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달개비꽃 사랑
세상에서 가장 위험스런 사랑을 나누는 이가 잇다
냇물이 위험스레 흘러가는 개을가에
닭처럼 앉아 부리로 쫑긋 물을 퍼 마시며
질펀한 사랑을 나눈다
그 사랑 청자빛으로 물들면
산골짝의 안개가 술렁이면 개울로 내려온다
파란 꽃잎 쭉 뽑아올려
물살 너울대는 개울을 내려다본다
그 때마다 사랑을 풀어
물살에 울렁술렁 떠내려보낸다
그 사랑 향기 되어
안개처럼 솟아오를 때
가느랗게 실눈을 뜨고
하늘을 쳐다보는 달개비꽃
그것이 제 몸에서 나는 향기란 걸
그제서야 알았다
찔레꽃 어머니
찔레꽃 왜 저리 서러운 가 했더니
꽃빛깔 너무나 하얘 그렇단다
어머니 사는 고향 언덕 못 잊어 그렇단다
어머니 물 길러 가던 샘가
빙 두른 산언덕
그 언덕 따라 활짝 핀 찔레꽃,
햇살 너무 눈부셔
사르르 눈 감길까 두려워라
찔레꽃 왜 저리 서러운가 했더니
꽃빛깔 하얘 그렇단다
너무 하얘 상큼한 향기 좇아
날아온 벌들
붕붕대는 벌 떼들 날개 짓 따라
서럽게 서럽게 피어나는 꽃
어머니 가슴으로
활짝 피어나는 꽃
제삿날
제사상에 차려놓은 고봉밥이
고향 산골의 무덤처럼 그리움이 깊다
그리움이 고봉밥에서 김처럼 스멀거린다
엄마는 고봉밥 앞에서 경건하게 옷깃을 여몄다
전기밥솥에 담긴 밥을 사발로 퍼 담으며
수시로 밥의 옆구리를 매만졌다
삽으로 흙의 옆구리를 툭툭 치면서 봉분을 만들듯이
흘러내리는 밥알을 숟가락으로
쓸어 올리면서 고봉밥을 만들었다
고향 산천에 쓴 조부의 무덤처럼 봉긋했다
돌아가신 조부를 위해
제삿밥도 무덤처럼 쓰리라고 결심을 했다
고봉밥에 숟가락을 꽂고 큰절을 올리는 것도
흙무덤 속에 누워 있는 조부를 향한 그리움 때문이다
김장
과년한 딸년
머리카락 빗겨 동백기름 발라주듯이
부스스한 얼굴 세수하고
토닥토닥 분 쳐 바르듯이
마른 입술에 빨간 립스틱 곱게 그려주듯이
아낙들 마당가에 앉아 깔깔거리며
빨간 고무장갑으로 가을 햇살 버무리듯이
개나리꽃
한겨울에 오돌돌 떨고 있는 너를
소박맞은 년이라고 놀려대지 않겠다
불쌍타 불쌍타 할머니가 지나가다 궁시렁거린다
보문산 둘레길 작은 언덕을 배경으로
시든 햇살 쬐고 있는 년
낭창거리는 머리칼 노랗게 물들이고
꽃단장을 한 채 길 위에서 떠돌고 있다
이제는 부모도 오만정 떨어져 너를 찾지 않는다
집에 가서 무조건 잘못했다고 빌어라
잠시 봄 햇살로 착각해서 가출했다고 머리 풀고 빌어라
깡통
머리가 비었다고 놀려대지 마라
깡통깡통하며 깡통이 굴러간다
무심코 거친 발길에 차여
축구공처럼 날아간 깡통
풀밭에 떨어져 불어오는 바람에 건들거린다
예전엔 걸인의 손에라도 들려
유랑을 떠나기도 했지만
이제는 걸인초자 깡통을 무시한다
그러니 얼마나 복장이 터지는가
하고 싶은 말 있으면
마음껏 쏟아내라고
뻥 뚫린 입도 오늘 따라 말이 없다
주름의 깊이
거울을 보는데 자글자글 늘어가는 주름
늘 보는 얼굴이지만
오늘 따라 딴 사람이 되어 있다
이마에 석 줄 정도 나 있던 주름이
얼굴로 번져 난마처럼 얽혀 있다
주름도 주름을 낳는단 말인가
아버지처럼 유전된다는 말인가
평생 지게만 지다 폭삭 늙어버린 아버지는
주름으로 인생을 주름잡았다
아버지 주름 속에는
땡볕이 있고 땀방울이 굴러다니고
고얀 땀 냄새가 동거하였다
그러니 아버지의 주름이 얼마나 값진가
누구는 말한다
자연스레 늙은 얼굴이 값지다고 말한다
천만의 말씀이다
그런 주름은 깊이가 없다
하찮은 사람에게 손가락질하고 남의 재산 축내면서
손끝에 흙 한번 묻히지 않고
떵떵거리며 산 사람이다
그런 주름에는 땀 냄새가 없다
땀 냄새 대신 부패한 냄새만 득실거린다
만월
부평초처럼 떠도는 것도 서러운데
사람들은 날 가만두지 않았다
나를 신처럼 대접하며 온갖 것들을 요구했다
아마도 황금빛 내 얼굴에 주눅이 들었으리
그러나 주기마다 다녀가는 내 신세를 안다면
나에 대한 환상은 여지없이 깨져버린다
난 신도 부처도 아닌 평범한 존재이다
나보다 더 눈부신 태양의 얼굴이 보기 싫어
도둑처럼 어둠만 딛고 다닐 뿐이다
사람들은 내가 헤쳐 온 가시밭길을 모른다
황달기로 부어 있는 얼굴엔
계수나무 가지에 할퀸 자국이 있다
대설주의보
한겨울에 계엄령이 선포되었다
흰 전단지를 뿌리는 하늘이 어둡다
언제쯤 일까
전단지 날리는 거리를 뛰어다니며
썩어 빠진 세상을 깨부수겠다는
신념으로 주먹을 쳐들었던 때다
침엽수 같은 사상이
내 마음속에 불끈 치솟곤 했다
아직도 세월의 기둥을 붙잡고
흐느끼는 청춘 앞에서
난 부끄러워 얼굴 들지 못했다
섞어 빠진 세상을 깨부숴야 한다며
하늘은 지겹도록 전단지를 뿌린다
땅에 쌓인 전단지가
백설의 언덕으로 변해간다
초승달
대장장이가 풀무를 돌려
숯불을 달구고 있다
홍염으로 이글대는 쇳덩이를 꺼내
망치로 모양을 잡는다
기역자로 굽어지는 형상이 조선낫을 닮아간다
누군가를 찍으면 즉사할 듯
파랗게 날선 낫날이 하늘을 베어 문다
하늘 한편이 핏빛으로 번져 가면
철새들도 험지를 날지 않는다
조롱박 목탁
아래채 셋방에서 목탁소리 들려온다
밤비도 서러워 가만가만 내리고
길고양이는 뒤꿈치 들고 담장을 타고 간다
박꽃 향기처럼 청량한 목탁소리에 빠져들다
스르락 꿈을 꾸었는데
옛적에 간 적 있던 청량사더라
대웅전에 좌정한 부처님은 주름살 늘었고
처마의 허공을 치는 목어는 주둥이 달아났지만
비구니의 합장한 손끝은 애처로워라
빗소리에 젖는 목탁 소리 하도 가냘파서
깜짝 놀라 깨어 보니 아래채 온통 절간이다
그러나 저 목탁 진짜가 아니다
작년 셋방 할머니가 시골에서 따 온 조롱박이다
밤낮으로 땡볕에 말리고 속을 파내
빈 조롱박 속에 할머니의 구구절절한 사연 담아 놓더니
매일 밤 제 가슴을 치듯 목탁을 친다
금환식
---아내의 금반지
아내의 금반지가 감쪽같이 사라졌다
하필 결혼 선물이라 마음이 급했다
서랍과 핸드백 뒤져보고
빗자루로 침대 밑 탈탈 털어내도 먼지만 풀썩일 뿐
사라진 금반지는 흔적도 없다
남편에게 혼날 일 생각하니 앞이 캄캄하다
툭하면 개처럼 얻어 터져도
금반지만은 가슴에 품고 살아왔다
물떼 파랗게 꼈어도 죽는 날까지 가져갈 거라며
퍽퍽 가슴 치다 올려다 본 하늘이
금환식을 치르고 있다
저것이 금반지라면 하늘까지 닿는 장대 들고
밤새도록 갉작거려 딸 수 있으련만
빈 들판에서
빈 들판의 허수아비가
헤어진 여자처럼 헐렁하게 서 있다
옆에는 추수한 볏단 언덕처럼 쌓였어도
여태껏 굶었는지 훌쭉하게 배가 꺼져 있다
함박눈 몰아치던 날
눈 쌓인 들판에 발자국을 찍으며
여자와 손가락 걸고 했던 약속이 떠올랐다
헤어지지 말자고 몇 번이나 손가락을 걸었을 때
눈발에 풀썩 쓰러진 풀대처럼 주저앉던 그녀
약속이란 부질없는 짓인가
퍽퍽 치는 가슴 위로 함박눈만 퍼붓는데
들판에 찍어 놓은 발자국이
그녀와 찍었던 손도장처럼 보여
눈발이 바람에 뒤엉키며 피울음 소리를 낸다
코스모스 시위대
시골 들판에 시위대들이 운집했다
가을이면 몸살 나는 시위에
구경꾼들의 마음도 심란했다
눈물 많은 사내들과 바람난 여인네들이
싱숭생숭하는 마음을
들판에 풀어놓고 구경을 하고 있었다
연분홍 깃발을 든 시위대들의 구호는
아름다운 가을을 보장하라는 것
그러나 시위 행렬이 질서정연해서
전경들은 이미 철수를 했고
벌들만 침을 쏘며 행렬을 막았다
시위대가 홍수처럼 불어나자
벌들도 무장해제
구경꾼과 뒤섞여 휴대폰 세례를 받기도 했다
구호도 함성도 없는 이곳
세상에 이렇게 아름다운 시위대가 있을까
고향 길
문득 눈앞이 가시밭길일 때
배낭 하나 달랑 메고 길을 나서라
칡넝쿨 우글대는 산길은 뱀이 나올 것 같고
산처녀 목매 죽었다는 강 길은 으스스하지만
그러면 그런대로 즐거워라
보름달 기다리는 재미에
푹 빠져 시간을 재다보면
어느새 새벽은 밝아오고
버드나무 시퍼렇게 머리 푸는 강가에는
희뿌연 안개 도열하며 나를 맞는다
여기가 어딜까 사방을 두리번거리면
아, 꿈속처럼 고향길이 나를 맞더라
두메에서 쓴 편지
바깥소식 끊고 싶어 두메에 왔지만
밤 깊으면 보름달이 와서 문을 두드리더라
문짝마다 달빛이 손 내밀어
책장 넘기는 내 손가락을 쓸어주더라
이러다 달이 산 너머 벼랑으로 떨어지면
의지할 이 하나 없겠구나
풀벌레들과 친구하면 되겠지만
밤새도록 지글대는 울음소리에
내 가슴속 반이 눈물이더라
속세에 두고 온 처자 생각 나 울컥해지고
긴긴 밤 잠 못 들어 목이 메면
차라리 풀벌레 울지 않는 속세로 들어가고 싶구나
속세와 인연 끊고 도인처럼 살고 싶구나
책과 나비
나비의 날개를 보고 책을 떠올린다
겨울 한철 꽃씨 속에 묻어두었던 상상을 펼쳐본다
곧 꽃이 피겠지
나비가 날갯짓을 하면
봄바람이 산마루를 쓸고 가겠지
꽃대 끝에 앉아 팔랑거리는 날개 속에서
봄이 펼쳐놓을 꽃밭을 본다
꽃이 무더기로 피어 있고
꽃가루를 달고 나비가 지나간다
나비가 날갯짓을 할 때마다
향기는 책 냄새처럼 풍겨 나온다
책도 펄럭펄럭 나비의 흉내를 낸다
늙은 수도승
천태산엔 황금장삼을 걸친 수도승이 산다
대충 봐도 천살 먹은 나이
거구의 풍채에도 누군가를 위해 염주를 굴리며
이웃한 영국사 스님처럼 설법을 한다
수도승을 쳐다보는 경이로운 눈길 위로
노란 설법들이 물음표처럼 흩날린다
난해한 설법들이 딱딱한 은행 알로 벗겨진다
천년동안 주워들은 풍월을 읊다보니
영국사 중들보다 더 수도승 같다
꽃의 낭만
꽃을 보고 낭만을 떠올리기 전에
꽃이 피기 전에 닥쳤을 시련을 생각하시라
꽃을 피우기 위해
훌쩍였다는 소쩍새 소리는
추억 속에 묻어두시라
거친 폭우와 격렬한 태풍과
앙칼진 매미 소리가 섞여
꽃이 피었다면
과연 꽃을 낭만이라고 할 수 있을까
바람에 흔들리는 꽃대만 봐도
꽃이 얼마나 옛날 추억을 등짐처럼 지고 있는지
가슴이 찡할 때가 있다
탁란
교회 앞에 갖다 놓은 베이비박스에 누군가 왔다 갔다
방금 그 속에서 태어난 듯
아기가 활짝 웃고 있다
험한 세상으로 실려 갈 쪽배인지도 모른 체
환한 미소로 옹알이하는 아기의 얼굴엔 그늘조차 없다
핏덩이 같은 생명을 갖다 놓고
어미는 지금쯤 뻐꾸기처럼 통곡하고 있을까
일말의 양심이라도 있다면
차라리 교회 앞에서 울지 말아라
산 그림자도 외로워 돌아눕는 산골에 가서 땅을 쳐라
가증스런 그의 위선이 더 답답하게 다가오는 오월
저 아기를 키워줄 뱁새 같은 사람이 더 그립다
탁란
둥지로 날아온 뱁새가
부리 끝에 먹이를 물고
새끼들을 눈여겨본다
새끼들은 개나리꽃처럼
주둥이를 활짝 벌려
저요저요 하며 부리를 쳐든다
머리통 만하게 벌어진
새끼의 주둥이 속에
뱁새가 냉큼 먹이를 넣어준다
뱁새는 그 놈이
뻐꾸기 새끼라는 것을 알면서도
연민 한 덩이를 넣어주는 것이다
팽이
나는 빙판 위에서만 춤추는 무희다
빙판을 만나면 엉덩이를 세워 춤을 춘다
채찍을 맞아야 다리에 힘이 생기는 나를
누구도 이해하지 못한다
아무리 춤이 좋아도 맞으면서 추는 춤을
도통 이해할 수가 없다
둥근 엉덩이를 쳐들고
채찍질의 속도에 맞춰
돌아가는 유별난 춤이 나의 삶이었다
채찍에 맞아 핑그르르 도는 모습은 황홀하지만
난 등짝에 새겨진 채찍질의 숫자로
삶의 고난을 재고 있다
난 아마 아픈 겨울을 더 빨리 보내기 위해
독한 채찍에 맞서는지도 모를 일이다
안개
강둑 저편 마을에 낀 안개 때문에
도저히 앞을 분간할 수 없었다
안개바람은 돌격대처럼 쓸려가고
나룻배는 안개 물결 밀며 어디론가 떠나간다
복사꽃 핀 마을에 가고 싶지만
안개를 싣고 가는 나룻배만 무심히 바라보았다
늙은 부부 둑에 앉아
손수건처럼 백발을 휘날려도
나룻배는 돌아오지 않고
안개만 피난민처럼 몰려다녔다
흰 배
개미떼가 나비를 끌고 간다
장송곡도 없이 장례를 치루는 길엔
축 쳐진 돛이 두 장
방금 전까지 활짝 펴서 활강하던 날개는
돛으로 변해 무작정 사지로 끌고 간다
나비는 흰 배처럼 너울거린다
저렇게 가다가는 언제 바다에 닿을지 모르지만
흰 배가 휘젓고 갈 망망대해는
꽃밭보다 더 수심이 깊었다
팽이
춤을 추고 싶을 땐
그녀의 몸은 채찍질로 부서졌다
등짝을 맞아야 살판났다
맞아야 춤을 추는 여자는 타고난 무희다
둥근 엉덩이 빙판에 대고
어지럽게 돌아가는 춤이 그녀의 삶이었다
춤으로 세월을 보낸
그녀의 등짝엔 채찍으로 맞은 흔적이
연륜처럼 아로 새겨져 있었다
빙판이 황홀한 무대로 변할 땐
휘날리는 눈발의 숫자만큼
채찍의 숫자도 늘어났다
보름달
행렬지어 산행하는데
거구의 털보 사내 잠깐만 하며 길을 막아선다
무슨 일인가 고개 기웃거리며
맨 앞줄 쳐다보는데
비 맞은 닭들처럼 쪼르르 달려가는 여자 넷
울창한 나무 그늘 속으로 숨어드는가 싶더니
붉게 핀 진달래 꽃 덤불 흔들리고
죽은 듯이 고요가 계속될 동안
잠자코 있던 내 아랫도리 탱탱하게 부풀어 올랐다
주머니 속에 슬쩍 손 집어넣고
고개 쳐든 거시기를 지그시 누르며 기다리는데
한낮의 변고처럼
네 개나 떠오르는 보름달
난 여태 저렇게 둥글고 넓적한 엉덩이를 보지 못했다
사과나무
지겹도록 기다리던 그리움이기에
양볼이 불타듯 익어간다
저 편 하늘에는 노을 한 무리 진 일이 없는데
사과나무엔 볼 빨간 사과들이 주렁주렁하다.
사과나무가 설레는 가슴으로 노을을 빨아들일 때
갈지자로 흩어지며 날아오르는 떼까치 소리
깃털에 묻은 가을비를 터는가 싶더니
나뭇가지에 앉아 울부짖는다
주인은 때까치를 쫒기 위해 연신 총을 쏘지만
울리는 총소리 숫자만큼 사과에 찍히는 상처
결국 그리움은 상처만 남기는 일이니
내년부터는 사과나무를
전부 베고 싶다는 상상을 했다
자벌레
그의 직업은 측량사
매일 산의 치수를 재는 일로 먹고 산다
쬐끄만 몸뚱이로
험준한 산을 재는 일이 무리지만
온몸이 줄자인 그들은 포기하는 법이 없다
산자락에 전답이 늘어가고부터 그랬다
친환경 농법을 고수하는 사람들이
농약마저 치지 않자
더는 두고 볼 수 없어 권력에 맞섰다
권력에 맞서다 지치면 삼보일배를 하기도 했다
물결처럼 밀고 가는 행렬에
사람들은 뒤로 흠칫 물러섰지만
발길에 밟혀 죽는 것들도 많았다
그들은 살기등등해져 떼거리로 몰려나왔다
차라리 나뭇잎이나
갉아먹고 사는 일이 마음 편했다
화투
노름하면 재산 말아먹는다고
욕을 퍼붓던 엄마가
화투와 친구가 된 건
마음이 넓어졌기 때문이 아니다
기억을 잃는다는 건
생의 전부를 잃기 때문이다
고드름
간밤의 추위가
얼마나 허공을 찔러댔기에
고드름이 투명한 마음을 갈았을까
매서운 눈물에 냉기를 섞어 칼끝을 갈더니
여차하면 세상 찌를 듯
증오의 눈을 치뜨고 있다
햇살이 증오를 풀라며
창끝을 살살 문지르자
고드름은 감격에 겨워
지상에 철퍼덕 칼날 파편을 튕긴다
절도범들
아무리 주인의 감시가 없다 해도
저렇게 여유로울 수 없다
원래 정직하다고 믿었던 놈들인데
세상에나, 세상에나
꽃 앞에서 보초를 서면서
뒤로 꽃가루를 빼돌리는
벌들의 낯짝이 저렇게 뻔뻔할 수가 없다
가을 부근
가을 부근에 오니 열차가 지나간다
죽어도 푸른 혈색으로 아우성치자던
가을 잎들은 죄다 떨어지고
산그늘이 욕망처럼 산자락을 뒤덮고 있다
산길 깊어 그가 사는 곳을 찾지 못했다
칡넝쿨 엮어 움막을 짓고 산다는
그의 구레나룻도 소문처럼 희어졌겠지
뻐꾸기 흐느끼는 산속을
열차가 달려가고 있는지
노란 불꽃을 튀기는
쇠바퀴에서 자갈 구르는 소리가 난다
파도
바닷물이 긁어댄 흔적이 해변에 너절하다
바다는 그리움을 앓고 있었지만
그 속엔 시퍼런 칼날이 숨어 있었다
고운 모래밭에 난 상처가
칼질처럼 어지러웠다
바닷물에 밀려 도망치던 흔적이
모래밭에 족적처럼 찍혀 있었다
해변은 파도를 막아내느라
게걸게걸 게거품을 쏟아내고
화가 난 갈매기가 바위틈에
하얀 똥을 낙서처럼 휘갈겨댔다.
배추
두메산골 배추밭이라서 배추의 대열엔 상처가 깊다
주인의 발길이 없는 틈을 타
배춧잎엔 오체투지로 기어간 벌레들의 이빨 자국만 성성하다
평소 친환경 농법을 고수하던 김 여사
벌레 잡아 준다고 살아날까 의심을 하면서도
벌레 잡아주고 흰 가루약 뿌려주고 한 달 만에 배추밭에 가보았더니
배추는 싱싱한 얼굴로 부처처럼 좌정하고 있었다
흰 엉덩이 받쳐 들고 속마다 노란 속살 채워놓고 꽃단장 하고 있었다
묵언수행 하듯 쭉 뽑아 올린 꽃대엔 벌들이 난리를 치는데
절에 기도하러 온 신자들처럼 불경 읽는 소리로 시끄럽다
늙은 민들레
죄수들이 교도소 담벼락에 붙어 있다
면도칼로 머리통 박박 밀고
서로 등 기대고 몰려오는 잠 쫓고 있다
햇살이 구들장처럼 따스한 것임을 미리 알았어도
죄는 마음속에서 스멀스멀 뿌리 내리지 않았으리
혈육들이 뿔뿔이 흩어진 것이
내 죄라는 것을 알고 난 뒤에는
후회도 부질없었다
너희들만은 도란도란 한곳에 모여 살아라
척박한 땅에서는 살지 말아라
무리들이 신명나게 춤추는 세상에서만 살아라
피안
옛날부터 찾기로 한
엄마의 고향을 그녀에게 묻기로 했다
희미한 기억을 들춰내도 알 수 없는 곳
살구꽃이 폭죽을 터뜨리는 곳도 같고
벼랑에 연등 같은 암자 한 채 매달린 곳도 같지만
그곳은 꿈결처럼 아늑한 곳
아홉 살 엄마는 이미 고향을 잊었고
엄마 앞서 걷던 누이도
그늘진 보름달만 생각난다는 곳
별빛 앞서가면 속 박박 긁어대는 돌밭이고
낮달 따라가면 얼키설키 마음 옭아맨 칡밭인데
아, 어쩌나 막막한 길
되돌아올 수도 없는 길
예라, 모르겠다
시동 꺼 놓고 살구꽃 분분한 강가에 앉아 졸다보니
저 멀리 강둑이 피안이구나
그녀도 더 이상 길을 알려주지 않는
내 마음의 극지極地
낮달
변기에 쪼그려 앉아 오줌을 눈다
변기를 더럽힌다는 마누라의 잔소리도 필요 없고
전립선으로 질질거리는 오줌 방울에
옷 적실 일 없어 편안하다
서서 물총을 겨눌 때만 남자가 아니다
앉아서도 집안을 호령하는 여자들도 있다
남의 시선 아랑 곳 없이
오줌을 갈겨대는 족속보다
쪼그려 앉아 고개 숙인 것을 들여다보는 것이
슬프다는 것도 알았다
그런데도 나 오늘도 변기에 앉았다
마누라 잔소리 때문에 다소곳해졌다
화장실에서 엉덩이를 까고 앉았더니
창문 통해 들여다 본 낮달이 히죽히죽 웃는다
따스한 말들
자, 밥그릇 나오십니다
어느 식당에선가 들었던 말
그릇에 존대를 하는 그녀를 보고
고개를 갸웃거렸더니
위대하지 않나요
밥을 담는 그릇이
얼마나 따스한가요
따스하게 하는 것은 위대하지요
김 모락거리는 두엄덩이도 그렇고
얼음장 녹이는 햇살도 그렇고
고목에서 악수 청하는 새싹도 그렇고
그것들이 아버지, 어머니만 못할까요
앞으로는 따스한 것들에게
존칭어를 붙일 겁니다
두엄덩이 님, 햇살 님, 새싹 님
들을수록 따스한 말
자, 밥그릇 나가십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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