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한국인의 음식 문화에서 두드러진 특징 중 하나는 ‘쌈’을 유난히 좋아하는 것 아닐까 싶다. 우리는 채소 중에서 잎이 조금 크다 싶은 것은 모조리 쌈을 싸서 먹는데 상추를 비롯해 호박, 배추, 깻잎과 곰취는 물론, 미나리, 쑥갓, 콩잎 쌈도 먹는다. 여기에 김과 미역, 다시마 같은 해초류로도 쌈을 싸 먹을 정도로 유별나게 쌈을 좋아한다.
쌈 중에서도 가장 대표적인 것이 상추쌈이다. “눈칫밥 먹는 주제에 상추쌈까지 먹는다”는 속담이 있었을 정도니 밥을 얻어먹으면서도 슬금슬금 눈치 보며 상추에 밥을 싸 먹을 만큼 우리는 쌈밥을 좋아한다.
한국인이 쌈을 좋아하는 것은 어제오늘의 일이 아니다. 숙종 때의 실학자 이익은 저서인 《성호사설》에서, 집집마다 상추를 심는 것은 쌈을 먹기 위한 것이라고 했으니 조선시대에도 상추쌈은 국민 음식으로 자리 잡고 있었다.
《승정원일기》에 숙종 때 대왕대비인 장렬왕후의 수라상에 상추가 올랐다는 기록이 있다. 조리를 하지 않은 상추 잎이라고 했으니 쌈을 싸기 위한 것이었다. 이어지는 《승정원일기》의 내용은 실수로 상추에 담뱃잎까지 섞여서 올렸으니 담당자를 엄중하게 처벌해야 한다는 것이다.
밭일을 하던 농부들이 밭에서 푸성귀를 따다 고추장, 된장 발라서 한 입 가득 쌈을 싸 먹는 풍경은 낯설지 않지만, 조선 왕실의 가장 높은 어르신인 대왕대비마저도 상추쌈을 즐겼다는 사실은 꽤나 이색적이다.
순조의 장인으로 세도정치의 주역이었던 김조순 역시 냇가로 천렵을 가서 갓 잡은 생선회를 안주 삼아 술 한잔 기울이며 상추 잎에다 밥을 싸 먹었다는 글을 남겼다. 그러니 상추쌈은 위로는 왕실 최고 어른과 막강한 권력의 세도가에서부터 시골의 아낙네까지 모두가 즐겨 먹은 음식이다.
요즘은 상추를 먹으면 졸음이 온다고 하지만 예전에는 상추가 정력에 좋다고 믿었다. 사실 과학적으로는 둘 다 일리 있는 말인데, 어쨌든 옛날 여인들은 고추밭 이랑 사이에 심은 상추는 서방님 밥상에만 은근히 올렸다고 한다.
상추 잎을 따면 줄기에서 하얀 액체가 흐르는데 이 때문인지 상추를 먹으면 남자의 정력이 세진다고 생각했다. 또한 고추는 남근을 상징한다. 그렇지 않아도 상추가 남자한테 좋다는데 거기에다 고추밭 사이에 심은 상추이니 남편 밥상에만 은근히 올린 것이다.
사람들은 상추가 정력을 증진하는 채소라고 믿은 것인데 입에서 입으로 전해지는 부질없는 속설만은 아닌 모양이다. 상추의 효능을 적어놓은 옛날 의학서에는 상추가 정력에 좋다는 항목이 반드시 들어 있다.
멀리 당나라 때 손사목이 쓴 《천금식치》에는 “상추가 정력을 더해준다(益精力)”는 기록이 있고 명나라 때의 《본초강목》에도 상추는 맛이 쓰고, 성질이 차가우며, 약간의 독이 있지만 젖이 나오지 않을 때, 소변을 편하게 보지 못할 때, 음낭이 부었을 때 먹으면 효과가 있다고 했다. 모두 생식능력과 관계가 있는 질병인데, 이런 병에 상추가 좋다는 것이다. 심지어 이집트 신화에서는 생식의 신에게 바치는 제물이 상추였으니 상추가 정력에 좋다는 것은 동서양 사람들의 공통된 믿음이었다.
아무리 맛있는 음식이라도 식탐을 부리면 보기에 좋을 리 없다. 상추쌈은 상추 잎에 밥을 올려놓고 고추장이나 쌈장을 척척 발라서 입을 찢어지게 벌린 후에 볼이 터지도록 먹어야 제맛이다. 하지만 그렇게 먹으려면 아무래도 보기에는 몹시 흉할 수밖에 없다.
옛날 사람들도 입이 터지도록 상추쌈을 먹었는지 조선 후기의 실학자 이덕무는 상추쌈 먹을 때 각별히 조심하라고 당부하고 있다.
상추쌈을 즐겨 먹고 하루걸러 세수도 않고 머리도 안 빗으며 이야기책이나 읽다가 낮잠을 자고 어린 계집종이 도둑질을 해도 막연히 깨닫지 못하는 자는 게으른 부인이다.
상추쌈을 입에 넣을 수 없을 만큼 크게 싸서 먹으면 부인의 태도가 크게 아름답지 못하니 매우 경계해야 한다.
게으른 아낙네의 행동거지를 지적하는 것까지는 그렇다손 치더라도 상추쌈을 즐겨 먹는다고 시비를 걸고 있는 것이 특이하다.
#음식#역사일반
#음식으로읽는한국생활사
글 윤덕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