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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2. 고난을 이기는 은혜를 누려라
(삼상7:12-17)
20220109 주일찬양예배
12 사무엘이 돌을 취하여 미스바와 센 사이에 세워 이르되 여호와께서 여기까지 우리를 도우셨다 하고 그 이름을 에벤에셀이라 하니라 13 이에 블레셋 사람들이 굴복하여 다시는 이스라엘 지역 안에 들어오지 못하였으며 여호와의 손이 사무엘이 사는 날 동안에 블레셋 사람을 막으시매 14 블레셋 사람들이 이스라엘에게서 빼앗았던 성읍이 에그론부터 가드까지 이스라엘에게 회복되니 이스라엘이 그 사방 지역을 블레셋 사람들의 손에서 도로 찾았고 또 이스라엘과 아모리 사람 사이에 평화가 있었더라 15 사무엘이 사는 날 동안에 이스라엘을 다스렸으되 16 해마다 벧엘과 길갈과 미스바로 순회하여 그 모든 곳에서 이스라엘을 다스렸고 17 라마로 돌아왔으니 이는 거기에 자기 집이 있음이니라 거기서도 이스라엘을 다스렸으며 또 거기에 여호와를 위하여 제단을 쌓았더라
유럽의 발칸반도, 아프리카의 소말리아 반도, 아시아의 카슈미르, 중동의 가자지구, 이곳들의 공통점이 무엇일까요? 모두 ‘세계의 화약고’라 불릴 정도로 정세가 불안한 곳입니다. 맞 닿은 국경을 두고 이전에도 여러차례 심각한 분쟁이 있어왔고 앞으로도 특히 전쟁이 우려되는 지역들입니다.
--이스라엘과 블레셋
성경에도 이러한 지역이 있습니다.
이스라엘과 블레셋입니다. 이 두 나라는 국경을 마주하고 있는 지형적인 이유 때문에 늘 적대관계에 있었습니다. 그래서인지 이스라엘이 불레셋과 싸우는 장면이 끊임없이 등장합니다. 사사 시대는 물론 이스라엘의 초대 왕인 사울 왕, 다윗 왕, 그리고 솔로몬 왕 때에도 블레셋과 전쟁을 치렀습니다, 사실 에벤에셀의 승리를 경험하기 전, 이스라엘은 두번에 걸친 블레셋과의 싸움에서 쓰디쓴 패배를 맛보았습니다.
첫 전쟁에서는 사천명 가량이 전사했습니다, 이 전쟁에서 패한 이후 이스라엘은 하나님의 임재를 상징하는 언약궤까지 동원하여 블레셋을 이기고자 했지만 또 다시 패하고 말았습니다. 두 번째 전쟁에서는 3만 명이 전사하고 언약궤마저 빼앗겼습니다. 엘리 제사장의 두 아들 홉니와 비느하스도 전사했습니다.
“살륙이 심히 커서 이스라엘 보병의 엎드러진 자가 삼만 명이었으며 하나님의 궤는 빼앗겼고 엘리의 두 아들 홉니와 비느하스는 죽임을 당하였더라”(삼상4:10b-11)
--이전에는 패하고 지금은 승리한 이유
이스라엘은 블레셋과의 전쟁에서 연속으로 패하고 하나님의 영광도 떠난 암흑기를 보내고 있었습니다.
생각해 보십시오. 이전 전쟁에서는 언약궤까지 동원했음에도 패했습니다. 그러나 이번 전쟁에서는 에벤에셀의 승리를 경험했습니다.
무슨 차이가 있는 것일까요? 싸움의 대상과 장소가 바뀌었습니까? 아닙니다. 싸움의 대상은 여전히 블레셋이었고, 싸움의 장소역시 에벤에셀이었습니다. 처음 블레셋과 싸울 때 이스라엘 백성들이 진을 쳤던 곳이 어디입니까?
“이스라엘은 나가서 블레셋 사람들과 싸우려고 에벤에셀 곁에 진 치고”(삼상4:1a)
에벤에셀입니다. 블레셋의 두 번째 전투에서 패배한 장소 역시 에벤에셀입니다.
“블레셋 사람들이 하나님의 궤를 빼앗아 가지고 에벤에셀에서부터 아스돗에 이르니라”(삼상5:1)
에벤에셀이라는 지명의 뜻은 ‘도움의 뜰’입니다. 누가 돕습니까? 하나님입니다. 그런데 하나님이 도우신다는 바로 그 에벤에셀에서 이스라엘은 블레셋에게 두 번에 걸쳐 참패를 당했습니다. 3만 4천 명이 전사 하고, 제사장 가문이 몰락하고, 하나님의 임재를 상징하는 언약궤마저 빼앗기는 수모를 당했습니다.
그런데 놀랍게도 이번에는 이스라엘이 블레셋 군대를 물리치고 승리했습니다. 패배의 아픔을 당했던 바로 그 에벤에셀에서 말입니다. 하나님이 우레를 발하여 블레셋 군대를 어지럽게 하였고, 이스라엘은 혼비백산해 도망치는 블레셋을 끝까지 추격해 물리쳤습니다. 이후 사무엘은 돌을 취하여 에벤에셀에 승리를 기념비를 세웠습니다. 패배와 수모의 자리였던 그곳에 ‘하나님이 여기까지 우리를 도우셨다’며 에벤에셀의 기념비를 세웠습니다.
그렇다면 이스라엘이 과거에는 패배하고 이번에는 승리한 이유는 무엇일까요? 단순합니다. 하나님과의 관계를 회복했기 때문입니다. 어떻게 관계를 회복했습니까? 이스라엘 백성들은 자신들이 섬겨왔던 우상들을 철저히 제거했습니다. 미스바 광장에 모여 종일 금식하며 자신들의 죄를 낱낱이 자백하고 회개했습니다. 사무엘은 적군이 쳐들어오는 위급한 상황 속에서도 젖 먹는 어린양을 취해 온전한 번제를 드렸습니다. 그리고 여호와께 부르짖어 기도했습니다.
이전에는 자신들의 힘으로 싸우려고 했습니다. 하나님을 의지하지 않으면서도 하나님의 도우심으로 승리할 줄 알았습니다. 하나님을 경외하지 않으면서도 주술적으로 언약궤를 동원하면 승리할 줄 알았습니다. 결과는 참패였습니다.
그러나 이번에는 철저하게 회개함으로 하나님과의 관계를 회복했습니다. 다급한 상황 속에서도 하나님께만 집중하고 하나님만을 의지했습니다. 이것이 바로 승리의 비결입니다.
--고난이 은혜가 되다
이스라엘이 에벤에셀의 은혜를 경험할 수 있었던 또 하나의 이유가 있습니다. 역설적으로 블레셋의 침공입때문입니다. 이스라엘이 미스바에 모여 종일 금식하며 회개할 때 블레셋 사람들이 쳐들어오지 않았다면 그들은 하나님이 자신들의 기도에 응답하고 도우시는 분임을 알지 못했을 것입니다. 살아계신 하나님의 역사를 경험하지 못했을 것입니다. 결과적으로 블레셋이 쳐들어왔기 때문에 이스라엘은 ‘우리의 기도를 응답하시고 우리를 위해 싸우시는’ 에벤에셀의 하나님의 은혜를 경험한 것입니다.
물론 블레셋의 갑작스러운 공격은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엄청난 공포였습니다. 하지만 이 커다란 위기로 인해 이가봇의 저주가 끊어졌고, 이스라엘은 에벤에셀의 하나님의 은혜를 경험했습니다. 그리고 그곳에 에벤에셀의 기념비를 세웠습니다.
다윗을 보십시오.
다윗은 아버지의 심부름으로 형들을 만나러 갔다가 블레셋 장수 골리앗을 만났습니다. 만일 그때 다윗이 이스라엘 왕과 군인들이 두려워하던 골리앗을 만나지 않았다면 어떻게 되었을까요? 그저 베들레헴의 한 평범한 소년으로 남았을 것입니다
하지만 그의 인생 가운데 누구도 감당할 수 없는 거인 골리앗을 만났기 때문에 하나님의 살아계심을 이스라엘 왕과 군인들 앞에 드러냈고 나아가 이스라엘의 위대한 용사가 될 수 있었습니다. 다윗이 골리앗을 만난 것은 우연이 아닌 그를 향한 하나님의 특별한 은총입니다.(여러분 삶 가운데 골리앗을 만났습니까?)
사도바울 역시 죄수의 신분으로 재판을 받으러 로마로 향하다 유라굴로 광풍을 만났습니다. 만약 바울의 생애에 그런 위기가 없었다면 어떻게 되었을까요? 바울 계속 죄수의 신분으로 살아 있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유라굴로라는 광풍을 만났기에 배 안의 사람들에게 ‘안심하라 두려워 말라’는 구원의 소망을 주고 죄수의 신분이던 그가 그 배에서 가장 영향력 있는 사람이 될 수 있었습니다. 유라굴로라는 광풍을 만났기에 하나님의 살아계심을 드러낼 수 있었고, 배에 탄 사람과 멜리데 섬에 있는 많은 영혼들에게 복음을 전하며 그들을 주께로 인도하는 놀라운 열매를 맺을 수가 있었습니다. 유라굴로 광풍이 바울을 바울되게 만든 것입니다.
요셉도 마찬가지입니다.
억울한 누명을 쓰고 감옥에 갇혔기 때문에 해몽을 통해 애굽의 국무총리가 될 수 있었습니다. 다니엘도 사자 굴에 던져졌기 때문에 바벨론 왕과 백성들로 하여금 하나님만이 살아계신 참 신이심을 믿게 만들 수 있었습니다.
믿음은 말에 있지 않고 현장에 있습니다. 그냥 현장이 아닌 고난의 현장에 있습니다. 지금 우리가 만나는 고난의 현장이 중요합니다. 믿음으로 사는 자에게는 고난의 현장이 하나님의 살아계심을 드러내는 은혜의 현장이 될 수 있습니다. 풍랑과 절망의 현장이 당장은 고통스러울지 몰라도 믿음의 사람들에게는 기적과 소망의 현장이 됩니다.
우리의 믿음은 현장을 필요로합니다. 현장이 중요합니다. 우리 인생 가운데 고난이 없다면 편안한 삶을 살 수는 있겠지만 하나님의 살아계심을 세상 사람들에게 생생하게 드러내는 기적은 결코 경험할 수 없을 것입니다.
--에벤에셀의 축복
그렇다면 이스라엘 백성들이 에벤에셀의 승리를 경험하고 에벤에셀의 기념비를 세우고 난 이후 누린 에벤에셀의 축복은 무엇입니까?
첫째, 하나님의 손이 함께 했습니다.
이에 블레셋 사람들이 굴복하여 다시는 이스라엘 지역 안에 들어오지 못하였으며 여호와의 손이 사무엘이 사는 날 동안에 블레셋 사람을 막으시매(13절)
‘여호와의 손’은 여호와의 능력, 여호와의 임재를 상징합니다. 이가봇 시대에는 하나님의 영광이 떠났습니다. 그런데 에벤에셀의 은혜로 말미암아 다시 하나님의 은혜의 손이 함께하는 축복을 누리게 되었습니다.
그동안 블레셋은 틈만 나면 이스라엘을 쳐들어왔습니다. 이스라엘을 압제하며 땀 흘려 지은 곡신과 가축을 빼앗아 가기가 일쑤였습니다, 그런데 더 이상 블레셋이 이스라엘 지경 안으로 들어오지 못하게 되었습니다. 여호와의 손이 블레셋을 막았기 때문입니다. 이스라엘 스스로의 힘과 능력이 아니라 하나님의 전능한 손이 함께했기 때문입니다.
그렇습니다. 하나님의 손이 블레셋 사람들의 침입을 막아 준 것처럼 전능하신 주님의 손이 우리와 함께 하면 악한 어두움의 영이 우리 안에 들어올 수 없습니다. 아무리 철저하게 준비하고 무장해도 나 스스로의 힘과 능력으로는 하나님이 내게 주신 것을 전히 지킬 수 없습니다.
생각해 보십시오. 하루아침에 건강이나 재물, 평생에 걸쳐 쌓아 둔 명성과 명예를 잃어버리고 싶은 사람이 있겠습니까? 하지만 우리 주변에 잘못된 선택이나 안타까운 사건 사고로 하루아침에 모든 것을 잃고 망연자실한 채 살아가는 이가 많습니다.
하나님이 은혜로 주신 것들을 빼앗기지 않고 지키는 것은 무척 중요합니다. 은혜를 받는 것도 중요하지만 (누리는 것) 은혜를 유지하고 지키는 것 역시 중요합니다. 복도 만찬가지 입니다. 주님이 주신 복을 받는 것도 중요하지만 받은 복을 잘 관리하고 유지하는 것은 더욱 중요합니다. (받은 복을 잘 누리시길 바랍니다)
하지만 악한 영은 우리를 죽이고 멸망시키려합니다. 어디를 가든지 무엇을 하든지 누구를 만나든지 끊임없이 우리 안에 있는 것들을 빼앗으려 합니다. 하나님이 내게 주신 것들을 빼앗기지 않으려면 전능하신 하나님의 손이 막아 주어야 합니다.
가정을 허무는 작은 여우가 들어오지 못하도록 하나님의 손이 우리 가정의 울타리를 지켜 주어야 합니다. 도적질 하고, 죽이고, 멸망시키는 악한 영이 성도의 기업과 일터에 역사하지 못하도록 전능하신 하나님의 손이 지키고 보호해 주어야 합니다.
둘째, 잃어버렸던 땅을 회복했습니다.
블레셋 사람들이 이스라엘에게서 빼앗았던 성읍이 에그론부터 가드까지 이스라엘에게 회복되니 이스라엘이 그 사방 지역을 블레셋 사람들의 손에서 도로 찾았고(14a)
에벤에셀의 은총이 임했을 때, 이스라엘은 잃었던 땅을 다시 찾았습니다. 이스라엘은 하나님이 자신들에게 기업으로 주셨던 땅을 블레셋에게 빼앗겼던 것입니다. 하지만 에벤에셀의 은혜가 임하자 하나님은 빼앗긴 기업을 회복시켜 주셨습니다.
지금까지 인생을 살아오면서 무엇을 잃어버렸습니까? 최근에 하나님의 은혜로 내게 주셨던 것들 가운데 무엇을 빼앗겼습니까?
건강입니까? 물질입니까? 가정입니까? 하나님이 주신 소망입니까? 하나님에 대한 사랑입니까?
돌이켜보면 하나님이 은혜로 주신 것들 중에 내가 제대로 유지하고 관리하지 못해 잃어버린 것들이 참 많습니다.
그러나 에벤에셀의 하나님이 함께하시면 회복될 수 있습니다. 잃어버린 하나님과의 첫사랑도, 무너진 자존감도 다시 회복할 수 있습니다. 에벤에셀의 은혜를 구하십시오. 그래서 여러분의 인생과 가정에 에벤에셀의 기념비가 계속적으로 세워지길 바랍니다.
셋째, 평화가 임했습니다.
또 이스라엘과 아모리 사람 사이에 평화가 있었더라(14b)
‘평화가 있었다’라는 말은 더 이상 보복 전쟁이 진행되지 않았다는 뜻입니다. 전쟁이 사라지니 자연스럽게 그 땅 가운데 고통과 괴로움이 사라지고 평화가 임했습니다.
여기서 한 가지 유심히 보아야 할 점은 성경은 이스라엘과 블레셋이 아닌 이스라엘과 아모리 사람 사이에 평화가 있었다고 말한다는 것입니다. 아모리 족속은 가나안 족속으로 단 지파를 자신들의 기업(땅)에서 쫓아낼 정도로 몹시 강한 족속이었습니다. 그런데 블레셋이 이스라엘에게 패했다는 소식을 듣자 스스로 겁에 질려 이스라엘과 평화조약을 맺었습니다. 이렇게 이스라엘과 아모리 사람 사이에 평화가 임한 것입니다.
에벤에셀 하나님의 은혜가 임할 때, 이스라엘은 블레셋으로부터 보호를 받는 축복을 누렸습니다. 에벤에셀 하나님의 손이 함께할 때, 그들은 잃었던 땅을 다시 찾는 회복의 축복을 누렸습니다, 뿐만 아니라 전쟁이 사라진 평화의 축복을 누렸습니다.
우리 인생도 마찬가지입니다. 우리 삶에 에벤에셀 하나님의 은혜가 임하면 악한 영들의 공격으로부터 보호받을 수 있습니다. 보호와 회복, 그리고 평화의 축복, 이 모든 것이 에벤에셀 하나님이 우리와 함께함으로 주시는 참된 선물입니다.
--사무엘이 사는 날 동안에
본문에는 한 가지 특이한 반복 어구가 나옵니다.
여호와의 손이 사무엘이 사는 날 동안에 블레셋 사람을 막으시매(13b)
사무엘이 사는 날 동안에 이스라엘을 다스렸으되(15)
‘사무엘이 사는 날 동안에’입니다. 반복은 강조의 또 다른 의미입니다. 준비된 한 사람 사무엘을 통해 그 땅 가운데 하나님의 보호와 회복, 평화와 축복이 임했습니다. 또한 이가봇의 저주가 끊어지고 에벤에셀의 은혜가 임했습니다. 이를 통해 그 시대에 사무엘이 얼마나 영향력 있는 사람이었는지를 알 수 있습니다. 그는 나라의 운명을 좌우하는 영향력 있는 사람이었습니다.
하나님은 전능하시지만 언제나 사람을 통해 그분의 위대한 역사를 이루어 가십니다. 그러면 하나님은 왜 사무엘을 통해 놀라운 역사를 이루셨을까요?
첫째, 그가 기도의 사람이기 때문입니다.
이스라엘 자손이 사무엘에게 이르되 당신은 우리를 위하여 우리 하나님 여호와께 쉬지 말고 부르짖어 우리를 블레셋 사람들의 손에서 구원하시게 하소서 하니(8절)
이스라엘의 모든 백성들은 사무엘을 기도의 사람으로 인식했습니다. 때문에 미스바에 모여 있던 이스라엘 백성들은 블레셋이 쳐들어왔을 때 가장 먼저 사무엘에게 기도를 부탁했습니다, 기도의 사람 사무엘이 기도하면 하나님이 분명 그 기도에 응답해서 자신들을 구원해 주실 것이라고 믿었기 때문입니다,
위급한 상황 속에서 사무엘은 늘 이스라엘을 위해 부르짖어 기도했습니다. 그러면서 기도를 쉬는 죄를 범하지 않겠노라고 했습니다.
“나는 너희를 위하여 기도의 쉬는 죄를 여호와 앞에 결단코 범하지 아니하고”(삼상12:23a)
어머니 한나의 기도로 태어난 그는 죽음의 그림자가 드리워진 마지막 순간에도 기도의 호흡을 이어 갔습니다. 이렇게 기도하는 사람이었기에 한 시대에 하나님의 손에 붙들려 거룩하게 쓰임받은 것입니다.
둘째, 예배의 사람이기 때문입니다.
“사무엘이 젖먹는 어린양 하나를 가져다가 온전한 번제를 여호와께 드리고”(9절a)
온전한 번제를 드렸다는 것은 그가 젖먹는 어린양을 제단에 올려 완전하게 모두 타서 없어질 때까지 그 자리를 떠나지 않았다는 뜻입니다, 멀리서부터 애굽 군대의 말발굽 소리가 들려옵니다. 그 군대가 날선 기세로 먼지를 일으키며 돌진해 옵니다. 머뭇거리면 목숨을 잃을 수도 있는 긴박한 상황입니다. 그러나 사무엘은 흔들림 없이 여호와께 집중했습니다. 기도에 귀 기울이시는 하나님을 철저히 신뢰했기 때문입니다. 예배를 기뻐 받으시며 내 백성을 돌보시는 하나님의 약속을 믿었기 때문입니다.
-- 이 시대의 사무엘을 기다리며
사무엘은 일 년에 한 차례씩 벧엘로, 벧엘에서 길갈로, 길갈에서 미스바로, 그리고 미스바에서 자신의 고향 라마로 순회 하면서 이스라엘을 다스리는 일, 즉 재판을 했습니다. 이 모든 사역을 마치고 고향으로 돌아온 그는 여호와를 위하여 제단을 쌓았습니다.
“라마로 돌아왔으니 이는 거기에 자기 집이 있음이니라 거기서도 이스라엘을 다스렸으며 또 거기에 여호와를 위하여 제단을 쌓았더라” (17절)
“또”라는 표현은 한 가지 중요한 힌트를 줍니다.
이 표현을 통해서 사무엘은 사역을 마치고 돌아올 때마다 반드시 하나님께 예배드렸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셩경과 역사를 보면 하나님의 손에 붙들려서 한 시대에 영향력 있는 인물로 쓰임 받았던 이들에게는 공통점이 있습니다. 바로 기도와 예배의 사람이라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사람 가운데 기도와 예배 없이 영향력을 끼쳤던 사람은 아무도 없습니다.
저는 하나님께 예배하는 성도들이 삶의 현장에서 영향력 있는 사람이 되기를 원합니다. 특히 교회의 다음 세대가 정치, 종교, 문화, 비즈니스 등 모든 영역에서 선한 영향력을 끼치는 사람들로 세워지기를 원합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실력이 있어야 합니다. 하지만 실력만 있다고 되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이 그들을 붙잡으시고, 세워주시고, 높여 주셔야 합니다.
악한 시대에 하나님의 손에 붙들려 쓰임받기 위해서는 기도의 무릎을 꿇어야 합니다. 사무엘처럼 어떤 상황 속에서도 흔들리지 않고 온전한 예배를 드릴 수 있어야 합니다.
이제부터라도 시간을 정해놓고 기도의 무릎을 꿇으십시오. 예배를 생명처럼 귀하게 여기십시오. 진정한 예배자로 하나님 앞에 서십시오. 사무엘을 들어쓰시는 하나님이 준비된 여러분들을 붙들어 영향력 있는 사람으로 세우실 것입니다.
여러분이 사는 날 동안 전능하신 하나님이 그분의 손으로 원수의 공격을 막아 주시고, 잃어버린 것들을 회복시켜 주시고, 여러분이 있는 그 현장에서 세상이 줄 수 없는 놀라운 평화를 주실 것입니다.
주를 믿는 모든 성도가 ‘여기까지 하나님이 인도하셨다’는 에벤에셀의 축복을 풍성히 누리며 살아가기를 원합니다. 여러분의 가정과 일터에 하나님의 은혜가 충만한 에벤에셀 기념비가 세워지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소망합니다.
이 설교문은 오륜교회 김은호 목사님의 저서
<인생의 밤을 만났을 때>에서 옮긴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