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재성의 축구산책] 축구감독들의 음주문화
애주가들은 종종 말한다.
"세상에 술이 없다면 무슨 낙으로 살까" 하고.
기자도 술 하면 자다가도 벌떡 일어나는 부류라 그 말에 전적으로 동감한
다. 그리고 세상에 술을 태어나게 해준 이에게 늘 감사하는 마음으로산
다. 이렇게 말하면 눈 흘길 사람 한둘이 아니겠지만 아닌 게 아니라 세상
에 술이 없었더라면 어쩔 뻔했나.
그 놈의 술 때문에 여포에게 서주성을 빼앗긴 장비가 의형제 유비와 관우
앞에서 가슴이 찢어져라 탄식하고 후회하지만 또 다시 술을 입에 댄다.
그게 술인가 보다.
조선 전기 문신 불우헌 정극인의 시문집 `불우헌집'에 수록된 가사 상춘
곡의 몇몇 구절도 애주가들의 사기를 돋운다.
【갓 괴여 닉은 술을 葛巾으로 밧타 노코, 곳나모 가지 것거 수 노코 먹으
리라. 和風이 건듯 부러 綠水랄 건너오니, 淸香은 잔에 지고 落紅은옷새
진다.】--< 막 익어 괴는 술을 갈포 두건으로 걸러 놓고, 꽃나무 가지 꺾
어 잔 수 세면서 먹으리라. 문득 화창한 봄바람이 불어 푸른들을 건너오
니, 맑은 향기는 잔에 지고 꽃잎은 옷에 떨어진다.>
이쯤되면 술은 멋이요, 인생이다.
동서고금, 남녀노소를 막론하고 할말 참 많은 술. 이번엔 축구판의 술 풍
경을 잠시 들여다보자. 과연 국내 축구감독들의 술 취향과 음주문화는어떨
까. 우선 대부분의 감독들이 `말술'이라는 사실부터 밝혀둔다. 10년 남
짓 숱한 감독들과 여러 형태로 대작해 봤지만 다리가 풀려 흐느적거리거
나,주사를 부리는 모습을 본 적이 없다. 하기야 승부의 세계에서 노는 장
수들이니 체력과 정신력이 여간은 아닐 게다.
또 한가지. 호탕하고 즐겁게 마신다는 공통점도 갖고 있다. 매너 또한 깔
끔해 술자리는 거개가 화끈하고 개운하게 끝나는 편이다.
김 호 전 수원 감독이 대표적인 인물이다. 그렇게 자주 마시는 편도 아니
고, 부어라 마셔라 스타일도 아니지만 일단 판이 벌어지면 시종일관씩씩하
고 늠름하게 마신다. 노래라도 한 곡씩 하게 되면 오른팔을 아래 위로 저
어 반동까지 넣어가며 우렁차게 불러제낀다. 박수로 박자를 맞추며바라보
고 있노라면 갑옷 입고 준마를 탄 옛 장수의 모습이 절로 연상될 정도다.
장난기로는허정무 감독 따라갈 자가 없다. 술이 몇 순배 돌아 분위기가
달아오르면 어김없이 허 감독의 장난기가 발동한다. `진돗개'라는 별명
에 걸맞게도주특기는 물기다. 갑자기 긴한 얘기라도 하려는 듯 다가가서
는 대뜸 상대의 귀나 볼을 물어 한바탕 폭소를 자아낸다. 이따금씩 머리
나 어깻죽지를공략하기도 한다. 대체 딱딱하고 둥근 머리를 어떻게 깨물
까 싶지만 허 감독의 재주는 갈갈이 저리가라니 그의 송곳니를 피하려 버
둥거려 봐야 소용없다.
해서 허 감독의 장난기를 꿰고 있는 이들은 시종 허 감독과 적당한 거리
를 두려고 애를 쓰며, 도리없이 어깨를 마주대야 할 경우엔 허 감독의일거
수일투족에 각별히 신경을 쓴다. 방심하면 여지없이 당하기 때문이다. 간
혹 설욕을 노리는 이도 있지만 성공률은 극히 저조하다. `본능적'인허 감
독을 당해낼 재간도 없거니와, 반란이 발각될 경우 또 한 번의 고통을 감
수해야 한다. 허 감독은 절대 남 괴롭히기가 아니라 `애정표현'이라고강
변한다. 물론 당하는 이 역시 전혀 기분이 상하거나 하지는 않으니 결국
술좌석에서의 별난 놀이쯤 되는 셈이다.
시끌벅적한 분위기의 으뜸 연출가는 단연 이태호 전 대전 감독이다. 노래
면 노래, 춤이면 춤 하나같이 능한 한량인 데다 입담이 좋아 금세 좌중을
휘어잡는다. 웃음보 약한 사람은 배꼽을 조심해야 할 정도다. 자칫 이 감
독의 만담에 녹아버리면 마실 겨를도, 취할 겨를도 없다.
반면 조광래 서울 감독은 대화를 즐기며 조용하게 마시는 편이다. 불콰하
게 술이 올라도 목소리 높이는 법이 없으며, 이런저런 밀린 얘기들만차근
차근 한다. 자칫 술좌석이 지루하고 무덤덤할 것 같지만 그 나름대로 재밌
고 분위기도 있다. 조 감독의 18번은 나훈아의 `영영'. 앙코르가쏟아지
면 어김없이 `사랑'이 뒤를 잇는다.
정해성 부천 감독은 열혈남아다. 일단 판이 벌어지면 이것저것 재지 않고
화끈하게 마시며, 시종 눈가에서 미소가 가시질 않는다. 김호곤 올림픽대
표팀감독은 한 잔만 들이켜도 얼굴이 빨개지는 게 특징이며, 박종환 대구
감독은 특히 횟집에서 마실 때 첫 잔을 반드시 소폭(소주+맥주 폭탄주)으
로하는 버릇이 있다. 처음엔 다들 "저걸 어떻게 마셔?" 하지만 일단 부어
보면 뜻밖의 부드러움에 너나없이 감탄사를 터뜨린다.
오래 전 에피소드 하나 소개하고 술얘기를 갈무리하자.
몇몇 축구인, 그리고 자타가 공인하는 진정한 축구인 김흥국과 자리를 했
을 때다. 몇 잔씩 들이킨 뒤 차례로 마이크를 잡았고, 드디어 김흥국의순
서가 됐다. 명색이 대한민국 10대 가수 출신이니 다들 기대가 컸다. 좌중
이 요청한 노래는 그의 히트곡 `59년 왕십리'. 술로 목을 축인터라 김흥
국은 그 어느 때보다 맛깔스럽게 리듬을 탔다. 우레와 같은 박수가 터졌
고, 앙코르가 쏟아졌다. 한데 일순 술좌석이 물 끼얹은 듯 고요해지더니이
내 폭소가 터졌다. 노래기계에 찍힌 점수가 `65'였던 것이다. 물론 기계
가 제대로 된 평가를 할 리는 만무하다. 그렇지만 아무리 재미로보는 점수
라 하더라도 하필 대한민국 10대 가수에게 그런 있을 수도 없는 점수를 매
길 건 또 뭐란 말인가. 덕분에 앙코르 곡은 듣지 못했지만분위기는 더욱
뜨겁게 달아올랐다.
감독들에게 끝없는 스트레스를 요구하는 냉정한 승부.
적당한 술과 즐거운 분위기가 그 불덩이를 날려버리는 명약이 되었으면 하
는 바람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