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할렐루야. 할렐루야. 하나님의 은혜와 평강이 오늘도 예배드리는 저와 여러분 삶과 가정, 일터 위에 충만하게 임할 수 있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 하나님은 저와 여러분들을 사랑하십니다. 할렐루야. 우리는 하나님에 대한 사랑이 변할지 모르지만 하나님께서는 변함없이 우리를 사랑하시겠다 그렇게 약속해 주셨습니다. 그 약속의 말씀을 붙잡으시고 그렇게 변함없이 부어주신 하나님의 사랑이 채워져 우리 서로에게 고백하셨으면 좋겠는데요.
주 안에서 사랑합니다. 축복합니다. 감사합니다.
오늘 함께 읽으신 4절 말씀은 앞서 기록된 1절 1절에서 3절을 제외하고 쉽게 말해 10장 29절과 연결해서 보는 것이 가장 자연스러운 그러한 내용입니다. 문맥상으로 볼 때 1절에서 3절을 제외하고 10장 29절에서 4절로 이어지는 게 합당하다는 것이죠. 즉 지난주에 함께 나누었던 1절에서 3절 말씀은 10장 29절과 11장 4절 사이에 삽입된 구절이라고 보시면 됩니다. 따라서 오늘 읽은 말씀은 저와 여러분들이 읽어내려가면서 그렇다면 하나님께서는 왜 이 저자를 통해서 1절과 3절을 이렇게 삽입해 주셨는가에 대한 궁금증도 좀 가져보시고 그리고 이후에 이어지는 내용은 도대체 무엇인가 함께 보는 은혜가 있었으면 좋겠습니다.
사실 저자의 의도를 우리가 정확하게 판단할 수는 없습니다만 아마도 오늘 본문을 이어가는데 굉장히 중요한 요소로 작용하지 않았겠어요? 왜 갑자기 본문의 흐름을 끊으면서까지 이 1절부터 3절의 이야기 지난주에 말씀을 나누었던 이야기를 넣어주셨을까라는 것이죠.
우리 본문을 보아가면서 그것은 좀 알아보도록 하겠습니다. 10장에서 보신 바와 같이 바로 왕은요 9번째 재앙으로 말미암아서 모세를 불러들여 마지막 협상을 진행하게 됩니다. 하지만 협상 결렬로 인하여서 극단적 선택을 하게 되죠. 결국 바로는 모세에게 ‘다시는 얼굴을 보지 말자 보는 날에는 니가 죽을 것이다.’ 협박성 거의 곧 다시 만나면 진짜 죽일 것 같은 그러한 위협을 가하면서 선언을 하게 됩니다.
여러분 바로와 모세가 지금 왕궁에서 대치하고 있는 현장의 분위기를 한번 떠올려보십시오. 얼마나 험악했겠어요 사실 바로 왕은 지금까지 참아왔던 게 있잖아요. 계속해서 제안이 왔고 그러면서도 그의 마음을 굽히지 않는 이 상황 속에서 모세를 계속 만난다는 것도 쉽지는 않았을 것입니다.
하지만 모세는 바로의 강력한 협박에도 전혀 굴하지 않았다라는 거예요. 오히려 바로의 말대로 앞으로 다시는 볼 일이 없을 겁니다. 강대강 구도를 형성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뿐만 아니라 이 말이 끝난 후에 모세가 즉시 피했던 것이 아니에요. 사실 ‘너 다시 보지 마 보는 날엔 죽을 거야’ 하면 도망갈 만도 하지 않습니까? 그런데 오늘 본문의 내용을 보시면 모세는 바로에게 10번째 재앙이 임할 것이다 장자의 죽음에 대해서 구체적인 내용을 설명해 주고 있다는 거예요.
이제 다시 보지는 말자고 말했던 이 바로에게 또다시 재앙 이야기를 한다는 것은 그리 쉬운 이야기가 아니죠. 또 재앙 올 건데 하면서 다가간다는 게 쉽겠습니까? 다시 볼 때가 문제가 아니라 그 재앙의 이야기를 하다가 당장 죽을 수도 있는 상황이 생길 수 있다는 것이죠.
그럼에도 불구하고 모세는 여기서 멈추지 않고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백성들을 보호하심으로 애굽과 이스라엘을 구별하여서 하나님께서 이끄시는 걸 너희들이 볼 것이다.’ 더 강한 이야기로 그의 마음을 긁어내고 있습니다.
여러분 세상 기준으로 볼 때 바로가 모세보다 강하죠. 왕과 한 나라를 구원하기 위해서 오겠다고 했던 모세의 모습을 보면 당연히 모세가 약할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그런데 지금 모세는 왕이었던 바로보다 더 강한 자, 더 담대한 자로 서 있다는 것이죠.
그가 얼마나 담대했는지 오늘 본문 읽었던 8절 말씀을 보시면 굉장히 자극적인 말을 한 후에 노 하면서 떠났다고 기록해 주고 있어요. 8절 말씀 읽어보실까요?
왕의 이 모든 신화가 내게 내려와 내게 절하며 이르기를 너와 너를 따르는 온 백성은 나가라 한 후에야 내가 나가리라 하고 심이 노하여 바로에게서 나오니라.
왕의 모든 신하들은 누구를 경배합니까? 왕을 경배하는 것이죠. 그런데 그들이 자신에게 와서 엎드린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제발 떠나달라고 사정을 하게 될 것이고 그렇게 된 후에야 내가 떠날 것이다 큰소리 치고 바로에게 화를 버럭 내고 나가버립니다.
여러분 감히 바로 왕에게 노하며 떠날 수 있는 사람이 누가 있었겠습니까? 그렇다면 모세는 어떻게 해서 그 자리에서 담대하게 그 강한 왕보다 더 강함으로 대치하여서 선포할 수 있었을까요? 그가 선언한 모든 말은 누가 주신 거예요? 하나님이 주신 대 하나님께서 주신 말을 그대로 전한 것이죠. 하나님이 주신 말씀이라는 것을 신뢰했습니다. 따라서 그 배후에는 하나님이 계시다는 확신을 가지고 있었다는 거예요.
그리고 여러분 1절에서 3절 말씀, 지난주의 말씀을 기억하시는지 모르겠습니다만 그때 신실하신 하나님 내가 어떻게 너희를 구원할 것인가를 말씀해 주심으로 그것이 바로 왕 앞에서 담대히 말할 수 있는 배경이 될 수가 있었다는 것이죠.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세상이 아무리 강할지라도 세상을 창조하시고 다스리는 분은 누구십니까? 하나님이십니다. 세상이 강하다. 하지만 그 강한 세상을 만드시고 다스리시는 분이 하나님이시다. 할렐루야.
사탄 마귀가 우리를 파멸의 길로 인도하기 위해서 온갖 방법을 다 동원한다 할지라도 저와 여러분들을 보호하시고 사탄의 권세를 물리치시는 분이 있으시니 그분이 누구십니까? 하나님이십시오. 그러기에 사탄 마귀가 우리를 공격한다 할지라도 하나님을 믿고 신뢰하는 사람은 두려워하지 않는다는 거에요. 우리의 죄로 인해서 이 땅의 지진, 질병, 고통들이 임하게 되었습니다. 이러한 죄악에서 건지시는 분이 누구십니까? 하나님이시다. 그래서 시편 기자는 고백합니다. 시편 40편 2절에 같이 한번 읽어보실까요?
나를 기가 막힐 웅덩이와 수렁에서 끌어올리시고 내 발을 반석 위에 두사 내 걸음을 견고하게 하셨도다.
할렐루야. 기가 막힐 웅덩이 빠져나올 수 없는 웅덩이에 있었지만 하나님의 손길이 임하자 그 웅덩이에서 벗어났을 뿐만 아니라 어디 위에 세우셨다고요? 반석 위에 더 이상 무너지지도 않고 쓰러지지도 않고 깨지지 않는 반석 위에 하나님께서 세우셨다. 그래서 그가 고백한 것이 무엇입니까? 새 노래로 내가 하나님을 찬양하리라.
저와 여러분들이 구원의 손길을 경험하는 은혜 속에서 하나님을 찬양하는 기쁨이 있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 예배 시간에 우리 찬양 시간이 좀 길다. 하지만 여러분 찬양할 때 구원의 기쁨을 가지고 찬양하십시오. 조금 모르더라도 가사를 기억하면서 그 가사를 고백하면서 하나님께 찬양하는 자들이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복을 드립니다.
그리고 여러분 하나님께서 저와 여러분들을 죄악 가운데 빠져나올 수 없는 웅덩이 그곳에서 건져내을 믿으십니까? 여러분 이 사실을 믿는다면 우리는 승리자가 되는 그래서 요한일서 5장 4절에 보시면 이렇게 말씀을 해 주세요.
같이 한번 읽어볼까요?
물은 하나님께로부터 난 자마다 세상을 이기느니라. 세상을 이기는 승리는 이것이니 우리의 믿음이니라.
여러분 하나님께로부터 난 자는 세상을 이깁니다. 이 사실을 믿으십니까? 그런데 그 세상을 이기는 승리는 어디에 있다고요? 믿음이에요. 믿음 승리는 어디에 있는가? 믿음에 있다. 전능하신 하나님을 믿는 믿음 구원의 하나님을 믿는 믿음 아멘 약속이 신실하신 하나님을 믿는 믿음 없는 것 있게 하시고 죽은 자 살리시는 하나님을 믿는 믿음 여러분 우리가 이러한 믿음이 있을 때에 하나님을 기쁘시게 할 뿐만 아니라 세상을 이기는 자가 된다는 것이에요.
저와 여러분들이 이 땅 가운데 살아가면서 슬퍼하는 일들이 줄어들 수 있기를 소망합니다. 걱정하는 일들이 사라질 수 있기를 소망합니다. 두려워하고 염려하는 일들이 점점 소멸될 수 있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복을 드립니다.
이 세상을 사는 동안 수많은 환란을 당하는 것은 우리의 몫입니다. 죄인이기 때문에 주님 오시는 그날, 내가 죽는 그날까지 환란을 당하는 것이죠. 그럼에도 불구하고 참 평안을 누리기 위해서 누가 오셨어요? 예수님이 이 땅에 오셔서 죽으시고 부활하신 것 아니겠어요? 그래서 예수님께서 말씀하시잖아요.
평안을 너희에게 끼치느라 내가 줄 수 있는 평화는 세상이 줄 수 있는 것이 아니라 내가 이 평안을 위해서 세상을 이겼노라
할렐루야. 그러니까 부활의 주님을 믿는 자들은 슬퍼하는 것, 두려워하는 것, 걱정, 염려하는 것보다 기뻐하고 평안을 누리며 사는 것을 추구해야 된다는 것입니다.
왜요? 예수님께서 사망 권세를 이기시고 부활하셨기 때문이죠. 그 주님을 믿는 자들이 부활의 주님과 함께하는 자들이기에 또한 우리는 그리스도인으로 살아가게 되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모세가 죽자 이스라엘을 가나안 땅으로 인도할 여호수아를 선택하십시오. 그리고 여호수아에게 했던 말이 무엇입니까?
강하고 담대하라 두려워하지 말아라 놀라지 말아라 어디로 가든지 내 하나님께서 너와 함께 하시리라.
시편 기자가 선포합니다.
여호와를 바라보는 너희들아 강하고 담대하라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여호와를 바라보는 우리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강하고 담대할 수 있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복을 드립니다.
또한 시편 기자는 118편 6절 7절을 통해서 말씀을 주십니다. 우리의 고백으로 같이 읽어보실까요?
여호와는 내 편이시라 내가 두려워하지 아니하리니 사람이 내게 어찌할까 여호와께서 내 편이 되사 나를 돕는 자들 중에 계시니 그러므로 나를 미워하는 자들에게 복음 하시는 것을 내가 보리라.
하나님이 내 편이 되셔서 나와 함께하신다는 이 놀라운 사실을 말씀 그대로 믿으시고 강하고 담대함으로 이 땅 가운데 살아가는 성도의 삶이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
이제 4절에서 6절에 보시면 마지막 재앙에 대한 구체적인 내용을 세 가지로 구분해서 바로에게 선언을 하고 있음을 볼 수가 있습니다.
첫 번째 4절에 보시면 재앙의 때에 대해서 이야기를 해줍니다. 4절 말씀 읽어보실까요?
모세가 바로에게 이르되 여호와께서 이와 같이 말씀하시기를 밤중에 내가 애굽 가운데로 들어가리니
밤중에 재앙의 시기는 밤중이라는 것을 말씀해 주셨다는 거예요. 여러분 밤중이라는 것은 어둠을 대표하는 표현이죠 그리고 성경에서 어둠은 무엇을 말합니까? 죽음, 사탄의 세력, 죄악된 세상 악인의 길 이것들로 상징하고 있다는 거예요. 따라서 밤중이 되었다 우리의 인생이 밤중이 되었다는 것은 죄악된 세상 가운데 살아가면서 죄의 유무에서 벗어나지 못한 상태 즉 악인의 모습으로 살아가고 있는 자 그것을 밤중이라고 표현할 수가 있는 것이죠.
즉 악인의 모습으로 살아가는 그 모습을 그대로 표현할 때 밤중이라고도 표현할 수가 있다는 것입니다. 이러한 자들은 하나님의 지속적인 심판 경고가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바로와 같이 완악하여서 회개하지 않습니다. 여전히 죄악 가운데 살아가고 있는 모습을 보게 되는 것이죠.
여러분 노아의 때가 그러하지 않았습니까? 하나님께서 세상을 물로 심판하겠다 노아를 통해서 계속해서 하나님의 말씀으로 선포해 주셨다는 것이죠.
그런데 악한 세상은요 노아를 어떻게 했어요? 조롱하고 하나님의 말씀이 노아를 통해서 선포되었음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의 말씀을 무시하고 결국 어떻게 되었습니까? 멸망의 자리로 가게 된 것입니다.
그뿐 아니죠 소돔과 고모라도 동일했다는 거예요. 이들의 공통점이 무엇인지 아십니까? 죄를 지었음에도 불구하고 그것이 죄인지 모를 뿐만 아니라 죄라고 가르쳐 주어도 죄를 죄로 여기지 않았다는 거예요.
그런데 문제는 그 죄악 가운데 행하며 살 때에 심판은 홀연히 임한다는 것이죠. 그것을 오늘 말씀하고 있는 것입니다.
여러분 죄를 죄로 여기지 않는 악인들에게는 실제 아무런 소망이 없습니다. 그렇잖아요. 죄 가운데 그냥 살아가는 그 인생이 어떤 소망이 있겠어요 그래서 자문 4장 19절에 보시면 좀 말씀을 주세요. 같이 읽어보실까요?
악인의 길은 어둠 같아서 그가 걸려 넘어져도 그것이 무엇인지 깨닫지 못하는도다.
여러분 이 말씀에 보면 악인에 대한 세 가지 특징을 말씀해 주고 있습니다. 보십시오. 악인의 길은 뭐와 같다? 어둠. 악인의 길과 어둠이 같다는 거예요. 어둠은 악인의 길인 것이죠.
그런데 그 악인은 어떻다는 거예요? 걸려 넘어진다는 것이죠. 세 번째는 넘어져도 왜 넘어졌는지 모른다는 거예요.
여러분 이 세 가지를 한번 좀 잘 생각해 보셨으면 좋겠는데 첫째 어둠 두 번째 넘어짐의 문제는 심각하긴 하지만 우리도 아는 거예요. 그렇죠? 이거 악인들에게만 오는 특징 아니잖아요. 우리가 믿음으로 살아가고 성도로 살아가지만 우리의 삶 가운데 어둠이 찾아옵니다. 그리고 죄로 인해서 넘어지기도 한다는 것이죠. 이것이 우리의 연약한 인생의 모습이잖아요.
아직 완성되지 않은 하나님의 나라에 살고 있기 때문에 우리는 이 땅에 죄인으로서 살면서 죄의 유혹 가운데 넘어지기도 하고 어둠이 우리 가운데 찾아오기도 한다는 것이죠.
하지만 세 번째 경우는 다르다는 거예요. 넘어졌는데도 그것이 무엇인지 깨닫지 못하는 것은 악인들에게만 있는 거예요. 저와 여러분들은 의인이잖아요. 말씀을 통해서 깨닫잖아요. 이게 잘못이구나 이게 죄구나라는 것을 깨닫는 자들이 의인이라는 거예요.
지난 월요일날 제가 조깅을 하다가 아스팔트에 걸려서 그냥 철퍼덕 넘어졌어요. 과유불급. 이번 주에 굉장히 많이 제가 생각을 했습니다.
한 2주 정도 운동을 하니까 무릎도 괜찮아지고 살도 한 2.5kg가 빠져서 야 이제는 70대로 진입할 수 있겠다.
아마 이런 부푼 기대와 꿈을 가지고 그냥 열심히 운동을 했어요. 왜냐하면 주변에 아파하는 분들도 많고 제가 아는 목사님도 또 고통 가운데 계신 분도 있고 그래서 몸 관리를 좀 잘해야겠다. 그래서 시간을 정해서 제가 2시간 정도씩 보통 이렇게 운동을 하기 위해서 애를 쓰고 노력하는데 근데 자꾸 이렇게 살이 빠지고 몸이 좋아지는 것 같은 느낌이 드니까 더 하고 싶은 마음이 생기잖아요.
그래서 본래 집에서 나와서 동서마을 쪽으로 해서 그쪽에서 이렇게 수변도로를 걷기도 하고 뛰기도 하는데 조금 더 해보겠다고 롯데마트 쪽으로 이렇게 간 거예요. 그쪽으로 가면 조금 더 멀리 볼 수 있으니까 그런데 거기 내려가 보니까 공사를 하더라고요. 공사하는 부분 부분들이 있어서 그쪽에 보니까 이제 아스팔트를 이렇게 새로 했는데 하는 부분들이 이렇게 울퉁불퉁해요. 막 이렇게 솟아나오기도 하고 그래서 위험하다 생각했는데 그 생각하는 찰나에 딱 걸려서 넘어져버린 거예요.
그런데 걸려 넘어질 그때에 제 마음 가운데 넘어지지 말아야지 하는 이 마음이 굉장히 강렬했어요. 그런데 몸이 안 따라주는 걸 어떡합니까? 그냥 정면으로 그냥 넘어지면서 이 팔 뒤꿈치와 손바닥으로 그냥 주변의 한 아주머니가 보시더니 깜짝 놀란 거예요. 저는 제가 어떻게 넘어지는지 잘 모르잖아요. 근데 그분은 심각하게 생각한 거예요. 어떻게 어떻게 그러면서 제가 일어나는 모습 보세 피야 피피피 막 이러는 거예요. 그러니까 주변 사람들이 다 저를 쳐다보잖아요.
여러분 다 동일한 마음일 거예요. 아프기도 아프지만 창피하잖아요. 근데 그 찰나의 뒤에서 따라오던 첫째 아들이 제가 넘어진 걸 보고 후다닥 달려와가지고 아빠 괜찮아 괜찮아 이 묻는 거예요.
괜찮겠습니까? 아프기도 아프지만 창피해서 제가 얼른 일어나서 뼈에는 이상이 없는 것 같은 그러한 느낌이 들어서 괜찮습니다 하고 속히 황급히 그 자리를 벗어나 뛰기 시작했어요. 사실 이제 뛰기 시작한 지 얼마 안 돼서 다시 집으로 가기도 좀 애매해서 에이 모르겠다. 1시간 더 뛰자 하고 뛰고 들어가가지고 집에 가서 이렇게 씻는데요. 물을 이렇게 쭉 뿌리는데 얼마나 쓰라리던지 여러분 그거 아십니까? 그러면서 제가 마음 가운데 생각을 했습니다. 이거 너무 무리해서 하는 거 좋지 않겠다.
그리고 길이 좋지 않으면 좀 좋은 길에서 뛰면 되고 그때 걸으면 되잖아요. 생각했어요. 그래 다음에 뛸 때는 점점 무리해서 뛰지 말고 좀 이제 나의 상황에 맞춰서 이렇게 뛰고 또 자리가 고르지 못하면 걷기도 하고 그래서 좋은 자리에서 뛰어야겠다라는 그러한 생각을 하게 되었습니다.
여러분 끝나고 오늘 제가 나갈 때 괜찮으세요? 묻지 마십시오. 괜찮습니다. 한 분씩 다 물어보면 제가 대답하기 곤란하니까 괜찮습니다.
근데 제가 이 이야기를 하는 이유는 뭐냐 하면 여러분 넘어져서 유익한 것이 있어요. 물론 아프고 창피하고 그렇지만 넘어짐으로 인해서 다음에 조심해야겠다는 경각심이 생기고요. 다음에 어떻게 하면 이것을 잘 피해갈 수 있겠다는 그러한 방법들을 모색할 수가 있다는 것이죠.
그런데 문제는 죄인들은 죄를 지었음에도 불구하고 무엇 때문에 넘어졌는지 알지 못한다는 것입니다. 그게 문제라는 거예요. 넘어졌을 때 이것 때문에 넘어졌지 다음에는 이것들을 조심해야겠다는 생각을 하는 자와 넘어졌는데 무엇 때문에 넘어졌는지도 모르고 그것에 계속해서 반복해서 넘어진다면 그것이야말로 큰 문제가 되는 것이죠.
여러분 분명한 사실이 하나 있는데 죄를 죄로 여기지 않고 악을 악으로 생각하지 못한다면 돌이킬 수 있는 방법은 없습니다. 여러분 대화하다 보면 정말 고집 강하신 분들 있잖아요. 대화 설득할 수가 없어요. 왜? 그게 진리이기 때문에 그러니까 죄를 죄라고 모르고 살아가는 자들에게 죄라고 얘기하면 그것은 그의 마음을 바꿀 수 있는 길이 없다는 것이죠.
그리고 죄 가운데 돌이키지 않는 자는 결국 어떻게 됩니까? 소망이 없이 패망의 자리로 가게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시편 1편 6절 우리가 잘 아는 시편 1편을 보시면 마지막에 악인의 길은 망한다. 그렇게 기록해 주고 있는 것입니다.
여러분 누구나 범죄에 빠질 수 있습니다. 즉 믿음으로 살아가는 나의 삶에도 어둠이 찾아와 나를 넘어뜨리고 죄악 가운데 머물 수도 있다라는 것이죠. 그런데 분명한 사실은 회개하는 자는 소망이 있고 회개하지 않는 자는 소망이 없다는 거예요.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어둠으로 인하여 넘어지는 죄를 지었을 때 깨닫는 지혜가 있어 회개함으로 하나님의 형상이 회복되어지는 은혜가 있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복을 드립니다.
더불어 어둠이 찾아왔을 때 어둠이 나의 삶을 지배 지배하지 못하도록 이 어둠이 나에게서 떠나게 해달라고 간구하는 성도님들이 계실 수 있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
금요일 저녁마다 지금 주기도문에 대해서 말씀을 나누고 있습니다. 다음 주면 주기도문의 강의가 끝나는데 여러분 예수님께서 기도를 가르쳐 주신 것이 주기도문이잖아요. 제자들에게 얼마나 많은 것들을 가르쳐주고 싶었겠어요. 다양한 부분의 기도의 내용들이 있을 것 아니겠어요. 그럼에도 불구하고 정말 꼭 필요한 몇 가지를 꼭 필요한 것들을 집약해서 가르쳐주신 것이 주님이 가르쳐 주신 기도예요.
그 기도문에 보시면 마지막 강\간구로 악에서 구원해 주십시오라는 강구가 있다는 것이죠. 그걸 가르쳐 주었다는 거예요. 그 강구는 악에서 구원하는 하나님의 손길을 겸하는 복된 기도가 되는 것이죠.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죄의 자리, 절망의 자리, 죽음의 자리, 심판과 파멸의 자리에 있을 때에 저와 여러분들이 깨닫는 지혜가 있어서 회개의 삶을 사시고 또한 구원의 요청을 통해서 구원의 자리, 승리의 자리, 의의 자리, 소망의 자리, 생명의 자리, 이리로 옮겨지는 역사가 있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복을 드립니다.
4절에 한 가지 더 주목할 것이 있는데 재앙을 주시기 위해서 애굽 가운데로 누가 들어가십니까? 하나님께서 돌아가세요. 우리 4절 말씀 다시 한번 보실까요?
모세가 바로에게 이르되 여호와께서 이와 같이 말씀하시기를 밤중에 내가 애굽 가운데로 들어가리니
밤중에 하나님께서 들어가시겠다. 심판하기 위해서 친히 애굽으로 들어가시는 것이죠. 여러분 이 모습은 무엇과 같냐면 이제 심판의 주로 오실 예수가 이 땅에 친히 오시는 모습과도 같은 것이죠. 예수님이 다시 오는 재림의 때에 예수님께서 다른 곳 가는 것이 아니죠. 이 땅으로 오시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때가 바로 주의 날 심판의 때이며 후원의 날이 되는 것이죠.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주의 날 저와 여러분들에게 심판의 날이 아닌 구원의 날이 될 수 있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
두 번째는 이제 재앙에 대해서 대상에 대해서 5절에 기록해 주셨습니다. 대상 5절 말씀 같이 읽어보십니다.
애굽 땅에 있는 모든 처음 난 것은 왕위에 앉아 있는 바로의 장자로부터 맷돌 뒤에 있는 몸종의 장자와 모든 가축에 처음 난 것까지 죽으리니
애굽 땅에 있는 모든 천난 것이라고 이야기를 했습니다. 이는 애굽인들 중에 하나님의 장자 재앙으로부터 자유할 사람이 아무도 없다는 것을 말씀하고 있는 것이죠. 부한 자든 가난한 자든 높은 위치에 있는 자든 낮은 위치에 있는 자든 누구나 이 장자의 재앙으로부터 피할 수 없다는 것입니다. 오죽했으면 여러분 가축까지 처음난 것들을 재앙으로 몰아가시겠습니까 특별히 여러분 고대 사회 그 세계 속에서 보면 장자는요 한 가정의 대표를 표현하는 것이었습니다. 그래서 여러분 장자는 두 배의 권리를 누리는 축복을 가졌잖아요. 그런 의미로 볼 때 장자의 재앙은 모든 애굽에게 임한 재앙이라고 볼 수가 있는 것이죠.
여러분 주님 다시 오시는 그날 악인들은 피할 길이 없다는 거예요. 악인들은 모두가 재앙의 대상이 된다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의 심판으로부터 피할 수 있는 사람은 단 한 사람도 없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그 재앙으로부터 그 심판으로부터 피할 길이 있으니 그것은 바로 우리의 생명의 길 되신 예수 그리스도라는 것이죠. 노아의 때에 방주 안에 들어갔던 사람들은 생명을 얻었죠. 그거와 마찬가지 홍해를 건널 때에 여러분 하나님께서 그 홍해를 마르게 하시고 마른 땅을 건너게 하셨습니다.
그런데 그 뒤에 추격하고 있던 애굽 군사들은 어떻게 됐습니까? 수장됐잖아요. 그러니까 맨 땅을 걸으면서 수장되는 그들을 보았다는 거예요. 하나님의 울타리 안에 있는 사람들은 구원의 은혜가 있었다는 것이죠. 그와 마찬가지로 이 시대에 살아가면서 그리스도 안에 거하는 자는 누구나 하나님의 심판에서 구원을 받게 된다는 것입니다.
하지만 앞서 말씀을 드렸던 것처럼 그리스도 밖에 있는 자들 아무리 견고한 성에 있다 할지라도 아무리 안전하다 말할지라도 심판으로부터 자유할 수가 없고 피할 수도 없다는 것 그래서 데살로니가전서 5장 3절에는 이렇게 말씀을 주세요. 같이 한번 읽어보실까요?
그들이 평안하다 안전하다 할 그 때에 임신한 여자에게 해산의 고통이 이름과 같이 멸망이 갑자기 그들에게 이르리니 결코 피하지 못하리라.
평안하다 안전하다고 아무리 이야기해도 그들이 정말로 경고한 성에 있다 할지라도 하나님께서 심판으로 임할 때는 피할 자가 없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저와 여러분들이 재앙의 대상이 되지 않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복을 드립니다.
세 번째는 재앙에 따르는 애굽의 반응이 어떠한지 6절에 기록되어져 있습니다. 6절 말씀 보실까요?
애굽 온 땅에 전무무무한 큰 부르짖음이 있으리라.
애굽 온 땅에 부르짖음이 있었다는 거예요. 스스로의 힘으로 절대로 해결할 수 없었기 때문에 이 너무나 큰 고통을 어떻게 극복할까? 할 수 없으니 부르짖은 거예요. 그들의 부르짖음 속에는 절규가 담겨져 있었겠죠.
여러분 그러면 애굽 사람들의 이 부르짖음을 통해서 혹시 떠오르는 장면이 있습니까? 출애굽 시대 출애굽기 2장 23절에 보시면 이스라엘 백성들이 고된 노역으로 인해서 하나님께 부르셨어요. 그렇죠? 고된 노력으로 인해서 하나님께 탄식을 하며 부르짖었습니다. 그리고 그 부르짖음은 하늘에 상달되었고 하나님께서는 그 고통 소리를 들으시고 그들을 구원하기 위해서 일을 행하셨다는 거다.
여러분 이스라엘 백성들은 세상으로 인한 고통 소리를 하나님께 구한 것이었죠 애굽 백성들은요. 하나님의 심판에 의한 고통으로 하나 소리를 부르짖은 것입니다. 여러분 따라서 애굽 백성의 소리와 하나님의 백성들의 소리는 구분이 되죠 둘 다 부르짖음이지만 다르다는 거예요.
예수님께서 우리에게 팔복을 말씀하시면서 ‘의를 위해서 박해를 받는 자가 복되다.’ 그렇게 말씀하십니다.
또한 ‘나로 말미암아 너희를 욕하고 박해하고 거짓으로 너희를 거슬러서 모든 악을 말하는 그때에 복이 있다.’ 그렇게 말씀을 해주셨습니다.
여러분 의를 위해서 예수를 위해서 곡소리 날 만한 일이 실제로 우리의 삶 가운데 있다는 거예요. 예수 믿어서 부르짖어야 할 때가 있다는 것이죠. 하지만 그 고통의 소리는 복된 소식, 복된 소리가 될 수가 있는 것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이 땅을 사는 동안 악으로 인해서 고통 소리를 낼 만한 공격을 당할지라도 악에게 지지 마시고 승리하셔서 마지막 때에 고통의 소리에서 자유를 얻을 수 있는 저와 여러분들이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복을 드립니다.
애굽 전역에 임할 재앙과는 달리 이스라엘 백성들 그들을 구별하고 보호하셨다는 것을 7절에 기록해 줍니다. 우리 7절 읽어보실까요?
그러나 이스라엘 자손에게 사람에게나 짐승에게나 개 한 마리도 그 혀를 움직이지 아니하리니 여호와께서 애굽 사람과 이스라엘 사이를 구별하는 줄을 너희가 알리라 하셨나니.
이 구절에 아주 특징적인 표현이 무엇입니까? 이스라엘 자손에게는 사람에게나 짐승에게나 개 한 마리도 무엇을 움직이지 아니하게 하셨다 혀를 움직이지 않게 했다. 쉽게 말해서 개 한 마리도 짖지 않았다는 거예요.
여러분 개의 특징 중에 하나가 뭔지 아십니까? 짖는 거죠. 얼마나 잘 짖습니까? 낯선 사람 보면 고 귀신을 봐도 짖는다 하잖아요. 그리고 뭐 어떤 전조 증상이 나타나는 계절은 또 짖는다 하잖아요.
여러분 이렇게 잘 짖는 개도 한 마리도 짖지 않을 정도로 어떻게 보호하시겠다? 하나님께서 철저하게 보호해 주시겠다. 그런 의미를 담아내고 있습니다.
여러분 우리가 잘 아는 요한복음 3장 16절 말씀 있죠? 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독생자를 주셨으니 이는 저를 믿는 자마다 뭐 하지 않는다고요? 멸망하지 아니하고 어떻게 한다고요? 영생을 얻게 하려 하신다. 이게 정말 복음의 핵심이지 않습니까? 여러분 하나님이 독생자 아들 예수를 세상에 보내신 이유는 심판을 위해서입니까 구원을 위해서입니까? 구원을 위해서죠. 여러분 그것이 분명한 사실입니다.
그런데 누구에게는 심판으로 온다는 것이죠. 그래서 요한복음 3장 17절에 말씀합니다. 같이 읽어보실까요?
하나님이 그 아들을 세상에 보내신 것은 세상을 심판하려 하심이 아니오. 그로 말미암아 세상에 구원을 받게 하려 하심이라.
여러분 믿는 자는 심판을 받지 아니한다. 믿지 아니하는 자 하나님의 독생자들을 믿지 않는 것이기 때문에 심판이 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빛보다 어둠을 더 사랑하는 일이 없기를 소망합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빛보다 어둠을 더 사랑하는 일이 없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복을 드립니다. 그리고 저와 여러분들이 빛이 있는 자리를 찾는 은혜와 지혜가 있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
예수님께서 빛으로 오셨는데 어둠에 있다 보면 빛을 잃어버립니다. 내 어둠의 현장에 예수님께서 물론 빛으로 오십니다. 그런데 어둠에 몰두하고 있으면 빛을 보지 못하고 살아갑니다. 그래서 우리는 습관적으로라도 빛의 자리를 찾아야 되는 거예요.
그게 무슨 자리겠어요? 예배의 자리 기도의 자리 말씀의 자리 세상에서 저와 여러분들을 요청하는 데가 얼마나 많아요. 공예배에 나오지 못할 만큼의 바쁜 생활들이 얼마나 많습니까? 내가 하나님 앞에 구별되는 시간이 하루 중에 얼마나 있습니까? 그 빛을 공급받기 위해서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세상은 계속해서 요구할 것입니다. 저와 여러분들을 점점점 세상 쪽으로 요구하는 것이 현실이 될 거예요. 세상 사람들이 다 그 길을 갈지라도 우리 믿음의 성도님들 역행할 수 있는 은혜가 있기를 소망합니다.
하나님께 나아가는 시간들을 구별하십시오. 그래서 그때 이미 우리에게 임했지만 꺼져가는 불이 다시금 살아날 수 있도록 그래서 어둠이 침범하지 못하도록 깨어 기도하시고 그 빛이 있는 자리를 찾으시고 그곳에서 공급되는 빛을 통해서 충전하여서 세상 속에서 넉넉히 이기며 살아가는 거룩한 성도님들이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
제가 이번 주 중에 한 번 새벽에 못 일어났어요. 새벽 운동에 가야 되는데 제가 못 일어나면 차를 타시는 분들은 아예 못 나오세요. 제가 확인해 보니까 세 분이 나오시기로 돼 있었는데 이제 저한테 미리미리 연락을 오시거든요. 못 오실 때는 세 분이 못 오신 거예요. 물론 새벽 예배가 시작되기 전에 일어나서 저는 나와서 불을 켜고 준비를 하고 있었습니다. 누구라도 오시지 않을까 혹시라도 오시면 해야지라는 마음으 그리고 시작했습니다. 저 뒤에 아내가 앉아 있고 제가 저희 교회에서 처음으로 둘이서 예배드려본 시간이었습니다.
그때 제가 기도하면서 여러 가지 마음이 들었어요. 정말 개척교회에서 기도하시는 분들의 마음을 헤아릴 수 있게 되었고 정말 그 기도의 자리에 한 분이 이 얼마나 소중한가에 대한 생각도 해보게 되었고 여러분 기도의 자리 구별하셔서 다는 못하더라도 나의 삶을 하나님께 드릴 수 있는 시간 수요, 금요 기도의 여러분 세상에 바쁜 일이 있지만 조금 더 사랑하시고 주님 앞에 나아가는 시간들을 확보하셔서 빛이 많은 그 자리에서 하나님의 은혜를 사모하고 하나님의 은혜 가운데 세상을 능히 승리하며 살아가는 우리 귀한 성도님들이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
◈ Messenger’s Note:
“In his heart, a man plans his course, but the LORD determines his steps.” (Proverbs 16:9)
“Nevertheless, not my will but yours, be done.” (Luke 22:4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