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나에게 시는 마치 저 멀리 신비롭게 둥둥 떠다니는 문 같았다. 앞에서 문제 내는 사람이 있고 못 맞히면 못 들어가는 곳. 그래서 갈 엄두도 안 내봤었다. 그러다 이번 기회에 처음으로 읽게 되었는데 흠... 역시 아리송하다. 문에 엄지발가락만 살짝 걸친 기분? 무언가를 느끼고 뜻을 찾아야 한다는 강박을 최대한 버리고 시 자체를 읽으려고 많이 노력했던 것 같다.
유년시절에 기인한 내용이 많아 보였는데 늘 소설만 읽다 이런 식의 표현은 처음 보다 보니 신선하기도 하고 머리 위를 그대로 날아가는 것도 많았다. 기억에 남는 시가 두 개 있는데 '대명사 캠프'와 '옷장'이다.
낙인찍히지 않고 명명되어 갈라 처지지 않고 '우리'는 같은 '저기'에서 왔다는 이유로 서로 위로가 되어줄 수 있고. 이름을 붙이면 순식간에 다른 많은 것도 달라붙어버린다고 생각하는데 이름을 버리고 하나 되는 듯한 느낌이 마음에 들었다.
옷장은 어린 시절 저자의 의식의 흐름인가 싶었다. 근데 어릴 적 나도 옷장이나 또는 책상과 의자에 이불을 덮어 그 안에 들어가 있는 걸 좋아했어서 그런지 시 속 어린아이 화자가 공감 가서 기억에 남는 시였다. 조그마한 스탠드가 있고 냉장고와 연결되어 있는 옷장은 지금도 탐날 정도로 완벽하다 느껴진다. 푹신한 이불에서 나는 옷장냄새와 엄마 아빠 할머니 할아버지의 옷 끝자락이 머리를 쓰다듬는 느낌. 세상과 단절된 거 같지만 동시에 보호받는 듯한 느낌을 옷장을 읽으며 오랜만에 느껴본 것 같다.
아직도 시는 잘 모르겠다. 근데 그냥 이렇게 술술 읽어가며 어디 하나 잠깐이라도 멈추게 만드는 구절 하나 있으면 그것만으로 시를 읽는 의미가 충분하지 않을까 싶기도 하다. 다음번에 또 다른 시를 읽게 되면 그땐 발목까지 걸치게 되지 않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