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비[慈悲] 뜻
자비[慈悲]에서
자[慈]는 <자애>요, 비[悲]는 <연민>이다.
자비[慈悲]란,
자애와 연민....이 두가지를 말한다.
<자애>란,
다른 이들을 사랑스럽게 친절하고 소중히 대하는 것을 말하고,
<연민>이란,
다른 이들의 불행과 고통을 마음 속 깊이 안타깝게 여기는 것을 말한다.
자비[慈悲]...
자[慈]가 우선이요, 비[悲]는 뒤에 온다.
자[慈]로 말미암아 비[悲]가 생겨나기 때문이다.
자애가 없다면 연민도 생겨나지 않는다.
싫어하는 사람을 불쌍히 여길 수는 없으니까...
그래서 *(주(註)1)<사무량심 (四無量心) >에서 자(慈)→비(悲)→희(喜)→사(捨)의 순서이다.
또한 자비[慈悲]는 둘이 같이 함께 있을 수 없다.
자애의 마음이 있을 때는 연민이 없고,
연민의 마음이 있을 때는 자애가 없다.
그래서 자비[慈悲]의 뜻을 풀이할 때는
두가지, 즉 <자애>와 <연민>으로 해설한다.
보리심의 근원은 바로 <비심>, 즉 연민심이고,
연민심의 근원은 바로 <자심>, 즉 자애심이다.
그래서 자애명상이 굉장히 중요한 수행법이다.
그 누구에게나....
세속 중생의 자비는 치우친 자비이다.
즉, 자신과 친하고 관계가 좋은 사람들에게만 자비를 베풀기 때문이다.
자신과 무관하고 또 싫어하는 사람에겐 자비를 베풀지 않는다.
자신의 적이나 원수의 불행을 오히려 기뻐하는데.....
불교에서의 자비[慈悲]는,
무차별적인 자비이고, 평등의 자비이다.
나에게 해를 끼치건 말건 상관없이,
나에게 신경을 쓰던 말던 상관없이,
나에게 친절하던 말던 관계없이........그 누구에게나 평등한 자비를 베푼다.
그 누구에게도 차별없는 자비[慈悲],
또 예외없는 자비[慈悲]가 바로 불교의 자비[慈悲]이다.
왜 무차별적으로 악한 존재에게조차 자비[慈悲]를 베풀어야 하는가?
선하건 악하건 상관없이
모든 존재는 다 행복을 바라기 때문이다.
또한 모든 존재는 근본적으로, 본질적으로 악한 존재가 아니기 때문이다.
번뇌에 휘둘려서 악한 행동을 할 뿐이다.
살아있는 모든 것들은 불행과 고통을 싫어하고 행복하기를 바란다.
그래서 불보살님들께서는 무차별적인 자비를 베푸신다.
무차별적인 자비[慈悲].....무조건적인 자비[慈悲].....댓가를 바라지 않은 자비[慈悲]...
참으로 멋지다.
무차별적인 <대자대비>를 베푸시는 불보살님들께 귀의하고 또 귀의합니다.
번뇌를 무찌르는 무기 두가지가 있는데,
하나는 지혜요, 또 하나는 자비이다.
그래서 석가세존께서 성불하시기 바로 직전 보살이셨을 때,
마왕 파순을 불러내 이렇게 말씀하셨다.
"나는 *(주(註)2) 공 (空 /무상 (無相 /무원 (無願) 의 삼삼매 ( 三三昧) 와 자 (慈) 비 (悲) 희 (喜) 사 (捨) 사무량심 (四無量心) 으로 너를 무찌르리라."
*(주(註)1)<사무량심 (四無量心) > 은 중생에게 즐거움을 주고 괴로움과 미혹을 없애주기 위해 보살이 가지는 자(慈)·비(悲)·희(喜)·사(捨) 의 4가지 무량심( 無量心) 을 의미하는 불교교리이다.
모든 중생에게 즐거움을 주고 괴로움과 미혹을 없애주는 자(慈)·비(悲)·희(喜)·사(捨)의 네가지 무량심 ( 無量心) 을 의미한다.
자무량심(慈無量心)은 모든 중생에게 즐거움을 베풀어 주는 마음가짐이며, 비무량심(悲無量心)은 중생을 불쌍히 여기는 마음으로 고통의 세계로부터 구해내어 깨달음의 해탈락(解脫樂)을 주려는 마음가짐이다. 희무량심(喜無量心)은 중생으로 하여금 고통을 버리고 낙을 얻어 희열하게 하려는 마음가짐이며, 사무량심(捨無量心)은 탐욕이 없음을 근본으로 하여 모든 중생을 평등하게 보고 미움과 가까움에 대한 구별을 두지 않는 마음가짐이다.
처음에는 친한 사람에 대하여 이 마음을 일으키고 점차로 반경을 넓혀서 미운 사람들과 아무런 관계가 없는 사람들에게도 평등하게 이 마음을 일으키도록 되어 있다. 사무량심 (四無量心) 은 대승불교권에 속하는 우리나라에서 매우 중요하게 강조되었던 교설로서, 고승들의 가르침뿐만 아니라 자비를 상징하는 십일면관음의 조상(彫像)에도 그대로 반영되었다. 곧 십일면관음의 11가지 모습 가운데 불면(佛面)을 제외한 10가지 모습은 이 4무량심을 상징적으로 나타낸 것이다.자무량심은 3면으로 표현된다.
그 까닭은 자무량심이 고통만 있고 즐거움이 없는 중생으로 하여금 그 괴로움을 떠나 즐거움을 얻도록 하려는 것이고, 다행히 복은 있지만 지혜가 없는 중생으로 하여금 복과 아울러 지혜를 다 갖추도록 하려는 것이며, 지혜는 있지만 통달하지 못한 중생으로 하여금 지혜와 아울러 신통력까지도 다 갖추게 하려는 것이기 때문이다. 비무량심 또한 3면으로 표현된다.
그 까닭은 비무량심이 고통스러운 과보에서 떠나려고 하지만 오히려 욕심 때문에 고통을 낳는 행위에 빠져 있는 자를 구하기 위하여, 즐거움의 과보를 얻고자 하면서도 즐거움이 있게 하는 착한 원인을 만들 줄 모르는 자를 구하기 위하여, 적정(寂靜)한 이치를 구하려 하지만 오히려 산란한 경계에 집착하고 있는 자를 구하기 위한 것이기 때문이다.희무량심 또한 3면으로 표현된다.
그 까닭은 희무량심이 중생을 제도하고 정업(淨業)을 쌓기를 바라는 이가 몸으로 입으로 마음으로 각각 올바른 행위와 말과 생각을 하는 것을 찬양하기 위한 것이다.
마지막의 사무량심은 1면으로 표현된다. 착한 이, 악한 이, 선악이 뒤섞여 있는 중생들에게 어떠한 집착도 없이 제도하는 것을 상징하는 것이다. 이와 같은 네 가지 무량심을 철저하게 실천하면 부처의 경지에 도달할 수 있다고 하며, 대승불교를 믿는 불제자는 이 마음을 먼저 길러야 함이 강조되고 있다
*(주(註)2) 증일아함경의 3삼매[편집]
이 부분의 본문은 3해탈문입니다.
《증일아함경》에서 드는 3가지 삼매는 공삼매(空三昧) · 무상삼매(無相三昧) · 무원삼매(無願三昧)가 있다.
공삼매 (空三昧) [편집]
불교 용어로서의 한자어 공(空)에는 허공 · 공간을 의미하는 공(空, 산스크리트어: ākāśa)이 있는데 지수화풍공식의 6대에서의 공이 이 경우이다. 또한, 어떤 것의 실제 내용을 얻을 수 없으므로 공하다고 할 때의 공함[空, śūnyatā]을 표현하는 경우가 있는데 예를 들어 일체개공에서의 공이 이 경우이다. 공삼매(空三昧, 산스크리트어: śūnyatā-samādhi, 영어: samādhi of emptiness)에서의 공은 후자의 경우이다.
공삼매는 일체 모든 현상[일체제법]이 다 공함[śūnyatā]을 보는 것을 말한다. 이는 불교의 4성제 가운데 고제(苦諦) 즉 '일체가 다 고다'라는 진리의 네 가지 모습[행상(行相)] 가운데에서 공, 무아 2 모습을 보는 것과 상응하는 삼매이다. 이 삼매를 통해 모든 현상이 인연으로 일어나며, 나와 나의것 둘이 모두 공함을 본다.
무상삼매[편집]
무상삼매(無相三昧, 산스크리트어: animitta-samādhi, 영어: samādhi of no-marks)는 일체제법에 생각 기억이 없고, 볼 수 없으며, 불교의 4성제 가운데 멸제(滅諦) 즉 고통이 사라짐의 진리와 관계하여 그 멸[滅] 정[靜] 묘[妙] 리[離] 4가지의 모습에 상응하는 삼매이다. 열반은 색성향미촉 5가지법을 떠나며 남녀 2가지모습 및 생하고 머무르고 멸하는 3가지 유위의 모습을 떠나므로 무상(無相)이라 칭한다.
무원삼매[편집]
무원삼매(無願三昧, 산스크리트어: apraṇihita-samādhi, 영어: samādhi of non-contrivance)는 무작삼매(無作三昧) 또는 무기삼매(無起三昧)라고도 한다.
일체제법에 대해 바라고 구하는 바가 없어, 불교의 4성제 가운데 고제(苦諦), 즉 모든 것이 고통이다는 진리에서 고(苦)와 무상(無常)의 2 모습과 집제(集諦) 즉, 고가 쌓이는 원인의 진리의 인[因]집[集]생[生]연[緣]의 4가지 모습에 상응하는 삼매를 말한다. 영원하지 않고 고통스러움, 그 원인등은 싫어할 바이며, 도[道]는 뗏목과 같아 마땅히 이를 버려야 하는데 이것이 이 삼매에 의하여 가능하다.
[출처] 자비[慈悲] 뜻|작성자 마하보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