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592년 임진왜란
임진왜란은 임진년인 1592년(선조 25) 4월 13일(양력 5월 23일) 선봉장 고니시 유키나가가 700척의 배에 18,700명이 먼저 침공하여 시작되고 1598년(선조 31년) 12월 16일까지 약 7년간 왜의 도요토미 정권이 침략한 전쟁이다.
임진 외란의 원인은 도요토미 히데요시의 개인 야망, 명이 勘合貿易(경제적인 이해관계로 허가증을 가지고 하는 무역)을 중단시켜 왜의 막부가 1551년 이후 경제적인 어려움, 왜의 영주 계급에게 영토를 확장해서 영지를 넓혀 주기 위해 征明假道(명을 정벌로 하러 가는 길을 빌려 달라)가 조선을 침략한 명분이다
왜군의 征明假道 공언으로 명나라가 파병 참전하면서 명, 조선, 왜 세 나라 간에 동북아의 형세를 바꾼 국제전이 되었다 나라마다 전쟁의 명칭이 다른데 명군이 참전할 당시 ‘동사’(東事), ‘왜범조선’(倭犯朝鮮), ‘왜구조선’(倭寇朝鮮), ‘왜사’(倭事) 등 다양하더니 17세기 초에 ‘조선을 도운 전쟁’(東援一役)에서 이제 중국과 대만은 抗倭援朝라고 한다 6.25 동란을 중공에서 抗美援朝라고 하니 미국에 대항해 북조선을 도왔다는 뜻이다
왜는 19세기까지 조선정벌 삼한정벌을 사용하더니 대한제국을 강점한 1910년부터 분로쿠게이초노에키(文祿慶長の役)라 쓴다 분로쿠는 1592~1595년까지, 게이초는 1596~1614년까지 왜의 연호로 문록경장 시대의 전쟁이란 뜻이다.
1586년 임진란 6년 전 도요토미 히데요시가 왜의 6주를 하나로 통합한 뒤 몇 차례 사신을 보내 올 때부터 침략할 뜻을 품었다 정세에 밝지 못한 선조는 선물한 조총을 제조나 사용방법을 찾지 않고 보관하며 국서가 거만하다 하여 일본에 사신을 보내지 않았다
조총은 한 발을 쏘고 화약을 재는 시간이 활을 꺼내서 쏘는 시간보다 더 오래 걸려 활보다 성능이 못하다고 봤지만 실제 전투에서는 3열 횡대로 세우고 1열이 발사하고 맨 뒤 돌아가고 2열이 발사하고 맨 뒤로 돌아가고 3열 발사하고 맨 뒤로 돌아가면 계속해서 순환을 하며 조총을 발사할 수 있게 된다
1590년 3월에 왜의 정세를 살피려고 황윤길과 김성일을 정사와 부사로 보냈으나 돌아와 황윤길 반드시 전쟁이 있을 것이라 하고 김성일은 쳐들어오지 않을 것이라 복명하여 대비가 소흘했다
일본이 본격적인 침략 준비를 한 것은 1591년 7월 도요토미 히데요시가 히젠에 나고야 성을 쌓고 주변에 20만 명 정도가 살 수 있는 신도시를 건설하여 전쟁의 거점이 됐다.
여기에서 전국 각지의 군인들이 모여서 이기섬에서 스시마까지 하루 쓰시마에서 부산까지 하루거리다
도요토미는 나고야[名護屋]에서 제군(諸軍)을 지휘할 계획을 세우고 대군을 9번대(番隊)로 나누어 침략을 개시하였다.
제1번대는 주장 고니시로 병력 1만 8700명이며, 제2번대는 주장 가토 기요마사[加藤淸正]로 병력 2만 2800명, 제3번대는 주장 구로다[黑田長政]로 병력 1만 1000명, 제4번대는 주장 모리[毛利吉成] · 시마즈[島津義弘]로 병력 1만 4000명, 제5번대는 주장 후쿠시마[福島正則]로 병력 2만 5000명, 제6번대는 주장 고바야가와[小早川隆景]로 병력 1만 5000명, 제7번대는 주장 모리[毛利元之]로 병력 3만명, 제8번대는 주장 우키다[宇喜多秀家]로 병력 1만명, 제9번대는 주장 하시바[羽柴秀勝]로 병력 1만 1500명으로 육군 15만 8700명의 정규 병력과 구키[九鬼嘉隆] · 도토[藤堂高虎] 등이 인솔한 수군(水軍) 9,000명이 승선하여 해전에 대비했고, 구니베(宮部長熙) 등의 1만 2000명은 후방 경비를 했고 하야가와[早川長政] 등이 부산에서 선척을 관리하는 등 정규 전투병 외에도 많은 병력이 출동하여, 전체 병력은 20여만 명이나 되었다.
나고야 성을 출발하여 부산 도착까지 사흘이 걸리는데 고니시가 인솔한 제1번대는 1592년 4월 13일 오후 4시 전후 병선 700여 척에 나누어 타고 부산포 앞바다 도착하여 4월 14일 부산포에 침입하여 부산진의 첨사 정발(鄭撥)은 600명이 채 안되는 병력으로 적과 싸우다가 패하여 전사했다
동래성에 4월 14일 경상 좌병사 이각과 양산 군수 조영규, 울산 군수 이언성의 병력이 집결했고 동래성은 이미 포위되어 동래부사 송상현은 갑옷 위에 조복인 관복을 입고 의자에 앉아 있는데 왜적이 생포하려 하자 발로 걷어차면서 항거 하다가 죽음을 당해 부산과 동래의 지휘관이 모두 전사를 했다
경상좌도 좌수영에 왜군이 이르자 경상좌수사 박홍朴泓은 동래부로 달아나고 동래부를 떠나면서 주변과 상부에 왜의 침임을 보고하여 4월 17일 한성부에 전달되었다
전라좌수사 이순신도 4월 15일 왜의 침입을 알게 됐고 다대포진은 4월 14일 왜군의 침입을 윤흥신尹興信 첨사와 장병들이 막아내는 승전이 있었으나 15일 대규모 왜군에 맞서 싸우다 전사했다
왜적이 침입을 조정에서 안 것은 난이 일어난 지 4일째 되는 날 경상좌수사 박홍의 부산진성 함락의 장계(狀啓)였다
조정은 급히 대책을 논의하여 李鎰을 순변사로 조령 · 충주 방면의 중로를, 성응길(成應吉)을 좌방어사로 죽령 · 충주 방면의 좌로를, 조경(趙儆)을 우방어사로 추풍령 · 청주 · 죽산 방면의 우로를 방어하도록 하였다.
유극량(劉克良) 조방장은 죽령을 지키고, 변기(邊璣) 조방장은 조령을 지키도록 했으며, 변응성(邊應星)을 경주부윤에 임명하여 임지로 보냈다.
오랜 기간 태평세월이 계속되어 인솔하여 전장으로 떠날 군사가 없었다. 명령을 받은 장수가 군사 모이기를 마냥 기다릴 수도 없어서 이일은 명령을 받은 지 3일 만에 떠나야 했으며, 신립을 도순변사로 삼아 이일의 뒤를 이어 떠나게 하고, 좌의정 유성룡(柳成龍)을 도체찰사로 삼아 제장을 검독(檢督)하게 하였다.
제승방략 체제에 따라 경상감사 金睟는 왜란을 열읍(列邑)에 알리고 문경이하 군현이 각자 군사를 인솔하고 대구에 모여 경장(京將)이 오기까지 대기토록 했다 군현의 수령들이 군대를 이끌고 약속된 지점으로 빨리 가야 했고 순변사 李鎰이 빨리 와서 전체를 통솔을 했어야 되는데 서울에서 지휘관을 내려 보내는 시간이 너무 오래 걸렸다 李鎰보다 왜군이 먼저 대구에 도착하여 군사들이 동요하고 비도 내리고 군량 보급도 여의치 않아 밤중에 모두 흩어져 싸워보지도 못하고 붕괴되었다. 왜적의 공격 속도가 조선에서 대비할 수 없을 만큼 빨랐고 규모가 컸다
유성룡은 징비록에서 진관체제鎭管體制가 무너지고 제승방략制勝方略체제로 변경된 것이 문제였다고 지적했다
세조 때 완성 된 진관 체제는 팔도에 병마사兵馬使가 주진主鎭을 지키고 주요한 곳에 거진巨鎭을 두고 주진 아래 몇 개의 거진이 있고 거진 마다 각 군현이 진鎭으로 딸린다 주진 거진 제진諸鎭의 3단계 체제로 전국을 연결하는 것이다
경상도 진관 체계는 좌병사左兵使가 울산 주진을 두고 경주 안동 대구가 거진으로 관할지역의 군현이 제진으로 나누어 참가한다. 경상우도는 右兵使가 창원에 주진을 두고 상주 진주 김해의 거진에 문경진은 성주 선산 금산 개령 지례 고령 함창 등의 진과 함께 상주 거진에 속했다
외적이 침략해 오면 각 고을 진에서 막고 곧바로 거진에서 군대가 가고 주진 군대가 가서 군대가 점점 많아지면서 외적을 막는 방법이 진관체제로 제대로 유지되기 위해서는 주진 거진 제진에 충분한 군사가 상주하고 있어야 된다
군인의 수가 많아야 되는데 전쟁이 없이 100년 이상이 지나가니까 방군수포放軍收布라고 군대 가는 대신에 포를 내는 대역납포代役納布가 생겨 포가 돈이니까 돈 내고 군대를 안 가게 되고 직접 군대를 가지 않고 사람을 사서 군대를 보내는 대립代立이라는 풍조가 만연하게 됐다 조선 전기는 양인계병제良人皆兵制 였으나 임란직전 근역軍役자원은 199,407명이었다
군인의 수가 줄어 진관 체제가 제대로 작동할 수 없자 현실에 맞게 방어 시스템을 바꾼 것이 제승방략이다
재승방략은 전쟁이 일어나면 각 고을의 수령들이 군사를 이끌고 약속된 지점에 집결하고 서울에서 지휘관이 내려와 군대를 지휘해서 전투를 하는 것이다
각 고을마다 충분한 군대가 없어도 모아서 전투를 하는 것이지만 임진란에 제대로 작동을 하지를 못했다 수령들이 군대를 이끌고 대구에 모이는 시간 서울에서 巡邊使가 오는 시간보다 왜군의 침입이 더 빠르고 감당하기 어려운 대군이라 무너지고 말았다
고시니유기나가 군은 관군의 저항 없이 중로(中路)로 양산 · 밀양 · 청도 · 대구 · 인동 · 선산을 거쳐서 상주를 침략했다
가토군은 19일 부산에 상륙하여 경상 좌도의 장기 기장을 거쳐서 좌병영 울산을 함락하고, 경주 영천 신령 의흥 군위 비안을 거쳐 하풍진을 건너 문경으로 침입 중로군과 합하여 충주로 들어갔다.
같은 날 구로다군은 동래에서 김해로 침입하여 경상 우도로 성주의 무계(茂溪)에서 지례 김산(金山)을 지나 추풍령을 넘어 충청도의 영동으로 나와 청주 방면으로 침입하였다. 모리 · 시마즈군은 김해에서 창녕을 점령한 다음 성주 개령을 거쳐 추풍령 방면으로 향하였다.
후쿠시마군과 고바야가와군은 모리 등이 이끄는 군과 후방을 지키며 북상하였다. 우키다군은 5월초 부산에 상륙하여 서울이 함락을 알고 급히 북상하였고 하시바군은 4월 24일 이키도에 유진(留陣)하고 침략을 대비하고 있었다.
이일 순변사가 4월 23일 군관 60여명과 상주에 도착했으나 상주목사 김해(金澥)는 산속에 숨고 판관 권길權吉만이 읍(邑)을 지키고 있었는데 순변사 이일은 상주에 이르러 판관에게 군사가 없음을 꾸짖자 창고를 열고 관곡을 내서 흩어진 백성들을 모아 800명에 이르자 훈련을 받은 적 없는 농민이라 급히 대오를 편성하였다.
24일 상주 북천변(北川邊)에서 습진(習陣)으로 전세를 갖추다가 25일 왜군의 제1번대 고니시군의 정찰부대의 공략으로 대패하자 이일은 단신으로 탈주하여 문경에서 상주의 패전을 치계(馳啓)하고 충주에 있는 신립에게 갔다. 이일의 종사관 朴篪, 尹暹, 李慶流는 전사하여 뒤에 충의단에 제향 되고 판관 권길, 사근도 찰방 金宗武도 전사하여 뒤에 충열사에 향사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