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9. 03. 19
꽃샘 추위가 기승을 부리던 며칠 전 한국권투연맹(KBF) 김장성 심판위원(57), 제주복싱 이광우 심판위원(73)과 함께 뚝섬에 있는 김찬수 KBF 심판위원(54)이 운영하는 가게에서 담소를 나눴다. 송파경찰서에 근무하는 김장성과 사업가 김찬수는 WBC 국제심판으로 2012년 멕시코 휴양도시 칸쿤에서 개최된 WBC 창립 50주년 행사에 참석한 베테랑 심판들이다.
김장성은 언제나 그 모습 그대로 오염되지 않은 샘물처럼 한결같은 인품을 지닌 포청천 심판으로 정평이 나있고, 박찬희, 장흥민, 김인창 등을 배출한 복싱 명문 서울 한영고 출신의 김찬수는 1985년 프로에 데뷔, 10전7승(5KO)3패를 기록한 중견복서 였다. 그는 1987년 3월 국내웰터급 타이틀전에서 국가대표출신 장성호와 격렬한 타격전 끝에 판정패를 당했지만 3개월 후 12승(10KO)4패를 기록한 박재용을 2회 KO로 잡으며 제2의 황준석으로 주목받던 유망주였다. 하지만 1985년 12월 만 21세에 소리소문 없이 글러브를 벗고 사업가로 변신, 이후 2005년부터 심판활동을 이어왔다.
▲ 1991년 8월 KBC 라이트급 타이틀전에서 챔피언 송광식의 승리를 선언하는 이광우 심판 / 조영섭 관장
이광우는 조만식, 김재근 심판과 함께 올해 40년이 넘는 오랜 심판 경력을 보유한 최고참 심판이다. 얼마 전 김광수, 김진국 심판과 함께 1세대 마지막 심판인 정청운 씨께서 삶을 등지면서 최고 원로 심판이 됐다. 이광우는 태릉선수촌에서 이창길 ,지용주와 함께 주당(酒黨) 삼총사로 명성을 날렸던 밴텀급 국가대표출신이다. 이들은 태릉에 입촌할 때 중간에서 모여 거나하게 한잔 걸치고 들어오다 김성집 선수촌장에게 발각되어 퇴촌당한 흑역사의 주인공들이다. 불행하게도 이광우를 제외한 두분은 짧은 생을 살았다. 사우스포인 이광우는 1970년 8전7승(3KO)1패의 프로생활을 기록한 후 이창길이 소속된 동근체육관에서 1973년부터 지도자로 변신했다. 이후 국가대표 김인창(한국체대)을 발탁키도 했다.
그는 필자에게 1968년 멕시코올림픽에서 밴텀급 2차 선발전에서 밴텀급 대표였던 엄복삼을 꺾고 결승에 진출했지만 장규철을 누르고 올라온 김현치에게 판정패를 당한 경기가 가장 기억에 남는 경기라고 소회를 밝혔다. 라이트급에서 이창길에게 페더급에서 김성은에게 각각 패하면서 영역싸움 에서 밀린 김현치가 극심한 감량 끝에 밴텀급으로 출전한 자체가 김현치의 불굴의 짐념을 함축시킨 단면이라 할수 있겠다. 최종 선발전에서 결국 체중감량 실패로 탈락함으로써 장규철이 밴텀급이 출전권을 얻었지만 후학들은 반면교사로 삼아 배워야할 교훈이라 생각한다. 김현치는 은퇴 후 프로모터로 변신 박종팔, 유명우, 서성인, 오민근, 정종관, 황준석, 이승순, 박찬영 등 기라성 같은 선수들을 배출, 한국복싱 중흥기에 한축을 담당했다.
그럼 시간의 수레바퀴를 51년 전으로 돌려보자. 라틴아메리카에서 최초로 벌어지는 멕시코올림픽은 1968년에 개최되었다. 한국복싱에서는 11체급의 국가대표가 탄생했다. LF지용주, F서상영, B장규철, FE김성은, L이창길, LW김사용, W박구일, LM이홍만, M김승미, LH박형춘, H김상만 등이 주인공인데 당시 W급까지 7체급만 본선대회를 내보냈고 나머지 중량급 4체급은 출전시키지 않았다. 본선에서 장규철은 우간다 선수와 맞대결, 2회 한차례 다운과 함께 우세한 경기를 펼쳤음에도 흑인 심판 3명이 배정되는 바람에 1-4로 판정패를 당했다. 지용주도 결승에서 멕시코 인접국인 베네주엘라의 로드리게스에게 2-3으로 판정패 은메달에 머물렀는데 억울하기는 매한가지였다.
▲ 멕시코올림픽 국가대표로 선발된 LF급 지용주, LH급 박형춘 / 조영섭 관장
멕시코올림픽에서 한국은 복싱에서 은1 동1 획득했는데, 복싱은 한국이 출전한 종목 중 유일하게 메달을 획득한 종목이었다. 과거 한국체육을 대표했던 효자 종목 복싱이 대한체육회에서 찬밥신세를 받는 종목으로 전락했으니 통탄할 일이다. 당시 올림픽에는 대한아마복싱연맹회장 김택수, 강준호 감독, 국제심판 박인양 주상점 김명곤씨 등이 참석했는데 아이러니한 사실은 이 대회에 참석한 선수 임원들이 대부분 짧은 생을 삶을 살았다는 점이다. 세월에 장사 없고, 술에 장사 없고, 매에 장사 없다는 말이 있듯이 이런 저런 사연으로 그들 대부분 일찍 떠나갔다.
주상점 심판이 1981년 뉴욕자택에서 향년 55세로 삶을 마감하며 시작된 불운의 역사는 1983년 김택수 복싱연맹회장이 57세로, 1984년 박구일이 40세로, 1985년엔 지용주가 37세로 삶을 등졌다. 1990년엔 강준호가 68세를 일기로, 2000년엔 장규철이 54세, 2002년엔 이창길이 42세, 2004년엔 김사용이 59세, 2007년엔 김성은이 64세로 차례차례 하늘의 별이 되었다. 김명곤씨만 80세를 넘기며 소천을 했고 유일한 생존자 서상영(76세)은 미국에 거주하고 있다. 하지만 대표팀에 선발되고도 멕시코 올림픽호에 승선하지 못한 LM급 이홍만(78세), M급 김승미(74세) LH급 박형춘(79세) H급 김상만(78세) 네분은 현재까지 무탈하게 지내며 왕성하게 활동하고 있어 묘한 대조를 이룬다.
▲ 라이온 후루야마와 일전을 펼치는 이창길(오른쪽) / 조영섭 관장
연세대 출신으로 헬싱키올림픽 복싱 국가대표출신의 주상점 선생은 한국인 최초로 세계아마복싱 연맹 집행위원에 올랐던 두둑한 베짱과 카리스마를 겸비한 복싱인이다. 후에 국제복싱연맹(AIBA) 회장을 지낸 파키스탄의 안와르 초드리가 주상점 선생의 수행비서를 할 정도로 전설적인 인물이었다. 주상점은 1970년 아시아선수권 대회에 미들급으로 출전한 박형춘이 당시 소화제를 마시고 혈압이 치솟아 대회규정에 따라 실격될 위기에 봉착되자 임원들을 잘 설득하여 극적으로 경기를 치를 수 있게 만들었다. 이에 박형춘은 금메달을 획득 한국의 대회 종합우승에 일조하게 만들었고, 1972년 뮌헨올림픽 플라이급 8강전에서 유종만이 폴란드선수에 2-3으로 패하자 호주심판에게 득달같이 달려가 고성을 쏟아내며 격렬하게 항의하며 혼쭐 낸 일화는 지금도 회자되고 있다.
65세로 타계한 박인양 심판은 1980년 모스크바 올림픽에 심판으로 배정을 받았다. 당시 검찰청에 근무했던 그는 한국이 불참을 선언한 올림픽에 검찰청이 심판 참가를 불허하자 사표를 내던지고 모스크바 올림픽에 나선 소신있는 복싱인이었다.
어찌보면 죽음은 탄생과 마찬가지로 인생이라는 일직선위에 놓인 순서일 따름이다. 하지만 그들은 시간이라는 모래밭 위에 소중한 사연을 남긴 채 떠나갔다. 한 세대가 넘는 세월을 복싱이라는 울타리 매달려 지내다 보니 짙고 얕은 추억의 이파리들이 쌓이고 또 그것들을 들추고 회상해보면서 글을 쓴다. 누가 말했던가 추억은 재현될 수 없기에 아름다운 것이라고.
조명섭 / 문성길복싱클럽 관장·서울시복싱협회 부회장
아시아투데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