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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출발점에 서다
채널전환
수수께끼
사슴이 죽어 있다. 어떤 사람이 말했다. 이 사슴은 죽은 사슴이야. 모든 사람이 동의했다. '암 그렇고 말고. 그 사슴은 죽은 사슴이 맞아.' 그들은 만족해서 가던 길을 갔다. 또 한 무리의 사람들이 찾아왔다. 어떤 사람이 말했다. '이 사슴이 죽은 이유는 총에 맞았기 때문이야.' 모든 사람이 동의했다. '원인이 있으면 결과가 있는 법. 원인은 총에 맞은 것이고 결과는 사슴이 죽은 것이지. 수수께끼는 모두 풀렸어.' 그들은 만족해서 가던 길을 갔다. 아무도 사슴을 죽인 총알이 어디서 날아왔는지에 대해서는 묻지 않았다. 이상하지 않은가? 이상함을 느낀 사람이라면 다음 페이지로 전진해 보자. 가야할 길은 아직도 멀다. 그래서 우리는 편안할 수 있다.
이상하다
천동설이 이상하다는 점은 누구나 직관적으로 느낀다. 왜냐하면 이상하기 때문이다. 불편함이 있다. 지동설로 바뀌고 편안해졌다. 지동설은 인류가 아무 것도 모른다는 사실을 깨닫게 한다. 아직 주문한 요리가 덜 나왔다는 사실을 우리는 알고 있다. 뭔가 부족해 보이지만 주방에서 조리하는 소리가 들린다. 기다릴 수 있다.
다시 한 번 불편함을 느껴야 한다. 이상하지 않은가? 천동설이든 지동설이든 보이는 것은 관측자 입장이다. 반대편 연출자 입장은? 스크린 반대편에 필름이 있어야 한다. 지동설의 충격은 스크린에 펼쳐진 이미지가 실물인줄 알았는데 알고보니 그림자에 지나지 않는다는 사실을 깨닫게 한다. 그렇다면 실물은 어디에 있는가?
전율하다
전율함이 있어야 한다. 전율을 경험한 사람과 그렇지 않은 사람의 눈빛이 같을 수는 없다. 겉만 보다가 처음으로 속을 들여다 봤을 때 인간은 전율한다. 세상의 다른 지점을 바라보는 훈련이 필요하다.
에너지가 솟구쳐야 한다. 흥분해야 한다. 손이 덜덜 떨려야 한다. 연속적인 액션의 관성력에 태워져야 한다. 생태적 지위가 바뀌고, 생활환경이 바뀌고, 호르몬이 바뀌고, 몸이 바뀌어야 마음이 바뀐다.
내 눈에 빨갛게 보이는 것은 다른 사람 눈에도 빨갛게 보인다. 사람마다 생각이 다를 수 없고 행동이 다른 것이다. 서로 다른 집단에 소속되어 서로 다른 파도에 휩쓸려가며 서로 다른 지점을 바라본다.
세상에 양면이 있는데 80억이 한쪽 면만 보고 있다면 끔찍하다. 사람의 생각이 같은게 아니고 채널이 부족한 것이다. 다른 채널을 개설하여 다른 악기를 연주하며 다른 세계로 가는 문을 열어야 한다.
도처에 막혀 있다. 도무지 말이 통하지 않는다. 전율을 경험하지 않은 사람과는 대화할 수 없다. 한 번도 존재의 안쪽을 들여다본 적이 없는 사람과는 대화할 수 없다. 눈빛이 통해야 비로소 말할 수 있다.
채널전환
다음 단계로 가는 이정표가 필요하다. 인류의 첫 번째 모노리스는 유클리드의 원론이다. 사유의 출발점이 되는 기본단위를 제안했다. 두 번째 모노리스는 갈릴레이의 운동법칙이다. 과학은 내부를 보는 것이다. 갈릴레이가 처음 내부를 봤다. 내부에는 운동 메커니즘이 있었다. 이후 완전히 다른 세계가 열렸다.
외부 관찰은 수집되지만 내부 메커니즘은 복제된다. 지식은 무한복제되어 폭발적으로 늘었다. 부족민의 채집경제와 같은 개별수집에서 메커니즘의 대량복제로 문명의 형태가 바뀌었다. 그러나 인류의 사고는 여전히 채집수준에 머물러 있다. 선발대인 과학이 바뀌었을 뿐 인류는 생각의 도구를 바꾸지 않았다.
우리는 본능적으로 바깥을 본다. 인간의 눈이 밖을 향해 있기 때문이다. 내부는 의식적으로 사유의 방향을 틀어서 보려고 해야 보인다. 원자론의 고정관념을 깨야 한다. 원자의 내부가 없다는 말은 내부를 보지 않겠다는 선언이다. 인간이 스스로 한계를 정하고 눈을 감은 것이다. 원자 내부에 메커니즘이 있다.
각종 음모론, 초능력, UFO, 지구평면설, 종교와 주술, 극단주의 등 인간의 모든 비과학적 기동은 사람을 동원해서 변방에서 사설권력을 창출하려는 것이다. 진리에 전율하지 않고 사람만 모이면 흥분한다. 농부들이 산나물을 채취하듯이 21세기에 지식채취꾼들이 온통 들쑤시고 다니며 채집과학을 하고 있다.
더 높은 세계로 도약해야 한다. 인류 문명의 세 번째 모노리스가 필요하다. 인류는 여전히 문간에서 서성대고 있다. 과학이 물질의 내부를 조사했다고는 하나 인간의 의사결정 메커니즘 내부는 쳐다보지도 않았다. 보여지는 극장의 내부를 둘러봤을 뿐 보게 하는 촬영장 내부는 조사할 엄두도 내지 못하고 있다.
인지혁명
이유극강
돌멩이 두 개가 충돌했다면 충돌 에너지는 어디로 갔을까? 돌은 깨져서 가루가 된다. 에너지는 가루로 변했다고 볼 수 있다. 기름 두 통이 충돌하면 어떨까? 그것이 유압장치다. 기름은 깨지지 않는다. 이미 깨져 있기 때문이다.
유체의 에너지는 보존된다. 여기서 없던 것이 생겨났음을 알 수 있다. 그것은 압력이다. 유체는 강체에 없는 것이 있다. 하나가 더 있으므로 유체가 강체를 이긴다. 삼차원과 사차원의 차이다. 사차원은 내부에 압력이 걸려 있다.
강체가 뭉치면 유체다. 사람 한 명의 행동과 집단의 행동은 다르다. 집단 내부에 스트레스 형태로 압력이 작용하는 것이 권력이다. 인간의 행동은 개인의 동기가 아니라 상당부분 집단의 스트레스에 의한 무의식이 결정한다.
세 개의 극이 있다. 강체의 극은 작은 수, 유체의 극은 큰 수, 세 번째 극은 강체가 유체로 바뀌는 한계다. 강체가 유체로 바뀌면 이후 가는 길이 완전히 달라진다. 인간의 내면에 유체가 만들어지면 삶은 극적으로 달라진다.
유체는 동질성을 얻어서 내부가 균일해야 한다. 울타리에 가두고 권력으로 압박하여 억지 동질성을 강제하지만 그것은 일회용 가짜다. 다른 그릇에 담아 다른 임무를 주면 강체로 돌아간다. 스스로 유체가 되어야 완전하다.
방향전환
태초에 낳음이 있었다. 그리고 그것은 나타났다. 낳는 것은 힘이고, 힘은 방향이 있고, 방향은 전환된다. 우주 안에 궁극적으로 부단한 방향전환이 있을 뿐이다. 방향전환 메커니즘을 알아야 한다.
사건의 원인과 결과를 연결하는 것이 메커니즘이다. 원인과 결과 둘 사이에 숨은 셋이 있다. 그것은 힘과 조절과 방향이다. 우리는 사건에 눈을 감고 사물에 주목하다 메커니즘의 존재를 놓쳤다.
겉에 드러난 원인과 결과 말고 안에서 그것을 결정하는 것이 있다. 그것을 붙잡고, 떼어내고, 보낸다. 이기는 힘과, 권력균형과, 극한의 법칙이 에너지 격발과, 조절과, 전달의 메커니즘을 완성한다.
이기는 힘은 힘의 원리다.
1. 이기는게 힘이다.
2. 내력은 하나가 더 있다.
3. 힘은 일점이 전체를 결정한다.
4. 힘은 최소시간, 최소액션, 최대효율, 최단경로를 찾는다.
5. 힘은 파동의 간섭에 따른 밸런스의 복원력이다.
권력균형은 힘의 연결을 조절한다.
1. 권력 = 이득 + 리스크다.
2. 대칭은 효율적으로 전달한다.
3. 비대칭은 주는 자가 받는 자를 이긴다.
4. 주는 권력과 받는 이득 + 리스크의 균형이 있다.
5. 결정론은 틀렸고 확률론은 결과론이고 조절론이 옳다.
극한의 법칙은 힘의 방향을 판단한다.
1. 모든 변화는 방향전환이다.
2. 큰 극과 작은 극 사이 일점에 코어가 형성된다.
3. 큰 것과 작은 것을 대조하여 에너지의 방향을 판단한다.
4. 유체에서 강체, 닫힌계에서 열린계, 결정자에서 전달자로 간다.
5. 결과보다 원인을 보고 공간보다 시간을 봐야 한다.
이기는 힘이 활이면, 권력균형은 활시위, 극한의 법칙은 화살이다. 먼저 활을 잡고, 화살을 겨냥하고, 다음 발사한다. 에너지 입력과 출력 사이에 밸런스를 만들고, 힘을 조절하고, 방향을 지정한다.
지금까지 인류가 주목한 것은 과녁이다. 과녁에 화살이 증가하면 엔트로피, 어디선가 화살이 날아온다는 질량보존, 과녁에 이득이 있다는 애덤 스미스, 과녁에 서면 위험하다는 내시균형이 있다.
아무도 활에 주목하지 않았다. 화살이 3차원이면 활은 4차원이다. 화살이 강체면 활은 유체다. 집단의 무의식이라는 활이 개인의 마음이라는 화살을 쏜다. 화살에서 활을 찾고 있으니 길을 잃었다.
이기는 힘
비행기가 나는 원리를 정확히 아는 사람은 없다. 양력으로 설명하는게 보통이지만 나무위키에 '잘못된 양력이론' 항목이 있는 것을 보면 문제가 있다. 베르누이 효과는 날개의 형태를 설명할 뿐이다. 실제로 비행기를 공중에 띄우는 것은 날개의 받음각이다. 받음각도 충분하지 않다.
그런데 중력은 어디로 갔지? 중요한 핵심이 빠져 있다. 사람들이 비행기를 탈 때 두려움을 느끼는 이유는 중력이 어디로 사라졌는지 모르기 때문이다. 이륙중량 최대 365톤의 무게를 가진 거대한 점보기가 허공에 뜬다고? 실감이 안 난다. 말로 때우지 말고 몸으로 느끼게 해야 한다.
모터보트가 속도를 올리면 공중에 뜬다. 빠를수록 잘 뜬다. 추에 끈을 달아 회전시키면 추가 공중에 뜬다. 속도가 빠르면 중력이 사라지는 마술이다. 회전하는 추의 멀어지는 힘은 중력의 방향이 바뀐 것이다. 달리는 자동차의 관성력은 누구나 이해한다. 중력이 관성력으로 바뀌었다.
달은 지구가 당기는데 왜 떨어지지 않지? 원심력 때문이라고 말하면 되지만 그걸로 사람들의 불안감을 해소할 수 없다. 진실은 무엇일까? 달은 매순간 지구로 떨어지고 있다. 각도가 살짝 틀어져서 슬립이 일어났을 뿐이다. 비행기는 매순간 지구로 떨어지며 수평으로 미끄러진다.
비행기는 이미 떨어지고 있으므로 추가로 더 떨어지지 않는다. 실속하지 않는 한 추락할 일은 없다. 이제 알겠는가? 아니다. 아직 핵심이 남아 있다. 날아가는 비행기는 추력과 중력을 동시에 받는다면 둘의 중간값인 45도 각도로 비스듬히 떨어지지 않을까? 이것이 공포의 진짜 이유다.
이기는 힘을 알아야 한다. 닫힌계 안에서는 특별한 일이 일어난다. 중간값 45도로 타협하는 것은 열린계다. 우리는 닫힌계에서 내력이 작용하는 원리를 모른다. 내력이 외력을 이기면 코어가 전체의 방향을 결정한다. 밸런스가 움직여서 방향을 선택하고 나머지는 파동에 흡수된다.
범선은 바람이 어느 방향에서 불든 전진한다. 공이 벽에 맞으면 튄긴다. 날아가는 비행기의 중력은 추력의 벽에 맞고 튕겨서 각도가 수평으로 틀어진 것이다. 야구공에 들어간 투수의 힘은 어디로 갔지? 타자의 방망이에 흡수되었다. 두 힘이 맞설 때 누가 이기느냐에 따라 달라진다.
이기는 힘은 마술을 부린다. 임계을 넘는 순간 180도로 태도를 바꾼다. 유체의 몰아주는 성질을 이해하는게 중요하다. 화약의 폭발력은 100 퍼센트 총알을 전진시키는데 사용된다. 사방으로 흩어진 화약의 폭발력이 서로 충돌하여 힘이 상쇄된다고 믿기 때문에 불안해지는 것이다.
엔진 속에서 가솔린의 폭발력은 백 퍼센트 피스톤에 전달된다. 이기는 힘을 모르면 베르누이 정리를 알고, 양력을 알고, 받음각을 알고, 원심력을 알아도 아직 아는게 아니다. 닫힌계를 걸어주면 강체가 유체로 바뀌고 우리의 통념과 다른 현상이 일어난다. 유체의 매력이 그곳에 있다.
이기는 힘은 최소시간, 최단경로를 따른다. 비행기가 뜨는 이유는 내부 밸런스 싸움에서 이겼기 때문이다. 그 길이 밸런스를 복원하는 최단경로였던 것이다. 누가 이기느냐가 결정한다. 추락의 공포가 실속의 공포로 대체될 때 힘을 이해한 것이다. 이기는 힘의 놀라운 세계로 안내한다.
권력균형
주는 자와 받는 자는 대등해야 한다. 체격 차이가 있으면 곤란하다. 개미는 코끼리에게 줄 수 없다. 받을 수도 없다. 코끼리도 개미에게 줄 수 없고 받을 수도 없다. 무리해서 주고받으려 한다면 사고 난다. 비효율적이다.
주는 자와 받는 자는 대등하지 않다. 주는 자가 우위에 선다. 대등하면 교착된다. 줄 이유도 없고 받을 이유도 없고 만날 이유도 없다. 연결이 끊어진다. 관계를 유지하려면 비대칭적인 주고받기의 흐름을 이어가야 한다.
딜레마가 있다. 평등해야 하지만 평등할 수 없다. 주는 자가 손해다. 주는 자의 호주머니에서 빠져나간다. 주는 자가 받는 자보다 강하지만 주는 자의 손해가 쌓여 관계가 계속되면 평등해진다. 주는 사람은 계속 줘야 한다.
주는게 권력이다. 받는 자가 손해다. 받는 자는 주는 자를 따라다녀야 하므로 행동에 제약이 있다. 받는 자는 리스크 부담을 진다. 주는 자가 변덕 부리면 곤란해진다. 주는 자는 리스크 부담이 없다. 힘들면 안 주면 된다.
권력적 우위는 주는 부모에게 있고 물질적 이득은 받는 자식에게 있다. 부모와 자식의 관계는 대등해야 하지만 대등할 수 없다. 여기에 균형이 있다. 권력과 이득을 둘 다 가지려 하면 관계가 파탄나므로 조절해야 한다.
우리가 대칭이라고 믿는 것은 모두 비대칭이다. 빛과 어둠, 선과 악, 여당과 야당, 진보와 보수, 중력과 부력, 머리와 꼬리는 평등하지만 평등하지 않다. 전달의 효율성을 따라 대칭을 띠지만 에너지와 권력은 비대칭이다.
자연의 대칭성은 에너지 전달의 효율성을 반영한다. 잘 주고 잘 받으려면 코끼리와 개미로는 곤란하다. 국제사회는 형식적으로 평등한 척 한다. 잘 주고 잘 받으려는 것일 뿐 중국과 인도의 큰 덩치는 피곤한게 사실이다.
우주는 결정자의 차별원리와 전달자의 평등원리로 작동한다. 비대칭성과 대칭성이 동시에 작동한다. 그런데 비대칭이 앞선다. 큰 것이 앞서고 작은 것이 따른다. 작은 것이 덩치를 키워 큰 것과 대등해지면 효율적이다.
인류는 뉴턴 이래의 결정론적 사고를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 결정론적 사고는 자연의 조절원리와 맞지 않다. 자연은 효율을 따르며 효율은 평등을 지향하므로 단위마다 리셋되어 사전에 결정될 수 없다. 결정론은 틀렸다.
자연은 대등해야 하므로 대등해질때까지 기다린다. 선두 반보 지시하고 속도를 조절한다. 보급이 올때까지 대기한다. 대등하면 안 되므로 변별력을 높인다. 시험의 난이도는 갈수록 높아진다. 자연은 이중으로 조절한다.
양자역학의 등장 이래 과학은 우연과 확률로 설명하지만 그것은 수학으로의 도피다. 평등해지고 불평등해지는 것은 필연이다. 자연은 닫힌계 내부를 압박하여 필연을 만든다. 필연에 이를때까지 압박의 강도를 높인다.
일어날 일은 일어난다. 일어날때까지 압박한다. 비행기 조종사는 전투기가 감당할 수 있는 한계까지 기체를 몰아붙인다. 더 높은 고도에 더 높은 압력, 더 빠른 속력으로 압박한다. 터질때까지 압박하므로 결국 터진다.
우주는 강체가 아니라 유체다. 결정론은 강체의 논리다. 우연론과 확률론도 강체의 논리를 벗어나지 못한다. 우연과 확률은 느슨한 유체로 본 것이다. 더 많은 에너지로 압박해서 우연을 필연으로 바꾸므로 느슨하지 않다.
외계인은 있거나 없거나 둘 중 하나다. 확률이 0이 아니면 백 퍼센트 있다. 지구에 없어도 어딘가에 있다. 확률이 0이면 확률은 필요가 없다. 확률이 필요한 느슨한 계는 인간이 만든 것이고 자연은 0 아니면 백 퍼센트다.
에너지는 효율성을 따른다. 인류는 전방위로 몰아붙인다. 햄버거 생산라인은 매우 효율적이다. 고압선은 최대한 전압을 높인다. 인류는 지구가 감당할 수 있는 한계까지 몰아붙인다. 결국 터진다. 이미 터졌을지도 모른다.
극한의 법칙
모든 도구는 똑같이 생겼다. 에너지 전달이라는 본질이 같다. 가장 간단한 도구는 막대기다. 손잡이에서 날로 동력을 전달한다. 막대기 두 개를 끼우면 가위가 된다. 가위의 날 숫자를 늘리면 바퀴가 된다. 메커니즘은 바퀴 두 개를 연결한다. 에너지를 주는 쪽과 받는 쪽이 있고 그 사이가 조절된다.
모든 기계장치는 구조가 같다. 실이 아무리 복잡하게 꼬여도 풀어보면 그냥 실이다. 모든 존재는 무언가를 전달한다. 정지한 것은 무게를 전달하고 움직이는 것은 질량을 전달한다. 인체는 입부터 항문까지 긴 파이프다. 막대기도 힘이 통과하는 파이프다. 모든 사물은 위상이 같다. 잘 보면 보인다.
메커니즘은 동력을 전달한다. 주는 쪽과 받는 쪽이 있다. 주는 쪽이 크다. 어른이 아이에게 준다. 머리는 꼬리보다 크고, 기관차는 객차보다 크다. 엔트로피 증가 법칙은 받는 쪽이 작은 대신 숫자가 많다는 말이다. 엔트로피는 받는 쪽을 본다. 엔트로피를 뒤집어 주는 쪽을 보면 극한의 법칙이다.
큰 것에서 작은 것을 빼면 에너지 낙차다. 그것은 의사결정비용으로 지불된다. 자연의 변화는 비용을 조달할 수 있는 방향으로 일어난다. 조절 스위치는 객차에 없고 기관차에 있다. 화살에 없고 활에 있다. 받는 쪽에 없고 주는 쪽에 있다. 우리는 조절장치가 있는 주는 쪽을 보는 훈련을 해야 한다.
극한의 법칙을 적용하면 직관적인 판단이 가능하다. 에너지 전달경로만 추려서 보면 위상이 같다. 문제를 이해하고 답을 검토하는 데는 시간이 걸리지만 판단 자체는 1초 안에 가능하다. 운전자는 0.1초에 판단한다. 초보운전자도 겁을 먹고 몸이 굳어서 그렇지 판단 자체는 조건반사로 일어난다.
극한의 법칙은 에너지를 주는 쪽과 받는 쪽을 대조하여 뇌 안에서 조건반사로 판단한다. 메커니즘의 머리와 꼬리를 구분힌다. 주변과 연결되는 라인이 많은 쪽이 머리다. 서울은 지방보다 연결되는 도로 수가 많다. 방향감각으로 판단한다. 에너지 방향성의 판단은 노이즈가 없으므로 믿을 수 있다.
실패는 엔트로피 증가에 따른 복잡성 때문이다. 받는 쪽을 보지 말고 주는 쪽을 보면 된다. 기슭이 복잡할 뿐 정상은 단순하다. 판단할 수 없는 문제는 판단할 수 있는 문제로 바꾸면 된다. 강체를 유체로 바꾸고, 열린계를 닫힌계로 바꾸고, 움직이지 않는 정을 움직이는 동으로 바꾸면 명확해진다.
받는 쪽은 엔트로피 증가로 헷갈리지만 주는 쪽은 이기는 힘의 최단경로 연결에 의해 명확하다. 닫힌계에 가두고 압박하면 강체가 유체로 바뀌고 이기는 힘의 최소액션에 몰아주는 성질이 작동한다. 사건의 시작점과 끝점의 차이가 화살표 기울기로 포착된다. 방향감각만으로 많은 것을 알 수 있다.
메커니즘
힘의 구조
구조는 '질, 입자, 힘, 운동, 량'이 있지만 우리가 아는 구조는 세번째 힘의 구조다. 예컨대 건축구조라고 하면 힘을 지탱하는 건물의 뼈대를 떠올리기 쉽다. 그것은 힘의 격발구조가 아니라 전달구조다. 전달구조는 대칭이다. 진정한 것은 격발구조이며 그것은 비대칭이다.
구조에 대해서는 그동안 충분히 말해왔으나 핵심이 전달되지 않은 느낌이다. 달을 가리키면 손가락을 보고 활을 가리키면 화살을 보는게 실패다. 인간의 인식은 언제나 한 단계 아래로 내려온다. 사건의 전모를 보지 못하고 수동적으로 눈에 보이는 것만 보면 잘못된다.
힘을 격발하는 엔진은 메커니즘 내부에 숨어 있고 그 힘을 전달하는 바퀴는 외부에 드러나 있다. 깨달음은 눈에 보이는 것 말고 한 단계 위로 올라가서 그것을 격발하는 메커니즘의 비대칭성을 보는 것이다. 결과 측 전달구조가 아니라 원인 측 결정구조를 보는 것이다.
메커니즘은 두 번째 입자다. 입자에 동력을 태우면 심장이 뛴다. 입자를 가리키면 그 아래 힘을 보는게 실패다. 입자 위의 질로 올라서야 입자가 보인다. 입자에 힘을 공급하는 동력원을 봐야 한다. 질, 입자, 힘, 운동, 량을 한 줄에 꿰어 전모를 보면 메커니즘이 눈을 뜬다.
손가락을 보지 말고, 달을 보지 말고, 둘의 대칭을 넘어 둘을 관통하는 에너지의 비대칭성을 발견할 때 달을 넘어 별과 은하로 확장하는 복제의 도구를 얻는다. 입자적 사고를 버리고 원인에서 결과까지 사건 전체를 한 줄에 꿰어서 보는 메커니즘적 사고를 얻어야 한다.
일방향성
화살은 머리와 꼬리가 있다. 앞뒤 구분이 있다. 대칭되어 있다. 마주보고 있다. 이는 인간의 관점이고 자연은 앞뒤가 없다. 인간의 관찰과 자연의 실재 사이에 결 어긋남이 있다면 어디에 맞추어야 하겠는가? 인간이 자연에 맞추어야 한다.
인력과 척력, 진보와 보수, S극과 N극, 선과 악, 중력과 부력, 정의와 불의의 대칭은 인간이 자연에 개입하는 방식일 뿐 자연의 본래 모습이 아니다. 모든 대칭은 가짜다. 자연은 메커니즘이다. 메커니즘은 대칭을 관통하는 일방향성이 있다.
대칭은 주는 자와 받는 자의 연결이다. 자연은 주는 자가 있을 뿐 받는 자가 없다. 화살은 일방적으로 날아와서 박힌다. 과녁이 유혹하여 화살을 빼먹는 것인가? 비는 일방적으로 내리고 바람은 일방적으로 분다. 자연은 언제나 일방적이다.
부력은 없다. 물의 중력이 누르면 상대적으로 가벼운 배가 뜬다. 실제로 변화를 격발한 것은 중력이다. 중력이 일방적으로 가만있는 배 밑으로 파고든다. 변화의 엔진은 중력에 있다. 배는 자발적으로 뜬게 아니라 물의 수압에 떠밀린 거다.
빛은 광자가 있고 어둠은 암자가 없다. 척력은 있고 인력은 없다. 궁극적으로 우주에 방향전환 메커니즘 뿐이다. 안에서 스스로 변화를 만드는 자발성 있어야 한다. 자체동력 없이 외력에 떠밀리면 가짜다. 우리가 아는 세상의 반은 가짜다.
방향전환
작용에 반작용은 없다. 반작용은 작용의 방향전환이며 작용의 말단부로 종속된다. 두 화살표 -> <-가 있는게 아니라 하나의 화살표 ->와 그 화살표의 방향전환이 있다. 그것이 메커니즘이다. 그것은 내부에 대칭을 품은 에너지의 비대칭이다.
우리는 대칭 짓기 좋아한다. 하늘과 땅, 육지와 바다, 낮과 밤이 대칭되어 있지만 자연의 모습이 아니라 인간의 편의다. 대칭은 타인에게 전달하기 좋은 세트 메뉴다. 자연은 그냥 있다. 하늘과 땅으로 나누는 것은 인간 중심 사고의 왜곡이다.
우주는 원소의 집합이 아니라 메커니즘의 복제다. 하나의 활이 많은 화살을 쏜다. 과녁에 날아와 박힌 많은 화살을 보고 인간은 많은 원소가 집합되었다고 착각한다. 활과 과녁은 대칭이다. 대칭은 인간의 관점일 뿐 에너지로는 비대칭이다.
인류는 문명의 첫 단추를 잘못 꿰었다. 80억이 일제히 우스꽝스런 바보짓을 한다. 자연과 인간의 결이 어긋나면 인간이 자연에 맞추어야 한다. 자연의 의사결정 메커니즘에 맞게 인식과 사유의 메커니즘을 기초부터 새로 빌드업 해야 한다.
세상을 대칭으로 보는 이분법적 사고, 이원론적 사유의 교착상태를 극복하고 에너지의 일방향성을 따르는 메커니즘적 사고, 일원론적 사유로 도약해야 한다. 인간에 의해 왜곡된 2를 자연의 순수한 1로 환원시킬 때 진짜 이야기가 시작된다.
기본단위
기본단위가 있다. 작은 것이 모여서 큰 것이 된다. 원자가 모여서 물질을 이루고, 대칭이 모여서 생각을 이루고, 단어가 모여서 문장을 이룬다. 이렇게 이해하기 쉽다. 틀렸다. 큰 것이 쪼개져서 작은 것이 된다. 방향이 반대다.
세상은 완전성의 복제다. 물질의 집합이 아니라 사건의 복제다. 단어가 모여서 의미를 획득하는게 아니라 의미가 쪼개져서 단어가 된다. 우주의 기본방향은 마이너스다. 근원에서의 변화는 언제나 쪼개질 뿐 합치지 않는다.
우리가 아는 기본단위는 인간이 자연에 다가서는 방식일 뿐 존재 그 자체와 상관없다. 존재는 사건이며 사건의 기본단위는 메커니즘이다. 대칭이 모여서 메커니즘을 이루는게 아니라 반대로 메커니즘이 쪼개져서 대칭된다.
의사결정의 단위가 존재단위다. 그것은 액션이며 궁극적으로는 방향전환이다. 우주 안에 방향전환이 있을 뿐이다. 그것은 정靜이 아니라 동動이다. 원자가 모여서 물질이 되는게 아니라 메커니즘의 작동이 갇힌 것이 원자다.
광원과 광자와 피사체와 스크린과 영상이 정렬하면 빛의 움직임이 그림자의 움직임으로 복제된다. 물레방아는 불레와 방아를 연결한다. 물레의 운동이 방아의 운동으로 복제된다. 둘은 일차원에 정렬하여 한 방향으로 간다.
보통생각
내 눈에 빨갛게 보이는 것은 다른 사람 눈에도 빨갛게 보인다. 사람마다 생각이 다를 수는 없다. 각자 생각이 다른 것이 아니고 행위가 다른 것이다.
행동을 격발하는 것은 호르몬, 호르몬을 결정하는 것은 무의식, 무의식을 결정하는 것은 집단과의 관계다. 생각이 다른게 아니라 역할이 다른 것이다.
새들은 둥지를 찾아 깃들고 짐승은 굴 속으로 숨는다. 각자 걸맞는 생태적 지위를 찾아가는 것이다. 인간 역시 사회 안에서 생태적 지위를 찾아간다.
진보와 보수는 생각이 다른 것이 아니라 포지션이 다른 것이다. 역할이 다르고 생태적 지위가 다르다. 지위를 높이려는 자와 지키려는 자의 차이다.
보통 사람의 보통 생각은 보통 틀린다. 사람들은 생각하지 않고 반응한다. 집단과 보조를 맞춘다. 집단이 결집하면 관성력이 걸리므로 궤도에 갇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