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월 31일 목요일 중천철학도서관에서 빌려온 서울대 심리학과 최인철 교수님의 책을 정독하며 읽고 있다. 생각할 여지가 많은 책이다. 세상엔 좋은 책이 참 많다. 많이 읽어 지식을 늘리고 싶지는 않다. 잘난 체하고 싶지도 않다. 다만 내가 책에서 얻은 것들을 실천하며 살 수 있길… 기도한다!
평소에 나의 생각과 너무나도 일치되는 내용이고, 본당 신부님으로 계시던 최 신부님과도 대화 중 세상을 어떤 시선으로 바라보는가에 따라 행동이 달라진다고 하던 이야기이기도 하기에 《프레임》의 프롤로그를 옮겨 본다.(10쪽 -17쪽)
세상을 보는 마음의 창, 프레임
핑크대왕 퍼시
프레임의 가장 흔한 정의는 창문이나 액자의 틀, 혹은 안경테이다. 이 모두 어떤 대상을 보는 것과 관련이 있다. 프레임은 뚜렷한 경계 없이 펼쳐진 대상들 중에서 특정 장면이나 특정 대상을 하나의 독립된 실체로 골라내는 기능을 한다.
광활하게 펼쳐진 풍경 중 어느 곳에 프레임을 맞춰 사진을 찍을 것인가 고민하는 작가가 양쪽 엄지와 검지로 사각 프레임을 만들어 여기저기 갖다 대보는 장면을 상상해보라. 동일한 장면을 대하고도 작가들마다 찍어낸 사진이 다른 이유는 그들이 사용한 프레임이 각기 다르기 때문이다. 물리학에서도 기준틀(혹은 준거체계, frame of reference)이라는 용어를 쓰는데 이 역시 세상을 관찰하는 데 사용되는 특정한 관점을 의미한다. 특히 어떤 물체의 위치와 운동을 표현하는 좌표(x축과 y축)를 뜻한다. 심리학은 물론 사회과학 분야에서도 프레임은 세상을 보는 틀이라는 의미로 사용된다.
프레임은 한마디로 세상을 바라보는 마음의 창이다. 어떤 문제를 바라보는 관점, 세상을 향한 마인드 셋(mind set), 세상에 대한 은유, 사람들에 대한 고정관념 등이 모두 프레임의 범주에 포함되는 말이다. 마음을 비춰보는 창으로써의 프레임은 특정한 방향으로 세상을 보도록 이끄는 조력자의 역할을 하지만, 동시에 우리가 보는 세상을 제한하는 검열관의 역할도 한다.
서양 동화 중에 《핑크대왕 퍼시(Percy the Pink)》라는 재미있는 작품이 있다.
핑크색을 광적으로 좋아하는 핑크대왕 퍼시는 자신의 옷뿐만 아니라 모든 소유물이 핑크색이었고 매일 먹는 음식까지도 핑크 일생이었다. 그러나 핑크대왕은 이것으로 만족할 수 없었다. 왜냐하면 성 밖에는 핑크가 아닌 다른 색들이 수없이 존재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고민 끝에 핑크대왕은 백성들의 모든 소유물을 핑크로 바꾸라는 법을 제정했다. 왕의 일방적인 지시에 반발하는 사람들이 많았지만 어쩔 수 없이 그날 이후 백성들도 옷과 그릇, 가구 등을 모두 핑크색으로 바꾸었다.
그러나 핑크대왕은 여전히 만족하지 않았다. 세상에는 아직도 핑크가 아닌 것들이 존재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래서 이번에는 나라의 모든 나무와 풀과 꽃, 동물들까지도 핑크색으로 염색하도록 명령했다. 대규모의 군대가 동원되어 산과 들로 다니면서 모든 사물을 핑크색으로 염색하는 진풍경이 연출되었다. 심지어 동물들은 갓 태어나자마자 바로 핑크색으로 염색되었다.
드디어 세상의 모든 것이 핑크로 변한 듯 보였다. 그러나 단 한 곳, 핑크로 바꾸지 못한 곳이 있었으니 그건 바로 하늘이었다. 제아무리 무소불위의 권력을 가진 왕이라도 하늘을 핑크로 바꾸는 것은 불가능한 일이었다. 며칠을 전전긍긍했지만 뾰족한 수가 떠오르지 않자, 핑크대왕은 마지막 방법으로 자신의 스승에게 묘책을 찾아내도록 명령했다. 밤낮으로 고심하던 스승은 마침내 하늘을 핑크색으로 바꿀 묘책을 찾아내고는 무릎을 쳤다. 스승이 발견한 그 묘책은 과연 무엇이었을까?
핑크대왕 앞에 나아간 스승은 왕에게, 이미 하늘을 핑크색으로 바꿔놓았으니 준비한 안경을 끼고 하늘을 보라고 했다. 대왕은 반신반의하면서도 스승의 말에 따라 안경을 끼고 하늘을 올려다봤다. 그런데 이게 어찌된 일인가? 구름과 하늘이 온통 핑크색으로 변해있는 것이 아닌가. 스승이 마술이라도 부려 하늘을 핑크색으로 바꿔놓은 것일까? 물론 아니다. 스승이 한 일이라곤 핑크빛 렌즈를 끼운 안경을 만든 것뿐이었다. 하늘을 핑크로 바꾸는 것은 불가능한 일이었지만, 하늘을 핑크색으로 보이게 할 방법은 찾아냈던 것이다. 핑크대왕은 크게 기뻐하며 그날 이후 매일 핑크 안경을 끼고 세상을 바라보면서 행복한 나날을 보냈다. 백성들은 더 이상 핑크색 옷을 입지 않아도 되었고, 동물들도 핑크색으로 털을 염색할 필요가 없었다. 핑크 안경을 낀 대왕의 눈에는 언제나 세상이 온통 핑크로 보였던 것이다.
우리 역시 핑크대왕과 마찬가지로 각자 색깔만 다를 뿐 ‘프레임’이라는 마음의 안경을 통해 세상을 바라보고 있다.
프레임으로 보는 세상
2006년 여름 내시경 검사를 받기 위해 전날 저녁부터 당일 오전까지 금식을 한 적이 있다. 말이 금식이지 내시경 검사를 위해 약을 먹고 화장실을 수시로 들락거려야 하는 아주 불편한 절차였다. 밤새 화장실을 수십 번이나 들락거린 나는 거의 탈진 상태로 소파에 누운 채 하릴없이 여기저기 TV 채널을 돌려댔다. 그러다가 정말로 재미있는 사실 하나를 발견하게 되었다. 우리나라 드라마에 먹는 장면이 너무 많이 나온다는 점이다. 그렇지 않아도 배가 고파 기진맥진한 상태에서 먹는 장면은 그야말로 고문이었다. 설상가상으로 그날 밤에 봤던 드라마에서는 한식, 중식, 일식, 양식을 먹는 장면이 한 번씩 다 등장하는 것이었다. 먹고 싶은 유혹을 참고 겨우 눈을 붙인 나는 검사 당일 아침, 병원으로 가는 길목에서 또 한 번 놀랄 수밖에 없었다. 도대체 우리나라 길거리에는 왜 그렇게 식당이 많은 것일까?
정말로 하루 사이에 식당이 그렇게 늘어난 것일까? 물론 아니다. 하루아침에 식당이 늘어선 것도, 유독 그날 그 드라마에서만 식사 장면이 많이 나온 것도 아니었다. 사실은 내가 배가 고팠기 때문에 세상을 온통 음식 프레임으로 바라보고 있었던 것이다. 글서 전에는 무심하게 지나쳤던 드라마 속의 식사 장면과 거리 음식점들이 강렬하게 내 눈에 들어온 것이다. 세상은 어제와 다름없었지만, 세상을 보는 내 프레임이 변한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는 세상이 변한 것처럼 착각했다. 변한 건 자신임에도 세상이 변했다고 착각하는 현상은 비단 나만의 경험은 아닌 듯하다.
미국 코넬 대학교 심리학과 연구팀은 본교 32명의 여대생을 대상으로 미국의 식품산업 전반에 대한 의견 조사를 실시했다. ‘TV에 등장하는 음식 광고가 10년 전에 비해 줄었는지 아니면 늘었는지’에 관한 것을 비롯하여 여러 가지 질문을 던졌다. 모든 조사가 끝ㅊ난 후 설문에 참가한 여대생들에게 다이어트 여부에 대한 추가 질문을 했다. 식사량에 신경을 쓰고 있는지, 지방이 많은 음식은 피하려고 노력하고 있는지 등에 대한 질문들이었다.
최종 자료를 분석한 결과, 현재 다이어트에 신경 쓰고 있는 여대생들이, 그렇지 않은 여대생보다 TV의 식품 광고가 더 늘었다고 보고했다. 이들이 서로 다른 TV 프로그램을 봤기 때문일까? 물론 그렇지 않다. 이유는 간단하다. 다이어트를 하는 여대생들도 내시경 준비를 하던 때의 나와ㅏ 마찬가지로 음식 프레임으로 세상을 보고 있었기 때문이다.
이런 착각이 음식에만 국한되는 것은 아니다. 사람들에게 자신이 살고 있는 사회가 얼마나 위험한 곳인지, 학교 폭력이 얼마나 심각한지, 교통하고 위험은 얼마나 높은지, 각종 안전사고의 가능성이 얼마나 높은지를 물었다고 해보자. 누가 우리 사회를 가장 위험한 곳으로 생각할 것 같은가? 아마도 이제 막 부모가 된 사람들이 아닐까 싶다. 갓난아이를 키우는 부모의 눈에는 모든 가구의 모서리가 흉기로 보인다. 그래서 아이들 안전에 대한 배려도 없이 가구를 만들었다고 불평하면서 모서리를 뭉툭하게 하는 안전장치를 사다 붙이거나 급한 대로 낡은 테니스공을 반으로 잘라 모서리를 원천봉쇄하기에 바쁘다. 전기 콘센트 구멍은 또 얼마나 위험한가? 아이들이 젓가락으로 장난이라도 친다면 …. 생각만 해도 아찔하다. 유괴 사건은 또 왜 그렇게 많이 발생하는가?
정말로 멀쩡하던 가구가 갑자기 흉기로 돌변하기라도 한 것일까? 하루아침에 유괴 사건이 급증한 것일까? 물론 아니다. 세상은 변하지 않았는데 그들이 변한 것이다. 즉 부모 입장이 된 것이다. 그래서 그들은 아이들 안전이라는 부모의 프레임으로 세상을 바라보기 시작한다.
코넬 대학교 연구팀은 미국의 한 초등학교 교사와 교직원을 대상으로 아동들이 직면하고 있는 위험 요소가 5년 전에 비하여 증가했는지 감소했는지를 물었다. 그런 다음 응답자들에게 신상 정보를 물었는데 그 중 한 질문이 첫 아이가 태어난 연도였다. 그 5년 사이에 아이를 낳은 응답자와 그렇지 않은 응답자의 위험지각 정도를 비교했더니, 그 기간 동안에 부모가 된 교사와 직원들이, 그렇지 않은 부모들에 비해 아이들이 직면한 위험 요소가 훨씬 더 늘었다고 답했다. 부모가 되는 순간 세상은 위험한 곳으로 인식되기 시작하는 것이다. 그런 이유로 이들은 영화나 드라마에 등장하는 ‘F’로 시작하는 욕도 더 예민하게 받아들이다. 이 점에 대해 저널리스트 엘리자베스 오스틴(Elizabeth Austin)은 이렇게 지적한다.
“부모가 되고 나면 영화, 케이블 TV, 음악 그리고 자녀가 없는 친구들의 대화 중에 늘 등장하는 비속어에 매우 민감해진다.”
이처럼 우리가 매일 보고 듣는 말이나 내용은 개개인의 프레임에 의해 결정된다. 따라서 누군가 ‘세상이 어떻다. 주변 사람들이 어떻다’라고 말하는 것은 세상과 주변 사람들에 대한 정보라기보다는 사실 그렇게 말하는 사람이 어떤 프레임을 갖고 있는지에 대해 더 많은 것을 알려주는 법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