 끝내고 나머지 시간에는 충분히 놀면서 다른 책을 읽거나 다음 학기에는 어떤 내용이 나오는지 궁금해 미리 알아보기도 했다. 오늘도 7월 말까지 숙제를 미리 끝낼 계획으로 일과표에 풀어야 할 날짜를 적어놓은 걸 살피고 있는데 영식이가 찾아왔다. 반가운 마음에 대문을 여니 영식이가 눈을 동그랗게 뜨고서는 큰 소리로
“전쟁이 끝났대. 우리 삼촌이 면사무소에 갔다가 어저께 라디오 방송에서 휴전협정이 발표되었다고 말하는 걸 들으셨대. 정말이야.”
하고 말했다. 정말 전쟁이 끝났다면 얼마나 다행한 일인가? 그러나 저녁때 아버지의 이야기로는 우리나라에서는 북진통일을 주장해 휴전에 반대하면서 이번 협정에 참석하지도 않았다고 했다. 나도 전쟁이 끝난 건 좋은 일이지만 통일이 되지 않은 건 참으로 아쉽다는 생각이 들었다. 아버지는 휴전협정 한 달 전에 이승만 대통령이 반공포로를 석방한 것은 잘한 일이라고 하면서 이 문제로 인해 휴전협정이 체결되지 않을 수도 있었는데 용케도 휴전이 성사되었다고 하면서 이제는 통일을 기다리면서 전쟁으로 망가진 나라를 다시 일으켜 세워야 한다고 했다.
그러나 전쟁은 끝났어도 사람들의 불행은 끝나지 않았다. 죽은 사람들은 말할 것도 없거니와 살아남은 사람들에게도 전쟁이 남긴 상처는 너무나도 혹독하고 비참했다. 가족을 잃은 슬픔에 집과 재산마저 사라져 살아갈 길이 막막한 사람들이 한둘이 아니었다. 그뿐만 아니라 죽거나 다치거나 재산을 잃는 것과는 상관없는 불행이 찾아들기도 했는데 우리 집도 그랬다. 광복절 다음 날 나는 기가 막힌 상황에 놓이게 되었다. 죽은 줄만 알았던 친아버지가 초췌한 모습으로 찾아온 것이다. 어른들끼리는 이미 합의를 보았는지 친아버지와 어머니는 서로 헤어지기로 하고 내 문제는 내 결정대로 따르기로 했다는 것이다. 세상에 이게 무슨 날벼락인지 나를 가운데 세워놓고 어머니가 있는 쪽으로 가든지 친아버지 쪽으로 가든지 선택하라는 것이다. 친아버지는 내가 어렸을 때부터 나를 무척 귀하게 여겼다. 쉬는 날이면 자전거 뒤에 나를 태우고 다니거나 내가 원하는 것은 무엇이든지 돈을 아끼지 않고 사주기도 했다. 결혼식장이나 회갑연 같은 데를 갈 때도 언제나 나를 데리고 다녔고 연극을 하는 극장이나 음악회에도 어린 나를 데리고 다니면서 끔찍이 위했다. 생각 같아서는 냉큼 친아버지 쪽으로 가고 싶었으나 그러면 어머니 없이 살아야 했다. 어머니 없이 어떻게 사나? 그렇다고 어머니 쪽으로 가자니 아버지가 너무 불쌍해 보였고 그토록 사랑해 준 아버지를 배신하는 것 같아 참아내기가 어려웠다. 어찌해야 하나? 시간은 마냥 지나가는데 아버지 쪽이나 어머니 쪽에서는 내 결정만 기다리고 있었다.
전쟁만 아니었으면 이런 일은 일어나지 않았을 것이다. 어머니는 피란을 다녀온 후 국방군으로 징집되어 떠난 아버지를 대전에서부터 마산까지 수소문을 해가며 찾아 나섰다. 마산에서 진주로 갔는지 부산으로 갔는지 모른다는 대답을 듣고는 부산과 진주를 오가며 여러 방면으로 알아보았으나 아버지 행방을 찾을 수가 없었다. 소문에 여러 지역을 이동하는 도중에 5만에서 10만 명에 이르는 국방군들이 추위와 배고픔을 견디지 못해 죽었다는데 행적을 모른다면 필시 죽었을 것이란 말을 듣고 돌아와 지금의 새아버지와 새살림을 차린 것이다.
아버지는 마산에서 병을 얻어 진주로 가는 대열에서 낙오되었다가 함안의 어느 촌락에서 구사일생으로 목숨을 건졌다고 했다. 그 후 몸이 다소 회복되어 소속 부대를 찾았으나 이리 가면 저리로 갔다고 하고 그곳으로 찾아가면 다른 곳으로 떠났다고 해서 일 년 남짓 떠돌다가 우리가 흑석동 어딘가에서 살고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고 했다. 그래서 학교부터 찾아가 내 이름을 확인하고 전학한 이곳까지 찾아왔는데 어머니가 이미 다른 사람과 살림을 차린 걸 알고는 깨끗이 포기하기로 했다는 것이다. 그러나 아들만큼은 놓치고 싶지 않아 어머니와 밀고 당기는 설전 끝에 당사자인 내가 선택하는 대로 따르기로 합의한 것이다.
나는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해 그냥 땅바닥에 주저앉고 싶었다. 나는 엉겁결에 또 하느님을 찾았다. ‘하느님, 제발 도와주세요. 제가 어느 쪽으로 가야 합니까?’ 그때 어머니가
“나는 네 아버지가 죽은 줄만 알고 너를 위해 새아버지와 살림을 차렸다. 네가 아버지와 살고 싶으면 아버지에게 가고 나와 살고 싶으면 이쪽으로 오너라.”
하고 독촉했다. 순간 내가 아버지 쪽으로 가면 어머니 없이 살아야 하지만 어머니 쪽으로 가면 그래도 새아버지가 있으니 아버지 쪽보다는 나은 것 같았다. 어머니도 아버지가 싫어서 새아버지와 살림을 차린 게 아니라 아버지가 죽은 줄만 알고 나를 위해 새아버지와 살림을 차린 것이 아닌가? ‘그래, 이게 하느님의 뜻인지도 모르겠다.’ 하는 생각에 나는 발걸음을 어머니가 있는 쪽으로 돌렸다. 고개를 돌려 아버지가 있는 쪽을 보자, 실망으로 무너져 내리는 아버지의 눈빛과 마주쳤다. 아! 그 눈빛! 나는 쥐구멍이라도 찾는 심정으로 고개를 푹 숙이고 끝내 엉엉 울면서 어머니에게로 갔다.
한글날이 지난 뒤 놀라운 소식이 있었다. 지난 9월에 실시한 도내 학력 평가 시험에서 1등으로 도지사상을 받는 영광을 우리 학교가 차지하게 되었다고 한다. 4학년부터 6학년까지 학년별로 따로 상을 주는 것이므로 어느 학년에서 도지사상을 받는 학생이 나올지 발표가 있을 때까지 알 수는 없었지만 아무래도 나는 아닐 거라는 생각이 들었다. 반에서 1등을 하기는 했었다. 당시 채점 결과는 평균 89.7로 평소 같으면 상상도 할 수 없이 낮은 점수였는데 출제가 너무 까다롭고 어려웠던 때문인지 아이들 성적이 모두 좋지 않았었다. 담임선생님도 크게 실망하시고 그날 우리에게 단체 체벌을 내리지 않았던가?
그런데 오늘 그 발표가 있다고 한다. 그리고 소문은 점차 4학년 중에서 도내 1등이 나왔다고 하는 쪽으로 기울고 있었다. 점심시간이 지나고 제5교시가 시작될 때 담임선생님이 들어왔다. 우리는 모두 선생님 얼굴을 주시했다. 선생님과 눈이 마주치는 순간! 나는 침을 꿀꺽 삼켰다. 이미 선생님의 눈빛에 그 답이 담겨 있음을 알아냈기 때문이다. 선생님의 눈빛은 무표정인 듯하면서도 잔잔한 미소가 배어있었다.
선생님은 여유 있게 내 이름을 불렀다. 고개를 숙이고 일어서는 나에게 축하한다는 말과 함께 앞으로 나오라고 했다. 나는 홍당무가 되어 앞으로 나갔고 누가 먼저 시작했는지 박수가 터져 나왔다. 선생님은 내가 평균 90점으로 도내 1등을 했다고 발표했으나 내 머릿속에는 겨우 89.7이라는 부끄러운 숫자가 지워지지 않은 채 맴돌고 있었다.
그리고 이튿날 아침, 조회 시간에 교장 선생님이 전교생이 지켜보는 가운데 나를 불러 교단에 세우고 도지사상을 수여하면서 학교를 빛낸 학생이라고 소개하는 소리를 들으면서도 시선은 마냥 허공을 더듬으며 머릿속에는 89.7이라는 숫자만 헤아리고 있었다.
그러나 상장과 상패, 부상을 들고 집으로 돌아온 나에게 가슴이 철렁 내려앉는 더 놀라운 소식이 기다리고 있었다. 10월 10일 자로 아버지는 미군 부대의 일을 그만두고 아는 분의 소개로 서울에 있는 국방부 산하기관에서 일하게 되었다고 한다. 본래 서울 사람이니 아버지로서는 기쁘기 이를 데 없는 일이겠으나 나에게는 청천벽력 같은 소식이 아닐 수 없었다. 얼마나 정든 이 시골인가? 학교와 친구들과 과수원과 뒷동산, 그리고 혜경이와 혜림이!
이사는 공휴일인 유엔의 날에 하기로 했다. 아버지는 이보다 먼저 서울로 가서 새집을 알아보기로 했고 당분간은 주변 사람들에게 이사 이야기를 하지 않기로 했다. 공연히 미리 알려 섭섭한 마음을 갖게 할 필요가 없다고 아버지가 말했기 때문이다. 하지만 매일 같이 아무것도 모르는 혜경이를 바라보노라면 마음이 천근만근 무겁기만 했다. 하늘도 내 마음을 아는지 늦가을의 궂은 비가 주룩주룩 내리기도 했다. 유엔의 날을 일주일 앞두고 드디어 나는 담임선생님께 전학해야 할 사연을 말씀드렸다. 선생님도 무척 서운한 표정을 감추지 않았다. 그리고 오늘 종례 시간에 학급 친구들에게 소식을 알리는 것이 좋겠다며 전학신청서를 작성하는 일은 선생님이 알아서 처리하겠다고 했다. 점심시간에 나는 혜경이를 불러내 학교 건물 뒤편에 있는 교장 선생님 사택 쪽으로 데리고 갔다.
"나 다음 주 24일에 서울로 이사 가."
"?..."
너무나 놀란 소식이어서인지 아니면 거짓말일지도 모른다고 생각해서인지 혜경이는 아무 말도 하지 않고 내 표정만 뚫어지게 쳐다보고 있었다.
"아버지는 먼저 가 계시고."
"..."
혜경이는 이번에도 아무 말 없이 눈만 말똥거리며 듣고 있었다. 그러나 그녀의 가슴 뛰는 소리가 귓가에 울리는 것만 같았다. 그럼에도 표정에는 별다른 변화가 없었다. 다만 얼굴빛이 하얘지면서 눈빛이 망연하게 초점을 벗어나고 있음을 얼핏 보았을 뿐이었다. 참으로 침착했다. 종례를 마치고 아이들로부터 섭섭하다는 인사를 받으면서도 눈길은 계속 혜경이를 살폈다. 집으로 돌아오는 길에 혜경이를 찾았으나 어디로 증발했는지 눈에 띄지를 않았다. 조금 섭섭하기도 하고 걱정이 되기도 했다. 그러나 그날은 끝내 더는 혜경이를 보지 못한 채 하루를 보냈다.
아침부터 트리쿼터(군용차)가 와서 대기하고 있는 가운데 영식이, 창현이, 용남이, 수찬이, 송이와 향이가 찾아와 어른들 틈에서 이것저것 자잘한 물건들을 차에 실어주었다. 은경이는 향이를 통해 편지를 보내왔다. 새 학교에서도 공부 잘하라는 의례적인 말과 함께 자기 주소를 적어놓고 편지를 보내주면 꼭 답장을 보내겠다는 내용이었다. 과수원 주인아저씨가 제일 애쓰면서 거들었다. 얼마 후 혜경이 아버지와 어머니가 혜경이, 혜림이와 함께 왔다. 혜경이 아버지가
"어이쿠, 이거 우리 장래 사윗감이 이제 영 멀리 가는구먼."
하고 농이 섞인 말을 했다. 혜림이는 엄마의 치맛자락을 붙잡고 비가 쏟아지기 직전의 흐린 날씨 같은 표정을 하고 있었다. 혜경이가 슬며시 다가와 내 손에 뭔가를 전해주었다. 쪽지였다. 하지만 혜경이의 쪽지만큼은 여러 사람이 보는 앞에서 펼쳐볼 수가 없었다. 드디어 떠나야 할 시간이 되었다. 혜림이가 엄마를 올려다보며
"오빠 우리 집에서 살면 안 돼?"
하고 발을 동동 구르며 말했다. 차가 움직이기 시작했다. 모두 손을 흔들거나 잘 가라는 눈빛의 인사를 보내고 있었다. 잠깐 사이에 혜경이가 어디로 갔는지 보이지 않았다. 마지막으로 한 번만 더 혜경이를 보고 갔으면 하고 안타까운 마음으로 살폈으나 끝내 혜경이의 모습은 보이지 않았고 다만 우리가 살던 과수원집의 헛간 어딘가에 주저앉아 울고 있으리라는 걸 난 이미 느낌으로 알고 있었다. 멀어져 가는 정든 집과 사람들의 모습을 바라보는 눈길에 혜림이가 땅바닥에 주저앉아 울고 있는 모습이 보였다. 어린 가슴에 적지 않은 아픔을 남기고 떠나는 내 마음 역시 슬프기는 마찬가지였다. 차가 더 속력을 내고 달릴 때 혜경이가 전해준 쪽지를 폈다.
"작년 추석 때 약속한 거 잊지 마!"
쪽지 하나에 편지 한 장, 그리고 혜림이가 준 그림 한 장이 이 마을을 떠나면서 내가 가지고 가는 마지막 작별의 선물이었다. 친아버지와도 헤어진 이곳, 이별이란 어른이든 아이든 마음에 잊을 수 없는 아픔을 남기는 것. 나도 모르게 쪽지 위에 떨어져 내린 눈물방울을 어른들이 볼세라 얼른 닦아내며 쪽지를 접어 주머니에 넣었다. 전쟁이 일어나고 휴전이 되기까지 가족을 잃고 고향을 잃고 이리저리 떠돌다가 이제 다시 서울 동대문 밖 어딘가에서 네 번째 학교에 다녀야 하는 내 인생의 앞날엔 또 어떤 운명이 기다리고 있을 것인가? 이런 내 마음을 아는지 모르는지 차는 간혹 덜컹거리면서 오늘 도착해야 할 목적지를 향해 힘차게 달리고 있었다.
-끝-
끝까지 읽어주셔서 감사합니다.
이 글이 연안문학회 카페를 활성화 하는데 도움이 되기를 바랍니다.
첫댓글 너무 재밌게 읽었습니다.
감사합니다.
늘 건 필하세요.^^
빠짐 없이 읽어주시며 댓글을 달아주셔서 감사합니다.
단 한명의 독자라 해도 관심있게 읽어주시는 분이 있어야 창작으로서의 가치가 있고 이것이 문학이 된다는 사실에 독자에게 성실한 작가가 되도록 더 노력하겠습니다. 문학을 통해 늘 행복하시기를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