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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탄의 계절이다. 지역마다 크리스마스 트리 점등식이 열리고 캐롤이 울려 퍼진다. 우리나라의 크리스마스 문화는 19세기 후반 선교사들과 함께 국내에 들어왔다. 초기 선교사들이 근대 학교와 교회를 세우면서 자연스럽게 성탄 문화가 한국에 스며들었다. 선물을 교환하고 크리스마스 트리를 장식하는 풍습을 이었다.
최초의 서양식 교육기관 '배재학당' 설립자 아펜젤러 선교사는 아이들을 모아 성탄절에 대해 소개했다. 당시 양말에 선물을 담아 학생들에게 나눠줬는데, 아이들은 산타클로스가 준 선물로 알고 기뻐했다고 한다. 서재필 박사에 의하여 만들어진 최초의 민간신문인 <독립신문>의 1886년 12월 24일자에 ‘내일은 예수 그리스도의 탄일이라’는 최초 기사로 성탄절을 소개했다. 1897년 <독립신문>과 <대한그리스도인회보>에도 배재학당에서 열린 크리스마스 행사가 소개되는데, 주로 성탄극을 공연하고 아이들에게 선물을 나눠준 것으로 알려졌다.
성탄문화에서 새벽송과 크리스마스 씰이 기억 남는다. 첫 크리스마스 씰은 카나다 의료선교사로 온 셔우드 홀 박사가 결핵의 예방과 계몽을 위해 도입하였다. 1932년 발행된 씰에 조선인의 자랑 거북선을 그려 넣었다. 거북선의 포를 결핵마크에 조준하여 결핵을 무찌른다는 의도로 디자인을 만들었으나 일제치하에 저항정신이 담겨있다는 이유로 남대문으로 교체되는 수난을 겪으며 발표되기도 했다. 이런 성탄문화는 일제강점기 후반부터 본격적인 상업성을 띠기 시작했고 이때부터 한국에서는 서구와는 달리, 크리스마스가 연인들의 날로 자리 잡기 시작했다.
1945년 해방 후, 미 군정은 평소 야간통행 금지를 실시했으나 성탄절과 12월 31일에
예외를 적용했다. 정부수립 이듬해인 1949년, 이승만 대통령은 성탄절을 휴일로 법제화하고 6·25 전쟁 기간중에도 미군들로부터 그 의미가 새롭게 전파되었다. 전쟁의 영향은 성탄절을 일제강점기의 소비와 여흥의 문화에서, 폐허속에서 새로 태어난 어린이들을 위한 기쁨과 축복의 날로 자리 잡았다. 전쟁이후 경제발전과 유신정권이 들어서며 ‘야간통행금지’가 시행되던 시기에도 새벽송은 자유와 기쁨의 상징이 되었으나 1982년 1월, 야간 통행금지가 풀리면서 그 의미도 크게 퇴색되었다.
그 후 성탄의 의미는 구세군 자선냄비가 전국적으로 확산되면서 연말연시엔 춥고 배고픈 이웃에게 ‘나눔’이라는 메시지를 전하며 이어져 왔다. 다시 성탄절이 다가온다. 이 시대에 성탄이 주는 의미는 무엇일까.
성탄은 전 세계인의 축제다. 상업용 이벤트나 교회 내부용으로 가두려 해선 안된다. 처음 예수그리스도가 오신 곳은 가장 낮은 절망의 자리 누울 곳 없는 ‘마굿간’이었다. 성탄의 의미나 문화는 ‘저 높은 곳을 향하여’나, 흥청망청이 아닌 자신을 비우며 가장 낮은 곳으로 내려가 소외된 이웃들과 함께 함이 아닐까. 성탄에 가장 아름다운 공연은 홀로 된 이들과 함께한다는 ‘임마누엘’이란 사랑의 실천이다. 올 성탄이 강도만나 경제적으로, 육신적으로 소외당하는 이들의 억울한 자리로 다가가 아픔에 관심을 가져 상처를 치유해줄 수 있는 사마리아 사람들의 따뜻한 손길과 발길로 채워졌으면 좋겠다. 그래서 그들에게 참된 기쁨과 회복을 되돌려주는 성탄되면 어떨까. 세상을 따뜻하게 만들 수 있는 나눔과 기부문화로 사랑의 온도계가 점점 더 올라가기를 소망하며 ‘하늘에는 영광, 땅에는 평화’가 임하기를...
글쓴이 이효상 다산문화예술진흥원 원장, 작가, 시인, 칼럼니스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