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책은 스리랑카 작가 <셰한 카루나틸라카>의 장편소설이다.
스리랑카 작가의 작품을 대한 건 처음이다.
스리랑카에 대한 지식도 '실론티의 나라' 라는 것 외에는 전무하다 싶이 했다.
내가 아는 '실론티'는 홍차를 의미하는데, 원래 '실론'은 싱할라족이 지배하기 전 '스리랑카의 국가명이었다고 한다.
말리의 일곱개의 달(Seven Moons of Maali Almeida)은 여러 번 개정되는 과정을 거친 후 2022년 부커상을 수상한다.
이 소설의 주인공 말리 알메이다는 스리랑카의 저널리스트이자 인권 운동가인 리처드 드 소이사를 모델로 했다고 한다. 실화를 바탕으로 한 셈이다.
리처드 드 소이사는 무장 괴한에게 납치 당한 후 머리에 총을 맞은 채 시체로 발견된다.
그의 어머니는 갖은 노력 끝에 용의자를 재판정에 세우나 결과를 보지 못하고 세상을 뜨게 되고 용의자는 증거 불충분으로 무죄를 선고 받는다.
용의자였던 란차고다는 소설 속 말리의 실종을 맡게 되는 게으르고 비열한 형사로 분한다. 결국 테러로 갈기갈기 찢기는 피투성이가 되어 단죄를 받게 된다.
말리 역시 죽임을 당한 사진작가이다.
전쟁터에서, 시위 현장에서, 학살이 이루어지는 곳 어디에나 달려가 끔찍하지만 생생한 사진을 찍어 필요한 곳에 팔며 살아간다.
누구에게 죽임을 당했는지 기억하지 못하는 말리는 7개의 달이 뜨는 동안 중간계에 머물며 자신의 죽음을 파헤쳐 나간다.
중간계.
마치 연옥을 의미하는 듯한 곳인데 작가는 나름의 상상력을 부여하여 악령과 떠도는 영혼, 빛으로 나아가게 애쓰는 영혼 등 다양한 존재를 만들어 낸다.
현실 속 인간들의 군상은 참으로 사악하고 비겁하고 참담하다.
종족간의 살상, 권력을 차지하기 위한 암투와 학살, 살아남기 위한 속임수, 일상으로 벌어지는 거짓과 사기...
말리는 자신이 찍은 사진의 원본을 지켜내기 위해 노력하지만 그로 인해 가장 사랑했던 딜런과 재키를 위험한 처지로 내몬다.
결국 말리는 자신을 죽게 만든 이를 알게 되고, 빛의 세계로 나아가 모든 기억을 잃고 다시 탄생하는 선택을 하게 된다.
이 책을 읽으며 가장 인상깊었던 구절, 말리의 아버지가 한 말이다.
"선과 악의 전투가 왜 항상 일방적인지 아니 말린? 악은 잘 조직되어 있고 무기가 많고 보수도 세기 때문이다. 우리가 두려워해야 할 것은 괴물이나 약카 악령이 아니야. 자기들의 정의를 실현한다고 믿고 악을 행하는 조직적인 집단, 그것이야말로 우리가 치를 떨어야 할 상대다"(본문 480쪽)
소설 속에서도, 내가 살고 있는 현실 속에서도, 말리 아버지의 말처럼 두려워하고 치를 떨어야 할 대상은 악을 행하면서도 뻔뻔스럽게 정의롭다 외치는 집단들이다.
대중을 가스라이팅하며 거짓을 진실로 뒤바꾸려는 이들, 우두머리 자리를 차지하고서도 모든 잘못은 타인에게 전가하며 아무런 책임도 지지 않는 이들, 탐욕으로 무장하고 아귀처럼 남의 것도 제 것처럼 구는 이들...
25년이나 내전에 시달리며 2009년 반군의 지도자가 죽기까지 계속되었던 학살과 납치로 만신창이가 되었던 스리랑카.
스리랑카에서 벌어진 싱할라족과 타밀족 간의 83학살 사건은 한국전쟁과 5.18 민주화 생각나게 한다.
내 편이 아니면 주홍글씨를 새겨 납치하고 고문하고 처참하게 죽이기까지 했던 기가 막히게 아픈 역사들.
진실을 캐내는, 그것을 알아차리고 밝혀가는 일에 게으름부리지 않아야 할 일이다.
참된 정의와 진실에 눈 부릅 뜰 때 아픈 역사가 되풀이되지 않으리라.
어줍지만 새삼 그런 생각을 한 번 더 각인시켰던 의미있는 소설이었다.
첫댓글 늘 느끼는 일이지만 글을 참 잘 쓰세요. 부러워요.
그리 생각해 주시니 힘이 나네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