집게발로 끌어당기는 허공---게발선인장
기억과 추억 사이/야생화 이야기
2006-04-08 17:51:28
선인장의 종류도 상상외로 엄청난 숫자가 있습니다. 불과 몇 종밖에 되지 않을 거라는 생각은 내가 사정골 식물원을 한 바퀴 돌아보고 나서야 깨졌습니다.
공작, 부채, 기둥, 노인, 새우, 별 선인장 등, 희환한 이름이 붙은 선인장들은 총 5,000여종이나 된다고 합니다. 그 중에서 기둥선인장아과에 속하는 게발 선인장도 끼여 있습니다. 화분에 담긴 게발선인장은 우리 집 거실 한쪽에서 늘 가족들과 함께 살아왔기에 더욱 친숙한 면이 있습니다. 특히 며칠마다 화분에 물을 주는 아내의 선인장 사랑은 유별납니다. 그래서 다투는 날도 종종 있습니다.
게발선인장 화분 하나면 족하겠지만 군자란이나 다른 화초들이 담긴 장독 같은 화분을 옮기는 데는 장사가 아니면 할 수 없는 노릇입니다. 내가 팔이 아프다고 투덜될 때마다 아내는 화분을 이웃집에 주어야겠다고 성질을 냅니다. 그런 잔소리 속에서도 게발선인상이 꽃을 활짝 피웠습니다. 며칠 전부터 길쭉한 모양의 진홍색 꽃봉오리를 한참동안 다물고 있더니 바람난 처녀처럼 꽃잎을 활짝 펴들었습니다. 볼수록 꽃잎의 모양이 꼭 게발을 닮았습니다. 톱니로 썰어낸 것 같은 꽃잎들은 너무나 날카로워서 허공의 한쪽을 꽉 찍어 누를 것만 같습니다. 저 팔팔한 힘을 누가 막을까요. 메몰 찬 사막의 바람도 등껍질을 벗길 만큼 따가운 햇살도 별안간 출몰한 게들을 막지 못할 것 같은 한낮, 화분 속의 선인장은 게들의 출몰처럼 집게발을 허공에 들어 올리고 핏빛보다 더 선연한 꽃들을 피웠습니다. 날카로운 게발에서 어떻게 저리 아름다운 꽃빛이 뿜어져 나올까요. 그 꽃잎이 뚫고 나온 선인장의 두터운 잎을 한참 훑어봅니다. 그러나 상처는 없습니다. 선인장의 상처대신 아내와 나의 마음에 남았던 깊은 상처를 기억합니다. 서로 다투는 사이, 상처는 깊어지고 게발 선인장은 상처의 진을 빨아먹으며 꽃을 피웠을 겁니다. 그래서 꽃이 진홍의 핏방울처럼 선명한 가 봅니다. 아내가 며칠마다 게발선인장 화분을 바깥으로 내놓고 물을 주고 들여놓은 것은 진홍빛 꽃들을 보기 위한 것임을 나중에 알았습니다. 나는 아내의 그런 면을 보지 못한 겁니다. 게발선인장이 꽃을 피우면서 아내는 확실히 더 젊어졌습니다. 아마 그 꽃들이 허공을 꽉 찍어 누르고 흘러간 세월을 한참 앞으로 끌어당겼나 봅니다.
게발선인장을 바깥으로 내 놓을 때마다 아내와 말다툼을 벌어야 했던 날들은 선인장이 비로소 화려한 꽃을 선보이고 나서 집안이 잠잠했습니다. 좁은 화분 속에서도 숨이 벅찰 정도로 꽃을 피운 게발선인장의 꽃들이 문득 희망처럼 보이는 이유는 무엇일까요. 희망, 바로 그것입니다. 나는 꽃말이 없는 게발선인장에 "희망"이란 꽃말을 붙여주고 싶습니다. 어쩌면 내가 아직 꽃을 피우지 못한 게발선인장같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아직도 꽃피우지 못한 희망이 언젠가는 게발선인장의 꽃처럼 화려하게 피어날 날을 기대해 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