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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2. 그리스도께서 쓰신 방법의 실례
" 세상 중에서 내게 주신 사람들에게
내가 아버지의 이름을
나타내었나이다" (요 17:6)
한 사람의 교육자로서 그리스도께서 사용하신 방법 중에 가장 완전한 실례는 그분께서 처음으로 열 두 제자를 교육하신 데서 찾을 수 있다. 이들에게는 무거운 책임이 지워질 것이었다. 그리스도께서 그들을 택하신 것은 그들에게 당신의 정신을 불어넣어 나중에 당신께서 세상을 떠나시더라도 남은 사업을 계승하기에 합당한 자가 되도록 준비시키기 위해서였다. 누구보다도 그들에게는, 그리스도께서 친히 교제해 주시는 유리한 조건이 주어졌다. 이 개인적인 교제를 통하여, 그분께서는 이들 택함 받은 동역자들에게 당신에 대한 깊은 인상(印象)을 심어 주셨다. 그분께서 사랑하신 제자 요한은 " 이 생명이 나타내신 바 된지라 이 영원한 생명을 우리가 보았고 증거" (요일 1:2) 한다고 말하였다.
이런 교제, 곧 마음과 마음이 이어지고 생각과 생각이 이어지는 사람과 하나님과의 교제를 통해서만 참된 교육 사업이 줄 수 있는 생명의 힘을 전할 수 있다. 이것이야말로 생명을 낳는 유일한 생명인 것이다.
주님께서는 당신의 제자들을 교육하실 때에, 창세시에 세우신 교육 제도를 사용하셨다. 처음으로 택하신 열 두 제자와, 필요한 봉사를 위하여 때때로 그들과 관계를 가진 소수의 사람들이 예수님의 가족이 되었다. 그들은 집에 있든지 식사를 하든지, 방에서나 밭에서나 간에 그리스도와 함께 있었다. 그들은 그분과 함께 여행하고, 시련과 역경을 나누고, 할 수 있는 대로 많은 분야에서 그분께서 하시는 일에 관여하였다.
그리스도께서는 때에 따라 제자들과 산허리에 함께 앉아 그들을 가르치셨다. 또 어떤 때에는 해변에서, 어부의 배 안에서, 혹은 길을 가면서도 가르치셨다. 그분께서 군중에게 말씀하실 때에 제자들은 언제나 그분 주위를 둘러싸 내원(內圓)을 만들었다. 그들은 예수님의 가르침을 한 마디라도 놓치지 않고 듣기 위하여 그분 가까이 다가붙었다. 그들은 각 나라와 각 시대를 통하여 가르쳐야 할 진리를 깨닫고자 주의 깊이 또 열심히 귀를 기울였다.
예수님의 최초의 제자들은 평민 계급에서 택함을 받았다. 갈릴리의 어부였던 그들은 가난하고 배우지 못한 사람들이었다. 그들은 비록 랍비의 학문이나 관습에 대해서는 교육을 받지 못하였으나 간난 신고(艱難辛苦)의 엄한 훈련을 통하여 단련되었다. 그들은 천부적인 재능과 교육을 받을 만한 정신력을 가지고 있었다. 바꾸어 말하면, 장차 구주의 사업을 위하여 교육을 받고 필요한 인물이 될 수 있는 자질을 가졌던 것이다. 세상에는 숨은 능력, 곧 발휘되면 위대한 지도자가 될 수도 있는 능력을 자각하지 못하고 평범하게 그날그날 근실하게 일하고 있는 사람들이 많이 있다. 구주께서 당신의 동역자로 부르신 사람들은 바로 이런 부류의 사람들이었다. 이 사람들은 세상에서 처음으로 보는 위대한 교육자에게서 삼 년 동안 교육을 받는 특전을 가졌던 것이다.
이 최초의 제자들은 피차에 현저한 차이를 보였다. 그들은 세상 사람들의 교사가 될 운명에 있었으나 서로 다른 성격을 나타내었다. 그 중에는 로마에 협조하여 일을 하다가 부름을 받은 세리 레위 마태, 로마 제국의 권위에 강하게 반발한 열심 당원 시몬, 충동적이며 자부심이 강하고 온정적인 베드로와 그의 형제 안드레, 교양과 재능은 있었지만 비열한 정신을 가졌던 유대 사람 가룟 유다, 충실하고 열성적이었으나 더디 믿은 빌립과 도마, 같이 뽑힌 형제 중에 과히 눈에 띄지 않으면서도 결점과 미덕이 모두 확실히 나타난 유력자 야고보와 유다, 아기처럼 순진하고 신뢰심을 가진 나다나엘, 대망과 애정을 가진 세베대의 아들들이 있었다.
이 제자들은 원래의 성격과 교육 정도, 그리고 생활 습관이 서로 전혀 달랐기 때문에, 부르심을 받은 일을 성공적으로 해 나가기 위해서 감정과 사상과 행동이 서로 일치되어야 할 필요가 있었다. 예수님께서 원하신 것은 바로 이것이었다. 이 목적을 위하여, 그분께서는 그들을 당신 자신에게 일치시키고자 노력하셨다. 그들을 위한 그분의 고심은 하늘 아버지를 향한 그분의 기도에 잘 나타나 있다. " 아버지께서 내 안에, 내가 아버지 안에 있는 것같이 저희도 다 하나가 되어 우리 안에 있게 하사 … 아버지께서 나를 보내신 것과 또 나를 사랑하심 같이 저희도 사랑하신 것을 세상으로 알게 하려 함이로소이다." (요 17:21-23).
그리스도의 변화시키시는 능력
열 두 제자 중에서 네 사람이 각각 독자적인 입장에서 주요한 역할을 담당하게 되었다. 이를 위하여 준비하는 중에, 그리스도께서는 이 모든 일을 미리 아시고 이에 맞도록 그들을 교육하셨다. 검에 의해 급사할 운명의 야고보, 형제들 중에서 가장 오랫동안 주를 따라다니며 일하고 박해를 받을 요한, 여러 세대에 걸쳐 장애가 되어 온 것들을 타파하고 이교의 세계에 그리스도의 가르침을 전할 선구자 베드로, 형제들보다 더 훌륭한 봉사를 할 수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스스로도 생각지 못한 방향으로 가려고 했던 유다, 이 네 사람은 그리스도의 특별한 관심의 목표가 되었으며 그분에게서 매우 자주 주의 깊은 교훈을 받은 자들이었다.
베드로와 야고보와 요한은 기회가 있을 때마다 그들의 주님이신 예수님의 곁에 있고자 노력했으며, 그들의 이 소원은 성취되었다. 열 두 제자 중에 이 세 사람은 그리스도와의 관계가 가장 친밀하였다. 요한은 그리스도와 누구보다도 친밀해지고 싶었다. 실제로 그는 그런 관계를 향유하였다. 요단강 가에서 처음으로 모인 집회에서, 안드레는 예수님의 교훈을 듣고 즉시 그 형제를 부르러 달려갔으나, 요한은 조용히 앉아서 그리스도의 기이한 화제에 대한 명상에 잠겨 있었다. 그는 언제나 열심으로 구주를 따르고 그 말씀을 듣기에 여념이 없었다. 그러한 요한이었지만, 그 품성에 결코 결점이 없는 것은 아니었다. 그는 유순하고 몽상적인 열심자는 아니었다. 그와 그의 형제는 " 우뢰의 아들" (막 3:17)이라고 불리었다. 요한은 자부심이 강하고 야심적이며 싸움을 좋아하는 사람이었으나, 거룩하신 교사께서는 요한의 이런 모든 성격의 이면에 있는 열렬하고 순진하며 사랑하는 마음이 있는 것을 보셨다. 예수님께서는 요한의 이기주의를 견책하시고, 야심을 꺾으셨으며, 믿음을 시험하셨다. 그러나, 이와 동시에 그리스도께서는 그의 심령이 사모하고 있는 성결의 아름다움 곧 당신께서 가지고 계시는 사람을 변화시키는 사랑을 그에게 나타내셨다. " 세상 중에서 내게 주신 사람들에게 내가 아버지의 이름을 나타내었나이다" (요 17:6).
요한은 교제하기를 좋아하며 사랑과 동정을 가지고 있었다. 그는 예수님께로 가까이 나아가 그분의 곁에 앉아서 그분의 가슴에 기대곤 했다. 마치 꽃이 태양과 이슬을 받듯이, 그는 하늘로부터 오는 빛과 생명을 받아 마셨다. 사랑과 숭경(崇敬)의 마음으로 구주를 바라보는 중에 그리스도의 형상을 닮고 그분과 더불어 교제하는 일이 그의 유일한 소망이 되었다. 마침내 그의 품성에는 그의 주가 되신 그리스도의 품성이 반영되었다.
그는 이렇게 말했다. " 보라 아버지께서 어떠한 사랑을 우리에게 주사 하나님의 자녀라 일컬음을 얻게 하셨는고, 우리가 그러하도다 그러므로 세상이 우리를 알지 못함은 그를 알지 못함이니라 사랑하는 자들아 우리가 지금은 하나님의 자녀라 장래에 어떻게 될 것은 아직 나타나지 아니하였으나 그가 나타내심이 되면 우리가 그와 같을 줄을 아는 것은 그의 계신 그대로 볼 것을 인함이니 주를 향하여 이 소망을 가진 자마다 그의 깨끗하심과 같이 자기를 깨끗하게 하느니라" (요일 3:1-3).
연약한 사람이 강한 사람으로
제자들의 경력을 보면 베드로보다 그리스도의 교육법을 잘 예시하고 있는 사람도 없다. 대담하고, 잘 다투고, 자신감이 넘치며, 지각이나 행동이 예민하고, 금방 복수하고 금방 용서하는 성질을 가진 베드로는 때때로 잘못을 거듭하여 견책을 받았다. 그러나, 그리스도께 대한 그의 충정과 헌신도 다른 성질 못지 않게 강했다. 이 때문에 인정과 칭찬을 받을 때도 있었다. 예수님께서는 특별한 사랑과 인내를 가지고 이 성급한 제자를 다루심으로 그의 자만을 견제하시고, 그에게 겸손과 순종과 신뢰를 가르치고자 노력하셨다.
그러나, 그가 배운 것은 그 교훈의 일부분뿐이었다. 자신에 대한 믿음은 근절되지 않았다.
마음이 무거울 때마다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의 눈을 열어서 당신이 당하시는 시련과 고난을 보게 하려고 애쓰셨다. 그러나, 그들의 눈은 닫혀 있었다. 그것을 알려고 하지 않았기 때문에 보지 못했다. 그리스도의 고난에 참여하는 것이 겁이 난 베드로는 자기를 불쌍히 여기는 마음에서 " 주여 그리 마옵소서 이 일이 결코 주에게 미치지 아니하리이다" (마 16:22)라고 간구하였다. 그가 한 이 말은 열 두 제자의 생각과 감정을 대표했다.
이리하여, 그들은 위기가 점점 가까이 다가옴에도 불구하고 그리스도가 십자가에 달리신다는 사실은 꿈에도 생각지 못한 채 다만 왕국의 영위(榮位)가 자신들에게 배정될 것을 기대하면서 자부심과 경쟁심으로 나날을 보냈다.
베드로의 경험은 모든 제자들에게 교훈이 되었다. 자기를 의지하는 자에게 있어서 시련은 패배를 의미한다. 그리스도라 할지라도 완전히 버리지 아니한 죄의 확실한 결과는 어찌할 수 없으시다. 그러나, 파도가 베드로를 휩쓸어 버리려고 할 때에 그리스도의 구원의 손길이 펴졌던 것처럼, 큰 물결이 그의 영혼을 횝쓸려고 하는 이 때에도 그분께서는 그를 구원하기 위해 사랑을 베푸셨다. 베드로는 파멸의 끝에 서서도 계속 교만한 말을 함으로써 점점 더 벼랑 쪽으로 나아갔다. 그에게는 " 네가 … 나를 모른다고 부인하리라" (눅 22:34)는 경고가 거듭 주어졌다. 그는 " 주여 내가 주와 함께 옥에도, 죽는데도 가기를 준비하였나이다" (눅 22:33)라고 맹세하듯 말했다. 이것은 그의 사랑하는 마음과 슬픈 심정을 고백하는 말이었다. 그 마음을 읽으신 예수님께서는 당장은 진가가 나타나지 않지만 신속히 임할 암흑 가운데서 희망의 빛이 될 수 있는 말씀을 베드로에게 주셨다. " 시몬아, 시몬아, 보라 사단이 밀 까부르듯 하려고 너희를 청구하였으나 그러나 내가 너를 위하여 네 믿음이 떨어지지 않기를 기도하였노니 너는 돌이킨 후에 네 형제를 굳게 하라" (눅 22:31, 32).
" 내가 너를 위하여 … 기도하였노니 너는 돌이킨 후에 네 형제를 굳게 하라" 시던 구주의 말씀이 베드로의 심령을 붙드는 지주가 된 것은 그가 재판정에서 주님을 부인하는 말을 하고 연민과 사랑과 슬픔으로 가득한 그분의 눈길과 마주친 때였다. 그 순간 그는 구주에 대한 사랑과 충성심이 되살아나, 전에 그분께서 눈물을 흘리며 기도하시던 동산으로 달려갔다. 거기서 그는 그리스도의 고민의 핏방울로 적셔졌던 잔디 위에 후회의 눈물을 흘렸다. 그리스도께서는 그의 죄를 미리 아셨으나 그를 절망 가운데 버려 두지 아니하셨던 것이다.
만일 베드로를 바라보시는 예수님께서 불쌍히 여기시는 눈길 대신에 견책하시는 눈길을 보내고, 그의 죄를 미리 말씀하실 때에도 희망의 말씀을 함께 주시지 않으셨다면, 그를 두른 암흑이 얼마나 짙었겠는가! 후회로 고민하는 심령의 절망이 얼마나 깊었겠는가! 고뇌와 자아 혐오 속에서, 무엇이 그로 하여금 유다가 갔던 길로부터 돌아서도록 붙들 수 있었던가?
당신의 제자가 그 고뇌를 경험하지 않게 할 수는 없으셨지만, 그리스도께서는 그를 홀로 그 괴로움 속에 버려 두지 않으셨다. 그분의 사랑은 용기를 잃게 하거나 못본 체하는 그런 사랑이 아니다.
사람은 그 자신도 죄가 많으면서 시험에 빠져 있는 자와 허물이 있는 자에 대해 관대하지 못한 태도를 갖는 경향이 있다. 남의 마음을 읽어 볼 수도, 또 그 마음속의 투쟁과 아픔을 알 수도 없는 것이다. 우리는 사랑의 견책, 치유를 위한 타격, 희망을 속삭이는 경고에 대해 배워야 할 것이다.
재판정에서 예수님을 본 것도, 십자가 옆에 서 있던 것도, 그리고 열 두 제자 중에서 제일 먼저 예수님의 무덤으로 달려간 것도 요한이 아니었다.예수님께서 부활하신 후에 처음으로 제자들에게 보내신 기별 중에 언급된 이름도 요한이 아니고 베드로였다. 천사는 " 그의 제자들과 베드로에게 이르기를 예수께서 너희보다 먼저 갈릴리로 가시나니 전에 너희에게 말씀하신 대로 너희가 거기서 뵈오리라" (막 16:7)고 하였다.
예수님께서 마지막으로 갈릴리 해변에서 제자들과 만나셨을 때, 베드로는 " 네가 나를 사랑하느냐" (요 21:17)는 질문으로 세 번 거푸 시험을 받은 후에, 열 두 제자 중 하나로서의 지위가 회복되었다. 그는 할 일을 부여 받았다. 그는 주의 양을 먹여야 했다. 그 후에, 예수님께서는 당신의 마지막 개인적인 명령으로 베드로에게 " 나를 따르라" (요 21:22)고 하셨다.
이제 베드로는 그 말씀의 참뜻을 깨달을 수 있었다. 그리스도께서 제자들 가운데 어린아이를 두시고 그같이 되라고 말씀하신 교훈을 그는 이제야 확실히 깨달을 수 있었다. 자신의 연약함과 그리스도의 능력을 완전히 깨달은 베드로는 그분을 신뢰하고 순종할 준비가 되었다. 그리스도의 힘으로 말미암아 그는 주를 따라갈 수가 있었던 것이다.
이리하여, 한때 십자가에 대한 인식이 부족하였던 제자가 희생과 수고의 경험을 마쳐 갈 즈음에는 복음을 위하여 생명을 바치는 것을 즐거움으로 여겼다. 전에는 주님을 부인했으나 지금은 그분께서 돌아가신 방법으로 죽는 것을 매우 큰 영광으로 생각하게 되었다.
베드로의 변화는 하나님의 자비심으로 말미암아 이루어진 이적이었다. 크신 교사의 발자취를 따라가려고 하는 모든 사람들에게 있어서 이것은 평생 동안 배워야 할 교훈이다.
사랑의 훈계
예수님께서 당신의 제자들에게 책망과 경고와 주의를 주셨음에도 불구하고 베드로와 요한과 그 형제들은 그분을 떠나지 않았다. 그들은 많은 견책을 받았으나 그분과 함께 있기로 결심했다. 예수님 또한 제자들이 허물이 있었지만 내어 버리지 아니하셨다. 그분께서는 사람들을 본래 약하고 허물이 있는 존재로 받아들이시며, 그들이 만일 당신에게서 배우고 단련 받기를 원하면 당신의 사업을 하는 데 적합하도록 훈련시키신다.
그러나, 열 두 제자 중 한 사람에게는 당신의 지상 사업이 아주 끝날 때까지 한 번도 직접적으로 책망하지 않으셨다.
유다로 말미암아 반항적 요소가 제자들 사이에 들어왔다. 그는 예수님과 관계를 갖게 된 이후로 그분의 품성과 생애에 마음이 이끌렸다. 그는 자신의 변화를 진심으로 바랐으며, 예수님과 연합함으로 이런 경험을 갖게 되기를 희망하였다. 그러나, 이 소망이 그의 마음을 완전히 주도하지는 못했다. 그의 마음을 지배한 것은, 그가 기대한 대로, 그리스도가 이 땅에 왕국을 건설하실 때에 얻을 이기적인 은전에 대한 희망이었다. 유다는 그리스도의 사랑이 지닌 하늘의 능력을 인정하면서도 그 주권에는 굴복하지 않았다. 그는 마음 속에 자기의 판단과 의견, 그리고 남을 비평하고 비난하는 경향을 계속 가지고 있었다. 그에게는 그리스도의 행동과 동기가 도무지 이해가 가지 않았다. 그래서, 의혹과 불만을 품었다. 그런데, 그의 의혹과 야심은 은연 중에 제자들에게까지 미치고 있었다. 제자들이 권력 다툼을 하고 그리스도께서 하시는 일에 불만을 갖게 된 대부분의 원인은 유다에게 있었다.
예수님께서는 반대하는 것이 오히려 마음을 완고하게 할 뿐임을 아시고 유다와 직접 충돌하는 일을 피하셨다. 그리스도께서는 당신의 자아 희생적인 사랑을 통해 접촉함으로써 유다의 속 좁고 이기적인 생활을 고쳐 주고자 노력하셨다. 예수님께서는 당신의 교훈에서, 유다의 자기 중심적인 야심을 근절할 원칙들을 보이셨다. 여러 번 교훈을 받은 유다는, 거기에 자기의 성격과 죄가 묘사되고 지적되어 있음을 알았으면서도 굴복하려고 하지 않았다.
자비의 호소는 거부되고, 악의 충동이 최후의 세력을 떨치게 되었다. 유다는 은근한 견책에 화를 내었으며, 야심적인 꿈이 깨어진 데서 자포 자기하여, 자기의 심령을 탐욕의 악마에게 내어 맡기고 주를 배반하기로 결심하였다. 그는 그리스도와 함께 있는 즐거움과 영원한 빛을 버리고, 악을 행하기 위해 유월절의 다락방에서부터 희망이 없는 바깥 어두운 데로 나갔다.
" 예수께서 믿지 아니하는 자들이 누구며 자기를 팔 자가 누군지 처음부터 아심이러라" (요 6:64). 모든 것을 다 아시면서도 예수님께서는 자비의 호소와 사랑의 은사를 아끼지 아니하셨던 것이다.
유다의 위험을 아신 예수님께서는 그를 당신께로 가까이 이끄셔서, 친히 택하시고 신뢰하는 제자들 가운데 두셨다. 매일 당신의 마음이 무거운 짐에 눌릴 때마다, 그분께서는 이 완고하고 의심 많고 깊은 생각에 빠져 드는 성미를 가진 자와 계속적으로 접촉하는 고통을 참으셔야 했다. 그리스도께서는 유다의 지속적이고 비밀스럽고 음험한 반항심을 아시고 이를 제자들과의 관계를 통해 없애 보려고 애쓰셨다. 이처럼, 위험에 빠진 그 영혼을 구원하기 위해 필요한 모든 방도가 다 강구되었던 것이다.
" 이 사랑은 많은 물이 꺼치지 못하겠고
홍수라도 엄몰하지 못하나니"
" 사랑은 죽음같이 강하고" (아 8:7, 6)
유다에게 있어서 그리스도의 사랑의 노고는 아무 소용이 없었다. 그러나, 다른 제자들에게는 그렇지가 않았다. 그들에게는 이것이 평생 동안 감화를 끼치는 교훈이 되었다. 애정과 인내의 모본은, 시련과 과실 가운데 있는 사람들에게 취해야 할 태도를 항상 가르쳐 주었다. 그것은 또한 다른 교훈도 주었다. 열 두 제자가 임명되었을 때에, 그들은 유다가 그들 중에 들어오기를 열망하였다. 그리고, 유다의 가입을 사도들의 단체에 큰 희망이 되는 사건으로 여겼다. 유다는 다른 제자들보다도 세상에 대한 견문이 넓었고, 응대 솜씨가 뛰어나고, 식별력과 실행력을 겸비한 사람이었다. 자신의 자격을 높이 평가하고 있었던 그는 다른 제자들도 그 같은 생각을 갖도록 유도하고 있었다. 그러나, 그가 그리스도의 사업에 적용시키고자 한 방법은 세속적 원칙과 정책을 기초로 한 것이었다. 그들은 세상의 인정과 영예를 확보하는 것, 곧 이 세상 왕국을 얻을 것을 기대하였다. 유다의 생애에 이런 욕망이 나타난 것은, 제자들이 그의 자대주의(自大主義)가 그리스도의 겸손과 자아희생주의, 곧 신령한 왕국주의와 서로 반대되는 것임을 깨닫는 데 도움이 되었다. 그들은 유다가 택한 운명에서 자아 중심 생활의 종말을 본 것이다.
이 제자들을 위한 그리스도의 사명은 결국 그 목적을 달성하였다. 조금씩 점진적으로 그리스도의 모본과 자아 희생의 교훈은 제자들의 품성을 형성해 갔다. 그리스도의 죽음은 이 세상에서 위대해지려는 그들의 희망을 무산시켰다. 베드로의 실패, 유다의 배신, 고민과 위기 가운데 계신 그리스도를 버린 자신들의 과오로 그들의 자만심은 사라졌다. 그들은 자신들의 연약함을 깨닫고, 자신들에게 맡겨진 일이 얼마나 큰 것인가를 알게 되어, 그들이 가는 모든 길에 주의 인도하심이 필요하다는 것을 느꼈다.
제자들은 이제 후로는 그리스도께서 그들과 함께 계시지 못할 것을 알고, 그분과 더불어 함께 여행하고 함께 이야기할 수 있었던 기회가 얼마나 귀중한 것이었던가를 전에 없이 절감하였다. 그리스도의 교훈 가운데에는, 말씀하실 당시에 즉시 그 참 뜻을 깨닫지 못한 것이 많이 있었다. 그러나 이제는, 이 교훈들을 회상하고 그 말씀을 다시 듣고자 열망하였다. 그리스도의 보증의 말씀은 말할 수 없는 기쁨으로 그들 마음에 새롭게 새겨졌다.
" 내가 너희에게 실상을 말하노니 내가 떠나가는 것이 너희에게 유익이라 내가 떠나가지 아니하면 보혜사가 너희에게로 오시지 아니할 것이요 가면 내가 그를 너희에게로 보내리니" (요 16:7). " 내가 내 아버지께 들은 것을 다 너희에게 알게 하였음이니라" (요 15:15). 또한 " 보혜사 곧 아버지께서 내 이름으로 보내실 성령 그가 너희에게 모든 것을 가르치시고 내가 너희에게 말한 모든 것을 생각나게 하시리라" (요 14:26).
" 무릇 아버지께 있는 것은 다 내 것이라 … 진리의 성령이 오시면 그가 너희를 모든 진리 가운데로 인도하시리니 … 그가 … 내 것을 가지고 너희에게 알리겠음이니라" (요 16:15, 13, 14).
제자들은 그리스도가 감람산에서 그들을 떠나 하늘로 올라가시는 것을 보았다. 그들은 또 하늘이 그분을 받아들일 때에 " 내가 세상 끝날까지 너희와 항상 함께 있으리라" (마 28:20)는 그분의 작별의 약속을 들었다.
제자들은 그리스도께서 자신들을 여전히 동정하고 계심을 알았다. 그들은 하나님의 보좌 옆에 그들의 대표자요 중보자이신 분이 계심을 알았다. 그들은 " 너희가 무엇이든지 아버지께 구하는 것을 내 이름으로 주시리라" (요 16:23)고 하신 예수님의 허락을 반복하여 말하면서 그분의 이름으로 기원을 드렸다.
그들은 " 죽으실 뿐 아니라 다시 살아나신 이는 그리스도 예수시니 그는 하나님 우편에 계신 자요 우리를 위하여 간구하시는 자시니라" (롬 8:34)고하는 큰 논증을 가지고 더욱 높이 믿음의 손을 폈다.
하늘 궁정으로 들림을 받은 거룩하신 분께서는 약속을 신실히 지키시고, 지상에 있는 신자들에게 당신의 풍성하신 은덕을 나누어 주셨다. 그리스도께서 하나님 우편에 좌정하신 것은 제자들 위에 성령이 부어진 사실로 확인되었다.
그리스도께서 하신 일에 힘입어, 제자들은 성령의 필요를 느끼게 되었다. 그들은 성령의 가르침 아래서 최후의 준비를 하고 필생의 사업을 시작하였다.
그들은 더 이상 무지하거나 교양이 없는 사람들이 아니었다. 이미 그들은 개개인의 집단도 아니요, 조화되지 않는 모순의 요소들이 모인 것도 아니었다. 그들의 희망은 더 이상 세속적으로 위대한 것에 있지 않았다. 그들은 " 마음을 같이하여 … 한 마음과 한 뜻이 되" 었다. 그들의 생각은 그리스도로 가득하였다. 그리스도의 왕국을 발전시키는 일이 그들의 목적이었다. 마음과 품성에 있어서 그들은 주와 같은 자들이 되었으며, 사람들은 그들이 " 그 전에 예수와 함께 있던 줄" (행 4:13)을 알게 되었다.
그 때에 나타난 그리스도의 영광은, 사람이 전에 전혀 본 일이 없는 기이한 것이었다. 전에 그리스도의 이름을 비난하고 그분의 능력을 업신여기던 많은 사람들이, 이제는 십자가에 달리신 예수의 제자임을 고백하였다. 그리스도께서 택하신 빈한한 사람들의 수고가 성령의 협력으로 세상을 뒤흔들었다. 한 세기 동안에 복음이 천하 각국에 전파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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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스도께서는 당신을 대신한 교사로 당신의 초기 동역자들에게 보내셨던 동일한 성령을 오늘날에도 동역자들의 교사가 되게 하신다. " 내가 세상 끝날까지 너희와 항상 함께 있으리라" (마 28:20)고 하신 것은 그분의 허락이다.
오늘날의 교육 사업에 그 동일하신 인도자께서 임하신다면, 옛날과 마찬가지의 결과가 나타날 것이다. 이것이야말로 참된 교육이 도달해야 할 목표, 하나님께서 성취하시기로 뜻하신 사업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