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4 십이연기법(十二緣起法)
십이연기법(十二緣起法)으로 사유(思惟)함에는 네 가지의 내용이 있다. 십이연기(十二緣起) 가지(支)의 구별, 가지(支)의 총괄(總括), 몇 생(生)에 원만(圓滿)해지는가, 이러한 내용의 총체적(總體的)인 도리(道里)이다.
십이연기(十二緣起)에서 무명(無明)은 격심(激甚)한 증오(憎惡, 敵意)와 같고, 진실(眞實)하지 않다고 하였다. 이것은 격심(激甚)한 증오(憎惡)와 진실(眞實)하지 않음이 다만 친우(親友) 혹은 진실(眞實)만을 가리는 것이 아니고, 다른 것들도 가려 버린다.
또한 무명(無明)과 대치(對治)된 명(明)을 가린다. 여기서 대치(對治)된 명(明)이란 보특가라(補特伽羅)의 무아(無我)의 참뜻을 바르게 이해(理解)한 것이어서 보특가라(補特伽羅)의 아집인 신견(身見)이다.
우매(愚昧)를 세분(細分)하여 보면, 업과(業果)에 대한 우매(愚昧), 진실성(眞實性)에 대한 우매(愚昧)의 두 종류이다. 업과(業果)와 진실성(眞實性)에 대한 우매(愚昧)는 악취(惡趣)로 가는 행(行)을 쌓아 모은다.
행(行)이란 곧 업(業)이다. 여기에는 악취(惡趣)로 이끌어내는 악업(惡業)이 있고, 선취(善趣)로 이끌어 내는 선업(善業)이 있다. 선취(善趣)로 이끌어 내는 선업(善業)에는. 욕계(欲界)의 선취(善趣)로 이끄는 복업(福業), 상계(上界)의 선취(善趣)로 이끄는 부동업(不動業)이 있다.
식(識)이란, 경(境)에서 육식(六識)의 모임을 가리키지만, 중요한 것은, 아뢰아(阿賴耶)를 인정하는 이들에 따르면, 아뢰아식(阿賴耶識)이고, 아뢰아(阿賴耶)를 승인하지 않는 이들에 따르면 의식(意識)을 말한다.
여기에는 불선업(不善業)에서 생기는 고(苦)가 있고, 몽매(蒙昧)함으로 인하여 (드러나지 않은 업의 습(習)에 의하여) 불선업(不善業)을 지어 쌓아가는 고(苦)가 있다. 업(業)의 습기(習氣)에 물들었을 때, 이 의식은 인위(因位)의 식이다. 이 식(識)에 의거(依據)해서 미래세(未來世)에 악취(惡趣)의 생처(生處)에 입태(入胎)하는 식(識)은 과위(果位)의 식(識)이다.
이러한 무아(無我)의 참된 본성(本性)에 대한 우매(愚昧)함으로 선취(善趣)도 올바른 고(苦)로 삼지 못하고, 낙(樂)으로 집착(執着)하여 복업(福業)과 부동업(業)이 쌓일 때의 식(識)을 인위식(因位識)이라 하고, 이에 의지(依支)하여 욕계(欲界)와 상계(上界)의 선취처(善趣處)에 입태하는 식은 과위식(果位識)이라 한다.
명(名)과 색(色)에서, 명(名)이란 비유색(非有色)인 수상행식(受想行識)의 사온(四蘊)을 말하고, 무색(無色)으로 태어났다면, 색(色)의 종자(種子)만 있고, 색(色)이 없는 것이다. 이것을 제외한 다른 위(位)로는 구위(痀位, 수정란) 등의 색(色)을 어떻게 아는가에 결합(結合)하여 이해하여야 한다.
육처(六處)란, 만일 태생(胎生)이라면 그 최초(最初)의 식(識)이 머무는 정혈(精血)의 구(痀)와 제명(諸名)의 증장(增長)으로 안이비설(眼耳鼻舌)의 사처(四處)를 이루는 것이며, 몸과 의식의 처(處)는 구위(痀位)에 있는 것이다.
만일 화생(化生)이라면 입태(入胎)할 때, 제근(諸根)이 동시(同時)에 형성(形成)되므로 그러한 단계가 없다. 만일 난생(卵生)이나 습생(濕生)이라면 주태(住胎)를 제외한 그 나머지는 모두 같은 것이라고 하였다.
이렇게 명색(名色)이 구비되면 몸의 본체(本體)를 얻게 된다. 육처(六處)가 성취(成就)되었다면 곧 몸의 차별(差別)이 성취(成就)된 것이며, 거기서 수용자(受用者)도 성취(成就)된 것이다. 색처(色處)의 다섯 가지는 색(色)이 없다면 역시 없다는 것이다.
촉(觸)이란, 경(境) 근(根) 식(識) 세 가지가 합쳐져서 경(境)에 대하여 합의(合意) 불합의(不合意) 중용(中庸)의 세 가지의 경계(境界)를 취한다. 수(受)란, 접촉(接觸)으로 세 가지의 경(境)을 취하고, 이와 함께 고품(苦品) 낙(樂) 불고불락(不苦不樂) 등 세 가지의 수(受)를 일으킨다. 애(愛)란, 즐거움을 받음에 대한 애착(愛着)이 분리(分離)되지 않는 것과, 고통을 받음에 대한 애착(愛着)의 분리(分離)가 일어나는 것을 말한다.
수(受)의 원인(原因)으로 애착(愛着)을 일으키는 것은, 무명(無明)이 모여 촉(觸)을 원인(原因)으로 애착(愛着)을 일으키는 것이다. 만약 무명(無明)이 없다면, 수(受)가 있다고 해도 애착을 일으키지 않는다. 이리하여 촉(觸)은 경(境)의 수용(受容)이며, 수(受)는 곧 태어남(生), 혹은 이숙(異熟)의 수용(受容)이기에 그 양자(觸受)가 원만하면 수용(受容)도 원만하다.
취(取)란, 색성향미촉(色聲香味觸)의 경계(境界)에 대한 바람과 집착(執着)을 말한다. 유(有)란 과거의 행(行)으로 식(識)에 업(業)의 습기(習氣)로 오염되어 애(愛)와 취(取)로 자양(滋養)하여 후유(後有)를 끌어들임에 큰 힘이 되어 인(因)에 과명(果名)을 부여한 것이다.
생(生)이란, 사처(死處)에서 처음 식(識)이 잉태(孕胎)하는 것이다. 노사(老死)란, 노(老)는 온(蘊)이 성숙(成熟)하여 다른 것으로 변하는 것이며, 사(死)란 온(蘊)의 동류(同類)를 버리는 것을 말한다.
무엇을 완성(完成)하는가는 생(生)과 노사(老死)이다. 어떻게 완성(完成)하는 가는 행(行)으로 식(識)에 물들인 업(業)의 습기(習氣)가 큰 힘이 된 상황으로 정해진다. 그 다음 애(愛)와 취(取)에 의해 거듭 자양(滋養)되며, 이로써 점차 힘있는 업(業)의 습기(習氣)로 내세(來世)에 그 취(聚)에 태어남을 완성하게 된다.
이러한 열 두 가지의 요소(要素)로 모든 중생들이 십이연기(十二緣起)의 문(門)에서, 생사윤회(生死輪廻)에 표류(漂流)함을 생각하여 대자대비(大慈大悲)를 일으키고, 이를 위해 성불(成佛)을 희구(希求)하고, 이 길에서 불법(佛法)을 공부(工夫)함을 상사류(上士類)라고 설명한다.
이러한 뜻을 총괄(總括)함은, 업(業)과 번뇌(煩惱)의 힘으로 생사(生死)의 고온(苦蘊)이 생기(生起)하는 도리(道里)를 알고, 특히 십이연기(十二緣起)의 문(門)에서 삼유(三有)의 수레바퀴를 돌리는 도리(道里)를 알고, 이에 대하여 수습(修習)한다면, 일체 무명(無明)의 어둠을 괴멸(壞滅)할 수 있으며, 무인(無因)과 갖가지 다른 인(因)에서 생긴 여러 행이 모여 만들어지는 모든 사견(邪見)을 제거할 수 있게 된다.
부처님 말씀의 보배의 창고에서 진귀한 보물을 증장(增長)할 수 있고, 생사윤회(生死輪廻)의 성상(性相)을 여실(如實)하게 알아서 엄격(嚴格)한 염리(厭離)로 해탈도(解脫道)에 대하여 그 뜻을 발할 수 있다. 이것은 앞선 수행자(修行者)들이 성자(聖子)의 지위(地位)를 얻게 하는 습기(習氣)를 각성(覺醒)시킬 수 있는 최고(最高)의 방편(方便)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