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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 七 부. 기념비,유허비류
1. 삼전도비 三田渡碑 유감
사진 5. 2004년 2월 1일,
장남 최임영, 손녀 최서연(당시 4세)과 함께 송파구 석전동에 있는 조선 인조 때의 삼전도비를 찾다.
가. 조선 인조 때의 삼전도비를 찾다
2004년 2월 1일 서울 가는 길에 장남을 설득하여 송파구 석전동에 있는 삼전도비를 찾았다. 조선의 왕이 청국황제에게 무릎을 굴었던 그 삼전도, 논이었으니 무릎까지 물이 채이진 않겠으나 진땅에 무릎을 꿀었던 인조의 마음은 어떠했을까. 총 높이 5.7미터, 비신이 3.95미터,비신의 폭이 1.4미터의 규모에 사적 제 101호인 삼전도비는 서울 송파구 석천동 289-3호가 그 위치. 시대는 조선 인조 17년(1639)의 일이다. 국내 어느 비보다 거대하게 세워진 大淸皇帝功德碑는 지금 보아도 그 규모에서 위압감을 느끼게 되는 청의 오만한 표징의 하나였다.
이 비는 병자호란때인 인조 17년(1639) 청태종이 군영에 있던 한강변 三田渡에서 인조가 항복한 사실을 기록한 유적비이다. 이 비는 한의 비(汗之碑)라고도 부르고, 비문에는 대청황제공덕비(大淸皇帝功德碑)라 적혀 있으나, 사적 지정 당시 이 곳의 지명을 따서 새로이 삼전도비라 하였다.
비석은 위에 두 마리의 용이 여의주를 희롱하는 모습을 조각한 용머리 장식과 비신이 하나로 되어 거북받침대 위에 세웠다. 비의 전면 우측은 만주문자 20행, 좌측은 몽고문자 29행을 뒷면은 모두 한문으로 되어 있다.
이 비의 문장은 재상 이경석(李景奭)이 지었으며 글씨는 오 준(吳竣)이 썼다. 이 비는 한 비 안에 세 나라 문자가 들어 있는 국내 유일한 비로서 역사적인 가치가 있는 유물이다.
1982년 12월 문화재관리국에서 세운 - 삼전도의 수난 -에는 ‘유구한 우리 겨레의 역사에는 만고에 길이 빛날 조상의 위업도 많고 자랑스러운 선현의 발자취도 흔하거늘 어찌 여기 삼전도(三田渡)의 욕된 비석의 옆자리에 부조(浮彫)를 세워 무엇을 기리고자 함인가 ! ’ 라고 자탄하고 있다. 부조의 장면은 인조가 신하들과 더불어 청태종에게 항복의 예를 올리는 자세를 취하고 있다.
조선 인조 14년 (1636) 12월 9일, 청나라 군사 10만이 압록강을 건너 우리의 국토를 침략하였으니 이 국난이 바로 병자호란이다. 임진왜란을 겪은 지 약 40년 뒤요 정묘호란을 겪은 지 8년 뒤에 우리 겨레는 다시 국난을 맞아 적군의 날카로운 침입을 꺾지 못하고, 인조는 남한산성으로 진을 옮겨 항전하였으나 군량이 다 하고 원군이 끊기어 45일 간의 항전 끝에 마침내 성문을 열지 않을 수 없었다. 이듬해 1월 30일 인조는 청의 강요로 삼전도의 수항단(受降壇)에 나와 청태종에게 항복하였다는 것이 대강의 내용이다. 당시 조선 인조에게 항복을 강요했던 청의 여진족은 현재 지구상에서 그 자취를 감추어버린 지 오래되었다. 그러나 지나간 역사는 오히려 반면교사가 되어 367여 년의 세월이 흘러간 지금 삼전도비는 아이러니칼하게도 당시의 민족적인 오욕을 깨우쳐주는 역사적인 유적으로 남아 있다. 그러나 현지를 찾아간 우리들 보기에는 산다는 문제에 집착하고 있는 서울 사람들의 기억에 관심을 둘 수 없는 상황에 놓여 있는 것 같다. 일 년에 누가 몇 번인들 삼전도비를 거론한 적이 있었던가. 옆 놀이터에 초등학생들이 놀면서 어린이 놀이터에 아저씨가 왜 왔는냐고 묻는다. 이날 땅은 몹시 질어 구두가 흙으로 범벅이 되었다. 구석구석에 쓰레기도 흩어져 있다. 아들과 손녀 손을 잡고 삼전도비를 배경으로 사진 한판을 찍은 것은 이 나라에 뿌리를 두고 있는 사람으로서 베풀 수 있는 최소한의 애국심인지 또는 나이든 사람의 슬픈 정서에서인지 여하간 그런 심사였다.
나. [매천야록]의 기록
그런데, 황 현의 [梅泉野錄]에 의하면, 삼전도비는 병자호란 다음해인 정축년(인조 15년, 1637)에 세웠다가 청나라와의 사대관계가 없어진 고종때는 迎恩門과 함께 없애버렸다 한다.
병자호란 다음 해인 丁丑年(1637,인조 15)에 仁祖가 남한이다. 죽은 재상 이경석이 글을 지었다. 이른바 天子가 10만명을 이끌고 우리나라를 정벌했다는 내용인데,몽고글자로 썼기 때문에 우리나라에는 읽을 수 있는 사람이 없었다. 이제 청 나라와의 관계가 모두 끊어지자 사대의 의절도 없애버렸다. 그래서 영은문과 삼전도비도 아울러 없애버린 것이다. 김가진은 김상용의 후손인데 팔을 걷어 붙이며 말했다.
“ 이제야 족히 여러 왕대에 걸쳐 당했던 굴욕을 씻고 臣子의 사사로운 원수도 갚게 되었다.” 개화의 의식이 어떠한가.
다. 다시 보는 三田渡碑
삼전도비는 大淸皇帝功德碑로 되어 있다. 청이 조선을 침략하여 정신적,물질적인 손상을 크게 입히고 인조의 항복으로 전쟁이 끝났음에도 삼전도비에는 그와는 반대로, 조선이 청에 대하여 유대를 무너뜨렸음(以壞和自我)에도 전쟁을 마감시킨 것은 寬,溫,仁한 聖皇帝때문이라고 한다. 그것은 조선군이 사면초가에 몰려 패하는 것은 서릿바람이 가을낙엽을 날리는 것과 같은 일인데 황제는 “항복하면 짐이 너희를 살려줄 것이고 그렇지 않으면 도륙하겠다”(來 朕全爾 否 屠之)고 하며 넓은 아량으로 예를 갖추고 사랑을 베풀었다는 것이다. 아울러 조선의 소국은 대국에 대하여 지은 죄가 오래되었다고 하면서 깊은 반성을 가장했다. 오늘날 이러한 대목을 읽는 국민이면 누군들 격분하지 않을 사람 있겠는가. 더구나 명(銘)에는 용맹한 청의 십만 대군을 일러 호랑이와 표범과 같다 하였고, 황제에 대하여 우리 백성을 赤子(皇帝班師 活我赤子)라고 표현하고 있다. 청의 황제 앞에 조선백성은 발가벗은 어린아이와 같다는 것이다. 철없고 어리석은 백성이라 청나라 황제의 뜻을 이해하지 못했다는 것이다. 식민지시대 이광수가 수양회사건으로 재판을 받을 때 일본 재판관 앞에서 ‘나는 천황폐하의 적자’라고 하자 재판관이 ‘네가 어째 일본대제국천황폐하의 적자냐?’라고 반문한 일이 있다 한다. 해방 후 이광수의 친일을 성토할 때 가장 치명적인 사례가 ‘적자’라는 말이었다. 다만 조선국이 청에 대하여 고마워한 것은 황제가 군대를 거두어 조선국 임금이 서울로 돌아갈 수 있게되었음은 물론 백성들이 농사를 짓게되었으며 국가는 옛 모습을 되찾아 사직을 새롭게 할 수 있게 되었다는 것이다. 대청황제공덕비에는 가능한 모든 치욕적이고 굴욕적인 표현의 극을 다함으로써 생명의 보전을 확보할 수 있었음을 하느님처럼 극존한다는 내용이다. 조선역사에서 가장 부끄러운 부분을 기록하고 있는 증언이다. 그러함에도 해방 후 한국정부는 국경문제, 국토회복문제, 역사바로잡기 등 민족의 근원적인 과제를 소홀히 한 채 이데올로기에 의한 좌와 우의 대립으로 국내문제에 치열성을 보였던 것은 잘못된 시각이었다. 따라서 국가가 위기에 처했을 때 조선인조 때 세운 삼전도비문을 교훈으로 삼는 것도 지혜의 하나가 될 것으로 믿는다. 대청황제공덕비명의 처음과 끝부분을 소개하여 참고로 삼고자 한다.
하늘은 서리와 이슬내려
숙살하고 생육하는데
황제께서 그걸 본 떠
위엄과 은덕을 아울러 베푸셨네
황제께서 동국을 정벌할 때
십만대군으로 우르릉 쿵쿵
흡사 호랑이와 표범이었네
(중략)
우리 임금 서울로 돌아간 것은
황제의 베려였고
황제는 군대 거두어
우리 백성 살리시고
흩어진 우리 불쌍히 여겨
농사 지어라 권하였네
국가는 옛 모습 되찾고
사직은 새로워지니
마른 뼈에 살이 다시 붙고
얼었던 풀뿌리가 봄을 만났네
드높은 비석을
큰 강가에 세우니
만세 삼한은
황제의 덕이어라
숭덕4년(인조17년,1639) 12월 초8일에 세움
2 윤봉길(尹奉吉, 1908~1932)生平事迹簡介
윤봉길의거현장
그는 1932년 4월 29일 일본 략군이 이 곳에서 상해사변 전승 축하식을 거행할 때 하객으로 가장하고 행사장에 들어와 폭탄을 투척하여 상해주둔 일본 파견군 사령관 시라카와 대장 등을 폭사시키고 여러 명의 일본 주요 관원에게 부상을 입혔으며 현장에서 체포되어 1932년 12월 19일 일본 사네자와에서 장열하게 일생을 마쳤다. 훙커우공원
尹奉吉, 1908년 6월 21일 生于忠淸南道 早年使投身于抗日光復團活動 1930年流亡中國1932년 4월 29일 日本侵掠軍在此擧行....閱兵大會 尹奉吉 入場...이하 생략
3. 일송 김동삼 어록비
안동댐 주변 옛마을을 ‘달마을’이라 불렀다 한다. 그 달마을에 운치있는 다리를 놓았는데 月影橋라 한다. 안동호 호반에 멋을 부려 목재로 놓은 다리는 호반 이쪽과 저쪽을 잇는 기능도 하지만 호반을 건너며 흐르는 댐물을 보는 것은 운치가 있다. 그 호반에 몇 개의 비가 서 있으니 일송 김동삼의 어록비와 정부인 안동장씨 시비가 그것이다.
나라 없는 봄
무덤은 있어 무엇하는냐
내 죽거든 시신을 불살라
강물에 띄워라
혼이라도 바다를 떠돌면서
왜적이 망하고
조국이 광복되는 날을
지켜보리라
(서대문 감옥 유언에서)
一松 金東三 (본관 義城 본명 貞植 1878-1937) 선생은 고향인 내앞(川前)에 협동학교를 세워 구국계몽운동을 폈고 나라를 빼앗기자 서간도로 망명하여 독립운동기지를 건설하였다. 선생은 1911년부터 만주에서 경학사.부민단. 한족회를 조직하여 독립운동의 기초를 닦았고 백서농장장.서로군정서참모장.대한통의부 총장. 정의부 외교위원장을 맡아 독립전쟁을 이끌었으며 국민대표회의 전만통일회의 .혁신의회 등의 의장으로 독립운동통합을 추진하였다
1931년 하얼빈에서 체포된 선생은 1937년 서대문감옥에서 순국하였다. 선생의 삶이 민족의 빛이요 희망이었기에 萬海 韓龍雲 중심의 동지들에 의해 사회장으로 모셔졌고 식민지에 묻히기를 거부한 선생의 뜻에 따라 유해는 한강에 뿌려졌다 정부는 선생의 공을 기려 건국훈장 대통령장을 추서하였다1999년 11월 4일/ 김희곤 짓고/ 이동익 쓰고 /안동청년유도회 세우다
4. 一石 이희승 3.1 운동비문
안동이라 어찌 삼일운동기념비가 없겠는가. 마침 一石 李熙승 선생이 글을 짓고 글씨는 여원구 씨가 쓴 기념비가 있다. 수필가 시인이며 국문학자인 일석 선생의 비문을 읽을 수 있다는 것은 행복한 일이다.
낙동강이 흐르는 맑은 호숫가에 숭고한 三一精神을 기리는 紀念碑가 아침 햇살을 받고 높이 솟아 있다.
아 겨레들이여
씩씩한 항일투쟁의 혼이여 一九一九년 三월 一일 온 겨레는 自由를 찾기 위해 獨立萬歲를 산천이 떠나가도록 외치고 이 喊聲은 지축을 흔들었다.일제의 무자비한 총칼에 맞서 분연히 일어선 우리의 열화같은 의지를 누가 감히 막을 수 있었으랴 억울하게 나라를 빼앗긴 백성들은 그 울분을 참다 못해 국내외에서 三一萬歲를 부르며 일어서게 되었고 그 항쟁의 불꽃이 조국광복의 씨앗을 민중의 가슴속에 뿌려 놓았으며 곧 그 씨앗이 해방과 자유의 기쁨을 얻게한 것이다.
안동군민들은 三月十二日의 봉기 계획이 탄로되자 닷새 후인 十七日 임동 예안을 비롯 三月 二十三日에는 안동읍내에서 수십군중들이 도다시 만세를 불러 수십명이 피살되었으며 백명이 투옥 부상당하였다. 이렇듯 잔인한 주검과 옥고를 겪으며 선열들의 피의 대가로 해방을 맞이한 후 어언 四十年이 지난 오늘 안동 유도회가 발의하고 민족정신을 모태로 창제된 동아일보사 안동시 군민들의 애국단심을 합쳐 유서깊은 이 곳에 삼일정신기념비를 건립하여 거룩한 삼일운동기념비를 건립하여 거룩한 삼일정신을 길이 만대에 드높이려 한다.
거룩한 三一精神이여
洛東江 물처럼
永遠히 맑고 푸르고 줄기 차리라
서기 1985년 8월 15일/
5. 독립운동가 왕산 허 위(許蔿) 유허비
가. 왕산(旺山) 허위
허위 (許蔿 , 1855 - 1908) 선생은 구미시 임은동에서 태어났다. 보관은 김해이고 호는 왕산이다. 한말 일제의 침략에 대항하여 의병을 일으킨 의병장이다. 5
1908년 10월의 유서에는 “나라와 백성의 욕됨이 이에 이르렀으니 죽지 않고 어이하랴/아버지 장례도 치르지 모하고 /나라의 주권도 회복하지 못했으니 /충성도 못하고 효도도 못한 몸이니 죽은들 어이 눈을 감으랴.”를 남기고 있다.
나. 왕산 허 위의 유허비문
배달의 푸른 얼이 삼천리에 굽이쳐
화랑의 가슴에 뛰고
선비의 핏줄에 여울져
이제도 여기 맥맥히 흐르고 있다
근세 조선 말기
왜적이 이 땅을 짓밟아 올 때
항쟁의 횃불을 높이 들어
겨레의 넋을 밝히고
뜨거운 피를 바쳐
반만년의 기상을 살리신 분을
여기 새기니 이 고을이 낳은
의병장 허 위(許蔿)선생이시다
선비의 넋은 안으로 스미어 겨레 마음의 기둥을 굳히고 밖으로 떨치어 침략자를 겨누는 매운 서슬이 되나니 왜적이 날로 그 모진 이빨을 드러내 우리의 주권을 앗아갈 때 선생은 책을 덮고 일어섰다. 1896년 3월 격문을 사방에 날려 의병을 일으키고 김천을 거쳐 한양을 향해 진격하였다.
그러나 의병의 충청도 진천 땅에 이르렀을 때 뜻밖에도 해산하라는 왕명을 받게 되어 눈물을 머금고 군사를 흩었다.
뜻을 꺾음이 아니요 나라의 법도를 살리기 위함이다. 다시 책 읽고 밭갈이 삼년, 안으로 조정은 더욱 병들고 밖으로 숱한 외국 세력들이 소용들이 칠 때 나라의 특별한 부름을 받아 벼슬길에 나아가니 1899년이다. 평리원 재판장 의정우참판 등의 관직을 지내며 나라 일에 정성스럽고 공번되어 일호의 티끌도 용서하지 않았으니 도도한 탁류 속의 한 가닥 맑은 샘이라 넘어져가는 나라를 바로 세우고 숨가쁜 백성을 살리기 위해 교육진흥, 군정혁신, 수력발전, 토지개혁, 산림보호, 석탄사용 등 진실로 백년 앞을 내다보는 밝고 넓은 경륜을 내세웠다.
그러나 기둥 하나가 받치기엔 큰 집이 너무 기울어졌다. 왜적은 침략은 한 층 심해지고 반역의 무리들이 더욱 날뛰니 다시 격문을 펴 그들을 꾸짖다가 왜병에게 잡히어 낙 달의 옥고를 치른 뒤 벼슬을 내던지니 1905년이다.
정치가로서 그의 포부를 펴지 못한 선생은 경상, 충청, 전라 세 땅이 맞닿은 三道峰 밑에 숨어 각도의 지사들과 연락하며 새로운 무장 투쟁의 길을 찾았다.
1907년 나라의 심장부인 경기에서 두 번 째 깃발을 들어 양주, 포천, 철원, 강화 등지를 달리며 적과 맞서 싸웠고 온 나라에 흩어져 있는 의병들을 묶어 연합진용을 만들고 선생은 그 軍師長이 되었다. 적 침략의 지점인 이른바 흉장부를 무찌르고 수도를 탈환하여 왜적의 세력을 이 땅에서 몰아 내려는 작전으로 서울을 향해 진격하였다.
그러나 다른 의진들은 약정한 시간에 닿지 못하여서 선생이 몸소 거느린 삼백의 결사대만이 동대문 밖까지 쳐들어가 고군 분투하다가 물러섰으니 나라의 아픔이요 역사의 슬픔이다. 동대문에서 청량리에 이르는 이 피어린 길을 선생의 호를 따 旺山路라 정하였음은 그 구국정신을 길이 살리기 위함이다. 다시 일어설 것을 꾀하며 경기 강원 일대에서 활약하다가 1908년 6월 영평군 용두에서 왜병에게 잡히니 하늘은 정녕 이 나라를 버리었단 말인가. 적장마져도 선생의 애국심과 인품을 우러러 구명 운동을 폈지만 그 해 10월 21일 쉰 네 살을 일기로 서대문 옥에서 기어이 가시고 말았다. 온 백성들의 슬픔이 사무쳐 하늘은 빛을 잃었고 삼천리의 산과 물도 노여워 울부짖었다.
선생은 1855년 4월 2일 이 고을 구미 땅 임은리에서 나시니 대대로 선비의 집안이요 許 祚님의 넷째 아들이다. 의롭고 슬기로운 내림을 이어받아 어려서부터 뜻이 높고 효성이 극진하였으며 학식과 덕망이 당대에 떨친 맏형 薰에게 글을 배웠다. 슬하에 學 , 瑛, 埈, 국의 네 아들을 두었으니 어버이 가시고 나라 망하자 숙부 겸(兼)을 따라 북만주 해삼위 등지에서 광복운동에 활약하다가 모두 그 곳에 뼈를 묻었으며 남은 동지들도 나라 안팎에서 투쟁을 계속하여 광복의 날을 맞이 하였으니 한말 구국운동은 임에서 샘솟아 그 줄기를 이루었다. 가시고 예순 여덟 돌, 이 날을 가려 선생의 넋이 어린 금오산 자락에 높이 새겨 부르노니
세기를 앞지르는 밝은 눈으로 백성을 걱정하고
삼천리를 뒤덮는 매운 뜻으로 원수와 싸웠다
겨레의 선각자요 선비의 본보기니
광복 투쟁의 등불이요 민족정기의 수호자다
그 높은 듯 금오산에 솟구치고
그 장한 길 낙동강에 굽이쳐
길이길이 이 땅에 푸르리라
글 정휘창
다. 허 위 선생 절명구
“忠義로운 영혼은 마땅히 하늘 나라에 오를 것이다
비록 지옥에 덜어진들 어지 너희들의 기도를 받을 것이냐”
1908년 10월 21일 /왕산 허 위 선생이 형장에서 명복을 비는 왜승을 꾸짖어 물리친 절명구임/1986년 8월 15일 허왕산선생기념사업회장 강주진/글쓴이 이채진
(4) 을사조약 후의 일본 규탄격문
한국이 비록 쇄약해도 이천만 인구가 한마음으로 분하게 여기고 의기를 내어 죽게된 곳에서 삶을 구하고 망해가는 때에 보존을 도모한다면 우리의 약함이 어찌 걱정되며 저놈들의 강포(强暴)함이 어찌 두려우랴. 비록 기운이 다하고 힘이 빠져서 약함이 강적을 당해내지 못하더라도 손이 묶여서 죽고 이리를 움추려서 망하는 것보다는 오히려 나을 것이다. 일인들의 탐욕스럽고 난폭한 행동을 어찌 백에 한 둘을 거론하리오마는 그중에서 다음과 같이 가려 적어서 13도 동포에게 통고하노니 목전 하루만의 편안함을 생각하지 말고 힘을 합치고 의분을 내어서 우리 종사를 공고히 하고 우리 생민을 보호하여 천하 만방에 수치를 면하게 하라
1905년 을사조약 체결 후 일본을 규탄한 격문의 일절 /대한민국 의병대장 왕산 허 위(許蔿)
6. 식민지시대 대구사범항일학생운동비
가. 왜관학생사건 기념비
1)위치: 경북 왜관읍 왜관초등학교
2)비문
이 자리는 1939년 7월 당시 대구사범 심상과 5학년생들이 의거를 일으킨 이른바 왜관학생사건의 현장이다. 일본의 혹독한 억눌림에 시달리고 있던 때인지라 광주학생사건의 10주년을 맞아 그 정신을 되새기면서 일치단결하여 그들에게 우리 민족의 분노를 터뜨린지 이제 45년이 지나갔다. 돌이켜보니 그 때의 감개가 새로와져 여기 자그마한 돌이나마 하나 세워 기념하는 뜻을 나타내어 본다.
1984년 11월 5일
대구사범 심상과 7기생이 세우고
후배 동애 소효영은 쓰다
3) 왜관 항일학생사건에 대하여
필자는 지금의 왜관초등학교 교문 왼쪽에 왜관학생사건 기념비가 있는 것을 보고 매우 의아해한 적이 있다. 더구나 일제식민지시대 대구사범심상과 학생운동비가 왜 여기 있을까 하고 비문을 읽은 적이 있다. 1939년 7월 심상과 5학년생들이 항일의거를 일으킨 장소였다. 그러나 사건내용을 알지 못했던 필자는 혹시 왜관초등학교학생이었던가 하는 의문은 사라졌지만 그리고 대구사범생들의 항일학생운동은 알고 있었으나 왜관과 무슨 관계가 있는지 속으로 의문을 품게 된 것이다.
그 후 2004년 9월에 대구 파크공원에 있는 독립운동기념관인 조양관을 방문한 일이 있는데, 기념관 사무국장의 대구부고에 역사박물관을 개관하다는 말을 전해 듣고 같은 해 11월에 역사박물관을 찾은 것이다.
일제강점기 한국에는 경성사범,평양사범 그리고 대구사범이 있었다. 3개 사범학교의 정원은 300명, 이 중 한국학생200명, 일인학생 100명을 모집했는데 대구 사범의 경우 주로 기숙사생활을 했다 한다. 기숙사생할은 학생들로 하여금 황민화교육을 꾀하기 위하여 수용한 것인데 결과는 오히려 항일정신을 키우는 장소가 되었다는 것이다. 특히 경성대학을 졸업한 온건한 사회주의자 玄俊赫 선생과 같은 경성대를 나온 廉廷權 선생의 부임 그리고 조선어시간에 근엄하면서도 민족적 감화를 주었던 金永驥 선생의 지도는 순진한 학생들로 하여금 민족정신을 체질화하는데 크게 기여했다는 것이다. 지금 80고령에도 사범학교심사과 역사관을 주관하고 있는 이장환 관장은 말하기를 ‘... 그러나 학생들로 하여금 민족정신을 갖게한 데는 무엇보다 당시의 학교 분위기였다’고 술회한다. 그리고 당시 일인 교사 중 岡本, 前園 같은 교사는 한국학생을 차별할 뿐 아니라 민족적인 반감을 갖도록 멸시하던 차, 실습을 마친 학생들이 왜관에서 10일 간 勤勞報國隊라는 강제노동을 당하게 된 것이다. 중일전쟁 중이던 일본은 당시의 물자보전을 위해 학생동원을 심하게하였던 것인데 대구사범생 전원은 巴山小學校(지금의 왜관초등학교)에 숙소를 정하고 5년생인 7기생은 日人小學校(지금의 읍사무소)에 숙소를 정하였다. 작업은 낙동강철교를 넘어 왜관과 약목 사이의 鐵路複線工事를 위한 堤防構築인데 토사운반을 등짐으로 날라야하는 일로써 일인 학생이 대부분이었던 연습과 학생에 비해 작업량이 엄청나게 많았던 것은 물론 연습과 학생이 심상과 4년 이하 생들을 지휘하면서 부당한 대우를 하므로 충돌이 일어나게 되고 감독교사에게 항의했으나 별무효과이므로 다시 회의를 하여 집단항의를 하게된 것이다. 학생들은 교사들의 비교육적인 처사와 한국학생차별에 대한 그간 쌓였던 민족감정이 폭발한 것이다. 그 중에도 일인 교장 市村은 학생들을 엄하게 꾸짖으면서도 학생들의 입장을 이해한다는 것으로 여러 가지 감화를 준 인물로 남아 있다. 그의 노력으로 최소한의 처벌을 받았으나 결국 퇴학7명,정학11명 나머지는 전원 근신처분을 받았다 한다.
왜관학생사건 기념비는 1939년 7월에 일어난 대구사범학교 항일학생운동사건으로 하여 현재의 왜관초등학교 교정에 세워지게 된 것이다. 필자는 카메라에 기념비를 몇 번 찍고 돌아오면서 햇빛에 모자도 쓰지 않은 채 걸었다. 왜 그리 착잡한 마음이었는지 뜨거운 빛살이 뜨거운 것이 아니었다.
나. 대구사범학교 항일학생의거 순절동지 추모비
1) 답사: 2004년 11월
2) 위치: 경북사대부설중·고 교정 역사관 입구
3) 추모비문
겨레의 역사 오램이 자랑이 아니라, 그 역사 속에 참됨이 살았음이 자랑이요 그들의 거룩한 행적이 겨레의 어려운 고비를 올바르게 이끎으로 해서 귀한 것이다. 여기, 영원히 이 겨레의 자랑이 될 다섯 별이 있으니 그 이름, 강두안, 박제민, 박찬웅, 서진구, 장세파
1940년대의 전반을 이 겨레의 생명이 가위 풍전등화의 위기에 놓이게된 때, 일제의 야만스런 민족말살정책이 드디어 우리의 말과 성까지를 못쓰게 하자 굴욕을 죽음보다 싫어하던 우리들 대구사범 서른 다섯 피끓는 동지들은 조국과 자유를 되찾기 위하여 1940년 11월 23일 분연히 뭉쳤으니, 이른바 다혁당, 문예부, 연구회라 기관지 반딧불, 학생 등이 가물거리는 민족정신에 기름을 붓고 학창과 교단 또는 대중 속으로 행동의 폭을 넓혀 민족의 얼을 일깨우고 동지를 규합하여 세계정세와 광복의 날을 내다보며 동분서주 하다가 일제의 악랄한 손에 서른 다섯이 모조리 대전감옥으로 끌려가서도 해방의 날까지 싸움을 그치지 않았다. 스물 안팎의 애띈 몸들로서 온갖 박해와 몰상스러운 고문을 끊임없이 당하면서도 끝내 지조를 굽히지 말자 버티다가 원통하게도 다섯 동지들은 상처입은 몸을 가누지 못하고 한밭 감옥 독방의 이슬로 사라졌으니 그 원한 천추에 사무치리.
이제는 광복된 조국땅 행여 그 이름 잊힐세라 살아 남은 우리들이 정성모아 이 곳 옛 배움터에 돌을 세워 님들의 빛나는 행적과 자랑스런 이름을 깊이 새겨 영원히 우러러보려 한다. 고귀하고 굳센 님들의 얼 역사와 더불어 겨레의 심장 속에 길이 길이 숨쉬리.
1973년 11월 3일/ 대구사범항일학생의거생존자 일동
다. 대구사범 학생독립운동기념탑 비문
1) 위치:대구시 달서구 두류공원 내
2) 답사:2002년 12월 18일 (수)오후
3) 기념탑 건립문
눈서리가 땅을 덮어도 송죽은 푸름을 바꾸지 않고 총칼이 목숨을 겨눠도 지사는 뜻을 굽히지 않나니, 자연은 늘 푸른 나무들에 의해 아름다움을 더하고 인류역사는 불의에 항거하는 지조로 인해 바른 길로 나아 감이라.
일제 군국주의 망령이 이 땅을 침탈하고 2천만 백의 민족을 노예로 삼음에 4천 유여년의 유구한 혈성의 민족자존은 분연히 분기하였더라. 자유와 평화를 위해 피흘리고 차디찬 영어에서 신음했으니 자유는 만물의 생명이며 평화는 인류공영의 기본권이라 그 누구도 타의 자유와 평화를 저상커나 늑탈치 못함이 만유의 대도이다.
대구사범학교는 일제치하 1929년 개교 당초부터 반제반일에 앞장섰던 이 고장 선비의 기절을 이어받아 민족의식의 뿌리를 깊이 내렸고 고매한 스승인신 현준혁 선생과 김영기 선생의 감화로 항일운동의 봉화를 올리기 시작했다. 1931년 심상과 1.2.3 기생들의 비밀조직 사회과학연구회의 ‘독서회’ 활동이 탄로남으로써 32명이 체포되어 3명은 징역 2년 15명은 징역 1년 여타는 기소 유예로 퇴학 처분을 당했고,1934년에는 3.4.5기생들의 독서회 활동이 발각되어 20여명이 처벌되었다. 1938년 일본이 학교교육에서 조선어과목을 폐지하자 6기생 18명이 이에 항거하여 우리말 보존을 위한 ‘민요집’을 발간하여 교재로 사용하다가 왜경에 검거되;어 혹독한 고문을 당하기도 하였다. 이와같이 선후배로 승계된 항일운동은 1939년 여름 방학때 7.8.9 기생 전원이 왜관의 경부선 철도 복원공사에 동원되자 7기생들이 비인도적 강제노역에 항거하는 사건을 일으켜 18명이 퇴학 또는 정학처분을 당했고 이를 계기로 9기생 20여명은 비밀결사 백의단을 조직하였다.
당시는 바야흐로 군국주의 일본이 대륙침략에 광부하여 제2차 세계대전으로 치닫고 있던 때로서 3천리 강토,2천만 민족을 총칼로 위압하던 공포의 시기였다. 그런데도 오직 조국의 독립과 자유를 쟁취하기 위한 지고지순한 젊은 학생들은 열화와 같은 용기로 감연히 일어나 1940년에는 8.9.10기생 11명이 뜻을 모아 ‘문예부’를 조직했고, 다음 해에는 8기생 14명이 ‘연구회’를 조지하였으며 같은 해에 9기생은 백의단을 해산하고 독립의식이 투철한 정예17명으로 ‘다혁당’을 조직하여 민족의식을 일깨워 결속을 다지는 한편 스스로 실력을 길러 둠으로써 일본이 패전하는 날 결연히 일어나 결정적 역할을 수행할 수 있도록 준비를 갖추기로 하였다.
더군다나 졸업후에는 교단에서 학생과 학부형에게 애국독립사상을 고취하는 민족운동을 은연중에 지속키로 하였던 것이다. 이는 강요되었던 소위 황국신민의 양성을 거부하기로한 한 중대한 사건이었다. 그러나 불행하게도 1941년 8월 기관지 ‘반딧불’ ‘학생’이 탄로됨으로써 무려 300여명이 검거되고 그 중 박효준 이태길 강두안 박찬웅 이동우 문홍의 류흥수 박효준 이주호 조강제 김근배 임병찬 안진강 장세파김영복 이무영 최낙철 윤덕섭 윤영석 이원호 오용수 박제민 양명복 권쾌복 배학보 최영백 이종악 서진구 이홍빈 김효식 김성권 이도혁 문덕길 최태석 고인옥 등 35명은 2년여의 예심을 거쳐 대전지방법원에서 1943년 11월 치안유지법 출판법육해군형법 위반으로 징역 7년에서 2년 6개월의 실형이 선고되어 대전감옥에서 복역하던 중 8.15광복으로 출옥하였다. 그러나 통한에 사무치는 애석한 일은 강두한 박제민 박찬웅 서진구 장세파 등 5명이 광복의 그 날을 보지 못하고 옥중에서 순국하였으니 일제의 만행과 망국의 슬픔을 어찌 잊을 수 있겠는가.
대구사범 학생독립운동은 이에 그치지 않고 이어져 다시 10,11기생 비밀독서회원 9명은 위 문예부에 가입하여 선배들이 과업을 계승 활동하다가 체포되어 기소유예로 석방되었으나 끝내는 퇴학처분을 당하였으며, 그 후에도 12,13 기생 12명의 독서회가 조직되어 활동하는 등 대구사범의 항일민족운동은 8.15 광복의 그날까지 면면히 계속되었다. 대구사범 학생 항일 독립운동은 1930년 후반부터 40년대초에 걸친 암울했던 시기에 일제의 국가총동원법과 치안유지법이 난무하던 가혹한 시대적 배경하에서 일어났고 혹독한 탄압속에서 줄기차게 투쟁을 전개한 연면성이 그 특징이다.
특히 이 운동은 독립을 쟁취하는데 그치지 않고 광복 후까지 대비한 미래지향의 지성적 학생운동으로서 항일독립운동사에 찬연히 빛나는 새로운 장을 열었던 것이다.
여기 그 공적을 기념하기 위하여 탑을 높이 세우고 그들의 위대한 업적과 이름을 이 비에 깊이 새기노니 불굴의 그 애국 충정 길이길이 민족의 역사와 함께 영원할 지이다.
1977년 11월 3일/ 문학박사 오세창 지음/설계 및 조각 경북대학교 예술대학 교수 변유복 / 작품명,‘97-11 한빛’ : 독립운동을 한 애국선열들과 이를 계승하는 젊은 후손들이 함께 약진하는 모습/ 2차기록 : 2003년 1월 13일 (월) 오후
4) 여담
대구 두류공원 내 지금의 경북사대부중·고인 대구사범학생독립운동기념탑 주변에는 서른 다섯 기의 石柱가 있어 탑을 에워싸고 있다. 이것은 당시의 희생자 35인을 상징하는 것이다. 그리고 조각가 유복자 변유복은 ‘97-11 한빛’을 조각했으나 넉넉지 못한 작품료를 받았고 문희갑 당시 대구시장의 배려가 있었다고 한다. 역사관에는 대구 심상과 학생 17년간의 항일독립운동일람표가 있는데 이를 연차별로 보면, 심상과 1기의 제1차 독서회사건,2,3기의 제2차 독서회사건, 6기의 민요집사건, 7기의 왜관학생사건, 8-9기의 문예부 사건, 8기의 연구회사건,9기의 다혁당사건 등을 들 수 있다. 그리고 10기 김근배, 12기 안병수(3년형)의 이름도 있었다. 전시장 유리상자 속에는 안병수가 강점기시대의 학생제복을 입은 사진이 하나 있다. 너무나 애띈 얼굴에 일제군복으로 디자인한 학생제복에 군모인 학생모를 쓰고 아직도 선연히 살아 있는 것이다.
7. 박희광 지사 동상비문
-민족혼의 횃불을 밝히리라 -
가. 시비
고구려 옛터 만주 벌에
망국의 한 피로서 물들이며
스무 해 모진 옥고 젊음을 불살라
마침내 조국광복 되찾으시고
일흔 한 평생 의롭게 살다
이제 말없이 이곳에 서셨도다
조국과 겨레 앞에 당당한
숭고하고 고귀한 그 넋은
언제나 민족혼의 등불이 되어
우리 앞길 드높이,더 크게, 더 밝게
비춰주리라
1997년 8월 15일 /광복회장 권 쾌복
나. 비 음
박희광 선생은 1901년 2월 15일 경북 구미 선주동(봉곡)에서 출생, 주로 만주에서 독b립운동을 하다 해방 후 귀국, 1970년 1월 22일(70세) 일기를 마쳤다. 그는 1966년 만주 봉천성 남성자학교를 졸업하고 1919년 18세 때 상해임시정부 지령에 따라 만철연선에서 수 차례 일본군 공격작전에 참가하고,1920년 봉천 일본 총영사관에 폭탄을 투척하는 등으로 1924년 - 1943년 여순 형무소에서 20여년 간 복역하고 출옥한 애국지사였다. 대구두류공원에 있다.
8. 중호 임용상 의사 비문
가. 비문
세상에는 명리에 팔려 불의를 서슴치 않고 행하는 이가 있고 의를 위하여 목숨을 홍모와 같이 가볍게 여기는 이가 있다. 그런데 전자는 언제나 항하사ㄹ처럼 많지만 후자는 항상 효성보다도 드문 것이 이 세상의 실태인 것은 애닯은 일이 아닐 수 없다. 그리고 이 현상은 난세일수록 더욱 심한 것을 보게된다. 구한말 이씨왕조의 국세가 날로 기우러져가고 왜적의 침략으로 민족의 운명이 누란과 같은 위국에 빠져들어 갈 적에 어던 사람이 감히 이에 항거하여 궐기하였던가 의사가 아니고 누구였겠는가 중호 임호상 의사는 효성 중의 한 개의 별이요 의사 중에도 시처였던 것이다.
의사는 용모가 정수하고 천품이 강직하며 자질이 영오하여 경서에 통달하고 특히 병서에 조예가 깊었다. 1905년 시년이 이십구세때에 급진적으로 제국주의에 광분한 왜적이 강압적으로 을사 늑약을 맺어 침략의 독아를 노골적으로 들어대게 되매 이 소식을 ㅇ ㅇ 에 분격한 의사는 분연히 향리를 떠나 동해일우에 있는 영덕군 청련사에서 포수 즙포군 등 뜻있는 인사들과 함께 널리 의병을 규합하여 창의군을 편성하니 그는 곧 창의대장으로 추대되었다. 이후 영덕 강구 흥해 영일 장기 등지에서 유격전술을 사용하여 왜병과 용감한 혈전을 여러 번 거듭하여 왜적을 격멸하였다. 1906년에 도찰사 정환직 선생이 광무황제의 밀조를 받고 그의 아드님 정련기 대장으로 하여금 포의진을 창건하게 하매 의사는 창의군을 이끌고 그의 의진에 입진하여 울산 언양 양산 밀양 창녕 진주 경산 청도 신녕 의흥 군위 의성 등 영남 가가지에서 전후 7년 간 수십회의 역전을 통하여 피어린 고전분투로 혁혁한 전과를 거두었다.1909년 5월 20일 청하지방에서 왜병을 공격하다가 중과부적으로 가열한 격전 끝에 그들의 포위망에 걸려 잡히게 되었다.3년형을 받고 투옥되었으나 한일합방을 꾀하는 일제 통감부의 회유정책으로 이듬 해 4월에 석방되었다. 의사는 다시 엣 동지를 규합하여 불굴의 정신으로 중군에 잔준호 의사 참모에 권석출 의사로 의진을 정돈하여 항전을 계속하다가 의성 안평 전투에서 다시 체포되어 한일합방으로 사형을 겨우 면하고 십년형의 선고를 받아 대구감옥에서 영어의 생활을 게속하다가 3일운동 다음 해에 형기를 마치고 출옥하였다.
의사는 그 후에도 계속 독립운동에 정진하여 혹은 국내에서 혹은 만주에 왕래하며 독립군의 군자금조달에 전력하다가 고희에 임한 노구로 광복을 맞이하여 정의는 이긴다는 감격과 환호의 절규를 올렸던 것이다.의사는 일생의 전 생애를 오직 조국광복을 위하여 전후 세 차례에 걸쳐 15년 간의 옥고를 겪고 산하 백전에 7년 간의 혈전고투는 우리 겨레의 영원한 사표가 될 것을 확신하여 이에 후생의 귀감을 삼고자 이 동상을 세운다.
1972년 5월 일 /글지은이 문학박사 이희승 주관 선열기념사업회 조경한/ 위치: 대구 앞산공원내 반공기념관 주변
9. 우재 이시영 又齊 李始榮 순국기념 탑문
가. 비문
서라벌 언덕에서 고구려 옛벌까지 겨레의 얼을 가꾸고 지키신 분이니 이름은 이시영이요 아호는 우제이다.1882년 1월 10일 대구에서 나시니 선비의 집안이요 이관준 님의 둘째 아드님이다. 크고 매운 마음은 나라 사랑 불꽃이 되어 동녘 삼천리와
대륙 만리를 휘달리면서 침략자 일제와 싸웠고 1914년 왜경에 잡히어 두 해의 옥살이를 겪었으니 국권회복단의 일이 드러났기 때문이다.다시 광복단 사건으로 모진 옥고를 당하였으나 그 뜻은 더욱 굳어졌다. 삼일운동 때에는영남일대의 유림들을 일깨우고 이끌었으나 굳이 이름은 감추고 나서지 않았다.곧 대륙으로 건너가 유하현 삼원보 의 신흥 군관학교에서 조국의 젊은 투사들을 기르기에 피땀을 쏟았다.그 지략과 용맹을 적은 매우 두려워 하였고 동지들은 우러러 날개 달린 범이라 일컬었다.1919년 7월 9일 급환으로 세상을 떠나시니 이승에 계시기 서른 여덟해요 나라 위해 싸우시기 열 다섯 해다. 동암 서상일님은 임의 가장 가가운 동지로 임의 외아들 이응창님을 사위로 맞아 돌보았고 애산 이인님은 임의 맏조카이자 동지로서 숱한 뒷바라지를 하였다.
여기 화랑의 옛 언덕에 임을 새겨 모시노니 높고 넓은 뜻으로 삼천리를 돌보시고 억만 겨레 위에 길이길이 복된 이슬을 내리시리라.
1972년 6월 17일/글 정휘창/설계 항윤호/글씨 구자봉/답사일 2002.11.21.(목)오후./11.26(화)오전 12시/ 위치: 대구 앞산 반공기념관 위쪽
10. 심산 김창숙 생가와 비문
가.생가
심산 김창숙(1879 - 1962)의 생가는 경북 성주군 대가면 칠봉리 504번지 에 있으며, 경북기념물 제 83호로 지정되어 있다.
안내문에 말하기를, 이 건물은 독립운동가이며 유학자인 心山 金昌淑의 생가이다. 김창숙은 1910년 성멍학교를 세워 후진을 양성하였고 오적매국성토상소건과 유림단 사건 등으로 잦은 옥고를 치렀다. 광복 후에도 유도회를 조직하여 성균관대학을 창립하고 민족문화 창달에 기여하였다. 이 가옥은 청천서당의 북측 100m정도거리에 동향으로 배치되어 있다. 안채는 1901년 화재를 당하여 새로이 고쳐 지은 것이며 사랑채는 1992년에 새로 지은 것이다.라고 써 놓았다.
이 날 방문자 일행은 마침 서울에서 성주로 내려와 있던 심산 선생의 미망인을 만날 수 있었다. 동네 아낙네들이 사랑채에 모여 놀고 있는데도 집안 분위기는 썰렁하다. 국가에서 유족에게 좀 도와주는냐는 물음에는 이내 반발하는 기세를 보인다. “도와주기는 뭘, 도와줘요”라고 반응한다. 미망인 그는 지방에는 잘 있지 않는다면서 주로 서울에서 산다한다. 그래서인지 집안은 더욱 을시년스러운 것이다. 일행은 미망인 그에게 무엇을 더 물을 것인가 하는 심정으로 집을 나온 것이다. 사진은 미망인이 대화를 나누다가 부엌으로 들어가려는 모습이다. 흘러간 세월이 무정한데 이제 더 무엇을 이야기할 것인냐는 태도를 보인 것이다. 여기서 청천서원이라 한 것은 동강 김우옹을 향사하는 서원으로 1992년 4월에 복원한 것이다.
나.심산 김창숙의 기념관과 사적비
기념관과 사적비 : 국가와 겨레를 위해 일생을 바치신 심산 선생의 높은 뜻을 영원히 빛내고자 마련한 기념관과 사적비는 동강의 13대손인 金昌烈 지사의 차남인 赫基가 주역이 되어 1970년 말 추진후원회 결성,1972년 3기공,1974.8.15준공한 것이다. 현판은 박대통령의 글씨이며. 초상화는 김창락 화백이 그렸다. 비문은 이인기 당시 영대총장이 썼다.
11. 망우당 곽재우 동상비문
가. 비문
근세왕조의 선조 25년(서기1592) 4월 13일 섬나라 왜적들이 돌연 대거침입하여 일으킨 임진왜란은 진실로 이나라 미증유의 최대 국난이었다. 부산에 상륙한 수십만의 적병이 신기한 조총을 난사하며 파죽지세롤 북상할 때 전 국민이 놀래어 망지소지함은 물론이요 연도의 수령방백과 병사군관들까지 백성을 내버리고 사산도주하게 되니 이십일이 못가서 수도 서울이 함락되었으며 두 달이 못가서 평양이 점령되고 때를 같이하여 동북으로는 두만강까지 왜적에게 석권당하고 말았다. 그런데 이미 의주로 파천한 이 나라 왕실과 정부를 평양의 왜적들이 주저하고 진격하지 못한 이유는 어디에 있었던가.
가장 직접적인 요인은 뒷날 천강홍의장군으로 불리운 망우당 곽재우 선생이 전국에 앞장서서 내 고장 의령을 중심으로 사월 이십이일부터 향토방위와 토왜 구국의 의병을 모아 이끌고 침략해오는 왜적을 연전연파하게 되자 이에 호응궐기한 각 지방 의병들이 저마다 왜적의 배후를 공격하며 견제하게 된 때문이었다.
선생은 어려서부터 호매하고도 영민한 기질에 학문을 좋하고 무예와 병학에도 능통하였으나 사십세가지는 포의한사로 벼슬을 탐내지 않고 유유자적한 생활을 보내 왔다. 사십일세 때에 임진왜란이 터져서 국세가 창황하게 되니 선생은 분연히 결심하고 사재를 기울려서 의병을 일으켰다. 오합지졸의 소부대였으나 선생이 몸소 생명을 내 대고 진두에 나서 신출귀몰한 작전으로 적세를 계속 격파하게 되자 몇 날이 안 가서 매우 정예한 전투부대로 등장하게 되었다. 선생은 특히 기병과 복병의 유격전을 잘 사용하여 도강 서침코자 하는 왜의 대부대를 정진에서 기습 격파한 이래 낙동강유역을 완전히 제압하여 경상우도의 백성들이 안심하고 영농할 수 있게 함은 물론이요 호남의 곡창지대가지 눙히 안보하게 되었으니 홍의백마로 연강산야를 동치서구하는 선생의 모습을 도처의 왜적들이 천강장군이라고 일컬으며 망풍도산하게 되는 것도 당연한 일이었다.
이같이 하여 천강홍의장군의 용명이 온 국민의 사기를 북돋우는 일방 왜적 왜적들의 기세를 여지없이 꺾게되니 지금까지 무능무위해했던 감사와 군관들의 시기와 중상은 구국의 천강장군을 반역으로 무함하기도 하였다. 그러나 용민하고도 호담한 선생은 이에 구애하지 않고 오로지 토왜일로에서 백전불패의 기록을 세웠기에 조정공론도 결국 선생의 우국단성을 재확인하고 목사병사 등의 중직을 제수하게 되었다.그렇다고 해서 관록이나 탐낼 의장도 아닌지라 선생은 때마침 도래한 전국의 안정을 이용하여 홀연이 사직하고 귀향휴식의 길을 택하였다. 그리하다가 얼마 후에 정유재란이 터지게 되니 선생도 할 수 없이 재기ㅘ여 방어사의 중책을 지니고 창녕의 화왕산성을 지키게된 바 이 소식을 탐지한 왜적들이 감히 일보도 접근 못하고 우화도피하게 되므로 인접제현의 치안을 확보할 수가 있었다,. 그러나 그 전란도 다시 평정되니 선생은 또 다시 기관하고 입산수도의 길을 택하였다. 조정에서 아무리 높은 벼슬로 소환코자 하여도 송엽으로 연명하여 망우무욕의 탈속한 수도생활을 계속하다가 신병이 침중해도 스스로 의약을 불허하고 육십육세의 생애를 고요히 마치게 된 바 임종에는 그래도 왜라으로 인하여 사직과 능묘가 참화를 입었으니 나도 죽거던 예장하지 말고 무덤에는 봉분하거나 식수하지도 말라고 유언을 남깅었다. 호왈 망우당이라 하였으나 최후순간까지 우구충정만은 잊어 버릴수가 없었던 것이 역시 망우당아니더냐.
우리나라 역사가 저 국난극복의 양대지주로 <육지에는 곽재우요 바다에는 이순신이라>하고 내세운 것도 가장 당연한 일이었다. 오늘에도 우리들은 정녕 비상한 국난에 직면하고 있는 만큼 새삼 그 옛날 선생의 모습을 추모하는 마음 간절하기에 이 동상을 세워 영원히 되살리고자 한다.
1972년 4월 22일
전면 글씨 박정희 대통령/글 이선근/ 글씨 최현주/조각 김만술
나. 의병유서
우리 의병들은 이름이나 이익을 위해 일어난 것이 아니라 오직 국가와 민족을 위해 싸우는 것이니 왜적을 격파하는 데만 힘쓰고 죽은 적의 머리를 베어 이를 조정에 바치고 논공행상은 논하지 말라
1592년(임진)7월 의병활동시 장병들에게 유시한 내용
다. 곽재우 약력
조선 명종 7년(1552) 경남 의령에서 출생
호는 망우당, 임진왜란 (1592) 의병을 일으켜 왜적을 격퇴하고 정유재란 (1597)방어사로 화왕산성을 지키는 등 큰 공을 세움
당시 선생이 붉은 전복을 입고 의병군을 지휘하여 세인이 “천강홍의장군”(天降紅衣將軍)이라 칭함
만년은 망우정에 은거하다가 광해군 9년(1617) 66세로 일생을 마침 시호는 충익(위의 (2),(3)은 독립기념관내 있음)
12. 마산의 기인 김형윤奇人 金亨潤과 3.15 의거
- 목발 김형윤 불망비 -
가. 위치 : 마산시 용마산 산호공원
나. 시인 정진업의 글
사람은 가도 이름은 역사에 남고 문장은 필묵에 남으리니 공은 1903년 12월 18일 마산에 나서 1973년 8월 7일 향년 70세를 일기로 유명을 달리하였지만 그 인간과 족적은 공의 유고집 [馬山 野話]에 남아 많은 시민의 입에 회자되고 있다.
애칭 ‘目拔社長’으로 일제암흑기를 무정부주의운동과 항일투쟁으로 보냈고 해방후 마산일보사장으로 지방언론계의 선봉에 서서 사회정의를 정규했던 공의 뜻은 가시지 않고 지금도우리와 대화를 나누고 있으며 안식을 위한 오랜 잠을 자고 있을 뿐 공의 인간상은 청산과 더불어 숨쉬고 있는 고고한 한 그루 수목이다. 공의 결벽은 누구도 어쩌지 못하였듯이 공의 깊이든 잠을 누구도 깨우지 못한다.
그러나 우리는 부디 악몽이 없는 공의 평화로운 잠을 위하여 삼가 두 손을 모으면서 생전의 숨결을 후세에 길이 전하고자 공을 기리는 모든 사람들의 단성을 여기에 묶어 불망의 돌을 깎아 오직 사연 몇 자를 검은 석신에 샛길 따름인저.
1074년 5월 18일/ 글, 시인 鄭鎭業 / 글씨, 심호철/ 조각, 김익권
다. 김형윤 약력
라. 기인奇人 김형윤
필자가 마산의 기인 김형윤을 알게된 것은 3.15의 진원지 마산을 둘러볼 때였다. 국수집에서 점심을 먹다 경남일보에 연재되던 <목발 김형윤을 찾아서>란 기사를 본 것이다. 그리고 마산시 용마산 산호공원을 찾아 그의 불망비를 확인하고 그가 마산의 기인임을 알게 된 것이다. 필자는 마산에 거주하는 지인을 통해 다른 자료를 수집하게된 것이다.
우선 그의 별호가 目拔이라는데 주목할 수 있다. 이 심상찮은 목발이라는 별호는 무엇인가. 김형윤이 22세(1925) 때인 일제치하 마산에서 한 일헌병이 조선인 여자를 구타하는 것을 보고 그 헌병의 눈을 빼겠다고 달려든 일이 있었는데 이에서 목발이라는 별호가 붙은 것이다. 식민지치하에서 조선인의 용기를 보는 것 같아 흐뭇한 웃음이 나는 것이다. 이러한 저항정신은 일본,만주 등지로 방랑하면서 체험하였던 민족정신의 발로였으며 아나키스트적인 기질에서 나온 것이라 할 수 있다. 그는 외투와 관련된 에피소우드가 많다. 증언자에 따르면, 하루는 여름인데 헌병대에 외투를 입고 들어가니 일본 헌병이 말하기를, “왜 외투를 입고 왔는냐”고 하니까 “너를 보면 추위를 탈까 두려워 외투를 입었다”고 답한 적이 있다. 유머가 뛰어나고 임기응변에 능했던 것이다. 어느 날 선생과 함안 산인에를 갔었는데 한 사람이 추위에 떨고 있으니까 그 자리에서 입고 있던 외투를 벗어주었다는 증언도 있다. 그는 주머니에 돈이 있으면 행인들에게 구걸하는 소년거지를 보면 주머니를 털어 주었고 어느 섣달 그믐께 거리에 깡통을 들고 다니는 놈을 한 명도 못 만나면 두툼한 입술로 ‘재수 없는 날’이라고 아쉬워했다 한다. 그는 태없고 텁텁하지만 천의 얼굴을 가진 인물로 비쳐지며 예상치 못하는 개성이 있어 마산의 기인으로 치부되는 것이다. 선생에게는 어떤 위선도 용납되지 않으며 결백증까지 가지고 있어 변변한 둥지 하나 장만치 못했다는 것이다. 이외에도 경남일보가 조사한 자료에는 발표되지 않은 자료가 많다. 그의 활동을 크게 나누어 세 가지로 요약할 수 있다.
첫째, 언론인으로서 일본의 부당한 처사를 지적하여 시정한 사실을 들 수 있다. 예컨대, 고등형사계에서 조선인을 상의를 벗겨놓고 몽둥이로 때리는 현장을 찾아 기사화하여 추방하였고, 요정에서 동침하기를 거절하는 조선인 동기에게 행패를 부리고 기물을 부순 일본 검사를 기사화하여 본국소환을 하게하여 쫓아버렸던 일화 등 지사적 면모를 보인 기자로 활동한 것을 들 수 있다.
둘째, 마산지방 문화예술 장려를 위해 노력한 점을 들 수 있다. 그는 지방신문을 경영하면서 조선의 문화예술 활동을 위해 지면을 할애하고 장려후원한 점이다. 특히 한 노음악가가 돈이 없어 낡은 바이올린을 켜며 뱃사공을 하고 있음을 보고 그의 연주실력을 듣고 후원자 최재섭씨에게 부탁하여 바이올린를 사주게하였고 그 음악가는 사은행사로 음악연주회를 열었다는 것이다.
셋째, 무정부주의자로서 세를 규합하여 일제에 저항, 시위에 앞장서 독립운동을 하였고 3년여의 구금생활을 한 점..
넷째, 애국선열 이교재 선생의 묘지개수와 방치되었던 위암 장지연 선생의 묘소를 찾아 개수하였다. 그 중 1950년 마산시 현동 독마산 (현동초등학교 뒷산)으로 애국자 숭양산인 장지연의 묘소를 찾아보던 일을 들 수 있다. 당시 장지연 선생은 1913년 경남일보 주필을 사임하고 맏아들이 살고 있는 마산 월영동으로 이사를 간 것이다. 장지연 선생은 시와 음주로 세월을 보내다가 1021년 10월 2일 자택에서 58세를 일기로 운명한 것으로 밝히고 있다. 그후 46년만에 묘지개수와 묘비건립사업을 추진하였다.
다섯째, 3.15 마산의거 당시의 활약상을 들 수 있다.
주지하는 바와 같이 1960년 3월 15일은 제4대 대통령과 제5대 부통령을 뽑는 선거일이었다. 이미 전국적으로 자유당에서는 부정선거를 획책하고 있다는 정황을 국민들은 다 알고 있는 터인데도 선거 당일 날 3인조, 5인조,무슨 조 등을 만들어 부정선거를 꾀하자 시민들은 거리를 메우고 남성동파출소를 부수고 시가행진에 나섰던 것이다. 이 날밤 마산의 군중들은 경찰의 발포로 50여 명의 사상자가 발생했고 시내는 공포로 사여 있었다.
마산일보는 27일자 2면에 <3.15 마산의 비분애통>이란 기사를 써서 10대들의 죽음을 애도하고 그들의 희생을 낳게한 정치.사화 등 현실을 고발한 것이다. 특히 실종자로 시노되었던 김주열군의 시체가 4월 11일 아침 마산 중앙부두 앞바다에 떠오르자 마산일보는 이 사실을 특종보도했는데 ‘시체는 오른쪽 눈에서 후두부까지 연막탄 같은 총탄에 관중되어 있었으며 온 몸은 물에 불어 있어 차마 눈을 뜨고 볼 수 없는 참상이었다.’라고 보도했다.이 보도가 나가자 4월 12일 마산시의 학생과 시민들이 또다시 들고 일어난 것이다.이른바 제2차 데모는 진주,하동,창녕으로 파급되었고 17,18일은 부산에서, 19일에는 4.19 의거로 확산되어 정의가 승리하는 최초의 민주혁명을 이루었던 것이다. 따라서, 물론 4.19혁명을 주도한 세력은 학생을 비롯한 시민들이었지만자유당의 부조리를 언론에 보도함으로써 학생과 시민들에게 정보를 제공하고 혁명의 타당성을 정직하게 지적한 <4월혁명 승리의 기록>을 남겼던 것이다. 4.19시기 마산일보는 혁명의 정보창구 역할을 하였고 이를 전국 언론에 제공하였다. 이러한 역할의 중심에 김형윤이 잇었던 것은 물론이다. 그가 증언하였던 4.19혁명의 <승리의 기록>은 3.15마산의거와 4.19학생혁명에 이르는 한국민주화 과정을 전부 기록함으로써 역사적인 사건의 대기록이었다. 아울러 김형윤은 3.15마산의거 희생자를 위한 조의금과 위령탑건립모금, 기념사업추진 등 마산의 민주혼을 계승하는데 앞장을 선 것이다.
이외 중요한 유고로 [馬山野話](1973)가 있다. 서문을 쓴 이은상 시인은 <꽃피듯이 잎지듯이 바람 불듯 구름가듯 아무런 조작도 없이 어리고 매인데 없이 行往野臥에 제멋대로 살다간 자유방랑, 목발 기인>이라고 회고했다.
13. 동화사의 인악대사비
가. 인악대사비
- 법명은 義沾
동화사에서 입장료를 주고 들어가자니 마치 저승가는데 돈 내고 들어가는 기분이다. 그러나 팔공산 동화사 들어가는 길만큼 편안함과 위안을 받을 수 있다면 돈내는 것이 아깝지 않을 것이다. 산이 다소 훼손되기는 하였으나 여전히 팔공산은 의젓이 앉아 산으로 오는 사람 어머니처럼 품는다. 동화사 鳳棲樓의 힘 있는 글씨는 晉體로 왕희지풍의 필체라 유러하다. 옛부터 鳳은 오동나무숲에만 깃든다는 봉서루의 힘찬 글씨에도 불구하고 신도회가입,청년회가입,방생회,일요법회,기왓장명기에 얼마 등 일거수일투족에 돈이 매겨져 있어 운영의 어려움을 반영하는 듯하다. 벽면에 새겨져 있는 공산면 桐華寺蹟碑銘은 지금으로부터 500여전인 16세기(1584)에 藕堂居士 金鼎來가 글을 짓고 肯石山人 金鎭萬이 썼다. 머리말에는, ‘불법이 東漸하여 여러 나라에서 신봉한 이래 사찰이 명승지마다 별처럼 자리하였고 신명이 영향하였으니 동화사 역시 그 하나이다.’라고 대개의 연고를 밝히고 있다.
봉서루 뒷쪽에는 작은 글씨로 嶺南緇營牙門이라는 편액이 있다. 동화사는 임란때 사명대사가 지휘하던 승군의 총지휘소였음을 말해주는 것으로 乙丑 初冬 達成後人書라 연대를 밝히고 있다. 대웅전 뒤에 祖師殿이 있는데 祖와 殿은 해서로 師는 굳이 묻게 한다. 동화사는 신라 소지왕 15년에 極達和尙이 창건한 것인데 처음에는 瑜伽寺라 칭하였고 팔공산을 부악,중악,공산 등으로 불렀다 한다. 그것보다 쓸어질 듯 서 있는 조그만 仁岳堂이 있는데 거기에 扶宗樹敎華嚴講主仁岳大師碑銘이 있다. 仁岳대사(1746-1796)는 속성이 이 씨이고 법명은 義沾(의첨)이다. 고려조 사공 성산부원군 能一의 23세손이다. 부는 휘 징이요 모는 달성 서씨, 용연의 산방에서 공부를 하여 불가의 청정한 법심에 감동한 마음이 있어 가선헌에서 머리를 깎고 碧峰師로부터 受戒具하였다. 인악대사는 최완수의 ‘동화사’란 글에서 안 인물인데 최완수는, 의첨을 義沼(소)로 잘못기록하고 있다고 지적한 일이 있다. 대구시에서 세운 동화사 500년 느티나무 밑의 ‘인악대사 나무’ 간판에는 ‘속성은 성산 이 씨이며 법명은 의소(義沼) 이름은 의첨(義沾)으로서 영조 22년 (1746) 달성군 인흥마을에서 태어났다’고 한다. 그런데 필자가 비문을 확인한 바 비문에는 ‘法名義沾’으로 기록되어 있고 ‘의소’는 기록되어 있지 않다. 이는 후술하는 바와 같이 필자가 확인한 바이다.
1999년 12월 30일(목), 겨울이라 날씨가 추웠다. 인악당을 지나자니 비각이 태풍이 불면 쓸어질 것 같았고 나무가 퍼석퍼석하게 떨어진다. 앞서 필자는 아름드리 나무로 9간의 ‘ㄷ’자형 신축건물을 보고 건축에 사용한 나무가 하도 우람하여 접근하다가 우람한 체구를 한 스님이 배를 내밀며 출입할 수 없다고 거절을 당하고 나오는 길에 인악당을 보는 것이어서 좋은 느낌은 아니었다. 전날 신문에 스님처소건물을 입찰을 보지 않고 독접계약을 하여 짓는다고 비판된 그 건물이다. 목수에게 물으니 목재는 전부 외국에서 수입한 육송이라 한다. 아름드리 기둥 10여 개가 겹처마의 무게를 버티고도 남아 장중한 느낌을 주고 있다. 깊은 회색기와골,두꺼운 마루, 목수들은 마루짝 이를 맞추느라 정성을 들인다. 마음을 비운 스님들이 거쳐하는 처소인데 사치가 있을까마는 속인이 보아도 건물의 무게가 돈의 무게를 능가한다는 느낌이다. 인악당 건물이 바람에 쓸어질 듯한 것과 너무 대조적이었기 때문이다. 다행히 다른 비각은 비집고 들어갈 틈이 없는데 인악당은 밑으로 들어갈 수 있게 틈을 내놓았다. 비문을 볼 사람은 와서 보라는 뜻이다. 흰 돌에 새긴 글씨가 세월을 지난 탓으로 확인하는데 어려움이 있었으나 인악대사는 법명이 義沼아닌 義沾임을 손으로 만져 확인할 수 있었다. 이울러, 비신을 받치고 있는 귀부가 거북이 아닌 봉황의 상이었음을 보았다. 처음에는 어류인지 조류인지로 귀부를 의심하였으나, 꼭지에 두 개의 벼슬이 있고 날카로운 눈매 뾰족한 부리를 백지에 그려놓고 보니 봉황의 머리였다. 비봉귀소의 형국에 봉서루,동화사,인악대사비의 봉황수 등을 연계하여 볼 수 있는 것이다. 崇禎紀元後三 戊辰 三月 日에 세운 것이고 추사와 쌍벽이었던 당대의 명필 안동 김씨 金羲淳(1757-1821)이 쓴 글과 篆書였다. 여러 종류의 비신에 귀부가 보통인데 봉황을 귀부로 삼은 것은 처음 보는 사례다.
나. 팔공산 지명
[택리지]에는 팔공산을 地形廻合이라 하여 뻗어나가는 지형이 아니라 산세가 모인 형국이라 하였고 약사여래대불봉안연기문에는 飛鳳歸巢의 형국이라하였다. 지명을 다시 재론할 필요는 없을 것이나 몇 가지 이설을 소개하려는 것이다.
첫째, 팔공산을 동화사사적비에는 父岳, 中岳 또는 公山이라 하였는데, 부악은 공산의 잘못이지 어디에도 부악이란 말은 찾을 수 없다는 지적이 있다. 둘째, 팔공산이란 명칭은 八郡에 걸친 산이다. 八州之間,盤據八邑之地이 그 예다.
셋째, 팔공산의 고칭은 桐藪山이라는 것, 태조 왕건이 동수산 대전시 신숭겸,김락,전이갑,전의갑 등 八將의 殉死로부터 전래된다는 설이다. 藪는 오동나무 또는 절(寺)로 해석할 수 있는데 桐藪는 오동나무숲이 아니라 동화사를 가리킨다는 것.
넷째, 팔공산은, 동화사사적비에서 영심으로부터 전수한 8,9개의 簡子를 봉안한 사실에서 온 것.
다섯째, 중국지명에서 온 것, 왕건의 동수산하 전투는 중국 안휘성 봉대현의 비수의 북,회수의 남에 팔공산이 있고, 진왕 符堅이 南朝東晋을 정벌하려고 팔공산하 肥水에 육박한 사실은 王建이 甄萱과 싸운 사실과 매우 유사하다는 것을 들고 있다.
어쨌든, 의소는 의첨으로 확인되었으나 봉황은 죽실을 먹고 오동나무숲에 서식한다는 신비성, 그리고 ‘동화사 중창시 눈이 내리는데 오동나무꽃이 상서롭게 피어 동화사‘로 불렀다는 약사여래대불연기문의 영묘한 사실과 함께 그대로 전해지고 있는 것이다.
14. 대선사 수운 최제우상 水雲 崔濟愚像
가. 廣濟蒼生 輔國安民 布德天下
나. 동학운동의 사상적 연원
동방에 신인이 나시니 괴로운 어둠 속에 기쁨의 밝은 빛을 펴시도다. 겨레의 정기가 들어남이니 만고의 진리가 찬연하도다 옷깃을 여미고 다시금 우러러 보라 거룩하신 그 모습 따스한 손길로서 깨우치는 무극대도 사람이 곧 한울이오 사람마다 마음 속에 모신 한울 존엄도 하올시고 너도 나도 동궤일체 분발인들 못할소냐 참된 마음 고이 지켜 공경하고 믿는데서 바른 기운 생기나니 뒤졌다고 낙심말고 남의 힘에 의존마세. 나에게 모셨으니 사근 취원 하단 말가 그렇고 그런 이치 무궁한 천지조차 다름 아닌 내 것이라.
새로운 삶의 길이 눈앞에 열리도다
스스로 서지 못하고야 강산의 주인 구실 어찌하며 스스로 믿지 못하고야 남의 신의 바랄손가 급급한 세상 사람 선각자를 몰랐어라 갑자년 삼월 십일 대구 장대에 순도하신 불멸의 그 얼 이어 한울과 더불어 길이 살아 창생을 제도하니 이 겨레의 자랑이자 나의 영광이 아닌가 밝음은 바로 그대 마음에 비치도다. 고요한 감격에 잠겨 나갈 길 더듬는 그대에게 새로운 삶의 힘 솟아 올라 맑은 복이 있으라.
도덕 百五年 三月 二十一日
조각 윤효중 /글 박종홍 / 끌씨 손재형
천도교조 대선사
순도 백주년기념 동상건립워원회 세움
(답사:1997년 9월 14일)
15. 청주시 명암동의 상당사(上黨祠) 중수기
조선조에 비해 고려조 유적이나 인물의 향사가 드문 가운데 청주시 명암동 上黨山城 明若山麓에 청주출신으로 고려조의 문장가며 정치가였던 郭元, 郭輿, 郭預의 淸原祠(상당사)가 있어 주목된다. 상당사기에 의하면 上黨은 백제때의 縣名으로 신라때는 西原京으으로 승격되었고 고려 이래로 淸州로 고쳤는데 湖西에서 가장 큰 도시라 하였다. 곽예의 영정은 나손 김동욱 교수의 고증에 의해 봉안할 수 있었다 하며 ‘상당사기’는 충남대 조종업 교수의 글이다.
곽 원(973-1029)은 성종 15년(996)에 문과에 장원 급제한 인물로 문사에 뛰어나 문과고시관, 외교국방에 주력하였으며 글안을 치고자 시도하였으나 뜻을 이루지 못하고 등창으로 분사한 정치가다.
곽 여(1059-1130)는 고려조의 대문호이며 철인으로 문종왕때 문과에 급제하여 예종의 총애를 받아 학창의(鶴氅衣)를 입고 烏巾을 바쳐쓰고 도사의 차림으로 제자백가의 학문과 시의 담론에 능하였다 한다. 예종이 고금에 유례없는 총애를 기울인 것은 그의 시문이 淸新高雅하여 대동제일일 뿐 아니라 書史를 비롯 도교, 불교, 의약, 음양오행설에 이르기까지 두루 통달하였고 物外에서 초연히 살 수 있는 철인의 관조가 있었기 때문이라 한다. 그의 사후에 정지상이 쓴 <山齋記碑>가 있다.
곽 예((1232-1286)는 고려조의 문신으로 외교에 능하였고 시와 글씨에 뛰어난 대문장가로서 고종 42년(1255)문과에 장원 급제한 인물이다. 왕명으로 홍저와 함께 왕의 화친첩을 가지고 일본으로 건너가 왜구들의 약탈행위를 다지고 잡혀간 백성과 노략해간 쌀,마액,소가죽 등을 압수하여 돌아왔다. 그의 글씨는 일가체를 이루어 서풍을 바꾸어 놓았고 풍자시<感渡海詩>와 풍경을 읊은 <雨中賞蓮詩>등이 남아 있다 한다..
16. 삼우당 문 선생 면화시배三憂堂 文先生 棉花始培 사적비
가. 비문
先生이 일찍이 恭愍王 十二年 癸卯(西紀 1363年)에 書狀官으로 入元하니 때에 賊臣 崔 濡가 元后 奇氏와 潛結하고 忠宣王 別子 德興君의 擁立을 陰圖하매 怵威俛從하는 무리 많은 지라 先生이 이에 抗爭하여 德興亭에 被拘됨이 무릇 42 日이오 마침내 交趾로 遠竄하니 風土가 고르지 않아 병이 많으나 先生은 조금도 危懼의 빛이 없이 항상 易經과 禮書로 自遣하더니 문득 冽泉이 湧出함에 土人의 宿疾이 이로 하여 完快되며 達學士 成貴와 從遊하고 雲南風土集을 편저하였다. 3年 後 宥還하는 途中 木棉花를 보고 民生에 利 넓음을 생각하여 從者 金龍으로 하여금 그 種子를 筆管에 넣어 携來하니 이는 禁網의 嚴함을 避하기 의함이었다. 丁未(西紀 1367) 2月에 還國하여 所居하신 培養里에 手植하니 처음은 土宜를 몰라 燥濕을 가려 심고 그 榮枯를 보아 培養의 妙를 얻어 3 年만에 蕃盛하여 드디어 全國에 퍼지니 紬苧 麻葛만 입던 東人은 비로소 綿衣로 寒苦를 면하게 되었다.
後에 先生의 孫 靖惠公 萊는 繅車를 文萊라고 이름하고 郡守 英은 織造의 要를 얻어 이를 文英이라 하였는데 지금 訛音되어 무명이라 부르니 後承의 先烈을 繼武하는 德行을 世人의 欽歎하는 바이다. 丁巳에 倭寇가 充斥하여 모두 鳥獸奔竄을 圖하나 홀로 先生은 內制로 守墓하고 哭泣을 平日과 같이 하매 賊도 서로 感服하여 勿害孝子의 四字를 써 後陣의 侵凌을 禁하니 一境이 安堵하였고 鄭圃隱 李陶隱 朴貞齋 諸賢과 함께 程朱書 硏鑽에 沈潛하여 正學을 唱導하고 儒風을 振起한 功은 于今것 斯文에 빛나고 있다. 先生은 이미 忠孝의 雙全으로 革鼎을 즈음하여 巍然히 절의를 지켜 風聲이 百代에 움직이니 圓顱(원로) 方趾의 綿衣를 입은 者 뉘 아니 尊慕하리오
사람이 萬物의 靈長이 됨은 오직 忠과 孝를 알므로써이다. 집에 들어 어버이를 섬기매 至誠을 다하며 나와 벼슬길에 오르매 맡은 바 職分에 힘쓰고 危難에 處하면 一身을 잊어 義에 나가니 이는 아무에게나 期할 수 없는 바이다. 또한 千에 하나 얻기 어려운 絶好의 機會를 만나 萬古에 누구도 이루지 못할 永久히 온 生靈에 입히는 바 큰 은덕을 베풀면 그 功德은 宇宙에 드리워 빛나며 聲望은 泰斗보다 높으리라.
三憂堂 文 先生의 諱는 益漸이요 字는 日新이며 晋州 江城縣人이니 忠貞公 叔宣의 子이다. 高麗 忠惠王 辛未(西紀 1331)2月 8日에 나셔 李稼亭先生 穀의 門下에서 受學하여 新京 東堂 及第로 벼슬이 左司議大夫 右文館提學 同知經筵事 兼 成均館大司成에 이르고 癸亥에 孝子里의 表旌을 받았으며 庚申(1400) 2月8日에 卒하니 享壽 70이라. 太宗時에 이르러 參知議政府使를 贈하고 江城君을 封하여 諡를 忠善으로 不祧(조)를 命하며 高麗忠信之門이라 褒奘하였고 世宗朝에 領議政을 加贈하였으며 富民侯를 封하고 世祖朝에 道川書院에 賜額하였다.
이제 先生의 遺蹟保存會를 組織하여 돌을 깎아 先生의 棉種 始播한 田地에 세워 事實을 밝히고자 鄕人士 卞鍾捧 李宇相 諸君과 後孫 正東이 朴正熙 大統領時 政府의 援助로 始終宣力하고 權君 鵬客이 나에게 글을 請하매 비록 글에 能하지 못하나 先生의 德學을 欽仰하여 固辭치 않고 大綱을 記述하여 炳烺한 功을 來後에 길이 照示하노라
安東 金舜東 謹撰
西曆一千六十五年 乙巳五원 日 立
慶尙南道 山淸郡丹城面 沙月里 培養村 田 106番地 大韓民國史蹟 第108號
17. 숭정처사 대암 최공 유허비명
崇禎處士 臺巖先生 崔公 遺墟碑銘
가. 비문
팔공산은 영남의 명산으로 초목과 구름이 아름답고 신이한 기운이 있는 곳이다.이같은 명산에 어찌 군자가 마땅히 쉬고 머물러 의지하지 않을 것인가. 그 군자가 누구냐 하면 사부 최공이 그 분이시다. 공의 휘는 東집이요 자는 鎭仲, 臺巖은 그의 호다. 일찍이 寒岡 鄭逑 선생 문하생으로 청문하여 그것을 학문의 비결로 삼았으며 물러나서는 일대의 제 명류들과 도의지교를 하였다. 성인의 경전이 아니면 강론하고 탁마하지 않았으니 자득에 독실하고 공부를 하매 엄밀하였음을 알 수 있다. 일지기 광해군 세상에서 그는 上舍生(성균생원)으로 태학에 유학하였는데 적신 이이첨이 더불어 교류하기를 요청해 오매 거절하고 대관령을 넘어 귀향하여 한가하게 즐겼으니 이는 식음을 잊을 정도였다.인조 17년 기묘년 (1639)에 유일로 천거되어 능서랑을 제수받고 이듬 해 효종이 대군으로 심양으로 인질되어 갈 때 공을 사부로 명하였다. 공은 하명을 전해 듣고 서둘러 조정에 이르렀으나 미치지 못하였다. 이에 체임되어 통곡하다가 고향으로 돌아왔다. 갑신년 (1644)에 명나라가 망하자 드디어 팔공산에 들어가서 용수연 수석이 좋은 곳에 오막집을 짓고 다시 세상에 나오지 않았다. 공이 돌아가신 지 백여 년, 55세손 전 익찬 흥원 씨가 공의 유적이 거칠어지고 매몰되는 것을 두려워하여 용연 옛 터에 다시 약간의 기둥을 세운 것이다. 많은 자제들을 이 곳에서 독서케하여 구업을 실추시키지 않도록 하였으나 오히려 오늘날까지 이루지 못한 것이다. 작은 집은 흥패가 무상하여 영원할 수 없으며 영원을 도모하는 데는 마땅히 돌을 세움과 같지 못하다하여 나 제공에게 서신을 보내었는데, 공의 사적을 서술한 것이 자못 상세하였고 그 끝에 가서 가로대, 공의 미거가 없다고 한다면 이는 속이는 일이요 미거가 있다고 하면 이는 불인이라고 부를 것이다. 원컨대 귀하께서 유허비명을 지어주시어 나의 자식들은 조상이 남긴 엣 자취를 마음에 새겨 후손으로 하여금 생을 도모함에 불인을 저지르지 않도록 하여 주십시오. 하기에 제공은 깨끗한 몸가짐으로 읽고 탄복하여 가로대, “대저 요동의 심양은 적인에 좇기는 여후를 구하지 못한 위백을 책망하는 것 같은 작은 일에 매여 있다. (旄丘瑣尾)
처자를 둘러보고 풍자하여 말한 것은 조선에 보좌할 좌우가 없기 때문이요 생각건대, 멀리서 망배하고 공이 홀로 용감히 마치 안락지지인 것처럼 한양에 다달었으나 이미 안락지는 아니었다. 북을 향해 곡하고 실성한 것은 개자추가 진 문왕(세자시절의 망명)의 말고삐를 집고 다닌 충성과 같은 것이다. 공은 홀로 즐거운 땅에 나가가듯 했으며 대군의 행차에 미치지 못하여 체임되었을 때인 갑신 이래 천지는 무너지고 도의는 더러운 양취로 변하였다. 공은 필부의 몸으로 이미 세상을 위하여 할 수 있는 일이 없으므로 마침내 멀리 거동하는 일이었다. 다만, 입산으로 세상을 피한 것은 齊나라 魯仲連의 도해蹈海의 풍조(진 나라의 방자한 정치에 반대하여) 때문이다. 공의 추의와 큰 절개는 빛나고 빛나는 것이어서 다른 사람의 이목과 법식에 비추어 이제 전사와 같은 제설을 모으기에 이르렀으며 그 얻은 바로써 공의 불후의 사실들을 돌에서 말하려는 것이저. 그러나 익찬 공의 효 또한 독실함이 그에 방불하고 선조의 빛을 추구함에 오랜 세월을 지나는 동안 게으르지 않았다. 선조의 덕을 현양함에 있어 그 지극함을 다하지 않음이 없으니 제공이 어찌 이에 감복하지 않을 수 있겠는가.
마침내 기쁘게 이를 명하여 가로대,
八公之頂日月高臨(팔공산정에 일월이 높이 솟았네)
公心在玆龍淵之石水((공의 마음은 이 용연 석수 간에 있어)
續千古公名輿之(공의 이름 천고를 이어 더불어 할 것이다)
彼短者碣豈曰重輕(저 작은 돌을 세웠다하여 경중을 말할 것인가)
惟後孫誠茫茫浩(다만 후손들의 정성이 넓고 큼을 취하여)
劫鬼護神持潛德之輝(억겁 년 신의 보호와 지지로 조상의 덕을 빛내고자 함이라)
蔡濟恭 撰
李載延 篆
崇禎紀元後 四回 甲申 月 日立
2003년 5월 5일 재정리
18. 모명재 두사충신도비명杜師忠神道碑銘
崇禎紀元後 三 壬戌 三月上浣
嘉善大夫行慶尙右道 水軍節度使兼慶尙全羅忠淸 三道水軍統制使李仁守謹撰
가. 神道碑銘并序
공의 성은 杜 씨요 휘는 師忠이며 明나라 사람이다. 萬曆 임진년(선조 25,1592)명황제가 장수를 보내어 우리 조선구ᅟᅮᆨ에 임란을 일으켜 날뛰는 섬나라 오랑캐들을 토벌하도록 명하셨다.
공은 그 때 복야상서(僕射尙書 겸 太師)로 매부인 수군도독 陳璘을 수행해와 있었다. 영호군에 있으면서 나의 7대조 忠武公을 처음 만났으나 옛 친구처럼 친밀하기를 延陵子가 子産을 만나 延陵季子라 자호한 것처럼 구면식이 된 것이다. 충무공 유첩에 남아 있는 것은 자손들이 잘 아라고 있으나 공이 조선에서 늙고 조선에 배례한 사실은 오히려 알지 못한다 했더니 庚申年(1620)봄에 試人으로 부임한 杜敬甫를 우연히 만났는데 공에게는 6세 손으로, 공(두경보)은 비로소 조서ᅟᅥᆫ에 후손이 있으며 遺趾는 달구중에 유택은 형제봉하에 있음을 안 것이다.
오호라, 甲申(1584) 이후 이 세상은 어찌 되었는고, 자그마한 동국 땅(瑣尾東土)을 그다지도 못 잊어서 돌아가지 않고 남은 뜻이 동해에 몸을 던지려는 魯仲連의 절개(蹈海의 義)가 아니던가.
명나라 사람으로 우리나라 기록에 실린 것은 星山의 施 씨가 있었으나 지금은 남아 있지 못하다. 이 사실을 복야공의 자손으로 6세가 되도록 알지 못했으니 어찌된 일인가. 藥圃 鄭 琢, 西厓 柳成龍이 연명한 同遊錄에는 아직도 감사 崔俔, 승지 李彦英이 있는데 그들도 조선에서 소문난 명사이다. 그 자손들이 항상 선조의 친호한 의를 전해 들었다고 말하니 또한 알음이 없다고 할 수 없는 일이다. 公은 천문지리학 즉 靑烏學에 깊었는데 도독의 진에 있을 때 군의 둔영을 도와 전략적 승리를 얻었으며 또한 내가 선조의 묘 자리도 길지를 잡았으니 그가 지리에 통달한 일단임을 보여준 징후이다.
나는 이제 三道 統制使로서 공의 묘소 역시 관애에 있다. 하나의 돌을 세움에 있어 말씀이 없을 수 없으니 이를 위하여 명하여 가로대
이 비는 명나라 복야공의 음택이다. 영세토록 樵牧들이라도 눈흘겨 보지 말기를 바란다.
오래된 비는 묘 앞에 세워져 있으나 칠곡 도호부사 李民守 공이 비문을 쓴 지 백여 년을 경과한 지라 이끼가 기고 돌결이 일어나 독해가 불가능함으로 9세 손 병선이 홀로 석물 등 모두를 맡고 힘써 고쳐 묘명제 뜰에 세우는 바이다.
이에 감히 이런 사실을 후인에게 알리고자 한다.
(기록 정리 2003년 4월 27일)
나. 복야공 신도비문 소고
1) 몇 가지 교수(校讎)
복야공 신도비는 1630년(崇禎紀元後三) 이인수가 찬한 비가 현재도 형제봉 하 묘전에 있는데 그 340년 후인 1969년에 현재의 모명재내에 류석우(柳奭佑) 옹이 개찬한 비문이다. 후자 모명재 내의 신도비문은, 조선시대에 세운 비문이 100여 년이 흘러 이끼가 끼고 돌이 망가져 해독이 어려우므로 다시 세운 것이라고 세운 동기를 밝혔듯이 전자 이인수가 찬한 비문을 원문으로 하고 몇 자가 바뀌었음을 알 수 있다.
이인수 찬 비문에는,
2) 皇朝僕射隨妹婿都督璘으로 되어있으나, 이 중 隨 ->共, 都督 ->陳都督 으로 고쳤다.
崔 監司 俔 ->晛으로, 軍屯營 ->相軍屯營으로 ‘相’을 추가 했다. 이외 碑面이 훼손되어 독해가 어려웠던 靑烏의 ‘烏’, 其吉亦徵의 ‘亦’을 바로 잡을 수 있었다.
한편 비문을 찬한 류석우 옹은 영남의 저명한 한학자로서 필자가 청년시절 경전을 배운 바 있다. 필자에게 경전독해에 눈을 뜨게하였던 스승으로 반가움이 더한다. 특히 서경은 중국의 역사와 지리,예악,풍속 등 다양한 박식이 있어야 해석이 되는데 유 옹은 거침없이 해석하던 것으로 당시의 제자들을 놀라게 하였다.
구비(舊碑)는 묘앞에 세워져 있었으나 칠곡도호부사 李民秀 공이 비문을 쓴지 백여 년을 경과한 지라 이끼가 끼고 돌결이 일어나 독해가 불가능함으로 9세 손 병선이 홀로 석물 등을 맡고 힘써 고쳐 모명제 뜰에 세우는 바이다. 이에 감히 이런 사실을 후인에게 알리고자 한다.
19. 불교전래 사은비
가. 건립
1972년 5월 10일건립, 부여 금강 백제교 옆, 일본불교도 田中智學 발원,
나. 비음
일본 불교는 일본국 흠명조 (서기552)에 백제 26대 성왕이 전한 데서 시작된다. 그 후부터 발전을 거듭하여 일본문화의 정화를 이룩하였다. 일본불교도는 그 은덕을 천추에 잊을 수 없어 정성어린 감사의 뜻을 표하고저 한국불교도의 협찬을 얻어서 성왕의 예 도읍지인 이 곳에 사은비를 건립하고 한일양국민의 영원한 친선의 표로 삼음과 아울러 세계평화의 상징이 되기를 염원하는 바이다. 1972년 5월 10일 일본 불교사은사업회
20. 삼별초군 호국 항몽 유허비 三別抄軍護國抗蒙遺墟碑
- 강화도 -
가. 유허비
고려 삼별초의 호국정신 계승 발전을 위해 1989년 5월 2일 자매결연을 맺은 지 16 주년을 맞아 군민의 마음이 담긴 강화군 - 진도군 - 북제주군의 상징물을 삼별초군의 원정길인 3 개군에 설치하고 뜻을 기리고자 함.
강화군 - 고인돌(삼별초유허비 앞)
진도군 - 진돗개상(향토문화예술회관)
북제주군 - 돌하르방(돌 문화 공원)
나. 비음
이 터전은 강화도 삼별초군이 1270년 6월 1일 몽고에 대항하여 내 나라를 지키고자 궐기한 근거지이다. 원나라 볼모가 된 고려의 원종 임금이 환국할 새 문인 중신들마저 강화도를 버리고 개성으로 건너가니 용사들로 조직된 좌별초 우별초 신의군 등 삼별초군은 강화섬 여기를 발판삼고 단호히 몽고군에 결사항전 정황 따라 전라도 진도로 제주도까지 싸우다가 끝내 아름다운 꽃으로 흩어졌다. 이 곳은 이렇듯 몽고의 지배를 반대하던 고려무신의 전통정신을 끝까지 떨쳐 들어낸 근원지인지라 온 군민의 뜻을 모아 여기에 유허비를 세운다.
삼별초군 항몽함성 그 메아리 쟁쟁하다
호국항적 만고불변 장하도다 삼별초여
1993년 6월 1일 강화군민 일동 세움
인제 김영상 짓고 강촌 정규은 쓰다
다. 여담
필자가 고려 역사를 배울 때 ‘삼별초 난’으로 배웠다. 교과서에도 그렇게 삼별초 난으로 규정했다. 항몽호국군들을 난군으로 몰아부친 역사의 기록과 식민사관에 젖은 역사학자들의 횡포가 이렇게 지금까지 흘러오고 있다. 최영 장군이 대군을 이끌고 몽고군을 제압하지 않았더라면 외세지배는 더욱 극성을 떨었을 것이다.
21. 견휜(甄萱) 유적지
2022년 8월에 문경시 별무리 마을에서 농민문학 여름 세미나가 있었다. 그때 찾은 견훤의 유적지와 금하굴이다.
가.금하굴(金霞窟)
경북 문경시 가은읍 갈전리 산 170-1,
이곳은 신라 진성왕 (892) 무진주(武珍州: 현 광주)에서 후백제를 건국한 신라말 고려초기의 새로운 지배세력으로 등장한 후백제 시조 견훤왕 (867-936)의 출생 설화가 전해오는 금하굴이다. 이곳 견훤왕 출생 설화에 의하면 부유한 농가에 과년한 외동달이있었는데 밤이면 미소년이 찾아와 사랑을 하게 되어 몇 달이 지나니처녀는 임신을 하게 되었다.배가 불러오니 들에게 전후 사실을 이야기 하였는바, 아버지 말이 “커다란 삼뿌리를 몸에몰래 놓았다가 실을 꿴 바늘을 소년의 옷에 꿰어라.”하기에 그날 밤그대로 하였다. 그리고 아침에 실을 ㅓ다란 죽어 있었다.그레서 견훤이 자식이라고 한다. 그 후 지렁이가 살던 굴은 아침 저녁으로오색이 영롱하고 풍악소리가 금하굴이라 이름 하였고 ,원근 각지에서 이 소문을 듣고 몰려오므로 이 마을에 살던 심장자가 매입 00 0대에 곤혹을 치루자 그는 하인을 시켜 금하굴을 묻어버렸다. 그 후로는 풍악소리도 끊어지고 심장자 집도 졸지에 망해 버렸다 전한다. 해방 후 다시 굴을 원형대로 파냈으나 풍악소리는 더 이상 들리지 않았다고 한다.
나. 견훤 유적지
이곳은 신라 진성왕 6년(892) 무진주(武珍州:현 광주)에서 후백제를 건국한 신라말 고려초기의 새로운 지배세력으로 등장한 후백제시조 견훤왕(甄萱王, 867-936의 출생 설화가 전해오고 있는 곳이다. 삼국사기와 삼국유사 등 각종 문헌에 따르면 견훤왕은 상주 가은면(현 문경시 가은읍)사람으로 사불성(沙弗城:현 상주)을 근거로 호족화된 ᄋᆞ자개의 맏아들로 태어났다. 원래 성은 이씨로 스스로 성을 바꾸었다. 진성여왕 3년(889) 실정과 흉년으로 인한 농민전쟁이 발발함에 결연히 천하에 뜻을 품고 무진주에서 기병하고 그후 진성여왕 6년 (892) 완산군(完山郡:현 전주)에 도읍을 정하여 백제의 옛 강토를 대부분 복고한 당시 王建,弓裔와 더불어 후삼국시대를 연 영웅이다. (중략) 이 밖에도 견훤왕과 관련된 유적으로 견훤산성, 가은성,회영산성, 작성, 근품산성과 치마산이 있고 지명으로는 아차동 말바위, 아차산, 천마산과 농암궁터, 북짓골, 어류동, 성저와 성유 등이 산재해 있다.
22. 제주 4.3 현의합장영령 유허비(顯義合葬英靈遺墟碑)
현의합장합장묘옛터 Old Burial Ground of Hyeonuihapjangmyo
이곳은 4.3사건 당시 의귀초등학교에 주둔했던 군인들에 의해 주민 80여 명이 집단학살 당한 후 학교 동녘 밭에 흙만 대충 덮인 채 방치되었던 시신들을 옮겨 3개의 구덩이에 매장(埋葬)한 곳이다. 2003년 9월 16일 세 구덩이의 유해를 발굴하엿는데 수습이 힘들 정도로 엉클리어 있어 당시 참혹했던 상황을 알 수 있게 해주었다. 서쪽 구덩이 17구, 가운데 구덩이 8구, 동족 구덩이 14구 등 총 39구의 유해와 50여 점의 유품이 함께 발굴되었다. 발굴 직후인 9월 20일 수망리 ‘신산마루’지경에 새 모역을 비로소 안장(安葬)하였다. 세월의 무게를 ᄀᆞᆷ당하지 못해 이미 흙으로 돌아간 유해도 다수 있어 ‘흙 한 줌’으로 대신하였다. 2010년 5월 10일 ‘현의 합장 영령유허비’를 세워 억울한 희생자들이 묻혀 있던 곳임을 알리고 있다. (2024년 4월1일,제주 서귀포시 남원면?)
고전편 완료
사진 4. 대구 수성못 시의 네거리
김동인,최남선,주요한,현진건,박태원,박종화,이상화,박영희,이장희,백기만,이태준,홍사용,정지용,김영랑,나도향
사진 5. 2004년 2월 1일,
장남 최임영, 손녀 최서연(당시 4세)과 함께 송파구 석전동에 있는 조선 인조 때의 삼전도비를 찾다.
사진 6. 중국 태산의 ‘무자비’옆에는 두 기의 시비가 있다.
당대 시인 짱추안(張銓)의 ‘觀無字碑’ 시비와 1961년 중국시인 궈모뤄(郭沫若)(1892-1978)의 ‘爲望泰山觀日未遂’가 그것이다.
사진 7. 중국 공부 자공수식해(자공이 황련목을 심다)
사진 8. 상해 대한민국임시정부 구지舊址, 상해시 노만구 인민정부 1990년 2월 19일 공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