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Chapter 6 - [ 돈만 아는 설계사무소 ? ]
[ 미국에 살던 한 교포가 겪은 일화입니다. 한 10년 살다보니 미국인 친구들도 제법 늘어 사교모임도 자주 다니곤 했지요. 한 모임에서 의사친구와 동석해서 즐겁게 대화하던 도중에, 교포가 의사에게 물었습니다.
"요즘 아침만 되면 가끔씩 속이 좀 쓰린데 뭐 좋은 약 없나?"
"그려? 그럼 OO약하고 XX약을 먹어봐. 괜찮아질거다."하고 메모지에 몇 가지 약을 적어주었지요.
그다지 대수로운 증세도 아니고 심각한 것도 아니었기에 교포는 그 메모를 까마득히 잊었습니다. 그런데 며칠 후입니다. 의사에게서 진료비 청구서가 날아왔다더군요. '이런 뒌장! 머 이런 XX가 다있노?' ]
들어보신 듯한 이야기인지요?
우리나라 같으면 난리가 나겠지요. '이런 X같은 넘을 봤나!'라는 욕부터 출발해서 상종 못할 인간으로 낙인찍고 그 순간부터 핸드폰에서 번호를 삭제하고 수신거부를 걸어 둘지도 모를 일입니다.
세계최고의 부자인 빌게이츠가 포스코같이 엄청난 공장을 가지고 있는게 아닙니다. 한마디로 매일같이 한 장에 몇십원하는 씨디를 몇만장씩 구워서 몇십만원에 파는 씨디장사하고 있습니다. 부가가치가 수만배에 달하는 사업을 하는거지요. 그러니 돈을 벌 수 밖에요. 원자재 단가개념이 없으니 그야말로 황금알을 낳는 사업입니다.
바로 소프트웨어에 대한 가치인식이 뚜렷하기 때문에 가능한 일입니다. 진정한 서비스업이지요. 우리나라도 소득수준이 높아지고 생활수준이 향상되어 소프트웨어의 가치에 대한 인식이 많이 높아졌습니다만, 선진국에 비하면 아직도 한참 미달이지요. 앞서 말한 메모지처방전을 꼬깃꼬깃 버리기 전에 그에 담긴 소프트웨어적 가치를 인정할 수 있는 수준까지 도달하려면 제가 살아있는 동안에는 요원할지도 모릅니다. 안타깝지요.
"형님 요즘 건물설계비 얼마나 합니까?"
"왜? 뭐 설계할거 있나?"
"상가하나 지어볼라고요..."
"평당 3-4만원정도믄 될끼라. 내친구 공장 지을때 들어보니 그정도 하던데 한번 알아봐주까? 후배 중에 설계사무소 하는 친구 있거든....."
"설계비만 좀 알아봐주세요"
잠시 전화통화 후, 한마디 합니다.
"아 띠불! 먼 설계비가 이리 비싸노? 6-7만원씩 한다네. 야...설계사무소 놈들 완전 훌훌빠네.. 옛날 손으로 그릴 땐 그렇다쳐도 요즘은 그리는 것도 없이 컴퓨터에 넣어놓고 국수뽑아내듯 출력해서 허가만 내고 끝인데.. 한마디로 거저 먹는고마...."
"그럼 150평이면 천만원 정도 되겠네요? 아 정말 비싸네......"
"글치..... 무슨 놈의 그림 몇 장에 천만원이고? 지들이 무슨 유명화백이가?"
아는 사람 사무실에 놀러 갔을 때 한쪽 구석에서 오가는 대화를 직접 들은 것입니다.
건물하나를 지으려면 아무리 적은 건물이라 하더라도 최소 10가지이상의 법규정을 검토해야 합니다. 도시지역인 경우는 그나마 조금 적은 편인데도 불구하고 건축법, 주차장법, 수도법, 하수도법, 도로법, 국토의 계획...법, 소방법, 문화재보호법, 전기사업법, 수질및...법, 대기환경보전법, 소음진동규제법, 학교시설...법 등입니다. 게다가 위치와 건물의 규모, 용도에 따라서 더 검토해야하는 법이 잔뜩 대기하고 있지요. 심지어 아파트같은 경우엔 거의 30여개에 달하는 법규를 검토해야 합니다. 아마 관련법규정만 찾는데도 몇 달은 걸릴 겁니다. 이 정도 법규를 책으로 묶으면 두툼한 백과사전 몇 권 분량정도 될 겁니다. 이런 규정을 달달 외우는 사람은 대한민국에 단 한명도 없습니다. 그런 이유일까요? 우리나라에 건축전문변호사가 단 한명도 없습니다. 귀찮아서 없는 겁니다. 공부해야 할게 너무 많으니.... 굳이 귀찮은 건축소송 건을 수임할 이유가 없을테니까요. 몇억이 넘는 수임료라면 한번 해볼만 하겠지만.....심지어는 건축관련 소송담당 판사도 건축에 대해선 거의 문외한입니다. 그래서 건축소송판결을 위해 반드시 건축협회에 법규정과 기술적자문을 구합니다. 그만큼 복잡하고 어렵다는 거지요. 우리나라서 제일 머리좋다는 판사들도 건축법이라면 두손 두발 다 듭니다.
설계자들이 이런 규정을 다 챙겨서 건물을 설계하는걸 보면 때론 대단하다는 생각이 들 때도 있어요. 확실히 전문가가 맞는것 같습니다. 그렇지만 복잡한 법보다 더 힘든 부분이 바로 기본계획입니다. 건물디자인의 초안을 만드는 순간인데 바로 이 때가 정말 '피를 말리는 작업의 시간'입니다. 이 계획이란게 몇 년씩 훈련하다 보면 익숙해져서 쉽게 될 법도 한데 전혀 아니란 겁니다. 건축이 맞춤작업이기 때문에 그렇지요. 기성복처럼 그냥 사오는 것이라면 좋으련만 현장에서 일일이 만들어야 하는 일이라서 단 한번도 똑같은 경우가 없습니다. 몇날 며칠을 밤을 새우다시피 해도 좋은 계획안이 떠오르지 않을 때가 있습니다. 건물주에게 보여줄 날짜가 바로 코앞인데 계획안이 떠오르지 않는 그 고통.... 정말 힘든 부분입니다. 대충 비슷한 건물보고 적당히 베껴서 보여줄 수도 있지만 건물주입장에서 보면 평생을 모은 돈을 투자해서 건물을 짓는 것이거든요. 정말 함부로 가벼이 내놓을 수 있는게 아닙니다. 물론 이것저것 안따지고 무조건 빨리만 서두르는 건물주도 있지만 나중에 그 원망은 고스란히 설계자의 몫이 됩니다. 서둘러서 대충 계획한 건물은 '설계가 잘못되서 건물 형편없이 지어졌다.'는 말이 어김없이 나오지요....
"그래서 설계하는 사람들을 예술가라고 하자너... 무에서 유를 창조하는 직업...캬~ 예술가 아이가?" 썰렁한 위로로 머리를 쥐어짜는 고통을 대신하고 싶지만..... 이렇게 탄생한 계획안을 건물주에게 보여주고 협의하고 결정하기를 몇 번 하다보면 처음 계획과 달리 상당히 많은 수정을 요하고 건물주하고 의견충돌도 많이 생깁니다.
기본계획이 결정되면 본격적으로 실시설계라는 걸 하는데 바로 이 부분에서 컴퓨터의 도움을 받습니다. 경우에 따라 다르지만 기존 도면을 그대로 사용하는 경우는 극히 일부이고, 대부분 도면을 새로이 그립니다. 구조계산도 전문사무소에 맡겨서 구조계산서를 받아 구조도면을 새로이 그리고 설비,전기,소방도면도 전문설비,전기,소방설계사무소에 맡겨서 도면을 그리도록 하고, 토목도면도 토목설계사무소에 맡겨서 그리도록 합니다. 즉 백평짜리 건물하나 설계하는데 참여하는 인원만해도 기본적으로 10여명정도 되는 거지요. 건축설계사무소에서 혼자 다 그리는 경우는 대한민국에 없습니다. 모든 분야를 혼자 설계하고 혼자 다 하는 것 같지만 그럴 수 없습니다. 수퍼맨이 아니자나요.
이렇게 만들어진 도면을 가지고 구청에 허가 접수를 하지요. 구청에선 허가를 내줄 건지에 대해 7-8개 부서에 검토를 의뢰합니다. 관련법에 따른 부서들 말입니다. 그들 검토과정에서 보완과 설명을 수차례씩 해야 하고 때론 애매한 법규정에 대한 해석으로 치열한 공방을 벌이기도 합니다. 단순한 것 같지만 전혀 아닙니다. 정말 많은 싸움을 하지요. 기본적으로 공무원들 사고방식은 건물주에 대한 보이지 않는 반감을 가지고 있습니다.(전부가 그런건 아니지만..) '돈있어 집지으니 좋겠다.' 가진 사람에 대한 배아픔입니다. 그래서 법규해석을 놓고 불리하게 해석하여 건물주에게 손해가 되도록 법을 적용하는 경우가 많습니다. 그래서 싸워야 하는 경우가 생기는데 대부분 설계사무소 직원들이 패배합니다. 이런 경우 건물주들은 설계사무소를 무능하다고 하기도 하지요.
이제 글을 마무리하겠습니다.
설계를 맡기실 때 가장 중요한 시간은 도면을 그리는 시간도 아니고 허가를 내는 시간도 아닙니다. 계획안을 가지고 건물주와 설계자간에 긴밀하게 협의하는 시간이 가장 중요합니다. 이 협의 시간이 치밀하고 긴밀하고 길어질수록 경제적이고 나중에 후회가 덜한 건물을 지을 수 있습니다. 그리고 설계의뢰 후 절대 조급하게 서두르지 마세요. 공사기간은 사람을 많이 붙여서 시간을 앞당길 수 있지만 설계는 사람을 더 붙인다고 절대 빨라지지 않습니다. 그리고 설계자하고 많은 협의를 하셔야 합니다. 심지어는 수도꼭지 위치. 전기콘센트 위치까지도 어디에 해달라고 요구하실 정도로 말이지요.
건물주의 요구조건이 많으면 많을수록 설계가 어려울 것 같지만 반대로 편해지고 나중에 하자가 덜 생기게 됩니다. 혹시 설계를 맡겼는데 알아서 다 해준다하고 한 두번 협의 정도로 계획이 끝났다면 그건 능력있는 설계자가 아니라 틀림없는 돌팔이입니다. 건물주와 마찬가지로 뭘 협의해야 하는지 모르는 설계자인거지요. 설계사무소하면 다 똑같다고 생각하실지 모르지만 전혀 아닙니다. 같은 외과전문의 면허가 있다고 모든 의사들이 외과수술전문가가 아니듯이 말입니다. 건축사면허를 땃다고 경력과 경륜까지 같이 따는건 아니니까요.
아무튼 다소 귀찮으실지 모르지만 설계자를 계속 귀찮게 하셔야 합니다. 몇억원을 투자하는데 그 정도가 귀찮다면 뭐 더 이상 할 말 없지만요...
첫댓글 오늘 사무실에서 깊은 대화 참 감사합니다.. 배울점이 많을듯...