메를로-퐁티 ‘밤의 공간성’
깜깜한 밤, 유난히 깜깜해서 아무것도 인지할 수 없는 어느 밤을 경험한 적이 있는가.
도시에 살다보면 아무리 밤이어도 어디선가 빛이 새어들고 만다. 그래서 정말 아무것도 인지하지 못할 정도의 어둠을 경험하기는 사실상 쉽지 않은 현대이다. 더구나 인간의 시각은 어둠이 덮쳐들어도 얼마간의 시간이 흐르면 서서히 밤의 풍경에 적응하기 마련이다. 실낱같은 빛줄기라도 그 빛에 기대어 어렴풋하게라도 윤곽을 인지하게 된다. 그럼에도 이 세상에는 그런 표현이 있다. ‘칠흑 같은 밤’이라는. 무엇도 감지할 수 없을 만큼의 어둠으로 가득 찬, 그런 밤.
나는 상상했던 적이 있다. 아니, 상상이 아니었던 것도 같다. 어느 밤, 눈을 떴다. 이사한 지 얼마 되지 않은 어느 날이었을 것이다. 그런 연유로 아직 익숙지 않은 방과 아직 짐이 들어차지 않은 방은 그 밤, 무척이나 깜깜하게 느껴졌다. 달빛조차 없이 깜깜했던, 그런 밤. 어쩌면 그 밤이 그야말로 ‘칠흑 같은 밤’이었을지도 모르겠다. 그런 밤 눈을 뜬 나는 이상한 경험을 했다. 아무것도 없음, 그것을 경험했다. 아무것도 없다는 것은 나의 몸조차 없음을 의미한다. 아무것도 없는데 눈만 멀뚱 떴다. 눈앞에 펼쳐진 것은 밤 그대로의 밤이었다. 암흑. 팔도 다리도 보이지 않고 어둠이 떡하니 공간을 메우고 있다. 오로지 의식만이 선명했다. 몸이 없는 의식. ‘나’는 인지하는데 몸은 없는 것 같은 이상한 느낌. 시커먼 화면에 허연 눈자위만 껌뻑대는 섬뜩한 그림.
메를로-퐁티에 의하면 몸이 없이 의식은 있을 수 없다고 한다. 몸으로써 세상을 느끼고 인지한다. 경험주의니 지성주의니 이전의 이분법적인 관점에서 보면 몸과 의식은 엄연히 분리된 것이고 둘 중에 몸보다는 의식이 더 중요한 것이었다. 그러나 메를로-퐁티는 이를 전면 부인한다. ‘나는 내 몸이다.’라는 언명을 통해 몸이 아닌 ‘나’는 존재할 수 없다고 천명한다. 그것이 메를로-퐁티가 주장하는 바의 핵심이다. 나는 이 새로운 관점에 매력을 느꼈다. 의식을 상위개념에 놓고 몸을 그 껍질 정도로 이해하는 것에 얼마간 불만이 있었던 터에 메를로-퐁티의 관점에 나는 일면 동의했다.
특히 메를로-퐁티가 말하는 ‘밤의 공간성’은 꽤 흥미롭다. ‘지각 주체와 지각 대상이 하나로 혼입되어버리는 공간성’이 밤이라는 공간의 특징이라고 했다.
- 밤은 나를 감싸고, 내 모든 감각들을 꿰뚫으며, 나의 기억들을 질식시킨다. 밤은 나의 개인적인 동일성을 거의 지워버린다.
- 이 밤의 공간이라는 환경에서는 내가 나를 공간과 통일시킨다. (351면)
그런 밤을 느꼈던 것 같다, 그 밤에. 밤에 묻혀버린 나. 무엇도 없는데 ‘나’는 인식되는 경험. 그때는 몸과 분리된 ‘의식’이란 것을 인식했다. 의식으로 밤을 인지하고 관찰한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메를로-퐁티에 따르면 ‘의식’이 아니라 ‘눈’으로써, 즉 ‘몸’을 통해 밤을 인지하고 있었던 것이다. 몸과 별개로 존재하는 ‘의식’이 아니라 ‘눈’ 즉, ‘몸’으로써 세상을 보고 인식한다는 것이다. 메를로-퐁티를 접하기 전에는 나도 이분법적인 사고방식으로 세상을 이해하고 있었음을 인정한다. 밤을 관찰하던 ‘눈’을 무시했던 것이다.
그런데 저자는 메를로-퐁티의 밤의 공간성을 설명하면서 이렇게 묻는다. 밤과 낮의 공간 구조 중 어느 쪽에 거주할 때 우리의 반성적으로 깨어 있는 자아가 더 강도 높게 나타나는가. 칠흑 같은 밤의 공간이 내 몸의 경계를 지우면서 내 속으로 뚫고 들어와버리면 실제로 반성적으로 깨어 있는 자아는 현저히 약화될 것이라고 설명한다(352면). 그러니까 밤이라는 공간에서 반성적인 자아는 밤과 통일됨으로써 약화된다는 것인데, 나는 그와는 다른 경험을 한 것 같다. 나는 그 밤, 그 칠흑 같았던 밤, 소위 ‘반성적인 자아’가 더욱 강하게 깨어나던 기억이 있다. 무엇도 인지되지 않은 암흑 속에서 의식만이 동동 떠 있는 묘한 느낌. 오히려 더욱 또렷해지던 의식.
나만의 개별적인 경험일 수도 있다. 흔히 아침형 인간이니, 저녁형 인간이니 분류하기도 하지만 나는 ‘밤형 인간’이라서 그럴지도 모르겠다. 모두가 잠든 시각 더욱 또렷해지는 내면의 무엇. 더욱 선명해지는 내 안의 무엇을 대면하기가 싫어 그저 밤이면 의미 없이 텔레비전 채널을 이리저리 돌리고 유튜브를 헤매다 자꾸만 멀쩡해지려는 무언가를 뭉개버린 채 기어코 잠재워버렸던 밤의 나. 나의 ‘반성적인 자아’는 오히려 밤에 더욱 강화되는, 그러니까 몸의 경계가 지워지면서 오히려 더 깨어나는 좀 별난 자아인 모양이다.
지금도 가끔 상상한다. 깜깜한 밤, 깜빡거리는 허연 두 개의 흰자위가 암흑 속에 동동 떠 있는 그림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