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조는 정형을 벗어나지 말아야 한다
시조는 정형을 벗어나지 말아야 한다.
이 봉 수 (시조시인, 문학평론가)
시조는 아무리 내용이 문학적이고 예술성을 갖추고 있다고 하더라도 정형을 무시하면 시조로서의 가치를 상실한다. 정형을 일탈한 시조는 이미 시조가 아니다. 따라서 자유시로서 평가를 받을 수는 있을지언정 시조작품으로 평가를 받아서는 안 된다.
시조는 3,4조의 율격과 3장 6구 12음보를 기본 정형으로 한다. 이에 더하여 종장 3.5.4.3의 변화를 의무화 하고 있다.
시조시인이나 심사위원, 평론가, 학자는 물론, 등단지망생과 시조를 공부하는 학생들 까지도 이런 시조정형을 모르는 사람이 없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각종 시조문예지에는 시조정형을 제대로 갖춘 작품을 찾기 어렵다. 수 천 편에 달하는 출품작에서 골라 뽑은 신춘문예 당선작 중에서도 정형과 내용을 제대로 갖춘 시조를 만나기가 어렵다.
혹자는 시조는 융통성이 있는 정형시이므로 어느 정도의 파격은 허용된다고 한다. 한두 자의 가감은 무방하다는 것이다.
물론 음보율이 맞으면 자수율만으로 재단할 수는 없다. 그러나 음보율은 한국어의 의미마디, 발음 및 호흡이 맞을 때 무리가 없는 것이지 억지로 짜 내어 음보율을 주장하면 정형의 파괴로 이어진다. 한두 자 가감도 어쩌다 부득이한 경우에 예외로 허용되는 것이지 음보마다 무제한 가감하는 것은 이미 시조정형이 아니다.
“누가 시조는 .......3장 6구의 제약에 꼭 매어야 한다고 주장하는가. 고집스런 한정된 공식의 누각만 짓는다면 시조문학은 현대인으로부터 멀어지고 말 것이다. 시 같은 시조, 시조 같은 시를 우리는 시도할 때이다....”
이런 중견 시조시인의 글이 있다(조옥동, 새시대시조2007겨울호 P218). 시 같은 시조를 시도해야 한다 즉 시조는 정형이 필요 없이 시와 같게 써야 한다는 뜻이다. 시조장르를 해체 하자는 주장이다.
시조정형은 수백 년의 시간을 투입하여 얻어낸 결과이다. 유명 무명의 수많은 문인들이 대를 이어 오면서 갈고 다듬은 결과이다. 가장 좋다고 인정되었기 때문에 정형으로 굳어진 것이다. 마치 물이 과학적인 원리에 의하여 흐름을 이루다가 오랜 세월이 지나서 폭포의 모양을 만들어 내는 것과 같다고 볼 수 있다.
현대는 개성(個性)의 시대라고 한다. 그렇다고 시조정형을 개성에 따라 각인각색으로 정할 수는 없다. 이는 시조정형의 파괴에 다름 아니다.
시조정형을 파괴하는 일에 앞장서서 큰 역할을 하는 일번 타자는 신춘문예 심사위원, 각종 문예지등단 심사위원, 각종시상 심사위원, 시조평론가 등 시조비평계에 있다.
극소수에 불과한 비평계가 절대다수의 창작계와 독자를 향도(嚮導)한다.
이들 중 적지 않은 사람이 시조정형을 무시하고 각양각색의 개인적인 주장으로, 새 지평을 여는 선구자인 양, 새로운 시도를 하는 거장(巨匠)인 양, 자기도취에 빠져 심사하고, 평론하고, 시상을 함으로서 시조는 나날이 병들어 가고 있다.
시조정형을 더 다듬고 굳히는 일은 안중에도 없고 개인적인 공명심과 이해관계에 빠져 여러 형태의 시조 분열에 일조하고 마침내 시조장르해체의 위기를 앞당기고 있다. 시조가 교과서에서 사라질 날도 멀지 않았다.
특히 언론사 신춘문예는 파괴력이 절대적이다. 화려한 등단(실제로 신춘문예등단은 문예지 등단보다 화려하지도 않고 반짝 인기가 아닌지 의문)을 목표로 하는 수많은 응모자들은 심사위원의 성향을 파악하는 것을 관건(關鍵)으로 인식하고 심사위원의 구미를 맞추는데 창작에너지를 낭비한다.
이런 환경에서 신춘문예 심사위원이 정형을 파괴한 작품을 당선시키면 수많은 지망생들이 그런 작품만 쓰게 되는 것은 필연적이다. 독자인 전 국민이 시조를 오해하는 것 또한 피할 수 없다.
왜곡된 당선심사와 각종 시상이 해를 거듭하면서 시조는 회생불능의 상태로 병들어 가고 이대로 방치하면 마침내 한국에는 정형시가 없어지게 될 것이다.
최근의 당선작을 중심으로 시조정형 파괴의 현주소를 짚어 본다.
1. 매일신문 08년 신춘문예당선작에 대하여
눈 속의 새
황성곤
광년을 달려와 빛이 된 투명한 새
망막에 앉은 기억, 때 늦은 아픈 고백
이른 봄
번갯불 튄 그대 스르르 한 점 불이었던
빅뱅의 환상이거나 눈부신 기록이었을
이별 뒤 하얀 여백 지울 수 없는 허공 같아
가락지
흰 원을 걸어 필생의 울음 가둔 걸까
수축하는 잔등, 달이 팽창하는 저 언덕
환각처럼 눈 속의 새 쪼그려 앉아있는데
우수수
눈망울 털어내면 겨울 그 후, 빈 고요
심사위원 심사평
심사위원: 이정환
(전략)
또한 엄정한 정형 형식에 크게 구애되지 않으면서 시상을 자유자재로 전개하는 활달한 수사법이 담긴 내용과 적절한 조화와 균형을 유지하고 있는 점도 신뢰를 더한다.
필자의 종합평
자유시의 연(聯)과 행(行)은 시조에서는 수(首)와 장(章)으로 대비된다. 육당 최남선에 의해 장(章) 구(句)의 배행이 생긴 이래 현대시조는 수와 장의 확실한 구별을 특징으로 한다.
연,행과 수,장으로 시어를 배열하는 것은 리듬의 극대화, 의미의 극대화, 시각적 미관 등을 위함이다.
별다른 필요도 없이 수,장을 마구 흩트려 자유시처럼 늘어놓는 것은 시조정형의 파괴이다.
시조의 수(首)는 큰 의미마디, 장(章)은 중간 의미마디, 구(句)는 작은 의미마디이다.
이를 무시한 당선작은 1연 12행의 자유시라고 밖에 볼 수 없다.
[이른 봄/ 번갯불 튄 그대 스르르 한 점 불이었던]
은 아무리 봐도 시조의 종장이 아니다. 음보가 3.6.3.6 인 것도 문제지만 [...불이었던 빅뱅의 환상이거나 눈부신 기록이었을]로 연결되기 때문이다.
형식적 수,장의 구별이 없을 뿐만 아니라 내용적 수,장의 구별도 없다. 하나의 의미마디인 1연의 자유시이다.
시상의 초점도 없고 언어의 구조도 종잡을 수가 없는 작품이다.
심사위원은 “엄정한 정형 형식에 크게 구애되지 않고” 내용이 좋아 신뢰를 더한다고 했다. 엄정한 정형을 지키면서 내용이 좋으면 신뢰가 떨어지는가? 그렇다면 시조 형식은 무엇인가? 정형시는 형식에 구애되지 않아도 정형시란 말인가?
2. 서울신문 08년 신춘문예당선작에 대하여
까마귀가 나는 밀밭
-‘오베르’**에서 보내온 고흐의 편지
임채성
윤오월/ 밑그림은/ 늘, 눅눅한/ 먹빛이다
노란 물감/ 풀린 들녘/ 이랑마다/ 눈부신데
그 많던/ 사이프러스/ 다 어디로/ 가 버렸나
소리가/ 죽은 귀엔/ 바람조차/ 머물지 않고
갸웃한/ 이젤 틈에/ 이따금 걸리는/ 햇살
더께 진/ 무채색 삶은/ 덧칠로도/ 감출 수 없네
폭풍이/ 오려는가,/ 무겁게 드리운/ 하늘
까마귀도/ 버거운지/ 몸 낮춰/ 날고 있다
화판 속/ 길은 세 줄기,/ 또 발목이/ 저려온다
모든 것이/떠나든 남든/내겐 아직/ 붓이 있고
하늘갓/ 지평 끝에/ 흰 구름/ 막을 걷을 때
비로소/소실점 너머/뉘가 새로/ 열린다
/ci0009 *빈센트 반 고흐의 마지막 작품으로 알려진 유화그림.
**오베르 쉬르 와즈:파리 북쪽의 시골마을.‘생레미’의 정신병원을 퇴원한 고흐가 약 두 달간 살다가 죽은 마지막 정착지로 그의 무덤이 있다.
심사위원심사평
-시공 넘나드는 붓놀림 뛰어나
심사위원 : 이근배, 한분순
새 아침의 언어가 신설처럼 차고 희다. 현대시조 100년을 넘어서면서 신인들이 내딛는 발걸음도 한결 더 빨라지고 있다. 시조가 신춘문예를 만나서 불꽃을 피우며 새 지평을 열어가고 있는 것은 참으로 반가운 일이다.
............
필자의 종합평
당선작은 시조의 3.4조 음보율을 상실한 것이 한두 군데가 아니다(밑줄 친 부분). 정형인 수(首)의 구별이 없다. 1연 12행의 자유시이다.
내용상으로는 4개의 큰 의미마디로 나누어 4수로 쓸 수 있는데 굳이 1연의 자유시로 붙여 쓴 이유가 무엇인지 모르겠다. 자유시를 흉내 내어 자유시처럼 보이려고 한 것인가?
행,연을 잘 다듬어 자유시로 응모를 하였더라면 훨씬 좋은 작품이 되지 않았나 싶다.
이런 작품을 시조라고 하면서 응모를 하고 이를 시조당선작으로 뽑아 놓은 현실이 안타깝다.
시조가 이와 같이 불구의 모습으로 신춘문예를 석권하는 것이 “새 지평을 여는 것”이며 “반가운 일”인가?
3. 중앙시조백일장 07.8월 당선작에 대하여
심사위원 : 이정환 이승은
(장원)
아버지의 구두
문선비 작
둘째수 종장
[여정을 마친 표정이 한지처럼 따스했다.]
필자의 견해 : 위 종장은 시조정형이 아니다. [여정을 마친/ 표정이/ 한지처럼/따스했다/] 5,3,4,4 이것이 정형인가?
억지로 틀에 구겨 넣어도 자수만 맞추면 시조정형이라고 착각하고 있다.
(차상)
숨쉬는 돌
연선옥
-미륵사지
길고긴 세월의 무게 견디다 사라진 절집
평평한 주춧돌 여기, 별처럼 박혀 있네
한 집안 떠받치다 가신 아버지 그 어깨가
-징검다리
무시로 밟고 가는 흰 달빛 다 받아주고
저편에서 이편으로 등을 밟고 건널 때마다
어머니,냇물에 앉아 잠들지 못한 한 평생.
만경강 한 허리쯤 이름뿐인 포구에는
필자의 종합평
심사위원들은 시조형식에 관해서는 언급이 없다. 3.4조 음보율을 일탈한 것은 말할 것도 없고 첫째 수 중장 [평평한/ 주춧돌/ 여기,/ 별처럼/ 박혀 있네] 3.3.2.3.4 는 시조 정형이 아니다.
둘째 수(首라고 할 수도 없지만) [징검다리]는 아예 시조가 아니다. 이런 4행시를 시조라고 당선시켜 놓고 정형시라고 독자를 우롱하고 있다. 어느 부분이 종장 정형인가?
(차하)
옛 둑에서
박신산
나팔꽃 홀로 피는 달맞이 길 꼬부라지고
농게들 혈거(穴居) 떠난 지 석삼년은 넘었겠다.
자갈 둑 뚜덜대는 억새 틈에 목을 늘여
강바람 호명하면 먹구름 몰려들어
소나기 튀다 멎는 곳, 토란잎들 서늘하다.
별자리 우수수 내려 뒷강에 멱을 감던
실꾸리 감던 순이 손톱물 번졌는데
꽃 물든 어린 내 맘은 부끄러워 마구 뛰었다.
필자의 종합평
역시 첫째 수는 초장 또는 중장이 떨어져 나간 불구이다. 사대육신 (四大六身)이 어쩌다가 머리(또는 팔)가 없어졌는가? 불구의 신체는 아무리 미화(美化)해도 아름다울 수가 없다.
작자와 심사위원들은 양장시조와 3장시조를 혼합한 걸작이라고 착각하고 있다.
양장시조나 4장시조는 시조가 아니다. 수십 년 전 저명 시조시인이 시도하였지만 실패하여 꺼진 불이 되었다. 뒤늦게 잿더미에서 불씨를 살리려고 애쓰느니 3장 정형으로 참신한 새 시대의 시상을 담는 것이 정도가 아닐까?
4. 중앙시조백일장 07.9월 당선작에 대하여
심사위원 : 김영재 정수자
(차상)
땅끝 바다를 만나다
배명민
파도는 꽃잎이다 좌르르 펼쳐지는
활짝 핀 파도 한 잎 재갈매기 물고 난다
선홍빛 해당화 같은 꽃 향이 번지는 곳
땅끝 그 꽃의 바다, 바람 불어 물길 열면
초록 빛 손가락으로 건반을 두드린다
꽃잎이 피어오르듯 음표들이 피어난다
땅끝바다, 한여자가 느닷없이 들어와서
몸 안의 음률들을 잠기도록 풀어 놓는다
마르고 텅 빈 이 바다, 너를 만나 채운 환희
필자의 작품평
1연 8행의 자유시이다.
내용적으로는 바다의 시각적 이미지, 청각적 환청, 심상의 묘사 등 3수로 구별할 수 있지만 시조라고 하면서 굳이 수의 구별을 없애버린 이유를 알 수가 없다.
자유시를 흉내 냄인가? 작품을 어렵게 보이려고 작심한 것인가?
(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